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인하르트-47화 (47/60)

■ 제47장 떠나는 자들 □

저벅저벅!

잘생긴 한 청년의 발걸음이 문 앞에서 멈추었다. 시녀는 그 청년을 보자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

"황녀님, 로엔그람 후작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조심스레 말하는 시녀에게 잠시 후 허락의 소리가 들려왔다.

"모시세요."

시녀는 살짝 웃음기 띤 얼굴로 청년에게 말하였다.

"들어가시지요."

이안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방문을 덜컥 열었다. 그의 눈길에는 여느 때와 같이 차를 한 모금 입에 대고 있는 이리스 황녀와 잔소리를 늘어놓고 있는 그리텔이 보였다.

"황녀님! 아니, 차로 인해 중독되신 분이 또 차를 드시는 겁니까?"

황녀는 수줍게 웃었다.

"괜찮아요. 이 차는……. 아! 로엔그람 후작, 어서 와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이리스 황녀는 이안을 반겼다.

3황자가 유배되고, 글루노 후작은 참수를 당하고 난 후 한 달이나 지나서였다. 3황자를 지지하던 귀족들이 들고 일어섰지만 아직까지 그들의 힘은 황제에 비할 바가 되지 못했다.

그들의 세력은 금방 와해되어 1황자와 2황자의 세력에 흡수되었다.

이안은 그때가 되어야 알 수 있었다.

펠타온 제국은 이제 거리낌이 없다는 것을.

이안이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황녀님, 몸은 괜찮으신지요?"

"그리텔 님의 잔소리만 아니라면 괜찮아요."

그리텔이 붙어 있는 이상 그녀의 생명은 3달이나 연장되었다. 한 달이 지났으니 두 달이 남은 상태지만 그녀는 초조해 하지도 않고 오히려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텔은 울상을 지었다.

"아니, 황녀님…… 이 노인을 어떻게 보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건지."

"호호! 농담이에요."

이안은 그리텔을 보며 말했다.

"그리텔 님은 언제 오신 겁니까?"

그리텔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나도 방금 왔다네. 모든 일을 뒤로 미루고 달려왔건만 황녀님께서는 그리 반기는 눈치는 아니군. 오히려 자네를 더 반기는 눈치야."

황녀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하지만 그녀는 찻잔에서 입을 떼고 용기 있게 말한다.

"허, 헛소리예요. 전 그리텔 님도 많이 반겼다고요. 아, 맞아! 해독제는 어떻게 되었죠?"

그녀는 화제를 돌렸다. 하지만 그녀가 당황하고 있는 것은 눈치가 빵인 사람도 알아볼 수 있었다.

"안타깝지만 아직 못 찾았습니다. 보통 다크 포이즌의 해독제 같은 경우는 흑마법사들이 가지고 있는데 흑마법사들과의 거래가 신통치 않답니다. 게다가 펠타온 제국은 흑마법사란 모든 흑마법사는 기사들이 처단을 했기 때문에 그들과 악감정 때문에라도 쉽게 만나 주질 않습니다."

그녀는 실망한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군요."

그리텔은 그녀가 더 이상 실망하지 않게 응원했다.

"황녀님, 꼭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이 노부도 열심히 찾고 있으니 포기하지 마십시오."

"네, 그래야겠지요."

이안이 황녀의 몸 상태를 확인하고 나오자마자 곧바로 향한 곳이 이노센트의 딸인 '루네'가 있는 객궁이었다.

메모라인 플라워의 사용법을 알고 있는 그리텔 덕분에 루네를 다행히 치료할 수 있었다. 하나 그녀의 몸은 너무도 쇠약해서 곁에서 보지 않는다면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를 정도로 풍선 같은 존재였다. 그리하여 이안은 황제께 요청하여 대대적으로 루네의 침실을 객궁으로 옮긴 뒤 치료를 했다.

루네의 몸 상태는 중원에서도 뭐라 단정 지을 수 없는 특이한 병이었다. 중원에는 중원에만 따로 존재하는 병이 있다면, 이곳 유라시아 대륙 또한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만 존재하는 병이 있다.

이안은 루네의 병이 바로 그런 것의 한 종류라고 단정 지을 수밖에 없었다.

칠음절맥과 다르게 그 병은 마치 남자들이나 걸린다는 태양지체와 같은 상태였다. 하지만 양기라기보다는 여성의 주체인 음기가 계속적으로 흘러나와 나이가 얼마 되지 않아 사망에 이르는 것.

그것뿐만 아니라 그것이 유전이 된다는 점과 한 대를 거슬러 두 대째에 일어난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어서 오세요, 로엔그람 후작님."

미리 시중을 들고 있던 시녀가 이안을 알아보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이안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마주 답하고 곧바로 루네의 방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 누워 있던 루네는 방문이 열리는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그리고 그녀는 곧바로 반색했다.

"아, 오빠!"

루네는 이안의 방문을 크게 환영하는 눈치였다.

그녀의 몸을 치료하고 난 뒤로 루네는 항상 이안을 보고 '오빠'라는 칭호로 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안은 그럴 때마다 자꾸 중원에 있는 연이가 생각나니, 중원의 냄새가 그리워지지 않는 날이 없었다.

'이곳에 온 것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

이안은 그런 마음을 훌훌 털어 내고 웃으며 입을 열었다.

"몸은 괜찮아?"

"으응!"

그녀는 힘껏 대답할 수 있는 만큼 크게 얘기했다.

하지만 그래 봤자 이 방 안을 빠져나갈 정도로 큰 소리는 아니었다.

이안은 고개를 양쪽으로 돌리며 물어보았다.

"이노센트 님은 어디 가셨지?"

"우웅! 나도 모르겠어. 어젯밤부터 안 보이던걸."

"나 참, 어디 가신 거지……."

항상 치료 받을 때만 해도 있는 사람이다. 혹시 자기 딸이 어떻게 되는 건 아닐까 하고 염려하는 눈빛으로 이안의 손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그가 생각났다.

