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
전환점
총구가 자신을 향한 그 찰나의 순간.
도수는 수류탄을 향해 뛰어들었다.
이곳 사람들을 위해서, 그렇게 생각하고 저지른 행동이 아니었다. 어떠한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몸이 본능적으로 먼저 움직였다.
탕! 탕! 탕! 타앙!
몇 발의 총성이 연달아 울렸다.
그리고 도수는 수류탄을 빼앗은 채 나뒹굴었다.
“…….”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고통.
언젠가 겪게 되리라고 생각했던 통증이 엄습했다.
그리고 동시에 부모님의 얼굴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평소에는 그렇게 떠올리지 않으려 했던 두 분의 모습이.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을까.’
눈물이 났다.
옆을 보자 총에 맞고 쓰러진 환자… 아니, 반군의 첩자가 보였다.
“닥터!”
세상이 다시 돌기 시작했다.
이근육이 자신을 부축하는 게 느껴졌다.
“이런, 피가…….”
무언가 말을 하려던 도수의 입에서 피가 먼저 뿜어져 나왔다.
“쿨럭, 쿨럭!”
객혈(喀血)이다.
즉, 복부에 한 발은 폐에 손상을 주었을 테고.
어깨에 한 발.
허벅지에 한 발.
도수는 부상당한 중에도 자신의 상태를 점검했다. 그러나 출혈이 얼마나 있을지, 정확히 어떤 혈관이나 장기를 다쳤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지혈을…….”
대답 대신 김광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리 눕혀! 빨리!”
주변이 분주해졌다.
군인들이 도수를 들어 침상에 눕혔다.
한편 이근육은 총에 맞고 쓰러진 반군은 일으켜 세웠다. 반군은 붙잡혀서 허망하게 중얼거렸다.
“어떻게…….”
총을 쏘는 순간.
설마 수류탄을 빼앗으러 오히려 달려들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도수 탓에 거사가 무산된 셈.
아이러니한 건, 그 덕분에 도수도 목숨을 건졌다. 만약 가만히 서 있었거나 도망치기 위해 뒤로 몸을 빼다가 총에 맞았다면 머리가 날아갔을 터였다.
넋이 나간 반군의 멱살을 틀어쥐고 있던 이근육이 수하들에게 그를 거칠게 넘기며 말했다.
“끌고 가.”
목소리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총으로 쏴서 죽이고 싶은 마음이 전해졌다. 하지만 어께에 총상만 입은 반군은 두려워하지도, 맞서지도 않고 끝끝내 도수를 노려볼 뿐이었다.
“젠장…….”
문제는 도수.
김광석은 도수의 출혈을 막으며 말했다.
“의식 잃으면 안 된다. 바로 응급수술을 할 거야.”
도수는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마취하지.”
김광석이 말했고, 간호사가 피를 매달았다.
한순간에 졸지에 의사에서 환자로 변한 것이다.
‘이대로 쉬는 것도… 나쁘지 않아.’
도수는 눈을 감았다.
***
도수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눈에 들어온 것은 병실이었다.
2차 병원이 아니다.
허름하긴 해도 널찍했고 간호사들도 여럿 보였다.
그를 발견한 간호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외쳤다.
“닥터 리! 정신이 좀 드세요?”
끄덕끄덕.
“여기가 어딘지 아시겠어요?”
“군병원.”
“맞아요.”
활짝 웃은 간호사가 고개를 돌렸다.
“장군님! 그렇게 걱정하시던 닥터 리가 정신을 차리셨네요.”
“나도 보고 있네.”
할리 무어였다.
그는 도수에게 물었다.
“몸은 좀 괜찮나?”
끄덕끄덕.
“…내가 없는 새에 또 사고를 쳤더군.”
“…….”
“아주 대단한 일을 해냈어.”
도수가 대답하지 않자, 그가 말을 이었다.
“불과 이틀. 48시간이야. 이 48시간 동안 세상이 변했네.”
“세상이… 변했다고요?”
“그래. 끝날 것 같지 않았던 전쟁. 지긋지긋한 7년간의 전쟁이 끝났어.”
도수는 충격을 받았다.
갑자기 내전이 일어났을 때처럼.
부모님이 돌아가신 그 순간처럼.
“…어떻게요?”
“별로 놀라지도 않는군.”
아니, 놀라고 있다.
“반군의 게릴라식 습격으로 총리가 사망했어. 그 아들은 운 좋게 살았네. 질긴 목숨이야.”
도수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난민들은? 난민들은 어떻게…….”
“그쪽은 문제없네. 총리는 저격을 당한 거니까.”
“아……!”
“자네처럼.”
“네?”
“자네도 저격을 당했잖나. 방식은 달랐지만.”
“…….”
“천운이야. 자네가 아니었다면 그곳에 있었던 미국인들과 부상병들, 의료진들까지 모조리 다 죽을 뻔했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막 깨어난 사람한테, 너무 이른 거 아니에요?”
매디 보웬 기자였다.
“매디.”
“도수. 일단 살아남은 걸 축하해.”
긴 전쟁에서 살아남은 걸 말하는 건가, 아니면 저격에서 살아남은 걸 말하는 걸까?
“…고맙습니다.”
“내가 뭐 한 게 있다고. 너한테 감사 인사를 전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아.”
“누가……?”
“누구긴. 너와 닥터 킴이 치료해 준 많은 군인들. 그리고 국제의료협회 미국인들. 그리고… 총리 아들과 여기 장군님까지.”
“…….”
도수는 감사 인사를 받기가 불편했다. 낯설기도 하고 멋쩍기도 하고 정작 다른 데로 관심이 가버린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이틀 만에 전쟁이 끝날 수 있습니까?”
