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인하르트-49화 (49/60)

■ 제49장 전쟁 발발 □

쩌저적!

세로로 정확히 쪼개지는 리치의 몸뚱이.

양쪽으로 몸이 서서히 가라앉더니 손상을 입은 부위들끼리 붙어 버렸다.

"흥! 가만둘 줄 알고."

이안은 붙어 버리며 다시 무저갱 같은 눈을 뜨는 리치를 향해 일 검을 휘둘렀다. 라이프 베슬이 있는 한은 리치는 계속해서 살아난다.

이안은 리치가 살아나는 족족 계속해서 검을 휘둘러 죽였다.

'역시!'

한 대여섯 번 몸이 갈라진 리치의 재생 속도가 점점 줄어들었다.

이안은 눈에 이채를 발산했다.

리치가 아무리 죽은 존재이고, 라이프 베슬을 이용한다 해도 그 라이프 베슬도 어딘가에서 마나를 흡수하거나 회복해야 하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즉, 리치를 계속해서 죽인다면 리치의 살아나는 시간이 점점 길어진다는 것.

"크아악! 이 개자식!"

리치가 고통을 느끼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몸을 쪼개는데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리치는 살아나자마자 곧바로 틈을 타 조금씩 이안에게 멀어졌다. 그것이 수십 번 반복되자, 이안은 위기감보다는 지루함을 느끼고 리치는 아주 죽을 맛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시간도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리치가 자리에서 벗어나자마자 곧바로 앱솔루트 마법을 전개, 자신의 라이프 베슬을 뽑아낸 뒤 키메라들의 피를 제물로 주문을 외웠다.

이 리치와 계약을 맺고 있는 자.

마왕 발록의 간부인 10개체의 최상급 마족들.

그중 하나가 리치와 계약을 맺고 있었다.

레아드리프 그록.

최상급 마족들 중에서는 제일 강한 힘을 지녔지만, 그만큼 오만하고 포악하여 적을 제일 많이 두기도 하고 있었다.

"미, 미친! 세상을 적으로 돌리고 싶은 건가?"

이안은 다급한 음성을 토해 낸 뒤 곧바로 검강을 최대로 전개하여 앱솔루트 쉴드를 깨부수기 위해 그대로 내리그었다.

까가가강!

엄청난 파공성과 함께 부딪힌 곳에서 불꽃 세례가 일어났다. 무엇이든 순두부 자르듯 쉽게 잘라 내는 검강이 어째서인지 고작 리치의 마법 하나를 깨뜨리지 못하고 있었다.

"크크큭! 마족 소환 의식은 강대한 마기의 힘으로 시전자를 보호한다! 그랜드 마스터가 아닌 이상에야 뚫을 수도 없지."

"망할!"

이안은 만상귀일신공을 펼치며 그대로 패도성을 드러냈다.

'막아야 한다!'

방금 전부터 신경을 거슬리는 강대한 마기.

그 마기는 점차 강해지더니 이미 이안의 힘을 뛰어넘고도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져 갔다.

끝도 알 수 없는 마족의 힘에 이안은 계속해서 앱솔루트 쉴드를 건드렸지만, 금조차 가지 않는 방어에 이안은 급한 대로 검환을 만들어 내 무작정 부수기 시작했다.

쾅쾅쾅쾅!

검환이 실험실을 박살 내기 시작했다. 당연히 건물이 부서지고, 카이드 백작의 저택이 무사할 리가 없다.

쿠콰콰쾅!

건물이 폭삭 가라앉자, 이안은 호신강기를 두툼히 만들어 몸을 보호했다.

스르륵―!

쿠콰앙!

돌과 바위들이 위를 짓누르자 이안은 검으로 그것을 깨뜨리며 바깥으로 뛰쳐나왔다.

몸을 보호하던 호신강기를 없애자, 곧바로 역한 냄새와 함께 한 치 앞도 볼 수 없을 정도의 거대한 먼지바람이 일어났다.

"젠장!"

이안은 손으로 바람을 일으키며 순식간에 먼지들이 흩날리는 영역에서 빠져나왔다.

"크하하하! 좋아. 좋아! 최상급 마족이 강림하는데 이 정도의 제물은 필요할 테지!"

그저 리치의 앞에 1미터 정도의 크기로 존재하던 소환마법진이 저택을 모두 가둘 정도로 커졌다. 카이드 백작의 식솔들은 물론, 병사들까지도 마법진에 대해 속수무책으로 희생물이 되었다.

이안도 자신이 희생이 될까 공중으로 뛰어올라 곧바로 소환식을 시작하는 리치를 향해 다시 공격을 퍼부었다.

