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51장 계략의 성공 □
용아천에서 청령에게 크게 당한 귀창은 같이 물에 쓸려 나갔다. 그래서인지, 갑자기 노인이 청령이라는 꼬마 놈에게 달려가는 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빛들이 눈앞을 가렸고, 눈을 떴을 때는 이상한 대륙에 홀로 떨어져 있었다.
귀창은 이곳이 말로만 듣던 서역이라고 생각했지만, 달이 두 개라는 사실에 소스라치게 놀라야 했다.
그렇다. 이곳은 다른 곳이다!
다른 세상!
귀창은 거의 1년간을 이곳 대륙어를 배우는 데 힘썼다.
중원의 언어보다는 이곳 언어가 아주 손쉬웠다.
그 후에 귀창은 이곳에서도 순수한 무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수없이 강자를 찾아 싸웠다. 경지는 높아져 갔고, 귀창에게는 칭호가 붙었다.
'킹!'
무위의 경지로서는 과연 왕이라 칭할 만했던 것이다.
프라스 제국은 그를 거두며 킹이라는 칭호와 함께 성까지 킹으로 내렸다. 그리고 그가 수십 년 후에 그랜드 마스터 역대 최고의 경지에 오르자 대공으로 추대하며 전쟁에서 수없이 많은 공을 세운 그에게 거대한 공국을 선물했다.
그리고 귀창은 수없이 많은 세월을 보냈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신을 이곳으로 보낸 놈이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엄청 젊은 모습으로 말이다.
'차원이동을……. 내가 수십 년이나 앞당겨서 했단 말인가?'
킹 제레브, 아니 귀창은 절대 잊을 수 없는 기억 창고에서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청성파 개새끼."
이안의 얼굴이 구겨졌다.
설마 이곳에서 귀창을 만날 줄이야!
그것도 그의 얼굴은 수십 년이나 늙어 보였다.
등에 매달린 창이 아니었다면 절대 알아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안의 얼굴은 곧 분노로 변했다.
"죽일 테다! 이 새끼."
"얼마든지!"
귀창도 빠르게 창을 내뻗으며 이안의 검에 마주쳤다.
그 둘은 순식간에 3합을 겨뤘다.
"으하하! 아직도 실력은 그대로구나."
퉁퉁퉁!
이안의 검에서 검환이 만들어지며 귀창을 여러 번 타격했다.
귀창은 가볍게 창으로 막아 내며 곧바로 이안에게 달려들었다. 이안은 차원의 검술을 이용하여 그의 뒤로 나타나 곧바로 차원의 검술 2번째 기술을 선보였다.
"디멘션 홀드! 어디 한 번 그 여유로운 표정을 유지할 수 있을지 두고 보자꾸나."
차원이 찢어지기 시작하면서 거대한 아가리를 벌리는 공간. 상대는 현경에 오른 그랜드 마스터다. 이안은 평소와는 다르게 대폭적인 내공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차원이 변형에 변형을 거듭하더니 한쪽만이 아니라 양쪽에서 귀창을 끌어당기는 문이 열렸다.
슈아앙!
"가소롭다!"
귀창은 자신의 창을 대지에 강하게 내리꽂았다.
쿠콰아앙!
"으아악!"
그의 일격에 데미지를 입은 지반이 몽땅 뒤집혀지며 둘의 대결을 주시하던 자들의 입에서 거친 비명 소리가 울렸다.
이안은 그 광경에 눈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나름 자신 있던 디멘션 홀드를 내공으로 부딪쳐 박살 내 버리는 것이다. 이안보다 내공이 적다면 절대 사용할 수 없는 기술 중에 하나였다.
"후작 각하!"
후퇴하는 기사들은 이안을 걱정하는 투로 바라봤다. 그들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킹 제레브!
"레더린!"
이안은 레더린을 부르며 곧바로 자리에서 허공으로 뛰어오르더니 와룡연쇄참을 사방으로 휘갈겼다. 후퇴하는 중에 총사령관이 이곳에 발이 묶일 수는 없다.
"큭!"
귀창은 손을 들어 올리며 가볍게 검기들을 내쳤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막지 못한 병사들은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졌다.
귀창이 짜증난다는 투로 곧바로 자리를 박차고 올라 주위를 살폈지만, 이미 이안의 신형은 홀연히 사라진 뒤였다.
'놓쳤군.'
'어찌 이런 일이!'
