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55장 모든 것을 얻는 힘 □
그랜드 마스터와 소드 마스터 두 명.
분명 이 순간만큼은 지상 최고의 파티라고 자부할 수 있지만, 애석하게도 그들의 검은 그랜드 마스터 한 명의 창을 막아 내기에 급급했다.
소드 마스터 두 명이 집중적인 공격을 막아 내면 그랜드 마스터는 가끔씩 공격을 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창을 가진 그랜드 마스터는 뒤에 눈이라도 달렸는지 사방의 공격을 가볍게 막아 내거나 피해 냈다.
"헉! 헉! 헉!"
이프 후작은 죽을 맛이었다.
꿈에도 그리던 그랜드 마스터와의 대결이었지만, 이 순간이 매우 끔찍했다. 옆을 슬쩍 바라보자 라이브 후작도 별반 다를 바가 없는 듯 보였다.
"음!"
이프 후작은 자신의 앞으로 날아오는 검기 하나를 온 힘을 다해 막아 냈다.
카카캉!
이프 후작은 두 걸음 물러났다. 고작 검기 하나였다.
제레브의 창에서는 수백 개의 검기가 나오는데 그것에서 고작 하나를 간신히 막아 낸 것이다. 두 개는 어려웠다.
그나마 하나를 막은 것도 앞의 그 공격을 막아 내는 이안이라는 젊은 지도자 때문이었다. 거의 그가 검기를 막아 내는데 가끔씩 뛰쳐나오는 한두 발은 자신들이 막거나 피해 냈다.
'괴물들의 대결인가!'
시간은 2분을 경과하고 있었다. 하지만 식은땀으로 이미 등이 흠뻑 젖었다. 수십 년을 갈고닦은 체력도 단 5분을 막아 내는 데 버거워 하고 있었다.
'빨리!'
이프 후작은 빨리 이안이 제레브에게 반격하길 기다렸다.
라이브 후작은 묵묵히 검을 사용했다.
그리고 이프 후작을 힐끔 쳐다보더니 그의 버거워 하는 모습에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 느꼈다.
자신도 검기 하나를 막아 내는 것이 너무도 힘든데 이프 후작이 손쉽게 막아 냈다면 그건 분명 자신의 경지가 낮다는 것일 테니까 말이다.
'이프 후작과 나의 경지는 그리 많이 차이 나는 것 같지 않군.'
하지만 그랜드 마스터의 검기는 설사 소드 마스터 최상급이라고 해도 막아 내기에는 힘들 것이었다.
'헌데…….'
수백 개의 검기와 자연의 법칙을 무시하고 쏟아지는 번개는 앞에서 모두 걸러졌다.
그것도 단 한 사람한테서 말이다.
'빌어먹을!'
라이브 후작은 5분을 버티기 힘들어서 욕을 내뱉는 게 아니었다.
이 순간만큼은 무능력한 자신을 욕하고 있었다.
'5분을 버텨 준다고 했지, 공격을 안 하겠다고 한 건 아니야!'
'쳇!'
마인이 된 귀창!
만약 그가 지치지 않았다면 귀창의 공격을 막는 것도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이안은 간신히 소드 마스터들의 도움으로 그와 비등하게 싸울 수 있었다.
이안은 뒤로 빠졌다.
그런데 갑자기 라이브 후작이 앞으로 쏜살같이 뛰쳐나가는 것이다.
'위험해!'
이안은 차마 입으로 내뱉지 못했다. 그만큼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라이브 후작은 허공으로 2미터쯤 뛰어오르더니 길게 뻗은 오러 블레이드로 귀창의 후면을 공격했다. 아무리 그랜드 마스터라 해도 오러 블레이드에 베이면 살아남을 수 없었다.
하지만 괜히 그랜드 마스터가 아니고, 마인이 아닌 것이다. 마인의 생존 본능은 동물의 감각을 능가한다.
갑자기 반탄강기와 호신강기 여러 겹이 후면으로 쳐졌다.
