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59장 엇갈림 □
뜻하지 않은 에반의 방문.
익스퍼트 최상급의 경지에서 끙끙거리고 있던 에반이었기에 요즘 왕궁 침입이 뜸했다.
그런데 에반이 아주 재미있는 소문을 가지고 왔다.
그라나이드 황제가 어떤 한 지방에 수백의 병력을 가지고 나타나 영주들을 괴롭힌다는 것이었다.
"분명히 그라나이드 황제는 죽었다고 들었다. 헌데 어떻게 되살아난단 말이냐?"
"헌데 보고받은 것은 확실합니다. 그래서 전하께 보고를 올릴지 말지 한참을 갈등했습니다."
"전 프라스 황제가 왜 찾아왔을까? 아니, 그것이 문제가 아니로군. 일단은 내가 직접 가 보겠다."
에반이 대경실색했다.
"전하! 전하는 궁을 지키셔야 합니다. 소신이 직접 가 그라나이드 황제의 목을 따 오겠나이다."
에반은 진심으로 부복 자세를 취하며 원하는 듯 해 보였다.
하지만 이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건의 진상을 알아보기 위해 가는 것이다. 에반은 레더린 공작과 함께 궁을 지켜라."
"하, 하오나……!"
"그라나이드 황제가 직접 찾아왔다는 것은 본국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고 봐야 한다. 이는 절대 묵과할 수 없는 사실. 밖에 누구 없느냐?"
"예, 전하!"
한 기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잘 훈련된 정예병 천 명을 집합시켜라. 실전의 경험을 쌓을 아주 좋은 기회다."
"예, 전하!"
이안은 진열되어 있는 로열을 향해 손을 뻗었다.
촤륵!
검은 그의 손아귀에 빨려 들어갔다.
* * *
이안은 세리아에게 변명을 하고 곧바로 궁을 도망치듯이 빠져나왔다.
그런데 에반도 등에 한 보따리 짐을 챙기고 따라 나온 것이다.
"넌 왜 나왔냐?"
"전하가 가는 곳은 소신도 따라갑니다. 오랜만에 전하를 마스터처럼 여기며 따르겠습니다."
이안은 의심스런 눈초리로 그를 바라봤다.
"궁에 처박혀 있기는 싫고, 그렇다고 아직 벽이 뚫리지도 않으니 답답한 마음에 같이 따라가는 거 아냐?"
에반은 속으로 '헉!' 소리를 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오로지 소신은 전하를 지키겠다는 일념 하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몇 년 만에 멍청했던 에반이 조금은 말대꾸도 할 줄 알고 머리가 쓸 만해졌다.
"내가 그 마음을 안다. 그래, 오죽하겠냐? 따라와라. 궁에만 있기 이만저만 심심한 것이 아닐 텐데."
에반이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으하하! 역시 전하께서 허락하실 줄 알았습니다. 저에게 태양이 있다면 그건 바로 전하이십니다."
"……가자, 빨리."
"옙! 성심성의껏 모시겠습니다."
제시즈 남작가에 신출귀몰하게 나타나 병사들과 마을 사람들을 도륙하는 자들.
그 수가 근 수백에 이를 정도였으니 제시즈 남작은 궁에 지원을 요청했다. 제시즈 남작가는 수도가 상당히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지원 병력 천 명은 삼 일이 안 되어 나타났다.
"안녕하십니까, 제시즈 남작님. 라인하르트 왕국의 자유기사 에반입니다."
제시즈 남작의 얼굴이 밝아졌다.
에반이라면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소드 마스터를 죽이며 단숨에 사기를 끌어올린 자가 아니던가?
소문에는 자작의 작위도 포기하며 자유기사로 남기로 한 자였다.
에반이 오게 되자 제시즈 남작은 천군만마를 얻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의 덩치에서 나타나는 기운은 사람을 든든하게 만들어 주었다.
"오! 에반 경, 어서 오게. 한참 기다렸지 않나?"