귀창의 내공을 볼 때 자신보다 한참 위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던 이안이다. 차원을 이동하는 과정에서 시간까지 같이 이동했던 탓인지 이안보다 수십 년이나 앞당겨서 도착해 있었다.
그가 수십 년 동안 강해지는 동안 이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절대 이길 수 없다.'
승부가 내공이나 무공의 고하로 나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안은 단정할 수 있었다.
귀창을 만난 순간부터 그의 심장은 격하게 아파 왔다. 이미 그에 의해 한 번 뚫렸던 심장이다. 그를 보자 몸 또한 미미하게 떨렸다.
두려웠다.
다시 그와 맞서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싸워야 한다.
그리고 이겨야 한다.
그것이 이안이 해야 할 일이었다.
* * *
"참으로 많이 컸어."
귀창은 조소를 머금으며 자신의 창을 내뻗었다.
창은 대지를 박살 냈다. 허공에 부딪히면 하늘을 울렸다.
그의 창의 대상은 단 한 명뿐이었다.
맡은 바 임무만 아니었다면 지금 당장에 한판 붙어 보고 싶었다.
얼마나 강해졌는지!
"하지만 다음이다. 두고 보도록 하지. 그때는 얼마나 강해졌을지 궁금하군. 으하하하!"
"야습 작전은 대성공으로 돌아갔습니다, 총사령관 각하."
찰트의 기쁜 얼굴에 미소가 지어지자 이안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물었다.
"적병의 피해는?"
"적병의 피해는 최소 3,000으로 잡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약 6개월 치에 해당되는 방대한 양의 식량을 잃었으니 보급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하하! 성공 중에서도 이런 명쾌한 성공은 처음입니다."
"우리 군 피해는?"
"기사 스물에, 병사 800입니다."
이안은 가볍게 한숨을 토해 냈다.
"안타까운 인재들을 잃었군."
"하지만 사령관 각하께서 처음에 말하시던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 주었고, 그들의 희생으로 인하여 지금 병사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합니다."
이안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그를 거짓말쟁이 노스라고 하던 병사들의 입이 어느 순간부터 꾹 다물어진 것이다.
"아직 전쟁은 끝이 난 게 아니다. 허나 병사들에게 똑똑히 일러 주어라. 현재 프라스 제국은 당장 굶어 죽을 것을 염려해야 된다는 사실을 말이야. 그들은 식량을 보급 받는 데 최소한 한 달은 걸릴 터. 경계를 철저히 하고 인근 모든 나무의 벌목은 물론, 그들이 먹는 물에 독을 퍼부어라 일러라."
"오오오오!"
찰트는 기막힌 이안의 작전에 탄성을 내뱉었다. 식량이 없는 그들로서는 물과 여러 가지 과일로 배를 채워야 할 것이다.
찰트의 머릿속에서 빠르게 계책들이 세워졌다.
"벌목한 나무들로는 목책을 단단히 지으라고 전해. 기사의 오러에도 부서지지 않을 만큼."
"알겠습니다!"
이안은 씨익 웃었다.
"이제 시작이야, 전쟁은."
"크윽! 리자드 자작!"
딜듀란 백작은 피눈물을 흘리듯이 그의 시체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리자드 자작의 머리통은 주변 기사들 말대로 터져 버린 듯 찾을 수가 없었다.
그의 장례식에는 수많은 병사들과 기사들이 애도의 물결을 흘렸다.
그만큼 소드 마스터의 죽음은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장례식이 끝나고 한시름 돌린 딜듀란 백작은 또 다른 문제점에 봉착했다.
"슈레이더 왕국의 더러운 야습 작전에 식량이 모두 타 버린 터라, 더 이상 버틸 만한 식량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보급부대는? 보급부대는 어찌한단 말이더냐?"
딜듀란 백작의 노성에 총관이 찔끔거리며 대답했다.
"한 달 후에나 도착할 거라고……."
쾅!
딜듀란 백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게 말이나 되는 줄 아느냐! 한 달 동안 무슨 수로 버틴단 말이냐?!"
"그래서 병사들을 풀어 근처 열매나, 채소, 그리고 주변 인근 마을에서 약탈하라 시켰습니다."
딜듀란 백작은 떨떠름한 기분으로 말했다.
"알았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나가 보거라."
"예, 사령관 각하."
총관이 나간 이후에도 딜듀란 백작은 더없이 화가 났다.
