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4장 오너라! 헤일론 백작의 개들이여, 지옥에 온 것을 환영한다 □
"물건은?"
"시, 실패했습니다, 후작 각하."
아스만은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필립 후작은 예상과는 다른 대답이 나오자 '어째서?'라는 말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예상과는 다른 변수가…… 크게 작용했습니다. 그곳은 무덤이라고 보기보다는 하나의 커다란 던전이었습니다. 6서클 마법에 해당되는 트랩들이 깔려 있어 던전에 들어가는 데만 해도 애를 먹었고……."
"내 말은 왜 실패를 했냔 말이다!"
필립 후작의 언성이 커지자 아스만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죄, 죄송합니다. 그 던전에는 두 개의 물건이 있던 것으로 예상됐습니다. 단장님과 저는 각각 하나씩 물건을 취하기 위해 병력을 나눴습니다만…… 제가 갔던 방향으로는 이미 누군가가 물건을 취한 뒤였습니다."
"자네는 그가 물건을 취하는 것을 멍하니 구경했단 말인가?"
그의 의심스러운 눈초리에 아스만은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저희는 후작 각하의 명대로 그자가 취한 물건을 다시 가져오려 했으나 그자의 무위가 상당히 강했던지라……."
필립 후작은 아스만의 대답에 기가 막혔다.
전원 익스퍼트로 구성된 기사들이었다. 심혈을 기울이며 수십 년 동안 막대한 자본으로 키운 그들이 실패했다는 말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자, 잠깐! 그자? 그렇다면 적은 한 명이란 말인가?"
"두, 둘이었습니다. 하지만 여자는 마법사였고, 저희가 당한 것은 오로지 젊은 남자였습니다. 게다가 그 젊은 남자는…… 마스터로 추정됩니다."
"놀랍군."
아스만의 말은 좀처럼 믿기 힘든 말이었지만, 필립 후작은 자신의 수하를 신뢰하고 있었다. 익스퍼트에서도 높은 경지에 오른 아스만의 말이 거짓일 리가 없었다.
"그런데 왜 자네들만 돌아왔는가? 단장은 어찌하고?"
"크윽!"
아스만은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그는 이안에게 호되게 당한 이후로 동굴 바깥에서 수하들의 치료에 힘을 쓰다가, 이 일을 빨리 알려야 했기에 트레저 헌터들을 데리고 단장이 향했던 방향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잠시 후 나온 광장에서 그는 코를 찌르는 역한 시체 냄새에 얼굴을 찡그려야 했다. 그 시체 중에서는 자신이 단장이라고 알고 있는 남자도 있었다.
"단장님은 안타깝게도 순직하셨습니다. 모든 부하들과 함께……."
"자네들을 제압했던 그 사내가 했단 말인가, 아니면 트랩들 때문인가?"
"아닙니다. 저희를 제압했던 그 청년은…… 살육을 즐기는 자는 아니었습니다."
"흐음, 그렇겠지. 그랬으니 자네들이 이렇게 살아 돌아온 것일 테고."
필립 후작은 이제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그 무덤에 관해 관심이 있었고, 접촉을 가했다는 말이었다.
'쉽지는 않군. 설마 실패를 할 줄이야! 누구인지 철저히 알아 주지. 내가 이렇게 물러설 줄 알아?'
쨍그랑!
필립 후작은 들고 있던 와인 잔을 손아귀의 악력만으로 깨 버렸다. 와인과 함께 유리 조각이 박힌 손에서는 붉은 피가 흘러 내려와 카펫을 적셨다.
"허, 헉! 후, 후작 각하! 여봐라, 바깥에 누구 없느냐?"
아스만이 호들갑을 떨며 그대로 문을 박차고 나갔다. 그 순간 후작의 눈이 무섭게 빛났다.
'그 누구더라도! 내 일은 방해 못해.'
* * *
느릿한 발걸음.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죄다 지친 표정으로 수천의 사람들이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걸었다. 호위들의 대장을 맡은 리안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자신의 옆에 걷고 있는 하얀 사제복을 걸쳐 입은 노인을 바라보았다.
"영감님, 이거 속도를 좀 더 올려야 되는 거 아닙니까?"
리안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의 머리로 주먹이 떨어졌다.
쿵!
