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
표적
“JAMA Surgery(미국의학협회 수술 학회지)?”
김광석은 깜짝 놀랐다.
매디 보웬은 타임즈 기자. 그녀가 소속된 언론사 신문에 게재되리라는 건 예상하고 있었지만 학술지에까지 등재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수술 기록을 공유했군.”
매디 보웬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다른 언론사에 넘기진 못해도 학회지는 좀 다르죠. 어차피 수술 장면들을 그대로 보도하지도 못하는데 이렇게라도 써먹어야 하지 않겠어요?”
그때 곁에서 듣고 있던 도수가 물었다.
“무슨 내용이에요?”
김광석이 태블릿을 건네며 정리해주었다.
“메인으로 다뤄졌다. JAMA Surgery는 논문이라도 소개되면 평생의 자랑거리로 삼아도 좋을 만큼 외과 분야에서 영향력이 큰 잡지야.”
유명세를 타게 된다는 뜻.
하지만 명예욕에 별 관심이 없는 도수는 대꾸하지 않고 내용을 읽어 내렸다.
그리고 마침내, 태블릿을 돌려주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동물원 원숭이 취급이네요.”
“뭐? 동물원 원숭이라니…….”
“끊임없이 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잖아요? 기사를 본 사람들의 리뷰도 분분하고.”
신선하다. 야만적이다.
두 가지 상반된 반응으로 나뉘었다.
결국 결론은 ‘이도수는 누구인가’. 안 그래도 김광석의 질문 릴레이에 학을 뗐던 도수는 불필요한 관심이 달갑지 않았다.
그러나 김광석의 입장은 조금 달랐다.
“JAMA Surgery에 메인으로 실린 건 학계를 뒤흔들 만한 사건이라는 뜻이야.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향후 네게 좋은 기회가 제공될 거다.”
“좋은 기회요?”
“네 능력을 세상에 알릴 수 있지. 필요한 공부를 하는 데 지원을 받을 수도 있을 거고. 의술에 대해 더 깊이 파고들거나 의견을 반영시킬 때도 도움이 될 거다.”
“저를 굉장히 신기하게들 생각하던데, 어디 끌려가서 생체 실험 당하는 건 아니겠죠?”
“상상력이 풍부하군.”
“농담이에요.”
그렇게 말한 도수가 매디 보웬을 응시하며 덧붙였다.
“방금은 농담이었지만… 전 왜 반군들도 저한테 관심을 가질 것 같죠.”
“……!”
매디 보웬, 김광석의 눈이 커졌다.
“설마… 학회지를 읽어볼까요?”
“글쎄. 반군이 학회지를 볼 리가. 만약 본다고 해도, 어차피 타임즈에 소개된 내용인데 무슨 일이 있으려고.”
도수는 고개를 저었다.
“타임즈에선 수술 받은 대상이 누군지 공개하지 않았죠. 그냥 UN군에서 이미지 선전을 하는구나. 이렇게 볼 확률이 높았어요. 그런데 실제 수술 장면과 수술 받은 환자 명단이 공개됐다면? 그땐 저에 대해 궁금해할 것 같은데요.”
“아…….”
매디 보웬은 그제야 심각성을 깨달았다.
“널 노리는 칼날이 있을 거다?”
“맞아요.”
“하!”
매디 보웬은 천장을 보며 어찌할 바를 모르더니 이내 도수를 응시하며 말했다.
“미안해. 이제 어떡하지? 벌써 몇 곳에 더 실었는데…….”
그녀는 태블릿 화면을 넘겼다.
연달아 뜨는 사이트.
그걸 본 김광석이 눈을 질끈 감았다.
“Annals of Surgery(외과학 연보)에 British Journal of Surgery(영국외과학회지)까지…….”
모두 JAMA Surgery만큼이나 영향력이 강한 곳들이었다.
이 정도면 반군도 모를 리가 없다. 그들이 노리는 할리 무어 장군, 총리의 아들을 수술한 장본인. 어쩌면 반군은 자신들의 계획을 번번이 막아선 도수를 처단해야 할 인물로 여길 것이다.
“앞으로 정말 조심해야겠구나.”
“후… 내가 이런 멍청한 짓을.”
매디 보웬은 안색을 붉혔다.
그러나 정작 생각에 잠겨 있던 도수는 다른 말을 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 좋은 점도 있어요.”
“좋은 점?”
도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전쟁터잖아요. 눈먼 총알에 맞아서 갈 수도 있는 거고. 기왕 죽을 거면 이름이라도 가지는 편이 낫지 않겠어요? 이젠 죽는다 해도, 더 이상 이름 없는 시체가 아니에요.”
“……!”
김광석은 할 말을 잃었다. 도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녀석이기에……
“책임자한테 말해서 경호 인력을 붙이도록 힘써보마.”
김광석의 말에 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최대한 힘 센 사람들로 부탁드려요. 환자들 고정시킬 때 좀 써먹게.”
“이 상황에 농담은.”
김광석이 피식 웃었다.
한편 여전히 미안한 얼굴로 도수를 응시하고 있던 매디 보웬이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아마 협회에서 사람이 나올 거예요.”
“그렇겠지. 이만큼 화제가 됐으면.”
김광석이 덧붙였다.
“환자가 살아야 할 이유가 한 가지 더 늘었구나.”
“잘 싸워줄 거예요. 지금까지도 죽지 않고 버텼으니까…….”
도수는 무심코 창밖을 보았다.
땅 위에선 모래바람이 흩날리고 있고, 하늘에는 빼곡하게 수놓아진 별이 밤하늘을 밝히고 있었다.
이토록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하는 라크리마의 미래.
그 국운(國運)도, 도수의 운명도 바람 앞의 촛불처럼 불안하기만 했다.
