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인하르트-44화 (44/60)

■ 제44장 이노센트 경! □

"생각보다 이리스 황녀의 몸 상태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야."

버티면 이틀이다.

"그녀가 날 믿어 줬으면 좋겠는데……."

이안은 나오기 전에 전음으로 그녀에게 한시도 쉬지 않고 청명심법을 운용하길 말해 두었다. 하나 그녀가 이안을 범인의 주모자라고 알고 있다면 심법을 운용하는 데에는 문제가 따를 것이다.

"심법만 제대로 운용해도 최소 2, 3일은 수명을 늘릴 수 있다. 그 정도면 충분해. 좋아, 일단 해독제부터 찾아볼까?"

이안은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눈에 보이는 길목으로 무작정 들어갔다.

저벅저벅.

평소 이안의 모습과는 다르게 길바닥을 강하게 때려 밟았다.

그랬다.

마치 그는 자신의 존재를 누군가에게 알리기 위해 하는 행동처럼 보였다.

툭툭툭.

반응이 있다.

돌덩어리가 서너 개 이안의 앞으로 떨어졌다.

이안은 조건반사적으로 고개를 높이 들었다.

로브를 휘날리며 날아오는 한 복면의 남자.

그는 이안의 앞으로 서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로드께서 찾으십니다."

"앞장서라."

"알겠습니다."

그의 신형이 스윽 사라지자 이안도 그를 쫓았다.

'쉐도우 로드는 과연 나의 존재를 눈치 챘군.'

"데려왔습니다."

"돌아가라."

"예스, 마이 로드!"

쉐도우 로드의 높낮이가 없는 말투에 어쌔신 하나가 조용히 자리에서 사라졌다. 이안은 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쉐도우 로드의 눈을 직시했다.

쉐도우 로드는 잠시 서류를 정리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더니 이안을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으하하하! 이거, 로엔그람 후작이 아니신가? 안 본 사이에 신수가 훤해지셨군. 아주 제대로 당했어, 제대로!"

"일반인들 사이로는 퍼지지 않았을 텐데, 아니 귀족들 대부분도 모르는 이야기일 듯도 하고. 역시 쉐도우 로드시군요. 그렇담 누가 이리스 황녀를 중독시켰는지도 아실 테죠?"

쉐도우 로드는 아주 자랑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고럼, 고럼! 물론이지. 로엔그람 후작 자네가 이곳에 왜 왔는지도 알고 있어."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내놓으십시오."

쉐도우 로드가 주변에서 작은 종이 뭉치를 꺼내 들더니 이안에게 내밀었다. 이안이 그 종이 뭉치를 잡으려 들자, 쉐도우 로드가 다시 자기에게 끌어당겼다.

"못 준다."

"예?"

이안이 다시 되묻자, 쉐도우 로드는 고개를 돌렸다.

"못 준다니까. 자네 지금 궁궐 나오면서 개털 된 거다 알고 있는데, 돈 없는 놈한테 이 비싼 정보를 퍼 줘? 내가 미쳤어? 손해 보는 장사를 하고 있게. 내가 무슨 자원 봉사자도 아니고……."

"아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경우가……. 그 정보를 저 말고 또 누가 산다고 그렇게 생색내시는 겁니까? 돈은 전부 해결되면 두 배로 드릴 테니 내놓으십시오."

"아, 글쎄 못 준다니까 그러네. 1,000골드만 내. 딱 1,000골드만 받을게."

"아니, 이 노인네가?"

이안은 부들거리며 쉐도우 로드를 노려봤다.

"좋습니다. 아주 좋아요. 1,000골드 대신 드릴 게 있습니다."

쉐도우 로드의 입에서 당혹한 말이 튀어나왔다.

"엥? 마, 말도 안 돼. 넌 지금 아무것도 없는 거 내가 알고 있는데?"

"제가 가지고 있는 건 '여기'입니다."

이안이 여기라고 말한 곳은 바로 블랙 머플러의 본거지였다.

"……!"

그제야 사태 파악을 한 쉐도우 로드의 눈이 급격히 커졌다.

