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인하르트-33화 (33/60)

■ 제33장 갑자기 드는 불안감 □

"혹시 들어 봤는가?"

뚱뚱한 중년 남자가 고급스러워 보이는 비단 옷을 입은 훌쭉 마른 남자에게 물었다.

훌쭉 마른 남자는 궁금증을 토해 내며 되물었다.

"뭘 말인가?"

"로엔그람 백작령 말일세. 이번에 대대적으로 헤일론 반역자를 토벌하려는 모양이더군."

"그 이야기라면 이미 왕국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지 않나?"

"아냐, 아냐. 그 토벌 명을 이제야 전하께서 내리신 모양이야. 아마 삼 일 이내면 진격할 모양이더군."

그의 말에 훌쭉 마른 남자가 혀를 끌끌 찼다.

"쯧쯧. 헤일론 백작, 아니 그 반역자 놈이 불쌍해지는군. 로엔그람 백작에게 걸렸으니 된통 당하는 거야 시간문제겠어."

"그렇지, 로엔그람 백작은……."

뚱뚱한 남자는 잠시 후 생각하며 말을 내뱉었다.

보름 전에 퍼진 작은 소문. 로엔그람 백작의 영지군 모두가 드워프가 만든 장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실 그 소문이 퍼졌을 때만 해도 그 누구도 믿지 않았다.

로엔그람 영지군이라면 7천이나 되는 대군이었다. 그런 대군에게 값비싼 드워프제 무기와 갑옷이라니? 그 누구라도 코웃음 칠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 코웃음은 고작 일주일이 지나고 나자 놀라움으로 변해야만 했다.

인간이 만든 대장간의 무기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강도와 디자인을 가진 무기와 갑옷들이 한 작은 상단에서 풀려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상단의 이름은 '로엔그람'.

로엔그람 백작의 성을 따서 지은 상단으로, 그 상단의 주인이 로엔그람 백작이라는 것쯤은 그 누구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놀라운 것은 그 상단을 맡고 있는 상단주였다. 물론 상단의 주인은 로엔그람 백작이지만 그 상단을 실질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것은 이제 갓 스무 살로 보이는 여인.

하지만 상상도 할 수 없는 마케팅 전법으로 고작 일주일 만에 무기 시장을 점령해 버린 것이다.

그것도 엄청난 양의 드워프제 장비를 가진 채로.

"좋겠어. 로엔그람 백작은 외모에 능력에 전하의 사랑까지 듬뿍 받고 있는 데다 그 상단을 운영하는 여인의 미모가 상당하다지?"

"그렇다더군. 듣기로는 지방 귀족의 영애였다가 몰락 귀족이 되었다더군."

"이거, 내 딸을 내밀어 보려다 축객령만 내리게 생겼네. 쯧쯧, 어디 그런 사윗감 없나?"

"이보게, 꿈도 꾸지 말게나. 내가 듣기로는 로엔그람 백작 때문에 대륙십강 구도가 곧 바뀔 거라는군."

"정말이야. 이미 어떤 사람들은 로엔그람 백작을 대륙십일인강으로 취급하고 있으니 말이야."

두 귀족의 대화를 듣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처럼 로엔그람 백작은 모든 귀족들에게 회자되며 거의 전설적인 인물로 취급당하고 있었다.

연회장이면 연회장, 식당이면 식당, 영지면 영지, 이젠 나라 전체까지.

슈레이더 왕국에 있어 로엔그람 백작을 모르는 사람은 간첩이 되었다.

* * *

"영주님."

"왜?"

시선은 돌리지도 않았다.

책상 위로 수북이 올라온 서류에 얼굴을 파묻은 채 엄청난 속도로 도장을 찍고 있을 뿐.

이슈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3일 후면 그래도 토벌령으로 진격을 하게 될 텐데, 병사들에게 따뜻한 말씀 한마디라도 없으신 겁니까?"