"남작님을 기다리게 한 죄, 달게 받겠습니다."
제시즈 남작이 웃음을 피웠다.
"하하하! 농담일세, 농담! 어찌 자네에겐 농담도 통하지 않는단 말인가? 오오! 자네가 데려온 군사들 전부가 듬직하기 이를 데가 없군. 모두 기세만 본다면 오우거도 때려잡을 것 같네! 하하하."
"푸흐흐! 못할 것도 없습…… 큭!"
에반이 정말 때려잡으려는 기세로 병사들의 훈련 성과를 입 밖으로 꺼내려다가 이안에게 옆구리를 한 대 맞았다.
일단 병사들의 훈련 성과 같은 것은 철저하게 비밀로 붙여졌다.
일반 병사들이 기사들과도 비견될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다면 그 누가 믿겠는가!
에반은 맞고 나자 아차 하는 심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오, 그러고 보니 에반 경, 이 옆에 있는 젊은이는 누구인가?"
'시종이라고 해라.'
이안이 전음을 보내자 에반은 곧바로 대답했다.
"제 시종을 맡고 있는 듬직한 녀석입죠. 늦은 나이에 검술을 배우겠다고 하는 아이인데 성실해서 제가 데리고 있습니다."
"오! 에반 경에게 검술을 직접 가르침 받는다는 말인가? 부럽군! 이름이 무언가?"
"아이론입니다."
"성은 없는고?"
"예, 남작님. 아직 평민인지라……."
남작은 이안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역용술을 주었기 때문에 지금의 이안의 얼굴은 그 누가 보더라도 기사의 시종 역할이나 맡는 그런 잡부였다.
"에반 경은 라인하르트 왕국에서도 순위권을 다투는 훌륭한 기사일세. 잘 따르고 본받도록 하게."
이안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명심하겠습니다, 남작님."
이안과 에반이 사이좋게 나란히 걸어갔다.
"왜 정체를 밝히지 않으신 겁니까, 전하."
"조그마한 영지에 내가 왔다는 것이 알려진다면 그리 좋을 게 없다. 또한, 나는 내 정체를 알리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그라나이드 황제의 얼굴만 확인하러 온 것뿐이다."
"그건 그렇고 정말 잘 참으셨습니다. 흐흐! 그 누가 알겠습니까. 지금 이 순간 전하가 제 시종이나 되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안이 에반을 쳐다봤다.
아니, 표독스런 눈길로 노려봤다.
"내가 살던 곳에는 이런 말이 있지. 죽고 싶거든 뭔 말을 못하겠냐고……. 정말 죽고 싶은 것은 아니겠지?"
"……."
"일단 소문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아무 곳이나 들쑤시고 다녀 봐야겠군. 정말 그라나이드 황제인지 확인해 보고 꿍꿍이가 뭔지 들어 봐야겠어."
"저는 무엇을 합니까?"
"대기해."
"……."
이안은 허공답보로 하늘에 오르더니 한참을 위로 올라갔다. 상당한 압력이 이안의 몸을 짓누르자 이안은 슬슬 반탄강기와 호신강기를 몸에 두르며 안력을 돋웠다.
거대한 영지가 한눈에 보일 정도였지만, 수상한 점이나 그라나이드 황제가 단숨에 보이지는 않았다.
"흐음! 높은 곳에 오면 보일 거라 생각했는데, 놈들이 생각보다 꼭꼭 숨어 있는 건가?"
그들을 잡기 위해서는 그들의 이동경로를 알아봐야 한다.
이안은 에반이 제시즈 남작에게 요청해 받은 예상 이동경로 등을 바라보았다.
"일단 저기부터다."
이안은 한곳을 가리키며 그곳으로 천천히 내려갔다.
마을로 내려선 이안은 황폐해진 광경으로 인해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졌다.
지나가는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다.
"여기가 그들이 제일 마지막에 나타났다고 알려진 그곳이로군."
어제다.