마치 둔기가 떨어진 듯 육중한 음이 들렸고, 리안은 그대로 작게 생긴 혹을 만지며 눈물을 찔끔거렸다.
"아윽! 왜, 왜 때립니까, 영감님!"
"이놈! 내 나이가 얼마나 됐다고 영감님이냐! 그리고 어떤 멍청이가 사제인 나에게 그런 호칭을 붙이는지 말 한번 해 보거라."
"크윽! 그렇다고 때릴 건 아니잖습니까, 영…… 이크! 마리엔 님."
다시 한 번 영감님이라고 부를 뻔한 리안은 마리엔의 찡그린 표정에 얼른 말을 바꿨다.
"하여간 호위 병력의 대장이라는 놈이 그런 중책을 맡고도 이런 칠칠치 못한 행동이라니. 그리고 네놈이 눈이 있다면 한번 봐라. 이들은 벌써 일주일을 넘게 꼬박 걸었는데 무슨 수로 속도를 높인단 말이냐."
이들이 하루에 쉬는 시간은 4시간을 넘지 못했다.
마리엔은 프로시안 영지의 둘밖에 없는 사제이기 때문에 그 쉬는 시간에도 퉁퉁 부은 발을 치료하느라 여념이 없을 정도였다.
영지 안에서만 살아온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며칠씩이나 걷는 강행군은 익숙지 못했다. 특히 이 대열은 노인이나 아이들이 많기 때문에 속도가 도통 나질 않았다.
"그렇지만 남작님이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브론테스 자작님 영지 경계령까지 가지 못하다면 위험하다고요."
"흠, 그렇지! 우리들은 그렇다 쳐도 후발대로 오는 자들은 어떻게 됐을지 심히 걱정되는구나. 게다가 남작님은 또 어떤 상황인지까지 말이야."
"하하! 남작님께서는 건강하실 겁니다. 보란 듯이 그들을 막을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마리엔은 두 손을 마주 잡으며 기도를 했다. 부디 무사하기를 바라며…….
덜컹! 덜컹!
남작을 실은 마차가 전속력으로 달렸다. 다행히도 마구간에는 4마리에 해당되는 말과 조금 작지만 이동용 마차가 하나 있었다.
부관의 생각과는 달리 남작이 잠에서 깨어난 것은 꼬박 하루가 지나서였다. 그간 피로와 노고까지 한순간에 풀어지는 바람에 늦게 일어난 것이었다.
"으음, 여긴?"
남작은 잠에서 깨어 엉덩이를 문질렀다. 워낙 마차가 빨리 달리는 바람에 엉덩이가 다 아플 정도였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것이냐!"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을 보며 남작은 정신이 없었다.
마부석에 앉아 있는 병사 둘과 그런 남작을 뒷좌석에서 쳐다보던 병사는 남작을 진정시켰다.
"부관께서 남작님을 재우셨습니다."
"그, 그게 무슨 말이냐! 부관이 날 재우다니?"
"저 또한 자세한 것은 알지 못합니다. 죄송합니다, 남작님."
"크으!"
남작은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곰곰이 생각했다. 천천히 회상을 해 보자 마지막으로 부관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그 말과 함께 잠이 스르르 들었다. 그리고 깨어나고 보니 자신은 마차 안.
"여봐라, 마차를 돌려라!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죄송합니다, 남작님. 그럴 수 없습니다."
마부들은 서로 입을 모아 그렇게 대답했다. 남작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 명령이 들리지 않는단 말이냐!"
"이미 너무 늦었습니다. 노여움을 거둬 주십시오."
"뭐가 늦었단 말이냐! 지금이라도 상관없다."
"부관께서는 남작님이 프로시안 영지를 되찾으실 거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되돌아갈 수 없습니다."
"이놈들이 정말!"
챙!
남작은 그 자리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돌아가지 않으면 벨 것이다."
싸늘한 그의 말과 함께 살기가 뻗쳐 나왔다. 웬만한 기사들도 버티기 힘든 살기를 병사들은 고삐를 쥔 손에 힘을 세게 쥐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
"베, 베려면 베십시오. 마차는 되돌아갈 수 없습니다."
"빌어먹을!"
남작은 그대로 검을 쥔 손을 놓았다. 검은 마차 바닥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내었다.
