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저렉션-17화 (17/152)

# 17

“보내줄 수 없소.”

총리는 완고했다.

“중태에 빠진 내 아들을 위협했소. 이 나라의 총리를 협박했고. 사형 말곤 해결책이 없을 거요.”

“사형이요?”

김광석이 눈을 치켜떴다.

“이 소년은 실제로 아무 짓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형이라니…….”

“국법이 그러하오.”

그때 도수가 중얼거렸다.

“…이러니 라크리마가 내전에 시달리지.”

“뭐?”

“여긴 당신 왕국이죠. 당신이 선택하는 대로 모든 국민이 피를 흘려야 하는.”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나?”

“어차피 사형당할 거, 할 말은 다하고 죽겠단 겁니다.”

도수가 지지 않고 총리를 노려봤다.

크게 한숨을 내쉰 리에크 총리가 김광석에게 고개를 돌렸다.

“보시오. 보다시피 죄를 뉘우치는 기색이 조금도 보이지 않소.”

“뉘우쳐도 죽일 거면서.”

다시 끼어드는 도수.

김광석은 입에 검지를 가져다 대며 몸을 들썩였다.

‘제발 좀……!’

가만히 있으라는 뜻.

그러나 정작 도수는 태연했다. 그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멈출 줄 몰랐다.

“저를 죽여 버리고 싶은 건 알겠는데… 그게 마음처럼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뭐?”

리에크 총리가 당황해서 묻자.

도수가 턱짓을 했다.

그리로 시선을 돌린 리에크 총리. 그는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지금 뭐 하는 거지?”

군인들이 도수를 겨누고 있던 총을 거둔 것이다.

그중 대장인 듯한 자가 말했다.

“저흰 라크리마 정부군이 아닌 UN소속. 에버스만 소령님의 지시에 따릅니다.”

도수가 덩달아 덧붙였다.

“이곳엔 총리님의 병력이 없죠.”

“이……!”

총리는 주먹을 쥐었지만 차마 날릴 수 없었다. 어느새 이근육이 도수의 앞을 가로막고 선 것이다.

“진정하십시오. 에버스만 소령님의 지시에 따라 닥터 리는 저희와 함께 가야 합니다.”

“UN은 내 땅에서 나와 다른 길을 걷겠다는 건가?”

이근육은 일전 그들이 들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그건 저희 상부에 이야기해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얘기한다 해도 이미 결정된 사안이라 별 소득은 없겠지만.”

“남에 땅에 와서 이렇게 설쳐도 되는 건가?”

그에 이근육이 대답했다.

“반군에게 당한 UN군이 한둘이 아닙니다. 거기다 세계의료협회에 소속 민간인들까지. 더 이상 라크리마만의 일이 아니란 뜻입니다.”

리에크 총리는 위기의 순간 자신을 도왔던 군인들에게로 고개를 홱 돌렸지만, 그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타일렀다.

“진정하십시오.”

“이런 엿 같은…….”

으드득.

이를 갈아붙이는 총리.

그를 빤히 응시하던 도수는 김광석에게 말했다.

“닥터 덕분에 명줄을 연장했습니다.”

“진심으로 죽을 생각이었나?”

“필요하다면요.”

담담하게 대답하는 도수.

김광석은 가슴이 철렁했다.

‘진짜… 다.’

도수는 한점 망설임도 없이 목숨을 던진 것이다. 난민들과 위중한 병사들을 지키기 위해.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거지?”

김광석의 질문을 들은 도수가 짧게 답했다.

“언제나 그랬으니까요.”

“하.”

김광석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맞는 말이다. 혼자 사람 목숨을 구하러 전쟁터로 뛰어든다는 것 자체가 매 순간 자기 목숨도 걸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도수는 매번 그렇게 해왔고.

지금도 그렇게 했다.

“가시죠.”

한마디를 남긴 도수는 막사를 나갔다.

리에크 총리는 그런 그를 잡을 수 없었다. 군인들이 우르르 막사를 빠져나갈 때까지, 그는 망연자실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가만두지 않겠다.’

총리는 손뼈가 으스러져라 주먹을 쥐었다. 아들을 살려낸 의사가 이렇듯 원수로 돌변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래서 도수에게 보기 좋게 당하고 말았다. 그가 그런 생각을 품는 그때, 아직 자리에 남은 김광석이 질문을 던졌다.

“무슨 짓을 했든 저 소년은 총리님의 아들을 살린 장본인입니다. 도수가 없었다면 아드님은 결코 지금 살아 계시지 못할 겁니다. 그런데도… 용서가 안 되겠습니까?”

