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38장 공간과 차원, 시간을 속여라 □
이안과 로이니스가 두 손을 맞잡고 연회장의 한가운데로 가자, 춤을 추던 귀족들이 하나 둘 옆으로 비켜 주었다. 조명은 그들을 비췄고, 음악 소리는 그들만을 위해 존재하는 듯 아주 가련하게 들려왔다.
슈레이더 왕국의 최고의 기사이며 영웅인 로엔그람 후작.
사교계에서 선망의 순위 1위인 아름다운 여인 로이니스.
특히 로이니스는 나이를 먹을수록 성숙해지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가히 절정에 다를 정도로 아름다웠다.
이안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며 귓가에 대고 살짝 말했다.
"그간…… 어떻게 지냈어요?"
그녀의 얼굴이 홍조를 띠며 붉어졌다. 하나 대답은 아주 쌀쌀맞았다.
"잘."
둘이 있게 되자 또 말을 놓아 버렸다.
이안은 그녀의 행동에 살짝 미소를 머금었다.
그녀의 귓가에 웃는 소리가 들렸나 보다.
"왜 웃는 거야?"
"아뇨, 아무것도. 단지 로이니스가 무슨 이유로 저에게 춤을 신청했는지 이유를 모를 뿐이에요."
"나도 가."
"무엇을요?"
"사절단, 나도 참가한다고."
이안은 갑자기 머리가 아파 왔다.
"안 갈 거라 생각했는데……. 왜요?"
이번 사절단은 아주 위험하다. 그런 위험한 곳까지 로이니스를 데려가고 싶은 맘은 없었다. 억지로 이별을 강요하긴 했지만, 아직까지 그녀를 보면 마음이 아팠다.
"네가 알 필욘 없잖아."
"그렇지요. 전…… 이제 알 필요가 없지요."
이안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
로이니스에게 자신이 무슨 권리로 그걸 안단 말인가.
그녀는 귀족이다.
귀족이라면 사절단에 참여할 의무가 있다.
"이번 달에 청혼이 다섯 군데서 날아왔어."
"……."
"네 곳은 우리 왕국의 별 볼일 없는 자작이나 남작 가문이었지만, 하나는 펠타온 제국의 3왕자가 보냈더라고."
"그래서 가시려는 거예요?"
"응. 거절하려고."
펠타온 제국이라면, 유라시아 2대 강국 중 하나가 아닌가.
고작 슈레이더 왕국이라는 작은 나라의 귀족보다는 펠타온 제국의 3왕자의 부인이 된다면 막강한 권력을 지닐 수 있을 것이다. 하등 아쉬울 게 없을 텐데…….
이안은 그 이유가 궁금했다.
"무엇 때문에요?"
"정말 몰라?"
그녀가 갑자기 흥분한 듯 숨을 쌕쌕거렸다. 이안은 그녀의 표정도 보지 않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기우뚱.
갑자기 그녀가 이안과 거리를 벌렸다. 이안은 갑자기 뒤로 당겨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팍!
"윽!"
이안이 갑자기 신음을 토해 내며 표정을 와락 구겼다.
그녀의 높은 굽이 이안의 발을 밟았기 때문이다.
표정을 보자, 고의로 한 듯 보였다.
그녀가 갑자기 코웃음을 쳤다.
"흥! 쌤통이다."
배시시 웃는 그녀의 표정을 보자 이안은 씁쓸하게 웃었다.
오늘따라…….
그녀의 표정이 너무도 슬퍼 보였다.
* * *
"이번 사절단은 사상 최대의 규모예요. 잘 알고 있죠, 로엔그람 후작?"
카이어스 국왕의 말에 이안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예, 잘 알고 있습니다. 신은 전하의 어명을 받아 충실히 이행하고 오겠습니다."
"따로 사절단에 얘기하진 않겠어요. 곧바로 나가는 대로 출발하세요, 후작."
"알았습니다, 전하. 그럼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이안이 꿇은 무릎을 빳빳이 세우며 곧바로 등을 돌려 나가려는데, 갑자기 국왕의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저기, 후작!"
"예? 왜 그러시는지요, 전하?"
갑자기 카이어스가 망설이는 표정을 지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주위엔 아무도 없으니 말씀하셔도 됩니다."
"……아, 그래요. 로이니스에게 잘해 줘요."
이안은 그녀를 생각하자 씁쓸한 미소부터 나왔다.
"알았습니다."
"후작만 믿어요."
이안은 자신 없는 투로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국왕은 그것만으로도 만족한 듯 웃음을 지었다.
왕궁 앞으로 나오자 이안이 탈 하얀 말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 뒤로 귀족들이 탈 마차가 수두룩하게 서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로엔그람 후작 각하! 저는 이번 사절단의 호위를 맡은 은의 기사단의 단장인 칼리프입니다."
팔뚝이 마치 여인의 허리만 했다. 그의 등 뒤에는 무지막지하게 커다란 할버드 하나가 있었다.