"뭐, 어찌 됐든 어딜 가서 목숨을 위협받을 사람은 아니니까……. 자, 오늘도 치료 받아야지. 호흡법은 어느 정도 했어?"

루네는 작은 손을 내밀면서 손가락 4개를 폈다.

"4시간!"

"자, 그럼 누워 봐."

이안은 가볍게 손을 허공으로 튕기며 그녀의 혈도를 제압했다. 치료 과정에서 상당히 아픈 티를 내기 때문에 수혈을 짚은 것이다.

아무 이상 없다면 3시간 후에 다시 깨어날 터.

이안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루네의 몸 상태를 확인했다.

* * *

펠타온 제국의 국경인 아브로 후작가.

프라스 제국과 정면으로 맞대어 있는 아브로 후작가는 그들을 경계하는 병사 둘만이 있었다.

메토스는 국경을 지키고 있는 아브로 후작가의 자랑스러운 병사 중 하나였다.

올해 나이 30에 이른 그는 며칠 전 부인을 얻고 난 뒤로 매일같이 퇴근 시간이 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공처가 중의 공처가였다.

"메토스, 경비 안 서나!"

"아, 예, 옙! 섭니다, 서요."

메토스는 밤을 기대하며 실실 웃다가 얼른 일어나서 모자를 고쳐 쓴 뒤 부리부리한 눈으로 아브로 평원을 쳐다봤다.

그 뒤로 갑자기 낄낄거리는 병사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낄낄낄. 이 미련한 친구야, 이 시간대는 대장님이 오시지 않는다는 거 모르냐?"

메토스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그에게 핀잔을 준 것은 다름 아닌 대장이 아니라 바로 동료 병사인 휴렌이었다.

"젠장! 다시 한 번 그래 봐라. 그땐 내 창의 따끔한 맛을 보게 될 테니."

메토스는 최대한 위협적인 눈빛을 살포하며 자신의 창을 내밀었다.

휴렌은 겁먹은 표정으로 몸을 사렸다.

"아이고, 이놈이? 하나뿐인 친구를 죽이려고 하네."

"흥!"

메토스는 그의 말을 무시하며 고개를 평원으로 옮겼다.

지금 시간이 점심시간이라 대장님이 오시지 않아 이리저리 나뒹굴어도 뭐라 할 사람은 없지만, 휴렌에게 놀림거리가 되니 놀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다.

그러다 갑자기 그의 눈에 이상한 것이 포착됐다.

"어? 저게 뭐지?"

아브로 평원 끝자락에서부터 엄청난 양의 먼지 폭풍이 일어나며 무언가가 떼로 달려오고 있는 것이었다.

흡사 소 수천 마리가 달려오는 듯한 광경이었다.

메토스는 자신이 잘못 본 것이 아닌가 하고 소매로 눈을 스윽 닦고서 다시 바라봤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이곳 아브로성까지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이봐, 휴렌! 저것을 봐 봐."

"왜, 이 친구야?"

"아, 글쎄. 빨리 와 보라니까 그러네."

그의 말소리가 좀 컸는지 뒹굴거리던 병사들도 고개를 내밀고 평원 끝자락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어라? 저게 뭐지?"

다른 병사들도 그제야 사태를 파악했는지 갑자기 걱정하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아니라면 상관없지만, 만약 그것이 적이라도 된다면 한시라도 빨리 기사들에게 알려야 했다.

휴렌은 그것을 보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이봐, 뭘 걱정해. 오늘 뭔가 오려는 모양이었나 보지. 봐 봐. 정찰대에서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았잖아."

아브로 평원에는 수십 명으로 이뤄진 정찰병들이 돌아다녔다.

메토스는 병사들에게 물었다.

"이봐, 오늘 정찰병들에게 올라온 별다른 소식 없어?"

병사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모른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저 정도 속도면 곧 도착하겠는걸? 일단 기사님들에게 알리자."

"그래야겠지? 그래, 일단 알리고 보자."

아무것도 아니면 따끔한 질책 한 번이면 되지만, 만약 적이면 사태를 파악하지 못하고 곧바로 성이 쓸려 나갈지도 몰랐다.

그 병사 둘은 굳은 결심을 하고 곧바로 기사들에게 달려갔다.

기사들과 같이 밥을 먹고 있던 아브로 후작은 사태가 심각하게 흘러간다는 것을 알고 곧바로 성벽으로 올라왔다. 펠타온 제국의 후작인 그는 국경을 맡는 자답게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고수였다.

시력 좀 좋아 보이는 병사나 익스퍼트의 능력으로 사태를 파악해 보려는 기사들과는 달리 그는 엄청난 시력으로 달려오는 것의 정체를 꼼꼼히 살펴봤다.

"큰일이다! 키메라다!"

며칠 전 상부에서 내려온 존재들이 있다.

프라스 제국에서 은밀하게 키우고 있다는 자들.

바로 키메라!

그들이 지금 국경으로 수천 마리가 쳐들어오고 있었다.

"성의 모든 군대를 끌고 와라! 전투다! 전쟁이다! 프라스 제국이 전면전을 벌여 왔다."

기사들의 눈이 갑자기 판이하게 달라졌다.

"예!"

나태했던 병사들도 투구를 고쳐 쓰고 지금까지 수백, 수천 번 해 온 훈련대로 궁병들은 곧바로 궁을 들었다.

국경을 지키는 궁병들에게 지급되는 컴퍼지트 보우.

미노타우루스의 뿔을 엮어 만든 시위와 활대는 쉽게 부러지지 않고, 힘을 증폭시켜 보통 장궁보다도 정확도와 사정거리가 배는 길었다.

단점이 있다면 상당히 많은 근력을 필요로 한다는 점인데, 펠타온 제국의 병사들은 그런 훈련을 수년간이나 받아 오고 있었다.

"궁병, 발사 준비!"

