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인하르트-34화 (34/60)

■ 제34장 때때로 강함이란 전법을 무시하는 법이지 □

붉은 안광.

몸 구석구석을 파괴할 것만 같아 내포할 수 없는 거대한 마기(魔氣).

마계에서도 마왕 발록을 섬기는 10명의 마족 중 하나인 레아드리프 그록.

파괴적인 성향과 포악한 성격 탓에 최고의 자질을 타고난 마족이지만 단순무식으로 10명의 마족 중에서도 제일 적이 많은 자이기도 하였다.

헤일론 백작은 레아드리프 그록과의 계약으로 인해 전보다도 한층, 아니 적어도 두세 수 이상은 강해진 힘을 보유하게 되었다.

"크흐흐! 로엔그람 애송이 놈! 어디 덤빌 테면 덤벼 보거라, 쉽게 지지는 않을 테니!"

광소하는 그의 전신에서는 형용할 수 없을 만큼의 방대한 살기가 뻗쳐 나왔다.

대륙십강 급.

그랬다.

헤일론 백작은 이 일로 단숨에 대륙십강에 버금가는 힘을 얻게 된 것이다.

영혼을 조건으로 맺은 계약.

그만큼 헤일론 백작은 로엔그람 백작의 사지를 찢어 죽이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크하하하하!"

* * *

로엔그람 백작령의 병사들이 무적이라 칭해지는 이유.

첫째로는 이십 년간 혹독한 훈련으로 단련한 몸이 있었고, 둘째로는 개인이 값비싼 드워프제 무기로 장비했으며, 셋째로는 이안의 마나 연공법(삼재심법)으로 피로를 모르는 데에 있었고, 마지막으로는 상단에서 흘러나오는 돈 모두 병사들에게 전폭적으로 투입된다는 것이었다.

이 일로 마나 연공법이 사실상 대륙에 퍼지는 계기가 되긴 했으나 이안은 굳이 상관하지 않았다. 아무리 단순한 삼재심법이라 해도 유라시아 대륙 사람들이 비밀을 풀기 위해서는 수십 년이 걸릴 것이었다.

심법의 구결이나 내공의 이동 경로 등 그 모든 것은 이 대륙에서 오직 이안만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냥꾼과 사냥감이라……."

이슈는 며칠 전에 로엔그람 백작인 이안이 자신에게 하는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5천의 군사로 1만이 있는 군대를 쳐들어간다면서 자신들이 사냥꾼이란다. 수성도 아니고, 그것도 공성인 입장에서는 기가 찰 일이었다. 게다가 헤일론 백작은 이안보다도 경험이 많은 백전노장이었다.

자신이 만약 작전을 지휘하는 군사였다면, 죽어도 이 전쟁을 말렸을 것이다.

'허나…….'

지금 영주님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너무나 황당해서 말이 안 나온다. 웃고 있었다.

어느 정황상에서 보아도 불리한 자신들의 입장을 잘 알고 있을 터인데,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하루 종일 웃고 다니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백작이 병사 한둘의 목숨을 개처럼 여기는 이윤과 실리만 챙기는 그런 귀족이 아니라는 것쯤은 이슈 자신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보아 온 이안, 즉 로엔그람 백작은 병사 하나가 다쳐도 같이 아파하며 마음을 공유할 수 있는, 이 시대에 보기 힘든 최고의 귀족이었다.

'부디 이겨서 돌아오시길.'

가신으로서 백작을 충분히 믿을 수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드는 불안함은 초조하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

왠지 영지를 떠나는 이안의 뒷모습이 너무도 초라해 보였음은 착각이었을까?

다가닥―! 다가닥―!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는 부지런한 전마들. 그리고 그 뒤를 따라오는 5천 명의 군사들이 장엄하기 이를 데 없었다.

"영주님, 잠시 후면 헤일론 백작령의 외성에 도착할 것입니다."

출병한 지 이틀 만에 듣는 반가운 소리였다.

"아직까지 적병의 출몰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단순히 수성전으로 끌어 보겠다, 이건가?"

헤일론 백작령은 지금 고립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영지민들의 분위기도 그다지 좋지 않고, 빠져나갈 수 있는 모든 방향은 이안과 귀족들이 막아서고 있는 상태.

단순히 헤일론 백작의 오기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성이 보입니다, 영주님!"