'힘을 위주로 가르친다는 은의 기사단이다. 왕궁을 지키는 기사단 중 하나, 단장의 실력은 익스퍼트 최상급으로 판단.'
60의 나이로 익스퍼트 최상급이 되어 단장의 직위를 맡은 칼리프다. 그는 고작 20살밖에 먹지 않은 이안에게 고개를 깍듯이 숙이며 존경하는 눈빛을 지었다.
이안은 그를 보며 한마디 안 할 수가 없었다.
"칼리프 단장을 뵙게 되어 반갑소. 그대를 지켜보니 사절단이 매우 안전한 듯해 보이는군. 단장만 믿겠네."
칼리프는 자신의 가슴을 솥뚜껑만 한 손으로 두드렸다.
탁탁!
"저만 믿으십시오, 후작 각하! 최선을 다해 보필하겠습니다."
꽤나 아픈 기색을 볼 수 있었다.
"흠흠! 이번 사절단의 행렬에 대해 보고하게."
"옛! 일단 저희는 약 2일 후 서쪽의 도시 중 하나인 '이카루스시'에 도착합니다. 현재 그 도시의 시장은 '이카루스 남작'입니다. 그리고 하루를 쉬고 다시 3일 후 '그란시'에 도착합니다. 그곳에서도 하루를 쉬고 출발하여 아무 문제가 없다면 12시에 펠타온 제국의 국경을 지나 입국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하에게는 그렇게 보고를 올렸는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죄수는 어디에 타고 있는지 아는가?"
"이쪽입니다. 따라오시지요."
이안은 칼리프의 뒤를 따르다가 맨 마지막에 있는 철창에 다다랐다. 그곳만큼은 은의 기사단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는데 어째서인지 철창 안의 키메라의 왼쪽 팔이 뜯겨져 있었다.
"궁정마법사께서 떼어 가셨답니다. 연구로 인하여……."
"혹, 궁정마법사가 따른 말은 하지 않던가?"
"이 키메라의 일이 슈레이더 왕국뿐만 아니라 다른 왕국에서도 일어나는 일이라고 합니다."
"어떤 나라인지 아는가?"
"이것이 보고서입니다."
이안이 칼리프에게 보고서를 받고서 곧바로 중요한 부분만 읽기 시작했다.
"피해 왕국 슈레이더, 그레이튼, 샤멜 공국……. 모두 공통점이 있군."
"무엇인지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바로 이번 전쟁의 여파에 있어 펠타온 제국을 지지한다는 점이 같다는 것일세."
"아! 과연……. 그러고 보니 궁정마법사께서도 그런 말씀을 하신 듯합니다."
"그랬군!"
이안은 슬며시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프라스 제국.
아주 치졸한 방법을 쓰고 있었다.
* * *
카이드 백작이 불안한 기색으로 사절단이 출발하는 것을 보았다.
"으으, 젠장! 저 찢어 죽일 놈을 어떻게 해야 된단 말이오!"
그가 노성을 터트릴 때마다 많은 살들이 부르르 떨렸다.
"후후! 진정하시오. 제레브 대공께서 해결책을 마련해 주셨으니 말이오."
그러면서 그가 후드를 벗어 젖혔는데 놀랍게도 해골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리치.
그렇다.
얼마 전에 이안에게 헬 파이어를 먹이고 곧바로 사라진 그 리치였다. 그는 이안이 살아 있다는 사실에, 그것도 거의 정상의 모습으로 돌아왔다는 것에 매우 고무적인 모습을 취하고 있었다.
카이드가 조금 진정된 모습으로 리치를 바라봤다.
거의 못 믿겠다는 식이었다.
"저놈은 소드 마스터인 헤일론조차도 이길 수가 없었소이다. 그런데 무슨 힘으로 그대가 저놈을 죽인단 말이오?"
"키메라를 움직일까 하오."
"키, 키메라?"
"그렇소."
리치는 그러면서 자신의 품속에 있는 작은 구슬을 꺼내 들었다.
키메라라는 말에 얼굴이 살짝 굳어 있던 카이드가 궁금증을 토해 내며 물었다.
"그것이 무엇이오?"
"바로 아공간이라 하는 것이오. 이 안에 내 라이프베슬이 들어 있기도 하오. 후후후!"
리치의 유일한 약점은 라이프베슬이다.
그것을 말해 주는 것을 보면, 카이드 백작 따위는 아무 위험 거리도 안 된다는 의미였다.
"사절단의 숫자도 제법 만만치 않소. 게다가 은의 기사단까지 합류한 이상 키메라 한두 마리 정도로는 어림도 없을 것임을 잘 알 것 아니오?"
그는 마치 실패했을 때를 염려하는 듯 불안한 기색으로 물었다.
리치는 표정이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속으로 비웃었다.
'크흐흐! 저리 속이 좁아서야, 어찌 일국의 왕이 되겠다는 야심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군.'
