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인하르트-32화 (32/60)

■ 제32장 드워프들과의 거래, 그리고 빌어먹을 오크들 □

"뭐라고? 다시 말해 봐."

"뜻밖에도 산맥에는 드워프들이 살았고, 저는 가져간 포션으로 다행히도 드워프들에게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불행 중 다행이로군."

이안의 얼굴에 화색의 빛이 떠올랐다.

그간 영지 때문에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일주일 만에 본 이안의 얼굴은 초췌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이안의 기뻐하는 모습에 레더린 자신도 기쁘기 그지없었다.

"가져간 포션이 그렇게 활용될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도움을 준 인간들에게 은혜를 갚고 싶다며 말하자 전하를 말씀드렸더니 흔쾌히도 만남을 가져 보겠다고 했습니다."

"그럼 오크 본진은 알아보았나?"

"지도에 명확하게 표기해 왔습니다."

"좋아!"

이안은 만족스런 웃음을 지으며 지도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본진뿐만이 아니었다. 일주일 동안 리도우 산맥을 누비며 알아 온 오크 캠프는 수십 개가 넘었다.

"드워프들이 시간과 장소는 어디라고 가르쳐 주지 않았나?"

"이틀 후, 자신들의 목책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조건이 있다고 합니다. 전하 혼자 오시랍니다."

"혼자?"

"예, 드워프들이기 때문에 워낙 호탕하여 뒤에서 꿍꿍이를 꾸미는 짓은 하지 않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음, 그렇겠지?"

게다가 이안이라면 어떤 상황에서든 충분히 몸을 뺄 수 있었다.

"게다가 목책 1킬로미터까지는 저희가 안전하게 호송하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몬스터라 하더라도 전하께는 털끝 하나 못 건드리게 할 것입니다."

자부심이 깃들어 있는 레더린의 말투.

하지만 이안은 한사코 거절했다.

"아니, 괜찮을 것 같은데. 오히려 여럿이서 움직이면 오크들의 눈에 띄기 십상이고."

"예? 그럼 리도우 산맥에 혼자 들어가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괜찮다고 보는데? 뭐, 문제 있나?"

"아, 아닙니다."

"알았어. 수고했다. 레더린, 피곤할 텐데 푹 쉬도록 해. 가면서 시녀한테 찰트와 이슈, 세리아 좀 불러오게 해 주고."

"명을 받듭니다, 전하."

탈칵.

문을 닫고 나가 버리는 레더린은 이안과 둘이 있을 때는 꼭 전하라는 칭호를 붙여 주니 충성심이 여간 대단한 게 아니었다.

단순한 칭호지만 레더린이 이안을 얼마나 믿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이안이 자신에게 올라온 서류들을 정리하면서 찻잔을 전부 다 비웠을 때 세 사람이 동시에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백작 각하."

찰트와 이슈는 공손한 표정으로 인사를 올렸다. 거의 방구석에만 있던 이안이었지만, 세리아를 보자 급작스럽게 심하게 가슴이 요동쳤다.

이안은 가까스로 심장 소리를 제어한 채 편안한 표정으로 그들을 맞이했다.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백작 각하. 무슨 일인지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음…… 지금 영지에 여유 돈이 얼마나 있지?"

돈을 관리하는 건 아직 이슈다. 찰트는 그에게서 많이 배우고 있지만, 돈 관리에 대해서는 이슈가 철저하게 지켜 나갔다.

이슈는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휴우∼ 한 푼도 없습니다. 이것저것 빼다 쓰다 보면 1골드조차 제대로 사용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작은 상단을 하나 인수한다면 돈과 시간은 얼마나 필요할 것 같나?"

"괜찮은 상단을 인수한다고 해도 10만 골드는 필요할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시간이라 하시면 족히 몇 달 정도는……. 헌데 상단은 무슨 일로 물으시는지요?"

