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인하르트-35화 (35/60)

■ 제35장 최대 결전 □

이안의 군대는 아주 무서운 속도로 헤일론 군을 토벌하기 시작했다. 총 다섯 개의 성 중 네 개는 이안의 군대를 막기에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다섯 곳 중에서 두 곳은 무혈입성까지 했으며 두 곳은 간단한 전법으로도 점령할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쉬웠다.

다그닥, 다그닥…….

푸히힝!

말고삐를 당기자 말이 걸음을 멈추었다.

휘이이잉∼!

황무지가 펼쳐진 이곳.

모래가 섞인 바람이 불어 시야를 가리는 이곳.

"프로시안 영지……."

5천의 군대를 끌고 온 총지휘관의 입에서 씁쓸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만약 세리아가 있었다면 꼭 이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을 텐데……."

정보가 빠른 상인들이라면 벌써 이 정도의 소식은 듣고도 남았을 테지만, 지금 당장 달려오고 싶음을 참고 있는 것이 눈에 훤하게 그려졌다.

"레더린."

"옛!"

뒤에서 장년인이 말을 끌고 다가왔다.

"오늘 이곳에 숙영지를 만든다. 그리고 레더린만 날 따라온다. 적 성주를 봐야겠다."

"알았습니다."

"에반도 날 따라와라."

"옙!"

에반은 그전에 있었던 일 이후로 완전히 이안을 따르게 되었다.

포부도 있고 배짱도 두둑한 것이 이안의 마음에 쏙 들었다.

프로시안 외성을 50미터 앞둔 곳에서 이안의 말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잘못하면 궁수들의 화살에 고슴도치가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지만, 이안은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왔음을 적에게 알려라."

"충!"

에반이 앞으로 한 발자국 걸어가더니 잠시 후 크게 숨을 몰아쉬며 전방 성을 향해 내포되어 있던 모든 에너지를 내뱉었다.

"헤일론의 개새끼들아! 뒤꽁무니만 내빼지 말고 용기가 있다면 나와라! 이분이 바로 로엔그람 백작님이시다!"

"풋!"

이안은 실소를 머금었고, 레더린은 하얗게 질렸다.

초반부터 적에게 이런 적의를 심어 줄 줄 알았겠는가?

하지만 이미 노성은 내질러졌고, 귀가 있는 이상 프로시안의 기사들은 들을 수밖에 없었다.

"네 이놈! 감히 뚫린 입이라고 지껄이느냐!"

기사들의 노한 소리가 귀에 빤히 들렸지만, 에반은 그들의 말을 무시하고 다시 한 번 크게 소리를 내질렀다.

"잔챙이들은 필요 없다. 자신을 키워 준 국왕 전하를 배신한 역적 놈 헤일론은 당장 앞으로 나와 로엔그람 백작 각하의 검을 받들라!"

"저, 저놈이!"

자존심을 땅바닥에 곤두박질칠 만한 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사들은 서로 눈치만 볼 뿐 나가는 이가 없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에반이 풍기는 기도가 생각보다 대단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로엔그람 백작이라면 그 누구도 모르는 이가 없었다.

제정신이 아닌 이상에야 왕국 최고의 기사인 로엔그람 백작에게 검을 들이밀게 될 것이었다.

"다시 한 번 할까요?"

에반이 재차 물어 오자 이안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짝 돌렸다.

"아니, 그만 됐다."

성안에 있던 '개새끼'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하긴 성을 네 개나 박살 내고 왔으니 꿈틀거리지 않으면 그것이 진정 지렁이만도 못한 존재일 테니까.

"흠!"

성벽 위로 나타난 헤일론 백작이 풍기는 살기에 에반의 얼굴이 굳어졌다. 뿐만 아니었다. 마스터 중급의 실력자인 레더린도 인상을 찌푸리며 검집에 손을 올려놓았다.

이안과 헤일론 백작은 서로를 마주 보더니 입가에 씨익 웃음을 지었다.

"강해졌군."

이안의 입에서 흘러나온 칭찬이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헤일론 백작의 기도나 마나가 급격히 강해졌다. 뭔가 깨달음을 얻어 성장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단기간에 이렇게 성장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현재 헤일론 백작의 힘은 이안마저도 두려움을 느끼기에는 충분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우리 마당에 들어온 벌레 한 마리 잡기 위해서는 강해져야겠지."

헤일론 백작이 이죽거렸다. 그의 눈가로 붉은 안광이 번뜩이자, 이안의 심장이 갑자기 빨라지기 시작했다.

'뭐, 뭐지?'

우우우웅!

로열이 검집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 흔들거렸다. 이안은 마음을 다잡으며 헤일론 백작을 노려봤다.

'마나가 아니다!'

헤일론 백작에 감도는 기운은 마나의 기운이 아니었다.

그것보다 더한 답답한 기분이 드는…….

이안은 이런 기분을 느껴 본 적이 있었다. 중원에 있을 때 사파의 심공을 익힌 자들이나 마교, 혹은 혈파의 사람들 같은 느낌이었다.

'이 시대에는 심법이 없다. 더군다나 중원의 심법을 저 녀석이 익혔을 리가 없다. 그렇지만 이 마기는 대체 무엇인가?'

이안은 담담한 듯 말했다.

"벌레 한 마리치고는 공을 많이 들이는군."

"그 벌레 한 마리가 공든 탑을 부쉈으니 만만하게 볼 상대는 아니더군."

"아, 그랬나? 공든 탑치고는 하도 쉽게 무너지기에 토성인 줄 착각하고 있었군."

"흥! 마음대로 지껄여 봐라. 얼마나 지껄일 수 있을지 두고 보겠다."

이안도 살기에 맞서며 말했다.

"좋을 대로."

이안은 에반과 레더린을 바라보며 말했다.

"돌아가자."

"옛!"

* * *

"프로시안은 그간 수십 년이 넘도록 두꺼운 외성을 바탕으로 몬스터들과 혈전을 치른 성입니다. 성의 견고하기만을 따지고 본다면 대륙 그 어디의 성이라 해도 프로시안에 비할 바가 되지 못합니다."

성을 빼앗기기 전이라면 기분 좋은 칭찬으로 들릴지 모르나 지금은 반대의 상황이었다. 이안의 토벌대는 프로시안의 두꺼운 외성을 뚫고 헤일론의 목을 따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들이 수성으로 버틴다면 공성을 하는 저희 입장에서는 아무리 드워프들의 무기와 방어구들로 장비를 하고 있다 한들 함락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약점은 알아봤겠지?"