이안이 협박을 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허 참, 쉐도우 로드님 정말 이름만큼이나 용기가 대단하시더군요. 어떻게 기사들의 나라인 펠타온, 그것도 수도에 대륙적으로 유명한 살인청부길드를 세울 수 있는 거죠? 이거, 어떡하나……. 방을 붙여서 떠들어 대면 기사들이 벌 떼같이 몰려들 텐데. 쉐도우 로드님이 손이 열 개가 아닌 이상 수많은 기사의 검을 막진 못하실 텐데……."

"이, 익!"

쉐도우 로드는 당장 잡아먹을 것만 같은 표정으로 능글거리고 있는 이안을 째려보았다.

"흠! 분명 내가 준 차원의 검술은 익혔겠지?"

"물론이죠. 상당히 괜찮더라고요."

"망할, 그렇다면 도망가는 널 잡을 수도 없겠군."

싱긋!

이안은 입을 귀에 걸기라도 하듯 웃어 보였다.

쉐도우 로드는 그의 손에 결국 정보를 넘길 수밖에 없었다.

'젠장, 어떤 식으로 골려 줄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저 자식이 이리 능구렁이같이 나올 줄이야……. 재미는 다 놓쳤군, 다 놓쳤어.'

"뭐 또 없겠죠?"

이안이 고개를 불쑥 내밀며 쉐도우 로드가 정리하던 정보들을 이 잡듯이 뒤지자, 쉐도우 로드의 얼굴이 탈색되며 그대로 이안을 밀어 버렸다.

"가! 없어! 끄응!"

쉐도우 로드는 이마에 손을 짚고서는 한쪽 팔로 훠이훠이 이안을 내보냈다.

이안은 종이를 하나하나 넘기며 읽어 보더니 입을 살짝 열었다.

"이 정보 확실한 거죠?"

쉐도우 로드는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언제 블랙 머플러가 거짓 정보 뿌리는 거 봤냐? 우리 본거지나 뿌리고 다니지 마라."

화르륵!

이안은 들고 있던 정보를 삼매진화로 태워 버렸다.

웃고 있던 이안의 표정은 무표정한 채로 돌아갔다.

"이게 사실이라면 이제 그곳을 털어 보는 수밖에는 없겠군요."

"나 참, 살다 살다 궁 턴다는 놈은 처음이네."

3황자궁.

후드를 눌러쓴 한 남자가 발 빠르게 궁 안으로 들어갔다.

아니, 들어가려 했지만 궁을 호위하고 있는 그랜드 나이트들이 막아섰다.

"멈춰라! 여긴 황자님의 궁이다. 함부로 들어갈 수 없다."

"수상한 놈이다! 얼굴을 보여라. 컥!"

갑자기 남자가 기사의 얼굴을 발로 걷어차 버렸다.

"헉? 아니, 저놈이!"

동료가 쓰러지는 것을 본 기사는 상대가 만만치 않다는 걸 느꼈는지 검을 뽑아 들려 했다. 하지만 어느새 나타난 남자가 검집에서 튀어나오는 검을 다시 밀어 넣고 기사의 가슴을 손바닥으로 후려쳤다.

"컥!"

내가중수법이 담겨 있지 않기 때문에 크게 영향이 미칠 데미지는 아니지만 플레이트 메일이 찌그러질 정도니 기절할 정도는 되었다.

기사 둘이 쓰러지자 남자는 궁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누구냐!"

"황자를 보러 왔다."

"황자님은 아무나 뵐 분이 아니다. 죽고 싶지 않거든 그대로 뒤로 걸어 나가라. 경고도 이번뿐이다."

나타난 기사들은 남자의 기세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꼈는지 얼굴을 굳혔다.

남자는 후드를 벗어 내렸다.

그러자 금빛이 휘날리는 흑발 머리가 드러나 보였다.

기사 몇몇이 그를 알아보았다.

"헉! 로엔그람 후작!"

"소드 마스터 로엔그람 후작이다! 대열을 정비해라."

"로엔그람 후작이 어째서 황자 전하의 궁으로 온 것이오!"

이안은 그들의 대열 정비 솜씨에 놀라움을 토해 냈다.

