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인하르트-36화 (36/60)

■ 제36장 다시 만난 인연 □

"콜록, 콜록!"

레더린은 급히 옷으로 코와 입을 막고 검집으로 주위를 헤집으며 먼지 구름 사이로 들어갔다. 그의 뒤를 따라 수백 명의 병사들이 돌덩이를 옆으로 치우며 이안을 애타게 찾았다.

"영주님을 찾아야 한다!"

레더린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옆에서 보필하지 못한 자신의 죄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20년이나 기다려 온 마지막 황태자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에반도 자신의 우람한 신체를 바탕으로 돌을 저 멀리 집어 던지며 찾기 시작했다.

"여, 여기 계십니다, 대장님!"

"뭣이? 어디 말이냐."

한 병사의 찾았다는 말에 레더린의 신형이 급격히 꺼지며 그곳에서 나타났다. 병사의 말대로 이안이 쥐 죽은 듯이 누워 있는 것이 산 사람이라고 판단하기 어려웠다.

"여, 영주님이 맞구나. 어서 영주님을 뫼셔라. 신관과 마법사는 모조리 불러와라. 약초사든 뭐든 좋다. 전부다 불러와라! 영주님이 위급하시다."

누구 손에 맡기지도 않았다. 레더린이 직접 업으며 전속력으로 뛰어갔다.

* * *

이안이 쓰러진 지 정확히 3일이 지났다.

강력한 화염 마법 때문인지 그의 전신은 화상으로 고생이 심했다. 하지만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혼수상태에 빠져 일어날 기미가 없었다.

"신관이 얘기한 지 이미 3일이나 지났다. 이대로 영주님을 내버려 뒀다간 사절단에서 제외당할지도 모른다. 정말 영주님이 깨어나시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는 거란 말인가?"

찰트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그렇습니다. 언제 깨어나실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어쩌면 평생……."

"크으! 어, 어찌 일이 이렇게 됐단 말인가. 이 모두가 전부 내 잘못이 크다. 내가 보필하지 못했음이야."

레더린은 자책하며 숨을 죽였다. 찰트도 찰트 나름대로 그때 혼자 레더린을 부르러 간 것이 마음에 걸렸다. 만약 그때 자신이 있었더라면 이런 상황까지 가는 일은 없었을 것이었다.

"그것보다 큰일이군. 아무리 영주님이 소드 마스터라고 하신들 일어나서 이 모습을 보신다면 얼마나 크게 놀라실지 심히 걱정되는구나."

"……."

사람의 형상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의 추악한 얼굴이었다.

만약 그때 이안을 발견했던 병사가 라인하르트 제국의 사람이 아니었다면 절대 이안이 맞는지 확인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여신의 축복으로 인한 여신의 문신이 그의 왼쪽 팔뚝에 깊게 새겨져 있었음을 말이다.

"그때, 소환되었던 마법이 바로 헬 파이어(Hell Fire)였던 듯합니다. 메모라이즈 때문에 데미지가 많이 축소되긴 했지만, 소드 마스터인 영주님에게 이 정도의 타격감을 줄 수 있는 마법은 그것뿐입니다."

"그럼 그 마법사는 어떻게 된 거지?"

"시체가 없었던 것을 보아 도주한 듯싶습니다. 참으로 기묘한 일입니다. 헬 파이어를 사용하고도 도망갈 힘이 있다니……. 최소 7서클 유저 급, 어쩌면 7서클 마스터 정도의 고서클 마법사였을 것입니다."

"그 정도면 대륙십강 중에서도 최상위의 실력이 아닌가?"

"알려지지 않은 강자들이 많은 법이지요."

"음……."

레더린도 알려지지 않은 강자 중의 한 명이었다. 마스터의 중급 정도 실력이라면 대륙십강은 못해도 대륙이십강 이내의 실력을 다툴 정도는 될 것이다.

그들이 그러고 있는 사이 한 시녀가 안으로 들어왔다.

"로엔그람 상단의 상단주이신 세리아 님께서 오셨습니다. 들일까요?"

"뫼셔라."

레더린이나 찰트도 세리아에게는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그들은 거의 세리아를 황태자비(?)로 착각하고 있었음이 확실했다.

"대장님, 저흰 일단 나가 봐야겠습니다."

"음, 그러도록 하지."

레더린과 찰트는 곧바로 문을 닫고 나갔다. 그 와중에 세리아와 잠시 인사를 나누긴 했지만, 세리아는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서는 곧바로 방 안으로 들어왔다.

쥐 죽은 듯 누워 있는 이안. 화상 때문인지 간단한 복장만 하나 입고 있었다. 온몸이 불덩어리인 양 붉었다. 피부는 노파나 영감들처럼 쭈글쭈글해서 사람의 형상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아……!"

