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7장 슈레이더 왕국 제2소드 마스터 □
과연 같은 소드 마스터란 말인가.
1미터 가까이 솟아오른 오러 블레이드에서 뿜어져 나오는 예기는 결코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라이온 용병단들의 전의를 상실한 것은 그때였다.
루시의 발걸음이 도저히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상대와 자신 둘 다 오러 블레이드를 뽑아내고 있었지만, 온갖 이름 있는 대장장이의 혼이 담긴 자신의 검보다 이제 갓 약관이나 됐을 법한 청년이 뽑아낸 오러 블레이드가 훨씬 위협적이었다.
검도 이가 닳은 데다 그다지 비싸 보이지도 않는 검.
어느 이름 없는 대장장이가 만들었을 법한 양산형 검을 들고 있는 청년의 전신에서는 형용할 수 없는 살기가 뻗쳐 나왔다.
소드 마스터와 이십 명이나 되는 익스퍼트 상급자들과 최상급한테 둘러싸여 있어도 한 치의 두려움이나 망설임도 없어 보였다. 오히려 당당한 태도와 건들건들 해 보이기까지 하는 오만한 웃음은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화를 솟구치게 만들었다.
하지만 충분히 오만할 자격이 있다. 충분히 건들건들하여도 누구라도 함부로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그는 소드 마스터였다. 그것도 대륙십강, 유라시아 대륙에서 제일 강한 초인 10명과도 버금가는 그런 자였다.
"내가 마스터라는 것을 알고 덤빈 것은 아니었나? 아니지! 설마 마스터 초입이 아닐 거라고 상상하지 못한 것이겠지."
"……."
"그럼 묻겠다. 너희들은 누구냐? 우리를 노리는 이유는?"
트리스탄은 분한 감정이 일어섰지만 그렇다고 함부로 자신의 검을 휘두를 정도로 멍청이는 아니었다. 머릿수만 믿고 까불 수준이 아니다. 적어도 지금은 칼을 누가 쥐고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
"……말할 수 없소."
입술을 비집고 나온 말이다. 이안은 만족스럽지 못한 표정으로 살기를 더욱 내뻗었다.
"말하지 않으면 죽는다. 다시 묻겠다. 너희들은 누구냐? 십 초를 세기 전에 말하지 않으면 누구든 죽인다."
"크윽!"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살기가 아니었다. 살기의 대상이 아닌 세리아나 로이니스, 칸까지도 거의 신음을 삼키며 상황을 보고 있었다.
"십……."
"……."
"구."
"……."
카운트는 계속해서 진행되었다. 그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이들은 철저하게 쉐도우 로드에게서 키워진 이들이다. 어쌔신들은 대답을 하느니 차라리 자결을 할 만큼 지독한 놈들이다.
"넷."
루시는 어금니를 꽉 물었다. 지금 카운트를 세는 자는 검을 늘어뜨리고 있다. 지금 당장 땅을 밟고 도약해서 오러 블레이드를 휘두른다면 충분히 목을 벨 수 있다.
"셋."
잠시 갈등이 들었다. 만약 실패한다면?
"둘."
실패해도 상관이 없다. 어차피 말을 하지 않고 있다면 죽는 것은 피차 마찬가지다.
"하나."
루시는 살기를 지웠다. 상대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트리스탄을 쳐다보는 것이다. 루시가 도약하려는 그 찰나, 트리스탄이 갑자기 고함을 지르며 상대에게 달려들었다.
"크아앗!"
절호의 기회다. 상대는 정확히 트리스탄에게 시야를 빼앗겼다. 상대가 마스터라 하지만 자신도 마스터다. 시야를 빼앗긴다면 충분히 단숨에 목을 딸 수 있을 것이다.
탓!
생각은 길었다. 하지만 행동의 시간은 극히 짧았다. 루시의 오러 블레이드는 정확히 상대의 목을 향해 나아갔다. 루시와 상대가 떨어진 거리는 불과 5미터. 지금 상대의 손은 트리스탄의 검을 막고 있다.