레더린의 외침에 이안이 시력을 극대화시키자 작게나마 외성의 겉모양이 눈에 띄었다.

"흥! 얼마나 버틸지 두고 보자고."

전력의 차이가 심하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실감이 날 테지만, 이안에게는 묘한 자신감이 있었다.

두 명의 소드 마스터와 5서클의 마법사, 그리고 전원 익스퍼트 기사들과 모두 마나를 느끼는 최정예병들!

이 앞에서는 어떠한 무력 집단이라 해도 꿀릴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웨일즈 경."

"예, 백작 각하."

웨일즈는 이안이 자신을 부르자, 묘한 흥분감으로 두근거리는 심장을 떠안은 채 말을 끌며 앞으로 나왔다. 기사들은 부러운 기색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누가 뭐라 해도 이안은 슈레이더 왕국의 최고의 기사이며, 단 하나밖에 없는 마스터(레더린은 아직 공식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음).

"저번에 말한 거 기억나나?"

"아! 헤일론 백작성의 약점 같은 거 말입니까?"

"그렇다."

"물론 알고 있습죠. 걱정 마십시오. 없다 해도 제가 약점을 만들겠습니다."

이안이 이번에는 찰트를 보고 물었다.

"좋아, 찰트.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이 얼마지?"

"국왕 전하께서 말씀하시길 영주님께서 사절단에 참여하시기 위해서는 최소 3주 이내에는 영지전을 끝내고 돌아오시라 하셨습니다."

"길군!"

무려 3주.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하지만 영지전, 아니 토벌을 하려는 입장에서 3주는 너무나도 짧은 시간이었다. 최소한 지형에 대해 파악하고, 작전을 구상하고 수정하는 데에도 그만한 시간은 소요가 되었다.

하지만 이안은 그 시간이 무척이나 길다고 느끼고 있었다.

만약 어느 정도 군대를 이끌어 본 장수들 같은 경우는 이안의 이 오만한 발언에 노성을 터트리거나 입을 쩍 벌리며 경악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안의 입 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3일."

"예?"

"우리는 3일 안에 이 성을 함락하고, 다음 성으로 나아간다."

"알겠습니다."

헤일론 백작의 군대는 여러 군데로 나뉘어 있었다. 현재 이안의 군대를 수성하는 곳은 약 3천여 명의 병사들이 집결되어 있는 곳이었다. 보통 수성은 공성의 3분의 1 정도의 병력으로 행하여도 큰 무리가 없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이안이 불리한 상황이었다.

"일단 오늘은 이곳에서 숙영을 한다. 정찰병을 보내 적들의 상황을 알아보도록 하라."

"명을 받듭니다, 영주님!"

"준비가 끝나는 대로 작전회의실로 모두 모이도록!"

"옙!"

이틀 동안의 고된 행군으로 제법 지친 병사들이 서둘러 막사를 짓고, 숙영지를 만들었다.

이안이 곧바로 준비를 끝마치고 작전회의실로 들어가자, 초라한 막사지만 갖출 것은 전부 갖추고 있었다.

'전부 왔군.'

"어서 오시지요, 영주님."

"영주님이 오셨으니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회의를 알리는 말이 나오자 이안은 자리에 앉아 의자를 옆으로 돌렸다. 찰트는 어느새 이안이 오기 전에 짧은 작전명령서들을 줄줄이 들고 있었다.

"현재 데르안 캐슬(이안이 침공해야 하는 성의 이름)의 경우 총사령관은 알렌. 기사입니다. 작위는 단승귀족으로서 남작이며, 국왕 전하에게 정식으로 받은 작위는 아닙니다. 실력은 익스퍼트 상급으로 판단, 과거 추격대를 이끌어 본 출중한 맹장이기도 합니다. 데르안 캐슬의 병사들의 수는 총 3천으로, 여기 있는 웨일즈 경의 얘기를 토대로 작성한 계획안 중에서 제일 가능성 있는 하나를 여기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면서 찰트가 레더린의 손에 있던 지도를 빼앗아 들며 누구든 볼 수 있게 쫘르륵 펼쳤다. 데르안 캐슬의 간략한 지도를 보며 작전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은 곤란한 기색을 띠었다.