시위가 팽팽하게 당겨지는 소리가 귀에 익숙하게 들려왔다.

아브로 후작은 키메라들이 점점 다가오자 기괴한 모습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병사들을 다독였다.

"저건 키메라다! 제군들이 알다시피 키메라는 여러 몬스터들을 엮어 만든 집합체지. 허나 그 아무리 강하다 해도 우리는 제국의 병사들이다. 가족을 지키고 싶거든 화살을 하나라도 더 당겨라! 수는 고작 수천에 불과하다! 너희들의 화살은 강철 갑옷이라 해도 뚫을 수 있다! 알겠는가, 제군들!"

"예, 후작 각하!"

"좋다! 신호를 보내면 모두 쏘기 시작한다."

"알겠습니다."

아브로 후작은 기사들에게 명했다.

"그대들은 성문을 지켜라. 그리고 키메라들이 도망갈 조짐이 있으면 성문을 박차고 나와서 곧바로 그들을 토벌하라."

"예, 후작 각하!"

아브로 후작은 유능한 지휘관이었다. 그는 여타 많은 전쟁을 이끌어 온 맹장이었다.

하나 그가 간과하고 있는 것이 딱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지금 이들이 싸우는 자들은 단순히 몬스터나 사람들이 아니라 키메라라는 점이었다.

"쏴라!"

아브로 후작의 명에 따라 2만의 병사 전원이 곧바로 화살을 쏘았다.

쏴아아아아!

하늘을 빼곡히 덮는 엄청난 수의 화살들.

150미터에서 쏘았기 때문인지 명중률은 형편이 없었지만, 키메라들 수가 워낙 많았기 때문에 눈먼 화살에 맞는 키메라들이 발생했다.

"키에엑!"

아브로 후작은 만족한 웃음을 보이며 다시 명을 내렸다.

"다시 화살 준비!"

시위를 당기는 병사들.

"쏴라!"

쏴아아아아!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키메라들은 동료애가 없는 괴물들 집단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옆으로 달리던 키메라를 방패 삼아 화살을 막아 내기 시작했다.

이번의 화살은 그 어떤 키메라도 머리에 맞지 않고 다리나 팔에 맞는 둥 좋은 효과를 내진 못했다.

"아니?"

아브로 후작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자신의 동료를 방패로 삼기 때문에가 아니라 화살을 스스로 뽑아내니 저절로 상처가 치료되고 있다는 점에서였다.

후작이 놀란 사이 키메라들은 이미 성에 거의 근접해 있었다.

"다시 한 번 활을 쏴라. 놈들은 이 성을 올라오지 못한다!"

성문은 기사들이 막고 있으니 쉽게 들어올 수 없을 것이고, 키메라들에게 날개가 없는 이상 30미터나 되는 성벽을 올라올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분명 그래야 했고, 아브로 후작의 생각은 맹장다웠다.

하지만 이들은 키메라였다.

척척!

그들은 마치 피라미드처럼 탑을 쌓기 시작하더니 그 탑을 이용하여 성벽을 단숨에 올라왔다.

"크아악!"

성벽을 타고 올라온 키메라에 의해 한 병사는 활을 놓쳐 버리고 첫 번째 희생자가 돼야 했다.

"놈들에게 아낌없이 화살을 퍼부어 줘라. 성벽에 올라온 놈이 있다면 창으로 찔러 죽여라!"

그 말을 듣고 한 병사가 용기 있게 그 키메라의 등을 향해 창을 찔렀다.

"흐압!"

힘껏 쥔 창에 그 누구라 해도 찌를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어째서인지 창은 가죽에 틀어 박혀 더 이상 전진을 못하고 있었다.

병사는 어찌 된 일인지 자신의 창과 키메라를 번갈아 쳐다봤다.

"키엑?"

키메라는 통증을 느끼고 곧바로 등을 돌렸다.

그러자 병사 하나가 눈에 띄었다.

"키에에엑!"

"으아아앗!"

그 병사는 정신없이 뒤로 도망갔다.

키메라는 그 병사를 쫓아가서는 사지를 찢어 죽이고 피와 살을 먹기 시작했다.

"으으으! 괴물들이다!"

"놈들에게 창이 통하지 않는다!"

성벽 위로 올라오는 키메라들이 점차 많아지자 병사들은 아무것도 못하고 바로 도륙당했다.

아브로 후작은 지휘만 하기에는 벅차다는 걸 느끼고 곧바로 자신도 검을 들고 키메라들을 도륙했다. 하나 느낀 것은 단순한 창이 아니라 적어도 익스퍼트들이나 사용하는 오러가 아니라면 놈들의 머리통을 단숨에 끊을 수 없다는 점이었다.

놈들의 위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익스퍼트들이나 뚫을 수 있는 갑옷을 입은 거와 다름없는 가죽을 지니고 있고, 몸은 날렵하기 그지없었다. 또한 그놈들의 발톱이나 손톱에 맞으면 즉사를 면하기 어려웠다.

"기사들을 불러와라! 놈들을 상대하기 어렵다. 기사들을 불러와라!"

"후작님, 저기를 보십시오! 성문이 뚫리려 하고 있습니다!"

"뭐, 뭣이라? 이, 이런!"

아브로 후작은 자신의 힘에 한탄을 느껴야 했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엄청난 맹장이었다고 해도 예상하지 못하는 한 막아 내지 못했을 터였다. 엄청난 힘을 지녔으면 그 어떤 전략도 통하지 않는 법.

그날 아브로 후작가는 키메라들 5천을 막지 못하고 2만이 전멸을 당하고 마는 사건이 일어났다.

"으하하하!"

프라스 제국의 속국인 제베르 공국.

킹 제레브가 지배하고 있는 이곳에서 그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대공 각하, 경하 드리옵니다."

한 가신이 그의 밑에서 부복 자세를 취했다.