전에 같이 일했던 필립이란 놈은 그래도 야심이 있는 놈이었다. 모든 일에 결단력이 있고, 때를 기다릴 줄 아는 놈이었다.
하지만 이번 카이드는 어떠한가.
아주 머리까지 아둔한 단순 돌격형 멧돼지가 아닌가?
"크흐흐! 이번 키메라만 해도 족히 20마리는 있소. 그리고 사절단이 데려가는 키메라만 일깨울 수 있다면 그 혼자서 열 마리 정도의 능력을 발산할 수 있을 거요."
"일깨우다니? 도대체 무슨 수로 한단 말이오?"
"이번 사절단의 행렬은 모두 눈에 꿰고 있소이다. 걱정 마시오. 적당한 때, 그놈이 깨어날 것이니 말이오."
이번 사절단에 확실히 완고한 점이 있었다.
이안이 보기에 로이니스는 그러했다. 평소 때와 같이 투정 한 번도 부리지 않는 것을 보면 지난 몇 달간 충분히 성장했음을 알 수 있었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그녀의 놀란 변모는 충분히 이안을 놀라게 할 정도였다.
이안은 언제부터인가 자꾸 그녀를 신경 쓰게 됐다. 3왕자의 청혼을 거절한다는 점도 그랬고, 그녀의 마차 바로 뒤에 키메라가 있다는 점도 그랬다.
그것을 잘 이야기하여 조금 앞으로 바꾸려고 했으나 그녀는 딱 잘라 거절했다.
"싫어. 내가 앞으로 가면 누군가는 지금 내 자리로 와야겠지. 그렇다면 그 누군가는 불안해 할 게 분명한데, 무엇을 위해 바꾼단 말이야?"
그렇게 말하니 이안도 더 이상 강요할 수 없었다.
"에반, 로이니스를 지키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마스터."
이번 사절단에는 따로 시종이나 시녀는 데려올 수 있지만 기사는 데려올 수 없게 했다. 각 귀족들 간의 마찰을 우려한다는 점에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이안은 서서히 말을 몰다가, 선두에 서 있던 칼리프가 표정을 구기며 다가오는 것을 보자 살짝 신음을 삼켰다.
"전방 500미터 앞으로 트롤 세 마리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어찌하시겠습니까?"
"별다른 방법은 없을 것 같군. 처리하시오."
"알았습니다."
이안이 나설 것도 없었다.
은의 기사단 중 그 누구도 트롤을 못 이기는 기사는 없었다.
이안은 슬쩍 키메라를 보았다.
"……."
쥐 죽은 듯이 서 있는 키메라는 여전히 이안을 바라보며 이빨을 드러냈다.
"흠!"
이안은 말 머리를 돌리며 전방을 쳐다봤다.
"크워어엉!"
트롤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은 사실상 여러 가지로 구분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정상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뿐이었다.
일단 첫 번째는 머리를 파괴하는 것이요, 두 번째는 심장을 박살 내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끊임없이 재생하는데, 그렇기 때문인지 트롤의 피로 제조한 포션은 아주 효능이 좋았다.
기사들은 트롤을 깔끔하게 죽인 것으로 모자라 그들의 피를 정성스레 담기 시작했다.
트롤의 피라고 무조건 아무거나 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엄연히 상체와 하체를 구분하여 피를 뽑아내는데, 상체와 하체 그 둘의 사용법은 달랐으며 머리나 발가락, 손가락의 피는 사용할 수가 없었다. 오랫동안 학자들이 연구를 진행해 왔지만 아직까지도 그 이유는 밝혀진 바가 없다.
"저희 은의 기사단은 여신 플로아 님의 교단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번 사절단의 행렬에 트롤이나 오우거가 나타난다면 피를 수거하기로 약속했습니다."
"기사단에게 무슨 이득이 있소?"
"때때로 신전에서 저희의 훈련 중에 생긴 상처나 기사 서임식, 혹은 여러 가지 행사에 참여하여 많은 도움을 줍니다. 그것 이외에도 몬스터의 피나 오줌은 영역을 표시하는 데에 아주 중요한 물건입니다. 이번 행렬에 그들의 피로 영역을 표시한다면 오크나 고블린 따위들은 덤비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렇군."
이안이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트롤은 먹이사슬에서도 거의 최상층을 차지하는 보기 드문 몬스터다. 몬스터들도 본능을 아는 이상, 트롤의 영역에 침범할 정도로 간 큰 녀석은 없을 터였다.
"음. 칼리프 단장, 내일 도착할 이카루스시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해 주시오."
"이카루스시는 대대적으로 이카루스가(家)에서 시장을 연이어 맡아 오고 있는 도시입니다. 이번 이카루스 남작은 고작 황무지에 불과했던 이카루스시를 살기 좋은 도시로 만든 데에 대한 주역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민들에게도 선망 좋은 귀족 중 하나이기도 하지요. 그 외에도 도시에 작은 아카데미들을 여럿 지어 평민들에게도 교육을 시키는 도시입니다. 그렇기 때문인지 유난히 해마다 이카루스시에서 재능 있는 평민 기사나 학자가 많이 배출됩니다."
