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인하르트-48화 (48/60)

■ 제48장 재회 □

확실히 이안은 가슴속에 응어리가 남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건 떠나기 바로 전날까지 계속됐다.

무언가를 하나 빠뜨린 기분.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이안이 빠뜨린 것은 하나뿐이었다.

현재 막혀 있는 경지를 위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는 것.

원한다고 이안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벽이 부서질 리는 없지만, 이안은 그 벽을 부수기 위해 한 가지밖에 생각을 못했다.

'강자와의 싸움!'

디그라실 공작을 본 순간 짜릿했던 기분.

강자는 강자를 알아보고, 고수는 고수를 알아본다.

이노센트 경과도 싸울 수 있지만, 이노센트 경은 루네 일 때문에 쉽게 허락을 해 줄 수는 없는 듯했다.

그렇다면 대륙 최강의 기사.

킹 제레브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라 해도 상대할 수 없는 디그라실 공작의 무위가 궁금해졌다.

'어느 정도 완성되어 가고 있는 차원의 검술. 그리고 무공들을 합친다면…….'

상대가 될 것도 같았다.

'펠타온 제국의 마지막은.'

이안이 검을 들어 올렸다.

'디그라실 공작과의 대련으로 마무리한다!'

이안은 그렇게 다짐했다.

"대륙에 위명이 자자하신 디그라실 공작 각하를 뵙습니다."

디그라실 공작은 홀로 자신을 찾아온 이안을 직시했다.

"그래, 나 또한 이렇게 사석에서 후작을 보니 반갑군."

공작은 양어깨에 매달아 놓은 수건으로 이마를 훔쳤다.

그의 몸에서 열기가 솟는 것을 보니 지금까지 격렬한 훈련을 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헌데 무슨 일인가?"

"언제부터인가 제 앞을 거대한 벽이 가로막기 시작했습니다."

"벽?"

디그라실 공작은 이안이 중급이나 상급 사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벽이라고 했을 때는 단순히 상급이나 최상급으로 넘어가는 그 과정을 얘기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 벽이 지금까지 넘어왔던 수많은 벽보다도 단단하기 때문에 공작 각하에게 조언을 구하러 왔습니다."

공작은 이런 질문을 수없이 많이 받아 왔고, 그 또한 엄청나게 많은 벽을 뚫고 이 자리에 설 수 있었다.

"자네도 알다시피 그 벽은 누군가 조언을 준다고 해서 어떻게 넘을 수 있는 것은 아니네. 조급해 하지 말고 기다리게. 자네라면 아직 시간이 많지 않은가?"

"단순하게 올라갈 수 있는 벽이 아닙니다."

이안은 은연중에 자신의 기운을 폭발적으로 내밀었다.

'헉!'

디그라실 공작은 이안의 경지에 헛바람을 들이켰다.

최상급. 아니, 아니다!

최상급을 넘어섰다.

대륙에 알려진 그의 경지를 몇 보나 앞서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저 나이에!'

"제가 얻고 싶은 조언은 단순한 조언이 아닙니다. 공작 각하께 대련을 신청하는 것입니다."

디그라실 공작이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대련, 대련이라니.

방금까지 훈련하고 왔던 터라 몸이 살짝 피곤한 것도 사실이었다. 하나 강자와의 대련이라 하니 몸이 다시 뜨겁게 달아올랐다.

입가엔 미소가 생겼고, 몸 안에서는 아드레날린이 분비되기 시작했다.

그건 디그라실 공작이 순수한 무인이란 뜻이었다.

웃음기 만발한 디그라실 공작이 살짝 어두운 표정으로 말하였다.

"헛된 패기는 죽음을 불러올 수도 있네."

"기사인 제가 전신 마르드 님에게 서약합니다. 이 자리에서 죽음을 당한다고 해도 그 누구의 잘못이 아닌, 나의 제안으로 벌어진 일일 것입니다."

"나 또한 마르드 님께 서약하도록 하지."

이 대련을 두고 서로가 증인이 되어 주었다.

대륙에 있어 위명이 자자한 그 두 명.

하지만 이안은 이제 혜성처럼 나타나 급부상하고 있는 젊은 강자였고, 디그라실 공작은 수십 년 전부터 절대 강자로 불려 오며 대륙십강 중에서 최상위를 밟고 있었다.