이곳은 바로 어제 그라나이드 황제가 이끈다는 병사들이 몰살한 곳이었다.
"음?"
이안은 눈앞에 존재하는 마력을 내뿜는 돌을 바라보았다.
'마법석?'
마법석이라 하면 마법사들에게 귀중한 마법재료들이 아니던가?
이안이 그 마법석을 집으려고 할 때였다.
'이런!'
누군가가 공간이동으로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고 클래스 마법사가 텔레포트로 단숨에 장거리를 날아오는 것이었다.
이안은 자신의 몸을 자연과 일체시키며 유유히 시야에서 사라졌다.
잠시 후, 이안의 시야로 로브를 입은 한 사내와 검을 찬 중년인이 나타났다.
그들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이안이 집으려 했던 마법석을 냉큼 주웠다.
"잃어버리는 줄 알았는데 다행히 찾았군."
"찾았으니 어서 돌아가세. 그분이 걱정하지 않겠나?"
"그러세."
마법사와 검을 찬 중년인은 산길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뭐야, 저놈들?'
이안은 갑자기 나타나 사라져 버리는 그들의 정체가 궁금했다.
'그리고 저 남자…….'
이안은 검을 든 중년인에게 눈을 흘겼다.
중년인의 기도에서 풍기는 기운이 보통이 아니었다.
소드 마스터 중급, 혹은 상급에 비견되는 기운이라니!
게다가 저 마법사의 서클은 최소 6서클은 되는 듯 보였다.
'7서클은 되지 못했나? 텔레포트 사용 이후 다시 사용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그다지 서클이 높은 것 같지는 않군. 허나 6서클 마법사와 소드 마스터라면 필시 보통 내기들이 아닐 터……. 이곳엔 나타난 이유는? 그리고 저 마법석의 정체는?'
이안은 그들을 뒤따랐다.
그들의 걸음걸이가 느린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한두 시간 걷는 것이 아니라 근 반나절이나 걸어야 했다.
이안이 그랜드 마스터에 오른 이후 이렇게 오래 걸어 본 적은 없다고 봐야 했다. 항상 디멘션 스텝으로 몸을 움직였기 때문이다.
반나절 정도를 걷고 나자 그들은 한 숲에서 갑자기 외치기 시작했다.
"붉은 달이 떠오른다."
그러자 숲 저편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검은 달은 떠오르지 않는다."
"핏빛 별이 물든다."
"허면 세상이 부활한다."
"……."
중년인과 사내가 가만히 있자 잠시 후 숲 쪽에서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확인 절차 끝에 확실하다. 들어가라."
마법의 파장이 느껴졌다.
파장 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마법사와 사내.
이안은 그 파장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한눈에 보아도 고위 급 마법사가 쳤다는 매직 필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안은 웬만한, 아니, 거의 모든 매직 필드 정도는 손쉽게 파고 들어갈 수 있다. 하나 아무 기척도 느끼지 못하게 하고 들어가는 것은 힘들었다.
이안이 무리하게 파고든다면 분명 이 매직 필드를 친 자는 알아볼 것이었다.
'젠장…….'
이안은 다시 그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이곳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 *
"마스터, 누구입니까?"
로브를 입은 남자가 물었다.
그러자 방금 통신을 종료한 젊은 남자가 담담히 말했다.
"도반 백작의 통신이다. 이전과 같이 계속해서 그라나이드 황제의 얼굴을 하고 있어 달라는군. 그건 그렇고 뒤에 따라온 자가 붙어 있거늘. 보지 못했는가?"
"예? 아, 그런 놈이 있었단 말입니까? 하지만 6서클인 저도, 소드 마스터인 포말 경도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허, 헌데 마스터께서는 어찌 아신 겁니까?"
로브를 입은 남자가 당혹해 하며 묻자, 젊은 남자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나 정도의 경지에 오르면 듣지 않고도, 보지 않고도 모든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3년 전 갑자기 작은 용병단으로 굴러들어 와 2서클에 불과했던 자신을 단숨에 6서클까지 만들어 준 괴인.
