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저렉션-16화 (16/152)

# 16

목숨의 무게

로봇 같은 중저음의 음성.

김광석이 물었다.

“오늘 바로 말인가?”

“그렇습니다. 의무대 인원들은 전부 피신해 있다가 상황이 정리되면 투입될 예정입니다. 이근육 중사.”

“중사 이근육.”

이근육이 복명하자 그가 말했다.

“의무대 호위는 자네 소대가 맡는다.”

“전 닥터 리의 호위만 전담하기로 되어있습니다만…….”

“상황이 바뀌었다. 환자들을 이송할 인원은 본대에서 따로 차출될 거야.”

그때였다.

도수가 칼같이 잘랐다.

“안 됩니다.”

“…지금 뭐라고 했소?”

“안 된다고 했습니다. 위중한 환자들이 한둘이 아니에요. 이송할 수 있는 환자들이라면 진작 여기보다 환경이 좋은 군병원으로 옮겼을 겁니다.”

군인이 선글라스 너머로 도수를 쳐다봤다. 거대한 탑처럼 서서 그를 내려다보는 것만으로 중압감이 대단했다.

하지만 도수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다른 방법을 강구해 오세요.”

“…….”

분위기로 봤을 때 뭔 일이 터져도 터질 것 같았다. 해서 김광석이 도수를 거들었다.

“틀린 말이 아니네. 내 소견도 같아.”

그에게 고개를 돌린 군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고는 올리겠습니다만 받아들여질 거라곤 말씀 못 드립니다. 라크리마의 국운 전체를 걸고 벌이는 작전입니다. 계획을 바꾸려면 상부에 직접 말씀하셔야 할 겁니다.”

도수는 이마가 지끈거렸다.

“젠장. 꼴통 같으니…….”

“지금 뭐라고 했지?”

“그쪽 상부가 꼴통이라고요.”

“뭐?”

군인이 허리에 맨 총대에 손을 올렸다.

“지금 바로 연행할 수도 있다.”

“해보시든지.”

도수 역시 허리에 손을 올리고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었다.

“기껏 사람 목숨 살려놨더니 다시 불구덩이로 몰아넣는다고요? 몇몇 특별한 환자들이야 의사들 붙여서 헬기로 이송한다 칩시다. 그럼 일반 부상병들이나 난민들은? 전쟁터 한가운데 버려둘 작정이에요?”

“작전에 성공하면 아군 피해는 없을 것이다.”

“실패하면? 적들이 반격해 오겠죠. 여긴 폐허가 될 테고.”

“작전 시기를 지체했다간 다신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하! 대의를 위해 소를 희생하겠다. 뭐 이런 건가?”

도수는 대놓고 비꼬았다.

그러자 총대에서 손을 뗀 군인이 김광석을 보며 말했다.

“이 어린애는 치워주시죠.”

“틀린 말은 없었던 것 같은데. 내가 소령을 찾아가 얘기해보겠네.”

“…말씀해 보시는 건 말리지 않겠지만 변하는 건 없을 겁니다.”

그렇게 쐐기를 박은 군인은 자신이 끌고 온 무리를 이끌고 막사를 나가버렸다.

이근육이 김광석에게 물었다.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솔직히 모르겠네. 이런 상황은… 예측하지 못했어. 너무 갑작스럽구만.”

그가 무심코 도수를 보는데.

도수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이런 자들 때문에…….”

“뭐?”

“라크리마가 이 꼴이 된 건 저런 자들 때문이에요. 멋대로 전쟁을 시작하고 죽어 나가는 사람들 따윈 신경도 쓰지 않았죠.”

분노.

김광석은 그 감정이 느껴졌다. 표정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구석이 섬뜩했다.

그때 도수가 말을 이었다.

“반군소탕에 성공해도 잔당들이 모르스에 들이닥칠 겁니다. 그리곤 피신하지 못한 부상자들과 난민들을 학살하겠죠. 제 부모님이 그렇게 돌아가신 것처럼.”

“…….”

“헬기이송이 가능한 건 총리 아들, 그리고 몇몇 간부 출신 부상자들뿐이겠죠. 막아야 돼요.”