사태가 심각하다고 듣긴 했지만 이 정도일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세리아는 제자리에 주저앉더니 이안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이안? 일어나 봐. 내가 왔어. 일어나 봐! 제발 일어나 봐!"

세리아는 그것도 모자라 이안의 어깨에 손을 대고 살짝 흔들어 깨웠다. 자세만 보면 마치 아침에 일어나기 싫어 투정부리는 사람을 깨우는 듯한 다정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안은 심통을 부리며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는 모습까지는 할 수 없었다.

그의 의식은 거의 죽어 있는 상태.

"흑흑! 왜, 일어나지 않는 거야? 응? 이안! 이봐요, 백작님! 아직, 아직 할 일이 그렇게 많으면서 왜, 어째서. 왜 일어나지 않는 거냐고? 응?"

하지만 이안은 일어나지 않았다.

세리아는 이곳에서 편히 머무르기로 했다. 하지만 몸은 편할지언정 마음은 편하지 못했다. 시간이 나면 나는 대로 찾아가서 이안과 계속 이야기를 나눴다. 물론 혼자 말하고 혼자 웃는 식이었지만 세리아는 그것으로도 만족했다.

그래, 아직 죽지 않았다. 살아 있으면 된 것이다.

언젠간 깨어날 것이란 생각으로 매일 찾아갔다.

"다행히 사절단은 일주일간 연기되었다 합니다. 토벌 문제 때문인지 아직 나라가 곤두선 상태라……."

"국왕은 이 일을 알고 계시는가?"

"아직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허나 이런 식으로 계속될 경우에는 알려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찰트와 레더린은 신음성을 속으로 삼켰다. 지금은 괜찮지만 며칠이 지나도 이안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소문이 퍼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가뜩이나 이안이 아직까지 깨어나지 못했다는 것은 병사들이라면 전원이 알고 있는 얘기였다.

"저기, 이안? 유리칼루스 아직도 보관하고 있어? 혹시 꽃말 알아? 아니면 동화책이라든지 누구한테 들은 적 없어?"

"……."

대답은 없었지만, 세리아는 얼굴을 붉힌 채 수줍게 이안의 왼손을 만졌다.

"그 이야기를 모른다 해도 괜찮아. 네가 꽃을 받았으면 남자로서 책임을 지란 말이야. 꼭 이 손으로 반지를 줘야 해. 알았지? 응?"

"……."

"호호, 쑥스럽게 말이야. 꼭 숙녀인 내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해야……."

꿈틀.

갑자기 이안의 왼손이 살짝 움직였다.

"으응?"

착각이 아닌가 하고 다시 왼손을 바라봤다. 이번에는 검지손가락이 위로 올라갔다 내려왔다. 아주 미약한 움직임이지만 여러 번 반복되자 무슨 뜻인지 대강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다. 지금 손가락으로 자신의 생각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 그렇다면 지금까지 한 얘기 혹시 다 들었단 말이야?'

세리아의 얼굴이 붉어질 대로 붉어져서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근데 무슨 뜻이지? 가라는 거야, 오라는 거야?'

분명히 손가락이 자신을 가리키고 있다. 하나 까닥거리는 것이 무슨 행동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곳은 참으로 어두운 공간이었다. 칠흑처럼 어두워 마음대로 앞을 보기에도 어려울 정도.

손과 발이 보이지도 않고 그 끝을 알 수도 없는 공간.

하지만 마나만큼은 너무나도 풍부했다. 마치 마나로만 이루어진 바다 속에 빠진 듯 허우적거렸다.

'사부님…….'

그곳에서 참으로 그리운 사람을 만났다.

아, 사부님.

별 볼일 없던 자신을 청성파의 제자로 만들어 준 천유한 장문인.

사부님은 갑자기 청풍검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평소에 보여 주었던 인자한 표정이 아닌, 적을 매도하는 아주 매서운 눈빛을 가득 담고서 말이다.

그의 검을 받는 자는 귀창이었다.

이안을 죽음의 기로까지 몰아세워 용아천으로 떨어뜨렸던 그 귀창 말이다.

귀창과 사부의 대결은 수십 분이고, 수 시간이고 펼쳐졌다.

그리고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삼 일이 지나도 그 대결은 끝나지 않았다.

이안은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그들의 대결을 바라봤다.

5일쯤 지났을 때, 그 대결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가진바 내공을 모두 사용한 그 두 사람은 마지막 한 수만을 숨겨 둔 채 서로를 바라봤다.

'합!'

'크아앗!'

그들의 기합 소리가 귀에 선명하게 들렸다.

그들은 서로를 향해 검과 창을 내질렀다.

슈악!

대결의 끝은? 승자는?

이안은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자 귀창과 사부가 모래 바람이 되어 한순간에 흩날리며 사라져 버렸다.

'뭐지……?'

