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인하르트-30화 (30/60)

■ 제30장 헤어짐, 그리고 영지로 □

"자, 어디 한번 어울려 보자꾸나."

우우우우웅―!

수천 명의 병사와 대치하고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이안의 표정은 담담하기만 했다. 오히려 위급한 상황에서도 몸을 뺄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가득했다.

만상귀일신공을 운용하자 몸에 서서히 축기가 진행되며 내공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느린 속도이기는 하지만 한 번에 많은 양이 유입되기에 비어 버린 단전을 채우기에는 부족함이 없을 지경이었다.

"놈에게 쉴 틈을 주지 마라! 공격하라! 공격!"

슈슈슈슈슉―!

처음에 쏟아진 것은 석궁의 쿼렐 공격이었다. 쿼렐은 관통할 만한 데미지만을 가지고 있을 뿐, 마스터의 경지인 이안에게 그다지 충격을 주지는 못했지만 허점을 만들어 내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창을 높이 들어 올려라!"

"투창 준비!"

기다리고 있던 기사 열 명이 랜스를 높이 들어 올렸다. 죄다 익스퍼트 급 기사들로서 마나가 담긴 랜스는 맹렬한 기운을 내포한 채 이안을 향했다.

"투창!"

기사들의 실력이 얼마나 빼어난지 아군에게는 거의 피해가 가지 않으면서 이안에게 다소 충격을 줄 수 있을 만한 공격이 주를 이루었다.

차차차차착―!

검막으로 쿼렐 공격을 손쉽게 막아 낸 이안이었지만, 등을 내보인 그에게 투창되어 날아온 랜스는 위협적이기에 충분했다.

"큭!"

이안은 그 자리에서 곧바로 허공으로 뛰어오르며 랜스를 밟아 더 높이 치솟아 올랐다.

"저럴 수가!"

투창된 랜스를 마치 계단처럼 이용한 이안의 신기에 기사들이 모두 어벙한 표정으로 이안을 바라볼 뿐이었다. 만상귀일검법의 일초식 풍룡비상으로 몸을 가볍게 만들어 순식간에 더 높이 뛰어 올라간 이안은 천근추의 수법으로 몸을 무겁게 만들어 파지풍룡을 이용해 지상으로 내려왔다.

쿠콰앙―!

마치 융단폭격이라도 맞은 것처럼 땅이 거대하게 울리며 병사들이 서 있던 곳에 작은 지진이 일어났다. 그것은 마법으로 지진을 만들어 낸다는 어스퀘이크 같은 위력이었다.

하지만 믿지 못할 위력을 보여 준 이안의 신형도 크게 휘청거렸다. 그만 너무 높이 올라간 탓인지 파지풍룡은 오히려 양날의 검이 되었다. 공격력이 강한 만큼 반탄력이 전신을 통해서 전해져 온 것이다. 무엇보다 하체는 검을 지탱하고 있지 않았다면 서 있을 수도 없을 것 같았다.

입 안에 감돌던 혈향이 꾸역꾸역 올라오더니 입술을 타고 한 줄기 피가 흘러내렸다.

"쳇!"

이안은 소매를 들어 올려 교묘하게 가리고서 스윽 닦았다. 하지만 이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몇몇 기사가 그 모습을 보고 소리쳤다.

"놈도 내상을 입었다!"

"충격이 적지 않을 것이다. 단숨에 몰아치면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

"후작님, 지금이 기회입니다!"

기사들의 소리는 온몸이 굳어 있던 병사들에게 힘을 실어 줄 수 있었다.

"놈을 잡아라. 놈을 잡는 자에게는 귀족의 신분을 약속하겠다!"

후작의 조건은 파격적이었다. 기사들은 물론 병사들의 눈이 순식간에 탐욕의 눈빛으로 변했다.

"우와아아아!"

한순간에 사기가 충전된 병사들은 무기를 힘주어 쥔 채 이안에게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이안은 왼쪽 발을 앞으로 내밀고 무릎을 살짝 굽힌 채 검을 서서히 들어 올렸다.

양팔에 거대한 납을 달아 올린 것처럼 무거웠다. 이안은 신법을 펼칠 체력도 없다는 듯이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처럼 체념한 표정을 지었다.

푸악―!

"아직 네놈들에게 죽을 정도는 아니다!"

이안은 달려오던 병사의 목을 순식간에 날려 버렸다. 그리고 잠시 숨을 몰아쉬더니 곧바로 옆으로 다가오는 병사의 창을 비스듬히 막아섰다.

채엥!

강한 충격이 전신을 통하여 흔들렸다. 그에 맞춰 또다시 피가 울컥 솟으며 입술을 통하여 흘러내렸다.

"비리군."

피는 그렇게 맛있지 않았다. 자신의 피지만 비린 맛만 날 뿐, 좋은 맛이 날 리 만무했다.

푸슉! 슈악―!

검을 허공으로 높이 들어 올리며 그대로 세로로 병사의 몸을 쪼갰다. 내공을 담고 있는 검이었으니 힘이 없다 해도 몸을 가르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이놈, 그만 설치고 죽어라!"

푸슉!