이번에 토벌이 결정된 병사들은 순전히 레더린이 이끌고 있던 병사들이다. 그전에 로엔그람을 지키던 병사들은 이번에도 수비를 맡게 되었다.

5천의 병사로 1만이 지키는 헤일론 반역자를 처치하러 가는 것치고는 너무도 이안의 표정이 태연한 것이 이슈의 걱정이었다.

하지만 이안은 걱정이 없었다.

무기면 무기, 갑옷이면 갑옷, 실력이면 실력, 이길 방도까지 모든 방책이 있었다. 전쟁이 물론 계획대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번 토벌 전쟁은 진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다.

"……."

이슈는 이안이 대답이 없자, 잠시 후 다시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아니, 그래도 국왕 전하께선 너무하신 것 아니십니까? 5천 명으로 1만 명을 막는 것도 아니고 공격하라니요? 그것도 공성전 아닙니까? 그쪽이 수성을 하게 된다면 저희는 이길 수가 없습니다."

이안이 그제야 고개를 들어 올렸다. 붉게 상기된 이슈의 표정이 참으로 볼만했는지 피식하고 웃음꽃을 피웠다.

"걱정이 참으로 많군. 그 시간에 영지라도 한 번 더 돌아다녀라.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전쟁은 기필코 이긴다. 우리가 사냥꾼이라면 그놈들은 그저 사냥감에 불과해."

"아니, 무슨 그런 억지가……."

"백작의 가신으로서 백작의 군대를 믿지 못할 이유는 또 뭔가?"

"그건……."

말을 더 이상 잇지 못하게 말뚝을 박아 두는 이안.

잠시 후, 서류 한 장을 빤히 쳐다보더니 빙그레 웃었다.

"세리아는 생각보다 잘하고 있는 모양이군."

"세리아 아가씨라면 말도 마십시오. 어찌나 일 처리가 깔끔한지, 이대로만 가면 1년이면 대륙삼십대상단 안에도 들 수 있고, 10년이면 대륙십대상단의 반열에 어깨를 나란히 놓을 수 있다고 상인들 사이에 소문이 아주 자자합니다. 여기 보십쇼. 얼마나 그 소문을 들었는지 귀에 딱지가 앉으려 하는 것을 말입니다."

정말로 귀 속을 보여 주려는지 이안 앞에서 자신의 귀를 만지작거렸다. 처음에는 이슈의 태도도 이렇지 않았는데, 이안이 이곳 영주로 부임한 지 두 달이 넘어서자 성격이 슬슬 변하고 있었다.

"흠, 다행이군."

이슈는 음침한 표정으로 웃기 시작했다.

"흐흐, 조마조마하셨군요. 작위로 돈을 빌릴 생각을 하셨다니, 정말 그 배포에 놀랐습니다. 하지만 일이 생각보다 잘 해결된 것을 보니 다행입니다."

"아니, 그것보다 세리아 일 처리가 나보다 나은 것 같아서 말이야."

"그것보다 세리아 님은 몰락 귀족의 딸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안이 고개를 슬쩍 끄덕였다.

"그랬지."

이슈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물었다.

"역시, 세리아 님을 볼 때마다 고귀한 분 같더라니. 그것보다 언제입니까?"

"뭐가?"

"결혼식 말입니다."

"……."

"설마, 아직 연인 사이도 아닌 겁니까?"

"……."

"아직 손도 못 잡으신 건 아니겠죠?"

"할 일이 없나 보군. 찰트에게 일은 안 가르치나?"

"끝낸 지가 언젠데 아직도 그걸 할 거라 생각하십니까."

이안은 이마를 짚었다.

이슈가 저렇게 수다쟁이였다면, 가신을 바꿔야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그가 한 이야기가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결혼식이라…….'

