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42장 이리스 황녀여 □
달칵!
마차 창문 사이로 로이니스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간 화살의 위험을 방지하고자 창문으로 얼굴조차 내밀게 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식사조차도 마차 안에서 해야 했고, 잠을 자는 것이나 간단한 생리 현상조차 그랜드 나이트들의 엄중한 감시와 호위 속에서 이뤄져야 했던 그녀다.
그랬기에 이번 그랜드 나이트들의 호위에 제일 불만이 많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녀가 무슨 짓을 하든 그랜드 나이트들은 아무 신경도 쓰지 않았다. 아니, 신경은 쓰되 그전처럼 엄중한 호위는 사라졌다.
로이니스는 이안이 이틀 전에 부단장을 한 수만에 쓰러뜨리는 것을 보지 못했다. 소란이 일어났고, 그 소란 덕에 간신히 비집고 나와 봤을 때는 이미 부단장이라는 자는 기절해서 실려 가고 있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호위의 감시가 느슨해진 것도 이안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전체적으로 그랜드 나이트들이 로이니스만 집중적으로 호위하는 것이 아닌 사절단 전체를 호위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안이 따로 시키지 않아도 그들이 하게 되었다.
그 덕에 은의 기사단의 노고가 조금 편해졌다.
교대로 불침번과 호위를 서니 자연스레 쉬는 시간이 많아진 덕분이었다. 그래서인지 기사들의 얼굴에 항상 화색이 돌았다.
"칼리프 단장."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칼리프가 이채를 발산하며 고개를 숙였다.
"말씀하시옵소서, 후작 각하."
"슈레이더 왕국이 펠타온 제국에 군사를 대동할 수 있는 숫자는 얼마나 된다고 했소?"
"최소 5만 최대 8만까지 지원이 가능하다 들었습니다."
"적군!"
"후작 각하께서도 아시다시피 반역이 일어난 뒤로 아직도 왕궁 내가 뒤숭숭합니다. 족히 옛 국력을 되찾기 위해서는 3년에서 5년, 길게는 10년까지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반역자들이 처형당하거나 유배를 당하고, 그들의 영지와 재산은 모두 국고로 환수되었다. 아직도 많은 영지들이 영주가 없어 예전 로엔그람 영지처럼 대리인이 영주를 운영하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슈레이더 왕국은 작은 변방 국가에 불과했다.
국민의 수가 그리 많지 않아, 각 영지에서 군사들을 파병한다고 하여도 10만을 간신히 채울 정도였다.
조국을 지킬 병사 5만을 제외한다면 파병할 수 있는 군사의 수는 고작 5만에 불과하다는 뜻이었다.
무리를 한다면 8만까지 지원이 되겠지만, 2만으로 나라를 지키기에는 사실상 역부족이었다.
"펠타온 제국의 수도까지의 거리는 어떻소?"
"지금 속도로 간다면 적어도 내일 아침이면 도착할 듯싶습니다. 펠타온 제국은 방대한 영토를 지니고 있지만, 수도는 국경과 맞닥뜨리고 있는 곳입니다. 만약 국경이 밀리면, 수도까지 가는 길이 모두 뚫리지만 그만큼 파병의 속도가 빨라 프라스 제국조차 그간 펠타온 제국을 건드리는 일이 없었습니다."
청산유수처럼 쏟아지는 그의 말에 이안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잠시 후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과연 이 대륙에 있어 최고로 알려진 펠타온 제국의 황제는 어떤 모습일지 사뭇 기대되는군."
"예?"
"아니오. 단지 내일이 기대된다는 것뿐이니……."
* * *
"폐하, 오늘이 어떤 날인지 알고 계십니까?"
당당한 기백, 전신에서 풍겨 오는 멋진 풍모.
여느 젊은이들 못지않게 떡 벌어진 어깨는 올해 60세가 넘은 노인이라고 하기에는 믿기 힘든 중년인.
그가 바로 대륙 최강의 기사라 불리는 디그라실 공작이었다.
그의 앞에 옥좌에 앉아 디그라실 공작을 내려다보는 이.
숨길 수 없는 위엄과 강력한 카리스마.
나이를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자의 전신에서는 여느 때와 같이 강력한 풍모를 풍겨 왔다.
그는 펠타온 제국의 현 황제인 브리온 샤헬 펠타온!
대륙의 두 지배자 중 한 명인 브리온 황제였다.
"하하하하! 어찌 모를 수 있겠는가?"
브리온 황제가 호탕하게 웃었다.
디그라실 공작은 다소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폐하께서도 들으셨다시피 오늘 도착하는 슈레이더 왕국의 사절단을 맡고 있는 로엔그람 후작은 고작 약관의 나이에 소드 마스터에 오른 인물입니다."
브리온 황제는 안타깝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어찌 그런 인재를 슈레이더 왕국에서 얻었다는 말인가. 본국에서 태어났다면 좋았을 것을."
대륙 어디에도 20살에 소드 마스터가 되었다는 전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때, 잠자코 있던 안경잡이 후작이 입을 열었다.
"위험한 자입니다, 폐하."
그제야 브리온 황제의 눈이 살짝 떨렸다.
"무엇이 말인가? 감히, 사절단을 핑계로 짐을 암살하겠다는 뜻이라도 품고 있는 젊은이인가?"
안경잡이 후작은 글루노 후작이다. 현 펠타온 제국의 황제 브리온의 재상이다.
그는 단 한 번도 틀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가 손가락으로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로엔그람 후작은 떠오르는 대륙의 샛별로 불립니다. 고작 작은 변방 국가에 불과한 슈레이더 왕국을 단숨에 대륙의 이목을 집중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
브리온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소드 마스터란 이름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젊은 나이에 소드 마스터라면 장래가 기대되는 젊은이라는 뜻이었다.
"뿐만 아니라, 로엔그람 후작은 과거 대륙의 4할을 점령하던 라인하르트 대제국의 마지막 후손이기도 합니다. 몇 달 전 슈레이더 왕국을 집어삼키려던 필립 후작이 그의 병사들에 진압되어 수포로 돌아가 처형을 당한 일도 있었습니다."
황제의 귀로 들어오지 않는 이야기는 없었다.
글루노 후작이 말하는 모든 이야기는 이미 보고받았다.
브리온 황제는 잠자코 듣기만 했다.
"그 당시 그의 병사들은 약 5천을 상회할 정도였습니다. 그 정도의 군사를 지니고 있다는 것은 그 병사로도 충분히 왕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허나 그는 왕권을 장악하지 않고 곧바로 카이어스 국왕을 찾아 그에게 다시 왕의 자리를 넘겼습니다. 사실상 그가 그 당시 국왕의 자리에 올랐다 한들, 아무도 넘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브리온 황제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질문을 던졌다.
"후작은 도대체 무슨 이유로 로엔그람 후작이 왕좌를 넘겼다고 보는가?"