"그래그래, 당연하지! 생각보다 대단해. 아주 대단해! 펠타온 놈들이 예상이나 했겠어? 뼈 빠지게 키워 놓은 기사들이 설마 키메라가 될 줄이야. 으하하!"

킹 제레브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아브로 후작가는 아주 날벼락을 맞은 기분이겠군. 쯧쯧, 그러기에 왜 쓸데없이 자존심을 내세운 거야? 항복했으면 전멸은 안 했을 거 아냐?"

가신이 서둘러 대답했다.

"대공 각하, 키메라들은 항복을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알아들을 수 있는 건 공격과 방어, 살육 이런 단순한 것뿐입니다."

짝!

킹 제베르는 손뼉을 쳤다.

"아, 그렇지! 그랬어, 쯧쯧. 그런 자아도 없는 것들에게 도륙을 당하다니 참으로 불쌍한 곳이야, 아브로 후작가는."

"폐하께서 대공 각하께 기대가 아주 크십니다."

"하하! 폐하께서도 좋아하실 줄 알았다니까. 폐하께는 잘 말씀드려. 곧 이 대륙을 폐하께 갖다 바친다고 말이야."

"그분께서도 그리 알고 계십니다."

"하하하! 역시 폐하와 나는 정말 얘기가 잘 통한다니까."

가신은 고개를 숙였다가 살짝 입을 열었다.

"이제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대공 각하. 아브로 후작가를 미뤘으니 계속 내버려 두겠습니까? 내버려 두면 아마 그놈들은 수도까지 미친 듯이 달려갈 겁니다."

킹 제레브는 한 손으론 와인을 마시고 다른 한 손은 휘휘 저었다.

"미친 듯이? 좋지, 아주 좋아. 이번은 선제공격이라고 생각해 두라 해. 내버려 둬."

"그리 전하겠습니다."

"그래, 어여 나가 봐."

"예, 각하!"

가신이 서둘러서 나가자 킹 제레브가 입을 실룩거렸다.

"이거, 정말 기대되는군. 펠타온 제국! 너희들이 어떻게 놈들을 막아설지."

* * *

"이런, 더러운 것들!"

브리온 황제는 용상을 주먹으로 강하게 때렸다.

쾅!

그의 소리에 놀란 신하들이 몸을 움츠렸다.

"감히 본국에서 키워 놓은 기사들을 키메라로 삼아? 이런 개 같은 자식들!"

브리온 황제가 이리도 크게 화내는 모습을 처음 보는 그들로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만 그때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딱 한 명.

바로 디그라실 공작뿐이었다.

"폐하, 일단 고정하시지요."

"고정? 지금 공작은 내가 고정하게 보이는가? 아브로 후작가가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날아갔어. 죽은 병사들 숫자가 얼만지나 아시오? 2만이야, 2만!"

정예병들이 한순간에 2만이나 날아가 버렸다.

"그리고 그 키메라들이 이 수도를 향해 올라오고 있다는데 도대체 경들은 대책조차 없이 대전에 왜 온 거요, 왜! 경들이 정말 본국을 지키는 자랑스러운 귀족들이 맞소?"

귀족들은 입을 꾹 다물었다.

더 이상 디그라실 공작도 뭐라 하지 못했다.

오늘 올라온 아브로 후작가의 멸가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점이 상당히 많았다.

아니, 어떻게 2만이 지키는 국경이 단 하루도 안 되어 6시간 만에 사라진단 말인가?

"키메라의 힘은 어떤지 알아봤소?"

조금 진정한 브리온 황제가 디그라실 공작에게 물었다.

"익스퍼트 정도의 힘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놈들의 힘과 민첩은 인간을 뛰어넘기 때문에 족히 익스퍼트 중급이 아니라면 맞설 수 없는 놈들이라 하옵니다."

"걱정이군! 걱정이야. 하필이면 이럴 때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뭔가 대책이 없겠소?"

"소신이 병사들을 이끌고 나가 일단 막아 보겠사옵니다."

브리온 황제는 디그라실 공작이 내놓은 말에 못마땅한 듯 고개를 돌렸다.

"안 돼. 그건 공작도 잘 알고 있지 않소? 병사들로는 상대가 안 된다는 걸."

"제국의 모든 기사들을 불러 모으겠습니다. 펠타온 제국의 수많은 기사들을 불러 모은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닐 것이옵니다."

"지금 키메라들이 도착한 곳은 어디인가?"

자작층 계열에 있는 남자가 벌떡 일어났다.

그가 바로 황제의 전속 정보를 맡고 있는 유가든 자작이었다.

"현재 키메라들은 아브로 후작 각하의 영지를 넘어서 다음 영지인 아트론 자작의 영지에 도착할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그들의 예상 도착 시간은 앞으로 하루 후입니다."

브리온 황제는 탄식했다.

"하루! 짧군, 짧아!"

그때, 귀족들 사이에서 한 건장한 남자가 일어났다.

"폐하! 신 조하리 백작이옵니다. 한 말씀 올려도 되겠사옵니까?"

조하리 백작은 브리온 황제의 측근 중 한 명이었다. 제국 안에서는 디그라실 공작과 이노센트를 제외하면 제일 강한 자였다.

"해 보게."

"신이 기사단을 이끌고 가겠나이다. 농성을 펼친다면 충분히 막을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오, 조하리 백작!"

브리온 황제의 얼굴이 밝아졌다.

조하리 백작이라면 믿을 만했다.

"백작만 믿겠네!"

"전쟁이 일어났다."

키메라에 대한 소문은 일파만파로 퍼졌다. 예전에도 소규모적으로나 대규모적으로 몇 번 부딪친 적은 있었으나 아브로 후작가가 일방적으로 밀린 적은 처음이었다.

발 없는 소문이 말보다 빠르다고, 키메라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펠타온 시티의 제국민들 모두가 그 사실을 알았다.

