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인하르트-25화 (25/60)

■ 제25장 끝난 영지전, 모습을 감춘 그들 □

애초에 후작령만큼이나 거대한 땅을 가지고 있던 프로시안 영지는 헤일론 백작가와 인근 영주가 없는 영지까지 합쳐져 거의 공작령에 버금갈 만큼 거대해졌다.

이로써 헤일론 백작은 명실상부 슈레이더 왕국 동부에서 최강의 귀족이 되었다.

그 후로 헤일론 백작은 막대한 금액으로 노예들을 대거 구입하여 장안의 숲 일대의 광산을 찾아 헤맸다. 한정된 공간에 있는 광산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발견되었고, 장안의 숲의 몬스터들을 일부 토벌하여 토지로 메웠다.

나날이 증가하는 영지와 영지민, 그리고 자본은 반국왕파의 힘을 몇 배로 증진시켜 주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뿐만 아니라 헤일론 백작이 소드 마스터에 오른다는 소문이 높디높은 왕궁을 뛰어넘었다.

이로써 마스터 보유국으로 인정받아 축하해야 할 일이었지만, 국왕파에게 있어 반국왕파에 마스터가 나타난 일은 딱히 반가워해야 할 일은 아니었다.

어린 국왕인 카이어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겉으로는 자타가 공인하는 검술 실력을 지닌 헤일론 백작을 추켜세워 주었지만 속으로는 끙끙 앓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국왕 카이어스의 근심은 늘어났다. 이제 일주일을 앞으로 다가온 자신의 생일.

마땅히 축하받을 날이지만, 그는 필립 후작이 어떤 계략을 꾸미고 있는지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자세히 엿볼 수 없음에 한탄해야만 했다.

"이 자리를 두고 거대한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거늘, 내 귀와 눈을 막아 이제야 알아차리다니."

반국왕파는 어린 국왕의 눈과 귀를 막는 것은 예삿일이었다. 이제 국왕 카이어스는 대체 누구를 믿어야 할지 혼동까지 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에게 있어 충신이란 존재는 주위에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리고 간신들의 사탕발림에 넘어가는 자신의 힘을 자책해야만 했다.

"하아, 누구를 믿어야 한단 말인가!"

그의 한숨 소리는 이제 흔하디흔한 일이 되어 버렸다.

* * *

프로시안 영주가 죽었다는 소식은 세리아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귀족의 영애가 아닌 한낱 평민에 불과했다. 게다가 공식적으로는 절벽에 떨어져 죽었다고 알려져 있었기에 프로시안가(家)는 세상에서 모습을 끝냈다고 믿었다.

이젠 헤일론 백작령이 된 프로시안 영지의 검문 강화는 철저하지 못했다. 이제 갓 영지가 합병되었기 때문에 오고 가는 사람들로 거리는 인산인해를 이루었기 때문일까?

정해진 시간까지 맞춰야 하는 경비병들로서는 그저 뒷돈이 쥐어지면 군말 없이 '통과!'를 외쳐 주었다.

챨랑!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금화가 빠르게 사라졌다.

금화를 만져 본 경비병은 미소를 짓더니 손을 위로 올렸다.

"통과!"

"고맙소. 그럼 이만."

뒷돈을 주고 마차를 끄는 남자는 로브를 깊게 눌러쓰고 있어 자세히 보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외형적으로 퍼지는 낯선 기운은 그가 마법사라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그러나 마법사가 탔다고 보기에는 어려워 보이는 마차였다.

말 4마리가 끄는 사두마차지만, 초라하기 그지없는 짐마차였다.

마차는 인적이 없는 도로를 달리더니 잠시 후, 많은 짐들 속에서 한 남자가 얼굴을 내밀며 일어났다.

"후아! 칸, 정말 죽을 뻔했다고요."

레더 아머를 껴입은 남자는 손을 아래로 내밀자, 그 손을 잡고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인 두 명이 똑같이 일어났다.

"허허! 젊디젊은 이안 경께서 그럼 누추한 곳에 이 늙은이를 처박아 두려고 하셨나."

"아뇨. 그건 아닌데, 이 좁은 곳에 셋이나 껴 있으려니 얼마나 힘든데요. 다음에는 저도 마부석에 좀 같이 앉혀 달라고요."

"걱정 말게. 내가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러는 것뿐이니."

칸의 말에 이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엥? 무슨 생각이요?"

"허허! 그냥 이 늙은이의 생각일 뿐이야."

젊은 남자는 여인 두 명을 보며 차례대로 물었다.

"세리아, 로이니스, 괜찮아요?"

세리아는 그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로이니스는 뭐가 불만인지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녀 딴에는 귀족인 자기가 이런 누추한 짐마차에 몸을 숨기고 있었으니 자존심이 상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건 그렇고 이안, 정말 생각이 있는 거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상의 없이 곧바로 수도로 가자니?"