승자는 누구란 말이지? 대체 이것들은 나에게 무엇을 말해 주는 거지? 여긴…… 대체 어디지?

아니, 왜 난 이런 것에 집착하는 거지? 그 모든 것은 순리대로 흐르고 있는데, 무엇 하러 내가…….

그래, 이미 자연은 자연대로 순리대로 흐르고 있거늘.

내가 이곳에 있는 것도 순리이며 운명이다.

그래…….

무언가 몸이 타는 느낌이다. 하나 그것과는 달랐다. 피부가, 뼈가 모든 것이 순리대로 돌아가는 것처럼.

이안의 몸이 점차 떠올랐다.

"어? 어?"

세리아가 입을 벌리며 당황했다. 사람의 몸이 떠오르다니?

마법사가 아닌 이상 떠오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눈앞에서는 마법적 기운이 가미된 것도 아니건만 떠오르고 있음이 분명했다.

이안의 왼쪽 팔뚝의 여신의 문신이 금빛을 내뿜었다. 그렇다. 이안을 보호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 기운으로부터 차단 역할을 하는 것이다.

치이이익!

피부가 전부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기분 나쁜 소리였지만, 세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전부 쳐다봤다. 화상을 입은 모든 피부가 사라지고, 다시 새살이 돋았다.

환골탈태(換骨奪胎).

이안의 몸은 환골탈태를 이루고 있었다.

* * *

2차 환골탈태까지 끝을 이루고 나자 이안을 감싸던 빛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둥둥 떠 있던 몸이 침대로 다시 내려앉았다.

이안은 살며시 눈을 떴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낯선 천장. 그리고 옆에 촉촉한 눈망울로 자신을 쳐다보는 한 아름다운 여인.

그 여인이 바로 세리아라는 것을 알았을 때 이안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후우!"

'어찌 되었건 간에 살아 있다는 뜻이로군.'

다시 눈을 감았다.

며칠 전 리치에게 강력한 헬 파이어 마법을 맞았을 때는 정신이 혼미해지는 타격을 입었다. 방탄강기와 호신강기의 여파가 아니었다면, 막아 내기 힘들 수준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정신을 잃을 때는 '아, 죽는구나!'라는 생각까지 해야만 했다. 분명 과거의 일이 주마등처럼 흘러가는 것이 죽을 때의 징조라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으니까.

정말 후회스러운 것이 세 가지 있었다면, 첫 번째는 바로 청성파와 사부에 대한 미안함이었고, 두 번째는 라인하르트 제국을 세우지 못하고 프라스 제국을 무너뜨리지 못한 점.

마지막 세 번째는 세리아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얘기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랬을까.

일어나서 본 사람이 바로 그녀라는 사실이 무엇보다 기뻤다.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 이렇게 눈물을 흘려 주는 여인이 있다는 사실도 참으로 고마웠다.

이안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눈을 떴다.

"어? 무, 무슨…… 웁!"

입가에 닿는 촉촉한 느낌.

서툴지만, 세리아는 이안의 목을 껴안으며 그대로 자신의 입술을 이안의 입술에 내리박았다.

이안의 눈도 휘둥그레진 채로 세리아의 눈망울을 보며 그대로 그녀의 등을 꼬옥 껴안아 주었다.

잠시 후, 그녀는 눈을 뜨며 다소 상기된 표정으로 일정 거리를 두며 떨어졌다.

이안이 장난스런 기색으로 그녀를 놀렸다.

"이거 무슨 뜻으로 이해해야 되는지 알아도 될까요?"

아닌 게 아니라, 그녀의 손이 슬쩍 내려가더니 이안의 배 쪽에 대고 있었다. 물론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안은 환골탈태를 겪고 난 뒤였다. 환골탈태를 겪고 나면 극심한 양의 기운이 쏟아지기 때문인지 옷들이 전부 타 버린다.

즉, 지금 이안의 상태는 완벽한 나체.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은 상태라는 의미였다.

세리아는 자신의 손을 슬쩍 보더니 더욱더 내려 봤다.

"아……!"

입맞춤 뒤에 있었던 감정은 점차 놀람으로 변했다. 그녀의 얼굴이 방금 전과는 다른 의미로 붉어지기 시작했다.

"꺄아아악!"

비명을 지르는 세리아는 그대로 방을 뛰어 나가 버렸다.

세리아가 나가고 난 뒤 이안은 머리를 긁적이며 주섬주섬 옷을 꺼내 입었다. 다행히도 시녀가 환자복 몇 벌을 옷장에 걸어 둔 상태였던지라 이안은 환자도 아니건만 환자복으로 만족해야 했다.

대충 가리는 것에는 성공한 이안은 그대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자신의 내공을 살폈다.

"후우……!"