'이길 수 있다.'
"위험해!"
세리아의 경고를 들은 이안의 왼손은 정확히 트리스탄의 검을 막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 경고는 트리스탄의 검이 아닌 루시의 검을 보며 한 것이라고 알 수 있었다.
챙!
인간의 피부와 오러가 담겨 있는 검이 맞부딪쳤는데도 불똥이 사방으로 튀기 시작했다.
"이, 이럴 수가!"
트리스탄은 후두부를 둔기로 얻어맞은 듯 비틀거렸다. 오히려 검을 내지른 자신이 충격을 먹었다.
이안은 그대로 전신을 바닥으로 깊숙이 숙였다. 이안이 숙이고 나자 곧바로 루시의 검이 허공을 내질렀다. 이안은 양팔을 바닥에 대고 작은 기합 소리와 함께 스프링처럼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빡!
이안의 양다리가 교차함과 동시에 루시의 뒷목을 강하게 후려 찼다.
"악!"
그녀는 짧은 비명과 함께 그대로 바닥으로 내팽개쳐졌다.
이안은 허공에서 한 바퀴 돌고 바닥으로 가볍게 착지했다. 그리고 멍한 상태의 트리스탄을 향해 그대로 검을 던졌다.
푹!
"컥!"
트리스탄의 심장으로 정확히 검이 들어갔다. 잠시 후, 피가 분수처럼 쏟아지며 그대로 트리스탄이 절명했다.
그것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익스퍼트 상급인 라이온 용병단도 제대로 보지 못해 눈을 껌뻑이며 쭈뼛쭈뼛 신경이 곤두 서 있었다.
이안은 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섬전 같은 속도로 손가락을 내뻗으며 그들의 수혈을 짚기 시작했다. 수혈을 짚인 라이온 용병단들은 하나 둘 바닥으로 풀썩 쓰러졌다.
누군가의 개입이 없다면 적어도 6시간은 지나야 일어날 것이었다.
"으으……."
이안은 신음을 터트리며 뒷목을 잡고 일어나는 루시의 마혈을 순식간에 점혈했다. 마혈을 점혈당한 이상 움직이지 못할 것이었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라이온 용병단과 마스터인 자신이 한순간에 제압당한 것을 믿지 못하는 듯했다.
"신경 쓸 것 없습니다. 그들은 모두 죽은 것이 아니니까요."
이안은 펼치고 있던 만상귀일신공을 해제하며 정확히 그녀만 자신들의 짐마차 뒤로 실어 버렸다.
"어차피 저들이야 곧 있으면 일어날 것입니다. 운이 좋아 늑대나 호랑이 같은 맹수들을 만나지 않는다면, 살아서 돌아가겠지요."
"으, 감히! 나, 날 어디로 데려가는 것이냐?!"
루시는 분한 듯 앙칼진 목소리로 꽥꽥거렸다. 이안은 그녀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곧바로 일행들을 휙 둘러보았다.
"어서 타시죠. 수도까지 얼마 안 남았습니다."
"그, 그러세."
칸은 나이에 맞게 이안의 무위를 보고서도 금방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세리아는 이미 경험한 것이었기에 담담했지만, 로이니스는 마치 못 볼 걸 봤다는 듯 한동안 굳어 있었다.
"로이니스!"
"아, 알았어."
느림보같이 짐마차에 올라선 로이니스는 그동안 이안을 하인 부려먹듯 대한 것이 두고두고 후회되었다.
'난 바보 아닐까? 어쩜 이렇게 둔한 거지?'
소드 마스터 앞에서 귀족 신분 자랑한 꼴이었으니, 민망해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마스터는 대륙에서도 아주 귀중한 인재다. 어느 제국이나 왕국에 가서라도 '어서 옵셔!'소리를 들을 수 있다. 제국이라면 냉큼 백작의 작위와 거대한 영토라도 내놓을 것이었다.