로이니스가 은근히 물어보는 말에 이안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칸과 이안, 로이니스, 그리고 세리아를 제외한 영지 병사들과 남은 기사들은 전부 헤일론 백작가의 자원입대하여 병사가 되었다. 이안이 그들을 병사로 만들고 싶었던 이유는 프로시안 영지를 되찾기 위한 계획 중 하나였다. 그 계획에 동참을 하지 않더라도 그들은 스스로 병사가 되기를 원했다.

이안이 수도로 가는 이유는 간단했다.

예전, 라인하르트 제국의 후작이었던 레더린은 이안에게 맹세를 한 이후 프로시안 영지와 연락망을 구축해 두었다.

그 연락망은 윈스텀이 은밀하게 관리하고 있었기에 이안이 찾기에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일단 레더린과는 물의 도시 아르텔에서 만날 생각이었다.

레더린은 20년 전부터 강력한 세력을 만들어 프라스 제국에 대항하고 있었고, 그곳의 총사령관이었다. 그곳 세력의 가장 큰 문제점은 보급에 있고, 더 이상 세력을 키울 땅이 없다는 점이었다.

그 문제점을 해결해 줄 사람은 수도에 있었다.

'프로시안을 되찾기 위해서는 물의 도시 아르텔, 즉 슈레이더 왕국의 수도에 모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칸, 이 속도로 수도에 간다면 얼마나 걸리는 거예요?"

동부는 그렇게 큰 곳이 아니었다. 게다가 슈레이더 왕국은 정말 작은 변방의 국가였다. 아무리 변방 영지라지만, 빠른 사두마차를 타고 이동한다면 5일이면 도착할 수 있었다.

"5일 정도 걸릴 걸세."

이안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이안에게 살짝 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 로이니스가 들어왔다.

사실 그녀는 집을 거의 가출하다시피 뛰쳐나왔다. 수도에는 베리카 백작, 그녀의 아버지가 머물고 있었으니 쉽게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아르텔은 대륙에서 알아주는 물의 도시라고 하던데, 정말 그럴까?"

세리아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녀의 소리가 결코 작지 않았음에 로이니스가 말해 주었다.

"난 매일 봐서 질려. 그래도 대륙 최고의 물의 도시라는 건 맞으니까 관광 목적으로 여러 나라 사람들을 볼 수 있거든. 수도에 도착해서 시간이 있다면 차례대로 소개해 줄게."

세리아는 손뼉을 치며 아이처럼 좋아했다.

"어머? 정말요? 와아! 이안, 이안도 같이 다닐 거지?"

이안은 머리를 긁적이더니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 그게, 만약 시간이 되면 그럴게요."

"뭐야, 그게? 숙녀의 부탁을 거절하는 것은 신사로서의 매너가 아니란 것쯤은 몰라?"

"그, 그래도 관광 목적으로 가는 것은 아니잖아요."

"윽!"

금방 세리아는 울상을 지으며 등을 홱 돌렸다. 칸은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다가 '저런!'이란 말과 함께 딱한 표정으로 세리아를 바라봤다.

"이안 경, 검을 하나 사야 할 필요가 있겠는데."

이안이 들고 있는 검이 결코 좋은 것이 아니었다. 디펜스 캐슬에서 대량생산하여 병사들에게 나눠 주던 질 낮은 검이었다. 그동안 몬스터와의 싸움 때문에 피를 제대로 닦지 못해 이가 많이 갈리고, 손상이 심했다.

"윈스텀한테 하나 달라고 할걸 그랬나?"

하지만 '로열'을 잃어버린 이상 그와 비슷한 검을 다시 제작하기는 어려웠다. 게다가 부탁할 시간도 없이 부랴부랴 떠나왔으니 아르텔에 가면 하나 맞춰야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품고 있었다.

"후후! 칸이 하나 사 주실래요? 아까 보니까 돈이 꽤나 많은 것 같은데."

이안이 음침한 미소와 함께 얼굴을 내밀었다. 칸은 입을 쏙 다물며 품속에 집어넣은 돈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자기 돈은 꼭 지키겠다는 행동이었다.

로이니스는 그들의 대화를 듣다가 얼른 나섰다.

"물의 도시 아르텔은 관광도시야. 당연히 왕국에서 직접 운영하는 대장간이 한두 개 있을 뿐인데. 좋은 검을 구하기는 어려울걸?"

관광 사업이 발달하다 보니 자연스레 상인들이 와서 장사를 하기 마련이었다. 그렇게 되니 상업이 발달했다. 상업 중에서도 기념품 판매가 제일 성행하였다.

이안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로이니스가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걱정 마. 집에 가면 창고에도 드워프제가 산처럼 쌓여 있을 테니까."

이안은 기대감을 품은 눈길로 로이니스를 바라봤다.

"마치 그건 하나 골라서 주겠다는 것처럼 들리는데요?"

"원한다면."

왠지 로이니스의 행동이 이해가 안 갔다. 대가 없이 그저 드워프가 만든 검을 주겠다니?

