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
가야 할 길
도수는 천하대병원 VIP병동에서 눈을 떴다.
“…….”
한국에 오는 동안 도수는 젖산 수치가 오르고 혈소판 수치가 감소하며 중증패혈증으로까지 발전됐다. 혈압이 떨어지고 심박수가 올랐다. 호흡부전까지 왔다. 그 탓에 중간중간 의식을 잃어가며 천하대병원까지 온 것이다.
그의 곁에는 김광석이 아닌 간호사가 있었다.
한국인.
아니, 어머니와 같은 한국여자.
실로 오랜만에 본 도수는 새로운 감회를 안고 그녀를 불렀다.
“저기.”
“아!”
상태를 기록하던 간호사가 고개를 들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기가 어딘지 아시겠어요?”
가슴팍에는 ‘천하대학병원’이라는 병원 이름과 함께 ‘김소진’이라고 써진 명찰을 달고 있었다.
도수가 그녀의 얼굴을 보며 답했다.
“천하대학병원.”
“맞아요!”
“당신은 간호사고.”
“그것도요.”
입을 가리고 웃은 간호사가 말을 이었다.
“주치의 선생님한테 말씀드릴게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잠시 기다리자 주치의가 들어왔다.
“천하대병원 외과과장 정창순입니다.”
“과장?”
높은 직책이다.
정창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도수가 존칭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병원 VIP니까요, 이도수 씨. 그럼 상태부터 보겠습니다.”
‘환자’가 아니라 ‘이도수 씨’라고 불렀다. 기분이 언짢은 것이다. 그가 청진기를 뻗는 순간.
도수가 옆에 달려 있던 차트를 휙 빼 들었다.
“……!”
정찬순이 미처 반응할 새도 없이 차트지를 살핀 도수가 말했다.
“이 정도면 정상인 것 같은데요.”
“그건 주치의인 제가 판단합니다.”
도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다른 말을 했다.
“이사장님 병원에 계십니까?”
“이사장님이요?”
정창순이 흠칫했다. 도수의 입을 통해 들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한 존재가 나온 것이다.
“이사장님은 왜 찾으십니까?”
“그분과 인연이 있어서요.”
“우리 이사장님과……?”
청진기를 다시 목에 건 정창순이 다시 물었다.
“어떻게 아는 사이시죠?”
“…….”
“말씀 안 하시면 저도 연락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분 손자입니다.”
또박또박 한마디.
분명 한국말인데, 정창순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지금 뭐라고……?”
“손자라고요. 이 병원 이사장님.”
“……!”
정창순의 표정이 여러 차례 변했다. 결국 묘한 얼굴을 한 그가 물었다.
“농담인가요?”
“아뇨, 전혀.”
“…….”
말을 잃고 있던 그가 차트를 살피며 말했다.
“몇 가지 검사를 더 받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오래 의식을 잃고 있어서 기억이나 인지능력에 혼동이 올 수 있습니다.”
“며칠이 지나도 제 기억이나 인지능력은 똑같을 겁니다. 여기가 천하대학병원이라는 것도, 닥터가 외과장 정창순 씨란 것도 인지하고 기억하고요.”
그렇게 말을 맺은 도수가 덧붙였다.
“이사장님께 연락해 주세요.”
***
막상 이사장과의 만남을 앞둔 도수의 심경은 복잡했다. 하지만 이미 주사위를 던졌고, 시간은 기다려 주지 않았다.
정창순의 기별을 받은 이사장이 내려왔다. 뒤에 의사 가운을 입은 사람들 여럿을 줄줄이 달고서.
“날 보자고 했다던데.”
강하면서도 부드러운 인상.
쉽게 대할 수 없으면서도 따뜻한 느낌을 주는 얼굴이었다.
도수는 눈을 떼지 않고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내 손주라고 했다고… 하하하하.”
웃음을 터뜨린 이사장이 물었다.
“왜 그런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한 거지?”
도수는 유심히 그를 바라봤다. 정말 모르는 건가? 아니면 모른 척하는 건가? 자기 체면 때문에? 그러나 왜인지, 도수는 그가 진짜 영문을 모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떠봤다.
“셋째 딸이 있으셨죠?”
그 순간.
이사장의 표정이 무섭게 굳어졌다.
과장들이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짓는 걸로 추측해 볼 때, 평소 잘 보이지 않는 표정인 듯하다.