뿐만 아니라, 익스퍼트 중급에 불과했던 포말을 3년 만에 소드 마스터로 만드는 기이학적인 능력까지!
용병단원들 전부가 익스퍼트에 오른 실력까지 겸비했다.
그것을 만들어 준 이가 바로 로브를 입은 남자, 아니 6서클 마스터 리잔의 마스터인 젊은 이 남자였다.
'마스터는 전설 속에서나 존재하던 인간으로서 9서클까지 오른 분이 아닐까?'
9서클 마법을 사용하는 것은 보지 못했지만, 익숙한 마나의 기운은 분명히 그가 고위 급 마법사라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 하지만 리잔의 실력으로는 이 젊은 미남자의 경지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리잔은 조심스레 물었다.
"저어, 마스터. 그렇다면 포말 경과 함께 저희를 추격한 이를 일단 잡아 두겠습니다."
"인간에 불과한 너희들의 실력으론 그를 잡기 힘들다."
'자기는 인간 아닌가?'
가끔씩 마스터인 헬라임은 뜬금없이 자신이 인간이 아니다라는 둥 이상한 말을 했다.
"6서클인 저와 마스터인 포말 경이 붙잡기 힘든 상대가 세상에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리잔은 지금 당장 대륙십강을 때려잡으라고 해도 포말 경과 함께라면 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내가 나가지."
리잔은 헬라임이 싸우는 모습을 몇 번 본 적이 없었다.
가끔씩 몬스터들이나 인간들을 잡긴 하지만 실력 차이가 너무 나서 어떻게 상대하는지 본 적이 없었다.
리잔은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예, 그럼 알겠습니다!"
'제법 단단한 매직 필드. 단숨에 깨질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고 누군가의 출입을 기다릴 순 없다.'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은 지 1시간이 넘었건만 이안은 왕래를 하는 사람을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
'깨 볼까?'
이안은 나뭇가지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안에게 있어 더 이상 검에 대한 존재 여부는 불필요한 일이었다. 현경에 오르는 순간 이안에게는 나뭇가지도 여타 명검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안은 고개를 저으며 나뭇가지를 내렸다.
'일단은 생각해 봐야 한다. 자, 어디 보자……. 이곳 매직필드에 구멍을 내 버리면 이곳으로 사람이 몰릴 테니 그 틈을 타 안으로 들어가 볼까?'
이안은 다시 나뭇가지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오러를 집중시켰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했으니."
우우웅!
나뭇가지가 연하게 빛나더니 매직 필드 안으로 쑤욱 들어가 천천히 갈라내기 시작했다. 한 10cm 정도를 내리긋던 이안이 나뭇가지를 안으로 쑤욱 집어넣어 버리더니 재빨리 그 자리를 벗어났다.
'음!'
매직 필드가 얼마나 단단한지 오러 블레이드로도 팔목에 상당히 무리가 갔다.
헬라임은 블루 드래곤이다.
올해로 3,000년을 넘게 산 웜 급 드래곤으로 벌써 세 번째 유희를 즐기고 있기도 하다. 그는 세 번째 유희 중 이번 유희가 제일 재미없다고 생각했다. 하루빨리 세계를 통일한 뒤 잠이나 한숨 자고 다시 유희나 해야겠다는 생각이 가득했다.
그런데 그때 참으로 재미있는 놈이 나타났다.
"오호! 저 나이에 그랜드 마스터라고?"
헬라임의 두 눈에서 빛이 번쩍였다.
인간이 그랜드 마스터라는 것도 놀라운데, 경지는 둘째 치고 그의 나이에 관심이 생겼다.
그랜드 마스터가 어떠한 경지인가.
드래곤을 위협할 수 있는, 역사상 대륙에서도 몇 나오지 않은 최고의 경지가 아니던가?
'어라?'