'어차피 베리카 백작의 집에는 반드시 들러야 한다.'

로이니스의 일 때문만은 아니었다. 프로시안 영지를 되찾기 위해서라면 베리카 백작은 계획에서 빠질 수 없는 자였다.

"좋아요."

이안은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자유도시 아이네스.

동부에서 수도 아르텔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작은 도시였다. 자유도시란 이름에 걸맞게 일부의 치안대만 있을 뿐, 경비병은 없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아이네스는 슈레이더 왕국 최고의 범죄율을 자랑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수도를 대신하여 거대한 용병지부가 있기 때문에 이곳에서는 크고 작은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났다.

"우와!"

이안은 연이어 탄성을 내뱉으며 눈을 이리저리 돌렸다. 아이네스가 작은 도시이긴 하지만 확실히 프로시안보다는 웅장함이 느껴졌다. 프로시안 영지에서는 보기 드문 높디높은 건축물들이 세워져 있었으니 이안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저곳은……?!"

그중에서도 제일 커다란 건물이 이안의 눈길을 끌었다.

아이네스라면 몇 번 들러 본 적이 있는 로이니스가 대답했다.

"용병지부."

"그렇다면 괜찮은 여관 하나 소개해 주세요."

"흥! 멍청하긴. 지금 너희들 자금 사정으로 내가 묵었던 여관으로 가려면 밥도 못 먹을걸?"

이안의 눈길이 저절로 칸에게 향했다. 일행의 자금을 관리하는 것은 다름 아닌 칸이었다. 칸 또한 고개를 내저으며 마차를 천천히 몰았다.

"에이, 그렇다면! 칸, 어디 괜찮은 데 알고 있어요?"

"크흠! 아, 알고는 있지만……."

뭔가를 강하게 숨기는 듯한 칸의 더듬거림.

일행들은 칸을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봤지만, 칸은 그저 헛기침을 할 뿐이었다.

그렇게 여관을 찾아다닌 지 십 분 정도가 되었을 때, 고급스럽지도 않고 그렇다고 헐어 보이지도 않는 평범한 여관 앞을 지나갔다.

"어, 어라? 칸, 여관이 여기 있는데 어디 가요?"

다급한 이안과는 달리 칸을 바라보자, 칸은 마치 철전지 원수라도 만난 듯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로이니스는 자금의 상황도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이 여관보다는 조금 좋은 곳으로 가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하지만 자금을 관리하는 칸도 웃긴 일이지만 그녀 말에 동의하며 일행들을 다른 여관으로 몰아갔다.

"칸 아저씨, 괜찮아요? 방을 두 개 잡는다고 해도……."

세리아가 칸을 흘겨보자, 칸은 시선을 의식했는지 너털웃음과 함께 머리를 긁적거렸다.

방금 전 여관에서 십 분 정도를 더 달리자 꽤나 고풍스러운 여관이 일행의 눈길을 잡았다. 모르긴 몰라도 이런 곳에서 묵었다가는 자금 상황이 허용 수치를 넘을 것이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칸은 한마디 상의도 없이 조금은 불만인 듯한 로이니스와 함께 여관 안으로 들어갔다.

"저…… 손님? 죄송합니다만, 오늘은 예약 손님들 때문에 방이 전부 차 버려서……."

"으응? 방이 하나도 없단 말인가?"

"죄송합니다."

"웃돈을 줘도 힘들겠는가?"

"죄송합니다."

점원은 고개를 연신 꾸벅거리며 일행들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일행들은 여관을 나와 아이네스 도시를 전부 돌아다녔지만 이상하게도 여관에 방이 남는 곳이 없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그러게. 보통 때라면 이렇게 사람이 많이 찰 리가 없는데……."

"얼마 후면 왕의 생일을 기념하는 축제가 수도에서 벌어진다는군."

그때만큼은 축제가 벌어지기 때문에 자연스레 용병이나 동부 사람들이 죄다 이곳에 모여들었다. 그렇다면 여관이 꽉 차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럼 이제 남은 곳은……."

일행들이 처음 보았던 평범한 수준의 여관. 오직 그곳만이 칸 때문에 들어가 보지 못한 곳이었다. 오랜만에 고급 여관에서 푹신한 침대에 베개를 묻고 자고 픈 로이니스는 금방 인상을 찡그렸지만, 그렇다고 노숙을 하고 싶은 맘은 더더욱 없었다.

끼릭.

여관 앞에는 미리 키가 작은 소년 하나가 기다리고 있다가, 마차가 멈추자 곧바로 달려왔다.

"오늘 여기서 묵고 가실 건가요?"

"그렇단다. 남는 방이 있어?"

"예! 오늘 예약 손님들이 취소를 하시는 바람에 2인실이 2개 남았어요."

"오, 다행이네. 우리 일행도 딱 4명인데. 어라? 칸, 저기, 안 내리고 뭐 해요?"

