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39장 7서클 마법사 등장 □
이안은 그 로브의 의문인을 보다 잠시 헛바람을 들이켰다.
만약 나뭇가지가 정확하게 들이박혔다면 로브의 의문인은 분명 차원의 공간에 끼여 죽음을 맞이했을 터였다.
로브의 의문인은 흑마법사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마법사들의 배척을 받는 네크로맨서들도 더더욱 아니었다.
로브의 의문인이 주위를 스윽 둘러보더니 멍하게 입을 벌리고 있는 이안을 보며 이빨을 갈았다.
"으득! 네놈이냐? 공간이동 하는 데 방해를 한 것이?"
이안은 어떻게 할 줄 몰랐다.
분명 방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자신은 지금 마법사 한 명을 죽일 뻔한 일을 벌였다.
최소한 자신이 왕국의 귀족이라면 이 일에 대하여 사과를 해야 한다. 그리고 숙영지로 블링크를 사용한 이유를 물어야 했다.
이안은 헛기침을 내뱉으며 말했다.
"미안합니다. 그만, 저희 숙영지로 블링크를 사용하는 것이 이 근처에서 유명한 괴물들을 양성하는 흉악한 흑마법사나 네크로맨서가 아닐까 하고 생각해서……."
로브의 의문인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흑마법사? 네크로맨서?"
갑자기 그가 반색을 했다.
"그렇습니다. 저는 슈레이더 왕국의 국왕 전하의 명을 받고 펠타온 제국으로 파견된 사절단을 책임지고 있는 로엔그람 후작이라 합니다. 헌데 얼마 전부터 이 네이티스 산맥에 흉흉한 병이 돌고 괴물들이 출현했다는 소식에 민감해져 있던 터이니 너그럽게 용서해 주십시오."
로브의 의문인은 이안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젊은 얼굴.
그리고 호리호리한 체격.
정형적인 학자의 제자쯤으로 보였다.
"후작? 정말 당신이 후작이오?"
후작이라는 말에 그의 말도 조금은 공손해졌다. 이안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로브의 의문인이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빌어먹을, 아버지가 후작이었나 보군. 30년 만에 세상에 나와 돈 좀 벌려 했더니, 뭔 이런 개 같은 일이…….'
로브의 의문인은 이안이 아버지의 후광으로 곧바로 후작을 이어받은 것쯤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이안은 그를 보며 물었다.
"헌데 당신은 누구이신데 저희 숙영지 쪽으로 공간이동을 하시는지요?"
"험험! 뭐, 이름 따위야 안 쓴 지 오래지만, 예전에는 사람들이 날 그리텔이라 하였소. 나 또한 흑마법사를 찾으러 왔소. 펠타온 제국 측에서 그놈에게 막대한 현상금을 걸었지. 얼마 전에 제국에서 도망간 놈이 슈레이더 왕국의 네이티스 산맥에 숨어들었다는 사실에 돈 좀 만지기 위해서 찾으러 온 것뿐이오."
그리텔은 약 40년 전에 활동하던 마법사였다. 하지만 30년 전쯤에 은거해 들어갔다가 다시 이번에 세상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왕국에 들른 지 얼마 안 됐다 한들 이안을 모를 리 없다. 슈레이더 왕국뿐만 아니라 주변 왕국에서도 이안을 은근히 신경 쓰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 이름은 이번에 사절단의 책임자까지 되면서 사람들의 구설수에 오르기에 충분하였다.
하지만 그리텔은 이안을 몰랐다.
공간이동으로 흑마법사를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가 은거를 그만두고 세상으로 나온 지 이제 갓 일주일밖에 안 됐다. 이안을 모를 만도 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이 산맥 근처에서 괴물을 봤다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들었는데…… 정확히 어딘지는 아시오?"
혹시나 해서 묻는 그리텔.
이안은 고개를 내저었다.
"죄송합니다만, 저희도 아직 자세한 것은 모릅니다. 만약 알았다면 저희가 처단을 했을 테지요."