"그는 다른 무언가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는 곧바로 그 일이 끝난 후 프라스 제국과 본국의 전쟁을 통하여 본국과 동맹을 맺기를 원했습니다.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브리온 황제는 자신만만하다는 투로 대답했다.
"당연할 테지. 프라스 제국은 적국이 아닌가? 과거 라인하르트 대제국을 잊지 않았다면 원수인 프라스 제국과 손을 잡을 리는 만무하니까 그럴 테지."
"로엔그람 후작은 절대 멍청한 자가 아닙니다. 바로 대륙인들의 그런 심리를 이용하여 본국과 손을 잡으려 하고 있습니다. 그는 결코 본국 밑으로 들어올 강아지 새끼가 아닌, 배고픈 늑대와 같은 이입니다. 그 증거로 이번 사절단에 그랜드 나이트들이 파견되어 부단장인 자작이 단 일 수에 당하지 않았습니까? 그는 본국에 무언가를 원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말이 동맹이지 슈레이더 왕국이 펠타온 제국에게 일방적으로 군사를 파병하는 것과 같다.
브리온 황제는 입을 열었다.
"분명 슈레이더 왕국의 힘으로는 거의 5만이 넘는 병사를 파병할 걸세. 그 정도 군대를 보내 준다면 본국에게 원하는 것이 있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아닙니다. 나라에서 원하는 것이 아닌, 그는 개인적으로 폐하께 원하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폐하, 이번만큼은 신을 믿어 주시옵소서! 슈레이더 왕국과 불가침 조약을 맺고, 그저 돌려보내야만 하는 줄 아옵니다."
"음……."
곰곰이 듣던 공작도 신음을 흘렸다.
글루노 후작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공작이 생각하기에는 꿍꿍이가 있어서 실력을 숨겼다기보다는 기사로서 실력을 숨겼다고 생각했다.
모든 기사들은 원래 자신의 실력을 숨기기 마련이다. 3할을 숨겨 놓는 것은 디그라실 공작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때, 갑자기 대전의 문을 열고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여인 한 명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건 아니 될 말씀이라 생각돼요, 후작."
바로 브리온 황제의 막내딸인 이리스 공주였다. 브리온 황제의 자식으로는 대부분이 남자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인지, 막둥이로 난 자식이 딸이라는 사실에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브리온 황제가 제일 아끼고 사랑하는 자식은 오로지 이리스 공주뿐이었다.
"오, 공주야! 여기까지 어인 일이더냐?"
이리스 공주를 바라보는 황제의 눈빛에는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아닌 게 아니라, 공주는 휠체어를 타고 등장했다. 그녀의 뒤로는 걷지 못하는 그녀를 위해 기사들이 항상 대동하여 휠체어를 끌고 다녔다.
불과 2년 전, 마차 전복 사고로 인하여 하체를 잃고 만 그녀였다. 그때부터였다.
그녀는 다리를 잃은 상심에 빠져 밝았던 성격에 어둠이 드리워졌다.
브리온 황제는 항상 그것이 안타까웠다.
그래서 다리를 고치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했으나 설사 성녀가 현신한다 해도 고치기 어렵다는 말을 들어야 했다.
글루노 후작은 그녀의 다리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그녀가 한 발언에만 관심이 있었다.
"감히 여쭙겠습니다, 공주님. 아니 될 말씀이라니요? 신이 아직 무지한 터라 이해를 할 수 없사옵니다."
"후후! 재상이 무지하다니요? 재상이 무지하다면 현자들이 모두 무지할 것이요, 아카데미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들은 모두 개보다도 못한 존재일 거예요."
공주가 소심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녀의 말이 맞았다.
글루노 후작은 왜 그녀가 그런 발언을 했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글루노 후작은 결코 대답하지 않았다.
공주가 어떻게 얘기를 해 줄지 굉장히 궁금했다.
글루노 후작이 생각하길, 이리스 공주는 아주 현명했다.
만약 펠타온 제국에 1황자가 황태자로 등극하지 않았다면 그는 적극적으로 이리스 공주를 밀어줬을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펠타온 제국은 여자가 황제로 등극하기에는 무리가 따랐다. 기사들은 연약해 보이는 이리스 공주보다는 황제의 위엄을 닮은 황태자를 존경하기 때문이었다.
'후후! 어서 대답해 보시지요, 공주님.'
"참으로 안타까운 사실이지만, 펠타온 제국은 대인전이 강한 나라예요."
"대인전?"
브리온 황제가 흥미롭다는 듯이 되물었다.
공주는 황제에게 고개를 돌리더니 다시 얘기했다.
"예, 아바마마. 병사를 육성하기 보다는 기사를 육성했고,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펠타온 제국은 명실상부 대륙에서 인정하는 기사의 나라가 될 수 있었지요. 기사들의 힘은 강하기 그지없으며, 기사들의 검술을 기초로 가르친 병사들의 훈련은 모두 정예병으로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어요. 허나 그건 대인전일 뿐이에요. 전쟁은 대인전만 강하다고 이기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렇지. 맞다, 얘야."
적극적으로 수긍하는 브리온 황제의 모습.
전형적인 팔불출적인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인정할 수 없지만 프라스 제국은 많은 국민들을 보유하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본국과도 비슷한 수의 마스터를 보유하고 있죠. 게다가 프라스 제국은 대인전이 아닌 전쟁을 위주로 훈련을 해 왔어요. 적어도 전쟁에 있어서는 군사도 많고, 훈련도 본국보다 한 수 위라는 사실이죠."
브리온 황제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 또한 걱정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인정할 수 없지만 사실이로다."
"반면 슈레이더 왕국은 과거 수백 년 전부터 그 작은 땅에서 일어나는 힘으로 여러 왕국과 제국들의 침략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지켜 온 곳이에요. 고작 숫자는 5만에 불과하지만, 여타 많은 경험으로 본국에 큰 가르침을 줄 수 있어요. 뿐만 아니라, 이번 사절단의 책임자인 로엔그람 후작이 직접 군사 5만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된다는 소식이 파다해요. 그는 확실히 카이어스 국왕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으니까요."
"그 말 또한 맞는 말이로다."
"로엔그람 후작은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소드 마스터, 아니 단순한 소드 마스터가 아닌 대륙십강 급에 비교해도 전혀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어요. 얼마 전에 3황자 오빠의 그랜드 나이트들의 정보로는 확실히 부단장이 단 일 권에 무너졌다는 것이었으니까요. 그런 인재라면 마땅히 환영해야 함은 물론이에요. 또한 후작의 말대로 그가 무엇을 원한다고 해도 상관이 없어요. 이번 일로 프라스 제국만 멸망시킨다면 저희 제국은 명실상부 대륙 최고의 나라로 부상할 수 있게 돼요. 그가 공을 세운다면 땅이면 땅, 권력이면 권력, 그 어떤 것조차 못해 줄 게 없게 되지요."