한순간 허점이 드러나자 기사의 검이 이안의 왼쪽 어깨를 베어 냈다. 그러자 하얀 뼈가 그대로 모습을 드러냈다.

파앗!

이안의 어깨를 베어 낸 기사는 그 대가로 목이 날아가는 신기한 경험을 해야 했다. 그대로 이안이 기사의 목을 날려 버렸기 때문이다.

위이이잉!

손가락에 기이한 강기가 맺히더니 좌우 전방으로 마구 쏘아 내기 시작했다. 매직 애로우처럼 작은 마나의 집결체들이 날아가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샤샤샤샥―!

수십 번에 걸쳐 강기가 맺혔다가 쏘아지기를 반복했다.

강기 하나에 병사 하나가 미간이 뚫린 채 푹푹 쓰러져 갔다. 기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익스퍼트에 오르지 못한 기사들은 막지 못하고 쓰러져야 했다.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 빠르기를 지닌 칠십육로무형지를 막아 내기에는 무리가 따랐다.

죽어 가는 병사들이 하나 둘 생겨날 때마다 이안의 몸에도 무리가 따랐다. 강기를 맺을 때마다 피는 흘러내렸고, 만상귀일신공에 의한 패도적인 기운은 가면 갈수록 얕아지기만 했다.

풀썩―!

근 천에 가까운 병사를 일순간에 미간을 꿰뚫어 쓰러트린 이안은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무너져야만 했다.

"헉! 헉! 헉!"

숨을 몰아쉬는 이안은 비 오듯 쏟아지는 땀이 눈을 가리는 바람에 제대로 앞을 보기 힘들었다. 그가 쓰러지자 그간 눈치만 보던 병사와 기사들은 한 발자국씩 앞으로 걸어 나갔다.

기사들의 보호와 병사들의 방패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필립 후작은 그제야 슬슬 두려움을 씻고 한심한 눈으로 이안을 바라봤다.

"거 보아라, 아무리 날뛴다 하더라도 한 손은 절대 열 손을 막아 낼 수 없는 법이다. 소드 마스터니 뭐니 하는 것들도 죄다 인간이 아니고서 뭐겠어? 그들이라고 목이 꿰뚫리고 심장이 파열돼도 죽지 말라는 법 있더냐?"

이제 그는 이안을 내려다보는 말투를 내뱉었다. 마치 하인 대하듯 하는 그의 행동에 이안은 화낼 힘도 없었다.

필립 후작은 아직도 주춤거리는 병사들과 기사들에게 노성을 터트리며 다그쳤다.

"이놈들, 공격하지 않고 뭐하느냐! 어서 썩 저놈을 내 앞에 무릎을 꿇게 만들거라!"

"예, 옛, 후작 각하!"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마지못해 기사들이 쭈뼛쭈뼛 이안에게 검을 휘둘렀다.

"큭!"

이안은 수치심이 드는데도 불구하고 땅바닥을 구르며 치명상을 겨우 비껴가며 난도질을 당해야만 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위중한 상처들이 생겨나자 이안은 로열의 예기를 믿고 기사들의 하단을 마구 휘둘렀다.

초식이나 검식에 의하지 않고 그저 힘으로만 내려치는 것이었다. 기사들은 그의 공격에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막아 냈다. 아무리 로열이 좋은 검이라 한들, 철로 이루어진 검을 단숨에 베어 낼 정도는 아니었다.

"후작 각하, 마지막은 제가 장식하게 만들어 주십시오!"

그때, 상처를 어느 정도 신관에게서 치료받은 헤일론 백작이 주변의 검 하나를 발로 튕겨서 집어 들더니 이안의 앞으로 다가갔다.

필립 후작은 기사들의 믿음직스럽지 못한 모습에 못마땅해 하다가 헤일론 백작이 나타나자 눈에 띄게 반색했다.

"오, 백작! 그대가 나서 준다면야 걱정할 것이 없지. 그대 말대로 끝을 장식해 주게."

"감사합니다, 후작 각하."

쌍수를 들고 환영하는 필립 후작의 말에 헤일론 백작은 조소를 머금으며 이안의 목에 검신을 대었다.

"이대로 내가 오러 블레이드를 생성시키면 넌 죽는다. 알고 있느냐?"

"……."

이안은 오히려 그를 노려볼 뿐 아무런 말도 없었다.

"아무리 너의 경지가 올랐다 한들, 마지막에 웃는 자는 나였던 것이다. 멍청한 놈! 고작 혼자의 힘으로 대항하려 했다니 역시 나이에 걸맞게 어리석은 놈이었구나."

"난 죽지 않을 것이오."

이안은 기대하는 눈치였다. 아니, 거의 확신하고 있는 듯한 말투였다.

"틀렸다! 넌 이 순간 이 자리에서 죽는다."

"후후!"

이안은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웃기 시작했다. 그때, 보다 못한 필립 후작이 헤일론 백작에게 외쳤다.

"백작, 뜸 들이지 말고 어서 죽이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놈이란 말일세."

"알겠습니다."

대답한 순간 온몸의 마나를 끌어올린 헤일론 백작은 그것을 검에 서서히 주입시키기 시작했다. 오러가 검을 한 번 휘감자 목 언저리가 상처로 도배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치명타를 입힐 만한 공격은 아니었다.