"허어……! 처단이라니. 그 흑마법사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 줄 아시오? 펠타온 제국에서 소드 마스터 2명을 살해하고 도주한 아주 극악무도한 놈이오. 최소 그를 죽이려면 소드 마스터의 중급 정도는 돼야 한단 말이오. 그놈은 나에게 맡기고 얼른 이 산맥을 빠져나가도록 하시오. 혹시라도 산맥을 빠져나가는 도중 그놈을 만나거든 큰 소리로 고함을 지르시오. 어떻게 해서든 그쪽으로 가겠소. 물론 지금처럼 공간이동을 방해만 안 한다……."
갑자기 그리텔이 말을 끊었다.
그리고 이안을 위아래로 훑었다.
생각해 보니 블링크 마법을, 즉 공간이동 마법을 방해한 정도의 인물이 자신의 눈앞에 있었다. 그렇다는 건 적어도 자신의 기운을 느낄 정도의 기사나 마법사라는 증거였다.
그리텔은 7서클 마법사다.
그의 기운을 느끼려면 최소 소드 마스터, 혹은 6서클 마법사의 경지는 돼야 한다.
"……."
하지만 눈앞의 이안은 허송세월 주색잡기에나 빠져 있을 법한 외모의 소유자다. 나이는 아무리 많이 쳐주어도 20대 중반.
모(母)의 배 속에서부터 검을 휘두른다 해도 절대 그 나이에는 한 경지에 대해 '마스터'라는 이름이 붙을 리가 없다.
20대 중반의 마스터라니!
이런 일은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펠타온 제국도 아닌 이런 조그마한 왕국에서 그런 마스터가 나왔다는 것은 대륙에서도 크게 긴장할 만한 일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이안이 조심스럽게 묻자 그리텔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다. 저자는 우연이다. 우연히 그런 것일 뿐이다.
"흐흠! 아니오. 생각해 보니 펠타온 제국으로 간다면 우리 제국의 손님이로군. 펠타온 제국의 마법사로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내가 네이티스 산맥에서 벗어날 때까지만이라도 호위를 해 주겠소. 그저 눈을 붙일 만한 잠자리와 배가 고프지 않을 만큼의 식량만 주시오."
이안은 크게 반색했다.
한눈에 보아도 고절한 마법사가 알아서 호위를 해 준다는데, 나쁠 일이 없다.
"알았습니다. 헌데 그리텔 님께서는 펠타온 제국의 어떤 귀족이십니까? 제가 소견이 짧아 그리텔 님을 잘 몰라서……."
그리텔은 40년 전에 활동한 대마법사, 그 당시만 해도 펠타온 제국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던 6서클 마법사였다. 하나 큰 깨달음을 위해 그가 30년 전 은거해 들어가 일주일 전에야 세상 바깥으로 나올 수 있었다.
이미 그의 이름은 그 누구도 기억하지 못할 만큼 잊혀져 버린 지 오래였다.
"귀족은 아니오."
이안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 중에서 귀족이 아닌 자는 상당히 많았다. 하지만 마법사 자체가 워낙 존귀한 존재이기 때문에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다.
"일단 휴식을 취하도록 하겠소."
이안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정말 죄송합니다. 결코, 그리텔 님을 해하기 위해서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걱정 마시오. 이 정도의 내상이라면 한두 번의 치료 마법으로 해결될 일이오."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 * *
한 달 전쯤, 펠타온 제국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바로 디그라실 공작의 기사단원 열 명이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기사단장이나 공작은 그들을 찾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백방을 수소문했으나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20일이 흐르고 난 뒤 소드 마스터 두 명, 즉 기사단의 부단장들이 암살을 당한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공작은 자신의 심혈을 기울여 키운 기사들이 죽고 나자 범인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수사망에 걸려든 한 흑마법사.
그가 작은 마을에서 주민들을 살해하며 사기를 보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사라졌던 기사 10명을 키메라로 부리며 주민들을 살해했다. 뿐만 아니라 소드 마스터들을 죽이며 얻은 마나로 그 키메라들의 힘을 강화시키니, 어느덧 그들은 소드 마스터에 준하는 실력을 지니게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키메라가 강해도 대륙십강의 최고 수준을 달리는 디그라실 공작을 이길 수는 없었다. 그가 홀로 무참히 키메라들을 베어 버리고 마법사를 처단하려는 찰나, 마법사는 공간이동 마법으로 제국에서 벗어났다.