"그럼 여유 돈 말고 급히 빼다 쓸 수 있는 돈이나 보석 같은 건 없나?"

"이, 이십만 골드쯤은 있을 겁니다. 아마도……."

아마도라는 말을 붙이는 걸 보면 자신이 없는 듯했다.

"영지를 담보로 잡고 돈을 빌린다면?"

"여, 영지를 말입니까?"

"원한다면 백작 작위도 담보로 잡는다면? 그렇다면 얼마까지 나오지?"

이슈의 눈은 물론 찰트나 세리아까지 동그랗게 떠져서 입을 쩍 벌렸다.

"서, 설마 매관매직을 생각하시는 것입니까?"

매관매직이 성행하는 것은 아니지만,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이슈는 이번엔 확신에 찬 듯 말했다.

"영지와 백작의 작위라면 아무리 급하게 돈을 구한다 해도 백만 골드는 충분히 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서류 한 장을 써 줄 테니 돈을 빌리도록 하거라."

"예?"

"아마 오늘 중으로 우리 영지에 꽤나 커다란 상단이 들어오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들에게 포션 값과 수량에 대해 알아보도록 해."

"아, 알았습니다."

"돈을 구하면 곧바로 중소 상단을 하나 인수하도록 하고, 그 상단주는 세리아가 해 주길 바란다."

"내, 내가?"

세리아는 남작의 영애로서 철저하게 교육을 받았다. 마법적인 재능도 충분하고 두뇌 회전까지 빨랐으니 상단주로서 부족함이 없었다.

"싫어? 하지만 영지에 그냥 앉아 있으려면 여간 심심한 게 아니잖아?"

세리아는 수줍게 웃더니 손을 흔들었다.

"아, 아냐. 오히려 기뻐. 영지에 도움이 될 수 있으니 그것으로 만족하고 있어."

"알았다. 그럼 그렇게 알아두도록 할게. 자, 빨리빨리 움직이자고! 찰트는 내가 이틀 후에 잠시 자리를 비울 테니 그 사이에 영주 일 좀 대신해 줘. 뿐만 아니라, 대륙 전체 드워프 물건 판매망을 알아보도록 하고."

"명을 받듭니다, 백작 각하."

이안은 창문으로 비치는 하늘을 바라보더니 뒷짐을 지었다.

'이틀 후가 기대되는걸?'

이틀 후, 이안은 모처럼 리도우 산맥에 오르자 상당히 기분이 좋아졌다. 영주 일이 생각보다 고되기도 했기 때문에 그동안 바깥바람은 제대로 맡아 본 적도 없었다.

이안은 동네 뒷산 오르듯 간편한 복장과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은연중에 드러나는 드래곤의 피 덕분에 생긴 살기로 웬만한 맹수들조차 쉽게 덤비질 못했다.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이안은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등산길에 올랐다.

"생각보다 먼데? 조금 속도를 올려 볼까."

이안이 가볍게 땅을 박차며 신법을 펼쳤다. 지도에 그려진 목책까지의 거리는 반나절 정도. 하지만 신법을 발휘해서 간다면 한 시간이면 충분히 도착할 거리였다.

잠시 후, 이안은 거의 성만 한 목책이 눈앞에 보이자 상당히 놀란 기색을 띠었다.

'역시 드워프다, 이건가?'

견고하긴 이를 데 없으며 고작 목책에서 웅장한 느낌을 받으니 충격이었다.

"누구냐! 이곳과 관계가 없다면 썩 물러나라. 그렇지 않으면 뜨거운 맛을 보게 해 주마."

바로 그 순간, 목책 위에서 경비를 보고 있던 드워프가 크게 호통을 쳤다.

"얼마 전, 이곳의 대표자와 만나자는 약속을 해서 찾아왔소. 그러니 문이나 열어 주시오."

"인간인가?"

"그렇소."

"옆에 작은 문을 열어 줄 테니 그곳으로 들어오도록 하게."

