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인하르트-29화 (29/60)

■ 제29장 반전되는 분위기 □

"오냐, 해볼 테면 해보거라, 로엔그람 백작. 이제 갓 마스터가 된 놈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두고 보자꾸나."

이안에 맞서 헤일론 백작도 반국왕파 귀족들의 앞으로 나서며 시퍼런 오러 블레이드를 섬광 같은 속도로 뻗었다. 그의 오러 블레이드는 제국검에 더욱 힘을 실어 부챗살처럼 크게 흔들렸다.

헤일론 백작은 이안의 힘이 자신보다 거대하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오히려 검과 자신의 경험을 믿으며 호기스럽게 앞으로 당당히 나섰다.

"풋."

이안은 그의 앞에서 작게 조소를 머금었다.

그토록 찾던 애검 '로열'이 헤일론 백작의 손에 쥐어져 있음은 알고 있다. 하나 그걸 과연 제대로 다룰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아무리 마스터라고 한들 주인이 아닌 자가 함부로 다룰 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분명 무리를 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그 증거로 검을 쥔 그의 손이 작게 화염에 둘러싸여 있었다. 마나로 보호하고 있긴 하지만, 같은 소드 마스터와의 대결 중에서 과연 얼마나 그쪽에 신경을 쓸 수 있을지는 기대가 되었다.

국왕파 귀족과 반국왕파 귀족들이 서로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필립 후작이 홀연히 걸어 나왔다.

짝짝짝―!

그의 박수 소리는 연회장에 모인 귀족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어느새 그의 뒤에는 수십 명이나 되는 복면인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만 두시게, 로엔그람 백작."

필립 후작의 뒤에 있는 복면인들.

최소 익스퍼트 상급에 이르는 절정 급 고수들이다. 이들이 한순간에 풀린다면, 이안은 카이어스 국왕을 지킬 수 있다고 장담하기 힘들었다.

"자네가 소드 마스터라는 것은 잘 알았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나와 손을 잡지 않겠나? 자네가 원한다면 후작의 자리라도 능히 내놓을 수 있네."

반국왕파로 등을 돌리라는 뜻이었다.

"닥치시오, 필립 후작! 그따위 간교한 혓바닥을 얼마나 놀릴 수 있을 것 같으시오!"

카이어스 국왕은 노한 표정으로 필립 후작을 노려보았다. 필립 후작은 웃음을 짓더니 국왕을 쳐다보며 말하였다.

"호오? 내 사랑스런 조카 카이어스가 아니신가? 너도 보는 눈이 있다면, 이 상황을 보거라. 이미 왕궁은 3천의 병사와 수백의 기사들, 그리고 이 옆에 있는 특급 어쌔신들이 접수했다. 아무리 마스터를 호위기사로 두었다고 한들 도주에 성공할 수 있다고 보느냐? 너도 이만 왕위를 내게 내놓거라. 약속만 한다면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이, 익!"

"잘 생각해 보시오, 로엔그람 백작. 자네가 이쪽으로 돌아서기만 한다면 자네의 일행들 전부를 살려 줄 걸세. 물론 국왕파 사람들을 전부 살려 줄 수는 없겠지만 말이야."

이안의 눈에 고민하는 빛이 떠올랐다. 아무리 화경의 경지에 올랐다 한들 절정 고수들이 시간을 끈다면 세리아나 로이니스, 칸을 보호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프로시안 영지를 위해 죽어 간 이들의 혼은 누가 달래 준단 말인가? 자신의 눈앞에 자리 잡고 있는 필립 후작은? 그 무엇보다도 사지를 찢어 놓고 싶은 헤일론 백작은?

영영 복수를 할 기회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물론 죽은 자들보다는 산 사람이 우선이라지만 이안에게 그 제안에 대한 답은 뻔했다.

"싫소."

필립 후작은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뭐가 문제란 말인가? 자네는 아직 젊네. 자네 같은 인재가 뭐가 아쉬워서 그런 허수아비 왕 따위를 보필한단 말인가? 드래곤은 결코 오크들 집단에서 살아갈 수 없네. 큰물에서 놀아야 한단 말일세."