이안은 살짝 탄성을 지었다.
보통 귀족들은 절대 아카데미 같은 교육 시설을 절대 자신의 영지에 설립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평민들의 교육이 질적으로 향상된다면 자신들의 위치까지 침범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빨리 보고 싶군."
"아마 만족하실 것입니다."
그때, 에반이 옆으로 다가왔다.
"마스터,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뭐지?"
"아까부터 키메라의 반응이 이상합니다. 1시간 전만 해도 쥐 죽은 듯 서 있던 놈이 지금은 마치 광분한 듯 길길이 날뛰고 있습니다."
"뭐야?"
이안은 재빨리 그곳으로 달려갔다.
특별히 놈을 가두기 위해 만든 아다만티움 철창이 조금씩 찌그러져 가고 있었다. 이안은 키메라의 엄청난 힘에 혀를 내둘렀다.
"크르르르릉!"
놈이 이안을 발견하자 인상을 찡그리며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이안이 폭발적인 내공을 운용하여 살기를 내뻗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 안정된 키메라를 보며 이안이 에반을 바라봤다.
"언제부터 그랬다고?"
"1시간 전입니다."
이안은 다시 칼리프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놈이 이상한 듯하오. 지금부터라도 경계를 강화시켜 주시오."
"알았습니다, 후작 각하."
그 외에도 이안은 이카루스시에 도착할 때까지 키메라에 대한 경계를 완전히 풀지 않았다.
이카루스시에 도착하기 전까지 꼬박해서 세 번 정도의 몬스터의 습격을 받았으나 아주 쉽게 물리칠 수 있었다.
하나 참으로 신기한 일은 그런 일이 반복되자 키메라가 몬스터가 죽을 때마다 괴성을 지른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날이 가면 갈수록 흉포성을 더해 가자, 이젠 이안의 살기에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빨을 드러내며 철창을 뜯어낼 작정으로 하루 종일 방방곡곡 뛰어다닌 적도 있었다.
그 때문인지 로이니스는 시끄러운 나머지 뜬눈으로 밤을 지새울 수밖에 없었다.
"와아아아!"
"사절단 만세!"
"로엔그람 후작님 만세!"
사절단이 이카루스시에 들어오자 모든 평민들이 꽃가루를 거리에 뿌리며 그들을 환영했다. 펠타온 제국과의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칼리프는 사방을 둘러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안은 그 이유를 몰라 그에게 물었다.
"왜 그러시오, 단장?"
"아니, 사실 이카루스 남작이 저희를 이곳에서 마중 나오기로 되어 있습니다. 허나 나오지 않는 것을 보니 무슨 일이 생긴 듯합니다."
잠시 후, 이카루스 남작을 제외한 몇몇 기사가 그들을 마중 나왔다.
"로엔그람 후작 각하 맞으십니까?"
"그렇소."
"저희가 안내하겠습니다."
칼리프는 기사 중 하나를 붙잡고 물었다.
"이카루스 남작에게 무슨 일이 생겼소?"
그러자 기사가 불안한 기색으로 주위를 두리번두리번 쳐다보며 그의 귓가에 살짝 말했다.
"여기에선 말씀드리기 곤란합니다. 일단 저택으로 들어가시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칼리프나 이안은 그러려니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 사절단의 행렬을 일개 남작이 마중을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 칼리프를 조금 짜증나게 만들었지만, 잠자코 있는 이안을 보며 마음을 위로했다.
저택에 다다라서야 남작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창백한 얼굴로 연신 기침을 하고 있었지만, 사절단의 모습에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콜록! 콜록! 어, 어서 오시지요, 후작 각하. 제가 이런 몸이라 마중을 나가지 못한 것에 대해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이안은 딱한 표정으로 혀를 찼다.
"저런……. 언제부터 병을 앓아 온 것이오?"
"콜록! 이, 이 주쯤 된 듯합니다."
"이 도시에 신관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
"신관의 말로는 자신도 잘 모르겠다 합니다. 저도 일주일쯤 지나면 어련히 나을 거라 생각했는데, 지금에 들어서는 이상할 뿐입니다. 콜록! 콜록! 어찌 됐든 먼 길 오셨는데 들어오시지요. 최고의 만찬으로 준비하겠습니다."
"알았소. 그럼 남작의 쾌유를 기원하겠소."
"감사합니다, 후작 각하."
이안은 말에서 내려와 철창 쪽으로 다가갔다.
"칼리프 단장, 이놈이 혹시라도 철창을 빠져나갈지도 모르니 경계를 철저히 하시오. 만약 철창을 빠져나갈 경우에는 큰 학살이 벌어질 수도 있소. 그럴 경우 곧바로 나에게 신속히 알리도록 하시오."
"걱정 마십시오, 후작 각하. 저희 기사단은 이깟 잡 동물에 당할 정도로 약하지 않습니다."