"크악!"
라이브 후작이 비명 소리와 함께 뒤로 날아갔다.
반탄강기에 밀려 오러 블레이드의 힘을 그대로 자신이 받은 것이다. 물론 베였다는 것이 아니라, 그 힘을 되돌려 받은 것에 불과하지만 워낙 호기스럽게 달려든 것이었기 때문에 데미지도 컸고 방심도 컸다.
"쿨럭!"
라이브 후작은 곧바로 선혈을 울컥 내뱉었다.
그리고 소매로 입을 쓰윽 닦아 내더니 검을 지지대 삼아 후들거리는 다리를 진정시키며 일어났다. 귀창도 그에게 더 이상 관심을 가져 주지 않았다.
"라이브 후작! 괜찮소?"
이프 후작이 염려되는 말투로 묻자, 라이브 후작은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버, 버틸 만은 하오."
"쉬어야 할 것 같소!"
"괜찮소. 아직 한두 번쯤은 괜찮소."
하지만 얼굴을 보니 영 아니었다. 더 이상 검을 들기에는 역부족인 듯싶었다.
이안은 인상을 찌푸렸다.
앞으로 5분까지는 2분도 채 남지 않았다.
소드 마스터가 한 명 당했다. 이제 남은 한 명마저 당한다면 귀창을 죽일 방법이 없었다.
'어떻게 하지?'
차근차근 회상을 하며 방법을 탐구했다.
하지만 중원에서도 현경을 죽였다는 얘기는 들어 본 적도 없다. 이야기 속에서나 존재하는 법.
하물며 현경을 넘어 마인이 되어 버린 귀창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이라고?
'무공이 높은 자는 이기기 힘들다. 하지만 그보다도 강한 자가 있지.'
'뭐죠?'
'마음이 굳은 사람이다. 아무리 강한 마인이라 해도 마음이 심히 곧지 못하면 그건 수많은 약점을 드러내는 법이지.'
'약점을 어떻게 찾아내는 건데요?'
'글쎄? 후후후!'
귀창을 보면 생각나는 것이 죽어 간 청성파 사람들이었다.
어려서부터 자신을 가르쳐 주신 청성파 장문인 천유한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애달픔.
수많은 과거들이 떠오르지만 그것들 중에서도 천유한 장문인과 대화를 나눈 것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약점, 약점을 찾아야 한다!'
이안은 정신을 집중했다. 모든 내공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그 내공을 전신에 집중했다가 들고 있는 한 자루의 검에 주입하기 시작했다.
우우우우웅!
오러 블레이드가 폭주라도 하듯 미친 듯이 떨기 시작했다.
'검은 나의 또 다른 팔일지어니. 검과 나는 하나이다.'
신검합일의 경지.
전설 속에서나 존재하는 그런 지고한 경지.
쾅!
이안의 오러 블레이드가 갑자기 터져 나갔다.
무(無).
이안의 검에는 아무것도 맺히지 않았다. 그 어떤 기운도 검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안은 귀창을 상대로 한 치의 밀림도 허락하지 않았다. 오히려 갑자기 압도하는 모습까지 보여 주었다.
그의 애검 로열은 귀창의 오러 블레이드도, 검환도 모두 가볍게 막아 내었다.
이안의 표정은 짜증스러움이 아닌 웃음으로 뒤바뀌었고 판세는 뒤엎어졌다.
'검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팔의 또 다른 연장선!'
'제국의 황제는 어떠한 자리인가?'
'만백성의 아픔을 어루만져 줌은 물론이거니와, 부정한 세상을 뒤엎고 모든 이들이 평안하게 지낼 수 있게 그들을 위해 존재하는 나라의 기둥!'
'왜 황제가 되려 하지?'
'모든 이들이 원하니까. 아니, 이 모든 순리가 나를 원하고 있으니까. 자연도, 백성도, 세상도, 그 어느 것조차도.'
'그 모든 것들이 너를 원하지 않는다면 넌 황제가 되지 않을 생각인가?'