이내 이사장이 물었다.
“…나에 대해 잘 아는가?”
쭉 반응을 살피던 도수는 그가 어머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주변을 물려주세요.”
그 말에 이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가 있게.”
“이사장님, 하지만…….”
“나가 있게.”
“…예.”
고개를 숙인 과장들이 병동을 나갔다.
단둘이 남자, 이사장이 다시 물었다.
“다시 묻지. 날 알아?”
도수는 고개를 저었다.
“잘 모릅니다.”
“그런데 어떻게 내 막내딸에 대해 알고 있지?”
“이사장님 막내딸이…….”
도수는 떠올리기만 해도 울컥울컥 심장이 들썩이는 대상을 말했다.
“제 어머니니까요.”
이사장의 눈가가 꿈틀했다. 그는 곧바로 동요하지 않고 침착하게 말했다.
“증명해야 할 거야.”
음성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딸의 행방을 모르고 있으면서도, 딸 소식을 묻는 게 아니라 사실 여부를 증명하길 바란다.
그만큼 이성적인 사람이란 의미였다.
고개를 끄덕인 도수는 가방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곳에 증거가 있습니다. 종이 한 장이요.”
“…….”
이사장은 가방을 뒤적여 호적을 찾아냈다.
“오래된 거군.”
“라크리마에 가기 전이었으니까요.”
“날조된 건 아니고?”
“아닙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말해봐라.”
이사장은 흔들림을 보이지 않았지만 도수는 그의 눈빛에서 일렁이는 두려움을 볼 수 있었다. 전쟁터를 전전하며 수 없이 보아왔던 감정이기에 알 수 있었다. 아무리 의연한 이라도 두려움은 감출 수 없다.
“돌아가셨습니다.”
“…….”
말이 없던 이사장이 입을 열었다.
“어떻게…….”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어떻게 된 일이냐.”
도수는 가슴 속이 꿀렁거렸다. 기분이 이상했다. 이유도 모른 채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해서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어렵사리 말을 뱉었다.
“어느 날 집에 폭탄이 떨어졌습니다. 그 폭격으로… 어머니, 아버지. 두 분 모두 돌아가셨고요.”
이사장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
고개를 끝없이 주억거리던 그.
그가 눈을 뜨며 말을 이었다.
“머릿속이 정리가 안 됐다. 시간이 필요해.”
“그러시죠.”
벌떡.
자리에서 일어선 이사장은 병동을 나가려다 문고리를 잡고 물었다.
“내게 원하는 게 있느냐?”
“제가 이사장님을 만나려고 한 이유는 하나예요.”
“……?”
“이사장님이 어머니 소식을 궁금해하실지… 그게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도수는 처음 이사장의 눈동자에서 봤던 두려움을 떠올렸다. 그리고 이젠 가족을 잃은 슬픔을 읽고 있었다. 창백한 안색, 잘게 떨리는 동공. 이 역시 라크리마에서 수 없이 봐왔던 모습이다.
“많이 궁금하셨겠네요.”
이사장은 거기에 대해선 가타부타 대답하지 않고, 문고리를 비틀며 말했다.
“내가 다시 왔을 땐 우리가 나눌 말이 많을 것 같구나.”
하지만 단 한 번도 본 적 없고, 그리워한 적도 없는 할아버지란 존재는 도수에게 어떤 감흥도 주지 못했다.
“저는 제 뿌리를 찾고 싶었을 뿐이에요. 부모님이 남긴 뭔가가 있다면 그것만 회수해서 떠날 생각입니다.”
뜻밖의 말에 이사장이 고개를 돌렸다.
“떠난다고?”
“네.”
“무슨 뜻이지?”
도수는 병실 안을 한 차례 둘러봤다. 이 병실을 포함해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이 화려하다. 지금 겪고 있는 유명세, VIP 병동까지 내어주는 병원의 관심, 할아버지가 가진 지위까지… 당장 그가 하고 싶은 일과는 접점이 없었다. 그가 원하는 건 오로지 사람을 치료하고 생명을 구하는 데서 오는 희열. 뭐 하나 자신과 거리가 멀다고 생각되는 풍경 속에서, 이사장을 똑바로 직시한 도수가 대답했다.
“직접 소식은 전했으니… 귀찮은 일에 엮이고 싶지 않다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