간단한 호흡으로 정신을 안정시킨 이안은 단전을 가득 채우던 내공이 사라진 것을 알고 내공의 흔적을 뒤쫓기 시작했다.

'여기 있구나! 다행이다.'

내공이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몸 전체에서 감도는 것이다.

이안은 만상귀일신공을 펼쳤다. 그전처럼 패색적인 기운이 감도는 것도 아니었다.

'대성은 아니다. 그렇다면 11성?'

11성의 끝자락, 거의 12성 즉 대성하기 일보 직전의 상황이었다. 만상귀일신공을 대성하면 내공이 마르지 않는 샘물과 같다고 하였다. 지금도 하루 종일 내공을 운용하여도 쓸 수 없을 만큼의 내공이 가득 차 있을진대 만약 대성까지 하게 된다면 어떨지 은연중에 상상이 갔다.

"그렇다면 지금 내 경지는?"

이안은 슬며시 눈을 뜨며 궁금해 했다.

뭐라고 정의를 내리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이 정의를 내리기 위해서 무리하게 내공을 운용했다가는 자칫해서는 주화입마에 빠지는 참담한 결과가 나올 수도 있었다.

그렇다. 기다려야 한다. 경지를 안정화시키기 위해서는 두고두고 기다려야 한다. 기회가 올 때까지.

'현경에 오른 것은 아니다. 하지만 화경의 경지도 아니다. 화경과 현경의 그 중간, 참으로 어중간한 경지다. 이런 경지가 존재했는가?'

이안은 현경이란 경지에 침을 꼴깍 삼켰다.

욕심이 가는 것은 당연했다. 현경이라 하면 역대 중원 역사상 몇 명 배출되지 않은 최고의 고수였으니 말이다.

"뭐, 어찌 되었든 간에 몸 상태는 최고로군."

예상외의 미녀의 서비스(?)까지 받고 난 몸이니 더욱 컨디션이 최고인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흐흐!'

슬며시 입술을 매만지자, 아직까지 그 기운이 머릿속을 맴도는 듯했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라 상상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쩝…….'

이안은 입맛을 다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루빨리 일을 처리해야겠군. 보기보다 할 일이 굉장히 많겠어.'

이안은 그 후로 쉬지도 않고 일을 했다. 레더린이나 찰트가 바뀐 면모에 상당한 놀라움을 토해 내는 해프닝도 있었고, 침대에서 훌훌 털고 일어나 곧바로 일을 한다는 말에 극구 말리려는 시도도 있었다.

그 이후로는 국왕 카이어스에게 정식으로 승인을 받아 그간 토벌 군대의 장악 지역이었던 프로시안 영지와 그동안 레더린이 사용하던 영지는 모두 이안에게 귀속되었다.

그리고 이안은 그 능력을 인정받아 백작에서 후작으로 올라가는 영광을 거머쥘 수 있었다. 공작이 없는 슈레이더 왕국으로서는 후작이라 하면 제일 최고봉의 귀족이라 일컬어진다. 물론 귀족들의 반발이 있긴 했지만 아주 조그마한 소리에 불과했기에 곧 이안을 지지하는 귀족들에게 기가 죽어 그들의 소리는 언제부터인가 들을 수가 없었다.

세리아는 그 서비스 사건(?) 이후로 이안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 볼 수도 없었지만, 프로시안 영지를 되찾고 그녀의 아버지의 묘비를 찾아가고 나자 그동안 감춰 두었던 눈물을 모두 펑펑 쏟아 내었다.

물론 그 대상은 이안의 가슴이었다. 이안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는 통에 이안은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소리를 죽인 채 눈물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헤일론이 가지고 있던 금광맥 소유권은 온전히 이안에게 넘어갔지만, 그 소유권이 다시 로엔그람 상단주인 세리아에게 넘어갔다. 상단 일은 이안보다는 그녀가 좀 더 능숙했기 때문이다.

이안은 영지 일을 거의 다 끝마쳤을 때, 찰트와 레더린에게 영지 운영을 위임하고 곧바로 수도로 떠났다.

"신 로엔그람 폰 이안이 슈레이더 왕국의 지배자이신 카이어스 국왕 전하를 뵈옵니다."

"어서 와요, 로엔그람 백작. 아니, 이제 후작이라고 불러야 될까요? 후후!"

카이어스의 순수한 웃음을 보자 이안이 반색했다.

"아닙니다. 아직 작위계승식을 한 것이 아니오니 백작이 맞습니다. 저에게 후작이란 과분한 작위일 뿐입니다."

"후후! 그럴 리가요. 반역자로부터 나라를 구해 내고, 반역자를 완전히 토벌한 자가 누구인데. 오히려 전 공작을 주어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전하의 은총에 송구할 뿐입니다."

"으음? 옆에 있는 경은 누구지요? 소개해 주겠어요?"

국왕을 처음 알현하는 에반.