3일 후 딜듀란 백작의 귀로 이상한 보고들이 들어왔다. 갑자기 평민들로 구성된 수백 명의 사람들이 이지스 대평원 근처의 모든 나무들을 벌목하고 있는 것이었다.
"뭐라고?"
식량이 부족한 그들에게 나무는 훌륭한 자원이다.
그런데 어떤 겁 없는 평민들이 전쟁 와중에 벌목을 해 간단 말인가!
"책임자는 만나 보았느냐?"
"근처 마을에 살고 있는 평민들인데, 갑자기 병사들이 식량을 약탈해 가 당장 먹을 식량이 없어 나무라도 팔아 치운다 했습니다."
"크윽! 그게 수백 명이나 된단 말이더냐?"
"앞으로 계속 유입될 예정입니다."
"막아라! 그리고 그들에게 경고를 줘라. 더 이상 벌목을 하면 모두 죽여 버리겠다고!"
"하, 하오나 그럴 경우 국민들의 반발이……."
"닥쳐!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끄는 게 중요한 거야. 알아?"
"아, 알겠습니다."
"예상대로입니다, 사령관 각하!"
찰트가 기쁜 듯 웃어 보였다.
"뭐가?"
이안이 의외로 담담히 말했다. 그도 찰트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는 보고를 통해 알고 있었다.
"놈들이 벌목하는 평민들을 핍박하여 막고 있습니다."
"벌목한 나무들은 이쪽에서 모두 구입한다고 해. 그리고 그들에게 돈과 함께 독을 묻힌 식량을 주면서 다음번에도 병사들이 약탈을 한다면 그 식량들을 전하라고 하고. 찰트는 마법사들을 모아 인근 나무는 모두 화염 마법으로 태워 버려. 자, 레더린에게 시켜서 날랜 병사들과 함께 그들 식수에 독을 풀어 넣는 것도 잊지 말고."
"알겠습니다!"
"마을 주민들한테 반드시 그 식량은 건들지 말라고 단단히 엄포를 주는 게 좋을 거야. 죽인다고 협박해도 좋아."
"협박만 합니까?"
"그래."
"사령관님! 사령관님!"
총관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딜듀란 백작은 자리에서 놀라 자빠져 한참 후에나 머리를 문지르고 일어섰다.
"뭔 일이냐? 또!"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듯 그의 얼굴이 구겨졌다.
"평민들이 드디어 미친 모양입니다! 어제 저희가 그렇게 엄포를 주고 나니 모두 숲을 불태우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평민들이 맞느냐?"
딜듀란 백작이 의심스럽게 쳐다보자, 총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안은 마법사들에게 모두 평민의 복장을 착용하라 일렀다. 그리고 화염 마법을 집중적으로 보여 준다기보다는 대충 불만 지르는 척하며 몰래몰래 파이어 볼을 쏘아 내고 있었던 것이다.
"막아! 그리고 당장 마을에 내려가서 있는 식량들을 모조리 뺏어 와! 빌어먹을 새끼들! 오냐오냐 봐줬더니 감히……! 미천한 평민 새끼들이."
"알겠습니다, 사령관님!"
* * *
디스는 프라스 제국의 정예병이다.
돌격 17부대의 백부장으로 임해 있다. 평민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자리까지 오른 것이다.
그는 백여 명을 이끌고 근처 마을까지 내려왔다. 이지스 평원에서 제일 가까운 마을이라고 해도 6시간은 꼬박 걸어가야 작은 마을 하나가 나왔다.
더 큰 마을로 가기 위해서는 하루는 작정하고 더 걸어가야 한다. 그마저도 고작 500가구도 안 되는 마을에 불과하다.
지금 디스가 가고 있는 마을은 6시간은 걸어야 도착하는 데다 30가구가 옹기종기 목책을 짓고 살고 있는 그런 곳이었다.
디스는 왠지 기분이 좋았다.
배급이야 점점 시들해지니 신경이 날카로울 만도 하지만, 이번 근처 마을에 약탈 자리를 뺏기 위해서 돌격대 대장들끼리 싸움이 일어났을 정도였다.
얻어맞은 것이 한두 대가 아니라 곳곳이 쑤시지만 약탈을 하고 나면 일단 배는 두둑이 채울 수 있고, 훈련도 빠질 수 있으니 좋았다.
디스가 헤벌쭉 웃으며 지나가는 여인들을 쳐다봤다.