그렇게 남작을 실은 마차는 꼬박 하루를 더 달려서야 마침내 마지막 후발대와 접촉할 수 있었다. 남작은 몇몇 소수에게만 자신의 신분을 알리고, 사람들 앞에서는 정작 얼굴을 내비칠 수가 없었다.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한 영지의 지배자인 영주라는 자가 자신의 땅을 내팽개치고 도망치다니. 당장 영지민들에게 돌팔매질을 당해 죽게 된다 하더라도 할 말이 없었다.
남작은 자신이 타고 왔던 마차를 밤에 찾아올 추위에 대비하여 태워 버리고, 말들은 죽여 식량으로 골고루 나누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참을 수가 없었다.
"남작님, 좀 드십시오."
남작은 한 병사가 내민 그릇에 손을 내밀었다. 귀족이 아무리 굶어도 먹지 못할 정도로 이상한 냄새를 풍기는 음식이었다. 남작 또한 먹지 못했다.
체면 때문이 아니라 자신은 이 음식조차 먹을 자격이 없었기 때문이다.
"브론테스 자작의 영지까지는 얼마나 남았는가?"
"이동속도로 보았을 때 적어도 삼 일은 더 걸어야 할 겁니다."
다행히도 후발대는 젊은 층으로 이루어졌기에 곧 있으면 선발대도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었다. 일단 브론테스 자작의 영지 경계령까지만 발을 디딘다면 추격군들의 이목을 피할 수 있었다.
보통 브론테스 자작령까지의 거리가 걸음 속도로 열흘이라고 보았을 때, 추격군들이 말을 타고 달려온다면 이틀 안에 따라잡힐 것이었다.
"자작령까지의 지도를 구할 수 있겠는가?"
"어떤 지도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주변 지형은 물론 모든 것이 세세하게 그려져 있는 것 정도여야 하네."
"노력해 보겠습니다."
"고맙네."
병사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몇몇 병사와 상의를 한 끝에 각각 흩어졌다. 남작은 음식이 들어 있는 그릇을 자기 여동생을 꼬옥 껴안고 있는 남자아이에게 내밀었다.
"가, 감사합니다."
"아니다. 이것뿐이라 오히려 내가 미안하구나."
남자 아이는 여동생과 함께 나눠 먹기 시작했다. 남작은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오히려 미안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힘이 있었다면, 적어도 이렇게 영지민을 피난시키지는 않았을 일이었다.
'자작령까지는 삼 일, 따라잡히는 시간은 이틀. 하루를 벌어야 한다.'
남작을 주먹을 움켜쥐며 다짐했다.
그 하루라는 시간을 자신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벌 것이라고…….
남작을 포함한 후발대는 빠른 속도로 이동했다. 식사도 이동하면서 해결했고, 자는 것도 최대한 줄였다.
불규칙한 식사와 피로감 때문에 병에 걸린 사람도 수없이 많았지만 손쓸 방도가 없었다. 그저 한시라도 빨리 브론테스 자작령에 도착하는 방법뿐이었다.
남작은 이동 중에 추격군들의 발을 묶을 방도를 생각해 내었다. 그 과정에서 병사가 가져다준 지도도 한몫할 수 있었다.
후발대가 피난을 가는 길목에는 브론테스 자작령으로 들어설 때 반드시 지나야 하는 외길이 존재했다. 그 외길에서 버티고 있다면 최소한 어느 정도의 시간은 벌 수 있을 것이었다.
'병사들을 이용해야 하나?'
후발대를 지키는 병사들의 수는 150명 정도.
노인과 여자, 아이가 많은 선발대에 500명 정도의 병사들이 투입되었고, 그 이후로 병사들을 계속해서 나누어 보내었다.
'아니다.'
남작은 고개를 저었다.
병사들을 이용하는 것은 좋은 방법일지 모르나 그들은 후발대를 지켜야 했다. 브론테스 자작령으로 가는 길목에는 가끔이지만 몬스터들이 출몰했다. 무장력이 없는 영지민들로서는 몬스터를 만나면 손쓸 방법이 없었다.
"큰일이군. 곧 있으면 그 외길에 도착할 터인데 그때까지는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남작은 더 이상 생각이 나지 않는지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으면서까지 고뇌에 빠졌다.
두두두두두!
2천명의 추격군들은 말을 다그치며 빠른 속도로 쫓기 시작했다. 헤일론 백작이 거금을 들여 구한 준마들은 주인들의 마음에 호응이라도 하듯 거칠게 나아갔다.