'글쎄? 후후!'
이안은 미묘한 웃음을 지었다. 귀창과의 싸움도 자신이 황제가 되기 전 모든 것을 준비하는 순리였다.
필연이었고, 운명인 것이다.
푸악!
이안의 검이 귀창의 심장을 꿰뚫었다.
"끄륵, 끄륵! 끅! 끅!"
귀창은 눈이 하얗게 뒤집어 까지더니 심장을 부여잡았다.
"사, 살려 줘……!"
마인이 된 그조차도 목숨을 구걸하고 있다니.
라이브 후작과 이프 후작은 미친 그랜드 마스터를 때려잡은 이안의 무위에 감탄했다. 초반에는 자신들이 도와줬다고 해도 후반에 들어서는 혼자서 이기지 않았는가?
'새로운 신성의 탄생이로다!'
'대륙십강 지존의 자리가 뒤바뀌었다.'
이안은 무심한 눈길로 귀창의 목을 단숨에 날렸다.
"그 더러운 영혼으로 죽어 간 이들에게 용서를 빌어라."
철컥!
이안은 검을 쑤셔 넣어 버렸다.
* * *
대륙에 부는 대파란!
킹 제레브가 죽었다!
이프 후작과 라이브 후작으로 인해 간신히 제레브가 마인이 되어 미쳐 날뛰었다는 사실은 묻혔지만, 정보력을 갖추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하나 일반인들에게는 전혀 알려진 사실이 아니었다.
7만의 군대를 시야에서 멀어질 때까지 물리는 이안의 모습.
그리고 혼자 당당히 1만과 제레브를 앞에 두고 서 있는 이안.
뿐만 아니라, 1만을 혼자서 격파하고 대륙 지존인 제레브 대공을 격파하여 프라스 제국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었다는 사실.
그건 남자들의 로망스요, 여인들의 낭만에 불을 피우기 충분했다.
제레브와 이안의 한판 대결에, 제레브의 손을 들어 주던 사람들도 고개를 내저었다.
"킹 제레브 대공이 죽었다니! 프라스 제국으로서는 뼈아픈 손실이겠군!"
"뼈만 아프겠나? 최고 지존이 죽었으니 프라스 제국에서 어떠한 대책을 강구할지 정말 궁금할 지경이야! 난 오히려 잘됐어! 에라이, 프라스 제국 놈들. 언젠가 한번 크게 당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러게 말이야! 그동안 프라스 제국이 얼마나 많은 나라들을 핍박했는가? 내 더러워서 그 로엔그람 후작의 군대로 입대나 할까 생각 중이네."
"푸하하하! 그게 어디 쉬운 줄 아나? 그의 군대 일원이 되고 싶어서 찾는 젊은이들이 수십만 명이 넘는다고 들었네. 자네같이 배나 나오고 턱에 수염이 가득하면 졸병으로도 안 써 준다고. 아나?"
"에라이! 그건 그렇군. 어찌 됐든 마시자! 언제 또 이런 말을 듣는단 말인가?"
"그래! 그래! 프라스 제국 놈들! 아주 잘됐군!"
쾅!
그라나이드 황제의 입에서 피가 왈칵 쏟아졌다. 신관들이 달려가 그의 몸을 살폈다.
"폐하! 폐하께서는 요 며칠간 잠 한숨 못 주무셨습니다. 어서 어전으로 드셔 충분한 숙면을 취한 뒤에 국사를 돌봄이 맞사옵니다."
간신들이 허리를 조아리고 주청을 올렸다.
그들도 제레브 대공이 이렇게 손쉽게 패배할 거라곤 상상하지 못한 것이다.
"킹 제레브 대공 각하의 죽음은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나, 벌써 로엔그람 후작의 군대는 그 세를 불리며 오합지졸에 불과했던 군대를 정예병으로 만들었사옵니다. 먼저 그들을 토벌하는 것이 마땅하옵니다."