찰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프로시안이 아무리 견고한다 한들 내부에서 폭발하면 버틸 수 없습니다. 현재 고립되어 있는 헤일론을 에워싸 놓고 있다면 얼마 후 식량 부족으로 지들이 알아서 기어 나올 것임을 확신합니다."

하지만 이안에게도 시간이 없기는 매한가지.

이제 열흘 정도 후면 이안은 수도 아르텔로 가서 펠타온 제국으로 떠나는 사절단을 이끌어야 했다.

"또 다른 건?"

"다른 하나는 모든 이를 살려 주는 대가로 헤일론에게 협상을 하는 겁니다."

분명 맹장이라면 그 협상에 응할지도 모른다. 아무리 봐도 자신들은 불리한 상황이었고, 자신의 목숨만 바친다면 모든 이들을 살려 줄 수 있는 조건은 떨쳐 버릴 수 없는 유혹이었다.

하지만 이안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놈이 그럴 것 같지는 않단 말이야."

"후후!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또 다른 건 없나?"

"프로시안은 인간과의 싸움을 위한 것이 아닌 몬스터와의 싸움을 위주로 지어진 성입니다. 그렇다 보니 여기저기에 인간들이 드나들 수 있는 비밀 통로가 있습니다. 그곳을 통하여 들어간다면 손쉽게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비밀 통로는 파악해 두었겠지?"

"프로시안은 총 다섯 개의 비밀 통로가 있습니다. 세 개는 외성 안으로, 두 개는 내성 안으로 잠입할 수 있습니다."

"오늘 밤, 각각 병사 이백 명을 보낸다. 준비해라."

찰트는 짧게 웃었다.

"이미 준비해 뒀습니다. 아, 영주님께서도 가실 것입니까?"

혹시나 해서 묻는 것이다.

"그래. 하지만 그전에 할 일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 감히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후후! 그때 가 보면 알게 될 것이다."

이안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조용히 분노를 드러내면서.

대대적으로 로엔그람 영지의 가신인 드라이너.

가신들 중에서도 나이도 제일 많았기 때문인지 수장 역할을 매년 맡아 오고 있는 자였다.

그런 그가 이번 전쟁에 출범한 가신들을 몽땅 불러 모아 입을 열었다. 물론 기사들도 영주의 가신이긴 하지만 그들은 충성심으로 앞뒤가 꽉 막혀 이야기가 통하는 구석이 없었기에 애초에 부르지도 않았다.

그렇게 해서 모인 것이 다섯 명.

지금 현 로엔그람 영지의 영주인 이안이 취임하기 전부터 꾸준히 전대 영주를 받들며 일해 온 자들이었다. 하나 전 로엔그람 자작 영주가 죽고 나자 영지를 운영하게 된 그들은 권력을 누리게 되었다.

가신들이 귀족 행세를 했으니 어떻게 되었겠는가.

그랬다.

권력에 취해 돈에 물들었지만 이안이 취임하고 나자 그 권력도 돈도 모두 빼앗기게 된 일이었다.

"현 영주에게는 자식이 없소. 그가 죽는다면 단연코 영지는 국왕 전하께서 다시 회수해 가실 것이오."

이안은 그 대에서 끝나는 단승제 귀족이 아니었다. 하나 자식이 없는 귀족이라면 그가 죽고 나서 친척이나 부인이 가지게 될 테지만 그것도 없다면 왕이 다시 영지를 회수해 갔다.

"물론 부인도 친척도 없소. 있는 것은 오로지 병사들과 기사들뿐이지."

드라이너의 말에 다른 가신이 물었다.

"말씀은 잘 알았습니다. 허나 그는 지금 왕국에서 제일 유명한 소드 마스터입니다. 그가 죽는다면 문제가 생길 소지가 있다고 봅니다만?"

마스터가 죽으면 국력이 약해지는 것은 당연했다. 아무리 자신들이 권력욕에 빠졌다고 한들 국력이 약해지는 것은 한 영지의 가신으로서 원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 나라에는 마스터란 존재가 없었다가 얼마 전에 갑자기 나타났소. 우린 그저 그전 생활로 돌아가는 걸 원할 뿐이지."

"또 있습니다. 소드 마스터인 그를 죽이기에는 암살자들도 꺼려 합니다."

마스터들도 암살할 수 있다는 블랙 머플러가 아니면 엄두도 내지 못한다. 하나 블랙 머플러를 개입시킨다고 해도 막대한 고용비가 문제였다.

게다가 이미 블랙 머플러는 이안에 대한 암살을 한 번 실패한 이후로는 마스터를 암살하는 일에 점점 더 신중해졌다.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소. 여기 그 문제를 해결해 줄 분이 찾아오셨소."

가신들과의 대화에 누군가 끼어든 것은 처음이었다. 드라이너가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그간 어둠 속에 묻혀 있던 이가 후드를 벗어젖히며 인사를 올렸다.

"안녕하십니까? 헤일론 백작 각하의 부관인 이든이라 합니다."

"……!"

"드, 드라이너 수장님! 지금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우리들의 문제에 헤일론 백작 사람을 불러들이다니. 그것도 지금 토벌 전쟁에 있어서 말입니다."

이 일이 만약 발각되기라도 한다면 즉각 참형을 면하기 어려웠다. 그것도 모자라 삼족이 멸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벌써부터 간이 작은 자들은 벌벌 떨기 시작했다. 혹시 누군가 올지 몰라 연신 불안해 하며 고개를 양쪽으로 돌렸다.

부관 이든은 그런 이들을 진정시켰다.

"걱정 마시지요. 누군가 있다면 진즉에 저희들이 알았을 겁니다. 음…… 방금 이야기는 잘 들었습니다. 로엔그람 백작을 죽이고 싶은 것은 저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소. 아무리 적이라고 한들 그건 영주가 혼자 결정한 문제에 불과하오. 흥! 가신들과의 얘기도 없이 혼자 헤일론 백작님을 적으로 돌리다니……. 어차피 우리와 당신의 목적은 같으니 적이라고 할 수도 없을 것 같소이다."

엄연히 국왕의 명에 항명하겠다는 의미도 비쳤다. 이안이 헤일론 백작을 토벌하려는 이유는 복수 때문만은 아니었다.

왕국의 기사로서, 귀족으로서 역적을 몰아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여러분들과 만나기 전에 드라이너 님과 짧게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로엔그람 백작이 비밀 통로를 통해 오늘 밤에 야습 작전을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더군요."