글루노 후작은 안경을 고쳐 썼다.
"허나 공주님, 전쟁은 말처럼 그리 쉽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저 또한 본국이 프라스 제국만 멸망시킬 수 있다면 이 땅에 이 목숨조차 버릴 수 있습니다. 그는 멸망과는 상관없이 본국에 원하는 것을 제시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것 또한 후작의 말이 맞다."
브리온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이것은 단초적인 논쟁에 불과하다. 어차피 오늘이면 로엔그람 후작이 입궁할 것이다. 그때 결정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알았사옵니다, 폐하."
"그럼 후작은 이만 물러가거라."
"사절단이 도착하면 다시 입궁하겠사옵니다, 폐하."
"알았소, 후작. 때가 되면 사람을 시켜 가르쳐 주겠소."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후작이 잰걸음으로 대전을 빠져나가자 함박웃음을 지은 브리온 황제는 이리스 공주를 쳐다봤다.
"그건 그렇고, 공주는 여기까지 무슨 일이더냐?"
"그리텔 전 궁정마법사를 아시는지요, 아바마마."
"잘 알고 있다. 어찌 그를 모르겠느냐?"
"예, 30년이 넘는 은거를 끝으로 세상으로 나왔지요. 저는 그와 알고 지내는 사이였어요. 1년 전 제 다리를 보고 고쳐 주려고 마음먹었던 분이기도 하지요. 물론 그 당시는 제가 그분이 궁정마법사였다는 것도 몰랐지만."
"그래, 조금 섭섭하더구나. 얘기를 했다면 오랜만에 만나 술이라도 한잔할 수 있었을 터인데."
조금 아쉽다는 듯 브리온 황제는 우수적인 눈빛으로 과거를 회상했다.
"그가 말하길, 얼마 전에 숙부님에게 있었던 키메라와 흑마법사의 일은 예상대로 프라스 제국의 소행이 맞다 하였어요."
소드 마스터 두 명이 살해되었던 일을 생각하자 곧바로 디그라실 공작의 얼굴이 구겨졌다.
"이걸로 본국은 큰 위기에 빠졌어요. 대인전에 강한 본국이지만 키메라가 양성이 되면 대인전에 강한 우리 기사들은 키메라로 다시 태어날 것이요, 본국에게 칼을 들이미는 살인마가 될 것이죠. 그렇다면 저희 제국의 장점인 대인전조차 쓸모가 없어져요."
"……."
황제나 공작도 공주가 하는 말을 잘 알아들었다.
"큰일이에요. 만약 우리 제국이 프라스 제국의 키메라를 당할 수 없다면……."
말을 끊어 버리고서 공주가 한숨을 내쉬었다.
말을 잇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최소한 패배, 크게는 패망할지도 몰라요."
"펠타온 제국 측에서는 저희를 그리 반기지 않는 듯하군요."
칼리프 단장의 말에 이안이 고개를 양쪽으로 돌리며 한 번씩 번갈아 보았다.
"그런 것 같소."
슈레이더 왕국처럼 좋은 의도로 사절단이 방문한다면 어느 나라건 간에 환영하는 것은 아주 당연했다.
하지만 펠타온 제국의 수도에 들어서자 그들을 반기는 시민은 단 한 명도 찾아볼 수 없었고, 오로지 말에 올라탄 기사들의 모습을 쳐다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이안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고개를 어디에 둘지 모르다가 칼리프가 한소리 했다.
"후작님, 이럴 때는 왕국의 위상을 살리기 위하여 가슴은 당당히 펴고 앞을 바라보시는 것이 맞습니다."
"아, 고, 고맙소."
"아닙니다."
이안은 꼬마 애들마저도 목검을 차고 돌아다니는 것을 보자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가 그랜드 나이트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적어도 저들은 황궁의 기사들만큼 썩은 자들은 아닌 것 같다. 명불허전이라더니 오히려 소문이 부족할 정도야.'
그랜드 나이트들은 수도에 입성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앞장을 섰다.
"지리는 우리가 더 잘 알 듯하니 우리가 안내하겠소. 슈레이더 왕국의 사절단은 우리의 뒤만 잘 쫓아오시면 될 것이오."
"알았습니다."
마르도 백작의 뒤를 쫓아 얼마 지나지 않아 황궁에 입성할 수 있었다.
황궁에는 수많은 기사들의 동상이 있었는데, 역대 나라를 지켜 온 황제들의 모습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란다.
"폐하는 어디에 계시는 것입니까?"
"지금쯤 소식이 당도했을 테니 대전에서 기다리고 계실 것이오. 일단 대전으로 가는 편이 좋겠소."
이안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러다가 그의 눈길을 끄는 것이 보였다.
궁의 입구에서 사절단을 맞이하는 한 소녀.
칼리프 단장은 그녀를 보자 바로 입을 열었다.
"펠타온 제국에 단 한 명 있는 이리스 공주입니다."
"그렇소?"
이안은 그녀를 위아래로 훑었다.
금발 머리에 웨이브를 준 머리카락은 정말 아름답기 그지없는 귀여운 여인이었다. 하나 이안의 눈길을 끄는 것은 외모와 공주라는 것이 아닌 바로 그녀가 타고 있는 휠체어에 있었다.
칼리프 단장은 말을 덧붙였다.
"2년 전 마차 전복 사고로 하체가 마비되는 증상이 왔다 합니다. 그리고 우리 왕국과 펠타온 제국의 동맹을 열렬히 지지하는 분이기도 하지요."
이안은 이리스 공주의 앞에 가서 정중히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슈레이더 왕국의 사절단 책임자인 로엔그람 후작입니다. 귀가 따갑도록 듣던 이리스 황녀님의 자태를 보니 소문이 오히려 부족할 지경이옵니다."
이리스 공주, 아니 황녀는 이안의 손에 팔목이 잡혔다.
그리고 곧이어 손등에 이안의 입술이 닿자, 갑자기 그녀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졌다.
여태 황녀로서 손등에 키스를 받는 것은 수백 번, 수천 번도 겪어 본 일이었다.
하나 오늘처럼 이렇게 가슴이 두근거린 적은 처음이었다.
"아…… 그, 그래요. 저야말로 슈레이더 왕국의 최고 기사인 로엔그람 후작을 보아 반가워요."
그리고 그녀의 눈길은 곧바로 이안의 옆에 서 있는 에반에게 향했다.
젊다고는 들었지만 설마 10대 후반처럼 보이는 외모를 지녔다고 생각하지는 못했다. 이안이 환골탈태로 외모가 살짝 변모하기는 했지만 그의 동안적인 얼굴은 약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10대 후반처럼 착각하기에 충분할 정도였다.
오히려 후작이라는 지위가 에반에게 더욱 어울릴 정도였다.
