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인하르트-60화 (60/60)

■ 제60장 모든 것의 종말 □

레더린은 긴장했다.

기척을 느꼈다고 생각한 순간 그들의 힘이 적지 않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찰트 후작."

"알겠습니다, 공작 각하."

찰트가 뒤로 한 발자국 빠지며 조용히 주문을 외웠다.

레더린은 칼에 오러를 주입하며 긴장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숫자는 정확히 넷.

하나같이 복면을 뒤집어쓰고는 막강한 기운을 사방에 풀었다.

"너희들은 누구냐? 감히 누구이기에 왕궁을 습격한 것이더냐?"

"말해 줄 의무는 없다."

"좋다. 그럼 너희들을 족쳐 캐 보면 되겠구나."

"……."

레더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곧바로 찰트가 마법을 전개했다.

"파이어 필드!"

전면의 땅을 모두 불바다로 만드는 엄청난 마법이 전개되었다.

찰트의 마력이 얼마나 강했는지 수십 미터로 펼쳐진 광역 마법이 가까이만 가도 후끈거릴 정도로 뜨거웠다.

그 덕분에 화단이 전부 홀라당 타 버리긴 했지만 찰트와 레더린은 그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흥!'

광역 마법이 펼쳐지면 하늘을 나는 재주가 없는 이상 벗어날 방법이 없다. 복면을 쓴 네 명은 동시에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레더린은 그들을 향해 차례대로 검기를 날렸다.

공중에 떠 있는 그들이 용빼는 재주가 없는 이상은 몸을 움직이며 피할 수는 없다.

하나 레더린의 날카로운 검기도 그들을 죽이기엔 역부족이었다. 복면을 쓴 여인이 갑자기 강한 마법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에어(Air), 디스펠(Despell)!"

바람이 레더린의 검기를 공중 높이 올려 버렸다.

그리고 디스펠은 찰트가 띄운 파이어 필드를 가볍게 날려 버렸다.

찰트의 입이 떡 벌어졌다.

자신은 6서클 마법사로 어느 왕궁의 궁정 마법사로도 손색이 없을 만큼 실력이 좋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런데 6서클 마법사가 펼친 파이어 필드를 공중에 떠오른 순간 동시에 두 개의 마법을 사용하여 검기와 파이어 필드를 디스펠로 막아 버리다니!

그 짧은 시간에 그런 일을 해낼 수 있는 마법사라면 많지 않았다.

그런 많지 않은 사람 중에 여인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복면을 썼다고는 하나 감출 수 없는 라인 등은 그녀의 나이가 상당하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었다.

'어디 세상에 숨어 살던 마법사인가? 기운을 보니 흑마법사도 아니다. 백마법사 중에 저런 실력자가 있다니!'

"음……."

찰트는 신음을 흘렸다.

고작 두 개의 마법만으로 상대가 자신보다 윗줄의 상대라는 걸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공작 각하.'

찰트는 레더린에게 매직 마우스를 보냈다.

'무슨 일인가?'

레더린이 전음으로 대답했다.

'상대방의 마법사가 제가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입니다. 놈들이 왕비님을 노리는 것 같으니 왕비님과 거리가 먼 곳으로 유인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예전에 제가 훈련을 하던 수련장이 있는데 그곳으로 가면 될 것 같습니다.'

레더린도 나쁜 생각이 아니라 생각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일단 유인은 해 보겠네.'

레더린은 그들을 향해 유감없이 마나를 뿌리며 달려들었다. 여차하면 곧바로 빠지면서 찰트가 아는 곳으로 유인하려는 생각이었다.

검을 들고 나타난 복면인 셋 또한 마법사만큼이나 엄청난 실력가들이었다.

어디에서나 구할 수 없는 소드 마스터들인 것이다.

'이런 자들이 단숨에 나타나는 곳이라니? 어디 용병단이나 살수 단체에서 구할 수 없는 이들이다. 적어도 한 나라가 움직이지 않는 한 이자들이 움직일 리가 없지.'

레더린은 찰트가 말한 곳으로 그들을 조용히 유인했다.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그게 정말입니까?"

이안이 말하자, 헬라임이 고개를 끄덕였다.

"디오그라프가 사실상 거대한 연합국이니 당장 펠타온 제국과 맞붙어도 밀릴 일이 없지. 하지만 디오그라프는 펠타온 보다는 너희를 더 위험한 적국이라 생각한 거야. 요즘 상승곡선을 타고 쭉쭉 올라타는 라인하르트 왕국을 말이야."