국왕파를 오크들 집단으로 칭하는 필립 후작의 말에 국왕파 사람들의 입에서 결코 좋은 말이 튀어나오진 않았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잘 알고 있는 그들로서는 결코 크게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싫소."

필립 후작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마지막 제안일세. 올 텐가, 말텐가?"

"나의 대답은 같을 것이오. 설사 10만 대군을 끌고 온다고 한들 내 대답에 변화는 없을 것이오. 아니, 프라스 제국 황제의 자리를 준다고 해도 변하지 않을 것이오."

이안의 대답은 그토록 오만했다. 필립 후작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럼 자네를 죽일 수밖에 없겠군. 나도 인재를 죽이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자네 같은 자들은 꼭 후환을 남기니 말일세. 헤일론 백작, 자네가 로엔그람 백작을 맡아 주게."

"예, 후작님."

그 말이 나오기만을 은근히 기다렸다는 듯 헤일론 백작은 모든 마나를 끌어올리더니 무서운 눈매로 이안을 노려봤다.

"이번에야말로 그 목을 끊어 주지. 저번과 같은 행운은 다시는 일어날 수 없을 것이다."

철컥!

검을 들어 올린 헤일론 백작에게서 매서운 살기가 뻗쳐 나오기 시작했다. 이안은 지지 않겠다는 듯 싸구려 검으로 응전했다.

"할 수 있다면."

음유시인의 노랫가락에 춤을 추던 자들이 어느새 검무를 추기 시작했다. 연회장은 전쟁터로 변해 버렸고, 귀부인들은 연회장 양 벽 쪽으로 물러나 이 상황을 숨죽인 채 바라봐야 했다.

탓!

먼저 움직인 것은 헤일론 백작이었다. 그에 맞춰 이안의 팔도 따라 움직이더니 일단 첫 공격을 간단히 막아 냈다.

쿠아앙!

오러 블레이드와 오러 블레이드의 격돌.

고수끼리의 싸움에서 흔히 일어나는 거대한 충격파가 부딪친 곳을 시발점으로 연회장을 울렸다.

소드 마스터 초입에 불과한 헤일론 백작은 제국검 '로열'로 이안의 오러 블레이드를 막아 냈고, 이안 또한 화경의 경지에 오른 자신의 내공으로 로열을 간단하게 막아 냈다.

"흥!"

이안은 짧은 코웃음 소리와 함께 곧바로 오러 블레이드에 또 하나의 내공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바로 한음지기.

푸르스름한 오러 블레이드에 갑자기 피부를 얼어붙게 만들 정도의 한기가 솟구치기 시작했다.

"고작 검으로 온도를 조절한 것으로 자만하는군. 아무리 펠타온 제국의 속성검을 익혔다 한들, 이 검에 맞설 수는 없을 것이다."

"잘 막아 봐라."

우우우우웅!

이안의 검이 부르르 떨더니 거대한 오러 블레이드를 헤일론 백작에게 발산하기 시작했다.

퍼엉―!

"크윽! 이놈."

설마 이런 작은 연회장에서 이토록 거대한 마나를 실어 공격을 취할 줄은 몰랐다는 듯, 헤일론 백작은 전력을 다해 공격을 막아 냈다.

"세리아!"

이안이 세리아를 부르자, 이미 그녀와 칸은 준비를 끝마쳤다는 듯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마법을 펼쳤다.

"얼음의 마녀여, 지금 이 순간부터 이 공간을 그대가 살아온 공간으로 바꿔 놓을지어다. 아이스 포그(Ice Fog)!"

이구동성으로 외친 마법은 4서클 아이스 포그.

거대한 얼음 안개를 생성시켜 최대 영하 50도까지 떨어뜨리는 이 마법은 대량 살상용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눈앞이 순식간에 뿌옇게 변하자 이안은 싸움을 그만두고 곧바로 일행들을 챙겨서 도주하기 시작했다. 이미 이안은 이 상황을 예견하여 세리아와 짜 맞춘 행동이었다.

출구는 로이니스의 바람의 정령이 찾아 줄 수 있었다.