그 과정에서 바로 네이티스 산맥으로 도망을 간 것이고, 공작이 내건 엄청난 현상금을 보며 그리텔 혼자서 흑마법사를 잡으러 온 것이다.
"크크크큭!"
휴몬은 6서클 마법사다.
프라스 제국에서 디그라실 공작의 힘을 줄이기 위한 일환으로 내세운 마법사였다.
마스터 두 명을 살해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궁극의 목적인 디그라실 공작을 암살하는 데에는 실패를 했다. 그는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네이티스 산맥에서 조용히 힘을 키우고 있었다.
"크하하하! 이것만 완성되면, 완성되면!"
그는 온몸을 감싸는 전율에 부르르 떨었다.
며칠 전에 갑자기 리치가 와서는 마스터 급에 준하는 키메라 20마리를 넘기고 갔다. 그 정도만 있다면 다시 디그라실 공작과 한판 붙어 볼 만했다.
"크흐흐! 디그라실 공작, 기다려라. 이놈들이 내 마기를 잔뜩 머금고 나면 널 죽이는 데는 문제가 없을 터이니. 크흐흐흐!"
키메라를 인계받는 과정에서 주인이 될 흑마법사는 강한 마기로 키메라들의 주인으로 인정받아야 한다. 휴몬은 지금 그 과정에 착수하고 있었다.
휴몬은 갑자기 인상을 찌푸렸다.
키메라 20마리를 인계받는 과정에서 조건이 하나 붙었다.
네이티스 산맥을 지나가는 사절단을 공격하여 그 사절단 안에 있는 로엔그람 후작을 암살하고, 맨 뒤의 철창에 갇힌 키메라를 일깨워 사절단을 모두 도륙하라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신의 이름으로 조건을 내달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휴몬이 그 조건을 받아들여야 했다.
하지만 그는 아무 문제도 없을 거라 생각했다.
이런 작은 나라의 평범한 사절단 따위는 마스터 급에 준하는 키메라 20마리를 상대할 능력이 되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이곳에서 힘을 키우는 동안 익스퍼트 급에 준하는 키메라만 30마리가 넘게 육성에 성공했다.
그들까지 한 번에 뿌리면 실패할 리가 없었다.
그의 광소한 표정을 보며 한쪽에선 리치가 히죽 웃었다.
휴몬은 참으로 멍청한 흑마법사다.
이미 사절단에 그리텔이 합류해 있다는 정보는 꿰차고 있는 리치였다. 그런데 로엔그람 후작을 치겠다니!
웃긴 얘기였다.
하지만 리치에게 있어 휴몬 따위는 고작 상대의 전력을 줄여 줄 소모품에 불과했다.
'크크큭! 로엔그람 후작, 이번에야말로 목숨을 건질 수 있다고 생각하긴 어려울 것이다!'
그의 검은 안광이 번뜩거렸다. 그리고…….
7서클의 힘은 조용히 불어 닥쳤다.
* * *
그리텔은 사절단에 있어서 있는 듯 없는 듯, 주위를 맴돌기만 할 뿐이었다.
말로는 사절단을 보호하겠다고 했지만, 이 정도의 사절단이 지나가면 당연히 흑마법사가 나올 거라고 생각하는 의중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밥을 먹을 때만 딱딱 나와서 먼저 먹고 사라지는 그리텔에게 귀족들이나 기사들이 많은 의심을 품었지만, 이안은 애써 그들에게 안심해도 된다는 말을 하나하나 전해야 했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난 다음 날.
그리텔은 놀랍게도 내상을 완벽하게 치료하고 나왔다.
과연 고서클 마법사다웠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제법 경계가 풀어졌다. 광역에 걸쳐서 알람 마법을 설치해 주었으니 안심하고 불침번들의 숫자는 적어지고 기사들의 휴식 시간이 많아진 것이다.
"나타나지 않을 작정인가 봅니다."
마지막 날의 밤이 끝났다.
이제 마지막 도시인 그란시에 도착하는 것도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다.
게다가 날도 밝아 햇빛이 시야를 트이게 해 주었다.
"흐음……. 사절단에는 손댈 생각이 없었나 보오. 참 다행이오. 아무 문제도 없었으니 말이오."