"그렇소. 그것 때문에 지금 바깥이 말이 아니오. 돌아갈 때 조심하시길 바라오."

이든은 염려 말라는 듯 손을 저었다.

"후후! 걱정 마십시오. 실력 좋은 기사들과 함께 왔으니 웬만해서는 들킬 일이 없을 겁니다. 아, 그리고 여러분들 중 저와 뜻을 같이해 주실 분들은 지금 얘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희 헤일론 백작 각하께서는 은혜를 절대 저버리지 않으십니다."

가신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갈등에 빠졌다. 지금 헤일론 백작은 왕국에서도 토벌 대상 1위로 점 찍힌 자였다. 그를 따라서는 하등 미래가 보장될 리가 없었다.

그때, 드라이너가 탁자를 쿵 하고 쳤다.

"어차피 이러나저러나 똑같을 뿐이오! 그럴 바엔 헤일론 백작님을 믿어 보는 게 어떻소!"

그의 말이 효과가 있었는지 가신들이 주춤주춤 손을 들기 시작했다.

"난 헤일론 백작님께 충성을 맹세하겠소."

"나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전원이 충성을 맹세하자 이든이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정말 환영합니다, 가신 여러분."

* * *

"제론이라 합니다, 백작 각하."

제론은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젊은이였는데, 3서클 유저 급에 오른 마법사였다. 시원한 금발 머리와 파란 눈동자는 보는 이로 하여금 기분 좋은 미소가 절로 나오게 만들었다.

이안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제론은 찰트의 많은 제자 중 하나였다. 그중에서도 재능이 특출하다 보니 수제자로서 많이 아끼고 있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시길, 프로시안 영지의 비밀 통로로 통하는 길에 트랩이 설치되어 있으니 마법사를 동행하라 하셨습니다."

"그렇군. 준비됐으면 어서 가도록 하자."

"옛!"

이안이 정한 곳은 바로 내성의 본관이었다. 레더린 또한 내성에서도 본관과는 좀 떨어진 곳으로 이안의 부대를 극비리에 보호하는 부대였다.

처음에 외성으로 잠입한 병사 600명이 소란을 피우고, 그곳으로 집중이 가면 내성으로 잠입한 이안이 곧바로 성주를 암살하고 도주하는 양동 작전이었다.

외성에서도 1킬로미터는 동떨어진 황무지의 바위들 사이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니 시원한 바람이 부는 동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법 넓군."

장정 20명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도 될 정도의 거리는 되었다. 이안은 만약에 생길 난전을 대비해 경계의 눈초리를 사방으로 뿌리며 로열을 빼 들었다.

"어둡다. 제론, 불 켜."

"옛! 빛나는 마나의 힘이여! 라이트."

이안의 시야에서는 문제가 없지만, 아직 익스퍼트에 오르지 못한 병사들에게는 무리가 따랐다. 잠시 후, 전방 10미터를 무리 없이 쳐다볼 수 없는 빛의 구슬 두 개가 주위를 둥둥 떠다녔다.

그렇게 얼마쯤 걸었을까.

외성의 안쪽으로 들어왔다고 생각했을 때, 제론이 손을 위로 올렸다.

"백작 각하, 이 앞으로 트랩들이 설치되어 있는 듯합니다."

"푸는 데 소요되는 시간은?"

"5분, 아니 3분이면 충분합니다."

"알았다."

제론이 기도를 하는 자세로 주문을 외우자, 곧바로 마나들이 재배열되는 것과 동시에 빛이 한동안 동굴을 메웠다. 그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는 것을 보니, 상당히 무리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죄송합니다, 백작 각하. 상당히 고클래스의 트랩들이라 해제하는 데 시간이 제법 소요될 듯합니다."

"아니다. 시간은 많다."

"예?"

"아무 말도 아니다."

이안은 제론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을 짓는데도 불구하고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웃었다.

그의 뛰어난 청각 덕분에 똑똑하게 들렸다. 바닥을 재빠르게 달리며 사라지는 소리들. 그리고 무기를 점검하는 병사들의 움직임들이 세세하게 말이다.

"이제 모두 해제되었습니다, 백작 각하."

"수고했다."

제론은 로브가 전부 젖을 정도로 식은땀을 흘렸음에도 불구하고 이안의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에 힘든 내색 없이 고개를 구십도 가까이 숙였다.

'찰트가 훌륭한 제자를 뒀군.'

주인과의 충복 관계는 확실하다. 이안은 만족스런 웃음을 지으며 앞으로 걸어갔다. 제론은 혹시 트랩들이 해제된 것이 아닌가 하고 염려하고 있다가 이안이 무리 없이 지나가자 재빨리 뒤를 따라왔다.

하지만 거의 20분에 한 번꼴로 트랩들을 만나자 이안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꼭 이렇게 트랩들을 해제하며 가야 하나?"

"예전만 해도 트랩들을 피해 가는 통로가 따로 있긴 했습니다만, 프로시안 남작이 과거 헤일론 백작과 전투 중에 모두 붕괴시켰다 합니다."

"알았다."

이번에도 제론은 힘겨운 기색을 띠며 트랩들을 해제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이안의 눈썹은 계속해서 꿈틀거렸다.

'벌써 시작됐군.'

병사들의 움직임이 더욱 빨라졌다. 가끔씩 비명 소리도 들리는 것을 보면, 병사들이 난전에 휩싸인 것이 확실했다.

"모두…… 해제했습니다."

"힘든 것 같군."

"괜찮습니다, 백작 각하."

"여기서 쉬어도 좋다."

"아닙니다. 앞에 트랩이 있으면 또……."

"음……."

하지만 제론의 기색을 봤을 때 또다시 트랩이 나온다면 그것을 해제할 수 있다고 보기 어려웠다. 제론은 이미 3서클에 해당되는 마나를 모두 소모한 뒤였다. 마나를 채우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어 시간은 소비해야 할 터인데, 이안에겐 그런 시간이 없었다.

'생각보다 트랩이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군.'

"알았다. 에반, 제론을 부축해 줘라."

"알았습니다, 마스터."

에반은 출발하기 전 이안에게 주종 관계를 서약했기 때문인지, 이안에게 마스터란 칭호를 붙이고 있었다. 여인의 허리 같은 양 팔뚝을 벌리며 제론을 안아 올리자 제론은 마치 여인이 된 것처럼 가냘파 보였다.

"배, 백작 각하, 트, 트랩은 어찌하실 것입니까?"