그중 선두에 달리는 500기의 기마병들은 서로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더니 더욱 빠른 속도로 나아갔다.
헤일론 백작의 군대가 4천인 것을 감안할 때 추격군이 2천인 것은 상당히 많은 전력이었다. 그랬다.
다급한 마음에 헤일론 백작은 최소한의 성을 지킬 2천의 병사를 제외하고 준마 2천 필을 준비하여 말을 타 본 자라면 누구든 추격군으로 뽑은 것이다.
하지만 헤일론 백작가의 병사들은 막대한 지원을 해 주는 만큼, 말을 타는 데에도 이미 프로시안 병사들과는 달리 익숙해져 있었다.
일단 500기의 기마병들이 남작과 피난민들을 공격하며 시간을 버는 사이 1,500명의 추격군이 합류하기로 되어 있는 상황.
남작이 예상했던 이틀과는 달리 500기의 기마병들의 속도는 넉넉잡아도 하루하고도 한나절이면 따라잡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렇게 서서히 남작의 생각과는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남작님?"
남작의 정체를 아는 병사 하나가 묻자, 남작은 애써 괜찮은 표정을 보여 주었다.
"아아, 괜찮네."
"도울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씀 주십시오."
팔을 걷어붙이며 입가에 미소를 짓는 병사를 보며 남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한 가지 해 줄 수 있겠나."
"말씀만 하십시오."
"혹시 후발대 중에 사냥꾼이라든가 함정에 능한 장인들이 필요하네. 그 이외에 후발대를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병사들을 제외하고 나 좀 도와줘야겠네."
병사는 눈이 동그래지며 물었다.
"아니, 병사와 장인들은 무얼 하시려고……?"
"시간이 없을 걸세. 준비해 줄 수 있겠는가?"
"그들을 구별하려면 최소 한 시간, 아니 두 시간은 필요할 겁니다."
"최소한 줄여 보게."
"아, 알겠습니다."
병사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남작은 약 한 시간에 걸쳐서 후발대 사람들에게 일일이 물으며 기름을 구했다. 기름 같은 것은 피난에 그다지 필요한 것은 아니고, 괜히 짐만 늘어나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사람을 구하는 것이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또한 가지고 있다고 해도 쉽게 내놓지 않았으니 남작은 돈을 써서라도 기름을 구했다.
'많은 양은 아니군.'
하지만 추격군들의 발을 묶을 만한 양은 되었다.
잠시 후, 남작의 명을 받은 병사는 30명의 병사와 5명의 장인을 데리고 왔다.
병사들의 숫자는 생각보다 적었지만, 장인들의 숫자는 5명이면 충분했다. 남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생각을 꺼내기 시작했다.
"저희는 지금부터 추격군들의 발을 묶을 시간을 벌어야 하오."
"그게 무슨 소리요? 추격군들의 발을 묶는다니? 추격군들이 쫓아온다면 한참 멀리 있을 것이 분명할 텐데, 그것까지 걱정한단 말이오?"
천하태평한 말이었다. 약간 어눌한 감이 있어 보이는 병사의 질문에 다른 병사들도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남작은 남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았으니 말투야 상관은 없었지만, 마치 남 일 대하듯 하는 저 관심 없는 표정은 참으로 봐줄 만한 것이 아니었다.
"추격군들은 말을 타고 달려올 것이오. 말에 능숙한 기마병이 쫓아온다면 이틀 정도면 쫓아올 것이 분명하오."
"숫자는 얼마나 되기에 고작 이 정도의 숫자로 막는다는 말이오?"
추격군이라는 말에 사람들의 오금이 저리기 시작했다. 그들이 보아도 고작 40명도 안 되는 인원으로 추격군들을 막는다니 생각만 해도 몸이 떨렸다.
"하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지친 몸으로 추격군들의 공격까지 받아야 할 것이오. 그중에 피난민들 대부분이 공격을 받을 것이오. 그중에서는 당신들의 가족도 있을 수도 있고, 친구도 있을 수도 있소. 그들이 당하는 것을 바라만 보고 있을 것이오?"
"……."
남작의 말에 일리가 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병사들 중 하나가 은근슬쩍 물었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한단 소리요?"