“총리가 죽었어. 미국인들이 습격을 받아서 다쳤고. UN군도 적잖은 타격을 입었지. 반군이 노린 건 정부군과 UN군을 공황상태에 빠뜨리는 것이었지만, 미국인들과 너라는 변수가 있었던 거야.”
“저요?”
“응. 네가 반군의 계획을 저지시킨 핵심 인물이야. 조사 결과에도 그렇게 나와 있고.”
“……?”
도수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자, 그녀가 차분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네가 총리 아들을 살려내면서 라크리마가 혼란에 빠지는 일을 막을 수 있었어. 그래도 반군이 똑똑한 게, 총리의 성향을 한발 앞서 예측했다는 거야. 도발만은 통했을 거라 생각하고 다음을 준비했지. 바로 게릴라 작전. 근데 네가 묘하게 끼어들면서 난민과 부상병들을 버리고 반군의 함정에 뛰어들 뻔했던 총리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어. 하지만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지. 반군이 작전을 철회할 수 있었겠어?”
“…그래서요?”
“여기서 문제가 생긴 건, 하필이면 미국인들을 건드린 거야. 그래서 반군은 시간을 벌려고 했어. 테러범을 보내 미국인들과 함께 폭사하려 한 거지. 그렇게 됐으면 미국이 개입하기 전에 배후를 조사한다, 뭐 한다 일이 복잡하게 엉킬 테니까. 그사이 반군은 뿔뿔이 흩어져 잠적하던지 다음 계획을 세울 속셈이었을 거야. 그런데…….”
매디 보웬이 피식 웃었다.
“그마저도 너 때문에 실패로 돌아갔지. 그 덕분에 미국은 미국인 생존자들로부터 범인의 소속을 확인하고 그걸 명분 삼아 UN군, 라크리마 군부와 연계했어.”
놀라운 이야기였다.
도수는 어느 하나 의도한 게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짜 궁금한 건.
“그렇다고 전쟁이 이틀 만에 끝나요?”
“미국이잖아.”
매디 보웬이 윙크를 했다. 그녀 역시 미국인. 자기 나라가 세계 최강의 강대국이라는 자금심이 표정에서 묻어났다.
“이번 일로 추측컨대, 이미 내전이 터진 시점부터 때부터 미국 첩보원들이 비밀리에 활동하고 있었을 거야. 반군 세력 핵심 인물들과 거점지도 전부 확보해 둔 상태였을 거고. 특수부대를 파견해 이틀 만에 이 참혹한 전쟁을 끝낸 거지. 여기까지가 내가 조사한 전부야.”
“…….”
전쟁이 끝났음에도.
도수의 안색은 어두웠다.
“표정이 왜 그래? 실감이 안 나?”
“이렇게 쉽게 끝낼 수 있는 걸 그렇게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는데…….”
매디 보웬은 씁쓸하게 대답했다.
“그렇지. 하지만 뭐든 명분이 있어야 하니까. 특히 국가가 움직이려면 더더욱. 국제사회의 이해관계란 건 그리 간단치 않거든. 받아들이긴 쉽지 않겠지만.”
“…….”
“하긴… 납득할 수 있다고 해도, 전쟁에 실질적인 희생자인 너한테 그 누가 이해를 바랄 수 있겠어.”
도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는 이 지긋지긋한 곳을 떠나고 싶었다.
온갖 더러운 꼴을 당해서가 아니었다.
총을 맞아서도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심경 변화가 아닌, 더 이상 땅에 남을 이유가 사라진 것이다.
“다행이에요.”
한마디.
도수의 입에서 나온 말은 딱 한마디였다.
수많은 감정이 엉킨 말이다.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은 그때.
할리 무어 장군이 혼잣말처럼 물었다.
“매디 보웬 기자. 나한테 환자한테 너무한 거 아니냐고 하더니 본인은 이래도 되는 건가? 안정이 필요한 환자한테…….”
“전 며칠 분량을 아주 조리 있게 요약해서 팩트만 얘기하잖아요. 이게 업이기도 하고.”
“말이나 못 하면.”
머리를 흔든 할리 무어가 도수에게 시선을 돌렸다.
“나도 이제 더 이상 이 땅에 머물 이유가 없어졌군. 자네는 이제 어쩔 셈인가?”
“모르겠습니다.”
“자네만 괜찮다면 내 약속은 유효해. 미국에서 제대로 의학을 공부하게 해줄 수 있네. 물론 꼭 내가 아니더라도… 세계의료협회 사람들이 자넬 돌봐줄 테지만 말이야. 재정적인 지원 같은 건 나도 얼마든 해줄 수 있어.”
“예전부터 계속 느낀 건데.”
“음?”
“돈 많으신가 봐요.”
“…….”
흠칫 당황한 할리 무어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어디 쓸 일이 있었나. 여기서 버는 돈은 족족 가족들한테 가는데.”
“필요하면 말씀드리죠.”
도수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아름다운 라크리마의 풍경이 노을빛에 붉게 물들고 있었다.
이 땅에 남을 이유를 잃은 채.
도수는 그 광경이 낯설게 느껴졌다.
그리고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한국.”
“응?”
도수는 죽음의 그림자가 닥치는 순간 떠올랐던 부모님의 얼굴을 기억했다.
비록 세 식구가 행복했던 때로 돌아갈 순 없겠지만, 행복하게 지내던 추억이 깃든 땅을 다시 찾아가 보고 싶었다.
도수는 ‘한국’이란 단어에 귀를 기울이는 두 사람에게 대답 대신 물었다.
“닥터 킴은요?”
“닥터 킴? 아침까지만 해도 들르셨어. 지금은 한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계실 거고.”
고개를 끄덕인 도수가 말했다.
“닥터 킴을 만나봐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