"제거한다."

"……."

"이곳이 맞습니까?"

이든의 물음에 드라이너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몇 번이고 확인하였소. 로엔그람 백작이 나오면 한순간에 덮치시오. 아무리 그가 방심한 틈을 타고 있다고 한들 소드 마스터요. 호락호락 당하지는 않을 것 같소."

"걱정 마십시오. 이곳에 저희 영지 기사들 반이 모였습니다. 설사 상대가 그랜드 소드 마스터가 된다고 해도 버텨 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이든에게는 묘한 자신감이 있었다. 모인 익스퍼트 급 기사들만 도합 수십 명이다. 그리고 방패병들의 뒤에는 철제로 만든 화살을 시위에 건 궁수 200여 명이 모여 있었다. 드워프 방어구를 견제한 화살이었다.

그 말대로 그랜드 마스터라고 한들 버텨 내기에는 쉬워 보이지 않았다.

"으으……."

그때 한 병사가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떨더니 주위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왜 그래?"

옆에 있던 병사가 묻자, 그 병사는 양팔로 자신의 몸을 꽈악 껴안더니 이빨을 딱딱거렸다.

"추워진 것 같지 않아?"

"아니, 잘 모르겠는데?"

"그런가?"

"흐흐! 이 양반아, 그러게 밤에 무슨 짓을 한 거야?"

"아니, 아무것……."

착각이라고 생각한 나머지 손을 내린 병사가 갑자기 입을 떠억 벌렸다.

콰아아앙!

정확히 그들이 밟고 있던 땅이 잘게 부서지며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그 구멍 속으로 한 명의 사람이 뛰어내렸다.

한음지기를 이용한 트랩 파괴법.

그랬다. 그는 트랩을 무식한 내공의 힘으로 철저하게 박살 내고 와 버린 것이다. 그만큼 효과도 톡톡히 볼 수 있었다. 제론이 없는 상황에서도 그는 트랩을 파괴할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이안은 주위를 힐끔 쳐다보더니 드라이너의 눈과 마주쳤다.

"출병 직전에 얼굴 좀 보려고 했더니, 역시 여기에 와서 꼬리를 말고 기대고 있었나?"

드라이너는 주먹을 부들부들 떨더니 노한 듯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으으……. 닥쳐라, 이놈! 이 모든 일이 네놈 때문에 생긴 일임을 모른다는 것이냐? 네놈만 없었다 해도 난 너에게 이런 감정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미래가 보이지도 않는 헤일론에게 붙었나?"

"이놈! 네놈이 그분을 욕할 자격은 없다. 지금 용서를 빈다고 해도 널 용서하실 분이 아니다! 이보시오, 어서 썩 저놈을 죽여 버리도록 하시오."

드라이너가 이든을 보고 외치자, 이든이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흐흐, 그럽시다. 여봐라, 앞에 있는 놈의 목을 성주님께 바쳐야겠다! 공격하라!"

기사들 50여 명이 순식간에 이안을 덮쳤다. 하지만 이안의 움직임이 익스퍼트 급 기사들에게 잡힐 리가 없었다. 허공으로 5미터 가까이 뛰어오른 이안이 로열에 마나를 응축하더니 전방으로 마구 쏘아 내기 시작했다.

쾅쾅쾅쾅쾅!

"크아아악!"

"아아아악! 이 개, 개자식!"

결코 기사들이 아니었다. 물론 그 공격에 기사들이 딸려 들어가 죽거나 상처를 입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안이 철저하게 죽이려는 자는 모두 방패병과 궁수들이었다. 멍하니 있던 궁수와 방패병들은 제대로 된 공격 한 번 해 보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

"이, 이익! 어서 저놈을 죽이거라. 뭐 하는 것이냐!"

하지만 기사들에게 용빼는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고, 간간이 오러를 이안이 떠 있는 허공으로 날려 보내긴 했지만 모두 호신강기에 가로막혀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이안의 다리가 땅에 내려오자, 기사들이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 득달같이 달려 들어왔다.

"공격하라!"

"놈, 어서 내 검을 받아라!"

짧은 순간.

이안의 검이 허공에서 잠시 획을 하나 긋자, 5미터에 이르는 오러 블레이드가 솟아오르더니 기사들을 무참히 도륙하기 시작했다.

슈슈슈슉!

촤악! 촤아아악!

"으아아아악!"

거의 손도 못 써 보고 죽어 버리는 기사들의 한심함에 이든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설마 소드 마스터가 이리 강대할 줄은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이안은 전신(戰神)이었다.

그의 검에 인 오러 블레이드의 길이는 자유자재로 움직였고, 그의 움직임은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이, 이런!"

기사 오십여 명 정도가 순식간에 도륙당하자 이든은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병사들도 몸을 벌벌 떨며 이안을 두려운 눈빛으로 쳐다봤다.

"우와아아아!"

이안이 올라왔던 구멍으로 그제야 병사들 200여 명이 물밀듯이 뛰쳐나오며 그나마 남은 병사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고작 단 한 사람에 의해 도륙당하는 것을 눈으로 보고 있던 병사들은 이미 사기를 잃고 이안의 군대에 의해 곧바로 참패를 당해야 했다.

"으으……! 이, 이게 어찌 된 일이오! 자신 있다 하지 않았소?"

드라이너는 원망스런 눈길로 이든을 바라봤다.

드라이너뿐만 아니라 이든을 따르기로 한 가신들 모두가 그를 원망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쳐다볼 뿐이었다.

"이, 이럴 리가 없는데……! 어, 어째서 왜, 이기지 못한단 말인가?"

"으득! 어찌할 것이오! 저, 저자가 다가오고 있소!"

"으아아악!"

"비, 빌어먹을! 어, 어째서!"

이안이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을 들고 그들에게 한 걸음씩 다가가자 가신들과 이든은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대난전 중에서도 난전.

일시에 도륙당하다시피 하는 헤일론 반란군과 이안의 토벌 군대는 그렇게 오래 싸우지 않았다. 이미 헤일론 반란군은 거의 다 제압된 상태.

이든과 가신들을 도울 군대와 군사들은 그 어디에도, 그 누구도 없었다.

이든은 무릎을 꿇더니 이안의 바짓가랑이를 잡았다. 거의 눈이 눈물범벅이 되다시피 울던 그가 애원하기 시작했다.

"제, 제발 살려 주십시오, 백작 각하! 이 모든 것이 헤일론 그 역적이 꾸민 일입니다. 뭐, 뭐든 하겠습니다. 살려 주십시오, 백작 각하!"