칼리프는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며 자신 있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건 칼리프가 몰라서 하는 말이었다.
화경의 경지에 올라 있던 자신도 상당히 고전한 것이 바로 키메라다. 작정을 하고 공격한다면 은의 기사단 전원이 달려든다 해도 이기기 힘들 것이었다.
"단장만 믿소."
이안은 저택으로 올라가 제일 전망 좋은 방에 짐을 내려놓았다. 특별히 남작이 자신이 아껴 둔 보물 자리라며 양보했기 때문이다.
매우 고급스러운 천과 비단들.
그리고 수많이 빛을 밝히는 야경들을 보며 이안의 마음은 포근해졌다.
이안은 곧바로 침대에 누워 그간 볼 수 없었던 차원의 검술에 대해 적힌 책을 꺼내 들며 첫 장을 살짝 넘겼다.
'이건가?'
검술이라고 자칫하고 검을 사용하는 방법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차원의 검술서 첫 번째 장에는 일상생활에서 사용할 수 있는 호흡법에 대해 가르쳐 주고 있었다.
이안은 그 호흡법을 보며 상당히 감탄했다.
"호오! 유라시아 대륙에도 운기토납법과 같은 호흡법이 존재하다니. 자세는 많이 달라도 상당히 훌륭하군. 이 정도라면 근 이십 년 정도 만에 초절정도 무리는 아니겠어."
보통 가부좌를 틀어 앉고 기를 쌓는 중원인들과는 달리, 이 차원의 검술서의 저자인 샤이헬 황제는 누워서 기를 흡수했다. 그가 말하길 자신에게 제일 편한 방법을 추구한 것뿐인데, 단연코 자신에게는 눕는 것이 제일 편하다고 했다.
"후후! 이 노인네, 확실히 모든 일이 귀찮았음이 분명해."
이안은 다시 한 장을 넘겼다.
그러자 거기에는 이상한 문구가 있었다.
"에…… 어디 보자. 기초를 수련하기 위해서는 일단 검에 대해 10년간 통달하고 와라. 그렇다면 다음 장을 볼 기회가 주어질 것이다."
이안이 다음 장을 다시 넘기자 하얀 백지였다. 이안은 글이나 그림 등이 사라지자 살짝 당황하다가 그 말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왜 10년을 통달하고 오라 했지?'
분명 그 정도가 되지 않는다면 다음 장에 대해 이해를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안은 약 10년 정도의 내공을 손에 몰아넣으며 순간적으로 책에 주입했다. 그러자 책이 마나를 머금자, 그림과 글을 그리기 시작했다.
"아하!"
10년을 통달하고 오라는 것은 10년의 내공이 필요하다는 의미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안은 책에 집중하며 보기 시작했다.
차원을 뛰어넘으려거든 나 자신을 타 차원에 있다고 생각해라. 이 세계는 한 차원 중 하나다. 이 차원과 타 차원의 문을 열었다고 생각해라. 그 사이에 바로 나, 그 중간에 바로 내가 존재하고 있음을 차원들에게 확실하게 알려 주어라.
그리했다면 바로 다음 장으로 넘어가라.
다음 장은 차원을 연 자에게 문을 열어 줄 것이다.
이안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뒤로 넘기자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백지였다. 이안이 내공을 끌어올리며 내공을 주입했지만 이번에는 아무 일도 안 일어났다.
"역시 책의 말대로 해야 된단 말인가?"
뭔가 책에 쓰인 대로만 하기에는 믿기지 않을 이야기였다.
쉐도우 로드가 그와 같은 검법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믿지 않았을 것이었다.
"차원이라……."
하지만 책에 쓰인 대로 무작정 되는 일이 아니었다. 이때 쉐도우 로드라도 있으면 조언을 구했을 일이었을 텐데, 참으로 아쉬웠다.
이안은 책을 덮었다.
책만 뚫어져라 쳐다본다고 차원에게 자신의 존재를 가르쳐 줄 수 있으리 만무하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똑똑!
그때, 방문을 열고 로이니스가 들어왔다.
"뭡니까?"
"식사하래. 내려와."
'그래, 일단 밥이나 먹고 생각해 볼 일이지.'
이안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곧바로 식당 쪽으로 내려갔다.
식당으로 내려가면서 이안이 로이니스에게 물었다.
"제 방이 거기 있는지는 어떻게 아셨습니까?"
"마치 내가 알면 안 된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그럼?"
그녀의 고운 얼굴이 살짝 찡그려졌다. 게다가 왜 그녀가 자신을 부르러 왔는지 이해 못할 일이었다. 시녀나 시종을 불렀으면 간단히 해결될 일이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저 궁금할 뿐입니다."
"내 방이 네 옆방이거든."
"……."
이안이 제일 전망 좋은 방을 골랐다면, 로이니스는 제일 고급스러운 방을 골랐다. 당연히 로이니스가 이번 사절단에 두 번째로 강력한 힘을 보유하고 있었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로이니스의 대답에 그전의 궁금증까지 해결됐다.