무작정 이안을 따라서 들어오긴 했지만, 거짓이 없고 꾸밈이 없는 카이어스의 모습에 상당히 놀라고 있긴 했다.

이안은 짧게 그의 옆구리를 툭툭 쳤다.

"시, 신은 로엔그람 후작 각하를 따르고 있는 리안 반 에반이라 합니다. 마, 만나 뵙게 되어 가문의 영광이옵니다."

떡대 같은 어깨를 내리깔며 무릎을 꿇는 모습은 오히려 로엔그람 후작이라는 칭호가 그에게 더 잘 어울리는 듯했다.

오히려 이안은 그의 시종쯤으로 보일 만큼 연약해 보였다.

"에반 경 같은 자가 우리 왕국에 있다니 미래가 보이는군요. 기대해 보겠어요."

"영광이옵니다, 전하."

웃음꽃을 피우던 카이어스 국왕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반색하며 이안을 지그시 바라봤다.

"그래요, 로엔그람 후작. 헤일론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상당히 무리가 있었다고 하던데, 괜찮나요?"

"전하의 걱정 덕분에 괜찮았사옵니다. 허나 그 과정에서 저희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았습니다."

"충격적인 사실이라니요?"

궁금증을 피워 내는 카이어스의 모습에 이안이 턱짓으로 한 곳을 가리키자 에반이 얼른 그곳으로 달려갔다.

철커덩. 철커덩.

사지에는 강력한 마법으로 제련된 사슬이 묶여 있었다. 그것이 에반의 순수한 힘에 의해 딸려 오고 있었다.

헤일론, 그자였다. 물론 리치가 도망가 버린 이후로는 의지를 잃고 숨만 허덕이는 놈이 되어 버리긴 했지만.

의지가 없는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헤일론입니다."

"헤, 헤일론? 어, 어찌 그자가 이런 꼴이……."

"증거는 없지만 심증으로는 이자가 프라스 제국과 은밀한 거래가 있었던 듯싶습니다. 제가 이자와 싸울 때는 의지를 거의 사라진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철저하게 한 흑마법사의 결정권에만 따르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프, 프라스 제국! 그들이 서서히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로군요."

"저희 왕국은 과거부터 펠타온 제국 바로 밑에 위치하는 나라였습니다. 펠타온 제국의 뒤통수를 치기 위해서라면 저희 왕국처럼 지리적 성향이 좋은 곳도 없지요. 지금은 고작 헤일론 한 명뿐이었지만, 키메라로 성장한 자들이 다수라면 막아 내기 힘들 것입니다."

"그, 그럼 이자가 키메라란 말인가요?"

"마족의 신체와 인간의 몸을 결합했다 했습니다. 프라스 제국이 이런 것을 양성하고 있다면 펠타온 제국에서도 상당히 곤욕스러운 것이 많을 것입니다."

"……."

카이어스는 두려움 섞인 눈빛으로 헤일론을 바라봤다. 지금은 거의 사람의 형상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온몸에 털이 곤두서서 마치 웨어울프와 같은 형상을 유지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더욱 신기한 것은 날이 가면 갈수록 털이 많아진다는 것이고, 체력이나 상처를 회복하는 정도가 거의 트롤 급에 버금간다는 것이었다.

"이틀 후면 사절단이 출발하게 될 터, 제가 그때 이자를 포박하여 펠타온 제국까지 데려가겠습니다. 우리 왕국의 힘만으로는 해결될 일이 아닌 듯싶습니다."

"그렇군요."

펠타온은 대륙의 두 개밖에 없는 제국 중 하나였으니 어쩌면 해결법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번 일이 슈레이더 왕국에만 일어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지금쯤이면 펠타온 제국도 어느 정도 눈치를 채고, 정보를 모으며 해결법을 찾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

"알았어요. 어쨌든 왕국에 있는 동안은 제가 궁정마법사와 상의해서 이야기를 나눠 보도록 하겠어요. 로엔그람 후작과 에반 경은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어요. 쉬도록 하세요."

"명을 받듭니다, 전하."

이안과 에반은 거의 동시에 대답하며 일어나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때, 카이어스가 다시 그들을 붙잡았다.

"잠깐만요. 로엔그람 후작, 오늘은 그대의 작위계승식과 파티가 있을 거예요. 참석할 예정이죠?"

"물론입니다. 이번 기회로 귀족들과 안면을 트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테니……."

이안은 다른 귀족들과 안면을 튼 사이가 아니었다. 아는 귀족이라고는 베리카 백작뿐이었으니 말이다.

"알았어요. 가 보도록 해요, 후작."

"그럼."

이안은 에반과 함께 대전을 나간 뒤에도 잰걸음으로 자신들의 방으로 돌아갔다.

"에반."

"예, 마스터."