"나를 유린한 것은 이 정도로 모자라나 후작 각하의 명이 있으니 이대로 죽여 주마."

꿈쩍도 않던 이안의 얼굴이 그때 갑자기 움직였다. 검을 내려치려는 순간, 이안은 온몸의 내공을 한순간에 폭발, 호신강기를 일으켰다.

"뭐, 뭐지?!"

그 순간, 당황하는 헤일론 백작에게 한 줄기의 오러가 쏘아져 날아갔다.

타앙!

"크흑!"

오러를 막아 낸 헤일론 백작의 몸이 크게 출렁거리며 신음을 흘렸다. 기척조차 없이 날아온 오러였기에 그는 데미지 때문에 얻은 상처를 챙길 시간보다 오러를 날린 상대를 찾는 데 여념이 없었다.

탁!

수천 명의 병사들이 바라보는 중년의 남자 하나가 이안의 옆으로 불쑥 다가왔다.

"전하, 명령을!"

"지금 당장 이곳을 벗어난다, 레더린."

"명을 따르겠습니다, 전하."

"웃기는 소리! 저놈들을 막아라! 백작, 어서 저놈들을 막으시오! 절대 이곳을 살아서 나가면 아니 될 것이오!"

"옛, 후작 각하."

하지만 헤일론 백작은 장담할 수 없었다.

본능이 외치고 있었다.

상대는 자신보다 높은 수준의 소드 마스터라고…….

분명 그 남자의 기척은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었다.

로엔그람 백작의 바로 옆까지 다가와서야 그의 기척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으니, 헤일론 백작은 절대 방심하지 않았다. 소드 마스터와의 대결은 본능적으로 피를 끓게 만들고 있었다. 심장 펌프질 소리가 배는 빨라지며 검을 쥔 손에 땀이 흥건했다.

상대는 강하다.

하나 이기고 싶다.

먼저 움직인 것은 헤일론 백작이었다. 하지만 그의 상대는 레더린 후작이 아닌 업혀 있는 이안을 향해서다. 상대가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전투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

쇄에엑!

롱 소드가 빛을 내뿜으며 이안의 어깨를 향해 찔러 들어갔다. 오러 블레이드였다.

50센티나 길어진 검이지만, 레더린은 여유 만만한 표정으로 검을 막아 냈다. 그의 검에도 어느덧 오러 블레이드가 선명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찰나의 순간이다.

레더린은 이안을 업고 있는 상태에서도 능숙한 상태로 안으로 파고들었다.

"헛!"

헤일론 백작이 짧은 신음을 토해 내고 백스텝을 밟았다. 하나 그가 이동한 만큼 레더린 또한 파고들었다. 뒤로 움직이는 것이 앞으로 이동하는 것보다 빠를 리 없다.

당혹한 상태인 헤일론 백작이 곧바로 다시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이성을 가지고 휘두른다기보다는 본능에 충실히 그저 휘젓는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슈악―!

하나 검결에 맹렬한 기세를 품고 있다. 아무리 대충 휘둘렀다고 한들 오러 블레이드가 맺혀 있다. 베이기만 해도 잘리고, 심장에 찔리면 즉사다.

쿠―콰앙!

레더린의 오러 블레이드와 부딪치자 곧바로 파공성이 주변을 엄습했다.

펑펑펑펑―!

"크윽!"

눈조차 쉽게 뜰 수 없는 빛을 발산하는 오러가 뒤이어 터지기 시작했다. 이안이 한 손으로 구하천풍장을 연신 발산하는 것이었다. 레더린은 헤일론을 한 수에 이기는 것을 포기했는지 공격보다는 곧바로 도주 경로로 미끄러지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이 고작 수 초도 안 되어 벌어진 일이었다.

"쫓아라! 놈들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아라!"

도주하는 레더린은 뒤로 필립 후작의 노성 어린 외침을 들었지만, 찾아 둔 도주 경로로 철저하게 움직일 뿐이었다. 슈레이더 왕궁은 이미 자신의 머릿속에 쉽게 그려지고 있었다.

쫓고 쫓기는 것은 계속 반복되었다. 필립 후작은 기사들을 풀어 철저하게 도주할 만한 곳을 막아 놓았다. 상대가 아무리 소드 마스터라고 한들 왕궁의 성벽은 쉽게 올라갈 수 없었다. 더군다나 부상자까지 데리고 있다면 더 힘든 일이었다.

그렇다면 왕궁에서 배회하고 있을 터.

병사들의 목에 호루라기가 하나씩 걸렸다. 그들을 발견하면 신호를 보내라는 의미였다.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는 약 100미터 정도를 두고 각각 다섯 명씩 조를 편성하여 수백 개의 조가 만들어졌다.

"하아…… 하아……."

일단 이안을 눕힌 레더린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봤다.

"전하, 상처가 심합니다. 어서 치료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괜찮다."

이안은 손을 내저으며 그동안 운용하고 있던 만상귀일신공을 끝냈다. 생각보다 상처가 심해 더 이상 축기를 할 수가 없었다.

"그것보다 이렇게 한 곳에 있어도 괜찮은 것인가? 분명 수색조가 우리를 찾을 텐데."