"크으! 네 이놈들을!"

이안이 서둘러 떠나려고 하자 헬라임이 그를 붙잡았다.

"잠깐! 너 혼자서 상대할 생각이야? 놈들 숫자가 대체 몇인 줄이나 알고?"

"몇인 줄 알면 어떻고, 또 몇이면 어떻습니까?"

헬라임이 손뼉을 마주쳤다.

"아! 그랬지. 네가 알케미온의 피를 마셨다는 걸 잊고 있었군. 그 정도면 걱정이 없겠네."

"그럼 다음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이 용병대도 해산시켜 주십시오."

헬라임이 섭섭하다는 듯이 말했다.

"에잉? 왜? 이번 의뢰는 포기해도 계속 해 먹을 거야. 언제 한번 찾아오도록 해. 아니면 의뢰를 하거나. 가끔씩은 국가 의뢰도 받아 주긴 하니까. 보수만 짭짤하다면."

돈 많은 드래곤이 돈을 밝히다니.

이안은 묘한 감정이 들긴 했지만, 별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럼 먼저 가는 거 이해해 주십시오."

그 말과 함께 이안은 사라졌다.

그가 사라지자 헬라임이 고개를 내저었다.

"쯧쯧, 불쌍한 디오그라프 놈들. 어쩌다가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린 거야? 신이 만든 대륙의 지배자는 이미 따로 존재하고 있거늘."

채채채챙!

순식간에 다가오는 쾌검술을 레더린이 간신히 막아 냈다. 오러 블레이드까지 서린 검이라면 날카롭기 이를 데가 없어 자칫하면 목에 구멍을 낼 뻔했다.

그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듯 레더린의 몸에는 갖가지 생채기가 가득했다. 가끔씩 뒤에서 찰트의 서포트가 있긴 했지만 반대쪽 마법사와의 대결로 많이 지친 것도 있고, 무엇보다 강한 마법사였기 때문에 찰트 혼자서 이제까지 막은 것도 아주 용해 보였다.

"헉! 헉! 헉!"

레더린이 거칠게 숨을 내쉬며 정면을 쏘아보았다.

"이제 포기할 맘이 생겼나?"

처음으로 복면인에게서 말이 튀어나왔다.

"지금이라도 포기한다면 고통은 느끼지 않게 죽여주겠다. 하지만 더 이상 반항할 경우 죽을 때 고통은 더욱 심각해질 것이다. 자, 어떠하냐? 결정해 보거라."

"개소리!"

레더린은 그들의 말에 얼굴을 와락 구겼다.

왕궁에 쳐들어온 간 큰 놈들이 천천히 레더린을 고통에 휩싸이며 죽게 만들 시간은 없을 것이다. 그가 레더린에게 이런 제안을 한 것은 시간이 없기 때문이었다.

"네놈들이 아무리 실력이 좋다고 한들 라인하르트 왕국을 무시하지 마라! 이곳은 너희들이 휘저을 만한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란 것을 내가 친히 가르쳐 주겠다."

복면인 하나가 화를 냈다.

"다 늙어 죽어 가는 늙은이 따위가 감히 어디서!"

레더린도 지지 않고 호통을 쳤다.

"닥쳐라! 왕궁에 진정한 호랑이가 있음을 보여 주리라."

레더린이 자신의 모든 기를 칼에 주입하자 칼이 미친 듯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순간, 대륙십강과도 같은 힘을 보여 주는 레더린의 모습에 복면인들의 눈이 흔들렸다.

"죽여라! 단순히 눈속임을 위한 요행에 불과하다."

레더린의 오러 블레이드가 순간 5미터까지 증가했다.

푸슉!

그리고 지시를 내리던 복면인의 가슴을 정확히 꿰뚫었다.

"크억!"

그 복면인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자신의 심장을 꿰뚫은 오러 블레이드에 눈이 돌아갔다.

하지만 그 공격을 성공시키기 위해 내다 버린 상처도 컸다.

슈욱―!

"크악!"

레더린이 비명을 내질렀다.

그의 왼쪽 팔이 어느새 깨끗하게 절단되어 있는 것이었다.

털썩!

왼쪽 팔은 정확히 하늘을 날다가 땅에 떨어져 꿈틀거리더니 움직임을 멈췄다.