"살려 주십시오, 백작 각하! 저희들이 어리석었습니다."

가신들도 빠져나갈 수가 없음에 한탄할 데도 없는 듯 곧바로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바닥에 박아 내렸다.

이안이 발을 움직이며 이든의 팔을 떼어냈다.

슉―!

빠른 움직임.

검이 슬쩍 움직이자 이든의 몸이 기우뚱 쓰러진다.

푸앗!

그리고 몸에서 거대한 피분수가 쏟아지며 그대로 절명했다. 비명을 지를 틈도 없었다. 고통도 없이 죽어 버렸다.

이안은 가신들을 바라봤다. 특히 드라이너를 원망스런 기색을 담고 바라봤다.

"너희들은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고 있느냐?"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사, 살려 주십시오, 백작 각하."

"……."

드라이너는 말하지 않았다. 가신들의 수장이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제 와서 다시 무릎 꿇고 살고 싶다 말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안의 검이 다시 한 번 움직였다.

"크, 크아아악!"

"아아악!"

가신들의 입에서 비명 소리가 튀어나왔다. 이안의 검이 그들의 사지를 단숨에 잘라 버린 것이다. 팔과 다리들이 땅으로 떨어지며 몇 초를 꿈틀거리더니 움직임을 멎었다.

"너희들은 살아도 산 것이 아니다. 이 시간 이후로 너희들의 로엔그람 영지에 관한 모든 권력과 재산을 박탈함과 동시에 압수한다. 한번 개처럼 살아 보거라. 에반, 이들을 치료해 주고 포박하여 압송하라!"

"옙, 마스터!"

드라이너는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이안이 어느새 한 발자국씩 다가오고 있음을 느낀 것이다.

"으으……! 이놈! 네놈이 이러고도 정녕 하늘이 무섭지 않단 말이냐!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두고 봐라. 반드시 용서하지 않을 것이니라!"

"할 말은 끝났나?"

"이, 개자식! 죽어서도 널 원귀처럼 쫓아다녀 주마."

"그럼 유언으로 알아주겠다. 죽어 간 모든 병사들에게 너의 그 어리석음과 욕심을 참회하도록 해라."

이안은 더 이상 시간을 끌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츄악!

드라이너의 눈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크게 부릅떠지더니 그대로 절명했다.

이안은 곧바로 본관 안으로 들어갔다.

"본관을 포위하라. 안에는 헤일론 반역자가 숨어 기다리고 있다. 너희들은 이곳에서 도망가는 헤일론 반역자의 목숨을 취한다. 알았나?"

"예옙!"

"우와아아아아!"

"막아라! 토벌군이다! 막아라! 막지 못하면 끝장이다!"

콰콰콰콰쾅―!

찰트의 5서클 플래임 버스터가 한 번 불을 뿜자, 성문이 그대로 박살 났다.

그리고 그 사이로 4천 명의 병사들이 물밀듯이 들어와 지친 반란군들의 병사들을 단숨에 도륙하기 시작했다.

"크아악!"

"이, 이놈들!"

"아악!"

드라이너와 이든이 흉계를 꾸몄다. 이안의 군대가 수를 나눠 비밀 통로 안으로 급습해 온다는 정보를 알고, 비밀 통로 끝에서 그들을 맞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안은 그들이 비밀 통로에 신경을 쓰며 군대를 전부 나누는 사이 성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4천 명의 병사들을 불러들인 것이다.

"한 놈도 살려 둬선 안 된다!"

"우와아아!"

병사들의 끝없는 함성 소리.

드워프제 무기와 방어구들이 빛을 뿜는 순간이었다.

뚜벅뚜벅.

이안은 본관을 향해 거침없이 들어갔다.

과거 프로시안 남작이 쓰던 방 안에서는 강력한 마기가 느껴졌다. 이안이 향한 곳은 그곳이었다.

과거 한음지체에 가깝던 프로시안 남작의 몸을 치료하기 위해 쓰였던 공간이 지금은 헤일론 반역자가 사기를 내뿜는 공간이 되었다.

이안은 과거의 향수에 빠질 시간도 없이 곧바로 로열을 움켜쥔 채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쾅!

헤일론은 마치 처음부터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방 안 구석구석에 촛불을 켜 놓은 채로 어두운 곳에 전신을 숨겼다.

"음!"

이안은 헤일론의 발아래 그려진 피의 마법진을 보며 신음을 삼켰다. 그곳에서 강력한 마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그것도 헤일론과 같은 기운이 말이다.

이안은 그 속에서 한 존재를 엿볼 수 있었다.

"마족인가?"

이안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물었다.

유라시아 대륙은 중원과는 다르게 여러 가지 세계가 존재한다.

정령계, 신계, 마계.

그리고 그들은 인간과 여러 종족이 대립하고 있는 중간계로 도움을 받으면 현신할 수 있었다.

이안의 앞에 있는 헤일론의 몸을 잠식하고 있는 자는 분명 마계의 종족인 마족이었다.

"크크큭! 단순한 마족은 아니지."

어둠 속에서 몸을 드러낸 헤일론의 눈을 바라본 이안이 인상을 찌푸렸다. 붉은 안광이 번뜩거릴 때마다 마치 현기증이 나는 듯 머리가 아파 왔다.

이안의 내공인 만상귀일신공과 대립하고 있는 것이었다.

"말해라. 너에게 그 힘을 준 자가 누구냐? 대답에 따라 결과는 바뀐다."

헤일론은 결코 마족을 불러낼 수 없다. 강력한 흑마법사나 네크로맨서들이 순리에 어긋나는 재료나 재물을 이용하여 소환해 낼 수 있는 것이다.

만약 헤일론에게 힘을 준 자가 있다면, 그자도 당연히 찾아내야만 했다. 반역자를 돕는 것은 공범의 일이었으니까.

"크흐흐! 어떻게 바뀐다는 것이냐? 결과는 같을 것이다. 네놈은 죽고 난 산다. 네놈 눈엔 이 힘이 보이지 않단 말이냐. 크하하하!"

헤일론은 실로 광오한 표정을 지었다. 영지를 잃어 가는 그의 모습에서 슬픔은 어디에서도 찾아낼 수 없었다.

이안은 마족과의 거래나 계약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터라 미간을 찌푸렸다.

마족들은 결코 함부로 이 중간계로 튀어나오지 않는다. 그것도 헤일론의 힘을 단숨에 몇 단계나 끌어올릴 정도의 마족이라면 단순한 것은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영혼이다.

