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밀당의 고수
이튿날 저녁.
할리 무어 장군이 찾아왔다
“…오늘 아침 병원에 다녀왔다.”
어제보다 십 년은 더 늙은 표정.
얼굴 가득히 그늘이 내려앉아 있었다.
타이를 멈춘 도수가 그를 응시했다.
“그렇군요.”
“암이라더군.”
고개를 끄덕인 도수가 물었다.
“병명은요?”
“진행성 비소세포폐암.”
모르는 병명이다.
“검사 사진이 있습니까?”
“가져왔다.”
할리 무어가 사진을 보여주었다.
도수가 투시 능력으로 본 것과 일치하는 곳들에 암 덩이가 자리 잡고 있었다.
사실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었지만, 아무 근거도 없이 몸속 상태를 턱턱 알아내면 의심을 살 게 분명했기에 의례적으로 물은 것뿐이다.
“병원에선 뭐라고 했습니까?”
“4기라고. 면적이 넓어서 절제할 수 없다더군.”
“그랬겠죠.”
도수가 수긍하자 할리 무어가 물었다.
“하지만 넌 가능하다고 했지.”
“…….”
“살 수만 있다면.”
심호흡을 한 그가 덧붙였다.
“살고 싶다.”
도수는 쇠창살 사이로 사진을 돌려주었다.
“저를 믿을 수 있으십니까?”
“척 보고 내 병을 알아냈어. 네가 아니었다면 발견할 수 없었겠지.”
“그랬겠죠.”
“…모르는 게 약이었을까?”
수술이 가능하냐는 뜻.
도수의 두 눈이 빛을 머금었다.
샤아아아아아아.
시선이 닿는 곳.
할리 무어의 신체 부위가 반투명으로 내비쳤다.
도수는 차근차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내리훑었다. 동시에 그의 뺨을 타고 땀방울이 떨어졌다.
역시… 투시 범위가 넓어질수록 체력 소모도 극심하다. 하지만 그 덕분에 알아낸 사실도 있었다.
“아직은 완치가 가능합니다. 시간이 많진 않지만.”
“후…….”
길게 한숨을 내쉰 할리 무어가 중얼거렸다.
“다행이군. 그 말이 사실이라면 말이야.”
그리곤 도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어쨌거나 내게는 목숨이 달린 문제야. 내 입장에선 지푸라기라도 잡을 수밖에 없다는 뜻이지. 고국에 남기고 떠나온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하지만 난 아직 불안해. 내게 신뢰를 줄 수 있겠나?”
“신뢰요?”
도수는 고개를 저었다.
“병원에선 시한부를 말했죠. 장군님한테 선택지는 두 가지뿐입니다. 죽을 날만 기다리느냐, 아니면 뭐라도 해보느냐.”
“…….”
“이런 상황에 성공을 장담하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더구나 우린 운명공동체죠. 제 실수로 장군님이 잘못되면 전 더 난처해질 겁니다.”
“그렇겠지.”
“그럼 믿으세요.”
“…….”
할리 무어는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차라리 호랑이를 앞에 두고 재주를 부려보라고 하고 말지. 내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사람한테 너무 무례했군.”
그는 본론을 꺼냈다.
“비용은 얼마나 들겠나?”
“돈은 필요 없습니다.”
“필요 없다?”
“네. 지갑이 든든하다고 날아오는 총알을 막아주진 않으니까요.”
그 또한 맞다.
전쟁터에 있는 한 화폐의 가치란 무의미하다.
고개를 주억거린 할리 무어가 물었다.
“그럼 내가 뭘 해주면 되겠나?”
“여기서 나가게 해주십시오.”
“당연한 얘기를 하는군. 성공한다면 자넨 자유야. 그걸로 끝인가?”
“그럴 리가요.”
도수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장군님 관할 지역 내에선 자유롭게 부상자들과 환자들을 치료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뭐?”
할리 무어가 난색을 표했다.
“그건 좀 곤란해. 네가 여기 잡혀 온 이상, 이 사실이 알려지면 난 모든 걸 잃게 될 거야.”
“글쎄요.”
도수가 역으로 물었다.