잘린 팔에서 피가 솟구치자, 레더린은 빠르게 천을 찢어 동여매 피를 멈추게 했고 이를 꽉 문 뒤 달려들었다.

방금 공격으로 거의 모든 마나를 소비한 그로서는 복면인 둘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레더린은 그들의 공격에 몸을 멈추고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자신이 모시던 이안을 상상했다.

'아! 전하!'

슉슉!

그리고 그의 몸을 꿰뚫는 두 자루의 칼!

"큭!"

복부를 꿰뚫은 칼들.

찰트가 매섭게 외쳤다.

"공작 각하!"

"재상! 더 이상 다가오지 말게. 쿨럭! 어떻게든 왕궁의 수비에 전념하도록 하게."

억지로 괜찮은 척을 해 보이는 레더린.

하지만 얼굴이 과히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아! 전하!'

이 순간에도 어김없이 찾아오는 이안의 모습.

'이 못난 수하, 먼저 가겠습니다.'

레더린이 그렇게 인생과의 작별을 고할 때, 그의 생명줄을 잡아 주는 작은 외침이 있었다.

"숙여!"

레더린은 이안의 목소리임을 알아채고 고개를 숙였다. 아니, 몸 전체가 땅바닥이 되도록 숙였다.

이안이 그를 들어 올리더니 복면인 둘을 향해 발과 주먹을 동시에 내질렀다.

퍽!

퍽!

"큭!"

그들은 외마디 비명과 함께 몸을 뒤로 주춤거렸다.

"저, 전하!"

레더린은 기쁜 듯이 외쳤다.

그에 반해 이안의 표정은 구겨졌다.

이안은 헬라임에게 이 일의 전말을 들어 알고 있었다.

왕비를 납치해서 더 이상의 전쟁을 막고 라인하르트 왕국을 집어삼키려는 디오그라프 연합국의 계략을 말이다.

그런 와중에 화를 참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안의 모든 기운이 몸 밖으로 폭사되었다.

복면인들의 얼굴이 구겨졌다.

'이, 인간의 기운이 아니다!'

마스터 급 실력자들이 몸을 벌벌 떨었다.

뿐만 아니라 찰트와 싸우던 여자 백마법사도 이안의 몸에 스캔을 하고 나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여타 일반인과도 다를 바가 없는 기운이었다.

하지만 느낄 수 있었다.

'저 남자가 바로 대륙최강이라 일컬어지는, 대륙십강의 윗줄로 본다는 자란 말인가!'

너무도 젊었다.

샘이 날 정도로 그의 나이는 어렸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믿기 힘든 전적을 보여 주며 단 몇 만의 군대로 시작해 프라스 제국을 무너트린 전적을 가지고 있는 훌륭한 맹장이었고, 강한 임금이었다.

"디오그라프가 단단히 미쳤군."

이안이 말하자 복면인들의 눈이 찢어질 듯이 커졌다. 단숨에 디오그라프가 행한 일이란 것을 알다니.

"알아 버렸다면 어쩔 수 없소. 당신을 죽여 입을 다물게 하는 수밖에는 말이오."

"더 이상 다가오면 목숨을 내놔야 할걸?"

"크음!"

이안의 말은 사실이었다.

복면인들은 더 이상 다가갈 수 없었다.

"난 세 가지 종류를 용서할 수 없어."

이안의 뜬금없는 말에 복면인들의 귀가 열렸다.

"첫 번째, 본국을 향해 검을 들이민 것."

이안이 펴 놓은 손가락 세 개 중 하나를 접었다.

"두 번째, 내 수하를 건드린 것."

또 하나를 접었다.

"마지막으로 하나, 내 아들과 마누라를 건드린 것. 너희들은 이 세 가지를 모두 범했으니……."

이안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왕궁 밖으로 발을 내밀기 힘들걸. 자신 있으면 해 봐도 좋고."

"하하하."

복면인 하나가 갑자기 크게 웃기 시작했다.

"으하하하! 아주 재미있는 어린 왕이로고. 강한 힘만 믿고 까부는가 본데 디오그라프 연합국에서 라인하르트 왕국을 공격하는데 설마 우리들만 보냈겠느냐? 우리들은 일종의 시선 끌기용에 불과하다. 지금쯤이면 내 동료들이 왕비를 납치해 가고 있겠지."

"아, 아니, 그런!"

"음!"