로이니스와 세리아, 이안은 내려서 여관 안으로 들어가려는 중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칸은 마부석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허허. 그, 그게, 마침 배가 아프기도 하고……."

세리아는 칸의 모습에 혀를 찼다.

"쯧쯧. 칸 아저씨, 그러게 차가운 음식은 웬만하면 조금씩 먹으라니까요."

"그, 그럴걸 그랬군. 허허!"

하지만 잠시 후 소년은 칸을 유심히 쳐다보더니 익살맞은 표정으로 헤벌쭉 웃었다.

"헤헤! 걱정 마세요. 저희 여관은 손님들을 위하여 배탈약이 상시 준비되어 있으니까요."

하지만 칸은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 아니, 어쩌면 우리가 돌아다니는 동안 다른 여관 예약이 취소됐을지도 모르고 나만이라도 다른 곳을……."

"안 된다는 거 몰라서 그래요? 저희 사정이 여의치 않은 것을 제일 잘 아는 칸이 왜 그래요?"

"그, 그게……."

결국 이안은 칸의 팔을 잡고 끄집어냈다. 중년의 마법사 칸은 결국 이안의 젊은 힘에 버티지 못하고 거의 끌리다시피 여관 안으로 들어와야 했다.

"바, 방은 이안 경이 좀 잡아 주게."

카운터 쪽을 쳐다본 칸이 급히 후드를 깊게 눌러쓰며 고개를 푹 숙였다.

"알았어요, 칸."

그의 행동이 좀 의심스러웠지만 이안은 돈주머니를 받고 카운터 쪽으로 향했다. 카운터에는 어느 여관과는 다른 3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여인이 칸을 유심히 쳐다봤다.

"칸?"

아무래도 이안이 하는 말을 들었나 보다.

갑자기 칸의 머리가 살짝 들썩거리더니 등을 홱 반대쪽으로 돌렸다.

여인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날렵한 움직임으로 카운터를 박차고 뛰어오르더니 칸을 향해 달려들었다.

"정말 칸?"

그녀가 다가오자 칸은 황급히 다른 방향으로 또 등을 돌렸다.

"자, 잘못 봤소. 어서 방이나 냉큼 주시오."

여인은 오른손을 칸의 후드 끝자락을 잡더니 냅다 당기기 시작했다. 칸은 두 손에 전력으로 후드를 사수하며 절대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 이익! 이게 무슨 짓이오!"

화를 내는 언성이었지만 결코 얼굴을 보여 주지 않았다.

"흐응∼ 좋아요. 뭔가 상처라도 있어서 안 보여 주는 건가요? 아니면 당신이 정말 칸……."

"글쎄 아니래도. 다, 당신이 잘못 들은 것이오. 내 이름은 칸이 아니라 렌이오."

급히 지은 티가 팍팍타는 외글자 이름 렌이지만, 여인은 그런 칸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다 손을 탁탁 털었다.

"그럼 일행들에게 물어보도록 하죠. 만약 당신들이 저분의 후드를 벗겨서 얼굴을 저에게 보여 준다면 여관비는 50% 절감해 드리겠어요."

"허, 헉!"

자금 상황을 뻔히 알고 있는 일행들이었다. 여관비가 50%나 줄어든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을 것이었다. 로이니스나 세리아는 이 상황을 흥미롭게 쳐다봤으나 이안의 손은 여인과 마찬가지로 후드를 당기고 있었다.

"크, 크윽! 이, 이안 경! 제발 한 번만 봐주게나."

"봐주긴 뭘 봐줍니까? 지금 밥을 굶을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어떻게……."

"제발……."

"안 됩니다!"

애걸복걸하며 다리에 매달리다시피 하는 칸에게 이안은 단호하게 거절하며 종국에는 후드를 벗겼다. 그렇게 드러나는 칸의 얼굴.

칸의 얼굴은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을 만큼 평범했으나 그 얼굴을 목격한 여자는 마치 석상처럼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이윽고는 여인의 눈에서 굵은 눈방울이 볼을 타고 바닥으로 떨어진다.

"카, 카에데."

"칸 오빠……."

"엥?"

일행들은 죄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상황이 마치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여인은 잠시 후 칸의 품에 안겨 버렸고, 칸은 멍하니 서 있었다.

"바보…… 바보…… 왜 이제 돌아왔어?"

퍽! 퍽!

여인이 주먹으로 칸의 가슴을 살짝 두들겼다. 그러자 칸의 낯빛이 절망으로 물들어 가기 시작했다.

"도, 돌아온 게 아니라……."

"둘이 아는 사이예요?"

세리아가 묻자 여인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알다마다. 나와 칸 오빠는 20년 전 결혼을 약속한 사이였던걸."

"예에?"

그러니까 20년 전.