하나 당연한 것이지만 이안은 대륙십강 급에서 살짝 아래 수준으로 판단되었다.

그건 이안이 중급이나 상급으로 치부되기 때문이었다.

어떤 자들은 그것마저도 헛소리라 치부하고 마스터 초급이나 익스퍼트 최상급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내가 저 나이 땐 익스퍼트 중급이었나? 상급?'

디그라실 공작은 재능이란 것이 엄청난 차이를 불러온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자신조차도 수많은 재능아들을 꺾고 뼈를 깎는 수련으로 간신히 최상의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이안의 독보적인 경지는 재능아나 천재들의 의기를 꺾어 버릴 정도였다.

"진검? 목검?"

디그라실 공작이 이안의 검을 바라봤다.

그 검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제국검.

그것도 라인하르트 대제국의 황손들만이 쥘 수 있다는 아티팩트였다.

그에 반해 디그라실 공작이 쥐고 있는 것은 고작 얼마 전에 대장간에서 기사 수련생들을 위해 구입한 롱소드에 불과했다.

이안이나 디그라실 공작 같은 자들은 무기에 구애받지 않으나 때론 무기가 승패를 가를 수도 있다.

"후후! 목검으로 하지요."

이안은 검집째 들어 올려서 구석으로 내팽개쳤다. 그리고 허공섭물로 튼실해 보이는 목검 두 개를 끌어당겼다.

하나는 공작에게, 하나는 자신에게.

목검 자체에 철심이 박혀 있어 검기를 운용하기에는 무리가 없으나 컨트롤이 미숙할 경우 오러 블레이드를 전개하면 목검이 박살 난다.

그건 둘 다 잘 알고 있었다.

"승패는 한 사람이 기절이나 항복하는 것으로 가름하겠습니다. 어쩌면 목숨으로 패가 갈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안은 처음부터 강하게 나가자고 마음먹었다.

그의 목검이 푸른색으로 빛나기 시작하더니 실낱같은 기운들이 뻗쳐 나왔다.

무림에서는 그걸 검사의 경지라 칭한다.

디그라실 공작도 미소를 머금더니 마찬가지로 실낱같은 검기들을 솟구치게 만들었다.

"준비되었습니다."

"흠! 원래는 후배를 위해 3수를 양보해야 하지만, 지금은 필요가 없을 것 같군."

"먼저 가겠습니다."

"마음대로 하게!"

* * *

탁탁탁!

검기와 검기가 부딪쳤다.

하지만 오러 블레이드와 맞먹는 기운이 솟구쳐 나왔으니 그들의 검이 부딪치면 계속해서 파공성이 들려왔다.

말이 대련이지 실제로는 대결이었다.

기대 만발한 공작도 계속해서 검을 맞부딪쳐 왔다.

방어하는 이안의 입장에서는 아주 죽을 맛이었다.

'밀린다!'

디그라실 공작과의 경지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노센트 때와 마찬가지로 계속해서 밀렸다.

'왜지?'

이안은 그 문제점을 찾아내려고 했다.

하나 생각보다 공작의 목검이 훨씬 빨랐다.

'망할!'

이안은 이제 오러 블레이드와 차원의 검술을 제외하면 남는 게 없다. 무공, 말이 무공이지 디그라실 공작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이미 만상귀일신공을 펼친 지 오래였다.

하지만 디그라실 공작은 이안에게 펼친 게 무엇 하나도 없었다. 그저 단 한 가지.

말도 안 되는 체력과 아직도 여유를 부린다는 것.

'강하다!'

이것 하나, 고작 이거 하나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죽도 밥도 안 된다. 그저 달려들어야 돼!'

이안은 곧바로 방어를 강제로 풀어 버리고, 디그라실 공작의 목검을 향해 자신의 목검을 댔다.

탁탁!

순식간에 2합이 펼쳐졌다.

이안은 왼손에 반탄강기와 호신강기를 여러 겹 두른 채 디그라실 공작의 목검을 잡아챘다.

"음?"

디그라실 공작은 겁 없이 손을 내미는 이안을 걱정해 검을 바로 빼냈다. 하지만 이안의 손이 조금 더 빨랐다.

부드럽게 디그라실 공작의 검을 잡아챈 이안은 곧바로 오른손의 검을 공작의 눈을 향해 내질렀다.

파앗!

'아니?!'

놀라운 일이었다.

오러로 무장되어 있는 검을 손으로 잡아채다니!