그런데 헬라임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왠지 모르게 저 아이에게서 익숙한 냄새가 풍겼다.
'왠지 늙은이의 피 냄새가……. 엥? 알케미온 늙은이의 피 냄새잖아.'
골드 드래곤 알케미온.
에이션트 드래곤으로 드래곤 중에서는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골드 드래곤이었다.
'라인하르트 왕국의 왕이라더니, 과연 황손이 맞긴 맞군. 여신의 축복을 받은 아이니까.'
여신의 축복을 받는 아이라면 드래곤들이라 해도 손쉽게 건드릴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헬라임은 호기스럽게 나섰다가 그랜드 마스터라는 점에서 몸 좀 풀겠구나 했는데, 여신의 축복을 받은 아이인 것을 알게 되자 실망했다.
'에라이, 그럼 어쩔 수 없지…….'
"헉!"
이안은 그라나이드 황제의 얼굴로 갑자기 나타난 자에 대해 소스라치게 놀랐다.
현경에 오른 자신이 근처에 다가온 자의 기척조차 느낄 수 없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확실히 그라나이드 황제에게 저런 실력은 없었다. 감춘 것도 없었다. 저자는 누구지? 누구이거늘 전 황제의 얼굴을 하고 있단 말인가!'
기세 좋게 매직 필드를 부수고 그 틈을 타 반대쪽으로 들어가려던 속셈이 보기 좋게 막혔다.
"누구십니까?"
이안은 일단 묻기로 했다.
"하하하! 그래, 일단 이 얼굴로는 보기 거북하겠지? 트랜스!"
그가 가볍게 외치자 그의 얼굴과 함께 골격 등이 변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십 대의 미청년으로 변해 있었다.
역용술 마법을 마치 가볍다는 듯이 펼치는 청년!
이안의 역용술이라 해도 노인에서 단숨에 청년이 될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다. 아니, 중원이라 해도 그 정도의 역용술을 발휘하는 곳은 그리 많지 않았다.
"설마 라인하르트 왕국의 아이가 알케미온 영감의 피를 받았을 줄은 몰랐네……. 우연이야?"
"우연입니다. 피는 확실히 죽기 직전 우연히 얻은 것이지요."
이안은 그 무덤을 생각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때는 정말이지 생사를 넘나드는 바람에 죽을 뻔했었다.
'드래곤!'
이안은 그와의 대화를 통해 그 사내가 바로 드래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위대한 존재께 인사 올립니다."
헬라임은 손을 저었다.
"됐어, 됐어! 지금은 유희 중이라 그런 것 따질 겨를도 아니고. 묻고 싶은 게 많겠지?"
헬라임이 능글맞게 웃었다.
이안은 한숨을 쉬었다.
"휴우! 위대한 드래곤 종족에게 누가 전 황제인 그라나이드를 흉내 내라고 시킨 겁니까? 드래곤은 인간의 일에 개입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그건 드래곤일 때라고. 지금은 유희 중이라고 아까 말했잖아. 유희 중일 때는 인간 세상에 변화만 주지 않는다면 뭐든 괜찮아. 지금은 적당한 의뢰가 들어와서 유희 중일 뿐이고."
"음……."
이안은 고심을 하며 눈을 감았다.
"그럼 그라나이드 황제를 흉내 내라고 한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터. 의뢰자는 저, 당신, 아니……."
이안이 이름을 몰라 더듬거리자 헬라임이 웃으며 말했다.
"헬라임이다. 헬라임이라 불러."
"아! 헬라임 님에게 흉내 내라고 한 이유에 대해 자세한 사항은 모르는 것이군요."
헬라임이 웃으며 대답했다.
"글쎄? 난 보지 않고 듣지 않아도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이안의 눈이 공허하게 변했다.
"제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아시는군요?"
"얼마 전에 이계의 문이 열렸지. 몇 년 전이었는지는 기억 하지 못해도 그 당시 꼬마 놈은 제대로 왔는데, 웬 중년인 하나는 시간의 차원을 잘못 타서 수십 년 전으로 가 버렸어. 그거 아닌가?"