그는 광역에 걸쳐 둔 알람 마법을 거둬들이며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말이야 다행스럽다고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흑마법사가 나타나기만을 고대했던 것이 틀림없었다.
"저희는 이제 곧 그란시로 입성합니다. 그리텔 님은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그의 뜻은 알고 있지만 이안은 다시 묻고 싶었다.
"이틀 전 말했다시피 난 이곳에 흑마법사를 처단하러 왔소. 일단 흑마법사를 처단하는 즉시 가겠소."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쉽지만 할 수 없군요."
"나도 로엔그람 후작과 지낸 시간이 짧지만 그리 나쁘지는 않았소. 여러모로 느낄 수 없었던 일도 많았으니."
이안이 며칠 전 차원을 나뭇가지 하나로 붕괴시켜 공간이동 마법을 실패로 만들 뻔한 일을 생각해 내며 얼굴을 붉혔다.
"그 일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습니다."
그리텔은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후작이라는 자가 어찌 이리도 고개를 숙인단 말이오. 됐소. 사절단을 지키는 것이 후작의 일이니 당연한 일이 아니오? 후작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 혹은 나였다 하더라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오."
"그리 생각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어쨌든 황제 폐하께 내 이야기는 하지 마시오. 아직 은거 중으로 알고 있을 테니 말이오."
"그런 점이라면 걱정 마십시오. 일절 입을 열지 않을 생각입니다."
"고맙소. 그럼 난 여기서 이만 사라지겠소. 펠타온 제국에 가거든 꼭 좋은 성과를 얻어 내길 바랄 뿐이오."
이안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 또한 그리텔 님이 좋은 성과를 거두길 바랄 뿐입니다. 꼭 그 극악무도한 흑마법사를 잡아 처단해 주십시오."
"알았소. 그 일이거든 걱정 붙들어 매시오. 혹시 흑마법사를 발견하거든 이것으로 연락해 주시오."
그리텔이 반지 하나를 전해 주자, 이안이 그것을 받아 들었다.
"알았습니다."
"그럼 난 이만 가겠소."
그리텔은 짧게 고개를 숙이고, 잠시 후 캐스팅을 외치며 빛에 휩싸여 사라졌다.
사절단의 사람들은 그 신기한 모습에 입을 벌리기도 했으나 이안은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어차피 공간이동이라는 마법 또한 차원, 시간, 공간마저 속여 이동하는 것이다.
어느 정도 공간이동을 보아 오며 차원의 검술에 익숙해진 이안도 근거리 정도라면 충분히 이동이 가능했다.
이안은 경계가 풀리고 나자 반지를 집어넣고, 느긋한 마음으로 말 위에서 만상귀일신공으로 주변의 마나를 흡수했다. 차곡차곡 쌓인 마나들은 이제는 순환만 반복할 뿐, 더 이상 몸에 차오르지 않았다.
그렇다.
이안의 몸 안에는 마나가 더 이상 차오를 공간이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또 다른 상위의 경지를 이룩해야만 다시 그의 몸은 소우주 같은 공간이 되어 마나가 차오를 것이었다.
'그렇기 위해서는 만상귀일신공을 대성할 필요가 있다.'
11성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은지라 대성으로의 길은 까마득할 뿐이었다. 이안은 조용히 만상귀일신공을 풀어 버리며 자연 그대로의 기운을 입으로 들이마셨다.
"후아!"
원한다고 오는 경지가 아니다.
현경은 그렇게 지고한 경지였다.
그랬기에 중원 역사상 몇 명 배출하지 못한 것이었다.
이안은 조급해 하지 않았다.
무공이란 조급해 할수록 멀어지는 것이다. 이안은 예전 사부와의 말을 기억해 내며 가까워지는 그란시에 한시라도 빨리 도착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한데…….
이안은 갑자기 얼굴을 와락 구겼다.
"하필이면 이때……."
뭔가가 있다.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는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다.
그것도 고서클의 마법사가.
"칼리프 단장!"
"부르셨습니까, 후작 각하."
그는 곧바로 이안에게 달려왔다.
"사절단을 자연스레 움직이되, 무기는 언제든 뽑아 들 수 있게 경계를 해 주시오."
