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45장 대륙십강과의 대결 □
"크아아악!"
"으으! 이노센트다! 피해라!"
"젠장! 빨리 튀어!"
거대한 하얀 창을 휘두르며 상단을 휩쓰는 한 중년인.
그가 바로 펠타온 제국의 최고의 자유기사.
하얀사신 이노센트였다.
항상 하얀 제복과 하얀 창을 휘두른다 하여 붙은 명칭이 바로 하얀사신이었다.
노예를 매매하려던 상단을 급습하여 단숨에 상단을 사로잡은 이노센트는 코를 킁킁거렸다.
그러다 잠시 후 실망한 기색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반드시 있을 거라 생각했건만, 역시 메모라인 플라워는 존재하지 않는단 말인가……."
메모라인이라는 기억의 신이 지상으로 자신의 힘을 나누어 꽃으로 만들었다는 희귀한 약초.
제국의 황제라 해도 쉽게 구할 수 없는 약초이며, 드래곤이 살고 있다는 지역에서만 아주 간간이 발견되고 있었다.
"참으로 재수가 없는 날이로군."
이노센트는 자신의 창에 묻은 피를 스윽 닦아 내었다. 오늘도 그의 창에 누군가의 피가 묻었다.
이노센트는 하얀사신이라는 별호가 붙었지만 썩 달갑지는 않았다.
별호를 얻기 위해, 입신양명을 하기 위해서 결코 대륙에 나온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딸만 아프지 않았다면 조용히 산속에서 살다가 죽을 인생이었다.
"또다시 어디서 찾는단 말인가……."
그의 푸념은 조용히 허공 속으로 사라졌다.
"저자입니까?"
3황자가 묻자 글루노 후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꽤나 젊군요."
"대륙십강의 일원들은 모두 얼굴이 젊습니다. 껍데기는 저래도 실제로는 60을 넘은 나이일 겁니다."
"흠, 60의 나이에 15의 딸이라니, 상당히 늦게 낳은 딸이로군요."
"뿐만 아닙니다. 그의 별호에 걸맞지 않게도 그의 아내는 고작 사냥꾼의 딸이랍니다."
3황자는 어릴 때부터 대륙을 떠들썩하게 했던 하얀사신 이노센트의 모습에 적지 않게 실망했다.
하지만 지금은 더운물 찬물 가릴 때가 아니었다.
어떻게 해서든 이노센트를 포섭해야 했다.
3황자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글루노 후작이 막아서더니 말한다.
"제가 먼저 접촉을 시도하겠습니다. 황자 전하께서는 이곳에서 기다리시지요."
"알았습니다, 후작. 몸조심하십시오."
"제 걱정은 마십시오."
글루노 후작은 천천히 이노센트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이노센트는 글루노 후작과 족히 300미터는 떨어져 있는 곳에 서 있었다. 그의 감각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 멀리 떨어질 필요가 있었다.
"누구시오?"
이노센트는 살기를 담은 눈길로 글루노 후작을 직시했다.
글루노 후작은 그의 눈길에 신음을 속으로 삼켜 내며 안경을 고쳐 썼다.
"난 글루노 후작이라 하오. 대륙십강의 일원인 이노센트 경을 만나 반갑소이다."
"글루노 후작?"
펠타온 제궁의 재상이 아닌가.
이노센트는 그가 왜 자신을 찾아왔는지 고개를 갸웃했지만, 알 수가 없었다.
"후작이 친히 날 찾아온 이유는 뭐요?"
"부탁할 일이 있소이다."
"부탁할 일?"
이노센트는 손을 털어 냈다.
"미안하지만 사양하겠소. 난 당신네들의 정치판에 끼어들 생각이 전혀 없소이다."
이노센트는 한두 번 겪어 본 일이 아니라는 듯 등을 홱 돌렸다.
그가 어딜 가든 간에 그를 포섭하려는 자가 한둘이 아니었기에 거절에는 능숙했다.
"도와준다면 원하는 것을 드리겠소."
이노센트의 귀가 갑자기 번쩍 뜨였다.
"내가 원하는 것을 알고 있단 말이오?"