디그라실 공작은 팽이처럼 빙그르 돌며 눈에 맞는 것은 피할 수 있었다.

허공을 내질러지는 이안의 검!

디그라실 공작은 곧바로 자세를 낮추고 검을 포기했다. 그리고 오른손을 이안의 복부를 향해 내질렀다.

퍼벅!

대련 후 첫 클린 히트!

"크억!"

이안의 입에서 선혈이 울컥 튀어 나왔다.

그리고 디그라실 공작의 검을 놓치며 뒤로 세 발자국 물러났다.

이안은 배를 부여잡으며 곧바로 피를 흘려 냈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 내는 공작의 실력에는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경험의 차이라는 건가!'

디그라실 공작이 순식간에 자신의 검을 잡아채며 땀을 닦아 냈다.

"하하핫! 역시 명불허전이로군! 이리 강한 청년을 고작 마스터 중급이라 생각했더니."

이안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후후! 이젠 제대로 가겠습니다."

"기대하도록 하겠네."

이안의 눈에서 이채가 발산되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허공으로 뛰어오르더니 신형이 사라졌다.

'어디?'

디그라실 공작은 입이 메말랐다. 속이 탄다는 증거였다.

도대체 어디 있는지 찾을 수가 없다. 놀랍다. 분명히 숨기는 한 수가 있을 거라 생각했건만.

보이지도 않고 기척조차 잡을 수 없다니!

그때, 디그라실 공작의 감각에 허공에 있는 이안이 잡혔다.

공작이 머리를 위로 젖히자 놀랍게도 그곳에서 수십 개의 검기 다발이 자신을 노려 공격해 오고 있었다.

바로 이안의 와룡연쇄참이었다.

슈슈슈슉!

까가강!

순간적으로 강도를 높인 오러 블레이드가 솟구쳤다.

그만큼 이번 공격은 공작에게 있어 아찔했다는 증거!

하지만 이 검기 다발을 날린 주인공은 아직도 모습을 감춘 채였다.

'대륙에 있어 나를 이렇게 몰아세울 수 있는 젊은이라니! 아니, 기사라니!'

대륙십강의 최강이라는 칭호가 아까울 정도였다.

이안은 디멘션 스텝으로 공작을 유린하다시피 공격했다. 아까완 달리 이안이 공격, 공작이 방어였다. 하지만 방어도 계속해서 밀리기 시작하더니 이안에게 세 번이나 클린 히트를 당했다.

'이대로 몰아친다!'

하지만 이안은 공작을 몰라도 너무 몰라봤다.

공작은 이안의 이동술에 어느 정도 패턴이 있다고 생각하여 이안이 도착할 지점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었다.

'벌써 알아챘나?'

이안은 이제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내기로 마음먹었다. 기세도 내공도 그 모든 것을.

솟구치는 엄청난 크기의 오러 블레이드가 검환을 만들어 내며 디그라실 공작에게 쏘아져 갔다.

하지만 하나가 아니었다.

하나로 나아간 검환은 수십 갈래로 나눠져 단단한 공작의 방어를 깨부쉈다.

'이대로 박살 낸다!'

이안은 곧바로 공작을 향해 빙허임풍으로 다가가 짧게 내리쳤다.

막지 못하면 죽는다, 공작!

파앗!

갑자기 디그라실 공작의 오른손이 슬쩍 움직였다.

'뭐, 뭐야?'

투둑!

디그라실 공작이 숨겨 두었던 한 수.

빠르다. 그것도 엄청 빠른 쾌속검!

이안은 자신의 검이 닿기도 전에 코앞으로 다가온 검을 피하기엔 늦었다고 생각했다.

곧바로 검이 맞닿을 곳에 호신강기와 반탄강기를 여러 겹이나 만들어 냈다.

콰광!

이안은 검을 놓치고 10미터 이상을 그대로 날아갔다.

반탄강기와 호신강기는 그대로 여지없이 깨졌다.

하지만 그 엄청난 쾌속검과 반탄강기에 공작도 피해를 입은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그의 오른손이 추욱 늘어졌다.

어깨뼈가 빠진 것이다.

하지만 이안은 자리에 쓰러진 채로 일어나지 못했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이안은 하늘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졌다.'

* * *

"감사합니다, 공작 각하."

"나야말로 즐거운 대련이었다고 생각하네."