칸은 마법사로서의 재능을 인정받지 못해 아카데미에서 쫓겨나 세상을 방황하고 다녔다. 하지만 어찌어찌하다 보니 자유도시 아이네스까지 흘러들어 와서는 돈 몇 푼 없이 무작정 여관에 머물렀다. 거의 몇 날 며칠을 밥 한 끼 구경 못한 터라, 그만 어린 마음에 무전취식을 결행하기로 했다.

하지만 급히 먹은 밥이 체하기라도 한 걸까.

밥을 먹고 난 후 그 자리에서 끙끙 앓아 버리는 바람에 여관에서 이틀을 묵고, 치료사의 도움까지 받아 왕창 갚지 못할 빚을 지게 된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도망을 가고 싶긴 했지만 그 당시 칸의 경지는 고작 1서클. 칸은 주인장의 눈치 때문에 그렇게 며칠을 고민하는 사이 빚은 쌓여만 갔다.

하지만 1서클로는 여관 주인의 점원 서넛을 이기기에는 역부족. 아마 주문을 외우는 사이 몽둥이찜질에 당할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 여관 주인인 한 소녀가 칸을 보고 한눈에 반하게 된 것이었다.

그것이 지금의 카에데였다.

그녀가 반하게 된 것은 여관 주인, 즉 그녀의 아버지가 시켜 칸의 돈을 받기 위해 방으로 들어간 순간이었다.

"저, 저기, 손님? 지, 지금까지 여관에서 묵었던 돈을 반이라도 좀 내 주시는 게 어, 어떠세요?"

칸을 보는 순간, 카에데는 마치 마법에 걸린 것처럼 두근거리는 가슴을 잡고서는 말을 더듬거리며 물었다.

"도, 돈?"

하지만 칸도 붉어진 얼굴로 말을 더듬거리는 모습을 보고 카에데는 큰 착각을 하게 되었다.

'어머? 어쩜……. 저분도 나를 좋아하나 봐. 우리 둘이 첫눈에 반한 건 아닐까? 그렇담 천생연분? 아아!'

"지, 지금 그게 마땅히 낼 돈이 없는데 마침 내일 내가 가지고 있는 보석을 팔러 갈 생각인데, 내일 걷으러 오면 안 될까?"

"그, 그러세요. 그, 그럼 이만."

카에데는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곧바로 문을 쾅 닫고 나가 버렸다. 돈도 제대로 수금하지 못한다고 크게 혼이 나긴 했지만, 이미 칸의 얼굴에 정신이 나가 버린 카에데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달콤한 꿈의 세계에 빠졌다.

반면 칸은 웬 미친 소녀를 본 것 같다며 구시렁거리다가 새벽이 되기를 기다렸다. 새벽이 되자 까치발을 들고 짐을 바리바리 싸 들었다. 야반도주를 결심한 것이었다. 이대로 여관에 계속 머물기에는 눈치만 보였다.

다음 날 돈을 내지 못한다면 종업원들의 몽둥이찜질로 악몽을 꿀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젠장! 이 마법사 칸 님이 고작 종업원들의 몽둥이찜질에 죽을 수는 없지."

칸은 창문을 활짝 열며 커튼을 밧줄 삼아 1층으로 살살 내려갔다. 하지만 그때 하필이면 재수 없게도 카에데가 칸에게 여관 한 바퀴를 돌며 자신을 어필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다.

"어라?"

"헉!"

1층에 간신히 내려온 칸과 카에데는 눈을 마주치며 서로 놀랐다.

"으응?"

그러다 카에데는 칸이 바리바리 싸 들고 있는 짐을 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건 설마 도주?"

"아, 그, 그게!"

퍽!

연약하게만 보였던 카에데의 주먹은 마치 철심을 박아 넣은 듯한 충격을 연신 안겨 주었다. 칸은 거의 정신이 혼미해질 때까지 카에데에게 얻어맞았다.

'컥! 무, 무슨 여자애가 이런 힘이?'

칸은 몰랐지만, 카에데는 용병지부에서 어릴 때부터 커 오며 아버지가 하는 여관에서 종업원으로 일했기에 많은 용병들을 알고 있었다. 친한 용병들에게 호신술로 배운 격투기는 그녀를 거의 살인 병기 급으로 탈바꿈시켜 주었다.

"자, 잠깐! 그만…… 살려 주세요. 뭐든지 할게요."

뚝!

'뭐든지 할게요'란 말에 카에데의 주먹은 허공에서 멈췄다.

카에데가 칸을 죽기 일보 직전까지 때린 이유는 칸이 자신을 좋아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 믿음에 철저하게 배신당했다고 생각했는지 평소보다도 손속이 더욱 매서웠다.

"뭐든지 한다고?"

"예, 옙! 요리든 청소든 뭐든지 시켜만 주시면……."

"이름이 뭐야?"

"카, 칸입니다!"

"나이는?"

"스물세 살."

그때 카에데의 나이는 열여덟 살. 평소 성격 때문에 결혼 적령기에도 불구하고 아직 남자 친구가 없는 카에데는 칸을 자신의 결혼상대로 점찍어 버렸다.