"메모라인 플라워. 당신이 5년 이상 찾아다니고 있는 약초지. 이 약초만 찾으면 병을 치료할 수 있다 들었소."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수십 가지의 희귀한 약초가 필요했다. 그러나 희귀할 뿐이지 메모라인 플라워처럼 5년 이상 찾지 못한 약초는 없었다.
이노센트의 눈에서 이채가 발했다.
"좋소. 그 약초만 준다면 한 번, 단 한 번을 당신의 뜻대로 움직여 주겠소. 난 뭘 하면 되오?"
글루노 후작은 품속에 있던 종이 한 장을 꺼내었다.
그것은 이안의 얼굴을 자세히 그린 그림이었다.
"그자를 죽여 주시오. 시체도 찾지 못하게 말이오. 독을 먹었기 때문에 이노센트 경이라면 쉽게 상대할 수 있을 것이오."
* * *
"사절단이 위험에 처할 수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슈레이더 왕국이 펠타온 제국과 적대국이 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도와주시지요, 쉐도우 로드."
쉐도우 로드는 골치가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설마 3황자가 작정을 하고 해독제를 없애 버릴 줄 누가 알았겠는가.
"독 이름은 알고 있지만, 해독제는 찾기가 힘들다."
"찾기 힘들어도 어디서 사는지 가르쳐만 주시지요. 이름도 좋습니다."
이안은 필사적으로 쉐도우 로드에게 매달렸다.
쉐도우 로드는 한숨을 푹 쉬었다.
'제길, 그놈은 왜 해독제를 없애 버려서 나를 이리도 곤란하게 만드는 거야.'
3황자를 상상하며 주먹을 불끈 쥐어 보는 쉐도우 로드지만 이안의 눈길을 매정하게 거절할 수가 없었다.
"다크 포이즌. 극비리에 흑마법사들만이 제조할 수 있다는 지독한 독약. 무색, 무미, 무취라 네가 아무리 소드 마스터라 해도 쉽게 알아볼 수 없지. 또한 소드 마스터에게도 상당한 효과가 있기 때문에 일단 먹으면 체력에 미미한 효과가 있고 내공 또한 점점 사라진다."
분명히 효과는 있었다.
하지만 이안의 몸속으로 들어온 즉시 그의 심후한 내공이 이미 태워 버렸으니 별다른 충격이나 데미지를 입진 않았다.
"얼굴을 보니 너도 먹은 것 같군. 하지만 중독되진 않았어. 역시 내 생각이 맞다 이건가."
"……."
"다크 포이즌의 해독제가 자라는 곳은 단 한 곳."
"어디죠?"
"드래곤의 산맥. 드래곤의 영토라 일컬어지는 그곳. 단 한 곳뿐이다."
이안은 그의 말을 듣자 얼굴을 찌푸렸다.
드래곤의 산맥이라 하면 일단 펠타온 제국의 수도에서 이안의 속도로 달린다 해도 족히 왕복 3일은 걸린다. 게다가 산맥의 크기가 워낙 방대해서 거의 한 제국과 맞먹을 정도이니, 도착한다 해도 눈앞에 바로 존재할 리도 없었다.
게다가 드래곤의 산맥은 사람들을 철저하게 막는다. 일단 그곳으로 들어가서 살아 나온 사람이라고 해 봤자 리치가 된 흑마법사들밖에 없기 때문이다.
루시는 사뿐히 책상에 다리를 꼬고 걸터앉아서는 말하였다.
"도착해도 찾을 수 있다는 보장도 없고, 찾아서 온다고 해도 그때쯤이면 다크 포이즌의 영향으로 이리스 황녀는 죽어 있을 터. 어찌할 거지?"
"……."
"제일 첫 번째 문제는 이리스 황녀의 생존이야. 네가 다녀올 동안 그녀는 살아 있어야 해. 무조건! 그 방법을 일단 찾아보도록 해 봐."
"다크 포이즌에 중독됐을 때 생명을 연장시켜 주는 약은 없을까?"
루시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있지."
"무엇이지?"
"메모라인 플라워. 기억의 여신이 자신의 능력을 담아 지상에 뿌리를 내리게 한 약초. 그거 하나뿐이야."
이안의 얼굴이 밝아졌다.
"어디 가서 찾을 수 있지?"
"드래곤 산맥. 그것 또한 드래곤 산맥이 아니면 쉽게 구할 수 없어."