이안은 공작의 저택에서 한 시간을 머물다 갔다.

패배한 후로 자신의 고칠 점을 생각해 보았고, 잃은 내공을 위해 심법을 사용해야 했다.

어느 정도 체력을 회복한 이안은 공작이 제공해 준 포션으로 외상을 말끔히 치료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또 한 번 할 수 있으면 좋겠군."

"그때는 인정사정없이 몰아칠 것입니다, 공작님. 후후!"

이안이 미소를 머금자, 공작도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그때가 되면 나 또한 발전이 있겠지. 기대하도록 함세. 아! 그건 그렇고, 곧 있으면 떠난다고 했나?"

"그렇습니다. 몇 시간 남지 않았습니다."

"흠! 바쁜 사람을 내가 붙잡고 있었군. 이만 가 보도록 하게나. 하핫! 슈레이더 왕국의 카이어스 국왕의 인복이 부러울 정도야. 정말이지……."

"그렇게 봐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이안은 긴 인사와 함께 떠났다.

디그라실 공작은 이안이 정말이지 탐나는 인재라 생각되었다.

하지만 자신이 데리고 있을 만한 그릇이 아니었다.

'멸망한 지는 이십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두려울 정도로군. 라인하르트 대제국!'

라인하르트 대제국이 지금까지 건재했다면?

어쩌면 이 대륙은 라인하르트 대제국이 숨통을 터 주지 않으면 숨도 쉬지 못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프라스 제국! 그대들은 너무 위험한 적을 만들었다.'

디그라실 공작은 이번 전쟁이 기대됐다.

그리고 다음번에 만날 로엔그람 후작, 즉 이안이 얼마나 강해졌을지도 굉장히 기대되었다.

다음 날.

슈레이더 왕국의 사절단은 열렬한 기사들의 환송을 받으며 사라졌다.

이 사절단 중에서 제일 먼저 왕궁으로 떠나고 싶어서 이안에게 매달려 보챘던 사람은 로이니스였다.

그녀는 이곳에 와서 차가운 감옥도 구경해 보고, 목숨이 이렇다 저렇다 할 여러 가지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펠타온 제국의 환송식이 반갑지는 않았다.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 * *

사절단은 빠른 속도로 질주해 나가 왕궁까지 단숨에 도착할 수 있었다. 슈레이더 왕국에 관심을 끊은 것인지 사절단에 더 이상 껄떡대는 키메라도 없었고, 프라스 제국의 어떠한 제지도 없었다.

그냥 운 없는 산적들이 마차를 습격해 피만 보고 사라진 경우가 대다수였다.

디그라실 공작과의 대련을 계속해서 머릿속으로 짚어 내며 문제점들을 찾아내던 이안은 어느새 자신의 발걸음이 대전 앞에서 멈추어 있다는 사실에 미소를 흘렸다.

얼마나 집중을 했으면, 자신이 이곳에 도착한 줄도 모르고 있었단 말이겠는가.

문 옆의 위사는 이상한 듯이 이안을 바라봤다.

"전하께 고해 주십시오."

"예, 후작 각하."

위사는 목을 가다듬더니 크게 외쳤다.

"전하∼! 로엔그람 후작 각하 드셨습니다."

잠시 후 대전에서 흘러나오는 말 한마디.

"들라 일러라."

"예∼! 들어가시지요, 후작 각하."

끼익.

대전의 문이 열림과 동시에 이안은 당당히 대전의 중간까지 들어갔다. 모든 귀족들의 눈이 쏠리는 이곳.

이안은 유독 카이드 백작을 죽일 듯이 노려본 뒤 부복 자세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전하∼ 신 로엔그람 폰 이안이 전하의 어명을 받아 무사히 사절단을 이끌고 돌아왔나이다."

그의 말에 실소를 터트리는 카이드 백작.

"흥! 제깟 놈이 무슨. 무사히?"

아주 작은 말 소리라 아무도 듣지 못했지만, 유독 귀가 밝은 이안은 똑똑히 들었다.

어린 카이어스 국왕은 목을 가다듬더니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하였다. 최대한 엄한 표정으로.

"잘 오셨소, 후작. 그간 노고가 컸을 텐데 쉬시오."

"감사합니다, 전하. 펠타온 제국에서의 일이 잘 풀린 것은 전하의 힘이 아니었다면 매우 힘들었을 것입니다."

