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인하르트-31화 (31/60)

■ 제31장 영지 안정화 □

"누, 누구시오?"

얼굴이 누렇게 뜬 경비병이 초조한 기색으로 물었다.

아닌 게 아니라, 로엔그람 외성 바깥에는 5천은 될 법한 대군이 집결해 있었으니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그 때문인지 한산하기만 하던 로엔그람 영지에는 2천 명의 병사들이 모두 집결하여 두려운 낯빛을 역력히 드러내고 있었다. 지금 그들에게 지휘관이 없으니 공격이 감행된다면 막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철컥―!

레더린이 마차를 삼중으로 호위하다 앞으로 나섰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플레이트 메일이 괴성을 질렀다.

"오늘부로 이 영지는 로엔그람 백작님의 영지로 결정됐다. 어서 썩 문을 열고 영주님을 맞이하라!"

그의 고함 소리에 잠시 아찔한 기분이 들었던 경비병들이 호들갑을 떨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들의 눈에도 국왕의 옥새가 찍혀 있는 종이 뭉치가 보였다.

"로엔그람 영주님께서 오셨다. 문을 열어라!"

"문을 열어라!"

끼릭끼릭. 쿵―!

경비병들은 외성을 둘러싸고 있는 해자 위로 도개교를 내리고 곧바로 영주를 환영했다. 영주 대행을 맡고 있던 서기관 한 명이 잠을 자다 일어났는지 눈을 비비며 부랴부랴 마차 앞으로 다가왔다.

"어, 어느 분께서 영주님이신지요?"

마차의 창문이 좁은 틈을 두고 열렸다. 그 안에서 흑발의 미남자가 영주 대행 서기관을 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영주인 로엔그람 백작이다. 너는 누구냐?"

"저, 저는 이슈라고 합니다."

"작위는?"

"준남작입니다. 로엔그람 자작님께서 돌아가신 이후 쭉 영주 대행을 맡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영지에 대해 자네만큼 빠삭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는 얘기군."

이슈는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요. 이 영지에 대해서 저만큼 아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흑발의 미남자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더니 마차 안의 누군가를 불렀다.

"찰트, 이리 나오거라."

"예, 백작 각하."

여기 오기 전 입을 맞춰 놓은 탓인지 찰트의 입에서도 자연스레 백작 각하란 이름이 나왔다. 찰트가 마차 문을 열자 이슈는 그 틈 사이로 흑발의 미남자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생각보다 젊군!'

이제 갓 20대에 접어든 자로 보였다. 로엔그람 영지까지는 아직 궁의 일이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흑발의 미남자가 누구인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찰트, 넌 이제부터 이슈라는 자의 일을 맡는다. 이슈는 찰트에게 자신의 직무를 빠른 시일 내에 가르쳐라."

"명을 받습니다."

"엥?"

찰트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슈는 납득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까지 영주 대행을 맡고 있던 자신의 일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린 것이다.

"배, 백작 각하, 그럼 저는 무엇을 하는지요?"

"말하지 않았나? 찰트에게 그동안 해 온 일을 가르쳐라. 찰트는 유능한 마법사이기 때문에 금방 터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그 일이 끝나고 난 뒤에는……?"

"내 비서다. 나와 찰트가 없을 경우 계속해서 영지를 이끌면 된다."

이슈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아, 알겠습니다."

흑발의 미남자는 그의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병사들이 쉴 곳이 필요하다."

이슈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5천 명이나 되는 병사들이 쉴 곳은 없습니다. 고작해야 천 명 정도……."

"막사를 지어라. 한동안 그곳에서 지내게 만들면 된다. 그리고 내일부터라도 모든 전문가들을 불러 병사들이 쉴 집을 짓게 만들어라. 물론 병사들 또한 자신의 집은 자신이 짓게 만들 것이다."

"알겠습니다."

"아마 한 달간은 수천 명의 사람들이 계속해서 영지로 유입될 것이다. 그들을 내쫓지 말거라."

"예."

병사들의 가족들이었다. 본대가 로엔그람 백작 영지로 이동했으니 가족들도 오는 것이 당연했다. 흑발의 미남자는 마차에서 내리더니 자신의 영지를 한껏 기대에 부푼 표정으로 돌아봤다.