이안의 얼굴은 구겨질 대로 구겨져서 거친 욕을 토해 냈다.
"망할! 그렇다면 그 둘 중 하나라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찾아야 할 텐데……. 아!"
정보 길드만큼이나 정보에 능한 사람들이 있다.
이안은 곧바로 블랙 머플러의 본거지를 뛰쳐나가며 그대로 허공 속으로 녹아 사라졌다.
차원의 검술을 이용한 이동술이었다.
쉐도우 로드는 그의 완벽한 이동에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허허허! 나는 저것이 그토록 오래 걸렸건만……."
루시도 멍한 채로 물어 왔다.
"그가 어딜 간 것이죠?"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이 힘과 권력뿐만 아니지 않느냐."
"지점주님! 지점주님!"
펠타온 제국 로엔그람 상단 지점주인 글레톤은 확 짜증이 일어났다.
"지금 일하는 거 안 보여! 제발 입 좀 다물어!"
한 영지의 영주보다도 바쁜 글레톤은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그가 한 시간도 쉬지 못하고 일을 한 것이 벌써 24시간을 넘어가고 있었다.
글레톤을 지점주라 부르고 나타난 남자는 잠시 숨을 고르고 말했다.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럼?"
"상단에 지금 비상령이 떨어졌습니다."
글레톤은 벌떡 일어났다.
"뭐? 불이라도 났어? 그럼 그걸 왜 지금 알리고 지랄이야! 빨리 불 꺼. 물건 다 타 버리면 너도 나도 다 모가지야! 알아?"
"그것이 아니라, 지금 상단에 로엔그람 후작님께서 와 계십니다. 상단주님을 찾으십니다."
"뭐, 뭐야! 로엔그람 후작 각하께서 오셨다면 진작 말했어야지. 상부에서 로엔그람 후작 각하께서 찾아오시면 뭔 짓을 해서라도 도와드리라는 말 못 들었냐!"
"이, 일단 가시지요.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래, 일단 가야지."
글레톤은 서둘러서 외투를 입고 접대실로 향했다.
"처음 뵙습니다. 펠타온 제국 로엔그람 상단의 지점주인 글레톤이라 합니다. 정말 영광입니다, 후작 각하."
"반갑습니다, 글레톤 씨. 제가 찾아온 이유는 익히 들어 알고 있겠지요?"
이안은 일단 상단의 정보력을 알고 싶어 떠보기로 했다.
"허허허! 어찌 모를 수 있겠습니까? 후작 각하의 일이건만."
현재 황궁에서 일어난 이리스 황녀 독살 사건은 아는 이가 거의 없었다. 제국 측에서도 고위급 인물들이 아니면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일 것이다.
"크흠! 후작 각하께서 현재 찾으시는 물건은 여러 정황을 압축시켜 보았을 때, 몇 가지로 나눠지지만 그중에서도 제일 유력한 것은 일단 이리스 황녀님의 독살 사건으로 주모자가 된, 크흠! 물론 오해의 소지가 있으시지만, 해독제나 메모라인 플라워를 찾고 있으시겠죠."
이안은 상단의 정보력에 놀라움을 토해 냈다.
"호오! 알고 계시는군요."
"하지만 저희도 다크 포이즌의 해독제나 메모라인 플라워는 찾기가 아주 힘듭니다. 저희 상단이 사실 대륙 최고라 해도 손색이 없는 것은 맞지만, 그런 귀중한 약초는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이안은 실망한 기색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쩔 수 없군요."
이안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글레톤이 붙잡았다.
"아, 아니, 잠시만 이야기를 다 듣고 가시지요."
사실 말은 안 했지만 로엔그람 후작을 대접했다는 사실을 상부에 보고하기만 한다면 특별수당이 붙는 것은 말로 할 것도 없었다. 그래서 로엔그람 후작이 펠타온 제국으로 사절단을 이끌고 온다고 했을 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가 상단에 들러 주길 하는 마음도 있었다.
'크으, 그래도 제법 비싼 정보인데.'
하지만 이 정보를 찾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런 약초는 보통 흑마법사들이 찾지만, 로엔그람 상단은 흑마법사와의 거래는 일절 허락하지 않았다.