쾅!

문을 박차고 나온 이안은 곧바로 카이어스를 부축하여 왕의 궁으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나, 나는 괜찮아요."

아이스 포그의 영향으로 머리가 어지러운 듯 다소 상기된 표정이었지만 가볍게 웃음까지 보여 주었다.

"내 방으로 가면 비밀 통로가 있을 거예요. 그곳으로 도주한다면 충분히 궁 바깥으로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카이어스가 자신 없는 듯 말하자 이안은 눈앞에 존재하는 모든 이들을 향해 오러를 쏘아 냈다.

"모두 비켜라! 비키지 않으면 모두 죽일 것이다."

탁탁탁탁!

"전하, 이쪽이옵니다."

"예, 백작. 그쪽에 병사가 있는지 봐 주세요."

"알겠사옵니다."

베리카 백작은 능숙하게 왕을 인도했다. 이안은 혹시 쫓아오는 자가 있지 않을까 하고 살피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 과정에서 로이니스가 최대한 일행들의 기척을 줄이는 역할까지 해야 했다. 실프의 능력이라면 익스퍼트 상급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아래 정도의 경지라면 그들의 눈을 충분히 속여 줄 수 있을 것이었다.

덜컹!

어느새 궁의 방으로 돌아온 왕은 주위를 살피더니 침대 옆에 있던 램프를 왼쪽으로 크게 한 번 돌렸다. 그리고 책이 꽂혀 있는 책장에서 중간에 위치한 파란색 책을 꺼내 오른쪽 비어 있는 공간에 집어넣자 신기하게도 책장이 밀리며 비밀 공간이 튀어나왔다.

"먼저 가시지요, 전하! 베리카 백작님, 전하를 보필해 주시기 바랍니다."

"알았네. 먼저 가서 기다리겠네."

"로엔그람 백작은 어떻게 하실 거죠?"

걱정스러운 듯 묻는 카이어스에게 이안은 자신이 들고 있던 검을 버리고 방에 있는 검 하나를 주워 들었다. 이미 싸구려 검 따위는 이안의 강한 내공을 버틸 수가 없었다.

"전 이곳에서 필립 후작이 보낸 추격자들을 최대한 막아 보겠습니다. 곧 뒤따라갈 터이니 크게 걱정하지 마십시오."

"몸조심해요, 백작."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하!"

"가자꾸나, 로이니스."

"예, 아빠."

카이어스 국왕과 베리카 백작, 로이니스가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며 안으로 들어갔다.

"칸, 세리아를 데리고 아르텔에서 제일 좋은 여관이 있을 겁니다. 그 여관에서 제일 커다란 방에 묵고 있는 남자 둘을 만나십시오. 제가 보냈다고 하고, 이 상황을 전한다면 될 것입니다."

"알겠네. 꼭 그리함세. 나만 믿게나."

가슴을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인 칸은 세리아를 쳐다봤다. 세리아는 엉겁결에 이안의 팔을 붙잡더니 큰 눈망울로 눈물을 뚝뚝 떨어뜨릴 것 같은 얼굴을 했다. 이안은 그녀의 얼굴을 붙잡더니 씨익 웃어 보였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상관없겠지?"

"……으응."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세리아.

"정 혼자만 내버려 두고 가는 게 미안하다면 재빨리 그들에게 이 상황을 알리도록 해."

"하지만!"

세리아는 도저히 발걸음이 떨어질 것 같지가 않았다. 칸은 세리아를 보다가 이안과 두 눈이 마주쳤다. 이안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칸이 먼저 비밀 통로 안으로 들어갔다.

바로 그때 바깥에서 작은 소란이 일어났다. 벌써 카이어스가 이 방 안으로 들어온 사실을 알아챈 이가 나타난 것이리라.

어떻게 할지 몰라 발만 동동 구르는 그녀를 이안이 살짝 껴안았다.

"무, 무슨 짓……!"

약한 그녀의 몸으로 화경의 이안을 밀쳐 내기에는 무리였다. 하지만 밀어내려는 그녀의 힘도 별로 강하지는 않았다. 싫지는 않은 것이리라.