"좋군, 생각보다."

"예전 로엔그람 자작님께서 아주 자식처럼 여기던 곳입니다."

"그랬겠지, 후후! 좋아. 영주성으로 이동한다. 이제부터 영주성까지는 걸어갈 테니 마차와 말들은 모두 마구간으로 보내라.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다. 해산시켜라, 레더린."

"명을 받듭니다, 전…… 아니, 백작 각하."

찰트만큼은 익숙하지만 레더린은 황태자에게 백작이라고 부르는 것이 조금은 곤혹스런 모양이었다.

잠시 후, 레더린이 십 분 만에 병사들을 모두 해산시켰다. 그들은 이슈를 따라온 몇몇 행정관들을 따라 병사들의 숙소 근처에 막사를 지어 생활하게 되었다.

영주 일행들은 이슈를 따라 영주 성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프로시안 영지와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커다란 영주성.

본관, 동관, 북관, 서관, 남관으로 나뉘어 본관은 영주가 살고, 동관은 기사들이, 북관은 시녀들이, 서관은 시종들이, 남관은 행정관들이 살고 있었다.

'이곳이군. 이제 이곳에서 모든 일이 시작되는 건가.'

흑발의 미남자, 아니 이안은 만발한 웃음을 지으며 본관으로 향했다.

첨벙―!

욕실의 크기는 매우 컸다. 분명 이안 혼자 쓰기에 과분할 정도로 컸다.

영지에 도착한 지 어느덧 일주일.

그간 영지 순찰로 거의 시간을 보낸 이안은 귀족 생활에도 익숙해지고 있었다. 일주일 동안 영지 순찰뿐만 아니라 제일 먼저 귀족으로서의 명예나 습관 등에 대해 배웠기 때문인지 이젠 그의 어느 면을 보아도 귀족의 카리스마가 풍겨 왔다.

이안이 욕실에서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시녀 둘이 수건을 가져와 몸 구석구석을 닦아 주었다. 처음에만 해도 시녀들을 물리치며 혼자 닦았던 이안의 모습을 지금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지금은 당연하다는 듯이 손을 높이 들며 붉어진 시녀들의 얼굴을 철저하게 무시하며 옷을 입었다.

백색의 정장.

검은 머리와 대조적으로 아주 깔끔한 면을 보여 주는 정장은 영지에서 알아주는 디자이너가 제작한 것으로 제법 값비싼 천이 들어갔지만 이안의 표정은 무덤덤하기만 했다.

"이제 됐다. 머리는 내가 만지도록 하마."

"예, 영주님."

이안은 시녀들을 물리치고 거울을 보며 기다란 머리를 하나로 묶었다. 아무리 귀족의 생활에 익숙해졌다곤 하지만 중원에서부터 간직해 온 이 머리카락은 도저히 자를 수가 없었기 때문에 평소에는 이렇게 묶고 다니고 있었다.

"가 볼까?"

영지 내의 아침 식사는 그리 유쾌한 시간이 아니었다. 일주일간 아침 식사는 사실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른 채 접시를 비워야만 했다.

찰트와 이슈는 누렇게 뜬 얼굴로 아침 식사에 참여했다. 밤을 꼬박 새웠는지 눈 밑에는 다크서클이 자리 잡고 있어 잠을 자지 않아도 피곤하지 않은 이안에게는 그들이 측은하게만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들도 정작 식사를 하기보다는 가져온 종이 뭉치들을 한 번씩 읽어 보더니 남몰래 한숨을 푹 쉬었다. 보다 못한 이슈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이안을 쳐다보았다.

"영주님, 영지 상황이 사실 말이 아닙니다. 병사들의 숫자가 급격히 많아지면서 영지민들은 불안에 떨고 있고, 헤일론 백작, 아니 그 반역자가 동부에서 강한 힘을 지녔다는 걸 알아 버린 것 같습니다."

"음, 그렇군."

"세금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그동안 저희 영지는 1년에 약 4할의 세금을 걷어 왔습니다. 허나 지금 영지 상황으로는 병사들이나 그의 가족들의 집을 지어 주기가 막막합니다."