만약 이안이 귀족들이나 입을 만한 옷을 입지 않았다면 분명 그를 후작이라고 생각하지는 못했을 것이었다.
'너무도 부드러운 손……. 검을 잡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힘들 정도로. 역시 마스터란 말인가? 그것도 중급 이상이라고…….'
그녀는 이안이 자신의 팔목을 잡은 감촉 하나만으로 이안의 경지를 추측했다. 검을 잡은 기사들은 죄다 굳은살이 박이지만 이안의 손은 여타 여인의 손과 다를 바가 없을 정도로 아주 고왔다.
'신체의 재구성이 일어나는 경지를 넘어선 거야!'
유라시아 대륙에서는 환골탈태를 신체의 재구성이라는 말로 불렀다. 기사의 나라의 황녀로서 그런 것은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어서 들어가요. 황제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세요."
"알겠습니다, 황녀님."
'타국과는 다르군!'
궁 안으로 들어서자 이안은 살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정말,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찾기도 힘들 정도로 궁의 길은 매우 복잡했다.
"미안해요, 후작. 본국은 일단 폐하의 안전을 위해 궁을 이렇게 지을 수밖에 없었어요."
정말 그녀는 미안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안은 손사래를 치며 살짝 웃었다.
"아닙니다. 저희야말로 펠타온 제국에 들어온 이후 보고 듣고 배우는 것이 아주 많아 즐겁습니다."
그녀는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와아! 정말요? 다행이에요. 역시 기사로서 보는 눈이 있는 것 같아요."
펠타온 제국은 관광과는 거리가 아주 멀다. 유라시아 대륙에서 기사들의 코스로 유명한 국가이긴 하지만 일반 귀족들이나 평민들이 여행 올 만한 곳은 아니었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이안의 말을 자신의 일인 양 기뻐하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아, 벌써 도착했네요, 후작."
대전 앞을 지키는 기사 두 명이 이리스 황녀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황녀님을 뵈옵니다."
"황녀님을 뵈옵니다."
"오랜만이에요. 아바마마를 호위하느라 수고가 많아요."
"저희의 일일 뿐입니다. 괘념치 마십시오, 황녀님."
이안은 아랫사람에게마저 일일이 인사까지 하며 말을 거는 그녀를 보며 살짝 감탄했다.
한 대륙의 두 제국의 지배자 중 한 명의 딸이었다.
그런 권력자가 자만심이 없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내숭인가, 진심인가?'
이안의 미묘한 표정에 로이니스가 어느새 다가와 한마디 했다.
"흥! 내숭 덩어리."
하지만 이안의 눈에는 진심으로 보였다.
"슈레이더 왕국의 사절단이 도착했습니다."
위사의 말에 브리온 황제가 크게 외쳤다.
"들라 일러라."
"예, 폐하!"
대전의 문이 열리며 사절단이 들어왔다.
척! 척! 척!
질서 정렬하게 움직여 정확히 용상과 20걸음 떨어진 거리에서 한쪽 무릎을 꿇어 내렸다.
"신 로엔그람 폰 이안이 슈레이더 왕국의 지배자이신 카이어스 국왕 전하의 명을 받들어 위대한 펠타온 제국의 지배자이신 브리온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신 베리카……."
귀족들의 인사가 끝이 나자 브리온 황제는 너털웃음을 흘렸다.
"허허허! 이렇게 와 주어 고맙구나. 먼 길 오느라 아주 수고가 많았네. 그래, 카이어스 어린 국왕은 잘 있는 겐가?"
"전하께서는 강녕하시옵니다. 전하께서도 폐하의 문후를 여쭈어 보라 하셨나이다."
"하하하! 아주 잘 있다고 전해 주게. 카이어스 국왕은 인복이 참으로 많은 것 같아."
이안을 두고 하는 말이 분명했다.
펠타온 제국 측의 기사들은 이안을 보며 열망을 불태웠다.
하나 글루노 후작은 아니꼬운 시선으로 이안을 바라봤다.
"그렇게 봐주시니 황공할 뿐이옵니다, 폐하."
브리온 황제는 은근슬쩍 이안에게 물었다.
"로엔그람 후작, 어때? 이참에 우리 펠타온 제국 측으로 붙는 것이 말이야. 자네를 위해서라면 후작이건 공작이건 뭐든 내놓을 테니 말일세."
정말 내놓을 기세로 말하자 이안은 당황했다. 사절단은 물론 펠타온 제국의 재상인 글루노 후작의 놀람은 평소보다 컸다.
"아, 아니, 폐하! 어, 어찌 그런 말씀을……."
"맞습니다, 폐하. 제가 모시는 분은 카이어스 국왕 전하 한 분이옵니다."
브리온 황제는 새삼 아쉽다는 표정이었지만, 잠시 후 다시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 이 사람들아, 뭘 그리 정색하나? 그냥 농 한번 던져 본 걸세. 농이야, 농."
"휴우!"
글루노 후작은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소매로 닦아 내며 안경을 고쳐 썼다.
"폐하, 다음에는 절대 이런 농을 하지 마십시오. 이 늙은이들의 간이 콩알만 해졌사옵니다."
"하하하! 알겠네, 알겠어. 다음부터는 그러지 않도록 하겠네. 허허! 이거 농 한 번 더 던졌다가는 신하들 모두가 심장마비로 죽겠구나."
펠타온 제국의 신하들은 늙은이들이 많았다. 젊은 자들은 모두 기사로서 활동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늙었다고 한들 대부분 실력이 뛰어난 은퇴 기사들이었다.
웬만한 일로 심장마비로 죽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하지만 심장마비로 죽는다고 하니 놀람이 얼마나 큰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이안은 브리온 황제가 호탕한 면이 있는 호걸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황제가 되지 않았다면 난세를 극복할 영웅 감이었다.
"폐하, 신들은 이만 물러나겠사옵니다."
이안이 말하자 브리온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 나누도록 하지. 아니, 일단 그전에 로엔그람 후작만 남고 모두 가 주겠나?"
"그러하겠사옵니다."
"폐하, 시, 신들은 그럼 어찌?"
글루노 후작이 묻자 브리온 황제가 말하였다.
"어찌하긴? 그대들도 일단 돌아가 있게나. 사절단들이 힘들어 하는 것 같으니 그대들과의 자리는 내일 만들어 주겠네."
"알겠사옵니다, 폐하."
처음 만난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브리온 황제는 이안을 적극적으로 믿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생각보다 담대한 자로다. 생각을 읽을 수 없을 만큼 간교한 자이기도 하며. 과연 제국의 황제로다.'
이안은 순수한 마음에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이안과 브리온 황제의 자리에서는 어떠한 황실기사단의 모습도 볼 수 없었고, 은밀하게 황제를 지키는 자들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이안이 고개를 쳐들고 눈길을 이리저리 돌리며 사라지는 황제비밀호위대를 바라보고 있자, 브리온 황제는 박수를 쳤다.
