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57장 국혼 □
마계에서 돌아온 이안은 일단 황제부터 찾기 위해 황궁을 들쑤시기 시작했다. 황궁에만 해도 소드 마스터들이 득실거릴 정도로 많았으나, 이번에 이안에게 호되게 당하면서 이안을 위협할 적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힘껏 창을 휘두르는 병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안의 반탄강기를 뚫지 못해 자신들이 고스란히 데미지를 입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이안이 황제를 찾는 것도 참으로 쉬웠다. 처음과 마찬가지로 실력이 있는 자들이 지키고 있는 곳이라면 몇 군데 없었다.
"가, 가그론 자작, 어떻게 된 일이오? 그대가 분명 대륙십강 급의 세 명이 덤비면 그놈도 무사하지 못할 거라 하지 않았소?"
"끄응!"
가그론 자작은 할 말이 없었다. 아니, 어떤 미친놈이 소드 마스터가 득실한 프라스 제국의 황실을 단신으로 쳐들어온단 말인가?
"황자 저하, 어쨌든 피신해야 할 듯싶습니다. 그 미친놈이 모두를 죽이려는 작정인 듯합니다."
"모두라니! 아바마마와 나까지 죽인단 말이오?"
"황송하오나 장담할 수 없습니다."
"끄응!"
이번에는 헤디온 황자가 앓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가그론 자작과 함께 도망가려던 그의 앞으로 갑자기 수많은 병사들이 도륙을 당했다.
"크악!"
지금까지 헤디온 황자를 지키던 병사와 기사들이었다.
그들은 손 한 번 쓰지 못한 채 적에게 죽어 나갔다.
"누, 누구?"
헤디온 황자가 겁에 질린 채로 있자, 갑자기 나타난 이안은 헤디온 황자의 멱살을 잡아 올리고 끌고 가 버렸다.
"이놈이 바로 프라스 제국의 1황자다. 이놈을 죽이고 싶지 않다면 당장 무기에서 손을 놓는 것이 좋을 것이다."
"크윽!"
기사들은 검을 내려놓았다. 병사들도 창을 내려놓았다.
이안은 황자를 황제가 있는 곳으로 끌고 갔다. 그동안 헤디온 황자는 정신이 없었다. 그가 말을 걸 때마다 위에서는 주먹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네, 네 이놈! 이 손을 놓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
"이놈?"
마나가 실린 주먹은 아니었지만, 그랜드 마스터에 오른 이안의 주먹은 헤디온 황자의 안면을 함몰시키기에는 충분했다.
"크악! 이 개새끼! 날 놓지 못하겠느냐?"
부모가 아니면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즉 황제가 알아볼 정도로만 내버려 둔 것이다.
기사들의 포위 속에서 두려움에 몸을 떨던 그라나이드 황제는 헤디온 황자가 피투성이가 되어 질질 끌려오는 모습에 경악했다.
"오, 내 아들아!"
"아, 아바마마."
헤디온 황자는 거의 정신을 반쯤 놓은 상태로 그라나이드 황제의 목소리만 듣고도 아비를 찾았다.
"괜찮느냐?"
"마, 많이 아픕니다."
"그래, 그렇겠지! 이, 이걸 어찌할꼬. 내 아들을 놔주게. 아들만 놔준다면 뭐든지 하겠네."
그라나이드 황제의 얼굴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이안은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원하는 것은 하나뿐이오. 일전에 잡아갔던 로이니스라는 여인을 데려오시오."
황제가 얼굴을 살짝 쳐들자 기사 하나가 빠른 속도로 사라지더니 금방 여인 하나를 데려왔다.
"아……!"
반항한 흔적이 있는지 몸 이곳저곳이 상처투성이였다.
로이니스는 기절해 있는 건지 숨을 고른 채로 누워 있었다.
이안은 속으로 참고 있던 분노를 터트렸다.
그의 몸 안에서는 엄청난 살기가 감돌았다. 그 살기가 바깥으로 표출되자 모든 자들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프라스 제국의 황제에게 경고하겠소!"
"……."