"엥? 그동안 모아 두었던 재물들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이지?"

"로엔그람 자작님이 돌아가시면서 모든 재물은 국고로 환수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세금은 매년 몰려들어 오는 몬스터들의 공격을 막기에도 빠듯합니다."

"몬스터? 로엔그람 영지에 몬스터가 있단 말인가?"

처음 듣는 얘기였다. 어디에서나 존재할 법한 평범한 영지 로엔그람에 몬스터가 존재한다니?

"예전에 계셨던 장안의 숲만큼은 아니어도 로엔그람 영지에도 오크 존(Zone)이 존재합니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그리 크지 않은 규모였지만 요 5년 사이에 웬 오크 한 마리가 로드를 자청하며 나타나는 바람에 그의 휘하에 강력한 오크 전사들이 육성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안이 잘 몰라서 그렇지, 어느 영지나 몬스터들이 사는 곳은 있기 마련이다. 다만 그 규모가 크지 않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숫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토벌을 한다. 하지만 전부 토벌을 하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는다. 오크들 또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생물체다. 그들이 숲에서 사라지면 또 다른 포식자가 나타날 것을 불러일으키는 짓이며, 병사나 기사들의 훈련이나 실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레더린."

"옛, 백작 각하!"

레더린이 불쑥 일어나 명을 받았다. 그의 표정에는 어느 때보다도 사뭇 긴장한 것이 역력히 드러났다.

"지금 당장 기사들로만 이루어진 부대를 편성한다. 모든 기사들을 데려갈 것이다."

"옛, 백작 각하!"

레더린이 준비를 위해 나가고 나자 이슈는 얼빠진 표정으로 있었다.

"영주님, 설마 기사들로만 오크들을 건드릴 생각은 아니시겠지요?"

"왜 아니겠는가."

"세상에! 그 오크들의 종은 하르말티아입니다. 하르말티아가 뭔지 아십니까? 오크 중에서도 제일 강력하기로 소문이 나 있고, 지능 또한 거의 인간과 다를 바 없을 정도입니다."

오크들의 몸은 보통 초록색 빛을 띠고 있지만 하르말티아 종은 갈색 빛을 띠고 있다. 덩치는 보통 오크들과 다른 게 없지만 민첩 면에서는 두어 배가 빨랐다. 소문에는 두세 마리만 뭉쳐도 트롤을 때려잡는다고 알려져 있었다.

"오크는 오크일 뿐이다. 오크들의 숫자는 파악했나?"

"1년 전에 조사한 기록에 따르면 800마리였습니다. 허나 오크들의 생식 속도로 보았을 때 현재는 천 마리를 넘어설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

"그렇습니다."

"훗! 기사들을 믿어라. 기사들 또한 레더린이 가르친 만큼 강력하기 그지없을 것이다. 보통 기사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단순히 믿으라는 말이지만 이슈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알겠습니다, 영주님. 허나 최고의 방법은 그 우두머리를 잡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알고 있다. 아무리 머리가 좋고 전투 능력이 뛰어나도 우두머리만 잡으면 오합지졸일 뿐이지."

씨익 웃고 있는 이안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가득해 보였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난 이안은 화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화단에는 매일같이 세리아가 있었다. 그녀는 첫날, 아침 식사가 거의 회의에 가깝다는 것을 알아 버렸는지 그 다음 날부터 아침밥은 꼬박꼬박 자신의 방 안에서 챙겨 먹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이렇게 화단에 와서 꽃을 가꾸고, 낮이 돼서야 칸과 함께 마법 연구를 시작했다. 하지만 요즘 칸은 얼굴을 보기 힘들었다. 4서클 마스터인 그에게 5서클 마법사인 찰트는 훌륭한 스승이었다. 비록 연배가 그리 차이 나지는 않았지만 같은 길을 걷는 자로서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었다.

비록 찰트가 이슈와 함께 일을 처리하기 때문에 많은 시간을 마법에 몰두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칸과의 시간은 꼬박꼬박 빼놓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되니 요즘 혼자 있게 되는 시간이 많아진 세리아.

이안은 영주일 때문에 많이 같이 있어 주지 못했기 때문인지 왠지 미안한 생각부터 들었다.