난공불락의 성만큼이나 빽빽하기 그지없어 웬만한 공격으로는 두들겨도 답이 없을 것만 같았다. 성은 견고하며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 있어 공격하기가 까다롭기 그지없었다.

"여기 계신 레더린 경이 남문으로 가서 일단 적들의 시야를 빼앗습니다."

"아니, 혼자서 말이오?"

"그렇습니다."

"허, 어찌 그런 말도 안 되는 전법을……."

레더린의 실력을 몰라서 하는 말이었다. 이안은 그 발언을 한 자를 톡 쏘아보았다. 과거 로엔그람 영지의 가신 중 하나로, 현재에도 로엔그람 영지에서 밥만 축내고 있는 자였다.

"레더린은 우리 군에서 최고의 기사이다.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허나 백작 각하, 아무리 사람이 하늘을 날고 긴다 하더라도 수많은 화살을 피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기사들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레더린은 마스터의 실력자였다. 여간해서는 화살 정도로 죽이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자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늙은 가신은 계속해서 레더린의 실력을 의심하는 행동을 했다.

이안은 코웃음을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찰트, 이 작전은 바꾼다. 레더린이 아니라 내가 적의 시야를 뺏는다. 아무래도 내가 이곳의 총사령관이니 적들의 시야가 나한테 더욱 쏠리겠군."

"아, 아니, 어찌 그런! 영주님,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제가 가겠습니다."

레더린은 황급히 자신도 일어섰다.

"그럴 필요 없다. 아무래도 우리 영지의 최고의 기사를 의심하는 사람이 한둘은 아닌 것 같군."

"절대 그런 뜻이 아닙니다, 백작 각하. 하지만 우리 왕국의 소드 마스터인 백작 각하께서 나서 주신다면 저희도 의심할 여지야 없을 것입니다."

가신이 고개를 숙이며 세 치 혀로 사람들의 마음을 샀다.

그러나 그 어떤 총사령관이 홀로 적들의 시선을 끄는 행동을 한단 말인가.

가신들은 이 토벌보다도 영주가 없는 로엔그람 영지를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루빨리 영주가 죽어 버리기를 바라며.

"좋다. 이 작전은 내가 대신한다. 이의 있나?"

"없습니다."

"찰트, 계속하라."

"예. 그럼 다음에는……."

말을 잇는 찰트.

그들 중에서 이안의 입가에 미소가 걸려 있다는 것을 눈치 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 *

데르안 캐슬.

3천 명의 병사가 지키고 있으며 그곳의 사령관은 알렌.

헤일론 백작령에는 총 다섯 개의 성이 있으며 그곳을 기사단장 급들과 백작이 지키고 있었다. 특히 데르안 캐슬 같은 경우는 아주 중요한 요충지였다. 그곳이 빼앗기면 곧바로 백작이 있는 프로시안 영지까지는 갈 수 있는 길목이 열리게 된다.

그랬기에 알렌은 하루 종일 눈을 시뻘겋게 뜬 채로 적들의 숙영지를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으으…… 건방진 놈들! 여간해서 공격하려는 조짐도 없어 보이는군."

그때, 그의 옆에 있던 기사 하나가 조심스레 물어 왔다.

"저어…… 단장님, 이럴 게 아니라 우리가 선제공격으로 적들의 기를 죽이는 건 어떻습니까? 적들도 저희가 먼저 공격할 거라곤 상상도 못할 겁니다."

알렌은 그 기사를 한심한 눈으로 쳐다봤다.

"넌 그 소문도 못 들었느냐?"

"소문이요?"

동그랗게 눈을 뜬 채로 묻는 기사를 보며 알렌이 한숨을 푹 쉬었다.

"저들은 드워프의 무기와 갑옷으로 무장한 이들이다. 오히려 선제공격으로 병사의 숫자가 적은 우리가 더 피해를 입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나?"

"그, 그런……."

알렌이 혀를 끌끌 차며 적들을 보니 평정심이 유지되는 듯도 싶었다.

"그럼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보고 있어라. 적들이 어떻게 하든 일단 우리들의 시야에서는 벗어날 수 없을 테니. 적들의 동향을 보고 우리도 그 동향에 따라 행동해야 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젊은 기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자, 알렌은 그제야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방금 전에 젊은 기사에 대해 안 좋은 감정을 품었던 모습이 아니었다.

