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인하르트-41화 (41/60)

■ 제41장 펠타온 제국의 망신 □

"크으윽!"

리치의 입에서 긴 신음 소리가 튀어나왔다.

라이프베슬을 두고 온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놈의 검환에 맞는 즉시 리치 또한 곧바로 헬 파이어를 소환하여 놈에게 맞대응을 했다.

하지만 급하게 만든 감이 있는 헬 파이어는 엄청난 냉기를 풍기는 검환과 부딪치자 즉시 상쇄되었다. 그리고 그 마나의 집합체들끼리 부딪치자 엄청난 충격을 입으며 그대로 허공에서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가까이에 있던 리치나 이안이나 강한 충격을 받았을 테지만, 리치는 이안이 상처를 하나도 입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정말이지 놀라운 일이었다.

공간이동 마법도 아니건만 공간이동을 한다.

그것도 순식간에 말이다.

캐스팅도 주문도 필요 없는 공간이동!

놈은 그것을 사용할 수 있었다.

"본국은 그놈을 너무도 모르고 있다. 놈은 다르다. 지금까지 상대했던 놈들과는 질적으로 달라……."

* * *

슈팟―!

섬전 같은 속도로 휘둘러진 오러 블레이드는 키메라의 어깻죽지를 날려 버렸다. 그나마 하나 있던 팔도 잘려 나가자 키메라는 두 팔이 사라진 괴물에 불과했다.

이안은 지면에 다리를 내려놓으며 놀랍다는 듯 키메라를 바라보았다.

차원의 검술을 사용했으니 충분히 놈의 머리를 쪼갤 수 있을 거라 생각했건만…….

역시 생전의 소드 마스터였던 놈이었던 만큼 키메라가 되면서 반사 신경이 더욱 좋아진 것이다.

"크르르르!"

이안은 날아간 키메라의 팔을 지그시 발로 밟아 버리며, 오러 블레이드로 몇 갈래로 갈라 버렸다.

"크르르!"

그러자 키메라는 마치 자신이 고통을 받는 것처럼 흉폭성을 이안에게 드러냈다.

이안이 내공을 전신에 휘감으며 모든 내공의 힘을 개방하자 소드 마스터 최상급의 기운이 쏟아져 나왔다.

준 그랜드 마스터.

이안은 지금 그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키메라는 이안의 기운을 받아 내자, 엄청난 공포에 휩싸였다. 다리가 조금씩 떨려 왔다.

그제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눈앞에 있는 인간 놈은 자신의 상대가 아니었다.

필패.

이길 수 없었다.

인간 놈은 강했다.

팟!

키메라는 등을 뒤로 돌리며 무작정 숲속으로 내달렸다.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여 현명한 선택을 해 온 것이다.

다리에 힘을 주며 그대로 내달리자 엄청난 속도로 쏘아져 나갔다.

순식간에 시야에서 멀어진다고 생각했을 때, 이안의 신형도 푹 꺼졌다.

"크릉?"

의문을 알 수 없다는 듯한 키메라 목소리만 잠시 후 숲속에서 들려왔다.

파앗―!

그리고 허공으로 높이 솟아오르는 키메라의 머리.

쿵!

머리를 잃은 키메라의 몸은 앞으로 세 발자국을 더 걸어가더니 그대로 쓰러졌다.

'어, 어떻게!'

로이니스는 이안을 바라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눈으로 좇을 수가 없었다. 분명 마법을 사용한 듯한 기분이었다.

그렇다. 공간이동.

공간이동을 사용한 것이 확실했다.

이안은 숲에서 조용히 걸어 나왔다.

뚜벅뚜벅.

그의 발걸음 소리에 모든 새들도 소리를 멈추었다. 마치 이 공간에 그만 존재하는 듯했다.

이안은 로이니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괜찮아요, 로이니스?"

어느새 공간을 지배하던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피 묻은 검을 그저 검집으로 밀어 넣는 모습뿐이었다.

"으응, 괜찮아. 정말 괜찮아……."

그녀는 눈물 가득한 눈망울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안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돌아가요, 로이니스."