레더린과 찰트가 깜짝 놀랐다.

이안은 시종일관 무표정이었다.

"으하하! 좀 더 절망적인 표정을 원했는데……. 내면을 숨긴다고 해도 이미 네 얼굴에는 전부 써 있구나."

이안이 갑자기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갑자기 차원의 문이 열리기 시작하더니 복면인 열 명 정도가 떨어졌다.

그 복면인들을 확인한 복면인의 얼굴이 변했다.

"이, 이럴 수가! 저, 전원 소드 마스터들로 이루어진 이들이 이리도 쉽게! 무슨 짓을 한 것이냐!"

복면인은 갑자기 버럭 화를 냈다. 죽은 복면인들 중에서는 자신과 친하게 지내던 이들의 얼굴이 간간이 보였다.

이안은 부드럽게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러자 그의 손에는 자연의 기운이 작게 실렸다.

그가 손을 내뻗자 작은 자연의 기운이 강맹한 힘을 내포하고 뻗어졌다.

쿠쾅!

"크헉!"

복면인의 가슴에 이안의 손도장이 찍혔다. 그는 울컥 피를 쏟아 내고는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마법사였던 복면인만 이 상황을 이해하는지 몸을 슬금슬금 뒤로 뺐다.

"너희 조국에 가서 알려라. 아니, 당장 디오그라프 연합국 수장들과 수뇌부들에게 내 말을 알려라. 죽고 싶지 않다면 덤비라고. 아니, 목 씻고 기다리라고. 이번엔 너희들이 왔으니 다음엔 내가 간다고 말이야. 알았어?"

이안의 몸에서 뻗어지는 살기로 인해 숨을 쉬기 힘들 정도였다.

"아, 알았소."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안은 곧바로 등을 돌리며 찰트와 레더린에게 말했다.

"공작, 재상! 당장 전투 준비다. 오늘 디오그라프의 멸망을 알리는 진혼곡을 울려야겠다."

"예!"

"대륙의 지존은 라인하르트가 되어야만 해. 25년 전 이 세상을 지배했던 그때처럼 말이야."

■ 에필로그 □

이안의 눈이 감겼다.

그리고 다시 떴다.

"우와아아아!"

함성을 내지르는 국민들의 소리가 하늘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대지를 가르고, 천지를 내질렀다.

이안은 국민들이 고개를 높이 들어 올려야만 볼 수 있는 위치에 서 있었다.

"라인하르트 대제국 만세!"

"황제 폐하 만세!"

근 10년이 넘게 계획했던 정치.

오로지 단승 귀족만이 존재하고, 탐관오리들을 벌할 수 있는 평민들의 세계가 도래했다.

그리고 오늘이야말로 대륙 최강을 알리는 라인하르트 대제국의 공표일.

대륙의 5할은 라인하르트 대제국이 점령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나라는 커졌다.

이안은 다시 눈을 감았다.

그의 귀로 국민들의 함성 소리가 들렸다.

"황제 폐하 만세!"

"라인하르트 대제국 만세!"

'스승님!'

이안은 천유한 장문인을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해 준 노인장.

용아천의 일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라인하르트 대제국 황제의 길까지 모든 것이 머릿속에 떠오르기와 잊혀 가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그의 귓속으로는 수많은 국민들의 함성 소리가 들려왔다.

■ 외전 검하은 편 □

둑이 무너지는 광경에 검하은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처, 청 공자!"

쏴아아아!

그녀는 온 힘을 다해 그를 구하려고 했지만, 이미 그는 둑이 무너지는 물살에 곧이어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녀는 물살이 이어지는 곳으로 경공술을 펼쳐 내려갔다.

하지만 청령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녀가 아무리 실력이 향상되어 빠른 경공법을 구사하게 되었다고 해도 물살이 터진 용아천의 속도에 비견할 바는 아니었다.

'제발!'

바로 그때였다.

그녀의 외침이 닿기라도 한 건지, 갑자기 흰 도포를 입은 서양인이 빠르게 내려가는 것이 아닌가?

얼마나 속도가 빨랐는지 서양인을 쫓는 검하은의 다리에 무리가 생길 정도였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검하은의 눈에도 윤곽이 뚜렷하게 보일 정도로 쓸려 나가고 있는 청령의 모습이 보였다.

"처……!"

그녀가 기쁜 마음에 그를 부르려 했지만, 그녀보다는 서양인이 앞섰다.