"뭐든지 한다고 했지? 그럼 나랑 결혼하자."

"아, 옙. ……예?"

"뭐든지 한다며?"

"아, 그, 그건. 좀 다른……."

"싫어?"

그렇게 칸은 거의 한 달가량을 카에데에게 시달리다가 결혼식 당일 도주에 성공했다. 그렇게 해서 흘러들어 간 곳이 프로시안 영지였다.

카에데에게는 즐거운 추억이겠지만, 칸에게는 절대 잊지 못할 괴로운 악몽 같은 얘기였다. 아직까지도 1년에 몇 번씩 그 일로 가위를 눌리며 살고 있는 칸이었다.

"……."

과거의 일을 알게 된 일행들은 죄다 고개를 끄덕이며 칸의 행동에 수긍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칸이라는 것이 밝혀진 이상, 발뺌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칸 오빠, 이따가 일 끝나고 봐."

한쪽 눈을 찡그리며 사라지는 카에데를 보고 칸은 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털썩 주저앉았다.

그저 일행들은 칸을 불쌍한 눈초리로 바라볼 뿐이었다.

"밥이 입으로 넘어가는지 코로 넘어가는지 모르겠군."

이따금씩 나타나 '괜찮아? 내가 먹여 줄까?'라고 묻는 카에데 때문에 칸은 가시 방석을 앉은 듯 영 자리가 불편했다.

"범죄율 1위라고 들었는데, 그렇게 나쁘지도 않은 것 같아요."

아이네스에서 아직 이렇다 할 범죄를 피부로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칸은 오랜만에 먹는 제대로 된 음식임에도 불구하고 반쯤 남기고서야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말했다.

"아가씨, 여기 놈들만큼 지독한 놈도 없습니다. 첫인상은 제가 겪은 거에 비하면 빙산에 일각일 뿐입니다."

"어머? 그래요?"

재차 묻는 세리아의 반응에 고개를 끄덕였다.

로이니스는 불평은 안 했지만 제일 비싼 음식을 시키고도 인상을 찌푸렸다. 배가 고프지 않았다면 '귀족으로서의 체면도 없군, 흥!' 하며 먹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내일 아침 동이 트는 대로 떠나는 게 좋겠다."

"예, 그래요."

한시라도 이곳에 있기 싫은 로이니스는 주변 시끄러운 소리에 경멸하는 듯했다. 세리아도 그렇게 싫은 것은 아니었지만, 여관에서 더 머물 수 있을 정도로 돈이 여유롭지 못했다.

이안은 식사를 끝마쳤는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려고?"

로이니스의 눈썹이 꿈틀거리며 물었다.

"용병지부입니다."

그에 맞춰 세리아도 식사를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를 조심스럽게 밀어 넣더니 이안의 옆에 섰다.

"신분증이 필요해서요."

"그렇담 나도……."

로이니스는 귀족을 증명해 줄 신분패를 잃어버렸고, 세리아는 이제 귀족 자격이 박탈되었다. 용병패는 훌륭한 신분증명서가 되기 때문에 어딜 가서라도 편리한 기능을 갖추었다.

수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자유도시와는 달리 경비가 철저하기 때문에 용병패 없이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

칸도 억지로 따라오려고 했으나 카에데에게 들키는 바람에 셋이서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네스가 작은 도시이기는 하나 엄연히 바깥에는 돌아다니는 사람이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많았다. 로이니스나 세리아의 미모는 너무 눈에 띄어서 출발하기 전부터 준비해 온 로브로 얼굴을 가리고 이안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용병지부까지 가는 길은 그리 멀지 않았다. 이안은 사방을 쳐다보며 입을 꾸욱 다물었다.

로이니스는 옆에서 '촌놈'이라며 구시렁거렸지만, 세리아는 옆으로 다가와서는 옆구리를 살짝 치며 물었다.

"이안, 무슨 일이야?"

"아뇨, 단지……."

두 명.

세리아와 이안에게 미약한 살기를 뿌리고 있는 자들이 자꾸 거슬렸다. 그들은 일행들이 아이네스에 도착한 순간부터 계속해서 쫓아다녔다. 살기만 보자면 엄청난 훈련으로 다져진 자들이었다. 만약 이안이 전과 같이 익스퍼트 최상급의 경지였다면 이들의 존재를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초절정은 되지 못하나 절정의 끝 경지다. 익스퍼트 상급일까? 최상급?'

은신술에 대해서는 가히 대가라고 불릴 정도로 은밀한 이들이었다. 이안은 그들에게 자신이 눈치 챘다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태연한 척하며 웃을 뿐이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

세리아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여관에서 약 30분 거리에 있는 용병지부에 들어서자, 1층은 바텐더 식으로 용병들이 가득 차 있었다. 보통 용병들은 남자로 구성되어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용병지부도 여자 한 명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그렇기 때문이었을까?