갑자기 슈레이더 왕국의 백작의 딸인 로이니스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 * *
한 번도 쉬지 않고 달려온 결과 제시간에 맞춰 아르텔에 도착할 수 있었다. 루시가 애초에 자작극을 하며 가져왔던 말들과 계속해서 교체를 해 오며 마차를 끈 덕분이었다.
수도에 도착해 오면서 알 수 있었던 것은 루시가 노렸던 것은 이안이었다는 점이다. '왜 노렸느냐, 어디서 온 것이냐, 너는 누구냐?'라는 질문에는 일절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루시는 '자신의 몸을 제압한 것은 무엇이냐, 마법이 아니냐?' 같은 질문도 해 왔다. 이따금씩 몸을 움직일 수만 있었다면 당장에라도 혀를 깨물고 자결할 것이라는 살벌한 엄포도 내놓았다.
그동안 지켜본 결과 아주 독한 사람이었다. 정말 마혈을 풀면 그럴 것 같다고 이안은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마차의 분위기도 상당 변해 있었다. 로이니스는 이안과 눈을 마주치기만 해도 고개를 홱 돌렸고, 칸도 이안의 실력을 보자 마치 귀족 대하듯 조심히 존대까지 해 왔다.
조금 불편한 감이 있어 평소처럼 대해 달라는 말을 부탁했지만, 칸은 그럴 수 없다며 마부 역할도 자처하며 이안에게는 부탁 하나 하지 않았다.
아르텔 수도 검문은 예상대로 간단하게 들어갈 수 없었다.
관광도시인 아르텔이기 때문에 혹시라도 어떤 자들이 침입할지 몰라 한참이나 기다려서야 들어갈 수 있을 듯했다.
기다리는 시간이 조금 따분했는지, 아니면 무슨 생각을 가졌는지 모를 루시가 갑자기 이안에게 제안을 하나 해 왔다.
"나를 묶은 이 방법을 설명해 준다면 나도 한 가지 질문에 대답해 줄 용의가 있다."
한 명의 살수로서 이 방법에 흥미를 느끼는 것일까?
이안은 응당 '그러죠'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대답해 드리죠. 레이디 퍼스트라는 말도 있으니."
이안의 능청스러운 말에 루시는 인상을 찌푸리며 코웃음을 쳤다.
"흥! 레이디를 이런 식으로 처박아 두는 기사도 있나? 어쨌든 좋아. 하지만 답변이 맘에 안 들 경우 나도 네 질문에는 답을 해 주지 않을 거야."
"좋아요. 음……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아! 인간의 몸에는 수많은 혈도가 있죠."
"혈도?"
"예. 당신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혈도는 바로 마혈. 인간의 움직임을 제재하게 만드는 거죠."
"그런 혈도가 몇 개나 있는 거지? 아니, 대체 그런 혈도라는 것을 어디서 배운 거지?"
이안은 씨익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안 되죠. 이번에는 제가 질문할 차례인데요."
"흥! 좋아. 질문해 봐."
"나를 노린 이유는?"
"그건 네가 드래곤의 피를 가지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드래곤의 피라는 말을 들은 일행들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특히 그런 것에 관심이 많은 칸은 갑자기 이안을 홱 돌아보았다.
"만약 더 궁금한 게 있다면 계속하도록 하죠."
"좋아. 드래곤의 피는 어디 있지?"
"그건 마셨어요. 그 당시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수준이라 마시지 않았다면 지금 이 자리에 있지도 못했겠죠. 그럼 질문. 당신들은 누구죠?"
어떻게 드래곤의 피에 대해 알고 있는지 궁금한 이안이다. 그것은 분명 세리아나 이안, 그때 만났던 기사들뿐이 모를 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누군지 묻는 거야? 아니면 내가 속한 단체를 묻는 거야? 당신들이라고 했으니 말해 주지. 사람들은 우리를 블랙 머플러(Black Muffle)라고 부른다."
"헉!"
"브, 블랙 머플러?"
귀족인 로이니스나 마법사인 칸은 거의 경악스런 표정을 지었다. 유라시아 대륙의 최고인 살수 단체.