창고 같은 곳이었다. 왕궁에서도 상당히 구석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괜찮을 것이옵니다. 한동안만 몸을 숨길 것이니……. 게다가 이전에 이곳은 사용을 하지 않는다 들었습니다."

"다행이군. 찰트는 병사들을 끌고 오라 시켰나 보지?"

"그렇습니다."

"얼마나 걸릴 것 같나?"

"왕궁으로 들어오는 것이 좀 힘들 것입니다. 아무래도 몇 시간은 걸릴 것이옵니다."

"그때까지 몸이 버텨 줄지 모르겠군."

"저, 전하! 잠시……."

갑자기 레더린이 불안한 기색으로 이안의 왼쪽 팔뚝을 매만졌다.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이안의 왼쪽 팔뚝에 그려진 여신의 문신이 은은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그러자 점차 상처가 조금씩 치료되고 있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레더린도 라인하르트 제국의 황손들에게 이러한 능력이 있다는 것은 듣도 보도 못했다.

"이게 뭐지?"

"혹, 짐작이 가는 것이 있사옵니까?"

"음……."

그 순간에 뇌리를 스치는 생각.

알케미온의 피가 번뜩 생각났다. 드래곤의 피다. 전신을 정화시켜 주고 최고의 몸으로 만들어 주는 드래곤의 피는 영약이다. 이안의 몸으로 흡수가 됐으니 치료율이 높아진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드래곤의 피를 마신 적이 있다."

"서, 설마! 그것 때문에 전하께서……."

이안은 레더린이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분명 그러했다. 전에 봤을 때와는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 하나 벌써 마스터의 경지, 그것도 대륙십강 급에 버금간다니. 기사들이 들었다면 비웃음을 살 일이었다.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들었지. 어찌 되었든 간에 운이 좋았다고 봐야겠군. 난 좀 자야겠다."

"신명을 다해 지키겠사옵니다."

무려 20년을 기다려 온 황태손!

죽는 한이 있더라도 지키겠다는 결의를 다진 레더린은 매의 눈과 흡사한 눈빛으로 주변을 경계했다.

"아, 마지막으로 슈레이더 왕국은 이전대로 카이어스 국왕에게 맡겨야 할 것 같다."

"그 말씀은?"

"도주한 카이어스 국왕과 베리카 백작을 찾아라."

"명을 받듭니다, 전하."

"카이어스 국왕에게 로엔그람 영지를 하사받았다. 동부에 있는 자작 영지인데, 일단 이번 일이 끝나면 모든 군대를 그 영지로 보내거라."

"예, 전하."

이안은 자신의 할 말만 끝낸 뒤 곧바로 몸을 편안히 눕히고 등을 홱 돌렸다. 잠시 후,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리는 것을 보니 잠이 든 모양이다. 피곤하기도 엄청 피곤했을 터인데 버텨 온 것이 대단한 일이었다.

* * *

"……."

만상귀일신공을 운용하고 있는 것도 아니지만, 어째서인지 전신으로 조금씩 내공이 유입되기 시작했다. 그건 이안이 잠든 사이 일어난 일이었다.

작은 상처들은 점점 사라지고, 피를 흘리던 왼쪽 어깨도 움직일 정도는 아니지만 조금씩 아물어 버렸다.

귀신이 곡할 정도로 빠른 회복에 경이로움을 느낄 정도이지만 어째서인지 그 모습을 태연하게만 쳐다보는 레더린 대장이었다.

'유라시아 대륙 전역에 펼쳐져 있는 모든 군대를 모은다면 2만, 아니 3만 명 정도는 될 터이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단숨에 백만이 넘는 군대를 조성할 수 있는 프라스 제국과의 싸움은 불가능하다!'

게다가 무엇보다 프라스 제국에는 대륙에서 제일 강하다는 킹 제레브 대공이 버티고 있었다. 유일무이한 그랜드 마스터!

단신으로도 능히 수십만의 능력을 보여 주는 것이 바로 그랜드 마스터가 아니던가!

'전하께서는 무슨 생각으로 프라스 제국과의 전면전을 생각하시는 것이란 말인가. 분명 다른 이유야 있겠지만 지금 일어나는 것은 힘든 일일 터인데.'

그랜드 마스터뿐만이 아니다. 슈레이더 왕국엔 고작 둘밖에 없는 소드 마스터가 수십 명이나 눌러앉은 곳이 프라스 제국이다.

소드 마스터들만 출전해서 싸운다면 3만 명의 군대는 단숨에 몰살당할 것이었다.

'그런 프라스 제국을 견제할 만한 곳은 단 한 곳.'

전하의 생각이 자신과 같다면 분명 '그곳'을 생각하고 있을 것이었다.

'펠타온 제국!'

기사들의 나라라 일컬어지는 펠타온 제국.

레더린은 요즘 들어 프라스 제국과 펠타온 제국이 묘하게 견제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단순히 생각이라 미치지 않는 증거는 근래 많아진 크고 작은 싸움들이 그것이었고, 양국 국경에 병력이 집중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뿐만 아니라 펠타온 제국, 즉 마스터들이 갑자기 엄청난 수의 병사들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분명 펠타온 제국은 프라스 제국이나 과거 라인하르트 대제국에 비해 약한 감이 있지만 개인의 힘은 어느 나라보다도 강대했다.