젊은 기사는 예전부터 시종으로 끌고 다니던 놈이었다.

머리가 워낙 둔해 기사 서약식을 외우는 데만도 삼 일 밤낮이 걸렸다곤 하지만 무골이 튼튼하여 예전부터 눈여겨봤던 아이였다.

"어? 다, 단장님, 저기 좀 보십시오."

"뭣이냐?"

흐뭇한 표정을 짓던 알렌은 젊은 기사가 손가락으로 적들의 숙영지를 가리키자, 자신도 눈을 크게 뜨며 바라봤다.

적들이 이동하고 있었다.

"으, 으음?"

그런데 숙영지를 정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움직이는 것인지 모르겠다. 엄청난 모래 바람이 이르는 것을 보니 5천 명 전부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숙영지를 바꾸려는 모양입니다. 하긴 이곳은 우리들의 감시가 철저하게 이루어지는 곳이니 제법 시야가 안 보이는 곳으로 옮기려는 것이겠지요."

젊은 기사는 오늘 안에는 수성전을 할 이유가 없을 것처럼 판단되자, 한시름 덜었다는 듯 소매로 이마를 닦았다.

"에반!"

알렌이 젊은 기사를 부르자, 젊은 기사는 즉각 대답했다.

"옙!"

"네 눈에는 적들이 전부 이동하는 것처럼 보이냐?"

"그, 그렇습니다만."

조금은 자신이 없어진 에반이 다시 확인해 보고 대답한 것이다. 하지만 확실했다. 이곳에서 주변이 전부 모래 바람으로 불어 닥칠 정도로 군대를 움직이려면 5천 명 전원이 움직여야 가능한 일이었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기사단 중에서도 제일 믿을 만한 아이였기에…….

"그래, 적들의 동향을 살피도록 하라."

"옙!"

대답만큼은 언제나 씩씩하게 한 에반이 서둘러 사라지자, 알렌은 그윽한 눈길로 적들의 숙영지를 바라봤다.

'어서 오너라. 이곳은 그리 쉽게 무너질 만한 곳이 아니니까.'

그 순간 그의 상념을 깨고 나타나는 자가 있었으니 명을 받고 사라진 에반이었다.

"단장님."

"뭐냐? 이젠 항명까지 하겠다는 게냐?"

"그런 것이 아니오라…… 병사들이 말하길 남쪽 성문에 문제가 생겼다 합니다."

"남쪽 성문?"

"예."

너무도 당당히 말하는 에반에게 당황한 알렌도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그, 그걸 왜 이제 말하는 것이냐!"

"지금 기억이 나서……."

"이 멍청한 놈!"

알렌은 남쪽 성문으로 달려가면서 입술을 잘끈 깨물었다.

'빌어먹을! 로엔그람 백작, 무슨 꿍꿍이냐!'

쿠콰콰쾅!

강했다.

강함 앞에서 전술이 통하지 않는다는 말은 괜히 존재하지 않는다. 수천의 병사들이 온 힘을 다해서 성문을 부수려 해도 단번에 박살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안은 오러 블레이드 하나로 성문을 무 자르듯 쉽게 자르며 성안으로 들어갔다.

황당한 일이었다. 성문을 지키던 병사들도, 기사들도 입을 떡 벌린 채로 경악해야만 했다.

보통 기사들의 오러를 견제하기 위해 성문은 단순히 나무로 만들지 않는다. 강도가 견고하기 그지없는 철이나 주철을 이용하여 만드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오러 블레이드 앞에는 속수무책이었다. 마치 종이 잘리듯 쉽게 잘려 나갔다.

"다, 당신은 누구시오?!"

"로엔그람 백작이다. 이곳 총사령관과 담판을 지으러 왔다."

저벅저벅.

이안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자, 무표정을 고수하고 있다. 상당히 잘생긴 얼굴.

체격을 봐도 모든 이들의 입에서 회자되고 있는 주인공치고는 너무도 호리호리해 보였다. 우람한 체격의 주인공이라 생각한 에반은 살짝 실망한 기색을 엿보였다.

하지만 반대로는 날렵한 몸놀림이 가능한 체격이었다.

'젊다!'

에반이 로엔그람 백작을 처음 보고 든 생각이었다. 아무리 봐도 자신보다 어리면 어렸지 많아 보이지는 않았다.