"난 21년 전에 멸망했던 라인하르트 대제국의 황태자요. 난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고 오로지 프라스 제국의 멸망만을 원한 채 살아왔소. 이대로 내가 돌아간다 생각하지 마시오. 곧 프라스 제국 황실로 직접 군을 이끌고 찾아올 것이오! 막으려거든 막아 보시오. 모든 군사적 요청을 해 보아도 좋소. 하지만 명심하시오. 당신들이 어떤 짓을 한다 해도 프라스 제국의 멸망은 곧 이루어질 테니까 말이오!"
말을 끝낸 이안은 로이니스를 데리고 공간이동으로 사라졌다.
그가 사라지고 나자 그라나이드 황제와 헤디온 황자는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허허허……."
발 없는 말이 천 리 간다고, 프라스 제국의 강탈 사건은 참으로 이안의 강대함을 보여 주는 일이었다.
단신으로 황궁에 쳐들어가 휩쓸어 버리다니!
그것도 여인을 위해서 그러한 짓을 했다는 게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한데 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 이후로 한 달이 지나고 프라스 제국은 펠타온 제국에서의 전쟁에서 패배를 인정했다는 것이다.
이름 드높은 프라스 제국은 한순간에 왕국이라는 딱지를 붙이게 되었고, 이 대륙에 오로지 제국이란 이름을 가진 나라는 펠타온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다시 세 달이 지났을 때, 대륙에는 어마어마한 파장이 지나갔다.
펠타온 제국에서 이안에게 대륙십강의 위에 하나의 경지를 더 만들어 주었는데 그것이 바로 1황이었다.
1황 대륙십강.
그리고 이안을 펠타온 제국에서 대공이라 칭하고 그가 일궈 낸 땅을 로엔그람 공국이라 명했다.
로엔그람 공국은 사실상 왕국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아주 커다란 곳이었다.
이안은 로엔그람 공국을 개명하여 라인하르트 공국이라 바꾼 후, 공국에서 왕국으로 선포하였다.
진정, 라인하르트 왕국이 탄생한 것이었다.
그리고 1년이 지났다.
"전하, 이 여인들이 바로 차기 왕비입니다."
찰트가 며칠을 고심하여 고르고 골라 낸 여인들이었다.
대부분이 타국의 공작이나 후작의 딸이거나, 혹은 공녀나 공주들도 있었다.
이안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곤란하다는 듯이 말했다.
"찰트 경, 말했다시피 난 맘에 드는 여인이 없다고 했을 텐데?"
"결혼할 생각이 없으신 것이 아니라, 마음에 드는 여인이 없는 것이 아닙니까?"
"끄응."
이안은 찰트와 말다툼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인지 앓는 소리를 내며 침소로 들었다.
"마음에 두고 계시는 분은 단 두 분뿐이겠군요."
침소까지 따라오며 찰트가 하는 말에 이안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전하께서는 한 나라의 제왕이십니다. 제왕이라 하면 제왕에 걸맞은 여인을 탐하셔야 합니다."
"제왕 또한 사람에 불과하다. 평민이나 노예, 귀족, 그 누구든 피와 살점으로 이루어진 귀한 사람이라는 것이지."
"전하! 그 말씀은 벌써 수십 번은 더 들었사옵니다."
"그렇겠지."
찰트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그녀들을 후궁으로 들이십시오. 왕비만큼은 제가 선택한 여인들과……."
"찰트 경! 난 아직 결혼할 생각이 없다. 아니, 있어도 바로 그녀들과 맺을 것이지. 아니, 됐다. 당장 나라에 나의 결혼을 공포해라."
"저, 전하?"
찰트가 당황하자 이안은 더욱 거칠게 밀어붙였다.
"지금 중요한 것은 결혼 따위가 아니다. 왕비 따위도 아니다. 아직 나라가 안정이 되지 못했으니 나라를 안정시키는 것이 첫 번째 일이지."
"그, 그럼 결혼하신다는 얘기는……."
"오래 끌 것도 없다. 열흘 후, 로엔그람 상단의 상단주인 세리아와 맺을 것이니 그녀를 궁으로 불러들여라."
"저, 전하……."
"됐다! 두 번 말하지 않겠다. 그녀가 아니라면 그 누구도 왕비가 될 수 없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안이 곧바로 혼자서 걸어가 버리자 찰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전하 고집을 누가 말린다는 말인가……."