그것이 바로 펠타온이 '제국'이라 불리는 이유였다. 아무리 프라스 제국이 펠타온 제국의 침공에 성공한다고 해도 절대 피해 없이 이기기는 불가능했다.

"서, 설마 전하께서는 펠타온 제국이 멸망하면 그때를 이용하여 상처 입은 프라스 제국을 침공하시려는 것인가."

"아니다."

등을 돌리고 있던 이안이 대답을 해 왔다. 쌕쌕하며 고른 숨소리를 내던 이안이 실상은 벌써 잠에서 깨어 있었던 것이다.

"이, 일어나셨사옵니까, 전하?"

"중얼거리는 소리가 하도 커서 도중에 깼다."

"죄송합니다."

"흠, 그런 건 됐고, 난 애초부터 약해 빠진 프라스 제국을 침공할 생각이 없다."

"그렇다면?"

"참여한다. 우리도…… 전쟁에."

"마, 말도 안 됩니다, 전하! 명을 거두어 주십시오. 어떻게 전쟁에 참여한단 겁니까? 소인은 생각이 짧아 이해를 할 수 없사옵니다."

"펠타온 제국이라 하면 슈레이더 왕국의 북쪽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이번 로엔그람 영지로 돌아가서 동부를 통합하면 엄청난 양의 땅이 나올 것이다. 그 영지를 펠타온 제국에 바쳐 우린 펠타온 제국의 영지로 복속될 것이다."

"……!"

놀라운 이야기였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펠타온 제국마저 이용하려 하다니!

이안은 거기서 이야기의 맥을 끊더니 벽에 등을 기대면서 일어났다. 상처가 어느 정도 치유됐다고는 해도 내상은 치명적일 정도였다. 트롤이 아닌 이상 단숨에 거동을 할 정도로 치료가 됐을 리 없었다.

"아무래도 손님이 찾아온 모양이군."

레더린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라인하르트 대제국의 병사들이 찾아왔다.

"가자, 레더린. 환영식을 거창하게 해 주어야 할 테니."

"예, 전하! 명령에 따르겠사옵니다."

부하 앞에서는 한없이 당당하게!

어깨를 쫙 펴고 입가에 묻은 피를 소매로 스윽 닦은 이안이 '로열'을 한 손에 쥐고 거칠게 문을 열었다.

"우와아아아!"

"전하를 구해라! 우와아아!"

"뭐, 뭐냐!"

갑자기 들이닥친 병사와 중무장한 기사들.

곳곳에서 날아오는 마법들.

필립 후작은 이 상황을 대체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분명 궁을 장악했고, 더 이상 지원할 병사 따위는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자치대나 용병들뿐만 아니라 인근 영주에게까지 손을 써 두었는데 갑자기 병사들이라니?

이상한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다.

창과 방패를 들고 여자의 문신을 하고 있는 귀족 가문이란 것은 듣도 보도 못했다.

그랬다.

갑자기 혜성처럼 나타난 것이다. 날벼락을 맞은 듯한 느낌이다. 필립 후작은 3천의 병사가 압도적인 무위로 한순간에 밀리자 공황 상태에 빠져 몸을 주춤거렸다.

"후작 각하, 이상한 일입니다. 일단 이곳을 빠져나가시지요. 국왕이 뭔가 손을 써 둔 모양입니다."

"그, 그럴 리 없다! 국왕에게 숨겨진 병사들이 있다는 소리는 처음이다. 그래, 분명 마법이다! 어떤 마법사가 우리에게 환영마법을 사용한 것이 틀림없다. 어서 마법사를 불러와 환영마법을 깨뜨리도록 하라!"

"하,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한 귀족이 앞을 바라보다가 석궁 쿼렐에 심장을 찔려 쓰러지는 병사의 피가 얼굴에 튀자 사색이 되어 꽁지 빠지게 도망갔다.

"후작 각하를 보호하라!"

수십의 기사가 필립 후작을 에워싸더니 슬금슬금 궁을 빠져나가려 하고 있었다.

찰트는 병사들을 풀어 궁을 모두 제압하고 나자 고래고래 소리쳤다.

"대장님과 전하를 찾아라! 분명 같이 계실 것이다."

"그럴 필요 없느니라."

갑자기 들린 중년의 음성에 찰트가 고개를 돌리자 레더린이 보였다. 그 뒤로는 수척해 보이는 이안이 찰트의 인사에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보아라! 이분이 바로 라인하르트 대제국의 단 하나뿐인 후손, 로엔그람 폰 이안 전하이시다! 모두 예를 갖춰라."

처처척!

그 자리에 기사들이 모두 부복 자세를 취하였다. 보는 이로 하여금 입을 떡 벌릴 만한 장관 같은 모습이었다.

"충! 로엔그람 폰 이안 전하를 뵙습니다!"

이구동성으로 외치는 기사들의 함성이 궁을 쩌렁쩌렁 울렸다.