***
“중사 이근육, 신고합니다!”
경례를 붙인 우람한 군인.
바로 김광석이 데려온 경호 책임자였다.
도수는 자기가 잘못 들은 건지, 입을 뗐다.
“이름이…….”
“이근육입니다!”
“…잘 어울리는군요.”
키는 백팔심삼, 사쯤.
떡 벌어진 어깨와 탄탄한 가슴이 운동선수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도수가 물었다.
“한국인입니까?”
“그렇습니다! 작년 1월에 파견됐고, 지금은 저격수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그때 김광석이 덧붙였다.
“네가 원하는 조건에 완벽히 부합하는 인재가 있더구나. ‘힘 센’ 한국인에 저격수 출신 경호 책임자. 심지어 부상 중 군 병원에서 치료받으면서 간호 보조를 했던 경험까지 있다.”
그야말로 완벽한 적임자였다.
“마음에 드네요.”
“그래. 하지만 문제가 있어.”
“문제?”
도수가 묻자, 김광석이 대답했다.
“임시 지휘관인 맷 에버스만 소령은 할리 무어 장군과 달라. 어디로 튈지 모르는 널 그냥 두고 볼 이유가 없다는 뜻이지. 할리 무어 장군의 지시가 있었으니 강압적으로 굴지는 않겠지만… 호위 겸 감시 역할로 사람을 붙인 걸 거다.”
설명을 듣는 즉시 도수는 상황 파악을 끝냈다.
“그럼 이 중사도 에버스만 소령이 차출한 겁니까?”
“아니. 그건 내 선에서 힘을 썼다.”
“…감사합니다.”
감사 인사가 익숙지 않은 도수.
김광석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너스레를 떨었다.
“뭐? 내가 잘못 들은 건가? 하하하.”
도수는 대답 대신 이근육에게 말했다.
“중사님. 지금부터 제 얘기 잘 들으세요.”
“말씀하십시오.”
“제 경호 겸 감시를 맡으셨다고요.”
이 중사는 난처한 표정으로 김광석을 일별하더니 대답했다.
“임무에 대해 아무것도 누설하지 못하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글쎄요. 어차피 중사님은 지금 이 시간부로 저와 ‘감시 임무’에 관한 모든 정보를 공유하셔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래야 제가 말을 들을 테니까요.”
“…예?”
“저를 잡아 가두지 않는 이상 중사님은 저를 통제할 수 없습니다. 7년이나 정처 없이 떠돌며 난민 생활을 했어요. 그 과정에서 반군한테 잡혀 죽을 뻔한 적도 여러 번 있었죠. 탈출과 도주에는 이골이 났어요. 하지만 중사님이 저한테 ‘감시 임무’에 대한 정보를 공유해 주신다면, 전 중사님 말을 잘 들을 겁니다.”
서로 상부상조하자.
그게 결론이었다.
우두커니 서 있던 이근육은 김광석을 바라봤다. 자신을 이번 임무의 적임자로 선택한 사람. 부상을 입고 군 병원에 실려 갔을 때부터 은인으로 생각해 왔던 김광석의 의견을 묻는 것이다.
그러자 김광석이 말했다.
“자네 통제에 잘 따라준다면 그편이 서로 편하지 않겠나? 문제 되고 자시고 할 것도 없고.”
“그건 그렇습니다만…….”
“군인으로서의 본분은 충분히 이해해. 그렇지만 같은 한국인들끼리 이런 오지에서 돕고 지내야 하지 않겠나.”
그렇게까지 말하자 이근육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김광석은 생명의 은인인 것이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이것만 알아두십시오. 제가 직접적인 대답을 해드릴 수는 없습니다. 어떤 비유를 해서 간접적으로 전해 드린다면 몰라도요.”
“알아서 듣죠.”
도수가 팔을 쭉 뻗어 악수를 청하자, 이근육이 손을 맞잡았다.
“에버스만 소령님께선 닥터 리가 주둔지를 벗어나길 원치 않으십니다.”
“왜죠?”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만, 얼마 전 세계의료협회에서 사람이 나온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그는 일부러 꼬아서 정보를 전달했다.
말인즉, 세계의료협회에서 사람이 나올 때까지 도수를 가둬두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것이다.
맷 에버스만이 이와 같은 지시를 내린 건 세계의료협회에서 도수의 무면허 의료 행위를 두고 어떻게 나올지 몰라서 눈치를 보는 것일 테고.
도수가 김광석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에버스만 소령. 조심성이 많은 사람이네요.”
“그런 사람이지. 문제는 그쪽이 아니라 성격 급한 리에크 총리 쪽이야.”
“왜죠?”
“그 아들이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있으니 애가 타겠지. 회복이 된다 해도 앞으로 적잖은 시간이 걸릴 텐데 그때까지 참고 기다릴 수 있을까? 지금도 다쳐서 누워있는 아들을 볼 때마다 반군들을 쓸어버리고 싶을 텐데.”
그 순간 이근육이 끼어들었다.
“제 생각도 같습니다.”
김광석과 도수의 표정이 동시에 굳었다. 그 말은 리에크 가이 총리가 벌써 움직였다는 뜻.
“벌써? 이렇게 빨리 움직이는 건가?”
김광석이 물었고.
도수 또한 의문을 제기했다.
“섣불리 움직이면 반군이 원하는 대로 흘러갈 텐데요. 도발이 보기 좋게 먹혀든 거잖아요?”
고개를 저은 이근육이 대답했다.
“그래서 UN군에 협조를 구하러 온 걸 겁니다. UN군과 정부군이 뭉쳐서 총공격을 펼친다면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을 테니까.”
그때였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했던가?
스포츠선글라스에 베레모를 쓴 일단의 군인들이 들이닥쳤다.
“오늘 밤, 반군 기지를 습격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