국왕의 개입이 없었다면 이안은 꼼짝없이 그곳에서 죽고, 사절단은 물론 나라가 큰 위기에 빠졌을지도 모르는 일.

카이어스가 그런 일을 한 것은 아주 당연했다.

"아니오, 후작. 후후!"

베리카 백작도 따라 웃었다.

이안은 조용히 물러났다.

카이드 백작을 향해 이를 갈면서.

"위험하셨다면서요, 후작."

카이어스 국왕의 질문에 이안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전하. 아직도 슈레이더 왕국에 매국노들이 있기 때문에 쉽지 않았습니다."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일을 성공으로 바꾼 로엔그람 후작. 대륙에 더 널리 퍼졌으면 좋았을 일이었어요."

"과찬이십니다."

이안은 손 안에 든 술을 한 모금 털어 넣었다.

"자자, 전하? 전하도 어서 드시지요. 소신이 오늘 죽자 살자 마시자고 가져왔습니다. 허허!"

베리카 백작이 비어 버린 이안의 술잔과 반만 채우고 있는 카이어스 국왕의 잔에 술을 가득 부었다.

"헌데 매국노라니? 매국노가 누구인지 아는가?"

카이드 백작이 술을 따르며 묻자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작님이 짐작하시는 분이겠지요."

"카이드 백작?"

이안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증은 없지만 심증은 있으니 원……. 전하, 전하도 심증만으로는 귀족을 벌하기가 어렵겠지요?"

베리카 백작이 슬쩍 묻자 카이어스 국왕이 취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예? 물론이지요. 괜한 귀족들의 반발을 사서 좋을 건 없으니까요. 확실한 물증이 없는 이상은……."

"물증이라……. 물증만 있으면 되는 겁니까?"

갑자기 베리카 백작의 얼굴이 밝아졌다.

"오, 로엔그람 후작! 자네, 증거를 찾았는가?"

베리카 백작은 이안보다 작위가 낮지만, 나이가 많다는 핑계로 사석에서는 이안에게 반말을 했다.

카이어스 국왕도 딱히 그걸 뭐라 하지 않았다.

"어쩌면 찾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털 겁니다."

"털어?"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베리카 백작은 답답한 듯이 다시 물었다.

"이보게나, 자네. 자세히 좀 얘기해 보게. 털다니?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게 맞는가?"

"후작, 혹시 집무실을 털어 버린다든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할 겁니다."

"……."

이안의 단호한 말에 그 둘은 말을 잃었다. 목구멍으로 흘러가던 술이 다시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도 모른 채로.

아니, 어디서 후작이나 된 귀족이 귀족의 저택을 턴단 말인가.

"단신으로?"

베리카 백작의 물음에 이안이 고개를 당연히 끄덕였다.

"다른 사람은 거치적거리기만 할 뿐입니다."

"성공한다면 상관없지만 실패 부담이 너무 크네."

"반드시 성공해야겠지요. 전하와 베리카 백작님은 내일 카이드 백작을 조용히 불러서 오늘과 같이 이렇게 술자리를 벌여 이야기를 나눠 주시기만 합니다. 결정적 단서를 반드시 찾아올 테니."

이안은 그렇게 다짐했다.

베리카 백작과 카이어스 국왕은 말을 잊었다.

"국왕 전하의 말에 따르시게나."

베리카 백작은 회피했다.

카이어스 국왕은 이럴 때 베리카 백작이 자신에게 책임을 전가하자 노골적으로 원망 가득 섞인 눈빛으로 쳐다봤다.

"마, 마음대로 해요, 후작."

"감사합니다, 전하."

* * *

이안이 상상했던 것과는 달리 베리카 백작과 카이어스 국왕은 일을 더욱 거하게 벌렸다.

사절단의 귀환을 환영한다는 의미로 무도회를 연 것이다.

가면무도회라는 이벤트까지 열었다.

가면무도회를 연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이 무도회에 이안이 참석할 수가 없으니, 누가 대신해서 이안 역할을 하려는 것이었다.

나이도 그렇고, 키도 비슷한 카이어스 국왕이 가면을 차고 에반 옆에 서자 그럴듯한 모습이 나왔다.

베리카 백작은 염려하는 투로 말했다.

"헌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전하께서 이러셔도……."