그 서양인은 환상적인 몸놀림을 보여 주면서 청령에게 가까이 다가가더니 무언가 입으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팟!

그리고 쏟아지는 빛 무리들.

그러자 서양인의 모습과 청령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뭐야?"

검하은이 당황해 주변을 샅샅이 뒤져 봤지만 청령의 모습을 찾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검하은은 그 빛과 청령이 사라진 것에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석윤서에게 돌아왔다.

그에게는 1각이라고 말했지만, 석윤서는 1각이나 더 기다려 주고 있었다.

"언니!"

검연이 검하은에게 달려들었다.

"오빠는?"

석윤서도 기대하는 눈빛으로 검하은을 바라봤다.

"찾을 수가 없었어요. 아니, 찾았는데 눈앞에서 놓쳤어요. 용아천을 수색해야 될 것 같아요."

"저희도 돕겠습니다. 청령 공자는 저희에게도 중요한 분이시니 반드시 찾도록 하겠습니다."

검하은은 석윤서의 이러한 말에 고마움을 느꼈다.

"고마워요, 석 공자."

"아닙니다. 오히려 도울 수 있는 제가 더 기쁩니다."

"좋아요. 그렇다면 일단 저는 석 공자를 따라가도록 할게요."

"그렇게 하십시오, 검 소저."

둑이 무너지는 바람에 용아천을 바로 건널 수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크게 벗어나 선회를 하여 돌아갈 방법밖에는 없었다.

날이 가면 갈수록 석윤서의 미간의 골이 깊이 파였다.

상단이란 신뢰가 우선이었다.

물품을 언제까지 가져다주겠다고 약속을 했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약속을 지켜야 하는 게 바로 상인의 의무였다.

'너무 급한 마음에 용아천을 건너려는 헛된 생각밖에 가지지 못했으니.'

그런 석윤서의 앞으로 두 개의 그림자가 뚝 떨어졌다.

그 두 개의 그림자의 몸에서 강맹한 기운이 흘러나오자 석윤서의 몸은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부르르 떨었다.

"흐, 흑백쌍마!"

청령에게 당했던 그들이 몸을 회복하고 다시 나타났던 것이다.

"크흐흐! 얼마 전 우리에게 창피를 줬던 그 꼬마 놈을 데려와라! 카악, 퉤! 내 이번에는 아주 혼쭐을 내주겠다."

백마가 침을 더럽게 내뱉자, 흑마가 웃었다.

"낄낄낄. 아우 놈이 제대로 열 받았구먼. 어서 애송이를 데려와야 할 것이다. 그렇게만 해 준다면 상단을 보내 주마. 시간도 없는 판에 우리를 만나 아주 똥구멍이 바짝바짝 타지? 낄낄!"

석윤서는 이들과 휘말리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하지만 필연적으로 부딪쳐야만 했다. 석윤서는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상단에 이들과 싸워 시간을 벌거나, 이길 수 있는 무사들은 없었다.

자신도 흑백쌍마에게는 역부족이었다.

석윤서는 잔머리를 굴리기 위해서 눈동자를 굴렸다.

"아이고! 잔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이놈아, 썩 그 애송이를 내놓지 못할까?"

흑마가 독촉하자 백마의 눈에서 살기가 은은하게 감돌았다.

"어서 그 꼬마를 내놔라!"

백마가 참지 못하고 상단을 향해 돌격했다. 상단을 두들기면 어련히 나올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백마의 손에서는 소수마공이 번쩍였다. 석윤서는 도를 들고 바로 달려들었다. 하지만 소수마공을 향해 검을 내지르는 그 순간에 눈을 감아야 했다.

소수마공이 얼마나 위험한 공격력을 가진 것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부터 무공을 단련한 자신도 한 대만 잘못 맞아도 단숨에 즉사를 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 순간에 갑자기 나타난 여인이 있었다.

검하은이었다.

'검 소저!'

검하은이 경공을 발휘해 석윤서보다도 앞에 나서며 소수마공을 향해 온 힘을 다해 검을 내질렀다.

쾅!

소수마공과 그녀의 날카로운 검이 한차례 강한 파공성을 일으켰다.

"으응?"

백마는 틀림없이 성공할 거라 생각한 자신의 공격이 한낱 여인에게 막혔다고 생각하자 화가 머리끝까지 일었다.