옆방이니 시종이나 시녀의 필요 없이 곧바로 부르러 온 것일 테니까.
"혹, 마법에 대해 조금 아십니까?"
"너, 나 놀리지?"
로이니스는 심술 맞은 표정으로 이안의 앞에 섰다.
양팔을 허리에 떡하니 얹고 삐딱한 얼굴로 이안을 올려다봤다.
"내가 정령술사라는 것은 벌써 잊은 거야?"
"그렇다면 공간 마법에 대해 잘 아십니까?"
"공간 마법?"
이안은 간단하게 설명을 곁들여 주었다.
공간 마법, 대표적으로 자신의 시야 속에 어느 공간으로도 움직일 수 있는 블링크나 먼 거리를 움직이는 텔레포트 같은 마법 말이다.
로이니스는 자신 있는 말투로 씨익 웃었다.
그녀의 웃음에 주변이 전부 화사해진 듯한 기분이다.
"어느 정도는."
참으로 애매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이안은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간략하게 공간 마법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뭘 해 줄 건데?"
"예?"
"가는 게 있음 오는 게 있는 거지."
"……."
이안은 황당하다는 투로 그녀를 바라봤다. 이안이 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뭘 원하는지 말씀해 보십시오."
"……전에 말한 거 취소해."
"예? 무엇을요?"
갑자기 로이니스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하나 눈에서는 눈물을 뚝뚝 흘리는 것이 아닌가.
참으로 오묘한 모습이었다.
울면서 웃다니.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울었는 줄 알아? 그리고 내가 언제부터 네 보호 따위를 받는다고 했어? 착각하지 마. 네가 내 오빠라도 돼? 아니면 그렇게 참견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웃기지 마. 난 그런 식의 말 따윈 추호도 들어 본 적 없어. 취소해. 취소해!"
그녀는 거의 발악하듯 말했다.
이안은 누가 그녀의 얘기를 들을까 염려되어 주위에 마나의 벽을 쳐 두었다.
"……."
이안이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자 로이니스는 그의 품에 살짝 안겼다.
"이 바보야, 이때 등이라도 토닥여 주면 안 돼? 머리라도……."
참으로 귀여운 여인이 아닌가.
그녀의 새침 표정이 세리아와는 다른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이안은 왼쪽 팔로 그녀의 등을 감싸며 오른손으로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취소하란 말이야, 취소……. 그렇다면 공간 마법이든 뭐든지 얘기해 줄게. 알았지?"
이안은 그녀의 슬픈 표정에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는 없었다.
언제 울었냐는 듯 로이니스는 싱글벙글 한시도 웃음을 참지 않았다.
"공간 마법이라는 것은 엄청난 수식을 요구해. 일단 자신이 서 있는 공간과 자신의 키, 몸무게 모든 것을 정확한 값을 알아야 한단 말이지. 그리고 자신이 어떤 좌표로 움직일 것인지까지 알아야 해. 그래야 비로소 공간 마법이 발동되지. 그 과정에 누군가에게 방해를 받는다거나 이동해야 할 공간에 다른 물건이 생긴다면 시전자인 마법사는 곧바로 죽어."
"어떻게 말입니까?"
"펑! 하고. 사실 아무도 몰라. 그저 죽는다는 것뿐이야. 마법사의 시체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지. 다만 마법사들은 차원의 공간에 끼었다고 생각할 뿐이야."
"차원? 같은 차원에서 같은 차원으로 움직이는데 또 다른 차원을 필요로 한단 말입니까?"
"응. 같은 차원에서 다른 차원으로 움직이면, 그 다른 차원이 움직여서 이동해야 할 구역까지 데려다 준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데려다 주면 다시 차원을 이동시켜 주지. 그래서 일반인들이 보면 같은 차원에서 같은 차원으로 움직인다고 생각하게 돼."
그렇다면 일종의 텔레포트도 차원이동 마법의 일종이라고 부를 수도 있었다.
"그 이외에는 없는 것입니까?"
갑자기 로이니스가 두 손뼉을 마주치며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마법사들은 항상 공간이동 마법을 배우기 전에 이렇게 배운다고 들었어."
"어떻게요?"
"공간과 차원, 시간을 속이라고."
"콜록! 콜록! 어서 앉으시지요, 후작 각하. 허허! 후작 각하께서 이리도 젊고 잘생긴 분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에 맞춰 아이들을 준비했을 텐데 말입니다. 참으로 아쉽습니다."
시녀들을 얘기하는 것이다. 이안은 홍조를 띠며 자신을 바라보는 시녀들을 바라보며 살짝 웃음을 지었다.
"하하! 그거 참. 나도 남작의 성의에 고맙게 생각할 뿐이오. 이 정도로도 충분히 과분할 정도요."
그때 이카루스 남작이 눈을 빛냈다.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지금이라도 원하신다면 언제든지 준비를 해 두겠습니다."
"하핫! 내일이면 떠날 몸이거늘 그럴 힘이 없습니다."