이안은 그런 그녀의 이마에 살짝 입술을 대었다. 잠시 후, 입술을 뗀 이안이 포옹을 풀더니 억지로 그녀를 비밀 통로 안으로 집어넣었다.

"어서 칸을 쫓아가. 그게 날 도와주는 것이니까."

멍한 표정으로 있던 세리아는 수줍은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법 이안의 뽀뽀가 효과가 있는 것이다.

결국 그녀는 한동안 얼굴이 붉어져서는 이안의 얼굴을 쳐다볼 뿐이었다.

쿵!

이안은 억지로 비밀 통로를 닫아 버렸다. 그리고 다시는 이 비밀 통로를 열 수 없게끔 파란색 책을 꺼내더니 삼매진화로 그대로 태워 버렸다.

화르르륵!

한순간에 재가 되어 공중에 흩날리는 모습을 바라본 이안이 곧바로 검을 들어 올리며 방문을 박차고 나갔다.

"로엔그람 백작이 저기 있다. 잡아라!"

"시끄러운 것들."

필립 후작에 의해 장악된 왕궁에는 그를 추대하는 기사들이 혈안이 되어 국왕을 찾아다녔다.

이안은 곧바로 검을 들어 올리고 그대로 그 기사들을 향해 오러를 쏘아 내기 시작했다.

"크아아악!"

이안이라고 무한정으로 마나가 쏟아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최대한 내공의 소모를 줄일 수 있는 공격을 차근차근 펼치며 좁은 통로로 상대를 유인했다.

이미 귀족들에게 이안이 소드 마스터라는 것을 전해 들은 터라 공격하는 기사들 입장에서도 죽을 맛이었다. 아무리 자신들이 익스퍼트에 오른 자들이라고는 하나 마스터와의 격차는 하늘과 땅 차이였기 때문이다.

"흥! 이제야 슬슬 나타나시는구먼."

이안은 그제야 봉해 놓았던 마나를 한순간에 풀어 버리며 손가락을 좍 펼쳤다. 그러자 순식간에 맺히는 강기들.

칠십육로무형지가 곧바로 특급 어쌔신들을 향해 줄기차게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특급 어쌔신들은 매직 애로우와 비슷한 모양의 공격이 자신들의 눈앞으로 다가오자 한순간에 놀라 뒤로 몸을 날렸다.

매직 애로우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공격 면에서 다르고, 무엇보다 신기한 것은 그림자조차 남지 않을 정도의 빠르기였다. 아무리 특급 어쌔신이라고는 하나 처음 접하는 공격을 보고 완벽하게 피해 내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고통에 대한 비명을 지르지는 않았지만 팔이나 어깨가 뚫려 입술을 비집고 작게 흘러나오는 신음을 삼키는 자들이 적지 않았다.

'한순간에 전부 죽여야 한다. 반항의 의지조차 없을 정도로! 죽여야 한다.'

게다가 이들이 헤일론 백작과 합류하면 여러모로 골치 아파진다. 이안과 마찬가지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어쌔신들은 섣불리 공격하기보다는 기습이나 암기를 날리는 일로 이안의 심신을 괴롭혔다. 분명 시간을 벌고 있는 행위였다.

"귀찮게 됐군!"

이안의 빙허임풍이 섬전 같은 속도로 나아가 특급 어쌔신의 목덜미를 쥐었다. 복면을 쓰고 있어 표정은 볼 수 없을 테지만, 분명 고통 때문에 악을 쓰고 있을 것이었다.

그만큼 이안은 지독하게 고통을 주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이 고통이란 고통을 주는 모든 혈들을 공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크흑!"

그들의 입에서 한 줄기 비명이 쏟아졌다. 하지만 죽지는 않았다. 분명 그 혈들은 죽지는 않지만, 최고의 고통을 선사하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이안은 남의 고통을 보고 즐기는 자는 아니었지만 최대한 히죽거리며 전투 불능 상태가 돼 버린 복면인을 그대로 바닥에 내팽개쳤다.

쿵!