변방 귀족이었던 세리아로서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모른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칸은 예전 오래된 친우에게서 블랙 머플러라는 단체를 들어 본 적이 있었다.
의문의 사건으로 왕이 죽거나 혹은 그에 준하는 왕족이나 나는 새도 떨어뜨릴 권력을 지닌 귀족들이 죽는 경우는 거의 블랙 머플러의 손길이 있다는 말도 있을 정도였다.
자신이 블랙 머플러에게 쫓기고 있다는 사실에 로이니스는 소름이 쫘악 돋았다.
"그럼 이번엔 내가 질문이다. 라인하르트 제국의 황제 무덤에 간 이유는?"
"우연한 기회였어요. 그때 헤일론 백작에게 쫓기다가 절벽으로 뛰어내렸죠. 하지만 운이 좋게 그 앞으로 떨어졌고, 우리는 길을 찾다가 그곳으로 흘러들어 갔죠. 그럼 이번엔 제 질문. 드래곤의 피에 대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죠?"
"듣기로는 네가 그 무덤에 들어갔을 때 두 갈래 길이 나왔을 것이다. 그때 왼쪽에는 드래곤의 피가, 오른쪽에는 샤이헬 황제의 검술이 있었지. 검술서에 적혀 있기를 드래곤의 피가 있다고 하더군."
참으로 왼쪽으로 가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이안이었다. 검술이라면 이미 청성파 것이 있다. 조금 아깝기는 하지만, 목숨이 위험한 그 순간에 드래곤의 피가 훨씬 도움이 되었다.
"질문은 이제 그만 하도록 하죠. 저도 더 이상 궁금한 것도 없고, 이제 검문의 시간도 온 것 같은데."
정말이었다. 경비병이 점점 다가오더니 이안이 있는 마차를 수색하기 시작한 것이다.
"저를 죽이기 위해 왔다면 위조라도 신분을 증명하는 것이 있겠죠?"
"그 질문은 아까와 같이 꼭 대답을 해 주어야 하나?"
"물론 아닙니다만."
"아니, 없다."
"예?"
"없다고."
세리아나 로이니스는 용병패를 들이밀음으로써 신분을 증명했다. 이안에게는 자유기사의 신분증이 있으니 물론 상관없었다. 칸 또한 미리 준비된 증명서로 확실히 신분이 입증된 것이다.
"아르텔 방문 목적이 무엇이오?"
"여행차 왔소. 국왕 전하께서 생신을 맞은 것에 대해 축제가 벌어진다고 들었소만."
"물론이오! 아르텔은 최고의 관광도시인 만큼 최고의 축제가 벌어질 거라 장담할 수 있소."
"축제일은 언제부터요?"
"오늘 밤부터요. 그럼 마지막 한 분 남았군. 신분패를 보여 보시오."
경비병은 칸과의 대화를 끝으로 손을 내밀었다. 루시는 정말인지 거짓말인지 도통 표정에서 진실을 구분할 수가 없었다. 이안에게 물론 제압당하긴 했지만 이성과 본능을 제어하는 마스터의 경지다. 게다가 어려서부터 쉐도우 로드인 아버지에게서 별별 훈련을 받아 온 몸이었다.
"……."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자 경비병은 살살 약이 올랐다.
"어서 냉큼 보여 주시오! 뒤에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보이지도 않소?"
"자, 잠시만요. 조금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여자의 몸을 이안이 더듬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세리아가 대신 눈치를 채고 옷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오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패가 나오지 않은 것이다.
경비병은 한순간 싸악 표정이 굳어 버리더니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서며 창을 들어 올렸다.
"이놈들! 수상한 자가 필시 맞구나. 여봐라, 이놈들을 포박하라!"
"옙!"
대기하고 있던 경비병 다섯이 달려와서는 이안 일행을 천천히 줄로 묶으려 하고 있었다.
"이런 멍청한 놈들아, 내가 누구인 줄 아느냐? 어서 썩 비키지 못할까!"