라인하르트 왕국의 제왕인 이안의 발언에 대륙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다. 일개 소국의 변방 영지의 딸에 불과했던, 아니 지금은 몰락귀족으로 오히려 평민과도 같은 여인을 왕비로 삼겠다니!
그런 왕실 발표에 제일 놀란 것은 다름 아닌 세리아였다.
사실 그럴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혹시 왕이 되면 마음이 바뀌지 않을까 하고 노심초사 했던 날들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이안……."
이안은 사람을 시켜 그녀를 직접 데리고 오라 했다.
그녀가 도착하자 이안은 서둘러 국혼 준비를 했다.
그리고 그녀와의 국혼은 금방 다가왔다.
라인하르트 왕국의 제왕이 국혼 한다는 공포에 수도 리든 시티에서는 때 아닌 파티가 일어났다.
거리에서 사람들은 술을 마시고 춤을 췄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기쁘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다름 아닌 로이니스였다.
"아아……!"
사실 이미 그를 포기하고 있다고 해도 맞았다. 하지만 결혼 상대로 자신이 아닌 세리아를 선택했다는 점에서 로이니스는 큰 충격을 받았다.
"알고 있었어. 알고 있었는데, 알고 있었는데……."
그는 어디까지나 자신을 어린 동생이라 생각할 뿐.
철없는 귀족가의 아가씨라고 생각할 뿐.
정령들이 다가와 그녀의 슬픔을 위로해 줬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녀의 슬픔을 위로할 순 없었다.
그리고 그날, 그녀는 첫사랑을 보내 주었다.
* * *
쿠궁!
쿵쿵!
라인하르트 왕국의 수도 리든 시티에 모인 수많은 국민들은 하늘을 수놓는 엄청난 양의 폭죽에 열광했다.
폭죽은 쉴 새 없이 터졌다. 그리고 그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하늘은 시끄러웠다.
국민들에게는 이날이 참으로 축제와 다름이 없었다.
"장관이로군."
레더린이 폭죽을 보며 한마디 하자 찰트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에휴, 전하도 너무하신 것 아닙니까? 아무리 그래도 전하께서는 제왕이십니다. 제왕의 국혼이 고작 폭죽놀이 따위에나 휘둘리다니요. 고작 준비 기간 십 일로는 국혼이 너무 작지 않겠습니까?"
"그분께서는 그 어느 것도 원하지 않았다. 왕비마마와 백성들이 즐겨 볼 수 있는 광장에서 하신다는 걸 보니 말이야."
찰트는 입맛을 다셨다.
"차라리 이럴 줄 알았으면 국혼 얘기는 꺼내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개국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나라에 이런 성대한 축제가 생기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그리고 전하께서는 포부가 있지 않으신가? 나라를 재건하기는 했으나, 지금 이 땅은 예전 대제국 때에 비하면 너무 작다. 고작 공국 크기라니……."
"전하께서 말씀하시길 이번 국혼이 끝나고 나면 곧바로 영토 확장 전쟁에 돌입한다 하셨습니다."
"그렇겠지."
"프라스 왕국은 이미 쇠약해진 작은 나라에 불과하다 합니다. 그쪽 귀족들도 하나 둘 슬금슬금 타국으로 자리를 옮겨 가고 있으니 남은 귀족들도 얼마 없다는 군요. 병사들을 긁어모아야 2만이 채 못 된답니다."
레더린은 코웃음을 쳤다.
"흥! 그러고도 아직까지 잘도 살아남았군."
"대외적으로 프라스 왕국은 라인하르트 왕국의 적대국이니까요. 라인하르트 왕국은 개국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국가에 불과하지만, 본국을 건드릴 만한 곳은 펠타온 제국뿐입니다. 그 누가 국왕전하가 지키고 계시는 이 나라의 적을 건들겠습니까?"
"그것도 그렇군."
레더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십니까?"
찰트가 묻자 레더린은 손을 휘휘 저었다.
"곧 있으면 이 나라의 제왕께서 국혼을 하시는 날이 아닌가? 멀리서나마 구경하고 싶군."
"공작께서는 따로 귀빈석이 있을 겁니다."