에반은 조금은 수척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확실히 이안은 보름을 안 자도 피곤하지 않지만, 에반은 아니었다.

"여독이 풀리지 않은 모양이군. 가서 자 보도록 해라. 적당한 시간대가 되면 연회장으로 오거라."

"알았습니다, 마스터."

* * *

화려한 조명들.

수많은 음유시인들의 노랫가락과 악공들의 악기 소리는 파티장의 흥을 몇 배나 돋워 주었다.

반국왕파가 사라지면서 새로운 귀족들이 많아졌다. 그들은 서로 얼굴을 익히기가 바빴다. 특히 힘 있는 귀족들 위주로 파벌이 만들어지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들 이외에 젊은 귀족 자제들은 파티를 사교회로 일삼아 여러 레이디나 멋진 남성에게 춤을 신청하며 순수하게 즐기는 것에 푹 빠졌다.

그중에서 특이하게 한 여성이 모든 남성들의 춤을 거절했다. 남성들의 얼굴이 매우 준수함에는 말할 것도 없었다.

하나 그녀 앞에서는 모든 남성들이 춤을 거절당해 거의 우는 낯짝으로 등을 돌리며 사라졌다. 어떤 자는 거의 애걸복걸하는 정도로 부탁했으나 그 여인은 똑 부러지게 거절했다.

"미안해요. 파트너가 있어서……."

하지만 그녀에게 파트너가 있다는 말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다름 아닌 로이니스.

슈레이더 왕국에 있어 그녀만큼 아름다운 존재는 드물었다. 특히 그녀의 배경에 베리카 백작이 있다는 것도 한몫했다.

그녀는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달아 놓은 여러 영롱한 보석들이 그녀의 미모와 함께 활짝 빛났다. 윤기가 흐르는 긴 생머리는 허리까지 왔고, 적당한 키, 그리고 들어갈 데는 들어가고 나올 곳은 나온 그녀의 실루엣은 보는 이로 하여금 다시는 기억 속에서 잊혀지지 않을 모습이었다.

"아……."

그녀의 붉은 입술이 열렸다.

그녀는 진심으로 한탄했다.

아무리 이렇게 예쁘게 화장을 하고 곱게 차려입고 나와도 그는 자신에게 한 번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에게 이별을 이야기한 사내.

하지만 그 사내를 아직도 잊지 못한 자신의 아픈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벌써…… 후작인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볼품없는 한 지방 귀족의 기사단의 부단장.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도 않았건만, 백작에 후작까지.

이제는 감히 넘볼 수도 없는 사내가 되고 말았다.

'이안…….'

이안은 여러 귀족들에게 둘러싸여 가볍게 인사를 나눴다. 하지만 파벌을 생성한 이름 있는 귀족들조차 이안 앞에서는 어린아이 수준이었다. 자신들의 딸을 앞으로 내밀며 이안과 어떻게 해서든 친분을 쌓으려 노력했다.

그렇게 되다 보니 이안의 주위에만 해도 화장을 곱게 한 여인들만 열 명이 넘는 지경.

그렇게 많은 레이디들을 내버려 두고 귀족들은 저 홀로 웃으며 사라졌다. 옆에 묵묵히 이안을 수행하던 에반은 코를 자극하는 여인들의 향수 냄새에 머리가 아찔한 지경이었다.

특히 몇 시간 잠으로 여독이 풀릴 정도가 아니었기 때문에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안은 그의 모습을 안쓰럽게 쳐다보더니 짧게 전음으로 입을 열었다. 아니, 입을 열지 않았다. 이미 이안의 경지는 입을 열지 않아도 전음을 보낼 수 있었다.

"에반, 쉬고 싶으면 쉬어라. 어차피 이틀 후면 사절단이 출발할 터. 그때까지 푹 쉬도록 해라."

"하, 하지만 마스터……."

"아니, 됐다. 왕궁에 있는데 감히 누가 나를 건드리겠느냐? 소임을 다하고 싶으면 왕궁 내에서가 아니라 사절단이 출발하고서부터 제대로 하거라."

"휴∼ 알았습니다, 마스터."

에반은 짧게 한숨을 쉬며 터벅터벅 연회장을 걸어 나갔다. 에반이 사라지자, 눈치만 보던 여인들이 곧바로 이안의 옆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눈싸움이 일어났다.

그중에서도 한 여인이 이안의 옆 자리를 쏙 빼고 들어오며 짧게 눈웃음을 쳤다.

"호호, 안녕하세요, 후작님."

"아……!"

이안은 그녀의 얼굴을 보며 참으로 감탄해야 했다. 그녀의 미모가 빼어난 것 때문에 감탄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바짝 다가오자, 목과 얼굴의 피부색이 약간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까이서, 그것도 육감이 뛰어난 이안이 아니라면 그 누구라도 절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역용술의 일종인가? 엄청난 수준이로군!'