"끝까지 재수 없게 구는군!"

리치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이안을 바라보며 한 손을 슬쩍 들어 올리더니 작은 화염구를 만들어 냈다. 단순히 파이어 볼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태워 버릴 것 같은 기세!

지옥의 파란 불꽃!

헬 파이어다!

메모라이즈 해 두었던 헬 파이어가 위력을 발산하며 이안에게 곧바로 발산됐다.

타이밍을 정확히 맞추었던 리치의 헬 파이어.

단순히 초보자가 사용한 것이 아닌지라, 이안은 피하기가 쉽지 않았다.

아니, 피해도 되지 않는다!

헬 파이어는 단순히 사정거리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안이 피해 버리면 다른 곳이 피해를 입는다. 단순히 한두 명이 아니라, 그나마 남아 있는 저택 사람들 모두가 타 죽어 버릴지도 몰랐다.

이안은 반탄강기와 함께 호신강기를 여러 겹 둘렀다.

'막아야 한다! 막지 못하면 다 죽어!'

헬 파이어 때문이 아니라 최상급 마족 때문에.

단순히 이안뿐만 아니라 왕국, 혹은 대륙 전체까지 펼쳐질지도 모른다.

호신강기를 둘렀음에도 불구하고 헬 파이어의 뜨거운 기운이 피부에도 느껴졌다.

이안은 검환 몇 개를 헬 파이어에게 쏘아 보냈다.

퉁퉁퉁!

헬 파이어가 크게 흔들렸다.

이안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이 정도면!'

온 힘을 그립을 쥐고 있는 양손에 주었다.

이안은 곧바로 오러 블레이드로 헬 파이어를 갈랐다.

스겅!

명쾌한 소리와 함께 기운이 반으로 갈라지는 헬 파이어.

하지만 평소보다 이상했다. 시간이 늦게 흘러간다.

이안은 리치의 얼굴을 보았다.

리치는 웃었다.

쿠콰콰콰쾅!

이안의 옆에서 동시에 터지는 헬 파이어.

이안은 인상을 찌푸렸다.

위이이이이잉!

마족소환 마법진이 더욱 열을 냈다.

그리고 한순간.

시간이 멈춰 버린 것 같은 고요한 시간이 되었다.

날아가는 새들도, 쓰러졌던 병사들도, 놀라움을 토해 내는 각 기사들도.

그들 모두가 갑자기 사라졌다. 땅거죽이 꺼지면서 사람들의 머리 위로 번개가 쳤다.

콰쾅!

마계에서 중간계로 차원이동 마법진이 열리며 서서히 몸을 드러내는 레아드리프 그록.

"크하하하!"

리치는 미친 듯이 광소를 터트렸다.

꺼리낄 것이 없었다. 자신의 일을 방해하던 놈은 헬 파이어를 막지 못하고 죽었다.

파르르!

전율을 느끼며 몸을 부르르 떠는 리치 앞으로 3미터의 거인이 몸을 드러냈다.

몸 전체를 날개로 감싸 얼굴을 제대로 보여 주지 않았지만, 앉은키가 3미터를 넘으니 서면 얼마나 클지 제대로 상상이 되지 않았다.

스르륵!

그리고 드디어 소환된 레아드리프 그록이 몸을 일으켰다.

오우거보다도 거대한 키.

적어도 5미터는 상회할 만한 크기였다.

그가 소환되자 아무것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다행히도 제물로 삼아지지 않았던 병사들은 입을 쩌억 벌리며 이 분위기에 얼어붙었다.

"어? 어?"

레아드리프 그록이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일자를 고수하고 있던 그의 입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날 소환한 놈이 누구냐."

"저, 접니다."

리치는 손을 들어 올렸다.

레아드리프 그록의 눈이 돌아갔다. 리치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의 안광에서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그래서 리치는 후들거리는 몸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잠시 후 레아드리프 그록의 입가에 진 미소를 보며 마족의 마음을 읽을 수가 없었다.

"크크큭! 어둠의 힘을 받은 리치로군. 그래, 인간의 잔재인 네가 무슨 이유로 날 부른 것이냐."

리치는 가슴 떨리는 듯이 입을 열었다. 아니, 열기도 전에 그의 눈이 먼저 경악했다.

"젠장!"

이안이 자신의 검을 질질 끌며 걷더니 리치와 약 2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반탄강기와 호신강기의 힘으로는 사실상 헬 파이어를 이길 수가 없다. 이안은 헬 파이어가 폭발하는 그 순간, 디멘션 스텝으로 그 자리를 빠르게 벗어났다.