"왜 그러시는 겁니까, 후작 각하?"
그가 묻자 이안이 살짝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주위에 기사 서넛을 보내어 조사해 보도록 하시오. 아까부터 심상치 않은 냄새가 풍기오. 게다가 바람에 혈향이 섞여 있는 것을 보면 일방적으로 사람 수십 명이 도륙을 당한 듯싶소이다."
이안은 그렇게 답을 내 주었다.
칼리프 또한 얼굴이 굳어 버리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기사들에겐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귀족들은 특별히 더더욱 조심하라 하시오. 이 주위에 네이티스 산맥에 나타났다는 괴물들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일지니……."
"크흐흐!"
휴몬은 기분 좋은 미소를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발밑에는 처참하게 도륙당한 시체 20구가 나뒹굴었다.
바로 그란시의 경비대들이었다.
휴몬이 성으로 향하는 모든 이들을 죽이자,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경비대는 직접 알아보기 위해 바깥으로 나왔으나 기다리고 있던 50마리의 키메라들에게 도륙을 당한 것이다.
그때, 옆에서 느릿느릿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리 좋아할 건 아니올시다. 지금 이리로 기사 몇몇이 다가오고 있소. 그들까지 도륙한다면 사절단이 우리의 존재를 눈치 챌 것이오."
바로 리치였다.
리치는 생각보다 아둔한 휴몬을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급습해도 모자랄 판에 오히려 자신들의 위치를 드러내다니? 보통 미친놈이 아니었다.
지금 이 일대는 리치의 마법으로 인해 그 누구도 키메라나 마법사들의 기운을 알아채기 어렵다. 그러나 냄새 같은 것은 마법을 빠져나가기 마련이다.
그 진한 혈향을 맡은 자들이 어느새 기사 서넛을 정찰로 보낸 것이다.
"크크큭! 사절단 따위는 내 상대가 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놈들만 죽이면 다시 디그라실 공작을! 흐흐흐."
"어쨌든 어서 키메라들을 움직이시오."
휴몬은 짧게 코웃음을 쳤다.
"흥! 뭐가 무서워서 그딴 짓을 한단 말인가? 와 볼 테면 와 보라고 하거라. 이미 내 밑에는 소드 마스터 급의 키메라가 스무 마리나 있다. 뿐만 아니라 익스퍼트 급 서른 마리까지 합친다면 그 누가 천하에 있어 이들을 막을 수 있단 말인가?"
"젠장, 알아서 하시오!"
리치는 거칠게 대답해 버리고 등을 홱 돌렸다. 그 순간, 그는 기사들이 놀란 얼굴로 입을 쩌억 벌린 채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제 저들 중 하나라도 살아 돌아가거나 전부 죽는다면 이들이 발각될 위험이 크다.
즉, 무조건 발각된다는 말이었다.
'어쩔 수 없군. 멍청한 놈 때문에 계획을 먼저 실행할 수밖에.'
그는 은연중에 마기를 서서히 풀기 시작했다. 그 마기의 냄새를 맡은 키메라들이 코를 킁킁거리며 낮은 괴소음을 내기 시작한다.
"크르르르."
하지만 리치는 결코 이들의 흉폭성을 일깨우기 위해서 마기를 푼 것이 아니었다.
바로 사절단 사이에 숨어 있는 한 잠자는 야수.
그를 깨우기 위함이었다.
마기를 맡은 키메라들은 기사들을 보고서는 엄청난 속도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은 온몸이 짓이겨 나가며 있는 힘껏 괴성을 질렀다.
"크아악! 살려 줘."
"으아아악! 이 개자식들!"
이안의 얼굴은 점차 굳어졌다.
아니, 이제는 펴고 있는 곳은 없다고 봐야 했다.
그의 청각 속으로 들리는 기사들의 괴성 소리.
이곳과는 500미터나 떨어져 있는 곳이었지만 얼마나 큰지 이안은 물론 칼리프에게까지 똑똑히 들릴 정도였다.
칼리프는 이안의 반응을 살펴본 뒤 조용히 물었다.
"앞에 무언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다시 한 번 정찰대를 보낼 것입니까?"
"됐소. 오히려 간다면 희생만 클 것 같군."