검을 익히거나 따로 무예를 수련한 흔적도 없어 보였다.

하나 은연중에 흘러나오는 살기는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였다.

'하긴…….'

소드 마스터가 이 정도가 아니라면, 혼자서 수천 명의 병사가 있는 이 성안에 들어왔을 리가 없지 않겠는가?

"이곳에 성주님이 계십니다."

"알았다."

이안은 짧게 대답한 끝에 문을 살짝 열었다.

끼이익!

꽤 낡은 문이다. 기름칠을 제대로 하지 않았는지 거북한 소리가 귀를 울렸다. 하나 그것에 연연할 때가 아니었다.

이안이 방 안으로 걸음을 한 발자국 옮기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알렌이었다.

"당신이 로엔그람 백작이오?"

그자는 이안을 기억하지 못하는 듯해 보였다.

확실히 이안의 얼굴은 그때와는 달리 많은 변화를 거듭했기 때문에 가까이서 보지 않았다면 알아보기 힘든 점이 많았다.

"그렇다."

"후후! 감히 이 성안으로 혼자 들어왔다기에 얼마나 담대한 인물일까 기대했는데……."

말꼬리를 흐리는 알렌에게 이안이 살짝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어떻지?"

"상상 이상이군! 과연 왕국 최고의 기사라고 추앙을 받을 만할 정도야."

알렌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였다.

"그래, 담판을 지으러 왔다 들었소. 어떤 담판을 원하는 거요?"

"그대와 나, 그 누구의 피해도 원치 않을 뿐. 살고 싶으면 성을 빠져나가라. 하루의 시간을 주지."

마치 이안이 주도권을 잡고 있는 것처럼 관용을 베푸는 듯 말했다.

알렌이 짧게 코웃음 쳤다.

"흥! 말도 안 되는 소리! 나야말로 지금이라도 빨리 짐을 챙겨 돌아간다면 용서해 줄 맘은 있소."

"교섭은 결렬이군."

상대와 의견이 다르고, 원하는 것이 같은 이상 어쩔 수 없다. 어차피 반쯤은 재미로 들어온 것도 있었으니 실망한 기색도 들지 않았다.

"로엔그람 백작, 당신은 지금 적군의 기지에 홀로 와 있소. 나에겐 천금 같은 기회, 지금 당신을 잡거나 죽인다면 적들은 저절로 퇴각할 테지."

알렌의 생각대로 되진 않는다. 이안이 설사 죽는다면, 5천 명의 병사들은 죽기 살기로 덤빌 것이다.

하지만 이안은 부정하지 않았다. 보통의 경우라면 당연히 퇴각하는 것이 맞는 말이다.

"그럴 테지."

챙!

"난 별로 기회를 놓치지 않는 성격이라 말이오. 좀 미안하게 됐소. 하지만 자만과 오만은 항상 자신의 생명줄을 줄여 놓는다는 것 또한 잘 기억해 두길 바라오. 뭐, 지금 이후로 기억한다 해도 살아남을 리가 없을 테지만."

알렌이 검을 뽑아 들었다. 에반도 얼떨결에 검을 뽑아 들었다.

'이곳은 좁은 방 안. 상대가 아무리 소드 마스터라고 해도 에반과 같이 덤빈다면 승산이 있다!'

죽이지 못해도 좋다. 최소한 사지 중 하나라도 자른다면 그걸로 대성공이었다.

하지만 알렌은 지금 큰 착각에 빠져 있었다. 좁은 방 안이라고 해도 알렌 같은 기사가 한 무더기로 덤벼들어도 이안의 몸에 상처 하나 줄 수 없다.

알렌은 마스터와 익스퍼트의 수준 차이를 실감하지 못한 것이 큰 실수였다.

"에반, 놈의 몸을 묶어라! 단숨에 죽여야 한다. 상대는 마스터다!"

"아…… 옙!"

마스터에 대한 좋은 감정도 있었던 에반이지만, 이때만큼은 알렌의 명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기사라 함은 명에 죽고 명에 살기 때문이다.

덜컥―!

가만히 서 있던 이안의 검집이 크게 흔들린다. 하나 검이 뽑히지는 않았다. 알렌의 검은 허공을 날아 이안의 목으로 빠르게 휘둘러졌다. 검이 흔들리니 마치 뱀이 주둥이를 벌리고 먹이를 잡아먹는 듯한 현상이 일어났다.