식량 보급이 끊기기 전까지만 해도 매춘부들이 여럿 돌아다녔지만, 보급선이 끊긴 이후로는 신경이 날카로워진 사령부 때문에 매춘부들의 출입이 일체 불허해졌다.
"헤에……."
침까지 흘리며 지나가는 여인들의 엉덩짝만 쳐다보고 있으니 디스가 창피했다.
"험험! 이놈들아. 그래도 눈치는 못 채게 쳐다봐야지, 이것들아."
한두 쌍도 아니다. 무려 백 명이다. 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한 여인만 쳐다보고 있으니, 그 여인이 질색해서 도망치는 것은 아주 당연했다.
"대장!"
그때 한곳에서 디스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디스는 그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왜?"
"촌장을 만나 보고 그냥 식량만 가지고 갈 겁니까?"
기대하는 눈치로 쳐다보는 막내 막스다.
막스는 올해 21살로, 사랑하는 여인에게 차인 이후로 군대를 지원하여 올해 2년째에 접어들고 있었다.
"아무리 이곳이 시골이라 해도 전부 프라스 제국의 사람들이다. 무지한 평민들이긴 해도 반항하지 않는 한은 아무것도 건들지 말라 했다."
군 이미지를 안 좋게 만들 이유도 없다. 디스는 이 점에서는 정말 자신이 선량한 백부장이라 생각했다.
"헤헤! 알겠습니다요."
막스는 곧바로 손을 내렸다.
디스도 곧잘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내뱉긴 했지만, 안타까운 건 사실이다. 그도 마음 같아서는 마을에 눌러앉아 며칠이고 놀다 가고 싶었다.
"촌장님."
디스는 촌장과의 만남에서 최대한 선량한 미소를 지어 주었다. 이미 이전에 여러 번 이 마을에서 식량을 약탈해 간 뒤라 마을 사람들의 시선이 곱지 않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콜록! 콜록!"
거친 기침 소리와 함께 머리카락이 파뿌리처럼 변한 노인이 허리를 굽히고 디스의 앞으로 나왔다.
"또 식량 문제로 온 겐가? 콜록! 콜록!"
디스는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아무런 수확 없이 갈 수도 없었다.
"죄송합니다만 어르신, 그렇습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나서라도 무력을 지닌 백부장임을 잊고 존대를 했다.
"그렇구려. 쿨럭! 쿨럭! 가져가시게. 하지만 다시는 안 오면 어떻겠는가? 우리의 마지막 식량일세."
촌장이 손으로 가리킨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마을 사람들이 한 보따리씩 음식들을 풀어 헤쳤다.
디스는 코가 시큰해졌다.
"알겠습니다, 어르신! 다음에 오는 놈들에겐 특별히 말해 이 마을만은 피해 가도록 하겠습니다."
촌장은 정말 기뻐하는 투로 디스의 두 손을 잡았다.
"고맙네. 고마우이!"
디스는 촌장의 말에 감복하여 식량을 가져가서 병사들에게 한마디씩 하며 나눠 주었다.
하지만 그의 식량이 시발점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크아악!"
딜듀란 백작이 거세게 책상을 내리쳤다. 슈레이더 왕국의 야습 작전이 지난 후부터는 일이 뜻대로 풀린 적이 없었다.
"풍토병에 사망하는 놈들이 생기더니, 이제는 괴질병까지 걸려? 게다가 우리가 먹는 식수에 독이 타 있어서 물도 못 마셔? 그렇다고 과일도 없고, 음식도 없는 이 마당에 대체 뭘 어떻게 하란 말야? 또다시 약탈해 와?"
약탈은 불가능하다.
이제 약탈할 것도 없다. 게다가 마을 주민들도 약탈할 때쯤 도망가 있다가 그들이 가면 다시 마을로 돌아온다.
"5일만 기다리시면 됩니다, 사령관님."
"그래, 보급부대가 출발한 지 여러 일이 지났다. 이제 예정일대로라면 5일이나 6일 이내로 도착하겠지. 하지만 그럼 뭐 해? 벌써 아사하는 놈들이 여럿 생겼는데 말이야."
보고를 올리는 총관의 모습도 초췌하기 이를 데 없다. 사령부들의 상위 간부들조차 먹을 것에 궁핍한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더 힘들다. 이미지 관리까지 해야 했으니. 배가 고픈데도 내색도 하지 못한다.