짝짝짝!
"과연, 슈레이더 왕국에서 사절단을 맡을 만하구나. 전원 소드 마스터로 구성된 호위대의 은밀한 움직임을 고작 한 번에 파악해 내다니. 우리 제국에서도 디그라실 공작이 아니면 어떠한 이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영광이옵니다, 폐하."
"이제 둘밖에 없는 자리니 편하게 얘기하세나. 자네 같은 젊은이와 얘기하니 나도 같이 젊어지는 것 같아. 하하하!"
"그리하겠사옵니다, 폐하."
하지만 이안은 전혀 편안한 모습으로 얘기를 나누지 않았다.
국가의 일이다.
아무리 황제가 명했다고 해도 결코 약해 보이는 모습을 보여 줄 수 없고, 너무 쉬워 보이는 자라고 보여 줄 수도 없었다.
브리온 황제는 가볍게 혀를 찼다.
"이런, 쯧쯧. 그리 융통성이 없어서야……. 자네의 마음은 잘 알고 있네."
"폐하, 이리 독대를 하신 이유는 무엇이옵니까?"
"허허! 본론부터 알고자 하는 겐가?"
"죄송합니다, 폐하. 허나 소신이 궁금하여 어쩔 수 없었나이다."
"하하하! 하긴, 자네같이 배짱이 두둑한 자가 아니라면 대체 누가 슈레이더 왕국의 필립 후작의 간계를 막고, 왕위를 다시 되찾을 수 있겠는가. 자네는 대륙의 홍복이야, 홍복!"
브리온 황제는 자신의 일인 양 크게 좋아했다.
하지만 이안은 어서 브리온 황제가 본론을 얘기해 주었으면 했다.
"음……. 사실 이런 게 아니라 예전에 프로시안 영지에서 프로시안 남작을 치료해 준 일을 알고 있네."
"예?"
아니, 어찌 브리온 황제가 고작 작은 왕국에서 시골 영지의 사정까지 알고 있단 말인가.
브리온 황제는 천천히 입을 떼었다.
"사실 타국의 귀족인 자네한테 이런 말을 하긴 어렵지만, 본국은 예전부터 프라스 제국과도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네. 그러던 중, 프라스 제국 측에서 키메라를 연구한다는 소식이 간간이 들려오기도 했지. 그러하여 본국은 프라스 제국의 키메라에 대응하기 위해 정령술사와 유명한 마법사들을 초빙하여 연구를 하기 시작했네. 기사들의 힘을 더욱 강화시키기 위해서 말이야."
이안은 살짝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어, 어떤 연구를 하신 것입니까?"
"본국은 예전부터 속성검법으로 아주 유명한 나라였지. 바로 그 속성검법은 자연의 힘인 불이나 얼음, 물, 스파크 따위를 이용한 것이네. 바로 신체를 뒤바꾸어 마나에 영향을 주어 속성검법을 익히게 된 것이지. 그것 또한 바로 연구를 통해서 얻을 수 있었다만, 우연한 기회로 얼음의 신체로 바꿔 주는 연구물이 프로시안 영지의 룩커강으로 흘러들어 간 것이라네. 바로 룩커강으로 흘러가기 전날 속성검법을 훔치기 위한 도적들이 들이닥쳤지. 아마 본국은 프라스 제국이 아닐까 생각하네."
이안은 혹시나 하고 물었다.
"그, 그럼? 혹시 그 얼음의 신체로 바꿔 준다는 연구물을……?"
"그렇다네. 바로 프로시안 남작이 우연한 기회로 얻게 되어 아마 복용한 것이 아닐까 싶네. 본국은 치료해 줄 방도도 없었고, 여러 방면에서 찾아보았지만 결국엔 찾을 수 없었네. 혹 찾았다고 해도 귀족이었기에 함부로 나설 수도 없었지. 어쩔 수 없이 방치를 해 두었다만, 그때 갑자기 자네가 혜성처럼 등장한 걸세."
이안이 프로시안에서 갑자기 나타났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다 자네의 과거사를 보게 되었네. 자네는 정말 이상한 사람이었어. 어느 날 갑자기 텔레포트 같은 마법으로 룩커강으로 흘러들어 와 프로시안 영지에 안착하게 되었지. 그러다 알게 되었네. 자네가 바로 프로시안 영주의 몸을 치료해 주었다는 사실을 말이야!"
브리온 황제는 진심으로 흥분해 있었다. 마치 발견하지 못했던 노다지를 발견한 듯한 심정을 가진 광부의 모습이었다.
"이렇게 자네와 독대를 한 이유는 나의 딸 이리스를 구해 줄 자는 자네밖에 없음을 잘 알기 때문이네. 얼음의 신체였던 프로시안 남작을 치료해 줬듯이 이리스를 치료해 주게나. 만약 그렇게만 해 준다면 자네에게 원하는 것들 모두를 전해 주겠네."
한 소녀의 여린 아버지의 모습.
이안은 결국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전 의사도, 성직자도, 그렇다고 약초사나 성자도 아닌 일반 평범한 기사인 후작에 불과합니다. 우연한 기회로 플래임 플라워 없이 프로시안 남작님을 치료해 주었다만, 이리스 황녀님 또한 고칠 수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 큰 기대는 하지 마십시오."
"알겠네. 걱정 말게. 치료 도중 필요한 것이 있다면 뭐든 말만 하게. 뭐든지 다 들어줌세."
"필요한 것이 있다면 시간과 몇 가지 약초, 누구도 볼 수 없게 방만 있으면 됩니다, 폐하."
"그 정도면 정말 되는가?"
"아까 말씀 올린 대로 큰 기대는 하지 마십시오."
"아니네! 그 정도만 해도 정말 고맙네. 정말 고마우이, 후작."
"괘념치 마십시오, 폐하."
글루노 후작은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마르도 백작과 3황자를 만났다.
마르도 백작은 그랜드 나이트들의 단장이며 3황자를 따르고 있는 사람이었다.
"어쩐 일인가요, 글루노 후작?"
글루노 후작은 안경을 고쳐 썼다.
그가 진심으로 따르고 있는 자는 브리온 황제가 아니라 3황자였다. 재상으로서의 그의 안목에 황제가 될 재목은 이리스 황녀나 3황자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폐하께서 완전 미치신 것이 맞습니다!"
글루노 후작은 엄청난 발언을 했다.
아무리 후작이라지만 황제 모독으로 참수를 당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마르도 백작은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혹시 누가 엿듣지 않을까 염려했지만, 3황자는 태연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째서지요?"
"슈레이더 왕국의 로엔그람 후작이 마음에 드신 모양입니다. 이리스 황녀를 고칠 수 있도록 따로 치료 방을 내준다는 명이 있었습니다. 이대로 두다가 로엔그람 후작이 황녀님의 하체마비를 고치기라도 하는 날에는 프라스 제국을 온전히 슈레이더 왕국에 갖다 바치는 꼴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렇지요, 후후! 분명 아바마마는 인재를 좋아하시지요. 그래서 제가 마차 전복 사건을 조작하여 그 아이의 다리를 다치게 만들었고요."