세리아는 멀리서 이안이 다가오는 것을 봤는지 꽃 한 송이를 따다가 이안의 앞에 내밀었다.

"이 꽃 이름이 뭔지 알아?"

"아니, 잘 모르겠는데……."

붉은색 장미보다는 아름답지 않지만 가시가 없는 꽃이었다. 하지만 어느 관점에서 보면 장미보다도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안은 머리를 긁적이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피이, 이 꽃이 얼마나 유명한데."

입술을 쭉 내밀고 고개를 홱 돌리는 그녀의 모습에 이안이 웃음꽃을 피웠다.

"미, 미안! 꽃에는 도통 관심이 없어서."

"호호호! 아이참, 그렇게 미안할 건 없잖아? 뭐, 이안이니까 모를 수도 있지."

이안이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엥? 그 말뜻은 뭐지요?"

"호호! 아냐, 아냐. 이 꽃을 꼬옥 화병에 꽂아서 방에 두도록 해. 밤에는 머리를 맑게 하는 효능이 있으니까."

"고마워."

"꽃말은 뭔지 알아?"

"아니. 뭔데?"

"음…… 비밀!"

"뭐어?"

"호호! 나 먼저 들어간다? 영주님께선 바쁘시니 빨리 일이나 하시죠? 메에롱!"

혀를 삐쭉 내밀고 장난치는 그녀의 모습에 이안의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렸다.

세리아는 자신에게 이런 대담함이 있을 것이라곤 예상치 못했다. 방금 상황에서 제일 놀란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유리칼루스.

꽃말은 '용기'였다.

대륙에서도 유리칼루스는 매우 보기 드문 꽃인데, 가격 또한 귀족들도 엄두도 못 낼 만큼 아주 비쌌다. 세리아가 매일같이 화단에 있었던 이유는 이 유리칼루스를 찾기 위해서였다. 장미들 사이에서도 아주 극악한 확률로 나타난다는 유리칼루스.

거의 동화에서 보면 왕자가 공주에게 청혼할 때 쓰는 꽃이었다. 공주들은 그 꽃을 받으면 무조건 청혼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였으니, 세리아는 이안이 그 뜻을 알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내밀었던 것이다.

물론 공주와 왕자의 역할이 바뀌었지만.

'헤헤! 언젠가 알게 되겠지만 지금은 상관없잖아?'

"하르말티아가 어떤 오크인지 전해 들은 것으로 알고 있다."

100명의 기사들. 전원 익스퍼트 급 기사들이었으니 왕실 기사단과 한판 붙어도 절대 밀리지 않았다. 그만큼 레더린이 심혈을 기울이고 기울이며 키운 기사들인 것이다.

그들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대열을 점검하고 있었다.

오크들을 족치려면 절대 말을 타고 가선 안 된다. 또한 무장도 안 된다. 오크의 귀는 무척이나 예민하다. 그들의 감각에 걸리지 않고 적당히 정찰만 하는 거라면 하드 레더 아머를 입고 최소한의 장비로 가는 것이 좋다.

이쯤 되면 툴툴대는 기사들이 하나 둘 나와도 이상할 것이 없지만, 그들에게는 레더린에게만큼은 충성심이 가득했다.

오히려 황태자인 이안에게보다도 레더린에 대한 충성심이 더욱 갸륵한 것이었다.

"출발은 밤에 한다. 아무래도 밤에 이동하는 것이 더욱 안전할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의견 있나?"

기사들 무리들에서 제법 젊은 축에 속하는 기사 하나가 손을 들었다.

"전하께서도 함께 가십니까?"

"물론 아니다. 전하께서는 영지 일이 무척 바쁘신 분이다. 처음에는 같이 가시려고 했지만, 예정이 변경됐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것으로 의견은 없는 것으로 판단하겠다. 밤에 다시 모인다. 알겠나?"

"옙!"

"영주님, 왕궁에서의 보고입니다."

"알았다."

이안의 영지는 수정 구슬을 이용하여 정보를 얻는다. 거의 왕실 쪽 귀한 사람들이나 사용할 수 있을 정도지만, 이안은 반국왕파의 반역을 눈앞에서 패퇴시킨 슈레이더 왕국의 영웅으로 부상하고 있다. 그런 그에게 통신용 수정 구슬이 없을 리가 없었다.