딜듀란 백작의 얼굴도 처음에 보았던 통통함과는 거리가 매우 멀었다. 소드 마스터가 아니었다면 그도 이미 드러누웠을 것이다.
딜듀란 백작은 인상을 구겼다.
"그래, 딱 5일만 기다리자. 5일만!"
로단 산맥.
이지스 대평원과 프라스 제국을 잇는 유일한 길목이다.
프라스 제국 측에서 수많은 병사들을 고용하여 산맥의 모든 몬스터들을 몰아냈기에 로단 산맥으로 통하는 길은 거의 안전하다고 봐야 했다.
전쟁 전만 해도 이 로단 산맥은 프라스 제국에서 펠타온 제국으로 갈 수 있는 유일하게 안전한 길이었다.
전쟁이 터지면서 모든 보급물자는 로단 산맥을 거쳐야만 통할 수 있었다.
프라스 제국 측에서 보내온 물자는 10만이 3개월을 족히 버틸 수 있는 방대한 양이었다. 하지만 프라스 제국에서 잘못한 점이 있다면, 그건 바로 호위 병사들을 세우지 않고 오로지 키메라들로만 구성했다는 것이다. 키메라들도 익스퍼트 수준으로 그 숫자가 천 마리가 넘어가지만, 그들을 다루는 흑마법사들의 실력은 형편없었다.
슈우웅!
바람을 가르고 날아오는 단 하나의 쿼렐.
누군가의 손에서 석궁용 화살이 발사된 것이다.
그 쿼렐은 기세 좋게 날아가더니 마차 한가운데에 정확히 박혔다.
부르르―!
한동안 몸을 떤 쿼렐의 깃대에는 하얀 종이가 묶여 있었다.
"전군 전투 준비! 저 종이를 내게 가져와라!"
이 보급부대의 책임을 맡고 있는 샌더슨이었다. 유명한 백작 가문의 차남이기도 한 그는 소드 마스터인 형을 따라 수많은 전장을 뛰어다니며 많은 전공을 세우기도 한 잔뼈가 굵은 기사이기도 했다.
한 병사가 종이를 풀어 헤치며 가져오자 기사는 종이를 쫙 펴며 읽었다.
내용은 한 줄이었다.
나 잡아 봐라, 멍청한 프라스 약국 놈들아.
팍!
샌더슨은 더 이상 볼 것도 없이 종이를 신경질적으로 구겨 버리고 땅바닥에다 냅다 버렸다. 그것도 모자라서 발로 지그시 밟아 버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감히! 본국을 약국이라 칭하다니! 어떤 놈이냐! 감히 어떤 놈이 제국을 능멸하는 것이냐! 썩 나와라! 나오지 않는다면 모두 다 죽이겠다."
"……."
샌더슨의 말을 비웃기라도 하듯 산맥은 아주 조용했다.
샌더슨의 화가 머리끝까지 폭발했다.
"당장 이놈들을 내 앞으로 끌고 오너라! 당장!"
흑마법사들은 샌더슨의 말을 거역할 수가 없었기에 그의 화난 표정에 찔끔하여 얼른 키메라들을 풀었다. 그러자 그때에 맞춰 병사 3명이 흑마법사들을 보며 비웃었다.
"으하하! 느려 빠진 놈들아, 나 잡아 보너라!"
놀리기만 하면 다행이다.
어떤 병사는 바지까지 내려 엉덩이를 내보이며 그들을 자신의 항문보다도 못한 놈들이라며 모욕했다.
얌전하던 흑마법사들도 그제야 키메라들을 풀어 헤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약삭빠르게 병사들은 도망갔다.
"잡아라! 잡아서 내 앞에 무릎을 꿇게 만들어야 한다! 알겠느냐!"
"예."
흑마법사들 또한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자 또다시 쿼렐이 날아갔다. 이번엔 한 발이 아니라 수십 발이었다. 무엇 하나 키메라나 보급물품을 건드리는 것은 없었다. 땅이나 마차에 꽂히기 일쑤였다.
그 쿼렐들 깃대에는 모두다 종이가 꿰여 있었는데, 전부 같은 내용이었다.
나 잡아 봐라.
샌더슨은 약이 오를 때까지 올라 화가 폭발했다.
"우하하하! 이 멍청한 놈들아. 잡아 보라니까."
"나 여기 있다고!"