남작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도를 펼쳤다. 그러면서 한 곳을 손가락으로 찍었다. 지도를 볼 줄 모르는 이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이것이 어쨌다는 거요?"
"이곳은 브론테스 자작의 영지로 통하는 유일한 외길이오. 이곳을 막아 함정을 파 놓는다면 추격군들의 추격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을 것이오."
"이 인원으로 충분하겠소?"
"사냥꾼과 장인이 있으니 최선을 다해 보는 수밖에 없소. 어찌하겠소? 하겠소?"
"……."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그 누구도 선뜻 나서려는 자가 없었으나 병사들 중 하나가 손을 들었다.
"나는 하겠수. 생각해 보니, 영지를 이렇게 내버려 두고 가는 것도 못할 짓이우. 으휴! 그 몹쓸 남작만 아니었다면, 이렇게 목숨 거는 일도 없을 텐데. 내 팔자가 어찌 이런 건지, 쯧!"
"나도 하겠소."
그 병사의 말에 눈치를 보는 이들도 손을 들었다. 장인들 중 두 명은 하지 못한다고 후발대로 다시 돌아갔지만 세 명은 그대로 남아 주었다. 그리고 모든 병사들 또한 남작의 계획에 동참했다.
다만 남작은 한 병사가 했던 말을 곱씹으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 순간에도 자신이 남작이라고 못하는 자신이 참으로 한심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렇다면 자, 시작합시다."
남작은 사냥꾼과 장인들을 한데 모아 일단 회의를 하며 경험상 말을 타고 빠르게 지나가는 이들이 함정에 빠질 만한 것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사냥꾼은 남작이 가지고 있는 기름의 양을 보며 감탄을 내뱉었다.
"오호, 이 정도면 충분히 겁을 줄 수 있을 것이오. 또한 적이 오도 가도 못하는 상태로 만들 수도 있소."
사냥꾼이 말하는 것은 외길에 들어서는 곳에 기름을 뿌리는 것이었다. 일단 기름 냄새가 나지 않게 흙으로 철저하게 막아 두고, 적당히 수풀로 가린 작은 물탱크를 지었다.
그리고 기름을 뿌린 곳 100미터 앞에 구덩이를 파고 대나무로 창을 만들어 꽂았다.
하지만 구덩이와 물탱크를 만드는 작업에서 장인의 숫자의 부족함과 병사들의 손길이 오랜 노고로 극에 달해 있기 때문에 쉬운 일은 아니었다.
6시간 정도가 흘렀을까.
남작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물탱크가 어느 정도 완성이 되고, 구덩이는 중간쯤 만들어졌다. 이정도 속도로 간다면 자신이 생각한 추격군들의 마찰 시간 전에는 완성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작은 먼지 구름. 땅의 작은 지진.
땅을 파며 힘에 겨워 허리를 뒤로 쭉 펴던 병사는 지진이 일어나자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왜 그래?"
동료 병사 하나가 이상한 듯 묻자, 허리를 폈던 병사가 머쓱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었다.
"착각인가? 자꾸 땅이 울려서."
"어라? 나도 그런데?"
병사의 눈으로 확인하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하지만 그들의 대화를 듣던 남작은 무언가 이상한 느낌에 재빨리 외길의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남작의 눈은 어느 때보다도 커져 있었다.
"자, 잠깐! 모두 그만 일을 마치고 돌아오시오! 추격군들이 오고 있소."
병사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뭐, 뭐라고? 아니, 지금 올 리는 없다면서 온단 말이오?"
"이렇게 빨리 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소."
아무리 빠르다 해도 크게 반나절의 오차 범위를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이것은 한나절하고도 반나절이 빠른 시간이었다. 남작은 기마병들이 탄 준마가 그토록 빠르다고는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어쨌든 빨리 숨으시오. 운이 없으면 저들과 격돌할 수도 있을 것 같소. 최소한 숨을 죽이고 있어야 할 것이오. 아직 시간이 있으니 구덩이만 덮으시오."
남작은 작은 활을 꺼내 들며 불을 붙였다. 그의 일은 기름에 불을 붙이고, 순식간에 물탱크로 하여금 불의 화력과 범위를 넓히려는 것이었다.
