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협상
주둔지로 복귀한 바실 프롬리는 사령관 할리 무어 장군을 만났다.
그리곤 목판 하나를 건넸다.
“이게 뭔가?”
할리 무어가 묻자 바실 프롬리가 고개를 흔들었다.
“전부 광신도들인 줄 알았습니다. 보시다시피 그들 모두 피로 연판장을 새겼습니다. 이도수를 석방시켜 달라는 일종의 탄원서를요…….”
“허.”
할리 무어는 헛바람을 뱉으며 김광석을 보았다.
“닥터. 그 소년을 처음 발견한 당신이 얘기해 보시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김광석이라고 알 리 없었다.
“글쎄요…….”
그때, 바실 프롬리가 입을 열었다.
“난민 수백 명을 치료했답니다. 혼자서요.”
김광석이 눈을 부릅떴다.
‘그럼 그 말이…….’
차 안에서 나눈 대화가 사실이란 말인가?
“전부 다 치료했답니까? 그러니까, 실수도 안 했고요?”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할리 무어 장군이 말을 잘랐다.
그러나 바실 프롬리는 한숨을 쉬며 대답해 주었다.
“네. 한 명도……. 전부 다 건강하게 치료해 주었답니다.”
“허허허.”
김광석이 헛웃음을 뱉었다.
하지만 할리 무어 장군은 웃을 수 없었다.
“실수까지 없었다? 그럼 우리가 내세울 명분이 더 줄어들겠군. 지금 난민들은 굶주리고 병들어서 무서울 것이 없소. 그런데 자신들을 치료해 준 성자가 위험하다? 무슨 짓이라도 할 거요.”
그에 김광석이 반론을 제기했다.
“우리 UN군도 그들을 지원해 주고 있지 않습니까? 게다가 그 소년은 엄연히 국제의료법상…….”
“의사 양반.”
말을 자른 할리 무어가 덧붙였다.
“세상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군. 지금 이 전쟁통에 국제의료법 같은 게 의미가 있을 것 같소? 그리고 UN군 지원은 한계가 있어요. 우리가 가장 열심히 하는 일이 반군에 맞서는 건데, 달리 보면 정부군과 반군의 협상을 번번이 막아서고 있는 셈이오. 그들 중 우리를 고맙게 여기는 사람도 있겠지만 불만을 품은 사람 또한 적지 않다 이 말이오. 지금 이런 상황에, 여기 이 탄원서들 좀 보시오.”
“…….”
김광석은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윤리적인 가치관을 내세운다 해도 하루하루가 전시상황인 라크리마에선 군인이 곧 법이었다. 그리고 이곳 지휘관인 할리 무어에게 중요한 건 의료법이 아닌 난민들의 동향이었다.
톡톡.
책상을 두드리던 할리 무어 장군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내가 한번 만나보도록 하지.”
“…그 소년을 말씀이십니까?”
“그래.”
“모시겠습니다.”
바실 프롬리는 할리 무어 장군, 그리고 김광석을 데리고 도수가 갇힌 유치장으로 갔다.
이도수는 태평하게 타이(Tie: 봉합할 때 쓰는 기술)연습을 하던 중이었다.
“장군님!”
보초가 경례를 붙이며 보고했다.
“무기가 될 만한 소지품은 모두 압수했습니다. 단, 그 외 물품은 돌려준 상태입니다.”
“알겠네. 나가 있게.”
“옛썰.”
보초가 유치장을 나갔다.
이내 의자에 앉은 할리 무어 장군이 말을 걸었다.
“소문이 자자하더군.”
그제야 도수가 타이를 멈췄다.
“장군.”
“내 얼굴을 아나보군.”
“먼발치에서 몇 번 봤습니다.”
“그래,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팔짱을 낀 할리 무어가 대뜸 물었다.
“난민들 모두가 널 풀어주길 바란다. 하지만 난 그럴 수가 없어. 어떡하면 좋겠나?”
정말 뜬금없는 질문.
그러나 도수는 기다렸다는 듯 역질문을 던졌다.
“이미 답안지를 작성해 두신 것 아닙니까?”
할리 무어 장군의 눈이 반짝 빛났다.
“…얘기가 빠르겠군. 똑똑한 친구야. 그래, 맞네. 지금 상황에서 우리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묘수를 생각해 왔지.”
“그게 뭐죠?”
“정말 다행스럽게도 자네가 무면허로 의료 활동을 했다는 사실을 아는 건 여기 네 사람뿐이야.”