* * *

"프라스 제국 측에서 드디어 야욕을 드러낸 듯합니다. 이번 사건도 프라스 제국과 많이 관련돼 있음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안이 심각한 어조로 말하자 그리텔은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부터 펠타온 제국에 그만한 타격을 줄 만한 흑마법사를 파견할 곳은 현재 대륙에서 프라스 제국 말고는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증거는 있소?"

"없습니다. 다만, 흑마법사가 자신의 입으로 말하는 것을 들었으니 확실합니다."

"흑마법사와 키메라는 어떻게 되었소?"

"키메라는 다행히도 죽일 수 있었지만, 흑마법사는 라이프베슬 때문에 깰 수가 없었습니다."

"놀랍군. 대륙에 알려지지 않은 7서클 마법사가 이리도 많을 줄이야……."

고위급 흑마법사들의 키메라와 능력들에 그리텔이 혀를 내둘렀다.

그리텔은 잠시 턱을 괴더니 이안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건 그렇고, 이제 어찌할 생각이오?"

"무엇을 말입니까?"

"키메라와 흑마법사의 공격을 받았소. 상당한 타격을 입었을 터. 펠타온 제국까지 꽤 먼데 이대로 괜찮을 것 같소?"

그리텔 덕분에 사절단이 박살 나는 것은 면할 수 있었지만, 이안은 이 일에 대해서 왕에게 추궁당할 것이 분명했다. 뿐만 아니라 이번 일로 이안의 신용도는 상당히 떨어졌다고 볼 수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로이니스를 구해 온 일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듯해 보였다.

"일단 그란시에 가서 국왕 전하에게 호위기사를 더 붙여 달라 할까 합니다. 조금 사절단이 늦는 것은 감수해야겠지요. 전 호위기사들이 도착하기 전 일단 그 흑마법사들의 흔적을 찾는 것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

그리텔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렇소. 이번 일은 상당히 중대한 일이오. 펠타온 제국으로 향하는 사절단을 공격했다는 것으로 이미 전쟁은 시작됐다고 봐도 좋소. 난 이대로 폐하께 찾아가 호위 병사들을 지원하겠소."

"아니,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어차피 본국으로 향하는 도중 일어난 일이오. 그 정도 일이라면 얼마든지 감수할 수밖에 없지 않겠소?"

"그렇다면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안은 거절하지 않았다.

그란시에 도착한 이후로 이안은 살아남은 은의 기사단을 추슬렀다. 귀족들의 죽음도 원통하기 그지없었지만, 은의 기사단의 전멸에 가까운 타격 또한 신음을 삼킬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기사단 내에서 평생 검을 들 수 없는 자 10명은 일단 다시 왕궁으로 돌려보내었다. 며칠 이내에 회복할 수 있는 경상을 입은 자들은 펠타온 제국에서 호위기사들이 도착할 때까지 충분한 휴식을 가졌다.

그리고 이틀 후, 펠타온 제국에서 달려온 기사들은 3황자의 전속기사단인 '그랜드 나이트'들이었다.

펠타온 제국은 기사들의 나라인 곳이다. 3황자를 지킬 정도라면 기사단 전원이 익스퍼트 상급을 넘어선 초극강 고수들이었다.

'과연, 제국이라 이건가!'

은의 기사단들은 은연중에 자신들이 꿀린다는 것을 알았는지 신음을 삼켜야 했고, 이안은 제국의 힘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슈레이더 왕국만 해도 익스퍼트로 이루어진 기사단은 보통 백작이나 후작가 이상이 아니면 찾아보기도 힘들었다. 그것도 상급 정도의 실력이라면 어느 기사단에 가더라도 단장이나 부단장을 할 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한데 그랜드 나이트들을 보니 단장만 해도 마스터 급인 초절정 고수였던 것이다.

"반갑소. 그랜드 나이트들의 단장직을 맡고 있는 마르도 백작이라 하오."

제국의 백작은 왕국의 후작과 버금가는 위치를 지니고 있다. 이안은 솥뚜껑만 한 손을 내밀며 악수를 건네 오는 마르도를 보며 자신도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슈레이더 왕국의 사절단을 책임지고 있는 로엔그람 후작이라 합니다."