몸을 그릇으로 삼는 영혼을 거래 조건으로 삼았을 것이다.

"다시 한 번 묻겠다. 너에게 그 힘을 준 자는 누구냐?"

"크흐흐! 모른다."

헤일론이 잡아뗐다.

'슈레이더 왕국은 물론 유라시아 대륙 대부분의 나라들이 흑마법사들을 배척한다. 하지만 합법적으로 흑마법의 힘을 날로 키우는 나라가 있다면…….'

프라스 제국.

강력해지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는 더러운 제국.

제국이라 부르기에도 이름이 아까운 개 같은 나라.

'설마 그곳에서 개입했단 말인가? 흠! 슈레이더 왕국이 펠타온 제국에 붙는다는 것을 알았으니 이참에 자체 붕괴시킬 만한 일을 원했던 거군. 아무리 작은 왕국이라 해도 막상 상대하기에는 곤란할 것이 분명하니까.'

범인을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 양지에 드러난 흑마법사들의 수준에서는 이 정도의 강력한 마족을 소환해 낼 정도의 힘을 가진 자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드러나지 않은 음지의 흑마법사들이라면 강력한 마법사들이 충분히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다시 묻겠다. 누구냐? 마지막이다."

"흐흐! 모른다고 하지 않……."

파팟!

이안의 신형이 급격히 사라지며 헤일론의 앞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그는 헤일론을 무심한 눈으로 쳐다보며 입을 살짝 열었다.

"카이어스 국왕 전하의 이름으로 지금 이 순간, 조국에 대한 반역을 저지른 헤일론을 처벌한다. 이 일에 관해서는 그 누구도 간섭할 수 없으며, 설사 왕족이라 하여도 간섭하는 순간 공범으로 여겨 처리한다. 이 일을 취소할 수 있는 자는 오로지 이 세상에 단 한 분, 카이어스 국왕 전하뿐이시다."

우우우우웅!

푸르스름한 오러 블레이드와 핏빛 마기를 머금은 붉은 오러 블레이드가 허공에서 격돌하기 시작했다.

콰콰쾅!

쿠앙!

그들의 중심으로 거대한 충격파가 공기를 뒤흔들었다.

쨍그랑!

나약한 유리창은 모조리 깨어졌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본관 전체가 흔들렸다.

이안의 손가락이 파랗게 물들기 시작하더니 곧바로 다섯 개의 칠십육로무형지가 엄청난 속도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슈슈슈슝!

하지만 헤일론의 몸 전체에서 갑자기 마기가 끓어오르더니 무형의 막을 만들어 내며 막아 냈다.

까가가강!

이안의 오러 블레이드가 무형의 막을 단숨에 잘라 버리려는 듯 내리쳐지자, 호신강기처럼 헤일론의 몸 전체를 보호했다.

"……."

검강이었다.

하나 검강으로도 막을 깨지 못했다. 하물며 극성으로 펼친 칠십육로무형지도 그 막에 흠집조차 내지 못했다.

탓!

빙허임풍으로 신법을 펼친 이안은 그대로 오른발을 들어 올리며 헤일론의 안면을 향해 강력하게 내뻗었다.

쿠웅!

이번에도 강력한 막이 그의 신체를 보호했다.

"흐흐! 이제 알겠느냐? 네놈이 아무리 발버둥을 친다고 해도 평범한 오러 블레이드로는 절대 깰 수 없다."

"그렇군."

반박할 여지가 없을 정도의 사실이었다. 검강의 힘으로는 절대 놈의 호신강기를 뚫을 수 없다.

"네놈의 공격이 끝났으면 내가 가 주마. 크흐흐!"

그 순간 헤일론이 강력한 붉은 오러 블레이드를 바탕으로 이안을 몰아치기 시작했다. 빠름이란 없었다. 단순히 중(重)이라는 검의 극성을 펼치는 듯했다.

손아귀가 찢어질 듯 아파 왔다. 화경의 경지에 오른 이후로 이렇게 위기감을 느낀 적도 없었다.

놈의 힘을 보고도 확실히 깨부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이안의 오만함이었다.

"망할!"

이안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그만큼 수세에 몰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가 점차 뒤로 한 발자국씩 물러가더니, 이제는 벽을 기대고 있었다.

이안의 왼손이 초록색으로 은은하게 빛내더니 독장인 최심장을 뒤로 휘갈겼다.

쿠앙!

강력한 독장.

한순간에 벽이 허물어 내리며 악취를 뿜어냈다. 이안은 개의치 않고 그 안으로 몸을 날렸다.

헤일론도 곧바로 구멍으로 몸을 날렸다.

'어떻게 하지?'

이안의 눈이 재빠르게 헤일론에게 향했다. 아무리 편법으로 높은 경지에 올랐다고 한들, 헤일론은 초보가 아니었다.

그는 이미 초절정에 오른 소드 마스터였다. 높은 경지라 해도 자신의 힘으로 순순히 커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이안은 로열을 움켜쥐었다.

'청성의 검…….'

만상귀일신공의 기운을 접어 버린 이안은 청명심법만을 운용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만상귀일신공으론 놈의 기세를 꺾을 수 없다. 단 몇 수만 겨뤄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확실히 사마(死魔)할 수 있는 검술이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청운적하검.

이안의 검은 무지막지한 힘으로 휘둘러 오는 헤일론의 검을 가벼운 손속으로 막아 내었다.

콰지징!

검기들이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이안의 검은 절대 빠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무겁지도 않았다. 단순히 내공만으로 화경에 오른 이안에게 있어 청운적하검은 실질적으로 더 높은 경지로 비상할 수 있음을 내포하고 있었다.

가벼운 손속.

그리고 절대 빠르지 않은 검.

그 속에 수만 가지의 함축되어 있는 변화를 거듭하는 변검도 아니다. 그저 눈길이 가는 대로.

하지만 이안의 검은 지금까지도 수적으로 몰아세우던 헤일론의 손속을 어렵게 만들었다.

채챙!

"크윽!"

헤일론의 붉은 안광이 흔들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도망갈 궁리만 하던 이안의 검이 엄청난 기세로 자신을 몰아치고 있는 것을 믿기 힘들었다.

'이러려고, 이러려고 마족에게 내 영혼을 판 것이 아니다!'

이안은 그동안 잊고 있었던 것을 생각했다.

청성.

청성파.