하나 펠타온 제국민들은 그 사실에 대해 안일하게 생각했다. 펠타온 제국에서 살아온 상인도, 노인도, 농부도, 심지어는 이제 갓 열 살이 된 아이조차도 자신이 들 수 있는 무기를 힘껏 쥐었다.

이안이 그들을 보며 느낀 것은 참으로 펠타온 제국은 강하다는 것이었다.

제국민 모두는 다른 나라로 피신할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나라를 지키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

그들은 프라스 제국의 공격을 기다렸다는 듯이 행동했다.

"우린 지금 아트론 자작가로 향하오. 싸울 수 있는 모든 자들은 나 조하리 백작과 뜻을 함께해 주시오!"

그의 말 몇 마디에 수천 명이 넘는 건장한 남자들이 몰려들었다.

펠타온 제국은 기사들의 나라다.

그들은 고작 농부라 해도 뼛속 깊이 기사도가 남아 있었다.

그리고 농부들의 힘도 상당히 막강했다.

펠타온 제국의 아이들은 소꿉놀이를 할 때 전쟁놀이를 하고, 아빠나 엄마 소리를 떼기 전에 유명한 영웅들의 이름을 먼저 외웠다.

놀기보다는 체력 단련에 힘을 쓰고, 잠을 자기보다는 명상에 시간을 투자했다.

그렇다.

펠타온 제국은 제국민들 전체가 병사들이나 다름없는 훌륭한 진짜배기였다.

두려움이 없었다. 상대해 오면 악에 받쳐서라도 되돌려 주었다.

그게 펠타온이었다.

"어찌하실 겁니까, 후작 각하. 소문이 사실이라면 아트론 자작가가 밀리는 건 순간입니다."

은의 기사단의 칼리프 단장이었다.

"어찌해야 하지?"

이안은 잠시 망설였다.

현재 이안이 디그라실 공작과 같이 움직인다면 키메라들을 막아 내는 데 일조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슈레이더 왕국에 있어 이안은 아주 큰 인재이며 존재였다.

"좋아. 어차피 이 일은 펠타온 제국의 일. 지금 칼리프 단장은 왕국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시오."

"명을 받듭니다, 각하!"

칼리프는 부복 자세에서 일어나 곧바로 사라졌다.

이안의 고민은 금세 사라졌다.

프라스 제국이 키메라를 준비해 온 만큼 펠타온 제국 또한 준비해 온 비장의 수가 아주 많았다.

예를 들어 속성검법.

단순히 오러라는 것을 떠나 자연의 기운을 불어넣어 데미지를 더욱 강화시키는 이 속성검법은 동급의 수준인 기사들에게 아주 효과적이었다.

분명 속성검법을 전개하는 기사들이 출격한다면 키메라들도 상당히 고전을 해야 함이 분명했다.

이안은 상황이 오히려 재밌게 돌아간다는 생각에 웃음을 지었다.

'펠타온 제국한테는 미안하지만.'

"지금 이 상황이 너무나 기대돼. 그리고 결과가……."

"떠난다고 했나?"

"그렇습니다, 폐하. 소신의 일은 펠타온 제국에 와서 잘 해결되었고, 이제 전쟁만을 위한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음……."

브리온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러세. 그럼 로엔그람 후작은 몸조심해서 잘 돌아가시오. 지금껏 본국에 섭섭했던 감정은 모두 내가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으니……."

이안은 부복 자세에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아닙니다, 폐하. 오히려 동맹국인 펠타온 제국의 일이 생각보다 잘 풀려 저희야말로 뜻 깊은 일을 했다고 생각하고 있사옵니다."

브리온 황제는 인자한 표정으로 이안을 직시했다.

"그동안 이리스에게 잘 대해 준 점은 아주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또한 모든 정보력을 풀어 이리스의 해독제를 찾을 것이고. 혹, 해독제를 찾게 되면 꼭 우리에게 연락해 줄 수 있나? 하하핫!"

브리온 황제가 호탕하게 웃었다.

이안도 살짝 웃음을 지었다.

"물론이지요, 폐하."

"상황이 상황인지라 축하 파티 하나 못해 주는 것, 정말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의 마음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럼 조심히 돌아가게."

이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뒷걸음질로 사라졌다.

브리온 황제는 이안을 보며 상념에 빠졌다.

'엄청난 젊은이다. 로엔그람 후작, 평생 잊지 못할 이름이야.'

확실한 건 하나 알 수 있었다.

'이제 대륙은 저 젊은이를 위주로 돌아갈 테지. 아니, 이 모든 세상이 저 젊은이들의 이름으로 말이야.'

패기, 능력, 용기, 때론 뻗어 오는 무모함까지.

그런데 갑자기 브리온 황제가 다른 생각을 하게 됐다.

"헌데 우리 이리스의 신랑감으로는 좀 부족하려나……."

그는 이리스를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었다.

"제가 없는 동안은 루네를 그리텔 님께서 봐 주실 겁니다. 그리텔 님이라면 아실 테죠?"

이안이 묻자, 이노센트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밤새 어딜 갔다 왔는지 자세하게 얘기해 주지 않아서 그런지 루네는 뾰로통해져 있었다.

이노센트는 이안을 보며 말하였다.

"조국으로 떠나는 건가?"

"제국으로 온 것은 사절단의 임무 때문이죠."

"허허! 루네가 참으로 슬퍼하겠군."

그는 너털웃음을 흘렸다.

이안도 루네와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이 안타깝긴 했지만, 그는 본디 슈레이더 왕국의 후작.

이젠 다시 돌아가서 국왕에게 전할 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루네는 돌아누워 있다가 이안이 떠난다는 사실에 등을 반대쪽으로 홱 돌려 이안을 바라보았다.

"오빠, 떠나?"

이안은 루네의 머리를 쓸어 넘겨 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빠르면 내일, 늦어도 모레까지는 떠날 거야."

"어디로?"

"슈레이더 왕국으로."