"영주님, 어서 오십시오."

찰트가 미리 대기하고 있었다. 통신용 구슬을 사용하려면 최소 3서클 이상의 마법사가 필요하다. 그래서 찰트가 대신하여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슈레이더 왕국의 국왕 전하십니다."

"연결해라."

"알았습니다."

찰트는 수정 구슬 앞에서 다시 말을 이었다.

"로엔그람 영주님을 바꿔 드리겠습니다."

찰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이안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는 수정 구슬로 보이는 카이어스 국왕의 어린 모습에 고개를 숙였다.

"신 로엔그람 폰 이안이 위대한 슈레이더 왕국의 국왕 전하를 뵙습니다."

"후후! 로엔그람 백작의 모습을 보니 좋군요. 한 달 만에 보는 건가요?"

"3주입니다."

"허어∼ 시간이 너무 늦게 가는 것 같아요. 사실 오늘 백작에게 연락을 한 이유는 회의 결정이 났기 때문이에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안의 눈이 반짝거렸다.

"귀족들의 반발이 꽤 심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저를 대신하여 전하께서 노고를 끼쳐 송구합니다."

"뭐, 이 정도야 평소에 있던 일이니까……. 우리 슈레이더 왕국은 펠타온 제국을 지지하기로 했어요."

"그렇습니까?"

이미 80% 이상은 예상하고 있던 대답이었다. 거의 확신하고 있었지만, 직접 듣고 나니 안심이 되었다.

"프라스 제국을 지향하자고 하는 귀족들이나 중립을 지키거나 더 지켜보자는 말이 있긴 했지만 주변 국가들 중 대부분은 이미 선택을 한 것 같더라고요. 사실, 프라스 제국은 멀리 떨어져 있지만 펠타온 제국은 가깝다 보니 그들의 의견도 결국 묵살이 되었지만요."

"다행이군요."

"곧 사절단을 꾸려 펠타온 제국으로 갈 거예요. 그 사절단을 이끌 귀족을 생각하고 있지만, 여러 귀족들의 입을 모아 생각해 봤을 때 로엔그람 백작밖에 없어서 이렇게 연락을 직접 하게 된 거죠."

그랬다. 사실 친히 국왕이 이 일을 전할 의무는 없었다. 하위 귀족들이 사실을 전해 듣고 연락을 해 주어도 충분한 일이다.

"어째서입니까?"

이안은 그것이 궁금했다. 사절단을 왜 자신이 대표로 임명되었는지 말이다.

"사절단을 이끌 카리스마나 힘에 관해서는 슈레이더 왕국 어딜 뒤져 봐도 로엔그람 백작 이상 가는 자는 보기 힘들 테니까요."

'역시 그랬던 것인가…….'

누가 뭐래도 이안은 슈레이더 왕국의 제일의 기사다. 헤일론 백작이 역적으로 몰리게 되었으니 이제 슈레이더 왕국에서 소드 마스터는 이안 혼자뿐이었다.

"사절단의 출발은 언제입니까?"

"한 달 후? 아니, 두 달 후일지 그건 아직 확실히 정해지진 않았죠."

"알았습니다."

"그럼 그렇게 알고 이만 통신을 종료하도록 하죠. 다시 보는 날까지 건강하길 바라요, 백작."

"전하께서도 강녕하십시오."

뚝―!

수정 구슬에서 카이어스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자 이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괜히 갑자기 귀찮은 일을 떠맡은 듯한 느낌이다.

"사절단으로 떠나기 전 헤일론 백작령에 대해서는 어떻게든 해야 되겠군."

옆에 있던 찰트가 조용히 물어 왔다.

"지금 당장 공격을 감행할까요, 백작 각하?"

"음……."

헤일론 백작은 이제 반역자다. 그가 영지로 어찌어찌해서 잘 돌아갔다고 해도 영지민들까지 그를 영주로 인정할 것인지는 미지수였다.

"헤일론 백작령 토벌은 어느 정도나 준비되었나?"