'역시 펠타온 제국이다. 대인전에 대해서는 완벽한 나라! 특히 소드 마스터와의 싸움에서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도 완벽하게 알고 있다!'

하지만 진법이든지 하는 것들 대부분은 소드 마스터에 오른 지 얼마 안 되는 초급 정도의 풋내기들이나 익스퍼트들에게 당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대외적으로 이안의 경지가 중급을 넘어 상급까지 넘본다고 알고 있는 자들은 정보에 능통한 귀족들이었고, 대부분의 기사들이나 하는 사람들은 초급에서 중급 사이로 보고 있었다.

펠타온 제국 측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소문으로 듣기에는 대륙십강 급에 버금간다 하지만, 그건 헛소리라 치부했다. 어찌 스무 살밖에 안 된 젊은 자가 소드 마스터가 된 것도 모자라 초급을 벗어나 대륙십강 급의 반열에 오른단 말인가.

엄마 배 속부터 검을 휘두른다 해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안은 살짝 기세를 드러내며 풍운지의를 펼쳤다.

그의 전신 곳곳에서 칼바람 같은 매서운 기운이 휘몰아치며 주변을 감쌌다.

"모든 기사들은 들어라. 펠타온 제국의 지배자이신 브리온 황제 폐하께서 어명을 내리셨다. 어떤 짓을 해서라도 찾아오라고 말이다. 너희야말로 죽고 싶지 않거든 길을 비켜라. 막는 자는 모조리 죽을 것이다."

"폐, 폐하의 어명!"

"대, 대체 무슨 일이기에 폐하께서 어명을 일개 소국의 사절단 책임자에게 내리시다니……."

기사들은 순간 망설였다.

자신들의 주인은 분명 3황자가 맞긴 하지만, 나라의 주인인 황제에게 거역할 수도 없었다.

이도 저도 아닌 곳에서 갈팡질팡하는 그들의 모습에 이안은 앞으로 걸어 나갔다. 기사들이 갈팡질팡하는 사이에 이안은 이미 그들을 지나쳤다.

"멈추시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궁으로 들어오실 수 없소이다."

이안은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기사들 사이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오오! 단장님과 부단장님이다."

'마르도 백작, 리카르소 자작. 둘 다 마스터로군.'

리카르소 자작은 예전에 맞은 부위를 쓸어 보더니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무리 당신이 폐하의 어명을 받았다고 해도 우린 황자님의 전속기사단이올시다. 더 이상 앞으로 가겠다면 용서하지 않겠소. 우리도 소드 마스터이니 두 손으로 네 손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오."

스스슷!

우우웅!

하늘을 향해 뻗쳐오르는 거대한 할버드.

오러 블레이드가 솟아오르자, 족히 할버드가 2미터 50센티는 넘어갈 정도로 뻗어 나갔다.

그리고 마르도 백작의 검 또한 50센티가 넘어 보이는 오러 블레이드를 뿜어내며 위압감을 풍겼다.

뭐든지 쪼갤 만한 오러 블레이드의 모습을 바라본 기사들의 마음은 한껏 들떠 있었다.

겉으로는 표현을 못해도 한시라도 빨리 궁을 쳐들어온 로엔그람 후작을 때려잡아 주길 기대하고 있었다.

특히 리카르소 자작은 그때의 주먹을 앙갚음할 수 있다는 생각에 한껏 고무되어 있었다.

"난 분명히 전했소. 폐하의 어명이라고. 막는 자는 모두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오."

이안이 엄지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그러자 검이 스스로 뽑혀 나와 이안의 손에 착 감겼다.

자연스럽게 뻗어 나오는 허공섭물의 경지.

"음."

"흠!"

리카르소 자작과 마르도 백작은 살짝 신음을 토해 냈다. 마치 검이 아티팩트라도 되는 것 같았다.

"폐하의 어명이라도 상관없소. 우리의 주인은 폐하가 아니라, 황자님 단 한 분뿐이올시다."

'참으로 갸륵한 충성심이로군.'

막아 봤자 쓸데없는 일이었다.