로이니스나 세리아는 코를 자극하는 악취에 눈살을 찌푸리며 앞으로 걸어갔다. 이안은 악취보다는 은신하고 있는 자들을 신경 썼다.

'늘었군. 둘 정도인가?'

용병지부 바깥에서 두 명이 대기를 하고, 이 안에서 또한 두 명이 미약한 살기를 뿌렸다. 이안은 그들을 발견하지 못한 것처럼 태연하게 카운터 쪽으로 걸어가며 그들을 자연스럽게 흘겨봤다. 마치 시선을 돌리다가 어쩌다 눈을 마주친 것처럼.

우람한 체격과 전신이 상처투성이인 용병들과는 달리 그들은 상처도 보이지 않았고, 체격 또한 평범한 수준 그 자체였다. 무기도 별다른 것 없이 허리춤에 찬 단검이 다였다.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은 평소에도 얼굴을 가리기 위함인지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전부 다 해서 넷이라……. 익스퍼트 상급 정도 되는 수준이다. 헤일론 백작이 보냈나? 아니, 그들은 우리가 살아 있는 것을 모를 터인데. 설마 병사로 잠입한 누군가가 벌써 들킨 건가?'

머릿속에서는 여러 가지 생각이 겹쳤다. 이안은 일단 카운터로 앉아 상황을 엿보기로 시작했다. 헤일론 백작이 보냈다면 아직도 이안이 익스퍼트 최상급이라고 판단하고 있을 터이다. 그렇다면 익스퍼트 상급 네 명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 것인가?

암살자들이 아니면 저렇게 미약한 살기를 뿌리는 것이 불가능했다. 익스퍼트 상급 정도의 암살자가 넷이 기습을 가한다면 최상급은 쥐도 새도 모른 채 죽을 수도 있다. 협공을 가한다 해도 죽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뭘 드릴까요, 손님?"

젊은 점원이 묻자 이안은 일부러 알코올 농도가 심한 술 한 병을 통째로 시켰다. 용병들이 자주 즐기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비싼 술은 아니었다. 이안에게 아직 돈이 있는 이유는 칸이 그에게 돈을 맡기고 도로 가져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안은 그 술을 목구멍으로 벌컥벌컥 넘겼다. 자신을 감시하는 암살자들에게 일부러 취한 척을 하며 유심히 상태를 파악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안은 내공으로 취기를 한순간에 몰아넣어 버리고 내공을 일으켜 얼굴이 다소 상기되었다.

옆에서 보면 술이 약해 단숨에 취한 것처럼 보였다.

"잠깐,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말씀만 하십시오, 손님."

"제 등 뒤로 구석 자리에 갈색 머리의 왜소한 체격의 남자 둘이 보이십니까?"

얼굴을 들어 올린 점원이 그들을 찾기 위해 눈동자를 돌렸다. 어느 순간 찾았는지 돌아가던 고개가 멈추었다.

"아…… 옙."

"혹시 그자들이 이곳에 자주 왔었나요?"

"어제부터인가 이곳에서 나가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안은 팁이라면서 은색 동전 하나를 내밀었다.

"궁금하신 것이 있다면 또 물어보십시오!"

"아뇨, 이제 괜찮습니다."

볼일은 끝났다. 이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갑자기 세리아와 로이니스의 양어깨에 팔을 떡하니 걸치고서는 2층으로 올라갔다. 그 둘은 갑자기 예상 못할 상황에 얼굴이 붉어졌지만 팔을 떼어 내지는 않았다.

"잠시만 제 연극에 맞춰 주시지 않겠어요?"

"으응?"

"뭔데 그래?"

"아뇨. 잠시면 돼요."

이안은 그렇게 말하고 2층에 올라가서야 팔을 떼어 냈다. 이미 그의 청명심법은 내공을 고작 익스퍼트 상급 정도의 수준으로 맞춰 놓았다.

이안은 그들의 기척을 감지하며 2층에 올라와서도 그들을 주시했다.

그들은 이안이 2층이 올라가는 것을 보고서는 고대로 용병지부를 나갔다. 그리고 바깥에 있는 둘과 접촉하는 것이 느껴졌다.

'무엇을 나누는 거지?'

분명 얘기를 나누고 있는 것은 맞을 터. 하지만 얘기가 무엇인지는 아무리 이안이 화경이라 한들 들릴 리가 없었다. 청력을 집중시키면 쓸데없이 용병들이 떠드는 소리만 귀를 윙윙거릴 것이다.

"일단 들어가죠, 숙녀 분들."

아이네스 용병지부의 지부장은 이제 갓 40대에 접어든 중년 정도의 남자였다. 아이네스에서는 5년간 지부장을 맡아 왔으며, 한때는 B급 용병으로 의뢰를 맡았다가 눈 한쪽을 잃어 사무직으로 전환한 것이다.