“장군님께선 지위가 목숨보다 중요하십니까?”
동시에 할리 무어의 표정이 휴지 조각처럼 구겨졌다.
“지금 내 목숨을 갖고 흥정을 하는 건가? 협박이야?”
“정당한 대가를 요구하는 것뿐입니다.”
“어떻게 의사란 사람이……!”
“제가 의사라면!”
소리치며 가로막은 도수가 나지막이 말했다.
“죽어가는 사람을 치료했다고 이곳에 갇혀 있진 않겠죠.”
“……!”
“더구나 제게 치료받은 그 사람은 장군님의 사람이었습니다.”
할리 무어는 할 말을 잃었다.
그렇다.
그는 상대가 어린 소년이라고 해서 너무 순진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곳은 생사가 오가는 전쟁터.
자신의 목적과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상대의 목숨 따윈 안중에도 둬선 안 되는 비정한 세계인 것이다.
“군인은 군율과 명예에 죽고 살아. 내가 한목숨 살자고 규율을 어기고 지위를 내던질 것 같나?”
“저랑 게임을 하고 싶으신 거라면 충고해 드리고 싶군요. 장군님은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암세포가 자라나고 있죠.”
“또 협박을……!”
할리 무어는 이를 악물었다. 마음 같아선 본때를 보여주고 싶었으나 자신에게 남아 있는 시간을 알 수 없었다. 이 순간에도 보이지 않는 죽음의 손길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그때, 도수가 입을 열었다.
“이미 저에 대해 조사해 보셨을 테니 제 수술 성공률은 들으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이다.
그게 아니었으면 지금처럼 믿음을 가지지도 못했을 테니까.
“…….”
대답이 없자.
도수가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제가 한 제안은 장군님을 포함한 수많은 목숨을 구하는 길이 아닌가요? 장군님의 지위와 사람 목숨. 뭐가 더 중요합니까? 어느 쪽이 진짜 명예를 지키는 길이죠?”
질문을 남긴 도수는 시계를 보며 덧붙였다.
“시간이 없으니 24시간 드리겠습니다. 그 안에 답변 주세요.”
그리곤 등을 돌렸다.
칼 같은 축객령.
할리 무어는 찍소리도 할 수 없었다. 기분대로 굴었다간 실낱같은 희망이, 수술이라도 받아 볼 수 있는 기회가 영영 날아가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단 한 번의 실패도 없었다고 했지.’
난민촌 촌장의 증언을 떠올린 할리 무어는 벼랑 끝에 내몰린 심정으로 걸음을 돌렸다.
***
할리 무어는 반나절도 채 버티지 못했다.
언제 몸 상태가 악화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6시간 만에 도수를 찾아왔다.
“좋아. 조건을 받아들이기로 하지.”
“그럼…….”
“단, 나에게도 조건이 있어.”
그를 빤히 응시하던 도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해 보세요.”
“자네가 사람들을 치료할 권한을 가지는 건 주둔지로 한정하도록 하지. 물론 아군만 치료할 수 있어.”
언뜻 들으면 모든 걸 수용하는 것 같다.
호칭도 ‘너’에서 ‘자네’로 바꾸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허울 좋은 제안에 불과했다.
주둔지에는 닥터 김광석처럼 이미 상주하는 의료진이 있으니까.
만약 의료 활동을 할 수 있는 장소가 주둔지 내로 국한된다면 닥터 눈치나 보며 허드렛일이나 하게 될 터였다.
해서 도수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진짜 위급한 환자들은 현장에 있습니다. 출혈이 심해서 이송해 오면 늦는 경우가 태반이죠. 장군님의 제안은 제 손을 묶어놓고 수술을 하라는 겁니다.”
“전투현장에 직접 나가겠다?”
“아프고 다친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요.”
“성자 나셨군.”
할리 무어는 비아냥댔다.
“군의관도 하지 않는 일을 하겠다고 자청해서 나서다니. 차라리 입대를 하지 그래?”
지구상에 수술 권한이 있는 의무병은 없다.
도수는 대답할 가치를 못 느꼈다.
“지금까지도 그렇게 치료해 왔습니다.”