"아니, 제레브 대공 각하도 못한 일을 어찌하란 말이오?"
"그러니 하루빨리 대책을……."
쾅!
다시 한 번 그라나이드 황제가 거세게 용상을 때렸다.
"조용! 조용하시오!"
그는 머리가 아픈 듯 이마에 손을 짚고 고개를 휘휘 저었다.
"이만들 물러가시오! 나 또한 이대로 다리나 펴고 잠을 취할 생각은 없소. 귀하들은 내일 다시 회의를 열 것이니 오늘 충분히 대책을 강구하여 오시오."
"알았사옵니다, 폐하!"
황제 그라나이드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대전을 떠나자 귀족들이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나 몇몇 파벌끼리 이야기를 나누며 문밖으로 빠져나갔다.
"저하!"
프라스 제국 제1황자.
헤디온.
어려서부터 총명하기 그지없으며, 다음 대 황제로 점찍힌 인물.
프라스 제국은 아들이 없고 황녀들뿐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황제의 자리는 그에게로 향했다.
헤디온은 고개를 뒤로 돌렸다.
얼굴이 약삭빠르게 생겨서는 있는 듯 없는 듯한 남자.
실제로 귀족들 중에서도 그의 이름을 들어 보지도 못한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하지만 헤디온은 이자의 무서움을 알고 있었다.
앞에 내세운 사람을 음지에서 조율하며 각자 취할 대로 이득을 취하는 그런 자였다.
얼굴만큼이나 머리가 약샥빠르기 때문에 헤디온은 그에게서 신뢰를 줄 생각이 없었다.
"무엇이오, 가그론 자작."
"오늘 회의가 시작되기 전에 제가 구축한 정보력에서 심상치 않은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심상치 않다니?"
"펠타온 제국이 로엔그람 후작이 뚫어 놓은 길을 그대로 통과하며 그들 세력과 합세할 생각인 듯합니다."
"아니, 이지스 대평원을 막아 놓지 않았소?"
"겨울 날씨가 풀리면서 펠타온 제국의 비밀병기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키메라들이 손도 쓰지 못하고 당한다고 합니다."
"아니, 어떠한 기운이기에?"
"신성력이라고 합니다."
"뭐, 뭣이? 신성력?! 정말이오? 신성력을 사용하여 키메라를 잡는단 말이오?"
키메라들에게 약점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신성력이다.
흑마법사들에게 재탄생된 생물들이니 신성력 디바인 포스에는 당할 바가 못 되었다.
"그럼 이제 어찌해야 하오?"
헤디온 황자가 걱정스럽다는 듯이 쳐다보자 가그론 자작이 입가에 씨익 웃음을 지었다.
"현재 황제 폐하께서는 대책을 강구하지 못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안 좋은 소식만큼이나 좋은 소식이 저하에게 있습니다."
헤디온 황자의 얼굴이 갑자기 밝아졌다.
"오, 그것이 무엇이오? 자작!"
"저희 프라스 제국에 몸담고 있는 나라들에서 각자 대륙십강의 고수들을 한꺼번에 내놓아 지금 모든 이들에게 회자가 되고 있는 로엔그람 후작을 암습한다는 겁니다."
"오오! 로엔그람 후작 그자를 말이오?"
입을 벌리며 좋아하던 헤디온 황자의 얼굴에 갑자기 어둠이 드리웠다.
"하지만 로엔그람 후작은 제레브 대공조차 죽인 괴물이올시다. 그런데 대륙십강들로 되겠소?"
"그런 소문을 믿으시다니요? 게다가 본국에서 5명의 소드 마스터가 나서기를 원하고 있으니 용빼는 재주가 없는 이상 그들의 손을 벗어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오오! 자작, 굉장하오!"
물론, 말뿐이었지만 가그론 자작은 입가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황공하옵니다, 저하!"
"프라스 제국을 멸망시키기 위해서는 하나하나 차근차근 보급로를 모두 끊어 버리는 게 좋지."