드워프들이 지나다니게 만든 문이다 보니 이안은 허리를 거의 반이나 꾸부리고 나서야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레더린이 올린 보고서에 따르면 드워프들의 숫자는 약 삼백 명이라고 들었다. 하지만 이안이 보기에는 5백 명은 될 듯한 수였다.

"환영한다, 인간 대표. 내가 바로 이곳을 책임지고 있는 족장 '마가'다."

"반갑습니다. 로엔그람 영지의 백작인 로엔그람 폰 이안이라 합니다. 편하게 이안이라 불러 주시면 됩니다."

"크핫핫! 젊은 대표께서 상당히 놀란 듯싶군. 자자, 그럼 어서 안으로 들어가세."

상당히 호쾌한 마가였다.

다른 드워프들보다도 산만 한 덩치에 몇십 년은 면도를 안 한 듯한 모습이 인간인 이안이 보기에는 충격이었지만 드워프들에게는 당연한 모습이었다. 자리를 옮기면서 마을 안을 둘러보니 남자고 여자고 도통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죄다 그놈이 그놈 같군.'

아이들이야 얼굴이 조금 어려 보이거나 수염이 없는 걸로 판별할 수 있지만 성인 여자와 아이들은 구별하기 힘들 때도 있었다. 성인 여자 또한 어려 보일 수도 있고, 수염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가 우리 집이다, 젊은 인간 대표. 대표자로서 온 것이니 편하게 있어도 될 거야. 핫핫핫!"

"알겠습니다."

마가의 집은 상당히 작은 모습이었다. 드워프들의 키와 덩치를 고려해 만들어졌으니 당연히 의자는 작지만 앉는 부분은 넓을 수밖에 없었고, 천장이 좁아 목책을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허리를 반은 접어야 했다.

"내가 듣기론 그쪽 인간 중 하나가 우리 드워프 일족을 살려 준 일이 있었다는데, 그건 정말 고맙게 생각한다네, 인간 대표."

"그렇게 생각해 주시다니 감사할 뿐입니다."

"아냐, 아냐. 드워프 일족을 살려 줬다는 건 인간으로서 자부심을 가져도 돼. 핫핫!"

"하하하! 그렇습니까?"

"그래, 난 인간 대표가 이곳에 온 이유가 궁금해. 나와 할 말이 있나?"

드워프 일족은 성미가 아주 급하기 때문에 이런 자리에서도 간단한 인사조차 제대로 나눌 수 없었다.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는 모습에 이안은 꼿꼿한 자세로 앉았다.

"제가 이곳에 와서 족장님과 이야기를 하고자 함은 바로 드워프와 인간으로서 교역을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교역?"

"드워프들에게도, 인간들에게도 공존하는 데에 많은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그 예로 오크를 들 수 있죠."

"크음! 오크들이라면 말도 말게."

얘기를 듣던 드워프들 모두가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으로 이를 갈았다. 오크들 때문에 그들은 자신감을 하루하루 잃어 가는 모습이었다.

"뿐만 아닙니다. 드워프 일족은 안타깝게도 마법사나 신관, 포션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지."

드워프 일족이 숫자가 적은 것도 그러한 이유였다. 이들은 치료법이 포션이나 마법에 의존하지 않고 모조리 자연 치유력에 의지했다. 그러니 제대로 큰 병이나 상처를 입으면 죽기 일쑤였다.

"젊은 인간 대표, 안타깝게도 우리도 그러한 문제점을 잘 알고 있지. 허나 우리는 과거 인간들에게 커다란 배신을 당했기 때문에 현재는 인간들과는 교역이 없어. 그렇기 때문에 포션이나 마법사 따위는 애초에 기대조차 할 수 없지."

"그러면 이렇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만약 족장님께서 원하신다면 포션을 지속해서 지급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시간은 약 6개월에 한 번, 원하는 수량으로 말입니다."