일촉즉발의 현상.

딸칵―!

이안의 좌수 엄지가 그립을 밀어 올렸다.

살짝 올라간 검이 갑자기 자아를 갖춘 것처럼 스스로 일어나더니 알렌의 검을 막아 냈다.

"헉! 이, 이럴 수가!"

연이어 그의 놀람은 경악으로 변했다.

검을 잡은 이안이 곧바로 검면으로 알렌의 가슴을 강타하기 직전이었기 때문이다.

'보, 보이지도 않는다!'

충격이었다. 이제 겨우 자신의 반밖에 안 살아 본 놈이 자신의 눈을 피해 검을 휘두르다니.

쾅―!

커다란 충격이 연이어 밀려왔다. 최강의 방어를 자랑하는 플레이트 메일은 보기 좋게 함몰되었고, 내가중수법으로 완벽히 충격을 입은 알렌은 피를 토하고 그대로 쓰러졌다.

"너도 덤빌 테냐?"

이안이 무의미한 어조로 묻자, 에반은 고개를 세차게 돌리며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목숨은 하나뿐이다. 잘 보존해라."

"며, 명심하겠습니다."

"멍청한 네놈 사령관보다는 낫구나."

적과 자신의 실력 차이를 현저하게 알지 못하면 현명한 지휘관이 아니란 뜻이다.

"애써 찾아왔는데 지휘관이란 놈이 이렇게 나자빠졌으니 교섭을 할 수 없게 되겠군. 어쩔 수 없지."

"무슨 뜻입니까?"

"항복을 권하겠다. 헤일론 백작은 반역자다. 기사가 반역자를 따르는 것은 기사도가 아니다. 네가 갈고닦은 검은 결코 나라에 반역이나 저지르는 놈을 따르기 위해서가 아니다."

에반은 이안의 한마디 한마디가 정확히 가슴에 박혔다.

사실이었다. 밤낮을 죽어라 수련하며 손아귀가 찢어져라 검을 휘두른 이유는 결코 반역자를 따르기 위함이 아니었다.

"사실 지금 병사들 사이에서도 불안감이 싹트고 있었던 것이 맞습니다. 하물며 기사들도 그럴 정도이니 병사들이야 오죽하겠습니까? 항복하여 목숨만 보장해 준다면 어떻게든 마음을 돌려 보겠습니다."

'이놈…….'

머리는 단순해 보이지만, 결코 가진바 능력이 떨어지는 놈이 아니다. 알렌 밑에 있기엔 아까운 자였다.

* * *

"허, 허, 허……."

찰트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무혈입성.

그야말로 피의 대가 없이 성에 들어왔으니 마땅히 좋아해야 할 일은 맞지만, 자신이 세운 전법이 그 무엇 하나 쓰이지 않고 들어왔음에 힘이 쭈욱 빠져 버렸다.

이안의 피해를 확신하고 있던 늙은 가신들은 눈만 동그랗게 뜬 채 성문이 열리는 것을 보며 노호를 터트렸다.

"이, 이게 어찌 된 일이오!"

"아, 아무래도 영주님께서 성안으로 들어가신 듯합니다."

"아니, 그분 혼자서 성으로 들어가셨다니? 그것도 모자라 성을 혼자 장악하셨다는 건가?"

"그렇다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끄응……!"

레더린도 머리를 긁으며 성안으로 들어갔다.

"이것 참……."

그때 이안이 그들을 맞이하기 위해서 나오고 있었다.

찰트가 얼른 가서 그에게 물었다.

"영주님, 어떻게 된 일입니까?"

"후후, 글쎄? 미안하게 됐군."

이안이 무의미한 웃음을 흘렸다.

"아니, 그것보다 이 일이 어떻게 된 일인지 궁금합니다."

찰트가 궁금해 죽겠다는 듯 대답을 재촉했다.

"뭐, 단순히 얘기하면 이들이 가지고 있던 불안감을 싹틔워 줬다는 것뿐? 그 누구도 반역자를 따르고 싶지는 않겠지. 그 이외에도 강함이란 것이 전법을 무시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고."

"그 말씀은……?"

"성으로 온 것을 환영한다는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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