프라스 제국 최고의 밀 수확 지대.
로마프.
로마프에 땅을 가지고 있으면 누구라도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소문까지 돌 정도로 이곳 밀의 가격은 비싸면서도 품질이 특등상급이었다.
모든 나라의 귀족들이 이곳 로마프의 밀을 먹는다고 봐야 할 정도였다.
그리고 로마프에서 얻는 수익금의 대부분이 수도로 올라간다. 로마프가 대륙에서 흘러나오는 밀의 30%를 책임지고 있으니 엄청난 수익금을 벌어들인다는 증거.
이안의 부대는 로마프를 공격하였다.
밀은 건드리지 않고 그곳을 지키는 병력이나 시장을 잡아 족쳤다.
"아이고! 살려 주십시오. 저에게는 처랑 노모가……."
처량하게 이안의 다리를 붙잡고 눈물 콧물 다 흘리는 대머리 남자를 보며 이안이 다리에서 그를 떼어 냈다.
하지만 그 대머리 남자는 계속해서 이안의 다리에 매달렸다.
이안은 할 수 없이 그에게 입을 열었다.
"더 이상 질질 짜면 너의 가족을 잡아 네 눈앞에서 찢어 죽이겠다."
"꼴깍!"
남자의 입이 다물어졌다. 이안의 협박이 성공한 것이다.
"넌 계속해서 시장 직을 맡으면 된다. 하지만 지금까지 운송 라인이 프라스 제국을 통해서였다면 이제는 슈레이더 왕국이다."
"평생 말입니까?"
"아니, 나중에 다시 말해 주지."
"아, 알았습니다."
로마프 시장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고마움을 표현했다.
이안은 로마프를 시작으로 프라스 제국의 모든 유통 경로를 끊었다.
그리고 프라스 제국은 어느 때보다도 위험한 시기를 맞고 있었다.
대륙십강의 자리는 결코 검사들만 올라가는 것은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창술의 이노센트나 제레브도 있었고 그 외에도 7서클 마스터인 마탑주 주나일 현자도 있다. 마탑주 주나일 현자 외에도 흑마법으로 주나일 현자와 어깨를 나란히 견주고 있는 마법사라면 벨턴이 있었다.
벨턴과 주나일 현자는 어려서부터 앙숙과 같은 관계였는데, 대륙에서는 주나일 현자의 경지가 조금 더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모르는 자들의 말일 뿐.
실제 주나일 현자와 벨턴의 경지는 거의 엇비슷했다.
강력한 흑마법은 백마법의 힘을 잡고도 남았기에 경지가 살짝 낮은 벨턴이라 해도 주나일 현자에게 결코 밀리지 않은 것이다.
프라스 제국과 펠타온 제국의 전쟁이 일어나는 날.
주나일 현자는 그 어떤 편에도 서지 않는 중립을 고수했지만, 마탑이라는 세력이 없는 벨턴으로서는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프라스 제국 측에 붙을 수밖에 없었다.
"낄낄. 원래 펠타온 족속들은 기사도만 추구하니, 나 원 참. 그에 비하면 프라스 제국은 천국이지, 천국! 그 모든 것을 인정해 주는 나라이니까 말이야."
"이 아둔한 친구! 프라스 제국은 자네에게 그 힘만을 원할 뿐이네. 당장 그곳과 손을 끊게!"
주나일 현자는 그래도 그를 향해 걱정하는 투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벨턴은 절대로 뜻을 굽히지 않았다.
"오히려 잘됐어! 이번에 로엔그람 후작이라는 그 애송이만 처치한다면 프라스 제국 측에서 흑마법사들을 위한 마탑을 세워 준다더군!"
"뭐, 뭣이? 마탑?"
흑마법사들의 마탑이 세워진다면 현재 백마법사인 주나일 현자와의 번복은 피할 수가 없게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낄낄! 잘됐어. 흑마법사들이 서러움을 받던 시대는 끝났다. 우리들은 프라스 제국과 영원한 동맹을 이루며 흑마법천하를 이루게 될 거야!"