유라시아 대륙은 결혼을 빨리 하기 때문에 세리아 나이라면 최소한 약혼 정도는 하는 것이 당연했다. 더군다나 귀족들 같은 경우는 스무 살 정도에 결혼하는 것을 아주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결혼 자금이라면 걱정 마십시오. 이젠 창고에 돈이 넘쳐서 문 밑으로 금화가 빠져나오려고 합니다."

분명 이안은 세리아와 결혼을 생각할 정도의 사이는 아니다. 더군다나 아직은 연인 사이라고 말하기에도 이른 상황이었다.

세리아를 떠올리자 그녀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기 시작했다.

'세리아…….'

상단을 크게 불리는 데에 '로엔그람 백작'의 이름이 상당히 큰 몫을 했다. 뭐라 해도 그는 슈레이더 왕국의 단 하나밖에 없는 소드 마스터였으니 말이다.

"저…… 상단주님?"

젊은 시녀 하나가 조심스레 세리아를 불렀다.

하지만 세리아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멍하니 턱을 괸 채 창밖을 보고 있었다.

"상단주님?"

"넵? 아! 로셀 양, 미안해요."

"무슨 생각을 하신 거예요?"

"아뇨, 단지. 아무것도……."

로셀은 프로시안 영지에서 시녀로 일했다가 브론테스 영지로 피난을 갔었다. 그러다 우연히 세리아가 이곳에서 상단주로 일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세리아의 시녀가 되기를 자청한 것이다.

"호호, 얼굴을 보아하니 창밖에 내리는 빗속에 누가 생각나시나 봐요?"

"아, 아니에요, 로셀 양!"

세리아가 다급하게 손을 휘젓자, 로셀의 표정이 더욱 음흉해졌다.

"바른대로 말해요, 아가씨!"

"끄응…… 로셀 양의 고집은 아직도 변하지 않았네요."

"원래 개 버릇 남 못 준다잖아요."

"호호! 나쁜 버릇인 거는 알고 있네요."

"빨리 얘기나 해 주세요. 누구예요? 아름다운 아가씨가 비 내리는 날 생각하는 님이라니. 아∼ 정말. 전 그런 사람 어디 안 나타나나?"

"성격 고치면 나타날지도 몰라요! 호호!"

"아잉! 정말, 아가씨∼!"

비 내리는 창문을 쳐다보는 세리아의 눈길이 더욱 그윽해졌다.

'비 내리면 생각나는 사람?'

단 한 사람뿐이었다.

'이안…….'

* * *

저벅저벅―!

과거 프로시안 백작령이었던 곳.

이제는 반역자의 땅이 되어 버린 이곳.

그곳에 검은 로브를 눌러쓴 남자 한 명이 성 앞에 섰다.

그자가 나타나자 경비를 서고 있던 병사 두 명이 창을 앞으로 내밀며 으르렁거렸다.

"이놈! 네놈이 감히 누구기에 백작 성에 발을 들이미는 것이더냐? 죽고 싶지 않으면 썩 꺼지거라!"

검은 로브를 눌러쓴 남자가 음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네놈은 내가 누군 줄 아느냐?"

하지만 로브에 달린 후드 때문인지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병사가 후드를 뒤로 젖히려고 앞으로 다가간 순간 눈이 동그래졌다.

"허, 헙!"

사람이 아니었다.

해골.

썩어 버린 얼굴과 눈이 있어야 할 곳에서 무저갱 같은 검은 안광, 그리고 햇빛 속으로 살짝 드러난 손은 하얀 뼈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병사는 간신히 머릿속에 넣어 두었던 정보 하나를 꺼낼 수 있었다.

"리, 리치?"

"네놈들에겐 볼일 없다. 그만 죽어라."

조용히 병사들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는 리치.

그의 양손이 섬전 같은 속도로 뻗어지더니 병사들의 목을 단숨에 잡아 버렸다.

"크, 큭! 커억!"

"컥! 컥!"

숨이 막히는지 허공에서 바동대는 경비병들.