하지만 강력한 폭발로 공간이 뒤틀리는 바람에 한순간이면 영원히 공간에서 갇혀 죽을 뻔했다.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막대한 타격을 입은 뒤라 이안의 몸은 이미 걸레짝같이 되어 숨이 붙어 있는 것이 용할 지경의 수준이었다.

'벗어나야 하는데…….'

리치의 눈은 더없이 커졌다.

그는 이안이 살아 돌아왔다는 사실에 경악했지만, 한편으론 잘됐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곧바로 소환된 레아드리프 그록에게 간청했다.

"마계의 진정한 주인이신 그록 님에게 간청합니다. 지금 제 앞에 서 있는 저놈의 심장을 뽑아 기를 축적하시고, 제 영혼을 받아 이 왕국을 멸망시켜 주십시오."

왕국을 멸망시켜 펠타온 제국에게 막대한 타격을 줄 수 있다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마족의 소환 시간은 정해져 있다. 마음 같아서는 펠타온 제국을 직접 쓸어버리면 좋겠지만, 7서클 마법사의 힘으로는 최상급 마족을 유지하는 마기를 감당할 수 없었다.

최상급 마족인 그록의 눈이 이안의 눈과 마주쳤다.

이안은 늪과 같은 그의 눈에 허우적거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본디 마족이란 인간계로 강림을 하게 되면 고작 10분의 1의 힘을 가지고 나타난다. 하지만 그 힘도 엄청나게 강하기 때문에 거의 마왕 급이 강림하게 되면 그때는 드래곤들이 개입하여 마족들을 막아 내었다.

따지고 보면 드래곤들은 유라시아 대륙을 지키고 있는 가디언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록은 고작 며칠 못 갈 최상급 마족이다. 이 정도라면 드래곤이 유희를 하다 운이 좋게 만나면 시험 대상으로 박살 낼지도 모르지만, 이 대륙에서 드래곤은 몇 종 없는 아주 드문 종족이다.

즉, 그록과 드래곤이 마주칠 일은 없다는 것이다.

이안은 이곳에서 드래곤과의 만남을 기대할 수 없었다.

말도 안 되는 확률을 기대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그록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불가능하다."

* * *

"그, 그런!"

최상급 마족 그록이 꼬리라도 말았다는 말인가?

리치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해명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그록을 직시했다.

이안 또한 만약 마족이 덤빈다면 싸우기보다는 체력 회복을 하다가 계속 도주할 생각이었다.

"어째서입니까?"

"어려운 것을 요구하고 있다."

"무엇을 말입니까?"

그록이 기세를 드러내며 리치를 노려보았다.

"두 번 말하지 않겠다. 불가피하다. 저자는 여신의 가호를 받고 있다. 마왕이라 해도 여신의 가호를 받는 인간을 공격할 수는 없다."

"여신의 가호?"

라인하르트 제국 황손에게 이어지는 여신의 축복을 말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상반된 기운을 가지고 있는 여신과 마족이 무슨 관계란 말인가.

게다가 적을 만드는 것을 두려워 않는 마족 중 하나가 바로 그록.

그런 자가 거부하다니?

분명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면 마족은 그록을 강림시킨 것을 진심으로 후회했다.

"천족이나 인간들만이 신앙심을 가지고 여신을 믿는 것은 결코 아니다. 여신은 이 세상의 창조주와 같다. 아무리 내가 마계의 왕과 버금가는 힘을 가졌다 해도 여신의 가호를 받는 인간을 죽이는 것은 무리다."

"말도 안 돼……!"

리치의 입에서는 더 이상 희망에 잠긴 듯한 말 따위는 나오지 않았다.

이안은 그런 리치를 보며 내공을 쥐어짜며 차원의 검술, 제2단계를 펼쳤다.

슈슈슈―!

내공이 부족한 감이 많았기 때문에 시전 시간이 상당히 오래 걸린다. 하지만 그런 시전 시간에도 불구하고 리치는 멍하니 있었기 때문에 이안의 검술을 눈치 챌 수 없었다.

'라이프 베슬을 가지고 소환을 했다면, 지금 리치는 라이프 베슬조차 없는 비렁뱅이에 불과하다!'

"디멘션 홀드!"

이안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그대로 검을 아래로 내리그었다.

그것도 아주 천천히.

하지만 그 느린 동작에 리치가 서 있는 공간이 갑자기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제야 리치가 정신을 차렸다.

"이, 이건 뭐야?"

파파팟!