"후회하게 될 걸세!"
"후회? 낄낄낄. 그래, 어디 후회가 어떤지 보자꾸나. 마탑이 세워지면 천하에 마도시대가 도래했음을 공표할 것이니라!"
주나일 현자는 미쳐 있는 그를 붙잡을 수 없었다.
벨턴은 비밀리에 회의에 참석했다.
그것은 프라스 제국에 몸담고 있는 왕국들의 대륙십강 고수들이 모인 자리였다.
벨턴을 포함해서 위명이 자자한 대륙십강 급 고수가 셋이나 모였다.
"우리가 여기 모인 이유는 다들 알고 있을 거라 생각되오."
대륙십강의 한 명인 돌프만 후작이었다. 그는 대검을 이용하는 중검을 중시하는 자였다.
벨턴이 코웃음을 쳤다.
"흥! 그딴 꼬맹이 죽이려고 우리들이 이런 같잖은 대화 따위를 해야 한다니. 언제부터 우리들이 이리도 약했다는 건가?"
"벨턴 경! 벨턴 경도 눈이 있고 귀가 있는 이상 보거나 듣지 않았소? 이미 그는 킹 제레브를 죽이고 대륙십강 최고의 반열에 오른 자요. 물론, 전부를 믿기는 어려우나 킹 제레브가 그와 대결을 하고 죽은 것은 사실이오."
"낄낄. 내가 검사들이 선이나 긋고 있는 그랜드 마스터나 소드 마스터 따위한테 밀린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벨턴의 말에 돌프만 후작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지금 벨턴의 말은 기사들을 무시하는 처사였다.
"벨턴 경! 그대가 아무리 대륙십강이라 해도 그런 언사는 참을 수 없소이다!"
벨턴은 눈썹 하나 꿈쩍이지 않았다.
"낄낄. 금속에나 의지하며 사는 네놈에게 내가 밀릴 리가 없지."
"벨턴 경!"
돌프만 후작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벨턴도 자리에서 일어나 한 손에 파이어 볼을 만들어 냈다.
그때였다. 갑자기 뒤에서 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만! 그만들 하시게! 어찌 같은 목적을 도모하고 있는 사이끼리 서로 싸우기를 원한단 말인가?"
대륙십강 내에서 나이가 제일 많은 노인네였다. 그의 나이는 벌써 100살을 넘어섰다는 말도 많았다.
돌프만 후작은 이안은 제외하고는 대륙십강 내에서 제일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이 노인의 말에 꿈쩍도 하지 못하고 곧바로 자리에 앉았다.
룰브 공작!
돌프만 후작은 사실 이 룰브 공작을 무신처럼 여기며 커 왔던 것이 사실이었다. 어찌 그런 자의 말을 듣지 않겠는가.
"공작님, 어서 오시지요."
"그래, 돌프만 후작도 오랜만이로군."
벨턴도 파이어 볼을 꺼뜨리고 그대로 자리에 앉았다.
돌프만 후작 따위야 벨턴이 이길 수 있다고 장담하지만, 룰브 공작만큼은 아니었다.
디그라실 공작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최강의 남자가 바로 룰브 공작이 아니었던가.
'끙. 이 노인네의 경지는 대체 알 수가 있어야지, 원…….'
벨턴은 속병을 앓으며 끙끙거렸다.
그때 그의 안색을 살핀 룰브 공작이 말을 걸어왔다.
"벨턴! 얼굴이 왜 그런 겐가?"
벨턴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아니올시다. 그건 그렇고 대체 그 애송이는 어떻게 족칠 거요? 계획이나 들어 봅시다."
"방법이 있겠는가? 혼자가 되기만을 기다렸다가 덮치는 수밖에 없지."
벨턴이 갑자기 클클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이번에 새로 개발한 흑마법이 하나 있는데, 그걸 사용해 보는 건 어떻겠소?"