발악을 하기 위해서인지 창으로 심장 부근이라 생각되는 곳을 찔렀지만, 창촉이 도리어 부러져 버렸다.

리치는 신의 명을 거역한 자.

심장이 존재하지 않고, 라이프베슬이라는 생명을 담은 용기가 따로 있었다. 그 용기나 머리가 부서지지 않는 한은 절대로 죽지 않는 불사의 존재였다.

콰득―!

리치가 힘을 주자 목이 부러지며 병사 두 명이 그대로 절명하고 말았다.

쿵!

그가 손에 준 힘을 풀자 스르륵 떨어지며 땅바닥에 아무렇게 널브러졌다. 리치는 당당히 문 앞에 서더니 가볍게 시동어를 읊었다.

"언락(Unlock)."

그러자 신기하게 잠겨 있던 문이 열렸다.

"뭐, 뭐냐!"

그 순간, 후드가 벗겨지며 기사들이 놀란 음성으로 검을 빼 들었다.

"헤일론 백작을 보러 왔다."

"네놈은 감히 누구기에 헤일론 백작 각하를 뵙고자 하는 것이냐. 병사 두 명을 죽이고도 살아 나가길 바라느냐!"

"내 말에 따르지 않아도 좋다. 다만 후에 일어날 일은 나도 장담하지 못한다."

무미건조한 말이지만 참으로 섬뜩한 말이었다. 수십의 기사가 지키는 백작 성을 단 혼자의 몸으로 쳐들어왔다니.

"으, 으음!"

기사들은 리치의 손에 맺힌 붉은 기운에 식은땀을 흘렸다. 한눈에 보아도 고위급 서클 마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의 열기였다. 캐스팅도 없이 고위급 서클 마법을 사용한다면 최소 6, 7서클은 된다는 말이 아닌가.

익스퍼트들이 아무리 날고 긴다 하지만,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마법사들 앞에서 숫자의 개념은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자, 잠깐 멈춰 주시오."

대치 상황을 깨는 이든의 음성.

헤일론 백작의 부관인 이든이 그들 사이에 끼어들며 리치에게 고개를 살짝 숙였다.

"어서 오시지요. 백작 각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번에는 그만 넘어가지만 다음번에도 이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아무리 헤일론 백작이라 해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이든이 끼어든 이상 기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명실상부 이든은 백작의 부관으로, 거의 남작 급의 권위를 행세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리치는 재빨리 손에 든 마법을 캔슬하고 이든을 뒤따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백작 성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기사들이며 병사들 모두가 당장이라도 반란을 일으킬 것 같은 폭풍 전야 같은 고요함이 가득했다.

'이런 지경에 처했으니 나한테 도움을 청하게 되는군. 흐흐흐!'

이곳에 오는 동안에도 마을에 사람들을 보기가 힘들었다. 영지 안에도 영지민들이 돌아다니는 경우는 거의 볼 수 없었다. 이미 그들도, 왕궁에서 헤일론 백작령을 반역자 집단으로 몰아 버렸으니 곧 토벌한다는 소문을 얼핏 들은 이상 바깥을 돌아다닐 수가 없었다.

한참을 걷고 나서야 본관에 도착한 이든은 접대실의 문을 열자, 헤일론 백작이 자리에서 일어나 맞이했다.

"오! 어서 오시오. 연락을 보름이나 전에 주었는데 이제야 오시다니, 기다리느라 목이 빠지는 줄만 알았다오."

"미안하게 됐군. 여기 오는 동안에 일이 워낙 많다 보니 변방까지 신경 쓸 시간이 있어야지, 원."

하지만 헤일론 백작은 리치의 말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리치의 실력으로 보았을 때, 분명히 텔레포트 몇 번이면 이곳 영지에 단숨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렇다 해도 아쉬운 것은 헤일론 백작이었으니 당장 뭐라고 역정을 낼 수는 없었다.

"그건 그렇고, 내가 얘기한 것은 어떻게 되었소?"