“전투 현장에 가서?”
“어차피 난민촌에 정착하기 전에는 반군을 피해 도망 다녔어요. 정처 없이, 숱한 전투 현장을 지나면서.”
“…물러날 생각이 조금도 없군.”
할리 무어는 도수의 눈빛에서 결연한 의지를 보았다.
그리고 역시, 도수가 말했다.
“애초부터 협상하려던 게 아닙니다.”
“왜 그렇게까지 하려는 거지? 목숨까지 걸어가면서?”
“생명에 대한 존중이라고 해두죠.”
“헛소리.”
할리 무어가 입꼬리를 올렸다.
“내 목숨을 걸고 딜을 하는 걸 보고도 그런 감상적인 이유를 믿으라고? 자네도 내게 원하는 게 있으면 날 납득시켜야지. 안 그런가?”
사실, 굳이 그를 납득시킬 이유는 없었다. 할리 무어는 거절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채로 발악하는 것뿐이니까.
그렇다 해도, 도수는 불필요하게 자존심을 긁을 생각이 없었다. 만에 하나 부스럼을 만들고 싶진 않았다.
“좋아요. 정확히 납득시켜 드리죠.”
“그래, 한번 해봐.”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도수가 입을 열었다.
“전투에서 느끼는 스릴과 비슷합니다.”
“스릴…….”
할리 무어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 역시 도수가 말한 ‘스릴’을 느껴본 적 있었다.
사람은 어떤 환경에 처하든 적응하기 마련이다. 잔혹성, 공포, 긴장과 같은 본능들이 반복되면 인격이 바뀐다. 그렇게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강한 자극들에 중독되는 것이다.
“지금 스스로 전쟁광이라고 밝히는 건가?”
도수는 고개를 저었다.
“비슷하지만 달라요. 저는 매일같이 죽어가는 사람을 봅니다. 죽음이란 구덩이에서, 지옥에서 악마가 끌어당기죠. 그때부터 전투를 치르는 겁니다. 지옥까지 손을 쑤셔 넣고 끌어 올리는 거죠. 죽어가던 사람을 살릴 때의 희열. 그 긴장감과 경이로움이 계속 저를 부릅니다.”
“……!”
너무도 생생한 설명에 할리 무어가 눈을 치켜떴다.
한편 도수의 눈동자 역시 광기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저는 생과 사의 경계에서 사람을 구하는 일이 좋습니다. 그게 제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이유예요.”
“허.”
할리 무어는 토를 달 수 없었다.
집착에 가까운 소년의 의지가 백전노장인 그를 질리게 만든 것이다.
“그거 아나?”
“……?”
“자넨 못 말릴 꼴통이야.”
그렇게 말한 할리 무어가 결론을 내렸다.
“좋아, 휘둘려 주지! 어차피 협상의 여지가 없으니… 수술만 성공하면 자네 뜻대로 하게 해주겠어. 지독한 꼬맹이 같으니.”
“제가 병원이랑 다른 점이 있다면, 저는 상대적인 대가를 받고 치료한다는 것뿐입니다.”
“늙은이한테 수술비 한번 더럽게 비싸게 받는군. 내가 준비할 건 뭔가?”
“수술 전, 장군님과 제가 한 약속에 관해 중립적인 증인을 세우고 싶습니다.”
“모든 의료진과 지휘부 간부, 난민촌 촌장에게 전달해 두지. 이 정도면 됐나?”
“믿겠습니다.”
믿는다…….
할리 무어는 피식 웃었다.
“내 몸속에 폭탄이나 심어두지 말게. 자, 그럼 이제 필요한 걸 얘기해 봐.”
역시 군인이라 그런지 한번 결정 난 일에 대해선 시원시원했다.
“자세한 건 수술 방에 들어오는 수술팀이 정해지면 주문하죠. 최대한 빨리 입이 무거운 팀원들을 선별해 주십시오.”
“내일까지 대령하지.”
“좋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도수가 미소를 보였다.
“닥터 킴을 어시스턴트에 포함시켜 주세요.”
닥터 킴.
바로 김광석을 가리키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