마차의 바퀴가 빠져 전복된 것은 사전에 3황자가 힘을 썼기 때문이다. 절벽으로 굴러 죽음을 원했지만 운이 좋게 이리스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만약 그 아이가 하체가 마비되지 않았다면 황제가 됐을지도 몰라요. 펠타온 제국의 유일한 여황제가 말이에요! 하지만 지금 보니 로엔그람 후작에게 하는 꼴을 저도 봐서 알 것 같군요."
"이렇게 병을 고쳐서는 안 됩니다. 물론 고칠 리도 없지만 확실히 끝을 맺어 두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3황자는 은근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렇지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신한테 맡겨 주십시오. 3황자님이 수년 전에 은밀하게 구한 독약이 있다 들었습니다."
무색, 무미, 무취
색도, 맛도, 향도 없는 독약.
세상에서 단 몇 개 없는 지독한 독약이다.
물론, 뭐 다섯 걸음 걷기도 전에 녹아내려 죽는다는 그런 독약은 아니었다. 그런 지독한 독에는 무색, 무미, 무취가 만들어질 리가 없었다.
그렇다 해도 3황자가 가지고 있는 독은 해독제를 이틀 이내에 구하지 못하면 심장이 멎어 버리는 것이었다.
"시종을 시켜 독살시키겠습니다. 황녀가 독살된 것은 그 누구도 모를 것입니다. 그저 치료 도중 로엔그람 후작의 손에 잘못 걸려 사망한 것으로 되겠지요."
로엔그람 후작도 처리하고 이리스 황녀도 처리한다는 심보였다.
"후작의 손에 맡기겠어요."
"감사합니다, 황자님. 흐흐흐!"
글루노 후작은 안경을 고쳐 썼다.
그의 입가에서는 어느덧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 * *
이안은 호위기사들을 대신하여 이리스 황녀의 휠체어를 직접 밀었다. 물어볼 것도 있었고, 그녀의 상태를 확인할 것도 있었다.
"양쪽 다리에 아무런 감각도 없는 것입니까?"
"맞아요, 후작. 움직일 수도, 힘을 줄 수도, 그렇다고 상처를 입어도 느낌조차 나지 않아요."
'확실한 하체마비. 중원에서 아무리 고명한 중들이라 해도, 명의라 해도 하체마비를 치료했다는 전례는 소문으로만 들었을 뿐, 눈으로 본 적은 없다.'
하지만 소문도 뜬소문이 많기 마련이다. 하체마비는 고칠 수 없는 신체적 장애였다.
"치료를 하려면 많은 마나를 필요로 합니다. 몸이 마나에 다치지 않게 하루에 3시간 정도씩 제가 가르쳐 준 호흡법을 이용하여 몸을 단련시켜 주시면 됩니다."
"호흡법이요?"
가부좌를 틀어 앉을 수 없어서 그다지 많은 효과를 기대할 수는 없지만 이안은 최소한 마나를 느낄 수 있을 정도면 충분하다 생각했다.
"예, 그렇습니다. 전 이 호흡법으로 성장해 왔습니다."
"호호! 후작께서 이 호흡법으로 성장했다니 정말 놀라워요. 저도 배운다면 후작처럼 될 수 있을까요?"
이안은 어릴 적부터 시작하여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지만, 이리스 황녀는 아니었다. 그녀는 영재라고 할 순 있지만 천재라고 할 순 없고, 하체가 마비인 상태에서 심법만으로 강해진다는 것은 무리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안이 가르치는 것은 만상귀일신공이 아니라 바로 청명심법에 불과했다.
"명심할 것은 이 호흡법은 친인이라 해도 가르쳐 드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째서 후작은 저에게 이런 것을 가르쳐 주시는 거지요?"
그렇게 중요한 거라면 감히 누구한테 가르쳐 준다는 말인가.
"전 펠타온 제국의 황녀예요. 이것으로 군사를 양성할 목적으로 사용한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나요?"
"황녀님께서는 아주 똑똑한 분이라 생각합니다. 군사나 기사들을 양성 목적으로 사용한다면 언제든 그 소문이 퍼지기 마련이고, 유출될 것입니다. 저 같으면 친인 한두 명에게 가르쳐 줄 것이 분명하지요."
"그걸 알면서도 가르쳐 준다는 말이에요?"
이안은 그것에도 생각해 둔 바가 있었다.
"이 호흡법은 고작 치료를 목적으로 사용할 반쪽짜리에 불과합니다. 남은 반쪽은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반쪽으로 아무리 연구한다고 해도 비밀을 밝혀내는 데는 수백 년이 걸린다 해도 불가능할 거라 생각합니다."
"대륙의 연구 수준을 밑으로 보는군요."
"발전이 있다 해도 수백 년으로 잡은 겁니다."
"후후! 어떤 수준의 호흡법이기에 후작이 그렇게 말하는 건지 정말 궁금하네요."
"일단 간단히 몸 상태를 보겠습니다."
치료 방으로 들어간 이안은 일단 플래임 플라워를 달여서 만든 약을 먹였다.
일단 첫 번째로 음기와 양기를 적절히 분배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안은 추궁과혈을 시작했다.
탕! 탕! 탕!
간단히 허공을 튀기는 손가락의 움직임.
그럴 때마다 드러누운 이리스 황녀의 몸이 살짝 들썩였다.
"흐윽!"
"말씀을 하시면 안 됩니다."
이안은 추궁과혈을 하며 이리스 황녀의 몸속을 들여다봤다.
'절맥?'
단순한 절맥이 아니었다.
'칠음절맥인가?'
지금까지 죽지 않은 것이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이안은 내공을 일으켜서 절대로 칠음절맥에 대해서는 건드리지 않았다. 하체마비뿐만 아니라 칠음절맥은 그녀의 몸을 고친다 해도 얼마 살지 못하다 죽을 것이 뻔했다.
이안은 플래임 플라워로 생긴 양기를 모두 빨아들였다.
'지독하군!'
"오늘은 일단 마나를 쉽게 느낄 수 있는 신체로 탈바꿈시켜 드리겠습니다. 그렇다고 신체의 재구성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단순히 몸의 성질을 바꾸는 것이니까요. 마나가 움직이는 길을 잘 기억해 두었다가 제가 가르쳐 준 호흡법으로 그 길로 마나를 운용하면 될 겁니다."
이안은 일단 기사들의 마나보유고인 하단전에 내공을 불어넣어 그곳의 존재를 확실히 각인시켰다.
머리 좋은 황녀이니 절대 잊어 먹지는 않을 것이다.
이안은 다시 내공을 일으켜 전신을 한 바퀴 휘돌았다.