"이미 도착한 순간부터 진행되어 있었습니다. 허나 그렇다 해도 식량이나 무기, 장비들이 여럿 부족합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백작 각하? 지금이라도 다시 국왕 전하께 연락을 취해 국고의 돈을 빌려야 되는 것 아닙니까?"

"정녕 나랏돈이라도 빌려야 토벌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애초에 국왕 전하께서 토벌을 명령하셨습니다. 하지만 정작 토벌을 위해 나온 돈이라고는 영지를 운영하기에도 빠듯한 돈입니다. 그것으로는 토벌은커녕 시녀들 월급 주기도 힘듭니다."

"휴우∼ 어쩔 수 없지. 현재 나라가 워낙 불안정세니까. 안정화가 되려면 족히 1년은 기다려야 할 테지."

반국왕파가 모조리 잡혔으니 그들의 삼족까지는 전부 화형에 처할 것이었다. 하지만 반국왕파가 모두 잡혔으니, 그간 슈레이더 왕국을 운영하던 실세들이 없어졌다. 귀족들을 새로 뽑고 다시 일할 귀족들이 필요했다.

"알았다. 그럼 이 문제는 두고두고 논의하도록 하지."

"알았습니다, 백작 각하."

* * *

리도우 산맥.

로엔그람 영지를 둘러싸고 있을 정도로 커다란 이 산맥은 하르말티아 오크 종족이 영역을 만들어 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만 영역을 짓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드워프.

키는 인간의 반만 하고 우스꽝스런 모습이지만 그들을 대체적으로 전사의 종족이었다. 우람한 팔뚝은 자신의 키보다도 두 배나 큰 배틀 엑스를 위협적으로 휘두를 수 있는 힘을 지녔고, 짧은 다리는 빠른 민첩력을 가질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하르말티아 오크뿐만 아니라 드워프들 또한 이 산맥 깊숙한 곳에 자신들의 터전을 만들어 두고 있었다. 워낙 깊숙한 곳인지라 수백 년간 인간의 발이 닿은 적이 없는 산세였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단 한 가지 고민이 있었다.

바로 하르말티아 오크들.

그들은 리도우 산맥을 자신들의 영역이라 생각하며, 이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드워프들에게 악감정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심심할 때면 한 번씩 쳐들어와서 목책을 두들겼다.

드워프들의 손재주가 뛰어나 단순한 목책이라 하더라도 견고하기 그지없지만, 빠른 성장 속도로 강한 전사가 되는 오크들과는 달리 개체 수가 적은 드워프들로서는 막아 내기가 여간 곤혹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이 개빌어먹을 오크 놈들."

붕붕―!

한눈에 보아도 2미터는 될 법한 거대한 배틀 엑스가 허공에 위협적인 소리를 내며 날아다녔다.

"취엑! 취익! 취익!"

"드, 드워프 놈이 반항한다! 취익! 사로잡아라. 취익!"

"멍청한 놈들! 내가 죽기 전에 네놈들 서넛은 더 황천길 동무로 갈 것이다. 오크 놈들의 노예가 되느니 혀를 깨물고 자살하리라!"

철강 기술에서 진보가 없는 오크들은 아무리 지능이 뛰어난 하르말티아족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드워프들을 사로잡아 뛰어난 무기들을 강제로 만들게 했지만, 드워프들의 자존심이 워낙 센지라 잡아오면 잡아오는 대로 족족 혀를 깨물어 자살했다.

하지만 아둔한 오크들은 자살하는 이유도 파악하지 못한 채 무조건 드워프만 보면 산 채로 잡기 위해 애썼다. 오늘도 어김없이 정찰을 나왔던 드워프 둘이 오크들에게 포위되어 배틀 엑스를 휘두르고 있었다.

"크윽!"

그때, 비교적 다른 드워프보다 체구가 작은 드워프의 신형이 급격히 무너졌다. 오크의 글레이브가 어느새 복부에 반쯤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아디온! 이, 이런!"

"취익! 드워프는 한 놈만 잡으면 된다. 취익! 상처가 난 놈은 죽여라!"

"크아악!"

오크 전사의 명에 오크가 글레이브를 더욱 깊숙이 박기 시작했다. 조금씩 비틀며 안으로 들어가는 글레이브를 보며 공격당한 드워프는 고통에 못 이겨 혼절해 버렸다.