이런 상황에서 더욱 열을 내는 것은 로이니스였다. 평민에 불과한 경비병들이 자신의 몸에 손을 댄다고 생각하니 열이 바짝 올라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잠시 멈추어라!"
전신을 플레이트 메일로 무장한 기사 하나가 갑자기 마차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기사를 본 로이니스의 표정도 순식간에 굳어 버렸다.
"아니? 아, 아가씨가 아니십니까? 아가씨가 어째서 이런 마차에……! 이놈들, 당장 비키지 못할까!"
그자는 바로 베리카 백작의 기사 중 한 명인 알레드였던 것이다.
알레드는 동부에서 수도로 들어오는 검문소를 담당하는 기사였다. 베리카 백작의 심복이기도 한 그가 검문소를 맡았으니 베리카 백작이 국왕 카이어스에 대한 충심이 얼마나 대단한지 느낄 수 있었다.
알레드는 오늘도 평소와 같이 검문소를 담당하고 있다가 갑자기 소란스러운 소리에 따끔한 충고를 주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그 순간 그런 생각은 꼬리를 말고 사라져 버렸다. 소란스러운 소리의 주인은 자신이 익히 알고 있는 바로 로이니스였기 때문이다.
"잠시 멈추어라!"
아직 정확히 확인된 바가 없기 때문에 바로 앞까지 다가가서야 알 수 있었다.
"아니? 아, 아가씨가 아니십니까? 아가씨가 어째서 이런 마차에……! 이놈들, 당장 비키지 못할까!"
자신의 눈은 정확했다. 집을 가출해서 몇 달 동안이나 사라져 있던 로이니스가 맞았다.
"당장 길을 비키라 일러라! 이분은 베리카 백작 각하의 영애 분이시다."
"허, 헉! 베, 베리카 백작 각하의 말입니까?"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경비병들은 줄을 휙 던져 버리고 곧바로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저희가 미천하여 아가씨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집에 하나뿐인 딸이 있으니, 제발 목숨만은……."
"흥! 너희들의 목숨을 취해 어디다 써먹는단 말이냐? 내 신분을 알았으면 당장 길을 열어 주기나 하거라."
"옛! 이놈들아, 당장 길을 비키라 일러라."
검문소라고 한들 평민과 귀족이 다니는 길은 애초부터 달랐다. 하지만 경비병은 호들갑을 떨며 재빨리 짐마차를 통과 시켰다.
알레드는 잠시 검문소에서 자신의 말을 끌고 나와 짐마차의 호의를 자처했다.
"아가씨, 빨리 집으로 가시지요. 백작 각하께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십니다."
"아, 아빠는 화가 많이 나셨어?"
로이니스는 풀이 한껏 죽어서는 살짝 물었다.
"아닙니다. 지금이라도 돌아오신다면 아마 맨발로 맞이하실 것입니다."
알레드의 말도 사실이었다. 로이니스가 가출한 한 달 안에는 돌아오기만 하면 다리를 부러뜨리겠다고 호언장담하던 베리카 백작이 두 달이 넘어서자 신전에 돈까지 기부하며 로이니스가 돌아오기만을 빌었다.
"정말로?"
미심쩍은 표정으로 다시 물었지만, 알레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합니다. 기사들 또한 아가시께서 돌아오시기만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그, 그래. 일단 집으로 가자."
* * *
베리카 백작은 국왕파였다. 오늘의 그가 있는 것은 바로 선왕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굳게 믿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대부호 중의 하나, 상인의 기질이 남아 있기 때문에 신뢰를 절대 잃지 않는 것이 신조였다.
며칠 전 그는 국왕 카이어스의 소환 부름을 받고 곧바로 왕궁으로 달려간 것을 회상했다.
'국왕 전하, 부르셨습니까. 신 베리카 폰 라이젠이 슈레이더 왕국의 지배자를 뵈옵니다.'