이안의 로열이 살짝 푸른 기운에 덮였다.

오러 블레이드도 아니고, 익스퍼트들의 전유물인 오러.

즉, 검기(劍氣)였다.

리카르소 자작이나 마르도 백작은 더욱 심중한 표정을 지었다. 고작 오러를 뽑아낸다는 것은 마스터인 자신들을 앞에 두고 만용을 부리는 거라 생각이 들기보다는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기사들은 아니었다.

어떤 자들은 이안이 오만을 부리는 거라 생각하거나 애초부터 승산이 없어 검기를 뽑아낸 거라 생각했다.

이안이 발을 뗀 순간.

그들은 그 생각을 지워 버릴 수밖에 없었다.

"……!"

'지, 진짜 공격하는 건가? 마스터들을 상대로 고작 오러로?'

그랜드 마스터가 아닌 이상 오러로 오러 블레이드를 상대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안은 달랐다.

눈앞의 로엔그람 후작은 너무나도 달랐다.

콰앙!

오러 블레이드와 오러 블레이드가 부딪쳤을 때처럼 거대한 충격파가 주변을 뒤흔들었다.

검을 부딪쳐 본 마르도 백작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어, 어찌, 어째서!'

'도대체 무슨 수로!'

바라보는 리카르소 자작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는 거대한 할버드를 들어 올리며 그대로 이안을 쪼갤 듯 섬전 같은 속도로 내리찍었다.

까아아앙!

수십 개의 반탄강기와 호신강기로 둘러싸인 왼쪽 손에 할버드가 잡혔다.

힘에 관해서는 대륙의 그 어떤 마스터보다도 자신 있던 리카르소 자작이지만 그는 할버드가 그의 한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자 모든 마나를 힘에 집중시켰다.

드드드득!

하나 할버드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앞의 이안은 너무나도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스르륵!

갑자기 이안이 할버드를 내려놓았다. 게다가 마르도 백작과 거리를 벌렸다.

"이래도 계속 덤비실 겁니까?"

"……!"

압도적인 실력의 차이를 보여 주었다.

마스터 둘을 상대로 마스터 하나가 압도적으로 이긴다니!

대륙십강이라 해도 쉽게 할 수 있는 건 아닐 것이다.

기사들의 얼굴도 입을 쩌억 벌리며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결코 아무나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마르도 백작은 더욱 강한 기세로 오러 블레이드를 뽑아내었다.

위위위잉!

리카르소 자작도 할 수 없이 할버드에 오러 블레이드를 더욱 강하게 내뻗었다.

이안은 그들의 답변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럼 어쩔 수 없지요. 시간이 없으니……."

우우우우웅!

1미터 이상 내뻗어지는 거대한 오러 블레이드.

이미 중급을 넘어섰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그것뿐만이 아니라 길이는 계속해서 길어지며 2미터를 자랑하게 되었다.

검이 아니라 장창을 들고 서 있는 듯해 보였다.

그리고 그의 주변에 맴도는 풍운지의는 이제 사람이 접근하기도 힘들 정도로 매서운 칼바람을 일으켰다.

꿀꺽.

누군가가 침을 삼켜 냈다.

그만큼 긴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로엔그람 후작!'

그저 헛된 소문이라고.

슈레이더 왕국에서 일부러 그렇게 낸 소문이라고 믿었다.

일개 소국에 불과한 나라였으니 말이다.

'허나!'

다르다.

소문이 오히려 부족할 정도였다.

초급? 중급?

누가 감히 그런 소릴 한단 말인가.

마르도 백작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앞에 있는 상대는…….

리카르소 자작이 말한 대로 디그라실 공작과 맞먹을지도 모른다.

'슈레이더 왕국, 그들은 용을 잡았다!'

두근두근!

마르도 백작은 리카르소 자작을 한번 쳐다보더니 두근거리는 심정을 다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일순간에 모든 힘을 내뻗기로.

그들은 서로 타이밍을 쟀다.

천천히.

그리고 시간이 3초 정도 지났을 때.

그들은 동시에 땅을 박찼다.

"타앗!"

"차앗!"

부앙!