'어, 어떻게 해야 하지?'

살아남은 드워프의 눈에 퇴로의 길이 언뜻 보였다. 하지만 동료를 들쳐 업고 뛰기에는 무엇보다 무리가 있었다. 순간 갈등의 빛이 눈가에 스치고 지나갔다.

"흥! 명색이 난 드워프다. 적어도 동료를 배신하지는 않는다! 덤벼라, 아둔한 돼지 놈들!"

드워프는 이곳에서 뼈를 묻기로 결정했는지 마지막 남은 힘까지 쥐어짜며 배틀 엑스를 휘둘렀다. 그의 손속에 오크가 하나 둘 쓸려 나갔지만, 포위하고 있는 오크들의 숫자만 해도 물경 30마리를 넘어서고 있었다.

이대로만 가면 오크들에게 제압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드워프는 거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할 때쯤에 배틀 엑스를 쥔 손을 그대로 놓아 버렸다. 끝까지 휘두를 힘이 없었기 때문에 이대로 혀를 깨물고서라도 자살할 생각이었다. 불행 중 다행인지 살수를 펼치던 오크가 그 도끼에 이마를 맞고 그대로 뒤로 벌러덩 넘어졌다.

'아, 이제 끝이구나.'

그렇게 눈을 서서히 감는 드워프, 아니 가디우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슈슈슝―!

'뭐, 뭐지?'

판도를 뒤엎는 소리.

그것은 분명 엘프들이 잘 쏜다는 '활'을 튕길 때 나는 소리였다.

'엘프들인가?'

가디우스가 눈을 살짝 뜨자, 검을 들고 나타나는 백여 명의 인간들. 귀가 뾰족한 것이 아니니 분명히 인간이 맞았다.

가디우스는 눈을 비비고 다시 쳐다봤다. 리도우 산맥에 인간들이 침입했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하나 지금 이 순간만큼 인간들이 반가운 것도 처음이었다.

"오크들을 모두 섬멸해라! 자비 따윈 없다."

"예, 대장님!"

"취익! 이, 인간들이다. 도주하라!"

요 며칠간 오크들을 대량 살상하고 사라진다는 신출귀몰한 인간들이었다. 오크들도 보고를 받은 적이 있는지라 상대의 숫자가 자신들보다 많을 경우에는 도주를 하라는 말이 있었다.

"오크들을 은밀히 쫓아 놈들의 본진을 찾아라."

"예!"

"그럼 만나는 시간은 5시간 후다. 그때까지도 오크들의 본진을 찾지 못한다면 이곳으로 돌아와라."

"옙!"

일부러 전부 오크들을 소탕하지 않고 도주하는 오크들의 뒤를 밟아 본진을 찾으려는 속셈이었다. 오크들은 그런 줄도 모르고 뒤에 추적자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도망가는 셈이었다.

산맥으로 들어온 지 삼 일째.

아무리 소드 마스터인 레더린이라도 만나는 오크들을 모조리 앞장서서 섬멸하다 보니 지치는 것이 당연했다. 하물며 기사들은 오죽할까?

"휴식이다!"

"와아아! 대장님 만세!"

6시간 만의 휴식이다. 기사들은 물론 휴식을 명한 레더린조차 휴식 시간이 그리도 달콤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산맥을 내려갈 수가 없었다. 아직 그들에게는 초기 목표인 정탐과 정보를 만족할 만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최소한은 오크들의 본진 정도는 알아둬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틀 동안 번번이 본진을 눈앞에서 놓치는 바람에 아쉬움은 극에 달해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 북서쪽에서부터 바람소리에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리도우 산맥은 거의 오크들의 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른 야수나 몬스터들은 진작 오크들에게 밀려 쫓겨난 뒤였다.

한데 그런 곳에서 병장기 소리라니?

호기심이 날 수밖에 없었다.

"전원 다시 출전이다."

"옛!"

다른 기사들 같으면 짧은 휴식 시간에 입이라도 툴툴거리겠지만, 이 기사들은 전혀 달랐다. 고작 10분밖에 쉬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체력적 회복은 모두 끝내 놓은 듯싶었다.