"오는 도중 공격을 여러 차례 받았을 거라 했소. 증거물이나 범인은 찾았소?"

"증거물은 있으나 범인은 놓쳤습니다."

이안이 그러면서 턱짓을 하자, 뒤에 에반이 낑낑거리며 한 구의 시체를 내밀었다. 그것은 바로 키메라의 시체였다.

그리텔의 썬더 볼트에도 전신이 멀쩡한 시체였던 것이다.

"과연, 본국을 공격했던 키메라들과 거의 비슷한 종이로군. 호오! 이놈을 보니 실력이 거의 마스터 급에 이르렀는데, 그리텔 님께서 잡은 것이오?"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을 표했다.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은의 기사단이 활동해서 잡은 것이라고는 고작 익스퍼트 급에 해당되는 키메라 몇 마리뿐이었다.

"그렇습니다."

"이 증거물은 본국에 가져가겠소. 그리고 우리가 도착하기 전 조사를 해 왔다고 하던데, 발견한 것은 있소?"

궁금해 하는 눈치였다.

이안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란시는 펠타온 제국과 슈레이더 왕국을 연결해 주는 큰 도시이기 때문에 발달한 도시이기는 하지만 흑마법사들의 흔적을 쫓기에는 정보 길드 크기가 아주 작았다.

"그리고 하나 더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소. 로이니스 님께서 키메라에게 납치를 당했다는 소식이 있었소. 정말이오? 로이니스 님은 3황자님의 부인이 될 분이오. 그분의 몸에 상처라도 났다가는 우리도 어떻게 할 줄 모르니 조심하는 게 좋을 거요."

이안은 가볍게 인상을 찌푸렸다.

아직 로이니스가 3황자의 부인이 된다는 것도 확정된 게 아니건만, 앞서 나가서 생각하는 그들의 생각에 쉽게 동조할 수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는 이번 결혼에 거절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니, 부인이라고 하기에는 힘들었다.

"우린 펠타온 제국의 손님격인 사절단입니다. 고작 3황자의 기사단 따위가 사절단을 이래라저래라 할 순 없습니다. 만약 이 문제에 대해 생각이 있으시다면 귀족회의에 안건을 내밀어 주십시오."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이안의 대답에 마르도 백작의 인상이 순식간에 구겨졌다.

"뭐, 뭣이오? 이, 익! 다시 말해 보시오!"

그는 마나를 전신에 휘감으며 이안을 갑자기 압박하는 살기를 내뻗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안은 그 기운을 웃음으로 쉽게 깨 버렸다.

"이 문제는 귀족회의에 안건을 내밀어 달라 했습니다. 저희야말로 고작 기사단 따위가 저희에게 이러한 압박을 가할 시 용서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겠습니다. 제가 왜 이 사절단에 책임자가 되었는지 아십니까?"

마르도 백작은 그러고 보니 대륙에서도 제법 유명한 일화를 들은 적이 있었다.

'슈레이더 왕국에 혜성처럼 나타나 단숨에 소드 마스터로 이름을 날려 반란군을 진압과 동시에 왕을 홀로 구했음. 그리고 라인하르트 제국의 황태자였던 것으로 추정.'

짤막하게 부관에게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지 않은가.

그때 당시만 해도 얼마나 놀랐던지 입이 벌어져서 다물어지지 않았을 정도였다.

'슈레이더 왕국의 최고의 기사! 마스터 초급 이상으로 판단 중.'

마르도 백작은 이안의 말에 한 치의 거짓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흥! 맘대로 하시오."

마르도 백작은 등을 홱 돌려 사라졌다.

이안은 그들이 사라지고 나자 살짝 한숨을 쉬었다.

여러모로 이곳에서도 안 보이는 전쟁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던 것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 * *

"슈레이더 왕국의 사절단 로엔그람 후작님의 신분을 확인했습니다. 펠타온 제국에 입국하신 것을 진정으로 환영합니다."

"고맙소."

미리 사절단이 오기만을 기다리던 병사들이 성문을 활짝 열어 주었다.