루네는 열다섯 살이나 먹은 소녀답지 않게 당장 눈물이라도 터트릴 것 같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루네가 아무리 나이를 많이 먹었어도 병 때문에 제대로 된 지식을 취해 본 적이 없었고, 항상 침대 생활만을 반복해 왔다.

그녀가 기억하고 있는 유일한 책은 고작 아직도 아이라고 생각하는 이노센트가 들려준 동화책뿐이었다.

"괜찮아. 언젠가 반드시 와야 할 테니까."

이안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이노센트가 갑자기 그에게 살짝 귀띔을 했다.

"잠시 할 이야기가 있네."

이안은 루네가 눈치 채지 못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가시죠."

이안은 이노센트를 데리고 한적한 곳으로 갔다.

"중요한 이야기입니까?"

"그리 중요하지는 않네. 내가 요 며칠간 루네 곁을 지키지 못한 이유는 루네를 돕는 자네는 물론 본국까지 도와주고 싶었기 때문이네."

이안은 그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노센트는 잠시 후 다시 말했다.

"황녀님의 해독제가 있는 곳을 알아냈네."

"그, 그걸 찾으신 겁니까?"

"아니, 어쩌다 보니 있는 곳을 찾아냈을 뿐. 하지만 있다고 장담은 못하네. 어디까지나 나에게 정보를 공급해 주는 상인이 흘려 준 이야기일 뿐이니까."

이안은 조심스레 그 이야기를 파고들었다.

"상인이란 자가 그렇게 얘기를 한 것을 보니 믿는 증거가 있는 거로군요."

본디 소문은 뭔가 믿음직한 증거가 있어야 퍼지기 마련이다.

이노센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에 한 시약상인에게 해독제를 사 간 사람이 있네."

"그자가 누굽니까?"

"과거 펠타온 제국의 한 거상이지. 하지만 해독제를 먹기도 전에 죽어 버렸지. 메모라인 플라워를 이용하지 못한 그는 오래 살지 못했으니까 말일세."

이안은 짧게 웃었다.

"제가 찾을 사람은 죽었다는 과거 펠타온 제국의 한 거상이겠군요."

이노센트는 놀랍다는 듯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다크 포이즌이 워낙 흔한 독이 아니니까요. 그 해독제를 가지고 있다 해도 고작 하나 아니면 둘. 그런데 제가 볼 땐 시약상인의 행방보다는 과거 프라스 제국의 거상이 해독제를 먹기 전에 죽었으니 고스란히 가지고 있을 터, 그 거상의 해독제가 더 찾기 쉬울 테죠."

"맞네! 정답일세. 그 거상이 바로 테일런 자작. 과거 수백여 개의 지점을 세운, 대륙십대상단의 작은 주인이었지."

"그 상단이 오늘날의 테일런 상단이겠군요."

"물론! 그 테일런 상단의 주인을 만나 보게."

테일런 상단은 불과 15년 전만 해도 대륙십대상단에서 엄청난 이름을 거머쥐고 있었으나 작은 주인 테일런 자작이 사망하고, 테일런 상단의 큰 주인이었던 테일런 자작의 아버지 테일런 백작이 죽고 나자 곧바로 쇠락해져 현재에는 대륙백대상단에서도 간신히 이름을 유지하고 있는 상단이었다.

"감사합니다, 이노센트 님."

이노센트는 손사래를 쳤다.

"별것 아닌 걸로 고맙다는군. 아닐세, 됐네. 루네를 도와준 것에 비한다면 이건 아주 작은 고마움에 불과할 테지."

이안은 이노센트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그리고 루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곧바로 펠타온 제국 로엔그람 상단 지부점으로 향했다.

글레톤은 며칠 전 로엔그람 후작을 접대했다는 사실을 상부에 보고해 특별수당을 받았다.

그 맛에 요즘 일을 해도 기분이 너무 좋았다.

'흐흐흐! 이런 날이 계속 온다면야!'

글레톤이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 돈이 차곡차곡 쌓이는 자신의 금고가 하루 빨리 차길 기다리고 있었다.

"지부장님!"

다급히 다가오는 직원 놈 하나 때문에 글레톤은 기분이 상하고 싶지 않았다.

"왜 그러느냐?"

최대한 위엄 있는 투로 말을 하자, 직원이 말을 더듬거렸다.

"아, 그, 그러니까……."

"빨리 말해 보거라!"

"아, 그 로엔그람 후작님께서 또 오셨습니다."

"또?"

"예!"

글레톤은 행복에 겨워 죽을 맛이었다.

설마 로엔그람 후작이 또 찾아올 줄은 상상도 못하고 있던 일이다.

"그래. 가자, 가!"

이안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전에 마셨던 차보다도 차 맛이 훨씬 좋았다.

끼익!

문이 열리며 글레톤이 다급히 들어왔다.

"로엔그람 후작 각하를 뵙습니다. 또 뵙는군요, 후작 각하."

이안이 능글 맞는 표정으로 웃는다.

"제가 싫으신가 봐요, 글레톤 씨."

"헉!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로엔그람 상단의 실질적인 주인이 바로 후작 각하임을 모르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글레톤이 핏기가 사라진 채로 말을 해 오자 이안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세운 건 저지만 엄연히 상단주는 세리아. 세리아의 말을 잘 따르도록 하세요."

명색이 지부장이지만 세리아를 실제로 본 적은 몇 번 없었다.

세리아의 미모를 침이 마르도록 설명하는 직원 놈은 많이 봤다.

"오늘은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크흠! 부탁할 일이 있습니다."

이안이 진지한 투로 입을 열었다.

궁금한 듯 얼굴을 바짝 들이미는 글레톤.

"어떤 것입니까?"

"전 이틀 후에 슈레이더 왕국으로 출발합니다. 그때까지 테일런 상단에 대해 모든 것을 조사하고, 그 상단주와 만날 수 있는 커넥터를 만들어 두실 수 있나요?"

"음……."