"허어! 이번엔 내 공격을 계집까지 막아선단 말이더냐? 언제부터 무림이 이렇게 미쳐 버렸다는 것인가! 오냐! 좋다. 오히려 이번 기회를 일삼아 그 애송이와 네년을 보기 좋게 안주로 삼아야겠다!"

하지만 백마는 검하은을 너무 얕봤다.

검하은은 검기를 내뻗으며 백마를 강하게 몰아쳤다.

석윤서는 검하은의 경지에 대경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검기를 뽑아내는 것은 자신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검하은과 같이 가는 실처럼 검기를 뽑아낼 수는 없었다.

그건 바로 검사의 경지를 뜻하는 것이었다.

당금 무림에 검사의 경지를 하고 있는 자들이 대체 몇이나 된단 말인가?

아니, 그건 고사하고 스물의 어린 나이에 그것도 여인이 검사의 경지에 들었다는 것은 두고두고 회자될 정도로 아주 대단한 일이었다.

'검의 천재다! 검각은 실로 무서운 자들을 키웠다.'

검하은이 백마를 상대로 압도적으로 이기는 건 아니었다.

백마와는 거의 막상막하로 싸우는 지경이었으니 백마의 입장이 난처해질 정도였다.

'백마만 죽인다면 흑마를 죽이는 것은 더욱 쉬워진다. 어떻게 해서든 검 소저가 이길 수 있게 도와야 한다!'

석윤서는 잔머리를 굴렸다.

바로 그때, 그의 눈에 작은 돌멩이 하나가 보였다.

그는 돌멩이 하나를 잡고는 내공을 실어서 검하은의 등을 향해 빠르게 튕겼다.

'검 소저, 피하십시오!'

빠른 염원으로 전음을 보내자 검하은이 소수마공을 피하는 척 싶더니 곧바로 고개를 숙이며 검을 앞으로 내질렀다.

그리고 백마의 안면을 향해 빠르게 날아가는 돌멩이.

막지 않으면 꽤나 강한 고통이 올 것이었다.

백마는 돌멩이와 검하은의 검을 피하기 위해 몸을 왼쪽으로 틀었다.

하지만 검하은은 내지른 자세에서 곧바로 몸을 유연하게 움직이며 오른쪽으로 몸을 비틀었다.

슈악!

백마의 몸이 갑자기 두 동강 나기 시작하더니 서서히 무너졌다.

'이겼다!'

석윤서는 손쉽게 백마가 죽자 환호성을 내지르고 싶은 마음에 양팔을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백마가 죽었다. 흑마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막아라! 흑마를 죽이면 무림의 명성을 얻을 수 있다."

흑백쌍마의 목에 걸린 현상금은 어마어마하다. 게다가 무림의 명성까지 얻을 수 있으니 자리에 있던 사람들 모두는 흑마를 향해 내달렸다.

"아, 아우야!"

흑마는 백마의 죽음에 뜻밖이라는 생각이었다.

결코 검하은의 수준으로는 백마를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검하은이 3할의 실력을 숨기고 있었을 뿐.

드러내지 않았던 것뿐이다.

그녀는 백마를 죽이자 곧바로 흑마에게 달려들었다. 흑마는 정신없이 자신에게 달려드는 무사들을 죽이기 위해 발악을 했다.

하나 그런 무사들 사이에 처박혀 있으면 틈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검하은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얇은 검을 그 안으로 통과시키며 흑마를 향해 매서운 일격을 내질렀다.

그러자 흑마는 아주 죽을 맛이었다.

아우인 백마보다야 자신의 경지가 높으니 검하은과 싸운다 해도 이길 자신은 있지만, 이렇게 많이 매달리면 힘들었다.

'젠장!'

흑마는 그들을 내팽개치며 몸을 뒤로 빼돌렸다.

그리고 곧바로 신법을 발휘해 유유히 숲 속으로 사라졌다.

"흐, 흑마가 도망갔다!"

"우와아! 우리가 흑마를 내쫓았다!"

흑마를 내쫓는 데 최고의 기여를 한 것은 바로 검하은이었다. 검하은은 그 일이 있은 후 곧바로 운기조식에 들어가서 마음을 다스리고 부족한 내공을 채웠다.

그리고 며칠 후, 그녀는 백마를 죽인 여성으로 아주 유명해졌다.

무림칠화.

중원 최고의 여인들에게 붙는 무림육화가, 검하은까지 더해져 무림칠화로 변모했다.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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