레더린이 빠르게 움직이자 기사들 또한 각각 석궁과 활을 들고 달리기 시작했다. 기사라고 해서 모두 검이나 자신 있는 무기만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레더린 또한 그는 소드 마스터이기도 하지만 레인저들과 버금갈 정도의 석궁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음?"

병장기 소리가 들리는 곳에 도착하자, 레더린은 흥분한 기색을 띠었다.

드워프다. 드워프가 오크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드워프들은 도움을 받으면 반드시 은혜를 갚는 그런 종족이다. 인간들처럼 뒤통수를 치는 그런 자들이 아니었다.

상황을 봐도 위험한 분위기.

지금 나서서 도와준다면 반드시 후에 도움이 될 터였다.

게다가 오크들 숫자도 한둘이 아니었다. 운이 좋다면 본진까지 알 수도 있는 일.

일석이조였다.

"오크들을 모두 섬멸하라! 자비 따윈 없다."

"예, 대장님!"

이구동성으로 외치는 기사들, 처음엔 화살이나 쿼렐이 오크들을 휩쓸고 지나가더니 이젠 자신 있는 무기를 들고 오크들을 섬멸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오크들이 부랴부랴 도망치기 시작했다. 바로 이 순간만을 기다려 온 레더린이었다.

"오크들을 은밀히 쫓아 놈들의 본진을 찾아라."

"예!"

"그럼, 만나는 시간은 5시간 후다. 그때까지도 오크들의 본진을 찾지 못한다면 이곳으로 돌아와라."

"옙!"

추격을 하는 기사들은 이 지형을 잊지 않겠다는 듯 눈에 끝까지 담고서 곧바로 사라졌다.

"인간에게 도움을 받는 날이 오게 되다니……."

드워프 가디우스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러다 솥뚜껑만 한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쳤다.

"아차! 내 정신 좀 보게. 아디온, 정신 좀 차려 봐! 괜찮나?"

도저히 괜찮다고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가디우스는 글레이브를 빼내지 않고 그대로 들쳐 맸다.

"이봐, 인간들. 고맙다는 인사를 못해서 미안하네. 봐서 알겠지만, 내 친우가 좀 위험한 상황이라."

"괜찮다면 저희가 응급치료를 해 드리지요."

"응급치료? 무슨 수로 한단 말인가?"

레더린이 살짝 고개를 까닥이자, 기사들 중 하나가 가져온 가방에서 작은 유리병 하나를 꺼내었다. 붉은 액체가 살짝 흔들리는 것이 보이자, 가디우스는 그제야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포션?"

트롤이나 오우거의 피를 바탕으로 신전에서 제작한다는 포션의 가격은 꽤나 비싸지만, 레더린은 앞으로의 드워프와의 관계를 위해 한 병이 아닌 두 병을 꺼내었다.

"글레이브를 빼내면 고통으로 기절 상태에서 깨어날지도 모르니 잘 잡아 주십시오."

가디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네."

'셋, 둘, 하나.'

레더린이 속으로 시간을 세면서 순식간에 글레이브를 복부에서 빼내었다.

"크아아악!"

"됐다! 어서 포션을!"

한 병은 입가에 붓고, 한 병은 상처 부위에 꼼꼼히 바르기 시작했다. 응급치료라고 할 것도 없이 거의 완벽한 치료였다.

하지만 포션으로 인한 치료 방법은 생각보다 고통을 수반하기 때문에 위험한 상황이 아니라면 사양하고 싶은 방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보통은 신관이나 마법사에게 치료를 받는 것을 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포션에도 장점은 있다. 마법사나 신관에게 받은 치료는 몸 안에 있는 세포를 끌어다 쓰기 때문에 많이 사용할 경우에는 대상자의 수명이 줄어든다. 하지만 포션은 세포를 재생시켜 주는 것이기 때문에 수명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아디온, 날 보게나! 괜찮나?"

"크으윽! 가, 가디우스?"

"오! 마르드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인간들, 정말 고맙네. 이 은혜는 반드시 갚겠네."

"제 이름은 레더린이라고 합니다. 그저 같은 신의 아들로서 도움을 주었다니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핫핫핫!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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