그들의 두 오러 블레이드는 이안을 쪼갤 듯이 날아갔다.

* * *

로이니스는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했던 고생이란 고생은 다 했다가, 3황자궁으로 불려 와 목욕을 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3황자궁으로 무작정 끌려왔을 때 병사들이 하는 소리가 간단히 조사 하나로 끝난다고 했지만 로이니스는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불안한 기분을 애써 털기 위해 차를 마시며 머리를 식혔다. 그런데 바로 그 무렵,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깥에 있는 시녀가 입을 열었다.

"3황자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로이니스는 그자가 거론되자 더욱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하나 거절할 힘이 없는 그녀로서는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

"들어오시라고 하세요."

3황자는 방안으로 들어와서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로이니스를 바라봤다.

"로엔그람 후작 때문에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얼마나 힘드셨소이까?"

"아니에요. 이렇게 저만 감옥에서 나온 걸 알면 사절단에게 상당히 미안할 텐데."

로이니스는 정말 사절단에게 미안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 오기 시작했다.

'읏!'

애써 참아 보이려고 하지만 얼굴로 나타나지 않을 리가 없다. 로이니스는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베리카 아가씨, 괜찮소? 지금 당장 의사를 불러 오도록 하겠소."

로이니스는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아니에요. 버틸 만하니 괜찮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3황자의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로이니스가 3황자를 쳐다봤을 때 그의 얼굴에서는 미소보다는 안타까움이 묻어나고 있었다.

로이니스는 얼굴을 살짝 돌리자 머리가 씻은 듯이 나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생긴 병일지도 몰라.'

고작 고생이라고 해 봤자 여행 다니면서 노숙한 것밖에 없는 그녀였으니 감옥이 낯설기만 했을 것이다.

3황자는 한동안 가만히 있더니 뻣뻣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가 베리카 아가씨를 처음 뵌 건 1년 전, 한 무도회장에서였소. 일개 소국에 불과했던 슈레이더 왕국에서 아가씨만 한 미모를 가진 여인을 보니, 1년 동안 단 한순간도 잊은 적이 없었소."

"……."

"폐하께서도 어마마마께서도 결혼 적령기가 된 저에게 수많은 여인들을 소개해 주었지만, 내가 생각하고 있는 사람은 베리카 아가씨, 단 한 분뿐이오."

로이니스는 조숙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막 옷을 갈아입고 나온 그녀의 모습에 3황자의 마음은 두근거렸다.

"황자 전하."

"말씀하시오."

3황자는 한껏 고무된 표정으로 기대하는 눈빛을 보여 주었다.

로이니스는 그의 눈빛을 알아보고도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사절단에 참가한 이유는 청혼을 거절하기 위해서였습니다."

3황자의 눈이 거세게 흔들렸다.

일개 소국인 슈레이더 왕국의 백작 영애가 제국의 황자인 자신의 청혼을 거절할 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왜, 도대체 무슨 이유요?"

"죄송합니다, 황자 전하. 지금은 이 말밖에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로이니스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몸을 옆으로 틀었다.

3황자는 주먹을 꽈악 쥐어 보이더니, 어느새 몸까지 가늘게 떨고 있었다.

"내, 내가 도대체 어떤 것을 하면 되오? 아가씨가 원하면 이 나라의 황제가 되겠소. 뿐만 아니라 원하는 것이 있다면 뭐든지 들어주겠소. 바꾸라면 뭐든지 바꿀 것이오. 난 바로 그럴 힘이 있소이다."

"전 권력을 원하지 않습니다. 돈도 있을 만큼 있고, 원하는 것도 얻을 만큼 얻었습니다. 그저 죄송할 따름입니다, 황자 전하……."

"크크큭!"

3황자는 갑자기 광소를 터트렸다.

그의 광소에서 살기를 엿본 로이니스는 몸을 살짝 떨었다.

"찻잔에 독을 타 두길 아주 잘했군."

"……!"

로이니스의 눈이 급격히 커지며 흔들렸다.

3황자는 로이니스의 한쪽 팔목을 거세게 휘어잡았다.

"무, 무슨 짓입니까, 황자 전하!"