"나 로엔그람 폰 이안이 자랑스러운 라인하르트 대제국의 기사들에게 첫 번째로 명하노라. 오늘 슈레이더 왕국의 반국왕파의 귀족들을 모두 사로잡고, 뇌옥에 갇힌 국왕파 귀족들을 모두 풀어 주도록 하라!"

"충! 명령을 받듭니다."

일어나는 기사들.

심지가 굳어 보이는 다부진 얼굴들.

기사들 하나하나가 모두 익스퍼트 중급에 이를 정도의 실력자들이었다. 병사들 또한 당장 기사라 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뛰어난 이들이 많았다.

지난 20년 조국을 되찾기 위한 그들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이 오늘에서야 증명되었다.

'이것으로 됐나?'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던 이안의 몸이 그제야 기우뚱거리며 쓰러지기 시작했다.

털썩―!

"전하! 전하!"

"어서, 전하를 궁으로 뫼셔라! 신관을 불러라! 의사를 불러!"

"전하!"

이안은 여러 가지 목소리에 눈이 감기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쥐고 있던 의식의 끈을 놓았다.

* * *

"피를 많이 흘리셔서 그런 것일 뿐이오니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이 회복 속도로 보아 하루면 정신이 드실 것이옵니다."

"그럼 이만 물러가시오."

"예, 여신의 축복이 가득하길."

신관은 기도문을 외우고서는 잰걸음으로 사라졌다. 이안은 쥐 죽은 듯이 침대에 누워 숨을 고르고 있었다.

레더린은 한껏 풀린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하께서는 괜찮다고 들었으니 이만 숙녀 분들께서도 방으로 돌아가 보시오. 전하는 내가 뫼시겠소. 아직 왕궁의 일이 완벽히 해결된 것이 아니라 호위기사들을 붙여 줄 테니 걱정하진 마시오."

"제가 하면 안 될까요?"

세리아는 큰 눈망울에서 눈물을 쏙 뺄 것만 같은 얼굴로 레더린을 바라봤다. 레더린이 살짝 고민하는 척하면서 로이니스를 바라보니, 로이니스는 심각한 표정으로 시종일관 이안의 얼굴을 쳐다보기에 바빴다.

'전하…….'

일국의 왕자도, 왕세자도 아니다. 무려 라인하르트 대제국의 황태자라니. 얼마나 놀랐던가.

고작 스무 살에 소드 마스터로 백작의 작위를 얻더니 이젠 반란군까지 제압하고 나서 라인하르트 대제국의 황태자란다.

앞으로 평생 동안 어떠한 일이 닥쳐도 별 대수롭지 않게 넘길 것만 같았다.

"저도 여기에 남을게요."

레더린은 그 둘의 모습에 남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숙녀 분들께 믿고 맡기겠습니다. 아직 몸이 다 나으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레더린의 태도는 아주 공손했다. 어쩌면 이 둘 중에서 황후가 나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남에게 맡기면 좀처럼 마음을 놓을 수 없는 레더린이었지만 지금만큼은 포기하고 방을 나섰다.

로이니스는 침대에 조심스럽게 걸터앉더니 얌전히 자고 있는 이안의 코를 잡고 흔들었다. 하지만 이안은 깊은 잠에 빠졌기 때문에 미동도 없었다.

"이놈, 깨어나면 친절히 국왕 전하께서 왔다 가신 것을 기억이나 할까?"

"후훗, 우리가 간호한 것도 잊을걸요?"

필립 후작과 반국왕파 귀족들은 대부분이 역적으로 몰려 잡혔다. 그뿐만 아니라 이 일이 최대한 바깥으로 새어 나가지 않게 막는 것 또한 국왕의 일이었다. 영주가 잡혔으니 반국왕파의 영지들은 몰수되었고, 대리인들이 대신하기로 했다. 하나 헤일론 백작은 어디로 내뺐는지 도대체 보이지 않았다. 그가 가는 곳이야 뭐 빤히 영지겠지만 그가 계속해서 동부의 왕으로서 행세한다면 토벌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었다.

수줍게 웃던 세리아는 이안의 얼굴을 수건으로 정성스레 닦고는 이마에 입술을 포갰다.

쪽―!

입술이 맞닿는 소리가 들리자 로이니스는 갑자기 깜짝 놀라 세리아를 멍한 상태로 쳐다봤다.

"뭐, 뭐 하는 거야!"

"어머? 로이니스 아가씨께서 이곳에 계신 줄은 깜빡 잊고 있었네요."

"이, 이게! 잠자는 사람을 덮치다니, 그게 귀족의 영애로서 할 짓이야!"

"후훗, 전 이제 평민이라고요."

"평민이면 평민답게 행동해!"

"이안과는 전 친구라고요."

"어떤 친구가 그, 그렇게 이, 입을……."

로이니스가 당황하며 물끄러미 이안의 자는 얼굴을 보더니 홍당무처럼 붉어졌다. 잠시 후, 로이니스의 귀로 세리아의 수줍게 웃는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이안이 그 후로 일어난 것은 정확히 하루가 지나서였다.

반란군은 진압되었고 왕궁은 바쁘게 돌아가 이젠 국왕파 귀족들의 얼굴들은 보기가 힘들었다. 그만큼 회의실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이건 말이 되지 않소! 어떻게 자국의 귀족이란 사람이 국왕 전하께 상주도 안 한 채 비밀로 사병을 키운단 말이오!"