"음? 교역이라 한다면 우리들한테도 원하는 것이 있겠지?"

이안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긍정의 표시였다.

"드워프제 무기와 액세서리들이 필요합니다."

족장 마가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언제부턴가 오크들 때문에 광산을 제대로 찾기가 힘들어졌어. 지금은 오히려 우리도 무기를 만들고 싶어서 안달이 난 상태다. 그렇기 때문에 교역은 힘들 것 같군."

"원한다면 금속 또한 지급해 드리겠습니다."

순간 드워프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하지만 마가는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그것으로는 힘들 뿐이야, 젊은 인간 대표. 아무리 지급을 받는다 해도 한계가 있지. 우리가 원하는 양은 엄청날 테니까."

"그렇군요.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떻습니까?"

"생각이 있나?"

"리도우 산맥, 이 산맥에 있는 대부분의 오크들을 섬멸해 드리겠습니다."

"뭐, 뭣이?!"

드워프들이 놀라서 발딱 일어섰다. 오크들이 그들을 얼마나 위협했는지 알 만한 행동이었다.

"드워프 일족에게도 그렇지만 오크들은 저희 영지에도 상당히 곤란스런 놈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에 대대적으로 오크들을 섬멸할 생각입니다."

"그건 곤란해. 인간 대표에게는 상관없지만, 다른 인간들에게 우리의 위치가 발각되는 것은 무의미해."

드워프들은 거의 잊혀 가는 존재다. 인간 세상에 나와 있는 드워프들이 몇몇 있긴 하지만, 그들의 일족이 어디 사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드워프들을 노리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분명 드워프는 노예로서 최고의 가치를 자랑했다.

"그건 상관없습니다. 저 혼자 할 생각이니까요."

"혼자?"

"지금 장난하나? 인간들이 그동안 아무리 강해졌다고 해도 오크의 숫자는 한둘이 아니야. 게다가 그들이 하르말티아 종족이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지 않나? 핫핫! 인간 대표께서 허풍이 꽤나 심하시군. 만약 인간 대표께서 오크들을 모두 물리쳐 준다면 교역을 허락해 주지."

믿을 수 없다는 듯 마가는 장난삼아 말을 툴툴 꺼내었다.

"조, 족장님! 어떻게 그렇게 빨리!"

"괜찮아. 오크들이 그렇게 쉽게 물러간다면 우리들이 그렇게 고생했겠나?"

"그, 그건 그렇지만……."

드워프들은 바깥세상에 대해 자세히 모르기 때문에 이안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안은 갑자기 눈을 가늘게 뜨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무슨 일인가, 인간 대표?"

"혹시 오늘 무슨 날입니까?"

"그것이 무슨 뜻인가?"

"놈들이…… 왔습니다."

벌컥!

그때, 거의 부서져라 드워프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족장님, 빌어먹을 오크 놈들이 드디어 쳐들어왔습니다! 숫자만 족히 이백은 될 것입니다!"

"뭐, 뭐야? 비상벨 울리지 않고 뭐 하는 거야!"

"이미 비상벨을 울렸습니다. 하지만 숫자가 너무 많습니다. 지금 목책 앞은 혼전 중입니다. 이렇게 되면 목책에 상당한 피해가 갈 것입니다."

"제길! 아, 알았다. 나도 곧 준비해서 나가지. 인간 대표, 미안하지만 여기서 기다려 주게. 곧 끝내고 돌아오도록 하지."

"……."

이안은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그리고 그의 눈빛은 빠른 뜀박질로 사라지는 마가의 뒷모습을 쳐다볼 뿐이었다.

"뜨거운 물을 부어! 오크 놈들이 못 올라오게!"

"물이 없습니다!"

"그럼 돌이라도 던지든가 화살이라도 쏴!"

난전의 모습은 인간들의 전투에서와 마찬가지로 별반 다를 게 없었다. 힘이 약한 어린 아이들은 여인들의 손을 붙잡고 물을 끓였고, 남자들은 앞장서서 싸웠다.