"주무셔도 좋습니다."
이리스 황녀는 처음 느껴 보는 시원한 느낌에 기분이 좋아졌다가 갑자기 눈꺼풀이 감겨지는 것에 억지로 눈을 뜨려다 이안의 말소리에 그대로 눈을 감았다.
* * *
"어땠어?"
로이니스는 뚱한 표정으로 물었다.
"하체마비가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은 여자구실도 힘들 것이고, 후에 가면 3년 안에 죽을 것입니다. 제가 볼 땐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참으로 용합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이리스 황녀랑 둘이 같이 있었으니까 어땠냐고? 내가 볼 땐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미녀던데."
이안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좋은 분이라 생각합니다."
"뭐, 뭐야?"
"질투심 느끼는 거지요, 로이니스?"
로이니스는 갑자기 얼굴이 붉어졌다.
"흐, 흥! 누, 누가 그런다고! 흥!"
말도 더듬거렸다.
"그런데 대전으로 가는 건 왜 막으시는 겁니까? 폐하를 알현해야 합니다. 사절단의 이유를 아시잖습니까?"
"흥! 난 사절단인 외교적 문제로 온 것이 아니라 단순히 청혼을 거절하기 위해 온 것이라고."
"3황자 말씀이십니까?"
"그래!"
3황자에 대한 소문은 자세히 듣지 못했다. 이리저리 바쁜 일도 많았으니까 말이다.
그때, 갑자기 로이니스가 엉뚱한 질문을 했다.
"넌 사람과 나라, 어떤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
"사람이 있어야 나라가 존재하고, 나라가 있어야 사람이 존재하는 것이니 그 둘의 존재 가치는 같다고 봐야지요."
"그런 철학적인 얘기나 교과서적인 답변은 말고 말이야. 네 생각을 알고 싶을 뿐이야."
"그때마다 상황에 따라 다르게 되겠지요. 지금으로썬 나라보다 우선인 건 없습니다."
"그, 그렇겠지?"
"예. 그런데 로이니스도 같이 대전으로 가실 겁니까?"
"그런데, 왜?"
"아닙니다. 그저 폐하를 알현할 때는 잠시 입만 닫아 주신다면……."
로이니스는 갑자기 역정을 내며 이안의 얼굴을 향해 무작정 주먹을 휘둘렀다.
"뭐야? 이게!"
"하하하! 어서 오시게, 후작."
"문후 여쭈옵니다, 폐하.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고작 3일 만에 다시 보는 얼굴이지만, 매일매일 이리스 황녀의 상태를 확인하고 싶은 브리온 황제.
황제는 이안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일단 물었다.
"그래, 황녀의 상태는 어떠한가?"
"기본적으로 괜찮으시긴 합니다. 허나 하체마비로 인해 그동안 몸을 움직이시지 않아 체력적으로 많이 약해진 데다 하체마비 이전에 이미 고질적인 선천적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혹, 알고 계셨습니까?"
브리온 황제는 오늘 처음 듣는 말에 화들짝 놀랐다.
"아니, 또 다른 선천적인 병이 존재하다니! 그게 무엇이요, 후작?"
"어릴 때부터 지독하게 몸이 약해, 어디 뛰어다니기만 해도 금방 힘이 들 정도로 체력이 약하지는 않았는지요? 아니면 따뜻한 봄날임에도 불구하고 감기에 걸리지도 않았음에도 몸이 굉장히 찬 증상을 일으키거나 말입니다."
"……!"
황제의 두 눈이 갑자기 커졌다.
이리스 황녀의 체질을 감추기 위해서 아무한테도 가르쳐 준 적이 없건만, 눈앞에 있는 로엔그람 후작은 고작 며칠 만에 알아본 듯했다.
신관들이나 의사들은 그 체질을 제대로 파악한 적도 없을 정도였다.
브리온 황제가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어, 어떻게 알았는가?"
"이 유라시아 대륙에서 그 병의 이름은 딱히 없습니다. 그저 제가 살던 곳에서는 선천적인 신체의 체질을 달고 태어나 20살이 되기 전 음기가 차올라 종국에는 사망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저희가 살던 곳에서는 이렇게 불렀습니다. 칠음절맥."
여성에게만 생긴다는 칠음절맥.
중원에서도 소문만 무성할 뿐, 고친 사례는 직접 본 적이 없었다.
수천만 명 중 하나 걸릴 정도로 아주 보기 드물 정도의 신체 조건인데, 일단 걸리고 나면 치료 방법이 없으니 죽기 전까지 엄청난 고통만 받다가 죽는 꼴이 된다.
"고, 고칠 방법은 있겠는가?"
이안은 사실대로 얘기했다.
"어렵습니다. 무엇보다 칠음절맥은 선천적인 신체 조건이라 하체마비로 체력까지 약해진 황녀님께서는 치료조차 제대로 받을까 두려울 정도입니다."
"그, 그럼 그 아이가 죽을 때까지 그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눈만 뜨고 있으란 말인가!"
"적어도 제가 살던 곳에서는 그랬습니다."
"그 말의 뜻을 알고 싶네."
"제가 살던 곳은 그대로 내버려 뒀기에 치료 방법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곳은 제가 살던 곳과 다른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황제 브리온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게 무엇인가?"
"바로 풍부한 마나와 속성검법을 연구하는 곳이기 때문에 속성으로 만들어진 약초들이 아주 많다는 점이지요."
"그것으로 무엇을 한단 말인가?"
"어차피 하체마비는 일종의 신체장애입니다. 만약 고칠 수 있다면 신체의 재구성뿐입니다. 그러니 일단 칠음절맥부터 막아 보겠습니다. 속성의 약초로 몸을 따뜻하게 데워 주면 반응이 올 것입니다."
브리온 황제의 표정이 조금은 밝아졌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이안에게 물었다.
"자네는 아까부터 계속 '살던 곳'이라는 얘기를 해 왔지. 혜성처럼 갑자기 룩커강으로 나타난 자네가 살던 곳이라는 얘기를 꺼내다니, 도대체 살던 곳이 어디인 겐가?"
이안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중원 얘기를 꺼내는 것이 아닌데…….'
"그건 명령이옵니까, 그저 궁금증으로 물으시는 것입니까?"
브리온 황제는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하하하! 단순히 농일 뿐이야. 궁금해서 물어본 것이니 만약 말할 수 없다면 하지 말게. 누구에게나 비밀은 있는 것이니, 조국도 아니고 타국의 귀족에게 물어볼 이유는 없겠지."
"조그마한 힌트를 드리자면 저의 고향입니다. 제 무위도 바로 그곳에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허허허! 그런 놀라운 곳이 있을 줄이야 몰랐군. 다음에 꼭 한 번 가 보고 싶군."
"기회가 되면 꼭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허허허! 기대하도록 함세."
"반드시 마음에 드실 겁니다."