특급 어쌔신은 몸을 조금 꿈틀거릴 뿐 더 이상 움직이거나 하는 행동은 취하지 않았다. 적어도 며칠을 쉬지 않는 이상은 다시 몸을 일으키기 힘들 것이었다.

"자, 이번엔 누가 걸려들 것이냐."

"……."

"흥! 루시의 실력을 보고 제법 기대했던 내가 한심스러워지는군."

그러자 특급 어쌔신들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루시라는 애칭은 쉐도우 로드의 딸이 자주 쓰는 이름 중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수 중에라도 그런 말을 내뱉는 자들은 없었다. 그렇다 해도 이자가 루시와 아는 자가 틀림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안은 루시의 실력을 꽤나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그 나이에 소드 마스터라는 경지는 아무나 오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만약 이안에게 만상귀일신공이 없었다면 지금까지도 절정이나 올랐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신공절학에 이르는 무공이 없었다면 꿈도 꾸기 어려웠을 일이었다.

분명 그런 면에서 루시는 최고였다. 어쌔신들 중에서는 과연 독보적인 존재라고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안은 그런 루시를 단숨에 제압할 정도의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근접전이라면 루시 같은 실력자가 몇이나 있다 해도 단숨에 제압할 자신이 있었다. 하물며 고작 익스퍼트에 불과한 특급 어쌔신들이다.

"역시 오지 않을 셈인가? 그렇다면 내가 간다."

탓!

가볍게 밟는 것이지만, 놀랍게도 그는 단숨에 거리를 좁히며 특급 어쌔신들의 태양혈을 단숨에 파괴시켰다. 태양혈은 무공을 익힌 자들에 한해 두드러지게 튀어나오는 혈이다.

그렇지만 반박귀진의 경지에 오르면 오히려 태양혈이 일반인처럼 줄어들며 무공을 익힌 흔적을 찾아볼 수도 없게 된다. 하지만 특급 어쌔신들에게 그런 실력을 기대하는 것은 힘들었다. 반박귀진의 경지라면 화경의 경지에 오른 이안이라 해도 불가능한 경지였으니 말이다. 적어도 현경에 오르기 전까지는 자신의 기를 숨기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태양혈이 파괴되면 최소 목숨을 잃는다. 무인들에게 있어 치명적인 사혈이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안의 속도를 제대로 접해 보지도 못한 채 죽어 가야만 했다.

쉬육―!

특급 어쌔신들과의 술래잡기가 슬슬 지쳐 간다고 생각했을 때 그의 머리카락 위로 살기가 번뜩거리는 오러가 스쳐 지나갔다. 그와 동시에 살아남은 어쌔신들이 반색하며 눈빛이 살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능숙한 오러. 그렇다면……!'

조금은 지쳐 보이는 듯한 얼굴, 그리고 다소 상기되어 이안을 노려보는 표정. 혼신을 다한 오러가 맞지 않았음에 분한 것인지 갑자기 인상을 와락 구겼다.

헤일론 백작이었다.

"쥐새끼 같은 놈, 여기 있었군!"

철컥!

이안은 대답 대신에 검을 들어 올리며 만상귀일신공으로 내공을 끌어올렸다. 만상귀일신공이 10성에 오르면서 그의 눈에 패도적인 기도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왕궁은 모두 장악됐다. 국왕파 귀족들은 모두 뇌옥에 갇혔고, 필립 후작님의 즉위식이 며칠 후에 진행될 예정이다. 왕이 있는 곳을 불어라. 적어도 필립 후작님께서는 네가 맘에 드신 모양이다. 목숨만은 살려 준다고 하셨으니, 그분의 관대함에 보답하라."

이안은 살짝 코웃음 치며 대답했다.

"흥! 아직도 전하를 왕이라고 칭하는 것을 보니 그분이 중요하긴 한 모양이구나. 하긴 전하께서 아무리 백성들의 원성을 산다고 하더라도 직계 혈통인 분이시다. 적어도 폭군이 될 필립 후작보다야 백배 나은 분이지."

"이, 이놈! 감히 필립 후작님께 그런 식으로 답하다니! 그렇다면 너를 없애 국왕파의 본보기로 삼아 주겠다."