"족장님!"

그때 마가가 나타나더니 목책 아래에서 기어 올라오는 오크 놈들의 머리통을 그대로 배틀 엑스로 찍어 버렸다.

"그래, 상황은 어떠한가?"

"처음과는 달리 아주 지독하게 달라붙습니다. 게다가 점점 오크 놈들의 숫자도 불어나는 걸 보면 지금쯤이면 삼백 마리를 넘어섰을 것입니다."

마가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양손에 침을 퉤! 뱉었다.

"빌어먹을!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는 오크들이 전부 연합이라도 했나 보군. 으라차차!"

그리고 곧바로 내리쳐지는 배틀 엑스. 또다시 어김없이 오크 한 마리가 그대로 밑으로 떨어져 내려갔다. 하지만 악독한 오크들은 동료의 시체를 밟고 올라왔다.

처음에만 해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 드워프 일족은 점차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이, 이러다 함락이라도 되는 날에는!'

끔찍한 일이다. 안에는 아이들과 노인들이 있었다. 드워프 일족 또한 가족을 아주 끔찍하게 사랑했다.

"크윽! 족장님, 놈들의 숫자가 더욱 불어났습니다."

"힘을 내라! 우리 뒤에는 가족들이 있다!"

"젠장!"

가족이라는 말에 힘을 얻은 드워프들은 어금니를 꽉 깨물며 마지막 힘까지 쥐어짰다. 하지만 상황은 악해지기만 할 뿐, 도저히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조, 족장님, 모, 목책이!"

"목책 성문이 무너지려 합니다!"

"뭐, 뭣이?"

오크들의 무게가 워낙 무거웠던지라 그놈들 수백이 달라붙자 나무의 무게가 버틸 수 없었던 모양이다.

끼이익! 쿠웅!

드디어 목책 성문이 무너지고 말았다.

"취익! 취익! 안으로 돌격하라! 취익!"

"몇 놈만 사로잡고 모두 죽여라! 취익! 취익!"

"젠장! 이 빌어먹을 오크 놈들!"

수백의 오크가 한순간에 유입되자 드워프들의 손속이 매섭고 바빠졌다. 물을 끓이던 아이들이나 노인들은 물을 엎어 버리고 뒤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젠장!"

상황은 너무나 지독했다.

짐작은 했지만 생각보다 많은 숫자다. 이안이 땅에 떨어진 배틀 엑스를 가볍게 차올리자, 그의 손으로 딸려 들어왔다.

"……."

자기 키보다도 커다란 배틀 엑스를 올려다보며 이안이 가볍게 던지자 어린 드워프를 공격하려던 오크가 정확히 반으로 갈라졌다.

"끄아악!"

녹색 피를 흠뻑 뒤집어쓰자 비명을 내지르며 혼절하는 드워프.

스르릉―!

그의 상태를 확인할 새도 없이 이안이 손을 내뻗자 검집에 딸려 있던 '로열'이 스스로 뽑혀 나왔다.

철컥.

그리고 손에 감겨지는 철의 느낌.

잠시 후 그의 검에 푸른 빛깔의 오러가 솟구치기 시작했다.

오러 블레이드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로열과 오러가 어울리면 오러 블레이드만 한 공격력을 낼 수도 있었다.

3대 제국검 중 하나.

분명 로열은 이 대륙에 있어 최고의 보검이리라.

"젠장!"

피가 얼굴에 튄다.

오크 놈들의 피다. 초록 빛깔의 피는 워낙 많이 봐 온 탓에 익숙해져 있지만 코를 찌르는 역한 피 냄새는 도통 적응이 되지 않는다. 도끼를 휘두를 때마다 머리가 어지러운 것이 자꾸 예상보다 오크 놈들의 공격을 많이 허용하게 된다.