초조한 기색으로 묻는 헤일론 백작은 자신이 기다리는 대답이 입에서 흘러나오길 바라고 있었다.

"아, 그거 말인가? 마스터께서 말씀하시길 특별히 윤허해 주신다 하더군."

믿기지 않는 얘기.

"저, 정말이오?"

"뭐 하러 거짓을 얘기하겠는가?"

"지금 바로 가능하겠소?"

"좀 기다려야 되겠는데……."

"그건 아니 되오. 그놈이 3일 후면 이곳으로 진격하기로 되어 있소! 더 이상 기다릴 여유 따위는 없단 말이오."

"자네 사정이지 내 사정은 아니지 않은가?"

흠칫!

검은 안광에서 쏟아지는 살기가 소드 마스터인 헤일론 백작의 기를 단숨에 죽였다.

'여, 역시 7서클 마법사!'

대륙십강에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지만, 헤일론 백작이 알기에 이자는 대륙십강 내에서도 수위에 들 수 있는 엄청난 실력을 가진 흑마법사였다.

'프라스 제국의 킹 제레브의 그림자!'

7서클 흑마법사이면서 킹 제레브를 섬기는 자이기도 했다. 평생을 그의 그림자에 녹아들어 살며 때때로는 잔인한 손속을 대신하기도 하는 자.

헤일론 백작도 필립 후작이 아니었다면 이자를 아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었다.

"미, 미안하오. 내가 잠시 흥분했소."

"쯧쯧, 어디 그래서야 소드 마스터라고 할 수 있나? 다음부턴 입 조심하도록 해. 그 더러운 성깔이 언제 자네의 목을 죄어 올지 모르니 말이야."

"명심하겠소."

'빌어먹을 해골바가지 새끼. 개 같은 말만 하는군.'

고개는 숙이지만, 마음속의 무릎은 절대 굽히지 않는다.

7서클 마법사의 힘은 거의 대륙십강 급의 실력을 냈으니, 그가 굽실거리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따라와라."

리치는 말없이 일어나서는 유유히 방을 나섰다.

'개새끼. 이 일이 끝나고 나면 너 역시 살려 주지 않겠다.'

헤일론 백작은 이를 악물며 조용히 따라갈 뿐이었다.

저벅저벅―!

어두운 통로를 지나 무수히 많은 계단을 내려가자 작은 실험실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먼지만이 수북이 쌓였던 곳이 리치가 살짝 손을 들어 올리자 잠시 후 깨끗한 모습으로 변했다.

"저 돌 위에 가서 상의를 벗고 누워라. 이 의식은 신성한 것이다. 옷을 입은 자에게는 할 수 없다."

"정말 그분이 소환되시는 것이오?"

헤일론 백작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묻자, 리치가 노성을 터트렸다.

"감히 그분을 의심하는 것이냐! 네놈은 그분의 존함을 듣는 것만으로도 영광스러워해야 할 것이다."

마계를 지배하는 것은 바로 마왕 발록이다. 그리고 발록의 아래 열 개체의 마족이 존재하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리치와 계약을 맺은 자였다.

"설마 나도 그분과 계약으로 인해 당신처럼 그렇게 변하는 것은……?"

"걱정 마라! 이건 리치의 모습일 뿐, 그분과는 하등 관계가 없다."

리치의 경우 해가 떠 있는 시간엔 많이는 아니라도 능력 중 반이 손실된다. 헤일론 백작은 리치의 모습이 되어서 검을 휘두르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리치의 능력에 몸서리를 쳤다. 낮인 지금도 이 정도인데 만약 밤이라면 어느 정도란 말인가?

"알겠소."

헤일론 백작은 조금 떨떠름한 모습으로 서서히 상의를 벗어 내렸다. 그의 탄탄한 근육이 드러나며, 갖가지 상처들이 모습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역시 소드 마스터.