"로엔그람 백작이 귀족의 작위를 받은 것은 불과 이틀도 되지 않은 일이오. 게다가 그가 라인하르트 제국의 황태자라는 사실을 알고 계실 것이 아니오? 그런 신분이라면 병사들 몇 명 키우는 것은 당연하오."

대체적으로 갑자기 왕국을 구한 이안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는 귀족보다는 옹호하는 귀족들이 많았다. 특히 베리카 백작을 지지하는 귀족들이라면 더했다.

"뿐만 아니라 로엔그람 백작은 현재 제일 문제화되고 있는 동부의 헤일론 백작을 토벌한다고 공공연히 선포했다 들었소. 그런 충신에게 벌을 주자니, 그건 도대체 어느 나라 법도란 말이오!"

"그가 충신일지 어찌 안단 말이오? 어찌어찌해서 운이 좋아 반란군을 진압하기는 했지만 막상 헤일론 백작령을 토벌하고 나면 어떤 식으로 나올지는 아무도 모른단 말이오."

"그는 라인하르트 제국의 황태자라 들었소. 그런 자가 어찌 거짓을 함부로 입에 담는단 말이오?"

"흥! 어차피 망해 버린 나라가 아니오? 그런 나라의 황태자를 데리고 있는 것은 프라스 제국과의 전쟁을 선포하자는 말로밖에 들리지 않소이다."

"크흠!"

옹호하는 귀족이 많다고 해도 프라스 제국의 말만 나오면 모두들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만큼 프라스 제국에 대한 공포심이 크다고밖에 볼 수가 없었다.

다른 귀족이 그에 대해 의견을 꺼내려는 그 순간.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군요."

이안이 회의실 안으로 들어오며 백작의 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어서 오시오, 로엔그람 백작."

카이어스 국왕이 살짝 인사를 하며 눈웃음을 쳤다. 파티장에서 이안을 본 귀족들이 얼마 되지 않았기에 그가 생각보다 젊다는 것을 보고 크게 놀란 자들도 많았다.

"그래, 방법이 있다는 것처럼 들리네만? 젊은 영웅 로엔그람 백작께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신지 궁금하군."

비꼬는 어조였다. 이안은 한껏 살기를 드러내더니 그 귀족을 힘껏 노려보며 입가에 웃음을 지었다.

"호오! 당신은 전하께서 위험한 순간에 자기 몸만 내빼기 바빴다던 '카이드' 백작님이 아니신지요?"

"뭐, 뭣이!"

넉살 좋게 생긴 뚱뚱한 카이드 백작이 수치심에 얼굴이 붉어지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금 이 자리에서 필립 후작이 사라진 순간, 국왕 카이어스 다음으로 베리카 백작과 마찬가지로 힘 있는 자였다.

분명 카이드는 일이 일어나자 곧바로 마법사들에게 보호를 받으며 숨어 있다가 제압되어 뇌옥에 갇힌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그 기록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카이드는 그 일보다는 고작 새파란 백작에게서 수치를 당했다고 생각하자 기분이 와락 나빠졌다.

"카이드 백작, 진정하시오! 지금은 백작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니잖소!"

카이어스가 위엄성 담긴 어조로 말하자 주변 귀족들이 자신에게 시선이 쏠린 것을 안 카이드 백작이 그제야 자리에 앉았다.

"어찌 됐든 로엔그람 백작이 아픈 몸을 이끌고 회의실까지 온 것을 보니 중요한 일인 듯싶소. 얘기를 들어 봅시다."

"최근 실태를 조사하니 펠타온 제국과 프라스 제국이 서로 견제하는 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고 합니다."

"그런 모습은 수십 년 전부터 일어났었소."

"단순히 그건 '견제'에 불과했지만 지금 상태로 보아하니 곧이어 '전쟁'이 벌어질 것 같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증거는?"

"펠타온 제국의 '디그라실' 공작을 알고 계실 것으로 압니다."

디그라실 공작은 펠타온 제국에 있어서 막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자다. 대륙십강의 일원이며 킹 제레브를 제외하면 그를 이길 상대가 없다고 판단되는 강자 중의 강자!

"얼마 전에 디그라실 공작의 두 번째 자제가 화친단을 이끌고 국제간의 협약을 맺기 위해 프라스 제국에 간 사건이 있었습니다. 다들 이 정도 이야기는 알고 계실 것입니다."

대외적으로 퍼진 이야기 때문에 귀족들 대부분이 들어서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 이야기라면 프라스 제국에서 화친을 거절하고 디그라실 공작의 두 번째 자제를 죽였다고 들었소만? 그 이야기가 언제적 이야긴데 지금 꺼내는 것이오?"

"그 후도 들으셨습니까?"

"그 후?"

"예, 프라스 제국이 화친단을 죽이고 나자 격노한 디그라실 공작은 이에 대한 사과를 공식적으로 프라스 제국에 올렸습니다만……."

"사과를 안 하겠다고 하던가?"

"아뇨, 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무슨 문제가 되나?"

