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
신의 손
덜컹, 덜컹…….
군용차량이 흔들렸다.
맞은편에 앉아 도수를 빤히 응시하던 김광석이 한국말로 불렀다.
“이봐.”
도수가 고개를 돌리자.
그가 물었다.
“부모님은?”
“돌아가셨어요.”
“아… 미안하군.”
“별말씀을.”
김광석은 도수의 표정을 훔쳐봤다. 창밖을 응시하고 있는 눈빛이 삭막하고 차갑다.
‘쯧쯧. 어린 것이…….’
내심 혀를 찬 김광석이 물었다.
“언제부터 떠돌았지?”
“열두 살 때부터요.”
“…지금은 몇 살이고?”
“열아홉이요.”
“7년이나 전쟁터를 전전한 건가?”
7년 전이면 이 땅, 라크리마에 내전이 발발한 시기. 전쟁이 시작되고 계속 떠돌았다는 뜻이다.
도수는 대답 대신 질문을 찔렀다.
“전쟁터를 잘 아세요?”
“무슨 뜻이지?”
“여긴 반군 세력과 인접한 위험지역이에요. 어딜 가든 생지옥이라고요.”
“그래서?”
“전쟁터에선, 일단 살리고 보는 겁니다.”
자신의 의료 행위를 정당화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잘잘못을 따지는 건 김광석의 소관이 아니었다.
“그 얘긴 주둔지에 가서 하도록 해.”
“어련하시겠어요.”
고개를 젓는 도수.
아랑곳하지 않은 김광석이 질문을 이어갔다.
“진단법은 어디서 배웠나?”
“아, 그거요…….”
도수가 두 손이 묶인 채 상체를 기울였다.
귀를 열고 집중하는 김광석.
그런 그를 향해, 도수가 말했다.
“그런 건 주둔지 가서 물어보시죠.”
김광석은 맥이 탁 풀렸다. 그 전부터 느낀 거지만 보통 까칠한 녀석이 아니었다.
‘하긴, 예의라는 걸 배울 여유나 있었을까.’
참는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말장난하지 말고. 메스를 다루는 손놀림이 정교하던데?”
“아아.”
도수는 뻔뻔하게 웃었다.
“본능이죠. 포크질하는 법을 배우진 않잖아요?”
“젠장.”
김광석은 눈살을 찌푸렸다.
“도무지 대화가 안 되는군. 메스질과 포크질을 비교해?”
그러나 기만은 계속됐다.
“이를테면 이런 겁니다. 운동화 끈이 풀리면 다시 묶어야 한다는 걸 알죠. 어떻게 묶을지도요. 저한테 수술은 그런 겁니다. 환자 상태를 보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그냥 알 수 있어요.”
김광석은 전혀, 조금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수술할 수 있다면 전 세계 의사들이 왜 이론을 공부하고 실습을 하겠는가?
“그래, 계속 해보자고. 말하는 걸 보니 이번이 처음은 아닌 것 같은데. 몇 명이나 수술했어?”
“5,271번이요.”
“하하하하하하!”
김광석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갈 수록 가관이다.
5,271번?
그의 임상경험보다 수십 배는 되는 수치였다.
“그래? 매일매일 하루 2건 이상 수술을 했다고?”
“네.”
그래, 어디까지 허풍을 떠나 보자.
그리 생각한 김광석이 물었다.
“그래서 성공 확률은?”
“제로.”
“응?”
“단 한 번도 실패한 적 없습니다.”
“도저히 못 들어주겠…….”
덜컹!
김광석이 들썩였다.
차량이 멈춰 선 것이다.
곧 문이 열리고, UN군 병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화 즐거웠습니다.”
짙은 미소를 띤 도수는 군인들 손에 이끌려 차에서 내렸다.
말을 하다 만 김광석은 입을 닫았다.
“뭐 저런 놈이 다 있어?”
5,271회 수술?
성공 확률 100%?
설령 성공 확률이 높은 환자만 골라서 수술했다고 해도, 절대 불가능한 수치였다.
사람 목숨은 예측불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의사도 사람.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는 법이다.
“조사해 보면 다 밝혀질 일이지.”
김광석은 느긋하게 그들을 뒤쫓았다.
***
UN군 주둔지에 도착한 도수는 곧장 취조실로 연행됐다.
그리고 머지않아 상사 한 명이 들어왔다.