글레톤은 비린 속을 다잡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있을 법한 인물을 알고 있습니다."
"있을 법한?"
"뭐, 장담은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라면 가지고 있을 거라 상단의 정보력으로 추측해 보는 거죠."
"말해 보시지요."
"일단 첫 번째로 수십 년 전, 펠타온 제국의 궁정마법사였던 그리텔 님이나 현 펠타온 제국 3황자, 아니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건 없어졌군요."
"그리텔!"
이안은 그의 이름이 거론되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또한 마법사다.
왜 그런 생각을 못했을까.
"소재지는 파악했습니까?"
"수십 년 전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해도 요즘 간간이 얼굴을 드러내기도 했지요. 특히 사절단에 같이 이동해 온 사람이기도 하고."
'그런 것까지 파악했단 말인가?'
이안은 다시 한 번 상단의 정보력에 놀라움을 토해 냈다.
글레톤은 숨을 고르고 말한다.
"여러 가지 정황상 그리텔 님을 찾기 위해서는 궁으로 들어가 이리스 황녀, 그분에게 물어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분이 그리텔 님과의 유일한 연락처지요."
"……."
이안은 입술을 꽈악 깨물었다.
독살 사건의 주모자로 몰린 후 이리스 황녀와의 접촉이 쉽지만은 않았다.
'젠장!'
또 숨어 들어가야 하나…….
이안은 그리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황녀님의 중독을 노리고 들어오는 놈이 있을지도 모르니 경계를 철저히 서라. 알겠느냐?"
"예!"
황실기사단만이 황녀의 중독을 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아는 기사단 전원은 철저한 경계령 속에서 황녀를 호위하기만 할 뿐, 퇴근도 못하고 있었다.
소문이 퍼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역시 예상대로 경계가 삼엄하다.'
하지만 이안은 이미 한 번 왔다 간 적이 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다는 아니다.'
차원의 검술을 이용한 이동술.
지금은 디멘션 스텝이라 가볍게 부르고 있지만, 확실히 마법사의 텔레포트보다도 훨씬 사용이 간편하고 쉬웠다.
이안은 디멘션 스텝으로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그를 발견한 황실기사단은 아무도 없었다.
이리스 황녀의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로지 그녀만이 홀로 존재하여 자리에 누워 규칙적인 호흡을 내뱉고 있었다.
그런데 참으로 요상한 것은 그녀의 호흡법이 일상생활에서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나가 들어 있다는 것이다.
이안은 그녀를 깨우기보다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그녀의 몸은 마나를 저장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칠음절맥으로 마나를 아무리 쌓아 봤자 소용도 없었다.
하지만 마나가 다닐 길목을 만들어 두는 것은 충분했고, 그것만으로도 그녀의 생존 확률은 더욱 높아져 갔다.
'어째서?'
아까 왔을 때만 하더라도 그녀는 더 이상 이안을 볼 마음도 없어 보였다. 그리고 그녀는 분명 청명심법, 즉 호흡법을 펼치지 않았다.
그녀의 호흡을 바라보고 있자, 그녀는 뭔가가 자신을 쳐다본다고 느꼈는지 눈을 번쩍 떴다.
"당신인가요?"
그녀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이안을 바라보고 있음이 확실했다.
이안은 애초부터 기를 숨기고 있지 않았기에 그녀가 자신을 알아볼 것을 충분히 예견하고 있었다.
어둠 속에 가려져 있던 이안의 몸이 달빛에 비쳐 드러났다.
"그렇습니다, 황녀님. 다행히 그 호흡법은 하시는군요."
"할 마음은 없었어요. 하지만 이대로 죽을 거였다면 지푸라기라도 잡아 볼 심정으로 해 봤을 뿐이에요."
"그럼……."
"그렇다고 당신이 했다는 것은 다르지 않아요. 저 또한 당신이라 단정 짓고 있어요."
"그렇군요."
이안은 씁쓸한 표정으로 웃었다.
이리스 황녀는 숨을 고르더니 입을 열었다.
"여기 들어오기가 만만치 않을 텐데, 당신의 능력은 참으로 놀랍군요. 제가 소리를 지르면 황실기사단이 엄청 몰려올 텐데요."