도수는 강력하게 주장했지만, 정작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들은 의사이지, 군 지휘관이나 정부 고위 인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김광석은 걱정이 앞섰다.

‘이대로 놔두면 안 되겠는데…….’

아니나 다를까.

주먹을 쥐고 있던 도수는 걸음을 뗐다.

“뭐야? 어디 가려는 건가?”

“총리한테 갈 겁니다.”

“총리한테는 왜…….”

“막지 마세요.”

이번 한마디는 김광석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어느새 앞을 가로막고 있는 이근육을 향한 한마디였다.

“제 임무입니다.”

이근육은 물러나지 않았다.

그 순간.

전혀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한 발 파고든 도수가 눈 깜짝할 새 이근육의 총집에서 권총을 뽑아 들었다.

처억.

총구를 겨눈 도수가 말했다.

“비키라고.”

한때 생존을 위한 소매치기를 하던 손놀림이 이렇게 쓰일 줄이야.

하지만 사정을 모르는 이근육은 당황했다. 이렇게 허무하게 총을 빼앗길 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방심했다고 해도 도수같이 어린 소년에게 훈련된 군인이 총을 빼앗긴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

철컥.

장전한 도수가 다시 경고했다.

“마지막입니다. 비켜요.”

두 손을 든 이근육이 옆으로 비켜섰다.

그러자 도수는 천막을 걷고 막사를 나가 버렸다.

꿀꺽.

침을 삼킨 김광석이 이근육에게 물었다.

“그걸 그렇게 빼앗기면 어떡하나?”

“…….”

변명할 말도 없는 이근육은 막사 밖을 보며 말했다.

“가시죠.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릅니다.”

“…그래 보이는군.”

두 사람은 서둘러 도수를 쫓았다.

***

총기를 탈취한 도수는 곧장 총리의 아들이 입원해 있는 의무대로 갔다. 간부들은 다들 지휘소에 모여 있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출동 준비를 하고 있는 병사들만 간간이 마주칠 뿐.

그 덕분에 도수는 아무런 제지 없이 의무대 중환자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어? 닥터! 여긴 무슨 일…….”

반갑게 아는 체를 하던 간호사가 헛바람을 집어삼키며 뒤로 물러섰다.

도수의 손에 들려 있는 권총을 본 것이다.

그러든 말든 도수는 개의치 않고 총리 아들이 누워 있는 침대로 갔다. 그 옆에는 군복을 입은 총리가 눈을 붙이고 있었다.

툭툭.

어깨를 두드리자.

총리가 눈을 떴다.

“자네…….”

그는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총은 뭐지?”

“이번 작전을 미루든 철회하든 하세요.”

“뭐?”

“여기 누워 있는 환자들. 그리고 난민들. 당신 아들처럼 가족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도수를 빤히 보던 총리가 불쑥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하… 애는 애군. 설마 그런 이야길 하러 총을 들고 찾아온 건가? 날 협박하기 위해서?”

“총구가 향하는 쪽은 총리님이 아닙니다.”

잘그락.

도수의 총구가 아직 의식을 찾지 못한 총리 아들을 겨냥했다.

“지금 무슨……!”

“작전을 변경하든 철회하든 하십시오.”

총리는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왜 이러는 거지?”

“난민들은 제 가족이에요. 여기 누워 있는 병사들도 저를 포함한 난민들을 지켜주려다 이렇게 됐죠. 저는 제 가족을 지키려는 것뿐입니다.”

“이러고도 무사할 거라고 생각하나?”

“아뇨.”

도수가 말했다.

“별로 무서운 게 없어서요.”

“지금이라도 총을 거두면 최소한의 처벌만 하지. 언제까지 이런 미친 짓을 이어갈 수 있을 것 같나?”

“오늘만 버티면 작전은 무산되겠죠.”

“그 후의 일은 생각하지 않는 건가?”

“총리님도 그런 걸 재고 움직이시는 건 아닌 것 같은데요.”

“작전은 성공할 거야.”