분명 목책의 성문은 뚫렸지만 오크 놈들이 쉽게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한두 마리 놓친다고 해도 뒤에서 드워프 전사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단번에 목을 잘라 버렸다.

'큭! 몸이 옛날 같지 않구나.'

어쩔 수 없이 늙으면 약해지는 것이 당연하다.

'늙으면 죽어야 한다더니, 그 말이 딱이로다.'

옛날에만 해도 한 손으로 가볍게 들었던 배틀 엑스가 이젠 두 손으로 들어도 체력적으로 지쳐 갔다. 이럴 때일수록 칼칼한 목과 스트레스를 풀어 줄 맥주 한 잔이 절실했다.

'크! 맥주 한 잔이면 죽어도 여한이 없을진대.'

드워프 인생에 있어 오크 놈들과 엎치락뒤치락하다가 죽는 것이 아까운 것이 사실이었다. 명색이 그래도 장인의 피를 이어받은 한 명의 장인으로서 망치가 아닌 도끼를 휘두르다 죽는다는 것은 생각도 못한 죽음이었기에.

"취이익!"

앞에 있던 어린 오크의 목을 단숨에 날려 버리자 이젠 도끼가 더 이상 들어지지 않았다.

"으득! 으읍!"

얼굴이 붉어지도록 힘을 주어도 3센티 허공에 들려진 도끼가 다시 바닥으로 기울어졌다. 뒤에 있던 드워프들이 그런 마가를 안타까운 눈빛으로 쳐다봤다. 하지만 묘한 긴장감도 불러일으켰다.

앞장서서 싸우는 마가가 밀리면 바로 곧 자신들에게 오크들이 몰려들어 올 것이기에. 죽는 건 두렵지 않지만 오크들에게 허망하게 죽는다는 사실이 좀 아까울 뿐이었다.

쿵!

마가는 배틀 엑스를 그대로 놓아 버리고 주먹으로 오크의 안면을 공격했다.

'흐흐! 이거 괜찮군. 생각보다 녹슬지 않았어!'

다시 한 번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하지만 막강한 글레이브를 장착한 오크들이 그의 팔목을 공격했다.

빠각―!

"크읍!"

팔목에 쓰라린 고통을 동반하며 비명을 질렀다. 오른손을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아무래도 부러진 듯했다.

"젠장!"

"헉! 조, 족장님, 아, 앞!"

족장이라면 당연히 앞장서서 싸우는 것이 맞다. 마가는 이 순간에 자신이 죽어야 한다는 참담한 기분에 멍하니 시선을 빼앗겼다.

오크다. 그것도 오크 삼백 마리를 이끄는 오크 우두머리가 마가의 이마를 향해 글레이브를 찔러 들어가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눈을 꽉 감고 고통의 순간을 기다리던 마가에게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아프지 않다.

신기한 일이다.

눈을 살짝 떠 본다.

'젊은 인간 대표?'

분명 드워프들에 비해 좁디좁은 어깨. 엘프들같이 호리호리한 몸매.

드워프들에게 있어 하나도 맘에 들지 않는 신체를 지닌 청년이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한 발자국조차 움직이지 않을 것 같은 그의 표정에 오크들 모두가 턱 막힌 듯해 보였다.

'넓다!'

분명히 그러했다. 착각이 아니다.

그의 등은 태산이었다.

츄악―!

허공을 나르는 거대한 왼쪽 팔뚝.

툭!

땅에 거대한 소리와 함께 떨어지자 잠시 꿈틀거리더니 움직임이 멎었다.

"취, 취이익!"

오크 우두머리의 비명 소리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의 비명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이안의 검은 다시 한 번 허공에 푸른 궤적을 그리고 있었다.

허공을 날아오르는 수십 발의 검기들.

구하천풍검법 3초식 와룡연쇄참이었다. 초식 명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마음만으로도 펼칠 수 있는 경지.

그것이 바로 이안의 경지, 화경이었다.