'오! 잘 오셨습니다, 백작. 가까이 사는데도 정말 오랜만에 뵙는군요. 로이니스는 잘 있나요?'
안부를 묻는 왕의 표정이 밝긴 해 보였지만, 눈에는 슬픔이 가득해 보였다. 그것을 엿본 백작은 남몰래 한숨을 쉬며 거짓을 고해야 했다.
'물론입니다. 전하, 요즘 사고를 많이 치긴 하지만 철이 덜 들어서일 것입니다. 염려 놓으셔도 됩니다.'
'후후! 하긴 어려서부터 그랬죠. 요즘 궁에만 있다 보니 따분하기 그지없어요. 꼭 며칠 후에 데려오세요. 제 생일이니만큼.'
수도에서는 축제가, 왕궁에서는 생일을 축하하는 파티가 펼쳐질 예정이다. 그날은 모든 귀족들이 참여하여 생일을 축하하게 될 것이다.
'꼭 데려오겠습니다, 전하.'
식은땀을 삐질 흘리며 베리카 백작이 고개를 숙였다.
'그래요. 그럼 이쯤으로 그만 두고, 백작을 왕궁으로 부른 이유는 제가 믿는 이가 백작뿐이라 그래요.'
'아,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신은 그저 불충한 자일 뿐입니다. 만백성의 어버이신 전하의 곁에는 충신들이 아주 많사옵니다.'
'후후! 말이라도 정말 고마워요. 그래서 부탁하는 겁니다. 베리카 백작, 제 생일 파티가 열리는 날, 한 가지 부탁을 드려도 될까요?'
'무엇이든 말씀만 하십시오, 전하. 신은 기쁜 듯으로 받아들이겠나이다.'
그 후로 카이어스 국왕에게 흘러나온 말은 아주 충격적인 것이었다. 필립 후작이 얼마 전, 특급 어쌔신들을 고용하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어쌔신들이 국왕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랬다. 카이어스는 자신의 목숨을 염려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 그렇다면 그 반국왕파인 놈들이 그날을 반역의 날로 잡았다는 뜻이옵니까?'
'그래요. 그런데 저에겐 그들을 막을 힘이 없어요. 백작이 절 도와줄 수 없나요?'
'하, 하지만 신이 무슨 힘으로……. 물론 신의 힘이라도 필요하시다면 기사와 병사들을 이용하여 전하의 안전을 책임지겠습니다.'
'그 정도라도 고마워요, 백작.'
그날 카이어스 국왕은 정말이지 웃고 있었다. 자신이 죽을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도 말이다.
반역이 일어나면 왕이 죽임을 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권력에 미친 필립 후작이라면 국왕을 죽일 것이 분명했다.
국왕에겐 반국왕파의 힘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들의 힘은 너무나 강력했고, 국왕은 너무나 나약했다. 그리고 이번 반역으로 인해 백성들이나 자신을 믿고 따르는 귀족들에게 어떠한 파장이 미칠지 걱정하고 있었다.
분명 반국왕파가 정권을 잡는다면, 국왕파는 반역자로 누명을 쓴 채 모조리 처형당할 것이었다. 그렇다면 베리카 백작도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국왕 전하를 지켜야만 한다. 하지만 어떻게?'
드디어 오늘이 천춘절(왕의 생일)이다. 며칠 전부터 머리를 쥐어짜며 생각해 보았지만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때였다. 병사 하나가 집무실을 빠르게 열어젖히며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
"백작 각하, 아가씨께서 돌아오셨습니다."
"뭐, 뭐라? 로이니스가 말이냐? 알았다. 지금 어디 있느냐?"
"방금 정문을 통과하셨습니다. 잠시 후면 저택으로 들어오실 겁니다."
"알았다."
과연 '대부호 베리카 백작!'이라는 말이 절로 튀어나왔다.
저택은 무척이나 웅장하고 화려했다. 특히 저택과 정문 사이에 존재하는 분수대를 중심으로 화려한 꽃들은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온 로이니스는 꽃의 향기를 맡을 새도 없이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어쩌지? 이대로 집에 들어갔다가 아빠한테 혼이라도 난다면…….'