"쫑알쫑알 떠들지 말고 덤벼라!"

어느새 이안의 입은 거칠어져 있었다. 만상귀일신공의 경지가 높아지다 보니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는 단계가 지난 탓이었다. 마음을 다스릴 수 있으려면 12성, 대성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의 심성까지 변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철저한 적이 아닌 자들은 그래도 살려 두려고 했다.

이안은 왼손을 들어 올리더니 곧바로 장법을 휘갈겼다. 구하천풍장의 용맹한 기운이 손바닥에 맺히더니, 곧이어 헤일론 백작이 서 있던 땅을 거침없이 헤집기 시작했다.

쾅쾅쾅쾅쾅!

연이어 폭발하는 바닥에 헤일론 백작이 뛰어오르며 오러 블레이드가 넘실거리는 검을 이안에게 휘두르기 시작했다.

샤샥―!

빙허임풍의 신법으로 피해 낸 이안이 헤일론 백작을 째려봄과 동시에 땅을 박차고 검을 휘둘렀다.

헤일론 백작은 공중에서 한 바퀴 횡으로 돌더니 그 원심력을 이용하여 이안의 공격을 막아 내었다. 참으로 귀신같은 수법이었다. 경험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실전에서 사용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경험이 약하다 해도 이안에게는 풍부한 내공이 존재했고, 헤일론 백작보다 훨씬 뛰어난 화경의 경지였다. 신공절학에 가까운 무공들이 받쳐 주는 이상 꿀릴 일이 없었다.

"음!"

헤일론 백작에게서 가벼운 신음성 비슷한 것이 뱉어졌다.

당연한 일이었다. 빙허임풍을 펼치는 이안의 모습은 분신이 되듯 환영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특급 어쌔신들의 얼굴에는 경이로움이 섞여 있었다. 분명 저런 것은 쉐도우 로드나 루시가 아닌 이상은 펼치기가 힘들다는 것이었다. 한평생 은신이나 잠입, 이동속도 같은 것에 매달리는 어쌔신들도 힘든 것을 한낱 기사가 펼쳐 내고 있었으니 놀라는 것도 당연한 것이었다.

이형환위.

이안의 신법은 이미 이형환위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슈욱―!

이안이 벽을 박차고 검을 휘두르자 구하천풍검법의 3초식인 와룡연쇄참이 뛰쳐나왔다. 실타래 같은 검기들이 한데 어우러져 누워 있는 용을 연상케 만들었다.

"크윽!"

쨍그랑―!

검기, 즉 오러의 힘에 버티지 못한 헤일론 백작이 제국검 '로열'을 떨어뜨리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의 표정에는 난처함이 가득했다.

이안이 그대로 끝을 내기 위해 검을 들어 올린 순간, 상황을 지켜보던 특급 어쌔신들이 이안에게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원래 사냥을 성공을 하려는 순간이 제일 사냥당하기가 쉽다고 하니 그 기본을 충실하게 이행하는 것이었다.

"죽고 싶지 않으면 비켜라!"

만약 특급 어쌔신들이 줄행랑을 친다면 쫓을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헤일론 백작이 도주를 한다면 응당 쫓아야 했다.

그렇지만 헤일론 백작은 특급 어쌔신들을 방패막이로 삼고 일단 도주하기로 했다. 자존심에 크게 상처를 입었다고 해도 제일 중요한 것은 목숨이라고 생각하는 이였다.

그에게 기사도를 강요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었다.

이안은 곧바로 특급 어쌔신들을 빠르게 베며 앞으로 지나갔다.

탁!

그가 손을 내뻗자 그동안 헤일론 백작의 손에서 잠식당하던 제국검 '로열'이 허공섭물의 수법으로 빨려 들어왔다.

착!

손아귀에 쥐어지자 주인을 알아보는 듯 가볍게 떨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그 순간까지 많지 않은 시간이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헤일론 백작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이안이 그길로 궁을 뛰쳐나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기사들과 병사들이 그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환영식이 무척이나 거창한 듯싶소."