화살에 붙은 불 때문인지 남작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도 상기된 듯해 보였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병사들은 재빨리 구덩이만 흙으로 덮고서 바위 뒤로 몸을 숨겼다. 외길이라고는 하나 사람이 몸을 숨길 만한 바위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병사들이 숨을 죽이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두두두두두두!
500필의 말발굽 소리는 병사들의 귀에 거대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500기의 기마병들은 바람의 저항력을 조금이라도 줄이겠다는 듯, 몸을 'ㄱ'자로 한 채 움직였다.
그들의 표정은 마치 독안에 든 쥐를 잡는 고양이같이 여유를 가지고 있었다.
'지금이다!'
500기의 기마병들이 순식간에 외길로 들어오자 남작은 화살을 빠른 속도로 날렸다.
휘잉!
화르륵!
불은 매서운 속도로 붙어 외길의 길을 막아 버렸고, 남작은 검을 빼 들고 곧바로 물탱크를 폭파시켰다.
펑!
그다지 많은 양이 들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불이 이곳저곳으로 옮겨 붙으며 불태우기 시작했다.
푸히히힝!
"뭐, 뭐냐!"
기마병들의 놀란 소리가 튀어나왔다.
선두에 달리던 기마대들이 순식간에 전복되며 그대로 함정으로 빨려 들어갔다.
함정으로 빨려 들어간 기마병들이 죽창에 온몸이 찔리며 절명해 버리자 뒤따라오던 기마병들이 곧바로 말을 세웠다.
"이런! 적의 함정이다. 뒤로 후퇴하라!"
"뒤, 뒤에 불이 붙었습니다! 도망갈 수 없습니다."
"비, 빌어먹을! 어디로 도망간단 말이냐!"
남작과 병사들, 장인들이 힘을 합쳐 만든 구덩이는 작은 외길을 일직선으로 가득 메우고 있었다. 구덩이를 뛰어넘으려면 적어도 5미터 이상을 뛰어넘어야 하기 때문에 기마병들은 말을 주춤거렸다. 그렇다고 뒤로 도주할 수도 없는 일.
불이 강력하게 그들을 위협하고 있었다.
"저, 저기 좀 보십시오!"
그때, 눈 좋은 기마병 중 하나가 손가락으로 구덩이가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한참이나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한 떼의 무리가 거대한 먼지 구름을 일으키고 있었다. 흡사 그 모습은 수백 명의 병사들이 달려오는 듯해 보였다.
'성공인가?'
이것은 철저하게 남작의 계략이었다. 제때에 장인들에게 시켜 몇몇 병사가 발을 구르면 밤인 탓에 사람의 모습을 확인하기가 어려웠다.
"도, 도주해야 합니다!"
겁에 질린 기마병 하나가 소리 질렀다.
"어디로 말이냐!"
"불구덩이라고 해도 충분히 도주할 수 있습니다."
"크윽! 모든 병졸들은 들어라! 불구덩이로 뛰어들어라! 애초에 불에 탈 만한 옷은 전부 벗어 던져라!"
기마병들의 얼굴이 초조함이 가득했다. 그들은 동요를 하다가 곧바로 옷을 벗어 던졌다.
"마, 말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버린다. 이 말들은 불에 대한 훈련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억지로라도 끌고 가긴 힘들다."
"옙!"
남작은 그들의 대화에 미소를 지었다. 말이 순식간에 500필이 생겼다. 생각지 못한 수확이었다.
기마병들은 말에서 내리고 곧바로 불구덩이로 뛰어들었다.
범위가 확장되었다곤 해도 500명 전부를 불태울 만한 양은 아니었다. 게다가 병사들이 팔로 얼굴을 가리고 뛰어넘자 불에 타는 이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됐다! 이걸로 충분한 경고가 됐을 터.'
저들이 다시 외길로 오게 된다면 심사숙고를 하게 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참으로 웃기는 일이군. 추격군은 고작 500명밖에 되지 않는 건가?'
적어도 헤일론 백작이라면 추격군이 천 명은 될 거라 예상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들은 기마병이겠군. 추격군들도 선발대와 후발대로 나눈 건가? 그렇군. 그렇다면 예상대로 늦는 이들은 약 한나절 정도 기다려야 도착을 하겠군.'
그들이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들이 기어 나왔다. 그들은 전부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서, 성공이오! 우리의 계책이 성공했소! 이걸로 우리는 안전할 것이오!"