이안의 청운적하검은 헤일론의 목을 향해 푸른 궤적을 그리며 날아갔다.

헤일론은 절망 속에서 자신의 목을 향해 찔러 들어오는 검을 보며 다급히 몸을 비틀었다. 분명히 검을 확인할 때는 아주 느릿한 속도로 오고 있었다. 하지만 눈을 한 번 감고 뜨자 곧바로 자신의 목의 살을 비집고 들어오려 하고 있다.

신기한 일이다.

눈 감는 시간이 그리도 오래라니.

감탄할 시간도, 놀랄 시간도 없이 헤일론은 목에 커다란 상처를 입었다.

"컥! 커억."

아무리 마족과 계약을 했다고, 초인의 경지에 올랐다고 한들 과다 출혈이 일어나면 살아남을 수 없다. 물론 뇌나 심장이 파괴, 또는 태양혈 같은 사혈이 박살 나도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후……."

이안은 짧게 한숨을 내뱉으며 검을 집어넣었다.

"끄륵, 끄륵."

헤일론은 눈이 뒤집히며 상처가 벌어진 목을 두 손아귀로 틀어막았지만 별수 없었다. 상처는 너무 컸다. 마기가 급격히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세포를 재생시키고 있긴 하지만, 흘린 피가 너무도 많았다. 이미 바닥은 빨간 피로 가득했다.

피부는 하얗게 질려 창백했다.

이안은 주먹을 들어 올렸다. 헤일론이 죽는다 해도 그 몸 안에 있는 마기는 아니었다. 마기는 주변을 더욱 잠식하기 위해 퍼져 나가 자칫하면 프로시안 영지 전부 다 집어삼킬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이안의 손에 푸른 기운이 맺히더니 태산 같은 기운을 내포한 채 헤일론의 복부를 강력하게 가격했다.

퍼억!

"끄으윽!"

강력한 힘에 몸 안의 단전이 파괴되었다. 마기들은 헤일론의 몸속을 마구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탁탁탁.

그 순간, 찰트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본관 전체가 전투의 여파로 무너지기 일보 직전. 이 일이 끝나면 새로 지어야 할 일이었다.

"영주님, 모든 일이 끝났습니다. 반란군은 제압되었고, 토벌군은 영주님의 명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알았다."

"아! 그리고 또……."

찰트는 말을 하려다가 헤일론을 바라보았다. 끈질기게 아직도 죽지 않은 그는 피를 담기 위해 바닥에 엎드려서 입으로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참으로 처절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지만, 이안은 그를 향해 안쓰러운 표정 하나 지어 주지 않았다.

"허……. 저것은 마기가 아닙니까?"

"맞다. 놈이 마족과 계약했더군. 이 일에 관련된 배경이 있을지 모른다. 병사들은 한동안 이 주위를 샅샅이 뒤지도록 해라."

"흐음. 영주님, 사실 이 건물 지하에 상당히 오래된 마법 연구실이 있습니다. 살펴보니 거기서는 소환 의식이 진행된 것을 보아 아마 헤일론 이자의 마족 소환식을 진행한 듯합니다."

"그렇군."

이안은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저자를 어떻게 하실 작정이십니까?"

"이대로 두면 죽겠지. 살려 줘라."

하나 찰트는 고개를 내저었다.

"저자는 이미 마족과 계약했습니다. 힐이나 추기경의 디바인포스 마법 같은 경우는 오히려 튕겨 나오거나 상황을 더 악화시킬 뿐입니다. 이대로 살리려……. 헉!"

말을 하다 만 찰트는 놀란 기색으로 곧바로 쉴드 마법을 쳤다. 차갑게 식어 가던 헤일론의 몸이 서서히 땅 위를 밟고 서더니 다시 오러 블레이드를 뿜어내는 것이 아닌가.

쨍그랑!

쉴드가 깨져 나가고, 찰트를 향해 날아가는 오러 블레이드를 이안이 검집째 그대로 흘려버렸다.

콰광!

"뭐, 뭐냐!"

찰트는 주위로 시선을 돌리다가 갑자기 오른쪽 천장 쪽에서 시선이 멈췄다. 아주 작은 기척.

하나 형용할 수 없는 폭발적인 마나의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엄청난 고클래스 마법사다!'

"크르르르!"

헤일론이 갑자기 짐승같이 침을 뚝뚝 흘리더니 검을 내다 버렸다. 갑자기 길어지는 손톱, 길어지는 팔과 다리. 그리고 손에는 붉은 빛깔의 수강이 맺히기 시작했다.

상처는 이미 치유되어 버렸다. 하나 이성을 잃은 듯 눈에는 힘이 없었다. 그저 흰자만 또렷하게 보여 주며 이안과 찰트를 노려볼 뿐이었다.

"크흐흐! 들어 본 적이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마법 생물인 키메라다."

"키메라?"

찰트는 눈에 이채를 번뜩거리더니 키메라라는 말에 헤일론을 연신 바라봤다. 하나 그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키메라와는 달랐다.

키메라는 몬스터의 팔이나 다리를 이어다 붙인 것으로 생각해 왔다. 그러나 지금 헤일론이 보여 주는 모습은 지금껏 보아 온 키메라와는 달랐다.

무엇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인간과 다름없는 지능을 가지고 있었다. 키메라에게 아무리 인간의 두뇌를 붙여 준다 해도 미쳐 버리는 '버서커' 같은 성질을 띠기 때문에 제정신일 리가 없었다.

"왜? 크흐흐! 다르다는 생각이 드는가? 그렇지. 다르지. 키메라는 키메라지만 마족의 신체와 인간의 몸을 결합하였으니 최강의 생물이 되었다."

"망할!"

이안이 거친 욕설을 내뱉으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의 손에는 이미 로열이 뽑혀 나와 오러 블레이드를 생성시킨 채 쥐어져 있었다.

"으득!"

"찰트, 어서 레더린을 불러와라. 혼자서 상대하기에는 껄끄러운 상대다."

"영주님, 저 마법사는 6서클 혹은 7서클에 해당되는 대마법사입니다. 방심하지 마십시오. 7서클 마법사는 그랜드 마스터 급과도 맞붙을 정도의 힘을 지녔다 합니다."

"알았다."

푸슉!

이안은 칠십육로무형지를 키메라한테 쏘기보다는 흑마법사한테 마구 쏘아 내기 시작했다. 예상해 보건대 키메라는 지식이 없기 때문에 그 누군가가 명령권을 전달해 줘야 한다. 한데 지금 그 능력을 할 사람은 흑마법사뿐. 흑마법사만 제압하면 키메라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파파파팟!