아무리 귀한 꽃처럼 곱게 자란 로이니스라도 평소 아버지만큼은 무서워하고 있었다. 이안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고 있던 터라 옆에서 실소를 머금었다.
"풋!"
얼마나 귀가 예민했던지, 로이니스의 표정이 굳어 버리더니 이안을 싸늘한 표정으로 쳐다본다.
"뭐가 우스운 거야?"
"아뇨, 별로."
"흥!"
저택으로 향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비단결 같은 옷을 걸쳐 입은 중년의 남자가 고귀한 표정으로 그들을 맞이했다. 특히 로이니스를 봤을 때는 다른 귀족들과는 달리 체통도 잊은 채 껴안아 버렸다.
"아, 아빠, 숨 막혀."
"나는 네가 어떻게 된 줄로만 알았다. 널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고나 있느냐? 그래, 어디 보자. 어디 다친 곳은 없느냐?"
"괜찮아."
"오! 이분들은 누구냐?"
베리카 백작이 그녀에게서 한 발자국 멀어져서야 일행들의 정체가 궁금해진 것이다. 일단 신분상 제일 높은 자리에 위치하는 이안이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평소부터 귀가 따갑게 듣던 베리카 백작 각하를 뵈어 영광입니다. 자유기사인 화이트 폰 이안입니다."
"오! 자유기사란 말이오?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마치 영웅이 될 것만 같군. 잘 오셨소, 화이트 경."
"과찬이십니다. 이분은 마법사 칸 님과 세리아 아가씨입니다."
"아가씨?"
자유기사에게 아가씨라는 말을 들으니 그녀의 신분이 궁금했다. 하지만 현실상 지금 그녀의 신분은 평민이었다.
"현재는 성을 잃었지만 프로시안 남작님의 영애였습니다. 세리아라고 불러 주소서."
그녀는 다소곳이 인사를 끝냈다. 베리카는 딱한 표정으로 세리아를 바라봤다.
"나도 소식은 들어서 알고 있소. 죽은 줄로만 알고 있었거늘, 이렇게 살아 있어 정말 다행이오."
"감사합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어머니가 보셨다면 고맙다고 인사를 드렸을 겁니다."
"허허! 날 이렇게 띄워 줄 줄은 몰랐소이다. 일단 저택으로 들어갑시다. 할 이야기가 정말 많소."
베리카 백작은 너털웃음과 함께 진심으로 일행들을 극진히 맞아 주었다. 시녀에게서 방을 배정받고 나서 점심 식사에 초대되어 로이니스는 여행담을 아버지에게 들려 주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안이 마스터라는 사실은 철저히 숨겼다. 그것은 이안이 부탁한 것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간은 점점 흘러가고 있었다.
"백작 각하, 아침에 왔던 손님 분 중에서 화이트 경이 뵙기를 청합니다."
"화이트 경이? 일단 들어오라 하시오."
"예."
시종의 말에 허락을 내린 베리카는 의자에 몸을 뉘었다. 로이니스에게 듣기로 화이트 경은 토벌에서 뛰어난 실력을 입증함으로써 기사들의 존경을 받았다고 들었다. 그뿐만 아니라 에이전트 기사단의 부단장이라는 직위까지 있었으니 그 젊은 나이에 제법 재능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흠! 그래 봤자 고작 시골 영주의 부단장이다. 실력이야 다 거기서 거기겠지. 돈 좀 쥐어 주고 내쫓아야겠구나.'
로이니스는 대귀족의 영애다. 고작 자유기사나 음험한 저 클래스 마법사 따위와는 어울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끼익!
문을 열고 들어온 이안은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고 난 뒤였다. 이안이 당당한 표정으로 들어와서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어서 오시오, 화이트 경. 나를 보자고 했는데 무슨 일이오?"
"백작 각하께 부탁이 있어서 왔습니다."
'그럼 그렇지!'