"크하하하하! 정말 다행이 아닐 수 없군. 게다가 말이 500필이나 생겼으니 이걸로 조금은 빨리 움직일 수 있겠어."
"어서 이 기쁜 소식을 알리자고요."
남작 또한 기쁜 듯 웃음을 짓고 나타나더니 말 한 마리를 자신에게 끌고 왔다.
"일단 구덩이를 메우고 말들을 전부 가져가시오. 다만, 나는 잠시 처리해야 할 일이 있을 것 같으니 먼저 가시오."
"처리해야 일? 이 기쁜 순간에 무슨 그런 것까지 신경 쓴단 말이오! 하하하!"
"별일 아니니 먼저 출발하시오. 금방 따라가겠소."
완고한 남작의 뜻에 병사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따라오시오! 당신 덕에 성공할 수 있었소."
"후발대에 도착하거든 말들을 이용하여 빨리 이동하시오. 한시라도 빨리!"
"걱정 마시우. 우리가 알아서 다 할 테니."
남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병사들이 땅을 메우고 기쁜 소식을 한시라도 빨리 알리기 위해 말들을 끌고 갔다.
준마들은 사람을 대할 때는 온순하기 때문에 말 500필을 끌고 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들의 행렬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던 남작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영주로서 차마 영지민들에게 하지 못할 짓을 했군."
힘이 없어서 고향을 버리고 피난을 가야 하는 입장.
평생을 농기구를 가지고 살아온 자들의 자식을 빼앗아 병사로 만들고, 허무하게 죽인 장본인.
뚝뚝―!
남작의 눈에서는 굵은 눈물이 흘렀다. 그 눈물은 땅을 한 방울씩 적시기 시작했다. 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영지민이 힘없는 귀족의 영향 아래 있는 것이 얼마나 가혹한 일인지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영주로서, 귀족으로서, 그리고 프로시안의 가주로서……."
남작은 검을 빼어 들고 그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남작은 눈을 감았다.
"……지킨다."
휘잉∼
머릿결이 바람에 휘날려 얼굴을 강하게 때리는 그의 모습은 사뭇 존귀해 보이기까지 했다.
* * *
기마병 500명은 거의 반나체로 뒤에 오던 추격군들과 합류를 했다. 추격군들의 대장을 맡은 알렌은 황당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봐야 했다.
"이, 이게 무슨 일이냐!"
기마병들의 수장을 맡은 남자가 앞으로 나와 고개를 조아렸다.
"매, 매복군에게 당했습니다."
"이런 멍청한 놈들! 옷은 어찌하고 말들은 또 어찌 됐느냐?"
"화공으로 인해 몸만 내뺄 수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함정 때문에 앞으로 진격하기에는 무리가 있었고……."
알렌이 눈살을 찌푸렸다.
"멍청한 놈! 그렇다면 말을 적들에게 고스란히 넘겨주었단 말이냐?"
"죄, 죄송합니다!"
그가 무릎까지 꿇으며 허리를 굽히자 알렌은 더는 보기 싫다는 듯 검을 빼어 들며 그의 목을 순식간에 베어 버렸다.
만약 머리가 조금이라도 돌아간다면 말에서 내릴 때, 죄다 말을 죽였을 것이었다. 적에게 말을 준다는 것은 미친 짓이라고밖에 볼 수 없었다.
"다시 뒤쫓는다! 놈들이 브론테스 자작령에 들어간다면 너희들의 목을 이놈같이 베어 버릴 것이다! 알겠나!"
"옙!"
"그럼 출발한다!"
500명의 기마병들은 그들이 지나가는 것을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지나가는 추격군들은 반나체의 기마병들을 보며 안타까운 시선을 보낼 뿐, 별다른 행동은 취하지 않았다.
1,500마리나 되는 말들은 사람을 태우고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그 기수의 알렌은 거만한 표정을 짓다가 외길에 들어서는 순간, 그들의 움직임을 막는 한 남자를 보며 멈출 수밖에 없었다.
"네놈은 누구냐! 썩 꺼져라!"
알렌의 옆에 있던 기사가 경고차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남자는 미동도 없었다.
이가 갈린 별로 좋아 보이지도 않는 검을 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자의 나이는 중년 정도로 보였다. 게다가 별 위협이 느껴지는 정도는 아니었다.