이안은 식은땀이 흘러나왔다. 순간적으로 손이 검의 그립 부분을 쥐었다. 만약 그녀가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면 역용술을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없었을 터였다.

그녀가 불순한 마음을 가지고 이안을 해하려 했다면 충분히 심장에 검을 꽂아 넣을 수 있었을 터.

이안은 왕궁 내라고 방심하고 있던 것을 느끼며 은밀히 내공을 끌어올려 몸을 보호했다.

위험의 인물이라고 생각했던 그 여인은 이안의 손을 잡더니, 작은 종이 뭉치 하나를 주고 바람같이 사라졌다.

이안은 그 종이 뭉치를 펴 보자 예상외의 인물이 쓴 편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호호! 다시 만나서 반가운걸? 시간이 나면 앞쪽 정원 쪽으로 나와 주겠어? 찾아갈 테니까. 그리고 나랑 같이 오신 분이 계셔. 방심하지 않도록 해. 호호호!

―루시

'루시? 왜 그녀가…….'

헤어졌을 때도 별로 좋은 모습을 보여 준 것도 아니었다. 이안은 루시의 모습에 살짝 미소를 흘렸다.

'따분했는데 잘됐군.'

이유를 모르면 찾아가 보면 알 터.

이안은 자신을 향해 열렬히 러브콜을 보내는 여인들에게 살짝 인사를 하며 곧바로 연회장을 나왔다.

이안은 정원으로 나와서 살짝 살기를 주변으로 흩뿌렸다. 이 정도의 반응이라면 충분히 루시가 자신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과연, 이안의 생각대로 역용술을 풀고 나타난 루시의 모습이 보였다.

"어머? 이거 생각보다 더 잘나졌는걸. 다시 봐야겠어?"

"그것보다 만나자고 한 이유나 말해. 그리고 너랑 같이 오신 분이라니, 누구를 가리키는 거야?"

"우리 아버지."

"아버지?"

이안의 표정이 살짝 찌푸려졌다.

루시의 아버지라면 쉐도우 로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이안은 루시를 지그시 바라보며 물었다.

"주변에 있겠지?"

"물론."

이안은 내공을 풀어 버렸다. 육감이 극대화가 되더니 주변 풀숲의 애벌레 소리마저 잡아냈다.

'소리도 없고 기척도 없다. 완벽하군. 과연 쉐도우 로드라 불릴 만해. 하지만…….'

이안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루시는 설마 하는 표정으로 경악했다.

이안이 빤히 바라보고 있는 곳.

북서쪽으로 100미터 떨어진 나무 위. 이안의 눈은 그곳을 정확히 짚어 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어둠과 동화된 쉐도우 로드가 있었다.

이안의 눈이 옆으로 돌아갔다.

쉐도우 로드가 움직인 것이다.

'빠르다.'

이안은 오른쪽 발을 슬쩍 들어 올렸다.

펑!

땅이 터졌다. 그곳에 작은 표창 하나가 박혀 있었다. 결코 표창 하나로 낼 수 없는 위력이었다.

하지만 표창 이외에는 해냈다고 볼 수 있는 것이 아무도 없었다.

이안의 표정이 점차 굳어졌다.

표창의 위력 때문이 아니다. 쉐도우 로드가 시야 속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감각 속에서도 사라졌다.

'이런……!'

화경과 현경의 사이.

이안의 경지는 그러했건만, 어찌 된 일인지 쉐도우 로드의 기척을 잡아낼 수가 없었다.

'과연 은신법에서는 최고라 이건가! 이거 완전 중원에서도 보기 어려운 실력자로군. 가히 신투라고 해도 이 정도는 아닐 거야.'

이안은 로열을 서서히 빼 들었다.

그리고 그 자세로 빠르게 휘두르자 표창 두 개가 검에 튕겨 맞고 날아갔다.

"놀랍군."

허공에서 낯선 음성이 들려왔다. 이안은 허공을 쳐다봤다. 그곳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허공에 말이다.

이안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허공답보란 말인가? 이곳에 그 정도의 경지에 든 자가 있었단 말인가? 아니, 대륙십강이라 해도 불가능할 거라 생각했건만.'

그 남자는 서서히 지상으로 내려왔다. 루시가 옆에 서 있다가 말했다.

"우리 아버지셔."

이안은 그를 바라봤다.

그의 눈에서는 그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아무 감정도, 아무 기운도, 그 어떤 것도 그 남자에게서는 알 수 없었다.

오로지 쉐도우 로드라는 것.

루시가 아버지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그의 성별이 남자라는 것조차도 의심했어야 할 판이었다.