은의 기사단이 전체적으로 사절단을 포위한 듯 에워싸며 들어갔고, 유일하게 그랜드 나이트들의 호위를 받은 로이니스의 마차가 마지막으로 들어갔다.

그랜드 나이트들이 도착한 이후로 경계가 많이 풀린 탓인지 귀족들의 얼굴은 안심하는 표정이었다.

확실히 펠타온 제국은 기사의 나라.

그 강력함에 있어 슈레이더 왕국은 절대로 따라갈 수 없는 제국인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 호위를 받으니 귀족들의 표정은 살맛이 난다는 것을 훤히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은의 기사단들도 바짝 경계를 하다가 지금에 와서는 어느 정도 풀린 기색을 보여 주었다.

이안은 그랜드 나이트들을 못마땅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텔에게 고마움을 느끼기는 매한가지였지만, 특정 인물만 호위하는 것은 사절단에 있어서 그리 좋은 모습이 아니었다.

특히 사절단은 왕국의 위상과 위엄을 보여 주는 얼굴이다.

절대로 그랜드 나이트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었던 것이다.

이안은 그랜드 나이트의 단장 마르도 백작의 앞에서 한마디 할 수밖에 없었다.

"우린 정식으로 펠타온 제국에 지원 병력을 요청했습니다. 로이니스 님은 제가 호위할 테니, 그랜드 나이트들께서는 사절단을 호위해 주십시오."

일단 숙이고 들어가는 자세다. 일국의 후작이 그리 말하면 어느 정도 알아듣는 맛이 있어야 하건만 그랜드 나이트들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해를 가하면 국제 문제로 불거진다는 것을 잘 알았기에 오히려 이안에게 큰소리를 쳤다.

"로이니스 님을 그때와 같이 위험에 두게 만들 생각인가 보오, 후작님? 저희는 정식으로 지원 요청받은 기사들이긴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로이니스 님의 안전만을 요청받았소."

이안이 말을 한 기사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랜드 나이트의 부단장 리카르소 자작이다. 그 또한 마스터에 오른 지 약 1년밖에 되지 않은 인물이지만, 과거 용병이었던 경험으로 오래된 마스터들과의 싸움에서도 크게 밀리지 않았다.

과거 용병이었던 이답게 입이 꽤 험악하고 더럽다.

이안은 그랜드 나이트들을 둘러보더니 이마를 탁 치며 탄성을 내뱉었다.

"아! 그렇군요? 로이니스 님만 호위하면 되시는군요. 그렇다면 사절단의 책임자로서 로이니스 님을 왕국으로 다시 돌려보내야겠습니다. 그렇다면 왕국 안까지 호위하는 편이 어떠신지요?"

리카르소 자작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제국의 힘을 믿고 젊은 이안에게 등에 매달린 거대한 할버드를 꺼내 들고 자세를 취했다.

"뭣이오?! 로이니스 님은 3황자님의 초청을 받은 분이나 다름없는 제국의 귀중한 손님이올시다."

이안도 지지 않고 맞섰다.

"저희 슈레이더 왕국 사절단 또한 국왕 전하의 뜻과 명을 충실하게 대답해 드리고자 폐하를 알현하러 먼 길을 가는 것입니다. 어차피 저희 왕국 또한 펠타온 제국을 지지하지 않는다면 그리 즐겁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만?"

"이익! 다시 한 번 말씀해 보시오, 후작!"

그는 역정을 내며 이안에게 달려들었다.

아무리 제국이라 하지만 고작 자작의 힘으로는 왕국의 후작과 비슷한 힘을 가지기는 힘들었다.

그나마 마르도 백작만이 이안과 어깨를 견줄 만한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안은 마르도 백작을 힐끔 쳐다봤다.

그도 말릴 생각은 없었던 듯했다.

그랜드 나이트들 또한 이 상황이 재미있다는 듯, 리카르소 자작의 할버드가 섬전 같은 속도로 뻗어 나와 로엔그람 후작의 목을 날려 버리기만을 고대하는 듯해 보였다.

'제국은 썩었다!'

힘만을 믿고 날뛰는 개새끼들에 불과했다.