"어디, 반항할 거면 마음대로 하시오. 하지만 반항이 그리 쉽지는 않을 것이오. '평범한 여인의 몸'으로 말이오."

로이니스는 아까 머리가 아팠던 이유가 바로 독을 탔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이 맞았다.

로이니스가 실프를 불러내려 하였으나, 몸의 정령력이 일어나지 않았다.

"대, 대체 무슨 독을!"

"적어도 두어 시간은 정령을 불러낼 수 없을 것이오. 크크큭!"

3황자는 팔목을 끌어당기며 로이니스를 힘껏 안았다.

그리고 그녀를 침대로 몰아 눕혔다.

"이, 이것 놓으세요, 황자 전하!"

정령을 사용한다고 해도 로이니스가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3황자는 어릴 적부터 펠타온 제국의 황자답게 거칠게 검을 익혀 온 자였다.

그런 그의 완력을 로이니스가 당해 낼 리가 없었다.

"거부하지 마시오. 어차피 그대는 나의 정부인이 될 것이니 말이오."

"꺄아악! 제발, 제발! 이것 놓으십시오, 황자 전하. 제발……."

로이니스의 눈에서는 어느덧 눈물이 흘렀다.

3황자는 그런 그녀를 보며 묘한 쾌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 쾌감에 따라 그녀를 더욱 거세게 밀어붙이며 그녀의 몸에 엎어졌다.

"제발……! 황자 전하."

"크흐흐!"

3황자는 실성한 사람처럼 웃기 시작했다.

"거기 누구 없어요? 살려 주세요!"

하지만 누가 올 리가 없었다.

여긴 대체적으로 3황자궁.

그 누가 있어 안으로 들어온단 말인가.

하나 그것은 그의 착각이었다.

철컥!

갑자기 방문이 열리며 기사 하나가 신속히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 만약 별일 아니라면 너의 사지를 찢어 버리겠다!"

3황자는 짜증스런 기색으로 기사를 질책했다.

기사는 3황자의 말에 겁을 먹은 것이 아닌, 오히려 이전부터 겁을 먹고 있었던 듯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로, 로엔그람 후작이 궁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뭐, 뭐야? 그랜드 나이트들은 대체 뭘 하고 있느냐? 단장은? 부단장은? 그들은 제국의 소드 마스터가 아니더냐!"

단장이나 부단장이 없어도 일개 소국의 소드 마스터 따위는 그랜드 나이트들의 단원들만으로도 충분히 때려잡을 수 있다고 자부하는 3황자였다.

그런데 이렇게 난리 법석이라니.

3황자는 짜증이 확 일어났다.

'고작 그딴 일로 나를 방해하다니……!'

"허, 허나 단장님과 부단장님은 이미 벌써…… 헉!"

기사는 말을 전부 잇지 못하고 어디선가 나타난 발길질에 그대로 쓰러졌다.

"뭐, 뭐냐!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냐!"

3황자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남자 하나가 들어왔다.

"넌 누구냐!"

남자가 얼굴을 똑바로 들어 올리자, 익히 알고 있던 얼굴이 드러났다.

바로 로엔그람 후작이었다.

"어, 어떻게 네가 이곳에……. 아니, 그건 그렇고 여긴 어떻게 들어온 것이냐!"

소드 마스터가 둘에 익스퍼트 상급의 엘리트 급 기사들이 호위를 하고 있다. 실성한 놈이 아닌 이상은 혼자서 오지 못할 병력이었다. 그런데 그 호위 병력을 뚫고 궁 안으로 들어와 자신과 면전을 맞대고 있다?

3황자는 쉽사리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체 지금 궁에서는 무슨 일이……!'

이안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께서 이리스 황녀님의 해독제에 대한 모든 일은 마음대로 하라는 어명을 내리셨소! 지금 당장 3황자는 해독제를 내놓으시오."

"이럴 수는 없다! 감히 제국의 황자인 나에게 이런 모욕을 주다니! 여봐라! 게 누구 없느냐! 당장 이놈의 목을 쳐라. 사절단이고 뭐고 간에 내가 책임지겠다."