"펠타온 제국을 프라스 제국과의 전쟁에서 도움을 줄 수 있는 슈레이더 왕국을 차 버리는 것 또한 그 순간 날아가는 것을 아시잖습니까?"
이리스 황녀는 소소하게 웃었다.
"후후, 그렇지요. 그래서 제가 소리를 못 지르고 있는 거랍니다. 그런데 여긴 또 무슨 일이지요? 아까같이 몸 상태를 확인하고 싶어서인가요?"
"황녀님의 몸을 치료해 줄 사람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열쇠를 황녀님께서 가지고 계시지요."
이리스 황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어 왔다.
"제가 말인가요? 하지만 전 그런 것이 없는데요."
"한 명의 마법사 소재지를 알려 주시면 됩니다."
"마법사라면…… 아! 혹시 그리텔 님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예, 맞습니다. 그분의 소재지가 필요합니다."
이리스 황녀는 살짝 망설였다.
"하지만 그분은……."
"알고 있습니다, 은거를 하신 분이라는 걸. 하지만 황녀님의 치료를 해 주실 분은 그분뿐입니다."
"알았어요. 허나 그분의 위치는 저도 잘 모른답니다. 그저 항상 시간을 두고 만나고 있을 뿐이죠."
"특정한 장소에서 말입니까?"
"예. 다음번에 만날 때는 음……. 시간은 정오. 내일이군요. 내일 화이트 산맥에서."
'그때까지 황녀의 몸이 버틸 수나 있을지 걱정이로군.'
이안은 황녀에게 바짝 다가갔다.
"황녀님, 몸 상태를 확인해도 괜찮겠습니까?"
"화, 확인이요?"
그녀는 어떤 때보다도 두려움을 느꼈다.
"부탁드립니다, 황녀님. 아무 짓도 하지 않을 겁니다. 라인하르트 대제국의 황태자였던 제가 여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황녀님의 결정에 황녀님과 사절단 전원의 목숨이 걸렸습니다."
'그래…….'
이리스 황녀는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을 기억해 냈다.
단순히 어린 소드 마스터에 후작이 아니다.
그는 20년 전 대륙을 평정했던 라인하르트 대제국의 마지막 황손, 황태자가 아닌가.
"좋아요."
이안은 살짝 황녀의 등에 손을 대었다.
그녀가 살짝 몸을 떨었지만 이안은 열양지기를 한순간에 일으키며 그녀의 독을 집어삼켜 냈다.
'다행이로군. 황녀가 청명심법을 운용하지 않았다면, 열양지기를 일으키는 것 또한 힘든 일이었을 터인데. 어쨌거나 황녀가 버텨 줄지는 의문이지만.'
위험하면 바로 열양지기를 거둘 생각이었다.
원래 독은 성직자들이 사용하는 디바인 포스와 불에 약한 법이다. 열양지기는 어떠한 불보다도 순수한 불이다.
다크 포이즌과 열양지기는 한순간에 뒤엉켰다.
"아……!"
그녀가 고통을 호소하자 이안은 곧바로 열양지기를 거둬들였다.
'역시 무린가.'
이안이 이빨을 깨물었다.
"몸은 어떻습니까?"
혹시나 해서 묻는 물음.
황녀는 인상을 찌푸리며 이안을 노려보았다.
"아프기만 할 뿐이에요."
'오히려 반감을 사게 됐군.'
"호흡을 계속해서 해 주십시오. 그것만 바랄 뿐입니다. 그래야 황녀님께서 독을 몰아낼 수 있는 체력을 얻습니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말하였다.
"노력해 보겠어요. 이제 그대는 어떻게 할 생각이죠?"
"그리텔 님을 만나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제 가실 생각이군요."
"예, 사절단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생각입니다."
그녀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결국 그대는 나를 위해서 그리 노력하는 것이 아니었군요.'
그녀의 눈이 갑자기 흔들렸다.
'아니, 저자는 날 중독시킨 사람이야. 그건 변하지 않아. 저 사람이 아니면 그 누구도 중독시킬 수 없었어. 절대 이런 마음을 가져서는 안 돼.'
그녀는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하지만 왠지…… 가슴이 너무 아파. 그리고 당신이 그랬을 거라는 생각 또한 안 들어.'