유라시아 대륙과는 다른 세계.
색목인들만 존재하는 곳이 아닌 동양인들이 존재하는 신비로운 세계 중원.
아인이 이곳 도착했을 때처럼 그 누구도 중원에 가면 바로 놀라움을 토해 낼 것이 분명했다.
이안은 어릴 적 향수를 생각하며 잠시 단꿈에 빠졌다.
'돌아가고 싶군. 중원…….'
"왜 같이 안 들어온 겁니까?"
마치 아까 전까지만 해도 같이 들어갈 것처럼 말하더니, 막상 대전 앞으로 도착하니 들어올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는 로이니스.
들어가자는 말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꿈쩍도 하지 않았기에 이안 홀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왔다.
"중요한 얘기였던 것 같으니까."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렇지요."
"이리스 황녀에 대한 이야기였어?"
"제가 황녀를 치료한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 모양이군요."
로이니스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대대적으로 그렇게 커다란 치료방을 내주었다는 사실이 퍼졌으니 당연하지. 그런데 어때, 이리스 황녀는?"
이안은 일단 한숨부터 쉬었다.
"안 좋습니다. 그것도 아주요. 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봐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안 좋은 걸 왜 너한테 치료 받는 거야? 단순히 소드 마스터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은데……."
"뭐, 그런저런 여러 가지 이유가 있어서지요."
로이니스가 이안의 옆얼굴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래?"
이안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예, 일단은 그렇습니다."
로이니스는 입술을 삐쭉 내밀고 투덜거렸다.
"쳇, 생각보다 재미없어."
* * *
"처음 보는 아이로구나. 평소에 내 시중을 드는 오닌은 어디 가고 네가 들어오는 것이냐?"
이리스 황녀의 물음에 수줍게 생긴 미소년이 고개를 숙였다.
"소년은 라오스라 합니다. 이틀 전에 새로 들어온 시종인데, 오닌이 오늘은 몸이 아파 일을 할 수 없다고 신관님이 이르라 하셨습니다."
"그래?"
오닌은 어릴 적부터 이리스 황녀의 시종인데, 꼭 그 아이가 한 달에 한 번씩은 몸이 아플 정도로 병약한 신체를 지녔다.
이리스 황녀도 몸이 약한 처지이기 때문인지 오닌에게는 애틋한 감정이 들어 평소에 아주 잘해 주는 시종이었다.
'뭐, 빠질 때도 되었지…….'
그간 한 달 동안 아프지도 않았으니 슬슬 아플 때가 됐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오닌이 빠지는 날에는 항상 다른 시종이 들어왔는데, 그 시종들이 매번 바뀌니 기억할 새도 없었다.
"그러하옵니다, 황녀님."
"알았어. 라오스라고 했지? 딱히 내 방에서 할 일은 없어. 시녀들이 방을 치우니 라오스는 내가 가끔 시키는 심부름만 하면 돼."
"알았사옵니다, 황녀님."
"말을 잘 알아들으니 좋구나."
황녀가 살짝 미소를 띠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러다 한 입 두 입씩 계속 마셨다. 어느새 찻잔을 모두 비워 버리자 라오스에게 명했다.
"시녀에게 시켜 차를 더 들라 일러라. 오늘은 차 맛이 아주 좋구나."
"예, 황녀님."
라오스가 잰걸음으로 사라지고 난 뒤, 이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녀님, 저 로엔그람 후작입니다. 잠시 들어가도 되는지요?"
"벌써 치료 시간이 된 건가요?"
"그렇습니다, 황녀님."
"에휴∼ 알았어요."
황녀는 그렇게 치료를 반기는 눈치가 아니었다.
하긴, 2년 넘게 치료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효과가 없으니 황제의 마음은 이해해도 딱히 받을 필요를 못 느끼는 것이다.
딸칵.
이안이 안으로 들어왔다.
"황녀님, 제가 말씀드린 호흡법은 꾸준히 하시는지요?"
호흡법에 대해서는 황녀가 아주 만족하는 모습이었다.
"그래요. 아주 대단한 것 같아요. 그 호흡법을 운용하면 그 누구라 해도 최강의 기사로 탈바꿈시켜 줄 수 있을 것 같아요!"
물론 이곳에서의 청명심법은 아주 위험한 호흡법이었다.
마나의 기척까지 지워 주니 반박귀진의 경지가 아니라고 해도 쉽게 알아차릴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안은 고작 반만 가르쳐 준 것뿐이었다.
어디까지나 무공의 진보가 아닌 치료의 목적으로 말이다.
지금은 황제의 말에 따르는 것이 좋았다.
"그렇다 해도 고작 반쪽짜리 호흡법이니 오래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황녀님께서는 현재 딱 2시간에서 3시간 사이가 제일 좋습니다."
"나도 알아요. 너무 많이 하면 탈 난다는 걸 말이에요."
"3시간 넘게 운용해 보셨나 보군요."
"네. 3시간이 넘으니 별 효과가 없더군요."
몸이 약하니 마나가 들어오는 것을 막아 버린다. 무엇보다 칠음절맥이기 때문에 말이다.
똑똑.
그때, 방밖에서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황녀님, 저 라오스입니다. 명령하신 대로 차를 가져왔습니다."
"그래, 들어오너라."
달칵.
미소년 라오스가 들어와 찻잔을 이안과 황녀에게 내려놓았다.
이안은 라오스에게 흥미가 생겨 물었다.
"내가 이곳에 있는지 어찌 알고 찻잔을 두 개 가지고 온 것이냐?"
"이 시간대가 되면 항상 치료를 하러 오신다는 것을 시녀들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구나."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손님이 있는 자리에 감히 시종이 낄 수는 없으니 재주껏 눈치를 부려 바깥으로 나간 라오스.
그가 나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이리스 황녀는 찻잔을 들어 올리며 한 입 감아 올렸다.
머리가 맑아지는 듯한 향이 코를 자극했다.
"아주 괜찮아요, 차 맛이. 후작도 드세요."
"아, 감사합니다. 향이 무척이나 깊군요."
"허브가 유명한 곳에서 재배를 했기 때문이죠. 바로 그곳에서 가져온 것이에요."
"그렇군요."
이안은 차를 한 잔 들이켰다. 차가 상당히 뜨거웠지만 이미 내공으로 보호되고 있는 신체였기 때문에 아무 상관없었다.
'응?'
이안이 차를 들이켜고 난 바로 그 순간, 갑자기 몸에서 이상한 기운이 등장했다가 곧바로 사라졌다.
내공이 한순간에 태워 버린 것이다.
'뭐지? 착각인가?'
이안이 다시 확인하기 위해 찻잔을 들어 올리려는 순간 이리스 황녀가 입을 열었다.
"차는 됐으니 빨리 치료를 하도록 해요, 후작."
"아, 알았습니다, 황녀님."
이안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후에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른 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