하지만 누가 달려올 리가 없었다.

이미 단장이고 부단장이고 단원들이고 이안에게 깨진 지 오래였다.

"어, 어찌 이럴 수가."

3황자는 그대로 허탈한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어서 내놓으시오, 황자! 이리스 황녀의 목숨이 달려 있소. 황제 폐하의 불호령을 받고 싶지 않거든 어서 내놓으시오!"

"이, 이놈! 어디서 감히 천한 놈이 나를 그리 부르느냐! 없다. 네가 이리 찾아올 줄 알고 미리 손을 써 두었느니라."

"……."

이안은 일단 황자 밑에 깔려 있는 로이니스를 무작정 손목을 잡고 끌어 왔다.

"네 이놈! 감히 그녀를 어디로 끌고 가느냐. 난 이 나라의 법을 관리하는 황자야! 그녀는 죄인이니 네가 함부로 끌고 갈 권리가 없다. 아니, 오냐, 좋다! 네놈도 죄인이니 감옥에 다시 가둬 주도록 하마!"

이안은 조용히 감춰 두었던 살기를 그를 향해 내뻗었다.

살기가 몸을 옥죄어 오자 황자의 몸이 갑자기 스르륵 무너지더니 무릎을 꿇었다.

쿵.

로이니스에게 심한 말을 들을 때보다도 더욱 격하게 흔들리는 눈동자.

그건 두려움의 표시였다.

3황자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가, 감히 황제 폐하를 등에 업고 날 업신여기다니. 너, 널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마음대로 하시지요. 하지만 이것 하나만 충고하고 가겠습니다. 다시는 신분을 믿고 함부로 날뛰지 마십시오. 당신은 언젠가 한 번 크게 당할 상이니까."

이안은 로이니스의 팔목을 거칠게 끌어당기며 바깥으로 나갔다.

"크, 크윽! 제기랄! 이, 빌어먹을 새끼가!"

이안과 로이니스는 한동안 계속 걸었다. 이안이 팔목을 너무 거칠게 잡았는지 로이니스가 얼굴을 찡그리며 이안의 팔을 떼어 놓았다.

"놔! 이제 됐잖아. 궁을 빠져나왔으니 괜찮아."

이안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다행이로군요, 로이니스."

로이니스는 그의 말투에 얼떨떨한 기분으로 대답했다.

"그, 그래. 네가 오지 않았으면 다행스럽지도 않았겠지만."

이안은 쉐도우 로드에게 속았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진 않았다. 하나 그 덕분에 로이니스를 구할 수 있었으니 참으로 다행이었다.

"일단 돌아가시지요. 이렇게 돌아다닐 순 없습니다."

"그래, 알았어."

로이니스는 힘없는 투로 말했다.

이안은 그녀의 대답에 살짝 놀란 감도 있었다.

그녀가 가야 하는 곳은 다시 감옥이었다. 하지만 그 더러운 감옥에 또다시 가야 한다니, 로이니스를 처음 만났을 때와는 다른, 상상하기 어려운 대답이었다.

"풋! 내가 아직도 어린앤 줄 알아?"

그녀는 가볍게 웃으며 조소를 머금었다.

"하하핫!"

이안도 그녀의 얘기에 같이 웃었다.

"황자 전하……."

글루노 후작은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변해 버린 3황자 궁을 바라보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폐인처럼 널브러져 있는 3황자.

"그, 글루노 후작. 오셨군."

"이, 이게 다 어찌 된 겁니까? 오는 길에 그랜드 나이트의 단장과 부단장 모두가 쓰러져 있어서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로, 로엔그람 후작이 왔다 갔습니다. 그가 우리가 해독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더군요."

"아, 아니, 그걸 어찌 그자가! 그 누구라 해도 비밀에 부쳤기 때문에 아무도 모를 거라 생각했는데……."

3황자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내부에서 아마도 빠져나간 듯합니다."

글루노 후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인상을 찌푸리며 노성을 터트렸다.

"아니, 어떤 자식이 감히! 전하, 명을 내려 주십시오. 제가 당장 그놈들을 속출하여 3족을 멸하겠습니다."