테일런 상단이라면 상단계에서 일한다는 사람치고 모르는 자가 없었다.

글레톤은 문제가 없다는 투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후작 각하."

"그럼 그때까지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예, 최대한 빨리 진행하겠습니다."

* * *

테일런 상단.

그들이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은 모직류였다.

유라시아 대륙에 겨울이 다가오면서 상당한 판매고를 기록하려고 마음먹은 그들이지만, 이번 년도에는 대륙의 제일 큰 제국의 전쟁으로 인해 상단 전체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전쟁이 일어나면서 프라스 제국과 펠타온 제국의 금화와 은화의 가치가 하락한 것이다. 돈의 가치가 떨어진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돈을 많이 찍어 낸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금화에 부가된 가치는 하락했다. 순금보다는 이물질이 상당히 많이 투입되기 때문이었다. 은화도 그 원리에 따라 마찬가지로 떨어졌다.

돈의 가치가 떨어지니 물가가 폭등하면서 모직류 판매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날씨가 상당히 맘에 안 드는군.'

전쟁이 생기고 겨울이 되니 사람들이 거리를 돌아다니지 않았다. 빨리 겨울이 지나 봄이 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자들뿐이었다.

테일런 상단의 상단주인 닉은 골머리를 앓았다.

예전 테일런 상단의 상단주였던 테일런 백작이나 그의 아들 테일런 자작.

그들이 죽으면서 자연스레 상단은 제일 배분이 높은 닉한테 주어졌지만, 닉은 경영력이 그들보다 현저하게 떨어졌다.

닉은 테일런 백작이 살아 있을 때, 고작 상단의 돈 관리를 맡고 있던 행정관에 불과했다.

'테일런 백작님…….'

그는 과거를 회상하며 추운 겨울 날씨에 몸을 사렸다.

닉은 따분한 회의장으로 들어가서, 휘청거리는 상단을 일으키기 위해 한 가지 생각해 둔 바를 꺼낼 수밖에 없었다.

"모직류를 그만둡시다. 저희가 상단 일 하루 이틀 해 본 것도 아니잖습니까? 모직류를 팔기 위해서는 족히 5년에서 10년 이상, 서민들의 생활이 안정권에 돌입해야 합니다."

"포기하기에는 그동안 쏟아 부은 피해가 너무 막심합니다."

따분한 회의에 참가한 행정관이다.

"하지만 이대로 있을 수는 없잖습니까?"

닉의 말에 행정관은 입을 꾹 다물었다.

말이 대륙백대상단이지, 이젠 그들의 이름을 기억해 주는 사람을 찾기는 어려웠다. 대륙백대상단에 끼기에도 너무 부족한 이름이란 걸 그들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어찌해야 하나…….'

닉은 한 가지 결단을 내렸다.

"위기는 곧 기회라고, 전쟁으로 모직류를 팔 수 없게 되었으니 전쟁으로 돈을 벌 수밖에 없습니다."

회의에 참가한 간부들이 깜짝 놀랐다.

지금까지 테일런 상단이 전쟁에 직접적으로 개입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전쟁상인 말씀입니까?"

간부 한 명의 말에 닉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크음!"

간부들의 얼굴에 어둠이 드리워졌다.

전쟁상단의 큰 매력은 바로 큰돈을 만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상단이 지지한 나라가 패하게 되면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엄청난 피해가 왔다. 자칫하면 상단을 날려 먹을 수도 있었다.

도박의 대가는 아주 컸다.

게다가 대륙십대상단이 아닌 이상 테일런 상단이 전쟁상단이 되기도 어렵거니와 설사 된다고 해도 중요한 일을 떠맡지는 못했다.

닉이 얼마나 커다란 결심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저희는 이 결정에 따라 또 다른 결정을 해야 합니다."

간부들이 살짝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지지할 나라를 결정하는 일이었다.

"펠타온, 프라스. 이 두 제국의 싸움이 어떻게 변할지는 그 누구도 모릅니다. 프라스 제국이 현재 펠타온 제국을 파죽지세로 몰고 가고 있지만, 전쟁이란 건 하루아침에 뒤바뀝니다. 그래서 묻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나라를 지지할 생각이십니까?"

간부 중 하나가 손을 들었다.

"전쟁상단이 될 수 있는 방법은 있는 것입니까?"

닉은 고개를 내저었다.

"현재로썬 없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현재 상단의 본점은 펠타온 제국에 있으니 일단 제국의 황제부터 만나 볼 생각입니다."

간부들 얼굴이 어두워졌다.

백대상단에 불과한 테일런 상단이 제국의 황제를 알현하기에는 상당한 무리가 따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도 어떻게 해서든 테일런 상단을 과거처럼 십대상단으로 끌어올리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다.

"어차피 저희들은 대륙 곳곳에서 몰렸습니다만, 그 누구도 프라스 제국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프라스 제국 사람도 상단에 들어오지 않았다. 프라스 제국 자체가 워낙 원한이 많은 나라다 보니, 현재는 망한 라인하르트 대제국의 사람들이 프라스 제국 사람들을 많이 배척했다.

닉은 서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마음은 펠타온에 두겠습니다만, 아직 결정된 건 아닙니다. 그 누구의 의견도 존중해 줄 터이니 괜찮습니다. 이 문제는 상당한 시간을 두고 생각해 봐야 할 문제입니다."

눈치 없는 상단들은 분명 이번 프라스 제국의 파죽지세로 상당히 프라스 제국을 지지했을 것이다.

닉은 그 이점을 이용해서 전쟁상단이 될 생각이었다.

오히려 펠타온 제국이 조금 더 밀려 줬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상단주님."

닉은 호위무사 하나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지금은 회의 중이네. 이따 말하게."

"워낙 시급한 문제라……."

"뭔데 그러나?"

"로엔그람 후작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갑자기 닉의 얼굴이 변했다.