"후후! 재미있잖아요. 연설 한두 줄만 하고 곧바로 와서 이렇게 변장하도록 할게요. 근데 정말 감쪽같아요?"

"그렇습니다. 특히 검은 머리로 염색을 했으니 아무도 알아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카이어스도 거울을 바라보더니 마음에 든다는 투로 고개를 끄덕이며 실실 웃었다.

"오늘 확실히 카이드 백작이 오기로 한 거죠?"

"물론, 수도 근처에 사는 그로서는 당연히 와야 할 것입니다. 급하게 열었기 때문에 몇 명이나 참석할지는 모르겠지만 수도에도 수십 명의 귀족들이 살고 있으니……."

"후후! 좋아요. 오늘 후작의 일에 동참을 해 보자고요."

* * *

어디에 잠입한다는 것은 소드 마스터라고 해도 힘든 일일 것이다. 병사들도 있고 감각이 뛰어난 기사들까지 있는 백작가의 저택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이안은 밤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베리카 백작과 국왕이 벌여 놓은 잔치에 마차를 타고 빠르게 사라지는 카이드 백작을 바라보다가 구름에 달빛조차 가렸을 때 돌입했다.

팟!

가볍게 허공을 박차 오르는 발걸음.

그의 무형에 병사는 물론이거니와 감각이 뛰어난 기사조차도 쉽게 알아차릴 수 없었다.

이안은 카이어스 국왕이 쥐어 준 지도를 보며 빠르게 집무실을 향해 들어갔다.

집무실에 도착하자 이안이 이미 준비해 두었던 캔슬 스크롤을 곳곳에 찢었다.

중요한 서류들은 모두 아티팩트를 이용하여 알람 마법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캔슬이 아니면 이 일은 실패였다.

이안은 캔슬을 사용하며 찢은 스크롤들도 모두 뒤에 매단 가방에 집어넣으며 곳곳의 수납장을 열어 보기 시작했다.

'이게 아닌가?'

이안의 손길이 갑자기 조급해졌다.

스크롤 마법이 영원한 것이 아닌지라 캔슬 마법은 1시간 후면 풀려 버린다.

'집무실이 아니다!'

이안은 집무실 이곳저곳을 돌아다녀 봤지만 카이드 백작이 매국노라는 증거를 찾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망할 뚱땡이. 도대체 어디에 숨겨 놓은 거지?'

이안은 카이드 백작의 그림을 주먹으로 박살 내며 떨어진 그림을 지그시 밟아 주었다.

"잠깐? 백작님 집무실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지 않았어?"

"뭐?"

집무실 바깥에서 순찰을 도는 병사들의 소리. 이안은 바깥에 설마 병사들이 있을 거라곤 상상하지 못하고 곧바로 그림과 유리 조각들을 발로 차 책상 밑으로 밀어 넣었다.

'일이 꼬이는군.'

집무실에 없다면 침실로 가 보면 된다. 이안은 곧바로 디멘션 스텝을 이용해서 집무실을 빠져나와 병사들의 정찰망을 요리조리 피해 나갔다.

이안에게 있어 이렇게 쉬운 건 없었다.

침실로 곧장 도착한 이안은 다시 캔슬 마법이 담긴 스크롤을 여러 곳에서 찢으며 알람 마법을 제거했다.

하지만 그때였다.

단순히 알람 마법만을 제거하기 위해 사용된 캔슬 스크롤로 인하여 갑자기 침실에서 작은 소리가 들렸다.

두두두두둥!

"설마, 캔슬 스크롤로 인해서 일루젼 마법까지 없어진 건가?"

뜻밖의 수확이었다.

이안은 쾌재를 부르며 소리가 난 곳을 찾았다. 벽 한 면을 모두 책장으로 가린 곳.

가운데에 있는 책들을 모두 빼내자 구멍이 뚫려 있는 작은 통로가 보였다.

"이쪽인가?"

이안은 그쪽으로 향하자고 마음먹었다.

'국왕 전하가 주신 지도에 비밀통로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그럼 백작이 따로 그놈이 숨을 공간을 만들어 놓은 것이로군.'

이안은 책장을 오러 블레이드로 사뿐히 잘라 내며 그 안으로 들어갔다.

어두컴컴한 통로였지만 이안의 시력으로 구별 못할 정도는 아니었기에 그다지 큰 위험은 없었다.