우두머리를 선두로 수십 마리의 오크가 몰살을 당했다. 하지만 아둔한 오크들이었기에 선두에서 무슨 일을 당했는지도 모른 채 계속해서 돌격해 들어왔다.

파파팟!

연계적으로 공격하는 검의 난무.

오로지 검 하나만을 든 채 연약해 보이는 팔뚝으로 검을 휘두를 때마다 오크 서넛이 그대로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단 한 명이었다. 드워프들에게 있어 그저 젊디젊은 인간 대표일 뿐인 그가 검을 빼어 든 이후, 오크들 중 단 한 마리도 어깨를 넘어오지 못했다.

슈슈슈슈슉―!

수백 마리를 말도 안 되는 무위로 처리해 버리는 이안.

'이, 이럴 수가!'

'세상에!'

드워프들은 입만 떠억 벌린 채 다물 줄을 몰랐다.

철컥!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이안의 검이 스르륵 흘러내렸다.

힘없이 축 늘어진 검은 스스로 검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막대한 내공을 필요로 하는 허공섭물의 경지.

이안에게 있어 허공섭물은 누워서 떡 먹기일 정도로 손쉬운 일이었다.

"자, 자네……!"

드워프들도 방금 일어난 일이 마법이 아니란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순수한 무위로도 그러한 경지가 펼쳐질 수 있다는 것에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을 뿐.

"후우!"

수백 마리를 일순간에 도륙한 이안이 짧게 한숨을 내쉬며 소매로 땀을 닦아 냈다. 아무리 화경의 경지인 소드 마스터 상급일지라도 오크 수백 마리를 도륙함에 따라 사용된 마나가 상상 이상이었다.

"괜찮나? 인간…… 대표?"

설사 조금이라도 글레이브에 상처라도 입은 것이 아닐까 염려되는 눈치였다. 하지만 이안은 처음 왔을 때와 별로 변한 것이 없었다. 다만 땀만 조금 흘리는 것일 뿐.

싱긋!

이안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족장님, 약속 지키시는 겁니다?"

* * *

아직 세세한 정도의 교역이 협약된 것은 아니지만, 교역권을 따낸 것만으로도 만족할 만한 성적이었다. 이안의 무위를 본 드워프들은 의심을 품고 있던 것을 모두 머릿속에서 지워 버려야 했다.

"첫날만 포션 50개라……. 일단 그 정도라면 해결이 불가능한 정도는 아니지."

물론 포션만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오히려 포션보다는 '맥주'를 원하는 듯해 보였다. 그들이 좋아하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면 바로 장인의 신이 내린 '손재주'며 두 번째는 바로 모든 갈증을 해소해 주는 '맥주'였다.

맥주는 평민들조차 쉽게 구해 마실 수 있는 값싼 음료였다. 다만 인간이 먹는 맥주와 드워프가 마시는 맥주는 다르기 때문에 얼마나 충족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맥주를 가져온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들뜨는 모양들이었다.

이안에게 있어 드워프들의 장점은 바로 '손이 크다'는 것이었다. 포션 50개와 맥주 몇 통으로 무기와 액세서리가 대량으로 들어오게 생겼다.

"꾸준히 거래할 상단을 구해 놓는 것도 좋겠지. 내일 물건을 옮기는 일은 내가 해야겠군. 어차피 오크들을 토벌하는 것도 내가 맡은 일 중의 하나이니."

이안은 등에 짊어지고 있는 가방을 보며 희희낙락한 표정을 지었다. 6, 7서클 마법사들이 만든 아티팩트 가방은 아니지만, 적어도 작은 방 하나 정도의 압축 공간이 고작 가방 하나에 들어 있다니 놀라울 지경이었다.

게다가 무게 또한 고작 100분의 1이란다. 그렇다면 포션 50개를 옮기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후후!"

입가에 생기는 작은 미소.

이제 나머지 일은 헤일론 백작을 박살 내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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