“그래서요?”
“자네 고향이 한국이든 다른 곳이든, 어디든 보내주겠네. 그러니 혼자 조용히 떠나.”
이곳.
라크리마는 지옥이다.
난민 누구한테 묻던 혹할만한 제안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도수는 아니었다.
“싫습니다.”
“……!”
눈을 치켜뜬 장군이 물었다.
“왜지?”
도수는 간결하게 대답했다.
“제가 어디 가서 사람을 치료할 수 있겠어요?”
“…….”
할리 무어는 그제야 자신이 무언가 단단하게 착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눈앞의 소년이 원하는 게 뭔지, 잘못 생각해도 한참 잘못 생각한 것이다.
그러든 말든, 비상식적인 발언으로 모두를 당황시킨 도수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이 땅에는 당장이라도 제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이 수백, 수천 명이나 있습니다. 내일이면 또 늘어나겠죠. 그다음 날이면 더 늘어날 테고요. 전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습니다.”
입가에 번지는 미소.
그 미소를 본 할리 무어 장군은 소름이 돋았다.
‘이 자식…….’
전혀 협조할 생각이 없다.
고집을 꺾을 것 같지도 않다.
할리 무어는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넌 사라지지 않으면 안 돼. 네 생각이 어떻든 이곳에 남을 수 없다는 뜻이야. 만약 그래도 이곳에 남겼다면? 난 널 국제의료법에 의거, 처벌할 거다. 얼마 전에 네가 벌였던 무모한 미친 짓을 계속하겠다면 더더욱!”
“…….”
빤히 응시하며 잠시 침묵하던 도수가 입술을 뗐다.
“잠시 독대할 수 있을까요?”
“그러지.”
할리 무어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주변에 눈치를 줬다. 그러자 바실 프롬리가 김광석을 데리고 나갔다.
두 사람이 나가고 둘만 남은 유치장.
도수의 눈이 번뜩였다.
샤아아아아.
그가 입을 열었다.
“혹시 담배 피우십니까?”
“한 대 피우겠나?”
할리 무어가 시가 케이스를 꺼냈다. 전쟁터에서 어린아이가 담배를 주워다 피우는 일은 심심찮았기 때문.
하지만 도수는 고개를 저었다.
“요새 기침이 늘지 않으셨습니까?”
“음?”
“가끔 가슴도 아프실 테고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
“왜… 그런 걸 묻지?”
“너무 놀라지 말고 들으십시오.”
“지금 무슨 말을 하려고…….”
“장군님께선 폐암이십니다.”
도수의 눈에는 폐에 있는 종양이 보이고 있었다.
“지금도 암세포가 눈덩이처럼 자라고 있는 중이고요.”
쿵.
할리 무어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말의 진위 여부를 떠나 ‘암’이라는 단어의 위력에선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그는 백전노장답게 평정심을 찾으려 했다.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지? 우린 오늘 처음 만난 것 같은데… 한번 본 것만으로도 암이란 걸 알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의학에 문외한인 그라도 얼굴만 보고 병명을 알아낼 수 없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만약 그게 가능했다면 검사는 왜하고, 경과는 왜 지켜본단 말인가?
그 사실을 떠올리자 문득 괘씸한 마음이 치고 올라왔다.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헛소리를 지껄이는 건가? 아니면 정말 신이라도 된 것 같아? 어떻게든 지금 상황을 벗어나고 싶어서 아무 말이나 지어내나 본데…….”
“내일.”
도수가 말을 잘랐다.
“내일 검사받고 다시 오세요.”
“뭐……?”
“저도 설마 암일 줄은 몰랐습니다.”
도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연기라면 너무나 사실적인 연기.
“그저 남들도 한두 개쯤 달고 사는 잔병치레나 하고 계실 줄 알았죠. 그걸 낫게 해드리고 다시 협상을 하려고 했는데…….”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건가!”
할리 무어가 호통을 쳤다.
그러든 말든 도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저 할 말을 계속했다.
“아마 병원에선 수술 성공률이 희박하다고 할 겁니다. 1퍼센트 미만으로요.”
그리고 덧붙인다.
“하지만 전 수술할 수 있습니다. 아직은요. 꼭 검사받아보고 내일 다시 오세요.”
“완전 미쳤군……!”
할리 무어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유치장을 나가 버렸다.
그 뒷모습에서 눈을 뗀 도수.
그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쉽지 않은 수술인데…….”
두근 두근…….
왜 심장이 뛰는 걸까?
도수는 다시 타이를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