지하에 통로를 만들어 놓은 것인지, 이안의 발걸음은 계속해서 원형 통로를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그렇게 한 5분쯤 걸어 나갔을까.

이안의 눈이 갑자기 환해지며 불빛이 보이는 곳이 있었다.

"이곳은 뭐지?"

마법사가 사용하는 마법 연구실쯤으로 보였다. 이안은 수십 개의 침대 위에 나체로 묶여 있는 탄탄한 체격의 남자들을 보며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서, 설마!"

키메라다.

완전한 인간의 시체인 자도 있었고, 키메라로 변화 중인 자도 있었다. 이안은 설마 이 왕국의 귀족 중 하나인 카이드 백작이 자기 비밀통로를 만들어 두고 이런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 치를 떨었다.

"일단 이것은……."

이안은 이곳을 영상마법을 이용해서 저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증거가 될 만한 자료들은 한 번 쓰윽 읽어 본 뒤 모두 가방으로 집어넣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뚜벅뚜벅.

조용한 발걸음으로 걸어오는 자.

'카이드 백작이 돌아왔을 리는 없을 터.'

이안은 숨을 죽이고 벽 한 군데에 몸을 숨겼다.

피할 수도 있지만 그가 누구인지는 꼭 영상마법에 담아 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통로를 끝으로 모습을 드러낸 자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다. 리치였다!

칠흑 같은 두개골 사이로 검은 안광을 뻗치는 그 리치는 양손에 파이어 볼을 전개하며 담담히 말했다.

"어떤 쥐새끼인지는 모르나 너는 걸렸다. 어서 나와라."

이안은 영상마법을 계속 전개했다.

그리고 곧바로 리치를 향해 걸어 나왔다.

리치의 표정을 알 수는 없었지만 이안을 보자 꽤나 놀라는 눈치였다.

"또 너인 거냐?"

그는 지긋지긋하다는 듯이 이안을 보며 말한다.

이안도 그리 그가 반갑지는 않았다.

"설마 이곳에서 다시 마주할 줄은 몰랐다."

리치도 마찬가지였다.

"나 또한 네놈이 보고 싶지는 않다. 죽기 직전까지 헬 파이어에 맞았으면 얌전히 있을 것이지. 나설 데 안 나설 데 분간도 못하고 움직이는 네놈이 싫다."

이안은 그때를 회상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하지만 지금의 경지는 그때와 차원이 달랐다.

"마음대로 해 보시지."

이안이 마음대로 하라는 투로 말하자, 짧게 코웃음을 친 리치가 곧바로 손을 들어 올렸다.

"흥! 자리에서 일어나라."

수십 구의 키메라들이 이 좁은 방 안에서 일어나자 정말 비좁아 보였다. 그리고 그들은 리치를 직시하며 바라보더니 흐리멍덩한 눈으로 다시 이안을 노려보았다.

적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너희들을 죽이려고 했던 놈이다. 반드시 죽여라."

"크르륵!"

키메라들이 재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방금까지 침대에 누워 있었다고 하기에는 믿을 수 없는 속도였다.

이안은 첫 번째 키메라의 공격을 피해 내고 곧바로 스프링처럼 공중으로 튕겨 올라가더니 와룡연쇄참으로 그들의 몸을 순식간에 때렸다.

텅텅!

북의 가죽이라도 터지는 것처럼 키메라들의 몸에선 피가 흘러나왔다.

하나 갈라지지 않는 것을 보니 가죽을 강화시킨 놈들이 분명했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입을 여는 이안.

"너와의 인연은 이곳에서 끊도록 하마!"

이안은 디멘션 스텝을 밟기 시작하며 오러 블레이드를 이용하여 키메라들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키메라들의 비명 소리로 방 안이 울렸다.

이안은 키메라를 베는 데 일말의 주저함도 없었다. 오히려 키메라로 변한 그들을 구원이라도 하듯 고통 없이 죽였다.

"이놈!"

리치는 양손에 든 파이어 볼을 이안에게 내던졌다.

쾅! 쾅!

두 구의 파이어 볼이 이안의 몸을 스치지도 못하고 곳곳을 폭발시켰다.

이안은 키메라들보다 애초에 그들을 조종하는 리치에 대해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발걸음은 곧바로 리치의 머리 위로 향했다.

뻗어지는 검.

섬전 같은 속도로 움직이는 다리.

이안의 검은 정확히 리치의 머리를 쪼갤 듯이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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