"전하께서 누누이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평민과 귀족은 다를 바가 없다고. 나 또한 평민의 방관하는 자세로 보고 싶군."
레더린이 그렇게 사라지자 찰트는 한숨을 쉬었다.
"저분도 참으로 사서 고생하시는군. 참으로 웃긴 사람들뿐이라니까!"
타국에서 수많은 귀빈들이 찾아와 선물 공세를 펼쳤다. 물론 이안에게도 많은 선물이 돌아갔지만 무엇보다 많은 손들이 오고 간 것은 세리아였다.
"리비아 남작님께서 보내신 것이에요."
로쉘의 말에 세리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이런 식으로 받은 선물만 해도 창고를 꽉꽉 채우고도 남을 정도였다.
"로쉘, 앞으로 저에게 오는 모든 선물들은 평민들에게 골고루 나눠 주고 귀족 분들에게는 감사하다고 전해 주세요."
"예! 아가씨."
세리아는 분을 찍어 바르고 수십 벌의 드레스를 내미는 시녀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것들을 대체 언제 다 입어 보지?'
한눈에 보아도 상당한 고가임에 틀림없다. 저런 드레스가 수십 벌이라니!
모두 이름이 고명한 디자이너들이 제작했으니 성에 안 찰 리가 없었다. 모든 드레스가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웠고, 마음에 들었다.
"마마! 마마께서는 어느 것을 입어도 아름다우세요."
"그, 그런가요?"
세리아가 곤란하다는 듯이 말하자 시녀들은 자기들끼리 깔깔대며 좋아했다.
"정말이죠! 그런데 너무 아름다우시다 보니 어떤 걸 입어야 제일 아름다울지 모르겠어요."
그러다 갑자기 시녀들이 울상을 지었다.
"어떤 것이라 해도 괜찮아요……. 그보다 이렇게 되면 식이 늦을 것 같은데."
"그럼 마마께서 하나 골라 보시는 건 어떠세요?"
"으음……."
세리아는 가슴 쪽에 사파이어 보석이 번쩍이는 드레스를 들어 올렸다. 라인하르트 왕국의 국색이 푸른색이다 보니 사파이어가 너무도 마음에 들었다.
"이걸로 하겠어요."
세리아는 입고 있던 드레스를 벗으며 자신이 고른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그러자 너무 아름다운 여인이 거울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세리아 그 자신도 너무 놀라울 정도였다.
"로쉘. 제 모습이 보이나요?"
로쉘 또한 너무 아름다운 세리아의 모습에 멍하니 입을 열었다.
"여신 같으세요, 여신……."
"그, 그렇군요."
세리아는 드레스 밑단을 잡고 종종걸음으로 테라스로 나가 광장에서 기다리고 있는 수만의 인파를 보며 탄성을 내뱉었다.
"와아! 저, 저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왕비마마의 국혼을 축하하러 온 것이지요."
"나 너무 떨려요."
"잘할 수 있으실 거예요. 왕비마마잖아요, 이젠."
"왕비……."
국모의 자리.
그녀는 자신이 잘 해낼 수 있을지부터 걱정했다. 이 많은 사람들, 그리고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많은 사람들을 과연 자신이 잘 이끌 수 있을지.
"이 자리는 왕비마마, 그 이외엔 누구도 될 수 없어요. 자! 이제 나가요. 곧 국혼식이 시작될 것 같으니까요."
"그래요, 로쉘."
* * *
이안은 자신의 팔뚝을 바라보았다.
왼쪽 팔뚝에 그려진 여신.
그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여신의 얼굴은 세리아와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그녀는 정말 아름다웠다.
이 세상에 강림한 그 어떤 여인보다도. 보진 못했지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종족이라는 엘프도 그녀의 외모에는 발끝도 따라오지 못할 거라 장담할 수 있었다.
"나에게 여신이 있다면 그건 바로 너일 거야, 세리아."
부케를 들고 다소곳이 서 있던 세리아가 웃음을 터트렸다.
"푸훗! 웃으라고 한 소리지?"
그녀는 이안의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쿡쿡 찔렀다.
이안은 옆구리를 부여잡으며 살짝 피했다.
그의 눈빛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피식 웃었다.
"왜 웃는 거야?"