과연, 왼쪽 눈을 검은 안대로 가리고 머리를 길러 눈을 가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안 일행이 도착하기 전에 덩치가 산만 한 남자가 먼저 지부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지부장님, 내가 이렇게 사정사정하지 않습니까? 제발 봐주시오, 제발. 고향에 어머니가 병에 걸리셔서 혼자 계신단 말입니다."

"도대체가 이게 몇 번째인지는 알고나 있는 것이오? 이렇게 되면 아무리 자네가 B급 용병이라 한들 정식으로 박탈시킬 수도 있소이다."

"아이고, 지부장님! 하라는 것은 뭐든지 하겠습니다."

키는 2미터는 될 법하고 몸무게가 150kg도 넘어 보였다. 그런 남자가 지부장에게 바닥에 엎드려 굵은 눈물을 흘렸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소이다. 어떻게 몬스터를 만났다고 도중에 임무를 포기한단 말이오? 흠, 자네 어머니를 봐서 이번은 특별히 용서해 주겠소. 하지만 몇 번식이나 찾아와 부탁하는 것은 나도 더 이상 손을 써 줄 수 없소이다. 다음번에는 옷 벗을 각오를 하시는 게 좋소."

"이 은혜는 죽어도 잊지 않겠습니다."

남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지부장의 손을 잡고 자기 팔뚝에 눈물을 닦았다.

"알았으니 이만 나가 보시오. 기다리시는 분이 있질 않소?"

"감사합니다."

등을 홱 돌린 남자가 문 앞에서 얼쩡거리는 이안을 강하게 밀쳤다.

"비켜, 꼬마!"

지부장에게 사정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이안의 옆으로 후드를 벗어젖힌 미녀 두 명이 자리를 잡고 있었으니 고깝게 보이기라도 한 것일까?

이안은 좁은 곳이었고, 세리아와 로이니스가 양옆에 있었기 때문에 손이 오는 것에도 불구하고 피하지 못한 채 뒤로 밀려났다.

분풀이를 하려 했던 용병이 이안을 쏘아보자 뒤에서 지부장의 엄한 소리가 들렸다.

"어서 가지 않고 뭐 하시오?"

"헤헤헤! 아닙니다. 가겠습니다. 그럼 이만."

입을 헤벌쭉 벌리고 솥뚜껑만 한 손으로 머리를 박박 긁으며 사라지는 용병을 바라보던 이안은 지부장의 앞으로 다가갔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소? 보아하니 이곳 아이네스에는 처음이신 듯한데. 의뢰요?"

"의뢰라기보다는 용병 시험을 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당신이?"

"아뇨, 제 옆에 이 두 분 말입니다."

순간, 이안의 전신을 훑던 시선이 세리아와 로이니스에게 옮겨 갔다. 세리아와 로이니스는 빈약해 보이는 몸과는 달리 상당한 파괴력을 지닌 마법사와 정령사.

특히 세리아 같은 경우는 대륙십강과 버금가는 재능으로 약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4서클에 오른 천재 마법사다. 로이니스 또한 한때는 정령을 잃었지만 현재는 꾸준히 수련, 하급 정령 실프를 어느 정도 다룰 수 있는 수준까지 올라와 과거의 실력을 바짝 되찾아 가고 있었다.

지부장 또한 용병계에서 잔뼈가 굵을 대로 굵은 사람이었다.

무기도 없이 돌아다니는 두 여인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마나의 흐름으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마법사와…… 이쪽 숙녀 분께서는 정령사이신가?"

"그렇습니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지부장의 눈이 살짝 휘둥그레졌다. 용병을 하며 잔뼈가 굵었다지만, 마법사와는 달리 정령사를 보는 것은 상당히 힘든 일이다.

"마법사의 기준은 2서클은 C등급, 3서클은 B등급, 4서클은 A등급을 매길 수 있소. 이 뒤 연무장 쪽에서 간단하게 캐스팅과 마법을 선보이면 그걸로 끝이오. 정령사의 기준 또한 하급 정령만 소환한다 해도 C등급, 하급 정령 둘 이상을 소환할 경우 B등급을 매길 수 있소이다. 더 정보가 필요하오?"

"……."

그들은 전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끝냈다.

"시험이라면 지금 당장이라도 할 수 있소이다. 원한다면 지금 당장 시작하겠소."

"저희도 시간이 없는바 내일 아침 떠나야 합니다. 용병패는 언제쯤 완성이 될 수 있겠습니까?"

"흠, B급 용병패나 C급이라면 무리가 없소. 다만 A급부터는 적어도 일주일은 기다려야 용병패가 발급될 수 있을 터이니, 하지만 걱정할 건 없을 것 같소."

지부장이 아무리 보아도 여인들의 힘은 그리 강할 것 같지 않았다. 아무리 잘 쳐줘야 C급 정도?

걱정 말라는 듯 손을 휘휘 내저으며 말하는 지부장을 따라 일행들은 연무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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