"그만두시지요. 지금 그것보다 문제는 그자가 이제 알았으니 황제 폐하에게 고하는 날, 나는 살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글루노 후작은 입술을 깨물었다.

"끄응!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3황자가 눈을 빛내며 물어 왔다.

"방법이라니요? 방법이 있는 것입니까?"

글루노 후작이 안경을 고쳐 썼다.

"그자가 알고 있으면 그자를 죽여 입을 다물게 하는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살인멸구.

3황자의 얼굴도 갑자기 미소가 가득했다.

하지만 그는 잠시 후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커다란 문제점에 봉착했다.

"허나 그를 죽일 수 있는 기사가 없습니다."

"왜 없겠습니까? 지금 대륙십강의 일원 중 하나가 바로 지금 펠타온 제국 수도에 있지 않습니까?"

"디그라실 공작을 말하는 것입니까? 디그라실 공작을 움직일 순 없습니다."

디그라실 공작은 함부로 움직여 줄 사람이 아니었다. 글루노 후작도 잘 알았고, 3황자도 잘 알았다.

3황자는 그렇게 잘 알고 있는 글루노 후작이 왜 대륙십강을 얘기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펠타온 제국에는 대륙십강의 일원이 총 두 명이 존재합니다. 최고의 기사라는 디그라실 공작과 또 다른 한 명 이노센트 경이 있지요."

"이노센트 경?"

펠타온 제국의 최고의 기사가 디그라실 공작이라면, 최고의 자유기사는 이노센트 경이다.

당당히 대륙을 휘젓고 다니며, 입신양명한 그는 혜성처럼 나타나 단숨에 대륙십강의 일원이 되었다.

워낙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여 자유기사가 되고만 그.

분명 잘만 구슬릴 수 있으면 움직여 줄 것이었다.

"하지만 그를 어떻게 구슬릴 수 있단 말이오?"

"잊으셨습니까? 이노센트 경이 대륙을 돌아다니는 이유 말이지요."

"혹시?"

"그렇습니다. 남들의 눈에는 이노센트 경이 악을 처단하는 정의로운 기사지만, 귀족들은 대부분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의 가문 대대로 유전병이 나돌기 때문에 대륙을 돌아다니며 약을 찾는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노센트 가문의 대대적인 유전병.

그것은 한 대를 거슬러 두 대째 아이에게는 항상 빨리 죽는 병이었다.

이노센트는 간신히 피해 갈 수 있었지만, 그의 딸은 올해 15의 나이로 수명이 고작 3년도 남지 않았다.

이노센트 가문의 유전병에 걸린 사람은 18살 이상을 넘어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그가 찾는 약초가 있지 않습니까?"

"그렇군요."

메모라인 플라워.

이노센트가 5년이 넘게 이 약초를 찾으러 다닌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노센트 경을 움직이기 위해서 메모라인 플라워라니……."

메모라인 플라워를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간신히 입수해 온 메모라인 플라워를 이노센트 경에게 넘기려니 영 찝찝한 것이 망설여졌다.

'아니, 아니다. 메모라인 플라워는 언제라도 구할 수 있지만 이노센트 경은 언제든지 이 도시에 있는 게 아니다.'

메모라인 플라워와 로엔그람 후작을 조용히 저울질해 보았다.

3황자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좋습니다. 이노센트 경과의 만남은 후작이 추진해 주십시오."

"저만 믿으십시오, 황자 전하."

로이니스를 데려다 준 이안은 이리스 황녀의 몸 상태를 확인한 뒤 곧바로 블랙 머플러의 본거지로 향했다.

가면 갈수록 이리스 황녀의 몸 상태가 좋아지지 않았다.

'제길, 정말 이대로라면…….'

이리스 황녀는 이안이 다가가는 것을 상당히 꺼리는 눈치였다. 한눈에 봐도 그녀가 이안이 가르쳐 준 호흡법을 하지 않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시간이 없다.'

이안의 발걸음은 조용히 울려 퍼지며 허공을 갈랐다.

'시간이 없어…….'

그의 신형은 어느새 종적을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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