사악한 흑마법사의 말인지라 돌프만 후작은 반기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룰브 공작은 호기심 섞인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오! 그거 참으로 반가운 소리군."
그때, 벨턴이 단호히 외쳤다.
"단! 애송이 놈의 목숨은 내게 주시오. 크흐흐! 오랜만에 본좌를 움직이게 한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될 거 아니겠소?"
"마음대로 하게."
룰브 공작은 손쉽게 허락했다.
돌프만 후작도 사람을 죽이는 일이 그리 좋은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아니라 남의 손에 죽는다면 마음이 한결 편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를 잡기 위해 덫을 준비해야겠군!"
벨턴이 눈을 반짝였다.
"나에게 좋은 생각이 있소."
"이곳은 졸트란 평원. 과거 라인하르트 대제국의 땅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이틀만 걸으면 거대한 광산지가 나오는데, 라인하르트 대제국은 그곳에서 나오는 철로 철갑부대를 만들어 대륙을 호령했습니다."
찰트는 그때가 그리운지 잠시 회상의 눈길로 돌아갔다.
이안은 찰트의 말을 경청하며 두 눈을 반짝였다.
과거 라인하르트 대제국의 국민들이 다녔을 길을 상상했다.
"좋은 곳이야. 다시는 이곳을 뺏기고 싶지 않을 정도로……."
바람에 휘날리는 황금빛 물결.
이안은 잠시 눈을 감았다.
"이곳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는 황제를 죽여야 합니다."
"그렇겠지."
"앞으로 황궁까지는 보름 거리도 남지 않았습니다. 귀족들 대부분이 저희 군대를 두려워하는 모양입니다. 마중조차 없는 걸 보면 말입니다."
마중이 없다?
그것은 한편으로 영지를 버리고 도망갔다는 것을 의미했다.
"프라스 제국은 그런 곳이겠지. 뒤로는 야비한 짓을 일삼고 약한 자를 핍박하지만 강한 자에게는 머리를 숙이는……. 귀족들만 봐도 나라를 볼 수 있으니까."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전하."
"그래. 프라스 제국만 잡는다면 펠타온 제국이 걸고 나올 테지만, 그들은 두렵지 않아."
"아무도 전하를 건들 수 없습니다."
"그래, 건들 수 없지. 그래서 하는 말인데, 프라스 제국의 황제를 보고 싶단 생각이 들어."
찰트가 놀라서 말했다.
"독대로 말입니까?"
"그래."
이안은 무의미하게 말했지만, 파장은 컸다.
"그라나이드 황제는 전하를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설사 황실이라고 해도 날 건들 존재는 없어."
"대륙십강의 최고인 제레브 대공이 죽었습니다. 그들도 귀가 있는 이상 경계를 철저히 했을 것입니다."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아. 설사 그랜드 마스터라 해도……."
그때, 에반이 갑작스레 다가왔다.
"마스터! 큰일입니다."
"큰일이라니?"
다급해 보이는 에반의 태도에 이안의 얼굴이 굳어졌다.
"오늘 아침 로이니스 양이 사라졌다는 통보가……."
"뭣이?"
찰트가 놀랐다. 이안이 얼마나 로이니스를 소중히 여기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그래, 그분의 종적은 어디로 갔는가?"
"프라스 제국의 황실에서 주도한 듯합니다. 로이니스 양의 방을 탐색하던 많은 마법사들이 고위 급 흑마법의 기운이 느껴졌다 하니, 프라스 제국으로밖에 좁혀지질 않습니다."
한 왕국의 백작 가문으로 들어와 손쉽게 그녀를 납치했다는 것은 고위 급 마법사의 공간이동 밖에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잘됐군. 한번 보고 싶은 얼굴들이었는데 이런 식으로 마주하게 될 줄이야!"
이안은 허공으로 박차고 뛰어올랐다.
"레더린에게 말해, 여기 대기하고 있으라고."
"하, 하오나!"
"걱정 말라니까."
이안의 신형이 갑자기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