귀창과 이안의 차원이동 때를 말하는 듯싶었다.
이안은 헬라임을 직시했다.
"그럼 가르쳐 주십시오.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헬라임이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충격 받지 않을 자신 있으면 언제든지 좋아."
세리아는 화단을 걸었다.
자신이 직접 키운 화단이기에 이 화단에는 웬만한 귀족들도 얼씬하지 못한다.
그의 곁에는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레더린이 걸었다.
"왕비마마, 전하를 수행하지 못한 죄, 달게 받겠습니다."
레더린이 고개를 숙이자 세리아는 잔뜩 화가 났다.
"흥! 그이가 왕궁에만 있더니 심통이 난 것 같아요. 저에겐 거짓말을 일삼고 남작 영지로 후다닥 도망가 버리다니요."
찰트가 웃으며 말했다.
"후후! 사실 전하께서 피곤하시긴 하셨지요. 그럴 때에 갑자기 재미있는 일이 터지면 거짓말을 해서라도 가고 싶지 않겠습니까?"
"흥! 그게 문제가 아니라고요. 그런 아버지를 보면서 우리 나르시안이 무엇을 배우겠나요? 흥흥! 맨날 우리 나르시안이 검술을 가르쳐 달라고 하면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도망가 버리니, 나르시안이 마법의 경지만 벌써 1서클이에요."
1서클에 올랐다는 말 만큼은 정말 뿌듯하게 하는 세리아였다.
나르시안과 같이 어린 나이에 1서클에 오른 것은 천재라 해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안이 나르시안에게 검술을 가르쳐 주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어느 하나가 일정 경지에 올라야만 다른 하나를 배울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안은 나르시안이 3서클이 되기 전까지는 절대로 검술을 가르쳐 줄 생각이 없었다. 오로지 홀로 연습하며 꾸준히 근성 있게 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 것이었다.
"찰트 재상이 아무래도 저보다는 마법 경지가 높으니 나르시안의 마법 선생이 되어 주세요. 부탁하겠어요."
"하하하! 그렇지 않아도 왕자님에게는 정말 대단한 재능이 있으십니다. 저도 눈여겨보고 있던 터인데, 왕비님께서 그렇게 말하신다면 저도 거리낄 것이 없지요."
"호호! 정말 고마워요. 그런데 그이가 이번에 간 남작 영지에는 무슨 일이 생긴 거죠?"
"끄응……."
레더린이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찰트가 불쑥 나타나 입을 열었다.
"하하핫! 왕비님, 그런 일은 관심 가지실 게 못 됩니다. 그냥 단순히 산적들이 연합해서 작은 소란을 일으킨 것이지요. 전하께서 잘 해결하고 돌아오실 것이니 걱정 마십시오."
"그랬으면 좋겠어요. 정말……."
세리아가 씁쓸하게 웃는 그 사이, 갑자기 찰트와 레더린이 두 눈을 반짝였다.
"왕비님, 저희는 이만 일이 있어 가도록 하겠습니다."
"아, 공작과 재상이 같이 어딘가로 가는 걸 보니 뭔가 큰일이 있는 듯싶군요. 어서 가 보도록 하세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왕비님. 바람이 차가워지니 왕비님께서도 어서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알겠어요. 호호! 저도 나르시안이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으니 들어가 보도록 하죠."
세리아가 발걸음을 돌리자 찰트와 레더린은 엄청난 살기를 내뻗으며 주위를 향해 말했다.
"누구냐?"
"……."
"누구이기에 왕비님을 노리는 것이냐?"
"……."
찰칵!
레더린의 검집에서 검이 뽑혀 나왔다.
화륵!
찰트의 양손에서도 파이어 볼이 떠올랐다.
둘의 눈에 은은한 살기가 맴돌았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슉―!
그들의 앞으로 그림자 네 개가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