“바실 프롬리 상사일세.”
“이도숩니다.”
맞은편에 앉은 바실 프롬리 상사가 조서를 꺼냈다.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생각나는 대로 자세히 적게. 자네 신원을 확인해 줄 난민촌 친구들 이름도.”
“언제 적 일부터 적죠?”
“기억이 시작된 순간부터.”
“좀 긴데요.”
“시간은 많아.”
도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안 그래도 능력을 써서 기운이 빠진 상태.
쉬고 싶었지만 펜을 집어 들 수밖에 없었다.
사각, 사각……..
정적 속에서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바실 프롬리는 종종 시계를 확인하며 기다렸다. 그리고 점심, 저녁 식사를 취조실에서 모두 마친 후에야 조서가 완성됐다.
“다 됐습니다.”
도수가 조서를 넘겼다.
이를 받아 쭉 훑은 바실 프럼리가 고개를 들었다.
“생각보단 짧군.”
“기억나는 건 다 적었어요.”
“열두 살 때 부모님의 죽음을 직접 목격하고 그 후 7년간 전쟁터를 전전하며 사람들을 치료해 왔다?”
“네.”
“반군도 치료했나?”
바실 프롬리의 시선이 고요하게 압박해 왔다.
그러나 도수는 꿈쩍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럴 시간이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하루 한 명, 가벼운 열상 환자도 치료하기 힘들었어요. 좀 수완이 생긴 후에야 하루 두세 명, 제가 치료할 수 있는 부상당한 환자들만 치료했습니다.”
“흠…….”
미심쩍은 시선을 보내던 바실 프롬리가 말했다.
“일단 여기 적은 자네 친구들에게 신원을 확인할 때까지 구류될 거야. 그 후 자네의 무면허 의료 행위에 관한 처분을 내릴 걸세.”
“좋으실 대로.”
도수의 얼굴에는 조금의 두려움도 없었다.
바실 프롬리는 그 모습에 위화감을 느꼈다.
‘이런 어린 소년이 어떻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지?’
처음 들어온 순간부터 이상했다. 조사실에 도착하자마자 겁부터 먹었어야 할 어린애가 너무 태연했기 때문이다. 만약 적이라면 시간이 지날수록 본색을 드러내야 하는데, 장시간 조사를 받으면서도 전혀 변화가 없었다.
“뭐, 조사해 보면 알겠지.”
바실 프롬리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한편, 취조실에서 끌려 나간 도수는 유리창을 통해 심문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김광석과 맞닥트렸다.
핼쑥해진 도수의 얼굴을 본 김광석이 물었다.
“…괜찮나?”
허풍쟁이에 싸가지 없는 꼬마 녀석이긴 하지만.
자식처럼 어린애가 구류당하게 된 것만으로 충분히 보기 불편했다.
그러나.
파리한 안색의 도수.
그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럼요. 저는 곧 풀려날 테니까요.”
***
‘이도수 사건’을 맡은 바실 프롬리는 도수가 써준 명단을 갖고 난민촌을 찾았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난민들.
‘어떻게 수소문을 한다.’
담배를 꺼뜨리며 한숨을 내쉰 바실 프롬리는 본격적으로 임무에 착수했다. 그는 맨 처음, 천막에 기대어 앉아있는 노파에게 가서 물었다.
“혹시 솔로몬 밴디란 분을 아십니까?”
단번에 찾을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도 안 했다. 그런데.
“솔로몬은 왜 찾으시오? 우리 촌장이라오…….”
“촌장님이요?”
바실 프롬리도 어렴풋이 들은 기억이 났다. 공권력은 없지만 난민들이 그들끼리 의존하는 존재가 있다고.
“솔로몬 밴디란 분이 촌장님이셨습니까?”
“그렇다오. 촌장이 지내는 곳은… 저쪽이오.”
노파가 쭈글쭈글한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
다른 천막과 다를 바 없는 허름한 곳이었다.
“여쭤보지 않았다면 고생할 뻔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공손하게 인사한 바실 프롬리는 촌장이 머문다는 천막으로 갔다.
천막을 걷자.
흑인 한 명이 책을 읽고 있는 게 보였다.
‘이 전쟁통에 독서라니. 한가롭군.’
바실 프롬리는 내색하지 않고 말을 붙였다.
“안녕하십니까?”
“…….”
고개를 드는 흑인.