"허허! 그것도 그렇군요."
이안이 살짝 음식을 찍어 먹자, 다른 귀족들도 음식을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이안은 그러면서 남작의 모습을 면밀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갑자기 궁금증이 일어났으니 말이다.
얼마나 몸이 아팠으면 사절단의 마중도 나오지 않는가 하고 말이다.
이안이 은근슬쩍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그의 손을 툭 쳤다.
"앗!"
"아, 미안하오, 남작."
"허허! 아닙니다."
짧게 마무리를 하며 무마시켰다.
이안은 그 짧은 시간 동안 내공을 운용하여 남작의 몸속을 살폈다.
이안의 얼굴이 갑자기 와락 구겨졌다.
'뭐, 뭐지? 왜, 이카루스 남작의 몸에 마기가…….'
이안은 자신이 잘못 본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이 본 게 아니다. 내공으로 본 것이다. 한 치의 실수도 없었다.
그때, 이안의 생각에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서, 설마 이카루스 남작이 카이드 백작과 손을 잡았나?'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정말 이카루스 남작의 몸에는 마기가 자라고 있었다.
하나 이상한 일이다.
이카루스 남작이 아무리 황무지를 일궈 낸 대단한 귀족이라 하여도 고작 남작에 불과했다.
게다가 이안이 느끼기로는 검 한 번 휘둘러 본 적도, 그렇다고 궁술이나 마법을 사용해 본 적도 없는 귀족에 불과했다.
그런 자의 몸에 마기를 심어 무엇 하러 키메라로 만든단 말인가. 차라리 지나가는 젊은이를 키메라로 삼는 것이 더욱 효과적으로 느낄 것이었다.
'그렇다면 왜?'
이안은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후작 각하? 제 얼굴에 무엇이 묻었습니까? 허허!"
"엥? 아, 아니오. 아무 일도 아니니 걱정 마시오. 혹시 남작, 요즘에 시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나지 않소?"
갑자기 남작이 반색하며 물었다.
"아니, 어떻게 아셨습니까?"
'역시!'
이안은 자신이 생각한 것을 확신했다. 그렇다면 남작은 단순히 마기에 중독이 된 것뿐이지 키메라는 아니었다.
'이 주위에 마기를 뿌리는 곳이 있다! 그곳이 어디든.'
남작이 갑자기 한숨을 쉬며 얘기했다.
"요즘 갑자기 한 마을에서 노인들이 떼로 죽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이후에도 여러 차례 일어났습니다만, 여전히 이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 신관을 파견해도 신관들도 모른다며 고개를 내저을 뿐이니 말입니다."
'신관같이 마기에 익숙한 자들이 어째서 마기를 모르는 것이지?'
이안은 그런 의심을 지울 수가 없었다.
'마기에는 생명을 줄이는 능력이 있나? 면역력이 약한 노인들부터 죽는 것이 당연하겠군.'
"알았소. 남작, 이 문제는 국왕 전하께 아뢰어 해결을 보도록 하겠소."
"오! 감사합니다, 후작 각하. 이 문제에 상당히 고심이 쌓였었는데……."
"하하! 어찌 이게 남 일일 수 있겠소이까."
* * *
다음 날이 되자 이안은 시장의 아쉬움 속에서 사절단을 이끌고 가야만 했다.
"콜록! 콜록! 오실 때 꼭 들러 주시기 바랍니다, 후작 각하. 모실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고작 하룻밤이 지났을 뿐인데 남작의 얼굴은 더욱 수척해져 있었다.
이안은 그를 측은한 눈길로 바라봤다.
"올 때는 꼭 다시 들르겠소. 아무쪼록 몸조리 잘 하시오. 자, 출발한다!"
곧바로 출발령을 내리자, 말들이 힘차게 움직이며 다음 도시인 그란시로 빠르게 나아갔다.
"칼리프 단장, 어제 얘기한 것은 조사해 왔소?"
"옛! 단 몇 시간뿐이라 미숙한 점이 많으니 양해 바랍니다. 이 과정에서 상당한 금화가 소모되었습니다."
"이카루스시에도 정보 길드가 있던 모양이군."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 정보입니다."
칼리프가 건네는 것을 이안이 받아 들었다. 몇 개의 종이 뭉치였는데 이안은 그것을 유심히 바라봤다.
고가의 금액을 주고 산 그 정보는 바로 노인들이 죽은 마을의 위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외에도 그와 비슷한 증상을 내고 있는 마을을 여러 차례 조사해 왔다.
"서북쪽에 위치한 마을의 노인들이 대부분 많이 죽었군. 특별히 이 지역이 말이오."
이안이 한 군데를 가리키며 원을 그리며 대충 짐작했다.
"그 외에도 정보 길드 측에서 놀라운 정보를 얘기했습니다."
"무엇이오?"
"이런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난 것은 고작 2주 전쯤이라 합니다. 근데 2주 전, 네이티스 산맥쯤에서 괴물을 봤다는 마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소?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됐소?"