펠타온 제국과의 군사적 협약과 더불어 동맹을 너무 쉽게 생각한 듯했다.

이안은 그 과정에서 찰트를 데리고 오지 않은 점을 새삼스럽게 아쉬워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럴 경우 확실한 대답을 해 줄 터인데 말이다.

이안은 가볍게 주먹을 말아 쥐었다.

검을 빼 들 필요도 없었다.

스르륵!

리카르소 자작의 등 뒤에서 무시무시한 기세를 담은 할버드가 뻗어 나왔다. 그리고 곧바로 마나를 담은 할버드는 오러 블레이드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2미터 가까이 되는 할버드가 오러 블레이드까지 뿜어져 나오자 2미터 30센티를 넘어서며 이안의 목을 향해 푸른 궤적을 그리며 휘둘러졌다.

그 순간, 이안의 손에서 수강이 만들어졌다.

푸른색의 수강을 바라본 리카르소 백작의 얼굴에 갑자기 미소가 번졌다.

이 젊은 사절단의 책임자가 마스터라는 것에 확신이 들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도 스무 살의 나이에는 익스퍼트 중급에 이르는 것이 고작이었으니까.

하지만 수강을 바라보자 확신이 들었다.

'피스트 마스터!'

주먹을 단련한 자들.

제국에서 또한 보기 힘든 것이 주먹을 단련한 이들이었다.

이안은 할버드를 향해 하얀 손을 그대로 내밀었다.

'위험해!'

그 누구도 이런 생각이 들 것이었다. 하지만 이안의 손은 이미 수강과 더불어 반탄강기와 호신강기를 몇 겹이나 둘둘 싸맨 상태였다.

오러 블레이드가 아무리 강력하다 해도 초급 상태에게는 뚫릴 리가 없었다.

쾅!

할버드의 오러 블레이드가 그대로 튕겨 나갔다.

"아니!"

"헉!"

그랜드 나이트들의 입에서 일제히 경악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안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이번엔 오른손을 앞으로 부드럽게 내밀었다.

주먹은 바람을 싣고 느긋하게 나아가더니, 어느 순간 갑자기 주먹이 사라진 듯한 환상이 들었다.

퍽!

그리고 잠시 후, 리카르소 자작의 갑옷이 일그러졌다.

"컥!"

강한 충격이 와 닿았다.

리카르소 자작은 피를 왈칵 토해 내며 뒤로 5미터는 날아갔다.

털썩!

리카르소 자작은 날아가고 나서 도통 일어날 기미가 없었다.

마르도 백작은 거의 경악하는 표정으로 다급히 리카르소 자작에게 다가갔으나 그는 이미 기절한 후였다.

단 일 권.

주먹이 어떻게 휘둘러지는지도 못 봤고, 마스터 급인 리카르소 자작을 일 권에 박살 낸다는 권법도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리카르소 자작은 경험마저 풍부한 이가 아닌가?

고작 젊은 놈의 주먹 한 방에 나가떨어질 리가 없었다.

하나 지금 이 눈앞에 일어난 일은 현실이었고, 사실이었다.

리카르소 자작.

그는 고작 단 한 방에 무너진 패배자였다.

이안은 수강을 걷어 내며 손을 탁탁 털었다.

그가 사용한 권법은 천풍무형신권(天風無形神拳)으로, 청성파의 권법 중 하나였다.

그리고 이안이 지금 사용한 것은 일초식인 천풍강권(天風强拳).

그저 힘만을 중심으로 두는 초식인데, 리카르소 자작이 단 한 방에 죽지 않았다는 것은 이안이 손속에 사정을 두어 내가중수법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르도 백작은 이안을 힐끔 쳐다보더니 어금니를 우득 소리가 나도록 깨물었다.

제국의 정보가 잘못되었다.

마스터 초급 정도가 아니었다.

마스터 초급이라면 중급에 이른 자신이 고작 주먹 하나 못 볼 리가 없었다.

'강하다! 나와 비슷한 정도, 혹은 그 위다!'

그랜드 나이트들은 부단장이 한 번 처참하게 깨지자 분위기가 요상하게 돌아갔다. 이안이 처음 말했듯이 사절단을 중심으로 호위하기를 마음먹은 듯 보였다.