은연중에 흘러나오는 기세가 실험실을 압도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리치의 표정은 태연하기만 할 뿐이었다.

'빌어먹을 로엔그람 백작! 내 땅에는 자유스럽게 침범해도 나갈 때는 절대 놔주지 않을 것이다!'

* * *

"에이취!"

검을 휘두른 이안이 검지로 코를 쓱쓱 닦으며 흐리멍덩한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누가 내 욕을 하나? 아, 이크!"

슈악―!

이안이 있던 곳으로 낡은 글레이브 하나가 빠른 속도로 휘어 지나갔다. 이안이 재빨리 고개를 숙이며 그대로 발을 오크의 복부에 꽂아 버렸다.

퍼억!

"취, 취익!"

상당히 고통스러운지 말을 제대로 내뱉지 못하는 오크.

"오늘은 이쯤 해 두기로 할까?"

이안은 오크를 죽이기보다는 그냥 놔주었다. 드워프들과의 계약을 맺은 후로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꼭 리도우 산맥에 들어와서 오크들의 상태를 지켜봤다.

드워프들도 오크들이 전멸하여 산맥에 이상이 생기는 것을 우려했는지 오크들의 전멸을 전적으로 반대했다. '수는 백 이하로 줄이되, 전멸은 시키지 마라'가 그들의 조건이었다.

이젠 이 거대한 리도우 산맥에 고작 30여 마리의 하르말티아 오크 종족을 제외하고는 어느 오크도 존재하지 않았다.

거의 천에 육박했다가 30으로 줄었으니 그동안 이안에게 엄청나게 당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젠 살아남은 오크들도 이안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지, 그를 볼 때마다 몸을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며 두려운 기색을 얼굴에 역력히 드러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이, 인간, 협상하자. 취익!"

그중에 대장 격으로 있는 놈이 선발되었는지 용기 있는 발언을 하며 앞으로 나섰다.

"무슨 협상?"

이안이 꽤나 재미있다는 듯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취익! 워, 원한다면 드워프들과 인간 영토는 침범하지 않겠다. 취익! 그, 그러니 우리들을 제발 살려 달라."

오크들도 자기들이 어떤 피해를 주었는지 잘 골라내고 있었다.

"물론 당연히 그래야지. 하지만 지금까지의 행동으로 볼 때 믿을 수가 있어야지. 말로만 하기에는 좀 그렇고……."

오크 대장은 자신의 가슴을 주먹으로 두들겼다.

"걱정 마라! 취익! 우리 오크, 절대 거짓말 안 한다. 취익!"

"인간이란 것이 워낙 의심이 많아야지. 난 믿을 수가 없겠는데."

이안이 미심쩍은 눈초리로 오크 대장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뭐, 뭘 더 원하나. 취익! 마, 말만 해라. 취익! 들어줄 수 있는 건 들어주겠다."

그동안 세리아가 상단 운영을 아주 효과적으로 한 덕에 영주인 이안이 톡톡히 부자 행세를 할 수 있었지만, 모두 전쟁 자금이나 영지에 쓰였으니 현재 개털이 된 상태였다.

그동안 오크 놈들이 드워프들에게 벗겨 먹은 것이 한둘이 아니니 오크들을 조금 벗겨 먹는다고 해도 한 치의 미안함도 없었다.

"아, 알았다. 따라와라. 취익!"

"역시! 약속을 지키는 종족은 오크뿐이지."

그동안 영주 일을 하며 성격이 판이하게 변한 이안이 실실 웃으며 오크의 뒤를 쫓았다. 앞서가는 오크는 뭐가 불만인지 얼굴을 찌푸린 채 구시렁거렸다.

"으응?"

"왜 그러나? 취익!"

"아니, 단지 하늘이……."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하늘.

하지만 어째선지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졌다.

가슴을 옥죄어 오는 듯한 불안함.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마기가 느껴지는 것이었다.

헤일론 백작령 토벌 이틀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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