이안이 몇 중으로 자신을 감싼 병사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기사 여럿에게 호위를 받으며 거만한 태도로 서 있는 필립 후작은 번뜩거리는 눈빛으로 이안을 바라봤다.

"마스터에게 이 정도의 환영식은 조촐하지 않은가 싶네. 물론 지금까지 많은 체력을 소비했을 거라 보고 있네. 그래도 설마 알았겠는가? 헤일론 백작이 그렇게 당하고 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네."

필립 후작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안은 지금 적지 않은 내공과 체력을 소비하고 있었다. 분명 적지 않은 내공을 가지고 있지만 연달아서 특급 어쌔신들과 헤일론 백작을 상대하고도 병사들을 상대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당신의 눈엔 지금 내가 지쳐 보이오?"

"충분히 그래 보이네."

"훗!"

이안은 짧게 웃었다.

"뭐가 웃긴 일인가?"

"후작은 사람 보는 눈이 없소."

"뭣이?"

"소드 마스터가 왜 나라의 힘을 상징하는지 가르쳐 주겠소."

철컥!

이안의 검이 원심을 그리며 맹렬한 기세를 뿜었다. 제 주인에게 찾아온 '로열'은 포효를 내질렀다.

그리고 그의 눈에 패도적인 기운이 번뜩이고 있음을 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 * *

"음……."

레더린 대장은 왕궁에서부터 흘러나오는 기운에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삼켰다. 자신도 소드 마스터 중급에 이른 지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왕궁에서 흘러나오는 힘은 오래전에 보았던 대륙십강과 필적하는 힘이었다.

"대체 슈레이더 왕국에 도대체 누가 있어 이런 기운을 뿜는단 말인가……."

"그건 그렇고, 대장님, 왕궁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어디 한번 살펴봐야 되는 게 아닙니까?"

"이안 전하께서 오시지 않았다. 그분의 명이 없이는 절대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

"흠, 전하께서는 언제 오실 것인지……."

필립 후작은 왕궁에서 흘러나오는 힘에 기가 죽어 축 늘어졌다.

"얼마 전 정보부에 따르면 필립 후작이 반란을 준비한다고 하더군. 어쩌면 전하께서는 이미 수도에 도착하셔서 왕궁으로 들어가셨을지도 모른단 말일세."

"그 반란의 날이 오늘이라는 말입니까? 하긴 오늘같이 축제의 날이라면 실패할 확률이 적을 테니까요. 설마 왕의 생일에 반란을 주도하다니, 숙부라는 자로서 지독한 자가 틀림이 없군요. 허나 지금 그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설마 대장님께서는 전하께서 그 반란에 휘말리기라도 하셨을 거라 생각하신단 말입니까?"

얼굴이 창백해지며 흥분으로 노기가 섞인 언성으로 묻는 찰트의 말에 레더린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예전에 프로시안 영지에서 기연을 얻으신 것이 틀림이 없어. 하지만 프로시안 영지에서 보았던 기운과 이 기운은 성질은 같지만 패도적인 기운 면에서는 다르군."

"전하께서 소드 마스터에 오르셨단 말입니까?"

"얼마 전에 슈레이더 왕국에 제2마스터가 나왔다는 말이 암묵적으로 있었지. 하지만 온전히 믿지는 않았지만 설마 그게 전하셨을 줄이야 상상도 못했군."

"전하가 마스터라니 축하해야 할 일이 아닙니까?"

"오히려 프라스 제국에 이름을 알리는 꼴이 됐을지도 몰라. 어쩌면 그 뒤를 캐는 과정에서 우리의 움직임을 포착했을지도 모르지."

찰트는 자리에 앉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본대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전하께 생각이 있을 걸세. 그때까지는 기다려 보는 수밖에. 어쨌든 우리도 이럴 게 아니라 군대를 어서 정비하세나."

"그래야겠군요."

본대 5천이라면 이미 이안의 명령에 의해 아르텔 바깥의 은신처에 야영하고 있었다. 마법사들의 혼란마법으로 바깥에서 그들을 본다고 해도 보이지 않을뿐더러 기척조차 느낄 수 없었다. 적어도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자가 아니라면 발견하기 힘들 것이었다.