마르도 백작은 거기에서 다시 한 번 경악했다.

지옥을 왔다 갔다 할 정도로 심한 훈련을 견뎌 온 그랜드 나이트들이 고작 단 한 명의 젊은 남자에게 위축되어 겁을 먹다니!

있을 수도 없는 일이고, 앞으로 있어서도 안 될 치욕스런 모습이었다.

하지만 마르도 백작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리카르소 자작.

먼저 일을 시작한 것은 바로 그였으니까.

그저 그가 일어나기만을 기다려야 할 뿐이었다.

"어서 부단장을 데려가라. 신속히 치료해야 할 것이다."

"예, 단장님!"

기사들이 신속히 리카르소 자작을 데려갔다.

이안은 등을 돌렸다.

"크으으……."

리카르소 자작은 눈을 뜨자마자 가슴에서 느껴지는 충격에 손으로 그 부위를 붙잡아야 했다.

옷을 살짝 들어 올리자 시퍼런 피멍이 들어, 요 며칠 사이에 없어질 것 같지는 않았다.

"괜찮소?"

단장 마르도 백작이 물어 오자, 리카르소 자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어찌 된 일이오? 경험 많은 부단장이 고작 일 권에 무너졌다는 소리가 돌면 제국 측에 많은 명예훼손이 일어날 거요. 뿐만 아니라, 사절단을 공격했다는 사실이 돌면 우리에게도 좋은 영향을 끼치지 못할 뿐만 아니라 3황자님의 위상이 떨어질 수도 있는 일이오."

그렇게 큰 문제로 붉어질 수 있는 것을 생각지 못한 리카르소 자작이 고개를 푹 숙였다.

"미안하오, 단장. 허나 어쩔 수가 없었소. 그가 하는 얘기를 듣다 보니 화를 참을 수가 없어서……. 이젠 어찌해야 합니까?"

리카르소 자작이 다시 고개를 올리며 물어 오자, 마르도 백작은 한숨을 쉬었다.

"일단 이 일이 퍼지지 않게 잘 해결해야 할 듯싶소. 그리고 요 며칠간 그의 요구 조건을 다 들어줘야 할 듯도 싶고. 그래도 말리지 못한 내 잘못도 있으니……."

"정말 미안할 따름이오. 뿐만 아니라 3황자님에게도 더없는 죄를 지었소이다. 허나 놈이 그리 강할 줄은 상상도 못했소. 처음에는 그저 몇 번만 부딪치고 놈의 콧대를 꺾으려고 했으나 그의 주먹은 내 눈으로도 볼 수 없었던 것이 사실이오. 어쩌면……."

리카르소 자작이 말을 다 잇지 못하고 끌었다.

"어쩌면?"

"디그라실 공작님과 비슷한 실력일지도 모르오."

마르도 백작은 믿을 수 없었다.

그가 평생 존경하고 존경하는 자가 있다면 바로 3황자이지만, 기사로서 존경하는 자는 디그라실 공작 그 한 명뿐이었다.

대륙십강의 일원이며, 킹 제레브를 제외하면 그 누구보다도 강한 자라 일컬어지는 사람.

그런 자와 비슷한 실력이라니.

마르도 백작은 떨리는 기색으로 물었다.

"호, 혹시 디그라실 공작님과 실력을 겨루어 본 적이 있소?"

리카르소 자작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어, 어떻게 되었소?"

"내 인생에 있어 단 한 수에 당한 것은 지금이 두 번째요. 첫 번째는 바로 디그라실 공작님의 검집에 당했소. 그 당시 공작님이 말씀하시길 전력을 다한다면 마스터 초급은 일 수에 이길 수 있다 하였소."

마르도 백작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 그럼?"

"그렇소. 로엔그람 후작은 어쩌면 마스터 상급 이상일지도 모르오. 이 문제는 폐하께 아뢰어 올리는 게 좋을 것 같소."

"오늘밤으로 전령을 보내리다. 꼭 그렇게 해야겠소이다."

조용한 밤. 그 둘의 대화는 그렇게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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