"저를 이곳에 부른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있지. 이름 로엔그람 폰 이안. 출생지 불문, 나이 불문, 그의 이름은 그것이 본명인지 불문. 현재 경지 소드 마스터 상급에서 최상급 사이로 판단됨. 하지만 이것도 불문, 아직 본신의 힘을 모조리 드러내 본 적이 없음. 확실한 것은 그가 인간이라는 점과 성별이 남자라는 것, 그리고 라인하르트 황태자라는 것. 이 세 가지뿐이로군."

"……."

한 가지 틀린 것이 있지만 이안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아군도 아닌 자에게 자신의 경지를 알려 줄 필요는 없었다.

"아, 한 가지 더 있었지. 과거 라인하르트 초대 황제의 무덤에서 검술서에 필요한 알케미온의 피를 홀라당 털어먹은 놈. 덕분에 반쪽짜리 검술서만 익힌 내가 고생 좀 하게 됐지."

"제 뒤를 캐고 다니셨군요."

"내가 모르는 정보라는 것이 바로 자네야, 자네. 출생지 불문, 나이 불문, 이름조차도 불문. 길드에서 자네의 이름을 사 가는 자들이 많긴 하지만, 이 정도의 정보로는 별로 내키지 않아 하더군."

"내 정보를 사 가는 사람이 있다고요?"

"적어도. 하루에 몇 개꼴로는 나가지. 길드 차원에서 이건 비밀이야. 누가 사 가는지는 알려 줄 수 없다고."

이안은 입맛을 다셨다.

사절단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이름이 알려지는 것이 썩 나쁘지는 않지만, 프라스 제국의 귀족들이 경계한다면 그렇게 좋은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저에게 찾아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어려운 발걸음까지 하시면서 말입니다."

"자네가 그저 보고 싶었을 뿐이야. 어떤 자인지 말일세. 드래곤의 피를 꿀꺽했으니, 다시 토해 내라고 할 수도 없고. 자네는 내가 가지고 있다고 하는 반쪽짜리 검술이 가지고 싶지 않나?"

"그렇지 않다면요?"

"방금 자네가 내 위치를 찾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더군. 상당히 대단했어. 대륙십강 중 한 명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라도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었는데."

이안은 침을 삼켰다.

방금 그것을 생각하면 식은땀이 흘렀다.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검술의 이름은 디멘션 소드. 공간과 차원을 가르는 검술이지. 억울하게도 살수인 내게는 어울리지도 않아. 게다가 알케미온의 피가 없는 이상 이 이상의 능력을 끌어올리는 것도 어렵고."

"전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가 안 갑니다만?"

쉐도우 로드는 너털웃음을 토해 냈다.

"하하! 자네가 원한다면 검술을 주지. 그리고 자네에게 필요한 정보 하나도 말이야. 사절단에 관련된 이야기지."

사절단에 관련된 이야기라고 하니 조금 관심이 생겼다.

"공짜는 아닌 것 같습니다만?"

"흐흐! 당연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전에도 루시의 목숨을 살려 준 보답도 있고 하니 좋은 조건이야. 나와 싸워 주게. 그래서 이긴다면 아까 내가 말한 조건을 다 들어주지."

"제가 지면?"

쉐도우 로드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한참 후에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불문으로 말했던 그 정보를 말해 주면 되는 걸세."

"내기를 거절한다면?"

사절단이 끌리긴 하지만 그렇다고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었다. 이안은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것만큼은 감추고 싶은 비밀이었다.

"얼마 전에 '어떤 귀족'의 자금줄을 끊어 달라는 의뢰가 하나 들어왔지. 그 의뢰를 승낙하는 것이지 더 뭐가 있겠는가. 허허!"

웃는 얼굴이 너무도 호탕해 보였다.

'어떤 귀족'이라는 말을 힘 있게 말하였다.

그에 반해 이안의 얼굴은 와락 구겨졌다.

현재 자신의 영지에서 있어 자금줄이 무엇이 있겠는가.

바로 로엔그람 상단.

그 상단을 끊어 버리려는 의도였다. 더욱더 나아가 어쩌면 세리아를 죽일 수도 있는 문제였다. 세리아가 있기 때문에 그 상단이 급속도로 커졌기 때문이다.

으득!

이안이 어금니를 깨물었다.

"한 가지 더 조건을 붙여도 됩니까?"

흥미가 생긴 쉐도우 로드가 물었다.

"어떤 것으로?"

"이기는 조건은 둘 중 하나가 항복을 선언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만약 제가 이겼을 경우 제 상단이나 영지에 관한, 혹은 저에 관한 모든 정보, 의뢰를 받지 마십시오."

"그렇다면 내가 얻는 것이 무엇인데?"

"어쌔신이시잖습니까? 몸을 숨길 시간 1분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 정도라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만."

쉐도우 로드는 당장에 승낙했다.

"좋아! 그럼, 언제 싸워 보겠는가?"

"지금 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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