이안이 묻자, 딱딱하게 굳어진 칼리프가 대답했다.
"모두 죽었답니다."
"괴물한테 죽은 건가?"
"아닙니다. 그들 모두 지금 남작의 병세와 아주 유사하게 죽었답니다. 그것도 그들은 고작 5일 만에 말입니다."
"……."
확실히 정보 길드가 아니라면 얻기 힘든 정보였다. 이안은 칼리프의 말을 들으며 수고했다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한 가지 물을 것이 있네."
"말씀 하십시오, 후작 각하."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산맥 이름이 뭔가?"
이안이 갑자기 불안감이 들었다.
칼리프 또한 주변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송구스럽습니다만, 네이티스 산맥입니다."
"지금 다시 돌아간다면 어떻겠소?"
"……제 시간대에 입국하기는 힘들 겁니다. 이 길을 돌아간다면 족히 그란시까지 5일은 걸릴 겁니다."
"오늘부터 불침번을 강화시키겠소. 그란시에 도착할 때까지만 참아 달라 얘기하시오. 뿐만 아니라, 이젠 2인 3조로 정찰 부대를 편성하여 주위를 샅샅이 뒤지라 하시오. 이건 명령이오."
이안의 굳은 얼굴에 칼리프가 수긍했다.
"알겠습니다, 후작 각하."
첫 번째 밤이 찾아 왔다. 이안은 이때만큼은 경계를 늦춘 적이 없었다.
예전 쉐도우 로드가 전한 문서만 해도 프라스 제국 측에서 이번 사절단을 노릴지도 모른다는 얘기가 있었다.
이안은 첫 번째로 불침번을 섰다. 칼리프의 방해 공작이 있긴 했지만 이안의 뜻을 꺾을 수는 없었다.
이안이 자고 싶지 않은 이유는 바로 차원의 검술서 때문이었다. 어차피 잠도 오지 않는 데, 차원의 검술이라도 익히려는 목적이었다.
아무리 사절단의 임무가 중요하다고 해도 이안에게는 수련도 아주 중요했다.
'예전 쉐도우 로드의 감각을 생각해 보자. 그는 과연 어떻게 했는지.'
이안은 회상하며 최대한 떠오르려고 애썼다.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문제에 봉착했다.
쉐도우 로드의 몸놀림이 너무 빨라 그가 무슨 짓을 했는지 잘 기억이 안 난다는 점이 제일 컸다.
'공간, 차원, 시간을 속여라.'
이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에 널려 있는 나뭇가지 하나 주워 들었다. 검을 뽑아 들면 이미 엄습할 수 없을 정도로 예기가 주위를 감싸기 때문에 감각이 노련한 기사들이 발딱 일어날지도 몰랐다.
'나의 전신은 이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타 차원에 있다. 타 차원……!'
"공간도 시간도 모두 이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난 이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넌 나를 잘못 보았다. 네가 보기에 난 이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철저히 자연을 속이기 시작했다.
그에 첫 번째로 나무들이 반응하기 시작했고, 두 번째로 마나들이 반응했다.
이안은 여기서 만족하기로 했다.
일단 처음 한 것치고는 상당히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자연이나 마나를 속일 수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속여 넘길 수 있었다.
"후우!"
이안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땀을 닦아 냈다.
고작 정신력이 조금 소모된 것만으로 땀이 나다니…….
생각보다 어렵다는 것을 느꼈다.
"응?"
이안은 갑자기 내공을 끌어올리며 전신에 방탄강기와 호신강기를 겹겹이 둘러싸기 시작했다.
뭔가가 오고 있다.
그것도 다른 차원에서.
"대체 어떤 놈이……!"
다른 차원에서 여기 차원으로 넘어오는 것이 세세하게 느껴졌다. 그렇다. 이건 바로 블링크라는 마법이 확실했다.
사절단이 있는 숙영지로 블링크 마법을 전개하는 마법사.
결코 좋은 의도로 한다고 볼 수는 없었다.
'이런 것이었나!'
누군지는 몰라도 이안이 집중하고 있는 사이 블링크를 사용해 주었으니 이안은 뭔가를 깨달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이안은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다른 차원이 보인다!
그저 마나만 느껴지는 허공에 다른 차원이 엿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안은 갑자기 재미있는 상상이 들었다.
그렇다!
어떤 대마법사라도 텔레포트나 블링크로 도착하려는 공간에 어떤 존재가 있다면 그 마법은 필시 실패한다.
그렇다면…….
이안은 짐작이 될 만한 공간으로 들고 있던 나뭇가지를 그대로 던졌다.
쾅!
"……."
나뭇가지는 살짝 공간의 비틀림에 영향을 주었다. 그러자 갑자기 나타난 로브의 의문인은 붉은 피를 왈칵 토해 냈다. 공간이동을 한 장본인이 분명했다.
"감히, 어떤 개새끼가 공간 이동하는데 방해질이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