황녀는 이안을 직시했다.
'그대는 너무 맑아.'
이안은 들어왔을 때처럼 디멘션 스텝을 이용하여 바깥으로 안전하게 빠져나왔다.
'내일 정오라…….'
이안은 씁쓸하게 웃었다.
'오늘이 걱정이로군. 과연 황녀는 오늘을 넘길 수 있을지……. 오늘이 고비야.'
이안은 자신의 발등을 차며 그대로 허공으로 뛰어들었다.
'화이트 산맥이라고 했지?'
* * *
다음 날 이안은 화이트 산맥에서 죽치고 기다렸다.
과연 황녀의 말대로 정오가 되자마자 검은 로브를 입은 그리텔이 나타났다.
그는 이안을 바라보며 놀라움과 반가움을 토해 냈다.
"아니, 자네가 여긴 웬일인가? 황녀님은 어디 가시고?"
'다행이로군. 그리텔 님께서는 모르시니.'
이안은 한참 후에 입을 열었다.
"황녀님께서 중독되셨습니다."
갑자기 그리텔의 눈이 흔들렸다. 그것도 굉장히 거세게.
"화, 황녀님께서 말인가? 그분은 어떠신가? 괜찮으신가?"
"하루 이틀 내, 혹은 이미 돌아가셨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리텔 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콰콰쾅!
갑자기 그리텔의 몸에서는 엄청난 기운이 폭사되었다.
"도대체 누군가! 누가 황녀님을 중독시켰단 말인가. 그 누구라도 해도 용서할 생각이 없네. 빨리 말하게."
"범인은 3황자이지만, 누명은 제가 썼습니다. 황제 폐하에게 사절단 전원이 인질로 잡혀 있습니다."
"아니, 자네가 말인가!"
그리텔은 이안이 그러지 않을 사람이란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와 지낸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지만 이토록 맑은 눈빛을 가지고 있는 자가 그런 사람일 거라곤 생각되지 않았다.
"그래, 일단 황녀님을 살리는 것이 문제겠지. 황녀님은 어떤 독에 중독되셨나?"
"다크 포이즌입니다."
그리텔은 그 순간 경악했다. 그의 전신에서 폭사되던 기운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허, 헉! 다, 다크 포이즌?"
눈이 동그랗게 떠져서 믿을 수 없는 듯해 보였다.
"크, 크흠! 문제로군."
"그래서 그리텔 님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혹시 해독제나 메모라인 플라워를 가지고 계십니까?"
"해독제는 없지만 메모라인 플라워는 가지고 있네. 그것으로 다크 포이즌을 치료할 수 있는 겐가?"
혹시나 해서 묻는 듯한 표정이지만 별 기대는 없어 보이는 그리텔.
이안은 고개를 내저었다.
"허나 그 약이면 적어도 황녀님의 독을 한 달에서 크게 두 달까지 잡아 둘 수 있습니다. 그리텔 님의 마나가 가세하면 두 달을 넘길 수도 있지요. 그 사이에 해독제를 찾아야 합니다."
"그래, 알았네. 내 당장 달려가서 메모라인 플라워를 가지고 오겠네."
"여기서 가까우십니까?"
"텔레포트라면 그리 멀진 않네."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건 참으로 곤란스러운 일이 될 걸세, 젊은이."
이안과 그리텔은 반사적으로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이안은 결코 이곳에서 방심한 적이 없다. 이안이 방심하지 않으면 소드 마스터들이라고 해도 이안의 감을 피해서 가까이 접근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자의 목소리가 들린 것은 고작 30미터 앞이었다.
게다가 7서클 마법사인 그리텔도 있었다.
그 둘이 이 대륙에서 눈치를 못 챌 정도의 고수라면 그리 많지 않았다.
아니,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나 이자는 당당히 그 안으로 홀연히 들어왔다.
'도대체 어떤 자이기에…….'
"끄응!"
그리텔은 심기가 불편하다는 듯이 끙끙거렸다.
'아는 자인가?'
"아는 분이십니까?"
이안이 살짝 묻자, 그리텔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는 아니네. 그저 한두 번 본 적이 있을 뿐이지."
"도대체 누굽니까?"
"자네도 들어봤을 걸세. 하얀사신이라고 말이야."