“군인 양반이 날 찾을 일이 없는데.”
책을 덮은 그가 물었다.
“무슨 일이오?”
묵직한 분위기.
잠시 기가 눌려 있던 바실 프롬리가 아차 싶어 용건을 꺼냈다.
“아! 혹시 솔로몬 밴디 촌장님이 맞으십니까?”
“그렇소만.”
흑인, 솔로몬 밴디가 고개를 끄덕이자 바실 프롬리가 덧붙였다.
“이도수라는 소년을 아시나 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분위기가 변했다.
솔로몬 밴디의 눈빛이 돌변한 것이다.
“그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소?”
감정이 뚝뚝 묻어나는 말투였다.
절로 긴장이 된 바실 프롬리는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그게, 의사 면허도 없이 부상자들을 수술하다 발각돼서 현재는 구류된 상태입니다.”
“휴……!”
솔로몬 밴디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하늘이 무너질 뻔한 사람처럼.
“다행이군. 정말 다행이야.”
“…다행인 겁니까?”
구류되어 있다는데 다행이라고?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솔로몬 밴디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살아는 있잖소.”
그리고는 상체를 내밀며 진지하게 물었다.
“내가 뭘 도와주면 되겠습니까?”
바실 프롬리는 뭔가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원래 이곳에 온 목적을 말했다.
“실은 그 소년에 대해 알아보러 왔습니다. 반군에서 보낸 첩자일 수도 있으니까요.”
“하하하하하하!”
천막이 들썩일 만큼 큰 웃음을 터뜨린 솔로몬 밴디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나를 비롯해 이곳 난민들 모두 그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목숨이라도 바칠 텐데.”
“예?”
바실 프롬리가 깜짝 놀라 물었으나,
솔로몬 밴디는 바로 대답해주지 않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마르지 않소?”
“아… 마릅니다. 그보다…….”
“기다리시오.”
말을 자른 솔로몬 밴디는 물을 한 잔 내왔다.
“워낙 궁색해 드릴 게 이것뿐이오.”
“아닙니다. 그보다 방금 뭐라고 하셨는지.”
“그를 위해서라면 우리 모두 목숨을 바칠 수 있다고 했소.”
“……!”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이쯤되자, 바실 프롬리는 궁금증을 참기 힘들었다.
“어째서입니까? 대체 그 소년이 무슨 일을 했기에 마을 사람들 모두가 목숨을 바칠 수 있다는 겁니까?”
“그가 지금 잡힌 이유라고 생각되는데.”
“…예?”
점점 알아들을 수 없는 선문답.
솔로몬 밴디는 빙그레 웃으며 설명을 이어갔다.
“도수는 마을 사람들을 돌봐주었소. 다친 사람도, 지병이 있던 사람도 치료를 받았지. 이 난민촌에, 가족 중 한 명이라도 그 소년의 손을 거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거요.”
“그… 그게 정말입니까?”
“그렇소.”
솔로몬 밴디는 바실 프롬리가 방금 목을 축인 물 잔을 눈짓하며 말을 이었다.
“당신이 단숨에 들이켠 그 물은 내가 오늘 구할 수 있었던 유일한 식수였소. 하지만 그를 도와줄 수 있는 당신한텐 기꺼이 내줄 수 있지. 그는 우리에게 이런 존재입니다.”
“…….”
“인간은 누구나 자기가 먼저라오. 하지만 상대가 같은 인간이 아닐 땐 얘기가 달라지지. ‘나’보다 먼저 생각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그 존재는 더 이상 타인이 아니지 않겠소? 다치고 병든 난민들을 단 한 번의 실수 없이 모두를 치료해 준 이도수는 우리에게 인간 이상의 가치가 있소.”
바실 프롬리는 얘기를 듣고도 믿기 힘들었다.
“한 번의 실수도 없이 모든 사람을 치료했다고요? 그 소년이 무슨 신이라도 된답니까?”
“아니, 그는 신이 아니오.”
진지하게 고개를 저은 솔로몬 밴디가 말했다.
“죽을 사람을 살려내진 못했으니까. 하지만 분명한 건… 그 자신이 살릴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을 살려냈다는 것이오. 그것도 수백 명을.”
“아…….”
“앞으로 수백, 수천 명의 난민들을 더 살릴 수 있는 한 사람. 그리고 내 목숨. 무엇이 더 소중하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