“이 치욕은 되갚을 것이오.”

총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을 이었다.

“미국이든 UN이든 그 꼬맹이든… 남의 나라 일에 분에 넘치게 개입한 대가를 치를 것이오.”

“…….”

침묵하던 김광석이 몸을 돌렸다. 그리곤 막사를 떠나기 전, 한마디를 남겼다.

“인정하지 않으시겠지만… 결국 도수의 행동이 총리님의 국민들을 살린 겁니다.”

***

도수는 군인들, 김광석과 함께 시내의 한 병원으로 향했다. UN군이 임시 대피소로 삼은 그곳에는 세계의료협회 소속 미국인들과 그들을 호위하던 군인들이 부상을 입은 채 호송되어 있었다.

가는 도중, 도수가 입을 뗐다.

“이상한 게 있어요.”

“또 뭐가 말이냐.”

김광석은 가시 돋친 목소리로 물었다. 말을 하진 않았지만 도수의 앞뒤 분간 못 하는 모습에 기분이 상한 그였다. 그게 분노인지, 실망감인지, 놀람인지는 그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개의치 않은 도수가 대답했다.

“병원을 점거하지 않은 건 반격을 당할까 봐 그렇다 치고. 왜 반군들이 의료협회 소속 미국인들을 납치하지 않았을까요?”

“…….”

김광석은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 역시 돌아가는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까닭이다. 그는 의사지, 군인이 아니었다.

그러자 선글라스에 베레모를 쓴 군인이 답했다.

“아마 몰랐을 겁니다.”

“몰랐다고요?”

“그렇습니다. 공격하고 보니 미국인들이었던 거지요. 반군 역시 미국의 개입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아…….”

도수는 그제야 수긍이 됐다.

미국.

어떤 누가 그들과 척을 지고 싶어하랴.

탈레반 같이 광적인 종교집단이 아니라면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이래서 나라가 강해야 한다.

“그럼 미국인들은 크게 다치지 않았겠네요.”

만약 크게 다쳤으면 차라리 제거해서 증거를 없애려 했을 터.

도수의 말에 군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총명하시군요.”

“그럼. 저 나이에 의사도 못하는 일을 해내는데…….”

김광석이 중얼거렸다. 그는 아직도 가슴속에 치미는 감정의 정체를 알 수 없어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그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이근육은 도수에게 시선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닥터 리는 미국인이 아닙니다. 저들은 닥터 리를 라크리마인. 혹은 한국 국적을 가지고 있다고 볼 겁니다. 인정사정 봐주지 않을 거라는 뜻입니다.”

“그렇겠죠. 하지만…….”

도수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무섭지 않아요.”

“하긴. 두려워하지 않을 것 같긴 합니다.”

이근육은 냉큼 동의했다. 죽음을 두려워했다면 애초에 총을 들고 라크리마 총리를 협박하는 미친 짓을 저지르진 못했을 테니까.

그 모습에 군인들 몇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들의 대장은 한마디 덧붙였다.

“대단한 담력이었습니다.”

특수훈련을 받은 그들도 못할 일을.

어린 소년이 눈도 깜짝하지 않고 해낸 것이다.

그 점을 칭찬한 군인대장은 이근육에게 말했다.

“그나저나 자넨 임무에 충실해야 할 거야. 지금은 상황이 급박해 죄를 묻지 않았지만, 저격수 출신 군인이 총기를 빼앗기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죄송합니다.”

이근육이 고개를 숙였다.

싸늘해진 분위기.

안 그래도 떨어진 온도에 찬물을 끼얹은 건, 그들 눈에 들어온 임시 대피소의 풍경이었다.

“…….”

누구도 입을 열 생각을 하지 못했다.

건물 밖에만 해도 상상하던 것보다 훨씬 많은 부상자들이 시내의 2차 병원을 개조한 임시 대피소로 옮겨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본 김광석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저 많은 환자들을 우리 둘이 감당해야 할 거다. 간호사야 몇 명 있겠지만 이곳에 수술까지 할 수 있는 서전은 우리 둘뿐… 다른 의사들은 모조리 병원 쪽으로 투입됐다.”

“…….”

도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전쟁터에서 겪은 사례들을 생각해 봤을 때 이런 경우 어떤 결과가 나올지 짐작이 갔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을 살릴 수 없다는 것.

이제는 그 현실을 인정해야만 하는 상황에 맞닥트린 것이다.