"하얀사신?"
대륙십강의 일원으로서 창을 주 무기로 삼고 있는 자.
하얀 창과 하얀 제복을 입고 다니는 자라 해서 그에게 붙은 별호 하얀사신.
이안은 머릿속에서 끄집어 낼 수 있었다.
"하얀사신 이노센트……."
이노센트는 탄성을 토해 낸다.
"호오! 이 노부를 알고 있을 줄이야."
"귀에 딱지가 얹을 정도로 들었습니다. 그런데 하얀사신께서 여기까지 친히 왕림하신 이유는 무엇인지요?"
"부탁받은 일이 있네."
"하얀사신께서는 사사로이 남의 부탁으로 움직이지 않는 분이라 들었습니다만?"
"조건에 따라서 다를 뿐이네."
이안은 이노센트에게 물었다.
"그런데 방금 전 무엇이 곤란스럽다고 하신 겁니까?"
"내가 받은 부탁에 자네들의 행동은 나를 곤혹스럽게 만드는 일이 될 걸세."
"황녀님의 목숨이 걸려 있습니다."
"알고 있네."
이노센트는 담담히 말했다. 그에게 있어 황녀의 목숨은 아무 상관이 없는 듯해 보였다. 아니, 황제의 죽음이라 해도 상관이 없을 듯한 말투였다.
"그건 나도 미안하다고 생각하네. 허나 나 또한 딸의 목숨이 걸려 있어서 말이야."
"딸?"
그리텔은 살짝 입을 열었다.
'이노센트 가문은 항상 이 대째에 얼마 살지 못하고 죽네. 이노센트 경의 딸이 아무래도 그 병에 걸린 것 같군.'
이안은 이노센트를 직시했다.
이노센트도 맞대응했다.
"놀랍군! 그 나이에 그 경지라니. 정보 길드에서 헛소리를 내뱉은 게 아니야. 소드 마스터 중급을 넘어섰다니!"
"저를 막아선다면 그쪽도 무사하진 못할 텐데요."
"그건 상관없네. 지금 자네의 상황에서 남 걱정할 때가 아니란 걸 잘 알아두게나."
"끄응!"
철컥!
이안은 좌수 엄지를 살짝 튕겼다.
그러자 검이 스르릉 뽑혀 나오더니 이안의 오른손에 착 하고 감겼다.
'어쩌지?'
그래도 대륙십강의 일원이다. 현경이 되지 못한 자신으로서는 대륙십강과 싸운다면 이긴다고 보장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따돌리는 일도 쉬워 보이진 않았다.
이안은 조심히 그리텔에게 전음을 보냈다.
'그리텔 님, 어찌 됐든 텔레포트로 먼저 가십시오. 그동안은 제가 막겠습니다.'
'텔레포트를 캐스팅하는 데는 적어도 몇 분은 소요되네. 막을 수 있겠는가?'
'해 보겠습니다.'
'조심하게. 저 사람은 사정을 봐줄 사람이 아니네.'
이노센트는 살짝 입가에 웃음을 지었다.
"후배에게 3수는 먼저 양보하도록 하지. 먼저 덤비세."
철커덩!
이노센트가 창을 꽈악 쥐었다.
이안이 움직이려 하자 그때 바로 빛이 터져 나오며 마나가 허공에 요동쳤다. 바로 그리텔이 텔레포트를 캐스팅하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이노센트는 막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안 막으십니까?"
"텔레포트가 사용되는 데는 족히 5분은 걸린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네. 내가 받은 부탁은 자네를 죽이고, 될 수 있으면 황녀의 치료를 저지하는 것이지. 일단 자네부터 죽이고 캐스팅하는 저 마법사를 죽이면 될 걸세."
"5분 안에 말입니까? 아니, 이제 4분하고도 한 40초 남았겠군요."
"그 정도면 충분하네!"
어떠한 자신감이 있어 보이는 그 말.
광오해 보이는 이노센트의 어조.
이안은 검강을 일으키며 로열에 씌웠다.
저 하얀 창이 눈에 거슬렸다. 자꾸만 로열과 비슷한 기분이 드는 것은 왜일까?
'조금만, 조금만 막고 물러나면 된다.'
이안은 허공을 갈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