검은 공간이 아가리를 벌리며 리치를 끌어당겼다. 리치는 갑자기 헛바람을 속으로 집어삼키며 공간이동을 하려 했으나, 소환의식으로 인하여 마나란 마나는 한 줌도 남지 않았다.

"끄아아악!"

리치의 입에서 절망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디멘션 홀드는 상대를 완전히 차원에 가둬 버리는 끔찍한 기술이다. 이것을 터득하는 데만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음은 물론이거니와, 여러 가지 깨달음이 필요했다.

"후우!"

리치는 그대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곧바로 가부좌를 틀어 만상귀일신공을 펼치며 내공을 빠르게 빨아들였다.

그 내공은 내상을 치료하는 데 온전히 쓰였다.

잠시 후, 이안이 눈을 떴을 때는 굉장한 미남자가 앞을 지키고 있었다.

그 미남자는 이안을 보며 씨익 웃었다.

"크흐흐! 여신이 참으로 잘 결정했어. 라인하르트 황손들은 모두 미친놈들뿐이니."

참으로 얼굴과 웃음소리가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이안은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리치는 죽었는데, 어떻게 나와 있는 겁니까?"

"마계에서는 지상계를 내려다볼 수 있는 신기한 장소가 하나 있지. 그곳을 우리 마족들은 '진실된 거울'이라고 부르는데, 내가 유독 관심을 가지고 쳐다본 사람은 너뿐이야."

"……."

"마계로 떠나기 전 네 얼굴을 보았기 때문에 한마디 하고 싶어서지. 크흐흐! 한 가지 묻겠다. 네가 실현시키고자 하는 꿈은, 무슨 방법으로 이룰 테냐?"

"펠타온 제국과의 연합으로……."

"이 전쟁이 끝나고 나면 펠타온 제국도, 프라스 제국, 또 그 누가 살아남을지도 모른다. 둘 다 살지도 모르고, 둘 다 자멸하는 상태가 되거나, 둘 중 하나만 죽을 수도 있겠지. 자, 그럼 묻겠다. 넌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비책을 가지고 있나?"

"……."

"단순히 네가 강하다고? 황태자라서 그냥 그런 이상을 실현시키고자 함인 건가? 착각하지 마라. 네 힘은 대륙십강에 비해 한참 떨어진다. 너 혼자선 그 무엇도 바꾸지 못하지."

맞다.

이안은 결코 혼자서 대륙을 뒤바꿀 만한 능력이 없다.

"끊임없이 생각해라. 끊임없이 고민해라. 네가 왜 프라스 제국을 무너뜨리고 황제가 되려 하는지."

두근두근!

이안은 그록의 말을 듣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만, 두근거리는 가슴 때문에 미칠 지경이었다.

그록의 말은 이안의 가슴을 울리게 하는 이상적인 효과가 있었다.

"어찌 됐든 조심해라. 여신의 가호를 받는 이여……. 곧 겨울이 시작되면, 프라스 제국의 공격이 시작될 것이니."

그록은 그 말과 함께 자신을 공간 속에 묻어 버렸다.

홀연히 사라지는 그의 몸체.

확실히 프라스 제국의 군사, 즉 키메라들은 겨울과 상관없이 공격해 올 것이다.

그들은 더운 것도, 추운 것도 모르고 공격을 가할 테니.

인간이 전투 능력을 가장 많이 상실할 때가 배고픔을 느낄 때와 바로 날씨에 영향을 받는 날이다.

겨울이 되면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리게 되고, 굼뜨게 된다.

즉, 겨울은 프라스 제국의 독무대가 될 가능성이 농후했다.

겨울을 어찌어찌 버티고 봄까지 기다린다고 해도, 그때쯤이면 펠타온 제국이 입은 상처는 쉽사리 복구될 정도는 아닐 터.

끝없이 몰려 들어오는 키메라들을 펠타온 제국이 과연 어떤 식으로 대응할 수 있을지 심히 걱정되었다.

'하지만 왜…….'

단순히 황태자이기 때문에?

그 당시 죽었던 추기경의 슬픈 눈물 때문에?

갑자기 떠오른 과거로 인하여 얻은 분노 때문에?

분노는 모두 사라졌다.

그냥 예전에 생긴 분노로 인하여 아직도 분노를 느끼기에는 가슴이 너무 좁다.

얼굴 한 번 못 본 부모나, 가족을 죽인 놈들보다는 청성파를 괴멸시킨 혈파에 대한 복수심이 더욱 깃들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닌가?

"어찌 되었든 움직여야 한다."