은의 기사단들은 모두 소드 익스퍼트 급에 오른 출중한 인재들이며 경험자들이었다. 웬만한 고통이나 공포에도 신음 한 번 내뱉지 않는 자들이 저리도 크게 괴성을 질러 댄다면 흉폭한 무언가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설마, 이곳까지 몬스터가 내려왔을 줄이야……."
도시 근처에서는 몬스터의 모습을 보기 어렵다. 사람들이 자주 왕래를 하기 때문에 토벌이 되기 때문이다.
"몬스터가 아니오."
"그럼……?"
"며칠 전에 조사했던 괴물들이 아닐까 하오. 아무래도 저 철창에 있는 키메라와 아주 관련된……."
이안은 그러면서 철창을 바라봤다.
"……!"
이안은 그러면서 큰 충격에 빠진 듯 몸을 비틀거렸다.
키메라의 탈출을 막아 내던 훌륭한 철창은 이빨이나 손톱으로 벌어져 버렸다. 그 사이가 얼마나 컸는지 키메라가 빠져나가기에는 충분해 보였다. 고작 한 팔밖에 없는 키메라 주제에 아다만티움으로 지어진 철창을 빠져나갔다는 사실이 참으로 믿기 힘든 일이었다.
무엇보다 그 일이 벌어지는 와중에 자신이 눈치를 채지 못한 사실에 패닉에 빠졌다.
이안은 철창에서 눈을 떼고 바로 앞에 있는 마차를 바라봤다.
마차에서는 아무 느낌도 없었다. 그리고 기척도 없었다.
마차를 호위하며 로이니스를 지키라 명했던 에반의 모습은 마차의 뒤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이안은 곧바로 에반에게 달려갔다.
"에반, 이게 무슨 일이냐!"
에반이 좀처럼 깨어나지 않자 이안이 거칠게 내공을 불어넣으며 그를 강제로 일으켰다. 몸에 손상이 가지 않는 한도에서 내공을 불어넣은 것이다.
에반은 조심스럽게 눈을 뜨며 이안을 바라봤다.
"마, 마스터……."
"어떻게 된 것이냐! 또 로이니스는 어떻게 됐고? 시녀들은? 시종들은?"
"크윽! 죄, 죄송합니다, 마스터. 철창에서 나온 키메라 때문에 제대로 명을 수행할 수 없었습니다."
"그녀들은 어디로 갔지?"
"저, 저쪽……."
에반이 북쪽의 숲을 가리키며 말했다.
과연, 그쪽이 유난히 나무들이 꺾여 있었다.
"알았다. 쉬어라."
"조, 조심하십시오, 마스터. 그, 그놈은 보통이 아닙니다."
이안이 다급히 그쪽으로 달려가려는 찰나 칼리프가 그를 붙잡았다.
"후작 각하!"
급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부르는 칼리프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오?!"
"전방, 300미터 앞에서 50마리는 될 법한 기괴한 괴물들이 출현하여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습니다!"
"뭐, 뭣이오!"
이안은 점점 극에 치닫는 상황에 입술을 깨물었다.
키메라가 로이니스를 어떻게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지만, 또 다른 키메라 50마리가 이쪽으로 온다면 사절단들은 막기가 어려울 것이었다.
'어떻게, 어떻게 해야 된단 말인가!'
이안은 로이니스와 사절단 사이에서 가치를 저울질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론은 오래가지 않아 결정이 났다.
'망할!'
"칼리프, 지금 당장 병력을 구축하여 괴물들을 막으시오! 그리고 마차를 방어로 삼아 싸우는 데 주력하시오. 일단 마차보다는 귀족들과 시녀, 시종들이 우선이오."
"알았습니다, 후작 각하! 헌데 후작 각하께서는 어쩌시려는……."
"5분! 단, 5분만 시간을 벌어 주시오. 납치된 귀족의 영애가 있소."
칼리프는 여느 때와 같이 자신의 가슴을 강하게 두들겼다.
"염려 마십시오. 5분은 물론 50분도 버티겠습니다."
이안은 믿음직스러운 그의 모습에 약간이나마 위안이 되었다.
이안은 어금니를 '우득!' 소리가 날 정도로 깨물었다.
그의 신형이 앞으로 튕겨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