돈을 요구할 것이 분명했다. 그 목적으로 자신의 딸 로이니스에게 접근한 것이 틀림이 없었다.
"부탁이라니? 뭐든 말만 해 보시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물론 들어주겠소."
부탁이 뭔지 알고는 있지만, 시치미를 뚝 떼었다. 일단 들어나 보자라는 생각에서였다.
"돈이 필요합니다."
'역시 예상대로군!'
"얼마나 필요하오?"
로이니스를 보필했으니 원한다면 평생 먹고살 돈도 내놓을 수 있었다. 어쨌든 그 돈을 주면서 다시는 로이니스에게 접근시키지 못할 생각이다.
"군사 오천 명을 무장할 수 있는 돈과 1년간 유지할 돈이 필요합니다."
"……."
이안은 굳게 다문 표정으로 대답을 기다렸다. 참으로 백작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돈을 요구할 줄은 알았지만, 설마 군사를 운용할 돈을 달라 할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군사 5천이라니? 대체 그 돈은 어디다 쓴단 말이오? 아니, 그것보다 군사 5천이 있단 말이오?"
"말씀드린 것과 같이 무장할 수 있는 돈과 유지할 돈이 필요합니다. 식량이나 그런 것도 필요하겠죠. 군사 5천의 존재 여부는 지금 당장은 대답해 드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군사 5천을 운용할 돈이라면 엄청난 액수였다. 일개 기사에게 넘길 만큼 적은 액수가 아니란 소리였다. 아무리 베리카 백작이 대부호라지만, 아무런 조건 없이 그 정도의 돈을 함부로 넘길 수는 없었다.
베리카 백작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 말고는 다른 건 없소? 원한다면 평생 먹고살 돈을 주겠소. 하지만 군사 5천을 운용할 돈을 준다는 건 아무리 나라도 어렵소."
"제가 뭘 해 드리면 되겠습니까?"
뻔뻔하게도 자신의 능력으로 마치 해결될 수 있다는 듯 말한다. 하지만 자유기사가 기사단의 단장이 된다 하더라도 평생 만지기 힘든 돈이었다.
"화이트 경의 진심은 이해하지만, 미안하오."
그래도 로이니스가 데려온 사람인만큼 어느 정도의 인덕은 갖추고 있을 줄 알았으나 이렇게 철이 없을 줄이야. 기사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로 기사도를 욕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렇습니까?"
"정말 미안하오. 더 할 말이 없다면 이만 나가 보시오. 오늘은 할 일이 많기 때문에, 미안하게 됐소이다."
"제 말을 오해하시나 본데, 달라는 것이 아니라 빌려 달라는 겁니다. 정확히 1년 후에 두 배로 갚겠습니다만."
"허!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런 큰돈을 두 배로 갚겠다니, 기사로서 할 말이 있고 안 할 말이 있거늘 그것도 구분하지 못한단 말이오? 그런 농담이라면 별로 좋아하지 않소이다."
"못 믿으시나 보군요."
탁!
백작은 더 이상 말할 가치가 없는지 책상을 두 손으로 치고는 몸을 일으켰다.
"대체 내가 경에게 뭘 믿고 빌려 준단 말이오!"
저벅저벅!
이안은 갑자기 주변을 잽싸게 둘러보더니 장식용 검이 매달려 있는 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금과 보석으로 치장돼 있는 검은 검신 부분이 뭉툭해서 실전에서 사용하기에는 어려움이 굉장히 컸다.
검을 쥐어 든 이안은 이리저리 허공에 베어 보더니 백작을 보며 물었다.
"보여 드리면 되는 겁니까?"
백작은 그 순간 '무엇을 말이오'라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눈이 더없이 커지기 시작했다.
"소, 소드 마스터!"
우우우우우웅!
장식용 검신의 위로 튀어 오르는 또 다른 검날.
분명히 백작이 기억하기로 그것은…….
오러 블레이드였다.
이안은 그 상태를 유지하며 살짝 웃었다.
"이제 되겠습니까, 백작 각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