‘젠장.’

신이 아닌 이상 모든 사람을 살릴 순 없었다.

차에서 내린 김광석은 창백한 얼굴로 지시를 내렸다.

“일단 환자 분류부터 합시다.”

“네!”

경험 많은 의료진들이 지시에 따라 신속하게 움직였다.

순식간에 환자가 분류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김광석이 막 움직이려는 도수를 향해 말했다.

“아직.”

“……?”

“간단한 응급처치 정도는 여기 모두가 할 수 있어. 우린 우리밖에 할 수 없는 일을 해야 한다.”

‘수술’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가 대답하기 무섭게, 한쪽에서 부상자를 살피던 간호사가 외쳤다.

“닥터!”

김광석이 반사적으로 움직이려는 순간.

“……!”

도수가 이미 멀찍이 달려가고 있었다.

“…참…….”

김광석이 중얼거리며 고개를 돌리는 찰나.

안색이 파래진 이근육이 헐레벌떡 그 뒤를 쫓았다.

***

“한 발자국도 저 없이 움직이시면 곤란합니다.”

그렇게 말한 이근육이 함께 온 부하에게 지시했다.

“알렉스, 트뤼포, 벤시, 제임스. 저격 포인트 선점하고 체크한다. 제프, 톰, 대니, 깁슨. 건물 봉쇄하고 주변 정찰 및 경계하도록.”

“옛썰.”

소대원들이 흩어졌다.

그러자 베레모를 쓴 군인이 다가와 말했다.

“우리도 병원 밖을 지키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위화감을 주는 무장한 군인들이 대부분 빠져나가자, 그래도 임시 대피소가 좀 병원 같아졌다.

한편 그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도수는 심각한 표정으로 환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환자 상태는 심각했다.

배가 당장에라도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올라 있었다.

장기가 깨져서 복강 내 출혈이 생겼다는 뜻이다.

‘제발…….’

그는 투시력을 발휘했다.

샤아아아아아.

그러자 뱃가죽과 복막이 반투명해지며 안에 들어있는 혈관과 장기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

도수는 자기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환자의 상태가 안 좋으리라 각오하고 있었지만 이건 최악 중에도 최악이었다. 복강 내 출혈이 심한 상태로 너무 오래 방치되어 있었다. 혈관과 장기가 조각나고 으스러지는 바람에 배 속에 고인 피가 장기를 모조리 썩어 들어가게 만든 것이다.

그때 바로 뒤의 환자를 보고 있던 김광석이 고개를 홱 돌렸다.

“뭐 해? 배 안 열고!”

환자 배 속을 볼 수 없는 그는 환자에게 가망이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도수는 배를 열어보지 않아도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썩은 장기를 들어내려면 배 속의 장기를 다 들어내야 한다.

즉, 사망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도수는 그걸 설명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다음 환자.”

그 말에 간호사가 눈을 치켜떴다.

‘이런 성격이었나?’

절대 환자를 포기하지 않을 것 같았던 도수.

그 모습을 똑똑히 봐왔다.

그런데 이렇게 쉽게 포기하다니?

“뭐 해요, 안내하지 않고.”

“…아, 네!”

그녀는 다음 환자에게로 움직이며 환자 상태를 떠올렸다.

그러나 도수는 그녀를 따라 나설 수 없었다.

김광석이 손목을 덥석 잡은 것이다.

“뭐 하는 거지?”

“뭐가요?”

“왜 포기하느냔 말이야. 이 환자는 아직 살아 있어. 지금이라도 빨리 배를 열어야…….”

“닥터 킴이 하시는 게.”

“뭐?”

“닥터 킴이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도수가 손목을 뿌리치고 말했다.

“이러고 있을 시간 없어요. 전 제가 살릴 수 있는 환자를 보겠습니다.”

그는 매정하게 걸음을 뗐다.

김광석은 벙 찐 채 서 있었다.

“대체…….”

다 죽어가던 환자들을 살려냈던 도수다.

남들이 다 말리는 상황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던 아이.

그런데 지금은 누구보다 위급한 환자를 누구보다 빨리 포기하더니 다른 환자를 보러 간다.

김광석은 저절로 환자에게 고개가 돌아갔다.

‘가망이 없다?’

그러나 이내 머리를 저었다.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배를 가르지도 않고 한번 보는 것만으로.

“후우.”

숨을 뱉은 김광석이 간호사에게 말했다.

“메스.”

도수가 포기했다고 해서.

그까지 포기할 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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