그들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방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자들이 있었다. 레더린과 찰트는 이들이 오기를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있었다.

"잘 오셨습니다. 프로시안 영지의 전속 마법사인 칸 님과 영주의 영애이신 세리아 님."

"어, 어떻게……?"

찰트는 한쪽 눈을 찡그렸다. 이리저리 유라시아 대륙에서 그들이 모르는 일이라면 거의 없을 정도로 정보에는 능했다.

특히나 이안이 있던 프로시안 영지의 사정이라면 눈에 훤할 정도로 꿰뚫고 있었다.

"반갑소."

무뚝뚝한 말이었지만, 칸과 세리아는 레더린의 흉흉한 눈빛을 보더니 그대로 굳어 버렸다. 4서클의 마법사들이라고는 하나 마스터의 눈빛을 보고 버틸 만큼 강인하지는 않았다.

"하하! 그렇게 긴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는 전하를 보필하고 있는 사람들로, 저는 찰트이고 이분은 레더린이라고 합니다."

"전하?"

칸은 무슨 소리냐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세리아의 표정은 살짝 굳어졌다.

'이들은 이안과 무슨 관계인 걸까? 단순히 보필이라고 말한다면 라인하르트 제국과 관계가 있는 건가?'

"이런, 전하께서 말씀하시지 않은 모양이군요. 뭐, 그건 그렇다 치고 왕궁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략적으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알았소."

칸은 그들이 조금 미심쩍기는 했지만, 이안이 가 보라고 했으니 분명히 믿는 구석이 있는 것이 틀림이 없다고 판단했다.

잠시 후, 칸은 자신이 알고 있는 궁 상황을 전부 설명해 주었다. 게다가 레더린은 궁에 이안 혼자만 남았다는 사실에 분노를 터트리기도 했다. 설마 수천의 병사나 기사들을 상대할 정도로 무모할 줄은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카이어스 국왕은 어디 있단 말이오?"

"아마도 베리카 백작님이 모시고 도주한 모양이오. 지금쯤 안전한 경로로 움직였을 것이니 궁 바깥에 있을 것이오."

"정확히는 모른다는 말이로군."

"우리에게는 당신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는 것이 더 중요했소."

"알았소. 찰트, 이분들을 데리고 천천히 오도록 하게. 나는 먼저 가서 전하를 도와줘야 할 것 같으니 말일세."

"알겠습니다. 반드시 전하를 데리고 시간을 끄십시오. 왕궁의 상황이 상황인지라 군사들을 데려오는 것이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지만, 이동에는 분명한 시간이 있습니다."

"알겠네."

레더린은 곧바로 땅을 박차고 여관을 나섰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그의 신형에 칸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자, 잠깐, 한 가지 질문이 있소. 아까부터 전하라고 부르는 그분이 도대체 누구란 말이오? 내가 생각하는 그 사람이 맞단 말이오?"

지금까지의 상황을 보았을 때, 왕궁에서 남아 있는 것은 이안뿐이었다. 하지만 전하라니?

어디 왕국의 왕자라도 된단 말인가?

"전하께서는 라인하르트 대제국의 황태자이십니다. 그리고 당신들이 '이안'이라고 부르는 분이 맞으시지요."

"커, 컥! 다, 단순한 펠타온 제국의 몰락 귀족이라 생각했었건만……."

상상도 못한 신분에 숨이 턱 막혀 옴을 느꼈다. 그리고 지금까지 단순히 몰락 귀족의 자제라고 생각한 자신의 우둔함을 욕했다. 거의 패닉 상태까지 간 칸은 태평한 세리아의 모습을 보더니 입을 열었다.

"설마 아가씨께서는 알고 계셨단 겁니까?"

"우연히 알게 되었지요."

"그러고도 친구처럼 지내셨다니 놀랍습니다."

"저도 그래요."

"여기서 이야기할 시간이 없습니다. 서둘러 가도록 하지요. 전하께서 위험하실지도 모르니."

"알았습니다."

이구동성으로 대답하는 그들을 이끌고 찰트는 서둘러 아르텔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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