# 25
도수의 전략
“좋은 생각?”
그 순간.
창문을 통해 헬기 프로펠러 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미세한 소음이었지만 김광석은 바로 알아차렸다.
“잠깐… 헬기 들어와서 나중에 얘기하지.”
그는 벌떡 일어나더니 연구실을 뛰쳐나갔다.
뒤에 남겨진 도수는 방금까지 있다가 온 아로대학병원 응급실을 떠올렸다.
이미 남는 침대가 없을 정도로 응급실은 만석이었다. 그것도 대부분이 24시간 모니터링을 해야 하는 중환자들이었다.
‘그런데 또 환자가…….’
개중에 멀쩡한 환자를 병동으로 올리고 더 위급한 환자를 중환자실에서 케어해야 할 터였다.
아니면 1차 수술을 해서 환자를 어느 정도 안정시켜 놓고 다른 병원으로 트랜스퍼를 보내던지.
라크리마에서도 주둔지나 병원에서 그런 시스템으로 넘쳐나는 환자를 케어했다.
‘전쟁터만 의사가 필요한 곳이 아니었어.’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뜬 도수는 연구실 책상 위에 있는 전화기 수화기를 들었다. 그리곤 번호를 눌렀다. 그가 누르는 번호가 닿는 곳.
그곳은 바로 뉴욕이었다.
***
삐리리리. 삐리리리.
매디 보웬의 핸드폰에서 일정 간격을 두고 벨이 울렸다.
근무하는 회사 앞 커피숍에서 편집장과 커피를 마시고 있던 그녀는 양해를 구했다.
“잠시만요.”
“그래, 그래. 얼마든지.”
편집장은 흡족한 표정으로 말했다.
매디 보웬이 라크리마에서 올린 공적은 회사 창립 이래 가장 큰 관심을 받은 빅뉴스 중 하나였으니까. 세상은 ‘이도수’란 소년의 존재만으로도 열광했다.
이내 매디 보웬이 전화를 받았다.
“매디 보웬입니다.”
-매디. 저 이도수예요.
“아! 도수… 한국에는 잘 들어갔어?”
그녀 앞에 앉아 있는 편집장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그사이 수화기 너머에서 도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덕분에요. 그보다 인터뷰 말인데요…….
일순 매디 보웬의 표정이 초조해졌다. 그녀는 헤어지기 전, 도수에게 인터뷰 약속을 받아놨던 것이다.
“약속은 꼭 지켜야 돼! 알지?”
-물론이죠. 그 전에, 제가 먼저 부탁할 게 생겨서요.
다행히 인터뷰 거절은 아니다.
그런데 부탁이라니?
“어떤 부탁?”
-네. 다른 사람부터 인터뷰합시다.
“누구를?”
-세계의료협회장, 외과 쪽 권위자들이요.
“그들은 왜?”
-제가 라크리마를 떠나오기 전, 그 분들께서 제안을 하나 했었거든요.
“무슨 제안을……?”
-제가 미국의 의료학계 연구에 협조한다면 특별 법안 하나를 추진해 준다고요. 의료협회측과 제 수술법을 주의 깊게 본 외과의들이 합심해서 말이죠.
표정이 달라진 매디 보웬이 품에서 펜과 수첩을 꺼냈다. 그리곤 편집장에게 손짓하며 물었다.
“특별법이면… 어떤 법안을 추진해 준다고 했어?”
-그들이 건의할 내용은 이래요. 제가 전례 없는 대상이기 때문에, 협회 측에서 준비하는 시험을 통과할 경우 미국에서 의료 활동을 할 수 있는 의사 자격을 부여해 달라.
“그게 정말이야?”
-네.
“하긴. 여론이 좋으니까 의원들도 호의적일 거고… 이미 실력도 증명됐고. 어느 정도 반대도 있겠지만 꽤 가능성이 높을 것 같네. 그래서 뭐라고 했는데?”
-일단 생각해 보겠다고 했죠, 뭐.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장 결정을 내리기엔 사안이 중대하니까요. 만약 그런 수혜를 받으면 평생 미국에 헌신해야 할 텐데.
“이해해. 그랬으니 의료협회 측에서도 공론화시키지 않은 걸 테고.”
-맞아요.
“그런데 이제 와서 인터뷰를 해서 공론화시켜 달라? 그걸 나한테 부탁하는 걸 보면 아직 결정을 내린 건 아닌 것 같고. 그들이 나중에 말을 바꾸지 못하도록 하는 게 공론화하려는 이유?”
척하면 척.
역시 똑똑한 여자다.
사실 다른 이유가 있었지만 도수는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비슷해요. 해줄 수 있어요?
매디 보웬은 혀로 입술을 축였다.
이건 또 하나의 특종이다.
지금 도수는 미국 국민을 구한 영웅이 되었으니 의료업계도 굳이 이 사실을 숨기지 않을 터.