이번엔 병사 셋이 아니었다. 한 50명은 될 법한 병사들이 산맥 곳곳에서 몸을 드러냈다. 샌더슨이 말하기도 전에 이번엔 흑마법사들이 키메라들을 움직였다. 키메라들 숫자만 천 마리에 가까웠다. 키메라들 대부분이 병사들을 잡으러 뛰쳐나갔다.
키메라들이 사라지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이번엔 쿼렐 200여 발 정도가 갑자기 보급물품이나 흑마법사들을 노리고 날아왔다.
"으아악!"
상단을 지키는 병사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전부 키메라들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병사의 숫자라고 해도 백을 넘지 못했다.
보급물품을 이끄는 건 대부분이 말들이었다.
말들도 퀴렐의 대상 중 하나였다. 프라스 제국 병사들은 말이 쓰러지자 말을 방패 삼아 몸을 꼭꼭 숨겼다.
샌더슨은 당황했다.
병사들보다 흑마법사들이 더 많이 쿼렐에 찔려 절명했다. 대부분이 하급 흑마법사들이었기에 키메라들을 구동하며 한 번에 쉴드 마법까지 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날아오는 쿼렐들을 자동으로 피해 낼 수 있는 용빼는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으으!"
샌더슨은 용감하게 앞으로 나섰다.
"당장 나와서 적들을 맞이해라! 놈들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상단을 지키는 병사들 숫자는 더 적었다. 보급부대를 향해 매복을 하고 있던 자들의 숫자는 200에 달할 정도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프라스 제국 병사들을 도륙했다. 사기까지 떨어져 있던 프라스 제국 병사들은 얼마 버티지 못했다.
샌더슨은 손까지 놓고 이 상황을 멍하니 바라봤다. 적들의 계략에 빠져 키메라들을 모두 잃다니!
흑마법사가 죽으면 키메라 또한 죽는다. 그것이 키메라들의 약점이었다.
샌더슨이 소드 마스터가 아닌 이상 이들을 모두 도륙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샌더슨은 어느 이름 없는 병사들의 합공에 밀려 목을 잃어야 했다.
"뭐야?"
보급부대가 공격 받은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보고되었다.
딜듀란 백작은 설마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다시 한 번 말해 봐."
총관은 고개를 푹 숙였다. 말하기가 꺼려지는 듯했다.
그러자 딜듀란 백작은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슈레이더 왕국 놈들의 매복을 받아서, 그것도 계략에 빠져서 모두 다 죽었다고?"
"그렇습니다."
"보급물품은? 설마, 아까 우리가 본 검은 연기가 그놈들이 우리 보급물품을 태워서 난 연기란 말이야?"
총관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대책은 있어? 없어?"
"없습니다."
총관이 딱 잘라 말했다. 솔직히 그랬다.
나무는 홀라당 다 타 버렸고, 주변 마을에 약탈할 건 없고, 물도 독을 풀어 놨기에 마실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병사들 사이에 풍토병에 괴질병까지 돌고 있으니 아주 죽을 맛이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와아아아아!"
바깥에서 시끄러운 함성 소리가 들려왔다.
딜듀란 백작이 얼굴을 찡그렸다.
"무슨 소리야? 알아봐 봐!"
총관이 서둘러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을 헐떡이며 돌아왔다.
"슈레이더 왕국 놈들입니다! 그놈들이 쳐들어왔습니다!"
딜듀란 백작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뭐야? 그럼 당장 막아!"
"사령관님, 빨리 피하십시오! 막을 시간이 없습니다."
"막을 시간이 없다니? 우리 군 숫자는 8만이나 되잖아. 적들은 고작 3만밖에 안 되는데 막지도 못한다고?"
"놈들은 이 순간만을 기다려 온 듯합니다! 병사들이 모두 병이 나 지친 상태라 덤벼들 생각조차 못합니다."
"젠장!"
딜듀란 백작은 검을 빼 들고 갑옷을 입었다.
"뭐 하십니까? 사령관님."
총관이 물어 오자 딜듀란 백작은 검에 오러 블레이드를 솟구쳐 올리며 소리쳤다.
"지금 본국으로 돌아가면 내가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천만에. 그럴 거면 차라리 전장에서 적병한테 내 목을 내주고 말겠다!"
그리고 딜듀란 백작은 뛰쳐나갔다.
홀로 남은 총관은 입에서 욕을 내뱉더니 빨리 짐을 싸기 시작했다.
그도 알 수 있었다.
이지스 대평원 전투는 패배로 돌아갈 수밖에 없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