로엔그람 후작이라면 능통한 상단의 정보력을 이용하여 항상 머릿속에 새겨 두고 있는 인물이 아니던가!

대륙에서도 이자를 모르는 자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스무 살의 소드 마스터!

이 이름의 무게는 가볍지 않을 것이었으니.

"어서 뫼셔 오게. 접대실로!"

"알겠습니다."

닉은 호위무사가 빠르게 사라지는 모습에 서둘러서 접대실로 향했다.

접대실에 도착한 닉은 조용히 자리에 앉아 차를 음미하는 젊은이를 보았다.

'젊다? 후작의 행정관인가? 비서?'

아니다.

그런 인물이라면 비서를 젊은 자를 쓸 리가 없다.

게다가 후작이 왔다 하지 않았던가.

'그럼 후작?'

후작은 젊다고 했으니 분명 맞을 것이다.

닉은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의 수행관은 달랑 한 명 있었다.

떡대 같은 몸을 자랑하며 언제든지 달려들 기세를 하고 있는 기사 한 명.

후작이 고작 기사 한 명을 대동한 채 돌아다닌다는 것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한 가지는 미친놈이란 뜻이고, 하나는 그만큼 믿는 구석이 있다는 뜻이었다.

닉이 생각하기에 로엔그람 후작은 후자에 가까웠다.

'자기 실력에 몸 하나 지킬 여력은 된다 이건가?'

상황 판단을 마친 닉은 재빨리 자리에 다가와 인사했다.

"로엔그람 후작 각하,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저는 이 상단의 주인인 닉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십니까? 이안이라 합니다. 이쪽은 제 수행원 에반."

"에반이라 합니다."

에반은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동안 에반의 실력은 상당히 상승된 상태였다. 3황자의 직속 수하인 그랜드 나이트들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었다.

하지만 이안은 거기에서 만족할 생각은 없었다.

에반은 상당한 인재였다.

최소한 익스퍼트 최상급까지는 최단거리로 상승시킬 생각이었다.

닉은 에반의 기세에 살짝 기가 눌려 있다가 이안의 옷차림이 상당히 수수하다는 생각에 궁금해졌다.

"날씨가 상당히 춥습니다, 후작 각하. 헌데 어찌 옷이……."

"기사가 어느 정도의 일정 경지에 오르면 그다지 추위를 느끼지 못합니다. 이 상단의 호위무사 대부분이 추위를 그렇게 느끼는 편은 아닐 겁니다."

닉의 얼굴에 당혹감이 물들었다가 금세 사라졌다.

지금 로엔그람 후작은 이 상단의 호위무사들의 실력을 단번에 알아챘다.

이곳 호위무사들은 수는 적지만 아직도 이 상단을 떠나지 못한 고수들이었다.

전원이 익스퍼트들을 뛰어넘는 고수들.

이안의 입은 다시 열렸다.

"그럼 본론으로 넘어가서, 제가 오늘 테일런 상단에 온 것은 거래하고자 하는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거래 말씀이십니까?"

"결정은 테일런 상단에서 하시는 겁니다. 이리스 황녀님에 대한 사건은 들으셨겠죠?"

닉이 서서히 고개를 끄덕였다.

"중독 사건이라면 잘 알고 있습니다."

이안이 오해를 품고, 주모자가 된 것도 알고 있다.

"황실에선 국민들을 잠재우기 위해 해독제를 찾았다고 소문을 퍼트렸으나, 사실 황실에서 해독제를 이 잡듯이 뒤지고 있습니다."

"그 점에 관해서는 알고 있었습니다."

닉의 정보력은 절대 약하지 않았다.

아니, 테일런 상단의 정보력은 분명 십대상단에 비해서 꿀리지 않았다. 그것 하나만큼은 자신 있었다.

"이것을 봐 주시겠습니까?"

이안은 닉에게 하나의 문서를 넘겼다.

아니, 하나라고 보기보다는 상당히 많은 분량의 문서였다.

수십 장은 될 법한 두툼한 두께.

닉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문서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펠타온 제국 교역 무역권! 3년?'

장난이 아니었다.

단순한 수준이 아니었다.

단숨에 대륙십대상단으로 오를 수 있는 엄청난 무역권이었다.

지금 그 무역권이 바로 닉, 자신 앞에 있었다.

"이, 이게 어찌하여 저에게……."

닉은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생각난 것이 있었다.

"아! 혹시? 해독제……."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황실은 해독제를 원합니다. 그리고 테일런 상단이 해독제를 내놓는다면 이만한 조건을 수락하기로 했습니다. 수락만 하신다면, 황제 폐하를 조만간 알현하시게 될 겁니다."

닉은 거대한 해머로 머리를 맞은 듯한 충격에 몸을 휘청거렸다.

그렇다. 잊고 있었다.

테일런 자작이 왜 죽었는지 잊고 있었다.

해결책은 앞에 있었다.

다크 포이즌의 해독제.

그건 분명히 자신이 가지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테일런 자작님! 당신은 돌아가셔도 저를 돕는군요.'

닉은 테일런 자작의 고마움을 피부로 느꼈다.

"조, 좋습니다, 후작 각하. 수락하도록 하겠습니다."

어차피 펠타온 제국을 지지하기로 마음먹은 바.

기회가 왔으니 잡으려는 생각이었다.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절차는 펠타온 황궁에서 따로 사람을 불러서 밟게 될 것입니다."

"아, 알겠습니다."

닉은 자신의 뺨을 살짝 때려 봤다.

꿈은 아니다.

분명 꿈은 아니었다.

이안은 테일런 상단을 나오면서 한숨을 거세게 내쉬었다.

이제 펠타온 제국에서의 모든 일은 끝났다.

이젠.

"프라스 제국을 밀어 버리는 일뿐."

이안은 왕국으로 떠날 채비를 모두 끝마쳤다.

하지만 그전에 한 가지 해 보고 싶은 일이 있었다.

이안은 곧바로 디그라실 공작가로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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