그녀에게는 오히려 먹음직스러운 먹이인 셈이다.
“도수가 부탁할 게 아니라 내가 고마워해야 될 일 같은데.”
-그럼 부탁할게요.
수화기 반대편 도수의 얼굴이 눈에 그려졌다. 항상 당차고 일희일비하지 않는 표정이. 피식 웃은 매디 보웬은 흔쾌하게 대답했다.
“오케이. 나만 믿어!”
뚝.
전화를 끊은 도수는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밖에 나갔던 김광석이 돌아와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웃은 김광석이 안 해도 될 변명을 둘러댔다.
“엿들으려고 한 건 아니다.”
“상관없어요. 어차피 닥터한테도 말씀드릴 내용이니까.”
그렇게 대답한 도수가 물었다.
“환자는요?”
“검사를 해봤는데 다행히 상태가 호전될 기미가 보여. 간단한 응급조치만 하고, 지켜보라고 얘기해 놨다.”
김광석은 왜 자신이 같은 의사나 상사도 아닌 도수에게 구체적으로 설명하는지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라크리마에서 봤던 것들 때문인가…….’
그가 복잡한 얼굴로 서 있었지만 정작 도수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보고받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네요. 아까 하던 얘기, 마저 해도 될까요?”
“아! 그래, 그러자꾸나.”
김광석이 다시 앉자 도수가 재차 입을 열었다.
“어디서부터 들으셨는진 모르겠지만 매디 보웬 기자한테 전화를 했어요.”
“그래. 네가 매디 보웬 기자로 하여금 ‘미국 의료업계 관계자들을 인터뷰해서 그들이 너를 위해 법안을 만들 의지가 있음을 공론화시키려고 한다’까지 들었다.”
“네, 그게 전부예요. 제가 가장 빨리 한국에서 의사 자격을 취득할 수 있는 방법.”
“뭐?”
이게 그렇게 이어지나?
그때 도수가 말했다.
“미국 의료학계가 저를 잡으려고 법안까지 만들려고 해요. 이 소식이 알려지면 한국 의료학계는 가만히 있을까요?”
“각 국가별로 자격증이 있다. 자격에 관해선 서로 연관지을 수도, 관여할 수도 없어.”
“그건 알고 있어요.”
“그런데?”
“전 일단 한국 국민이에요. 더구나 세계 여론의 관심과 애정을 받고 있는 유명 인사죠. 심지어 천하대병원에 입원해 있을 땐 대통령까지 관심을 보였을 정도로. 그런데 한국의료학계와 연관이 없는 미국의료학계에서 특별법안을 만들 만큼 저를 탐낸다? 과연 한국에서 가만히 있겠어요?”
도수가 다시 한번 풀어서 설명하자 김광석은 ‘아!’하고 탄성을 터뜨렸다.
“그렇구나! 처음부터 여론의 감정을 이용해서 체제를 흔들려는 거였어. 그런데 미국에서 주겠다는 걸, 왜 한국에서 받으려고 하는 거냐?”
“전 평생 어느 한 곳에 국한돼서 활동할 생각이 없으니까요.”
도수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아직 제 뿌리가 있는 이곳에서 할 일이 남았기도 하고요.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미국과 한국에서 쉽게 자격증을 받을 수 있겠어요?”
“하긴, 공론화된 이상 미국 학계에서 번복을 할 수도 없을 테고. 그야말로 일석이조구나. 운전면허시험이 어려워지기 전에 따려는… 뭐 그런 건가.”
도수는 김광석의 비유를 정확히 알아듣지 못했지만, 제 할 말을 계속했다.
“물론 국시는 봐야겠지만 이대로만 되면 훨씬 더 빨리 자격을 취득할 수 있지 않겠어요?”
“그럴싸한 이야기다. 실제로 우리나라 삼, 사십 년대에는 국시만 보면 의사가 될 수 있었던 적도 있었다고 하더구나. 세계 의학계가 네 수술법을 인정하고 관심을 가지고 있으니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어. 이런 사례는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었을 테니.”
점점 빠져든다.
도수란 소년에게.
대담한 성격 이면에 이런 치밀함이 있었으니 지옥 같은 라크리마에서 살아남을 동력이 됐을 터.
곁에서 지켜보는 그의 삶이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있던 김광석이 말했다.
“네 계획은 훌륭하다. 하지만 국내 의학계가 보수적으로 대처할 경우도 생각해야 돼.”
“아뇨, 그건 생각할 필요 없어요.”
“음?”
김광석이 선뜻 알아듣지 못하자.
도수는 중심을 잡고 그의 두 눈을 곧게 쳐다봤다.
“전 저를 필요로 하는 곳에 가면 돼요. 아직 한국이나 미국이나 동일선상에 있고요. 만약 한국에서 의사 자격증을 내주지 못한다면 그땐 결정이 좀 쉬워지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