이안은 얼굴을 황급히 가리고 다리를 살짝 놀렸다.

그러자 그의 신형은 허공 속에서 녹아들었다.

* * *

"에반."

검은 머리의 청년이 옆에 딱딱한 표정으로 서 있는 에반을 부르자, 에반이 덜덜 떨면서 슬쩍 다가왔다.

"예, 예……. 마스터."

에반의 옆에 서 있는 검은 머리의 청년은 결코 이안이 아니었다. 당현히 에반의 입에서 마스터라는 말은 제대로 나오지 못했다.

"내 옆을 제대로 보좌하도록 해. 이래서는 귀족들이 속아 들지 않을 거야."

"아, 알겠습니다. 마스터."

에반은 세 발자국 정도 떨어진 격차에서 한 발자국을 줄였다. 하지만 카이어스 국왕은 그것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가면 속에서 고개를 찌푸렸다.

"더!"

에반이 반 보 정도 더 다가왔다.

그러자 만족스러운 듯이 카이어스가 웃었다.

"변신한 모습이 어때?"

카이어스는 마음에 든다는 듯이 거울을 연신 바라봤다.

에반은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아, 아주 똑같습니다."

"누군가 내 가면을 벗기려고 하면 전력을 다해 막도록 해. 그 책임은 내가 질 테니. 아니지. 후후! 이 가면의 주인이 받겠지."

"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카이어스 국왕은 카이드 백작이 무도회장에 나타나자 입술에 미소를 지었다. 지금쯤 개털이 됐을 카이드 백작의 집을 상상하며.

물론, 벌써 마족이 소환되어 때 아닌 폭풍을 일으켰다는 것은 아무도 몰랐다.

카이드 백작은 은근슬쩍 이안으로 변장한 카이어스 국왕에게 다가왔다. 그는 첫눈에 이안이라고 알아봤는지, 별다른 의심은 하지 않았다?.

"크흐흐! 후작, 자네가 이 무도회를 주최했다는 것은 알고 있다. 무슨 꿍꿍이지?"

"……."

카이어스 국왕은 목소리를 살짝 바꿨다. 마법적 힘이 가미된 것이다.

"알 필요 없다."

카이어스 국왕은 평소처럼 입을 열었다. 하지만 작위는 높아도 자신보다 나이가 한참이나 어린 이안이 그런 소리를 하자 뚱뚱한 그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뭐, 뭣이!"

카이어스 국왕은 잠시 후 자신의 실수를 인정해야 했지만, 절대 물러설 마음이 없었다.

"그대는 나보다 작위가 낮은 백작일 뿐이다. 이곳은 단순히 지인들끼리 만나는 파티장 따위가 아니다. 후작인 나한테 예를 다해라."

"끄응!"

카이드 백작은 결코 그것만큼은 사양하고 싶었다.

명예를 꿇는 것은 무릎을 꿇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는 앓는 소리를 내며 카이어스 국왕을 노려보았다.

그런데 그 순간, 음유 시인들의 노랫소리와 함께 가면을 쓴 신비한 무도회에서 귀족들이 짝을 찾아 춤을 추기 위해 중앙으로 나왔다.

"다음에 보도록 하지, 백작. 물론, 좋은 의미로는 아니고 말이야."

카이어스는 입에 짙은 웃음을 짓고 유유히 파티장을 나왔다.

카이드 백작의 구겨진 얼굴에 그는 통쾌한 듯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파티가 끝난 후, 이안은 자신이 가져온 증거 자료를 카이어스에게 내밀었다. 그 과정에서 설명을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마족이 나왔다는 것은 말하지 않았지만, 여러 가지 리치에 관해서나 그를 처리한 점 등등에 대해 거짓말을 붙여서 말을 해야 했다.

특히나 리치의 7서클 마법인 헬 파이어에 대해서는 정말 놀라움을 토해 내야 했다.

프라스 제국의 힘이 생각보다 강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말이다.

"우리 왕국은 이제 전쟁 상태에 돌입해야 합니다. 곧 겨울입니다. 겨울은 프라스 제국이 손꼽아 기다려 온 계절. 이제 그들의 대륙 정벌전쟁이 시작될 것입니다."

이안의 심각한 어조에 카이어스 국왕의 얼굴에도 그늘이 드리워졌다.

"곤욕스럽군요. 겨울은 전쟁하기 상당히 힘든 계절인데."

"반드시 버텨 내야 합니다. 겨울이 끝나고 봄이 올 때, 판도를 뒤바꿀 수 있으니 말이죠."

카이어스 국왕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굉장히 긴 겨울이 되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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