이안이 무형지를 쏘아 내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타타탕!

하나 검은 쉴드에 막혀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예상대로다.'

쉴드를 소환하는 그 순간, 키메라의 움직임이 잠시 멈췄다.

그렇다면 명령권은 흑마법사가 쥐고 있다는 것이다.

이안은 곧바로 청운적하검으로 키메라를 몰아세웠다.

"크크르르륵!"

깡!

붉은 수강과 이안의 오러 블레이드를 담은 청운적하검이 수시로 부딪쳤다. 로열이 괜히 제국검이 아니기 때문에 이가 갈리거나 상처가 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수강을 부딪치는 키메라의 움직임이 점점 둔해지며 상처만 늘어날 뿐이었다.

그새 캐스팅을 끝냈는지 찰트가 곧바로 공간이동 마법으로 사라졌다.

한 점 빛이 되어 사라지는 그 순간.

이안의 몸이 활시위처럼 휘어지더니 엄청난 속도로 흑마법사를 향해 검을 던졌다.

팟!

공기를 가르고 날아가는 날카로운 검 하나.

"헉!"

흑마법사는 검이 날아올 줄은 몰랐다는 듯 몸을 거세게 움직였다. 아무리 고클래스 마법사라고 한들, 오러 블레이드가 담긴 검을 맞고도 무사할 리가 없었다.

그리고 키메라의 몸이 멈췄다.

츄아악―!

검이 흑마법사의 심장 부분을 정확히 뚫고 지나갔다.

'됐다!'

이안은 그대로 흑마법사를 향해 바람처럼 다가가 그의 후드를 벗겼다. 얼굴을 확인해 보려는 생각이었다.

하나…….

씨익!

참으로 황당한 일이다. 인간이 아니었다. 아니, 인간의 모형을 갖추고 있기는 한데 그건 분명 해골이었다.

얇은 손목, 그러나 하얀 뼈.

두개골 사이에서 두 개의 검은 안광이 번뜩거렸다. 그리고 입가에 짓는 미소. 그의 입가 쪽에 뚫린 구멍이 벌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이 확실히 웃음을 짓고 있는 것이다.

이안의 표정이 급격히 굳었다.

"리……치!"

리치의 왼쪽 손이 자신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리고 오른손은 복부를 향한 채로.

리치의 몸속에서 빠른 속도로 마나의 재배열이 이뤄졌다. 이안의 눈에 그것이 똑똑히 보였다.

큰일이다. 피해야 한다.

이 정도 속도로 마나의 재배열이 이뤄지고 있다는 것은 메모라이즈 해 놓은 마법이다. 게다가 이 정도의 거리에서 맞으면 직격타다. 아무리 화경의 경지라 한들 버텨내기는 쉽지 않다. 이안은 거칠게 그의 손목을 끊으려 움직였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몸이 갑자기 움직이지 않았다.

'웹(Web)!'

마치 거미줄처럼 끈적끈적한 것들이 이안의 몸을 칭칭 감았다. 행동에 제약이 생겼다.

이안은 눈을 부릅뜨며 리치의 오른손에 생긴 화염 덩어리를 보며 재빨리 방탄강기를 끌어올리고 호신강기를 있는 대로 몸에 둘렀다.

이 정도의 거리에서 마법을 쏘아 내면 마법을 사용한 마법사도 정상일 리 없지만, 라이프베슬이 있는 한 리치는 계속해서 부활한다. 이안과는 다르다.

쿠와아앙!

마법이 쏘아졌다.

이안은 양팔을 엑스 자로 교차하며 얼굴과 심장 부근을 가렸다. 그리고 잠시 후에 다가올 데미지에 눈을 감았다.

콰아앙!

* * *

톡톡톡.

책상을 두들기던 펜대가 갑자기 휘어졌다.

"으응?"

요상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히 이 펜은 고작 삼 일 전에 바꾼 고급 용품이었다.

"로셀 양―!"

부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로셀이 커다란 대답 소리와 함께 방으로 들어왔다.

"네에! 부르셨어요, 상단주님?"

"이 펜대 좀 바꾸어 주시겠어요?"

"어머? 벌써 부러졌어요? 호호호! 그분이 좋아하신다고 하지만 너무 열심히 일하시는 거 아니에요?"

갑자기 세리아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 그분이라뇨! 전 제가 맡은 일에 대해 그저 소임을 다하는 것뿐이라고요. 흥!"

다소 상기되어 말하는 세리아였지만, 로셀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호호호! 알았어요. 제가 설마 상단주님 마음도 모를까 봐? 알았어요. 상. 단. 주. 아. 가. 씨! 올 때 차라도 가지고 올까요?"

장난스런 표정으로 골려 먹는 것이 얼마나 재밌는지 세리아는 얼굴이 붉어진 채로 고개를 숙였지만, 로셀은 이곳에 혼자 있었다면 배를 잡고 뒹굴었을 일이었다.

"그, 그러세요."

"녹차? 보이차? 얼마 전에 상단으로 들어온 고급 보이차가 있는데 어때요?"

"그래요. 그거 한 잔 갖다주세요."

"호호호! 따뜻하게 끓여서 금방 올게요."

"펜 잊지 말고 가져와 주세요."

"네, 상단주 아가씨."

로셀이 나가자 세리아는 몸을 뒤로 젖히며 기지개를 쫘악 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좀처럼 펴질 생각이 없었다.

'뭐지, 이 불안감은……?'

덜컹!

그 순간, 갑자기 로셀이 다급한 표정으로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로셀 양, 숙녀가 그렇게 품위 없이 다니면……."

따끔하게 한마디 하려던 세리아는 로셀의 표정에 몸이 굳어졌다.

"아, 아가씨! 크, 큰일이에요."

"진정하고 말씀해 보세요. 왜 그래요? 무슨 일이에요?"

"백작님께서, 백작님께서 의식을 잃으셨대요."

"예? 뭐, 뭐라구요?"

마치 뒤통수를 둔기로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었다.

"의, 의식을 잃었다뇨? 괜찮은 거예요? 그 소식을 전해 온 사람은 누구죠? 네?"

세리아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틀 전 흑마법사의 공격으로 지금은 깨어날 기미가 없대요. 혼수상태라구요, 아가씨!"

"아, 아, 알았어요. 지, 지금 떠날 준비를 하세요. 프로시안 영지로 가야겠어요."

"예,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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