"다만, 디그라실 공작의 두 번째 자제의 눈과 귀, 코를 전부 잘라 내고 파내어 디그라실 공작의 영지로 보냈다고 합니다. 그것도 공식적인 사과도 아닌 비밀리에 말입니다. 당연히 격노한 공작은 프라스 제국과의 전쟁을 하게 된 것이지요."

"어, 어떻게 그런 일이!"

공작의 힘으로 제국을 움직이긴 힘드나 펠타온 제국 황제의 동생이 바로 공작이었다. 게다가 펠타온 제국은 바로 기사의 나라다. 자국의 귀족 자제가 그렇게 모멸을 당하고도 일어서지 않는다면 기사가 아니었다.

평소에도 존경해 마지않는 공작의 두 번째 자제가 죽었으니 전쟁이 일어날 만도 했다.

"그래서 이 자리에서 국왕 전하에게 제 뜻을 전하겠습니다. 프라스 제국도 제가 슈레이더 왕국의 귀족이 된 것을 슬슬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 토벌대를 이끌고 저를 따로 죽일 군대를 파견할 수는 없겠죠. 펠타온 제국과의 상태 때문인지 함부로 움직일 수는 없을 테니까요."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가?"

"이미 유라시아 대륙 간의 커다란 두 제국이 붙은 이상 왕국들이 가만있진 않을 것입니다."

"그 얘긴 우리도 한 군데 가담해서 싸우잔 얘긴가?"

"그렇습니다."

역사에서도 보기 힘들 정도로 이례적인 대전쟁이다. 분명 이안의 발언은 틀리지 않았다. 그리고 슈레이더 왕국 또한 펠타온 제국이나 프라스 제국 한 곳에 속해서 싸워야 함은 물론이었다.

이안은 처음엔 영지를 펠타온 제국에 복속시켜서 싸우려 했으나 이 방법이 더욱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문제는 이곳에서 다음 안건으로 진행시켜야겠군."

카이어스는 이안의 말에 수긍해야 했다.

"그럼 전 이만 회의에서 빠져 보도록 하겠습니다. 결론이 나면 영지로 전달해 주십시오."

"물론이네. 잘 가시오, 로엔그람 백작."

카이어스는 위엄이 넘치는 얼굴보다는 장난기가 가득한 웃는 얼굴로 이안에게 인사했다.

분명 회의였기에 공식적인 입장이라 '안녕히 가세요, 백작'이란 말은 할 수 없을 테지만, 충분히 눈으로도 전달받을 수 있었다.

"난 갑니다."

"무슨 소리야?"

이안의 발언에 로이니스가 눈을 껌뻑였다.

"영지로 돌아가야지요. 작별 인사하러 왔습니다."

"나, 날 데려가지 않을 셈이야?"

"예."

"어, 어째서?"

답변을 요구하는 눈빛.

"목숨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안 데려간다고?"

"네."

"그럼 세리아는?"

로이니스의 눈을 쳐다볼 수 없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어렴풋이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좋은 인연이었다. 하나 그녀와 이안은 결코 친구 이상의 관계로 성장할 수 없다.

아쉽지만 여기서 이별이다.

"그녀는 제가 지킵니다."

"날 지켜 줄 수 없다는 말이야?"

"예."

이안의 태도는 완고했다. 로이니스가 이안의 눈을 보고 확신할 수 있었다. 이자는 자신을 철없는 귀족 아가씨라고만 생각한다고.

'조금만…… 조금만 일찍 내가 너를 만났더라면…….'

후회가 들었다. 왜 자신은 이렇게 멍청했는가.

"쫓아오지 마십시오. 그리고 영지로 돌아가도 다신 찾아오지 마십시오. 이번에 전쟁이 벌어지면 외국으로 갈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

"찾아와도 저를 볼 수 없어서 하는 말입니다."

이안은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

"어쩌면…… 평생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작별 인사를 하러 온 것입니다."

"작별…… 인사? 평생?"

"아마…… 그렇게 되겠지요."

"……."

이안은 등을 돌렸다.

"이것이 로이니스와 마지막으로 나누는 대화가 될 것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로이니스."

저벅.

이안도 슬펐다.

저벅.

한 발자국을 걸으니 앞으로 갈 수 있을 것 같다. 이성과 본능을 제어하는 경지인 화경에도 올랐건만, 북받쳐 오르는 슬픔은 제어할 수가 없었다.

"이젠 정말 안녕."

그 말을 끝으로 이안은 거침없이 걸어 나갔다. 자신에게는 라인하르트 제국을 재건하기 위한 사명이 있었다.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하나 그의 예민한 청각으로 여자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필시 로이니스가 우는 것이리라.

그의 귀에는 바닥에 떨어지는 눈물 소리마저 크게 하나 둘 들려왔다.

바로 그때였다. 등 뒤로 커다란 소리가 들려왔다.

"야, 이 바보야! 그래, 좋아. 갈 테면 가! 가란 말이야!"

이안은 웃었다. 로이니스의 저런 점이 처음엔 마음에 안 들었지만 지금은 한없이 아쉽기만 했다.

저래야 로이니스다. 저래야 로이니스답다. 앞으로 그녀의 짜증 어린 얼굴이 그리울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안은 그녀의 시야에서 멀어질 때까지 결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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