“내전도 금방 끝날 거라고 하셨죠.”

“인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었네.”

“이번 작전도 인력으로 되는 일이 아닐 겁니다.”

“너……!”

“반군 기지를 소탕한다고 해도 뿔뿔이 흩어진 나머지 반군들은? 최전선에 위치한 이 마을을 공격하겠죠.”

“네가 참모야, 의사야?”

“경험으론 뒤지지 않습니다.”

“본분에 충실해.”

“총리님도 본분에 충실하세요.”

자국민의 생명을 모두 똑같이 여기는 것이 총리의 본분.

그런 그가 위중한 아들에 관한 복수심에 눈이 멀어 수많은 희생을 감수하고 UN군과 함께 전면전을 치르려 하고 있다.

그것도 이곳의 부상자들과 난민들의 안전을 확보하지 않은 채로.

“미치겠군……! 위기는 기회야. 자네 말대로 이들을 전부 다 피신시키면 그동안 반군은 우리의 계획을 눈치채겠지. 지금이야말로 최소한의 피해로 이 지긋지긋한 전쟁을 끝낼 기회다. 하지만…….”

총리는 아들을 일별하고 도수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젠 그 기회를 날리게 생겼군.”

“제게 그런 것 따위는 중요치 않습니다. 전 이미 가족을 잃었어요. 다시 한번 가족 같은 사람들의 목숨을 대가로 주고 전쟁을 끝내야 한다면 그런 상처뿐인 승리 따위, 제 목숨을 걸고서라도 막을 겁니다.”

그 순간.

병실 문을 열고 군인들이 들이닥쳤다.

“총리님!”

선글라스에 베레모.

일전 도수를 찾아왔던 군인들이었다.

“……!”

그들은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총을 든 도수를 본 것이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내가 묻고 싶은 말이군.”

총리가 담담하게 말하자, 군인들이 일제히 총을 뽑아 들었다.

처척!

모든 총구가 도수에게로 향했다.

도수가 겨누고 있는 건 총리 아들뿐.

그마저도 당장 방아쇠를 당길 수 없다.

“총 내려놔. 우리보다 빨리 당길 수 없다.”

나지막한 군인의 경고.

아마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만약 경고에 불응한다면, 먼저 총을 맞고 쓰러지는 건 도수일 터였다. 그는 총리 아들을 진짜 쏠 생각이 없었으므로.

“젠장.”

도수가 총을 내리는 순간.

군인들이 달려들어 총을 뺐고 그의 몸을 속박했다.

짜악!

도수의 뺨을 얼굴이 홱 돌아갈 정도로 후려친 총리가 군인을 보고 물었다.

“덕분에 화는 면했군. 그나저나 무슨 일이지? 난 부른 적이 없는데.”

“아! 국제의료협회 소속 미국인들이 반군에게 당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모르스 시내에 주둔하고 있던 병사들, 군병원까지 반군의 공격을 당했습니다.”

“……!”

눈을 부릅뜬 총리가 물었다.

“점령당한 건가?”

“아닙니다. 습격입니다. 해서 맷 에버스만 소령님께서 작전을 재검토 중이십니다. 적들이 우리 움직임을 미리 파악한 걸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빌어먹을 새끼. 네 뜻대로 됐구나.”

총리가 도수를 보며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너는 네 행동에 대한 엄중한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든 말든.

도수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웃어?”

총리가 다시 손을 치켜드는 찰나.

“기다리십시오!”

김광석과 이근육이 들이닥쳤다.

두 사람은 이미 출동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반군에게 습격당한 국제의료협회 소속 미국인들을 치료하기 위해 그 친구가 필요합니다. 군 병원도 마비된 상태인 데다 이곳에 의사는 한없이 부족합니다. 미국인, 그것도 민간인이 다친 이상 이는 더 이상 라크리마의 일이 아닙니다. 만약 그들이 죽게 되기라도 한다면 UN이 아닌 미국이 본격적으로 전쟁에 개입할 것입니다. 에버스만 소령께서도 이 점을 생각해서 닥터 리의 현장파견을 승낙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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