"이렇게 예쁜 여자가 오늘부터 내 부인이 된다고 생각하니까 절로 웃음이 나오는 걸 어떻게 해?"
"이게!"
그녀는 부케를 높이 들어 올렸다. 이안은 엄살을 피우며 눈을 감더니 살짝살짝 그녀를 피했다.
"흥흥! 오늘은 이만 봐줄게. 나도 좋은 날이고 하니까."
"하하핫!"
이안은 계속해서 웃음을 터트렸다.
"너도 이제 한 나라의 왕이잖아. 좀 체통을 지키란 말이야."
"왕이 별건가?"
"왕은 그 나라의 지존의 자리란 말이야. 아주 고귀한 자리다 이거지."
"왕도, 평민도, 노예도 모두 똑같고 평등한 사람이거늘."
"너처럼 생각하는 왕은 이 세상에 너 하나뿐이야."
이안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칭찬이라 생각해도 되지?"
"푸훗! 맘대로."
이안은 정말 기분이 좋았다.
"정말 결혼하게 되는데 호칭이라도 바꿔야 하지 않을까?"
갑자기 세리아의 얼굴이 붉어졌다.
"으응?"
"우리도 남들처럼 알콩달콩 살려면 호칭이 바뀌어야 되잖아. 어때?"
"새, 생각해 볼게. 아직은 좀…… 아악!"
이안이 세리아의 볼을 쭈욱 늘렸다.
"이젠 가지 않을 거야, 아무 데도. 알았지?"
"아악! 노, 놓고 말하란 말이야! 이 바보!"
찰트의 생각보다는 소소한 감이 있었지만 수만의 국민들이 바라보는 이 국혼은 정말이지 성대하다고 봐야 했다.
이안과 세리아는 제단에 올라 신관의 축언과 함께 축복을 여러 차례 받았다.
이안은 라인하르트 왕국의 왕으로서 여신에게 기도를 했고, 세리아 또한 여신에게 기도를 했다.
라인하르트 왕국의 국혼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두 사람이 한 사람이 되었다는, 즉 부부가 되었다는 신관의 말이 끝나자 국민들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신혼여행이라도 가야 되는 거 아냐?"
"푸훗! 왕께서 정말 못하실 게 없으시군요."
이안은 헛기침을 했다.
"흠흠! 그렇지. 부인과 결혼을 하였으니 이제 부인은 왕비가 되었구려."
조금 어색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세리아는 웃음꽃을 피웠다.
그런 과정을 멀리서 쳐다보며 초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여인이 있었는데, 바로 로이니스였다.
그녀는 귀빈석에 앉지 않았다. 몰래 평민들과 뒤섞여 그들을 축하해 주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레더린과 눈이 마주쳤다.
"로이니스 양……."
로이니스는 씁쓸하게 웃었다.
"레더린 공작 각하……."
"축하 사절단과 같이 오신 것이 아니십니까?"
"아뇨. 전 정말이지 여행을 좋아해요. 그래서 어쩌다 보니, 어쩌다 보니 이곳에 도착한 것뿐이에요."
"……."
레더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로이니스가 얼마나 이안을 생각했는지 그는 알고 있었다.
"전하께서는 당신을 잊지 않으실 겁니다."
"정말이에요. 그냥, 어쩌다 보니 도착한 것뿐."
"전하께 당신이 왔었다는 것은 비밀로 하겠습니다."
"그래요, 공작 각하. 고마워요, 후훗!"
로이니스는 슬픔을 잊고자 한 것인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데 그녀의 눈엔 눈물이 맺혀 있었다.
"다 떨쳐 낸 것 같은데 너무 아파요. 너무 아파서 죽을 것만 같았어요."
레더린은 그녀에게 아무 조언도 해 주지 못했다.
그는 소드 마스터일 뿐.
사람의 마음을 조정해 주는 마법사도, 그렇다고 정령사도, 아무것도 아니었기에.
"여행으로 오신 거라 하니 편히 쉬었다 가십시오, 로이니스 양."
"감사해요, 공작 각하. 그럴 거예요. 앞으로 쭈욱, 자주 올 거예요. 이곳은…… 다신 잊지 못할 것 같으니까요……."
"예……."
레더린은 입을 다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