알렌은 저자가 궁금했다. 과연 어떤 배포를 지니고 있으면 1,500명이 지나가는 길목을 혼자 막고 있는지.
그때, 알렌이 바라보고 있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네놈들은 이곳을 지나갈 수 없다."
"닥쳐라! 감히 네가 누구이기에 이래라 저래라냐! 죽고 싶지 않으면 당장 비켜라! 너를 상대할 시간 따위는 없다."
"네놈이 기사라면 두말없이 덤벼라."
"좋다! 이놈!"
알렌의 옆에 있던 기사가 호기롭게 검을 들며 말을 천천히 앞으로 끌었다. 알렌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의 실력은 얼마 전에 웨폰 오러 최상급에 오른 이였다. 기사단에서는 적수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실력이 매우 뛰어났다.
"호르카, 저놈의 목을 베어 와라."
"흐흐흐! 단장, 걱정 마시우."
덩치 좋은 호르카는 조소를 입에 머금고 자신의 애검인 바스타드 소드를 천천히 꺼냈다.
왼손으로 고삐를 쥐며, 오른손에는 검을 든 호르카는 그대로 기세 좋게 앞으로 달려 나갔다.
"이놈! 앞길을 막은 것을 후회하게 해 주겠다!"
그때였다.
중년의 남자는 살짝 검을 들어 올리며 그 검의 끝을 호르카 쪽으로 들어 올렸다.
위이이잉!
아주 맑은 검명이 울려 퍼졌다. 푸르스름한 기운이 뭉쳤다고 생각했을 때, 무언가가 갑자기 검에서 쏘아졌다.
"안 돼!"
알렌은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내질렀다.
남자의 검에 생긴 것이 오러였다. 웨폰 오러 최상급인 호르카가 상대할 수준이 아니었다. 하지만 호르카는 광분한 탓인지 그대로 자신의 검을 아래로 내리찍었다.
콰앙!
"크, 크악!"
오러는 검을 잘라 내는 것은 물론, 호르카의 몸을 양단했다.
쿵!
말에서 떨어진 두 개의 커다란 물체는 거대한 소리를 내며 울려 퍼졌다.
순식간에 추격군들의 눈은 더없이 커졌다.
별것 아닌 미친놈이라 생각했던 남자는 상상을 뛰어넘는 무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최소 익스퍼트 중급에 이르지 않으면 보일 수 없는 실력이란 것을 기사들은 잘 알고 있었다.
병사들 가운데 주춤하는 기색이 역력히 드러났다.
남자는 사람을 죽이면서까지 무표정을 고수했다.
마치 보는 이로 하여금 귀신이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섬뜩해 보였다.
찬물을 끼얹은 듯 그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다. 기세 좋게 나가던 호르카가 단 한 수에 죽으리란 상상을 한 자는 그 누구도 없었다. 그만큼 그들은 패닉 상태의 영향이 컸다.
남자는 아무렇지 않게 검을 들어 올리며 당당히 말했다.
"머릿수만 믿지 말고 기사라면 당당히 나와라. 떼거리로 덤벼도 좋다. 그 누구도 나를 죽이기 전까지는……."
남자가 그 말까지 하며 주위를 스윽 둘러보았다. 그의 눈길과 마주친 병사들의 입에서는 침이 삼켜졌다.
꿀꺽!
"……아무도 이곳을 지나갈 수 없다."
살일경천이란 말이 있다.
한 명을 죽이고 천 명을 두렵게 만드는 힘.
남자가 자연스럽게 그런 위엄과 카리스마로 대군을 두고 분위기를 앞도하고 있었다.
"자, 덤벼라! 어느 놈부터 오겠느냐?"
척―!
그의 검이 부드럽게 안쪽으로 원을 그리며 돌아오자 팔에서 나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마나 보유고에서는 폭발적인 마나가 솟구치고 있었다.
* * *
"흐음∼."
남자를 천천히 쳐다본 알렌의 입에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남자는 긴 머리카락이 얼굴을 가리고 있어 제대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어디서 본 듯한 낯설지 않은 외모였다.
휘잉∼
그 순간, 작은 바람 한 줄기가 남자의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그 바람에 얼굴이 살짝 드러났지만, 알렌은 그 얼굴의 주인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서, 설마?"
알렌의 입에서는 어느 때보다도 경악스런 음성이 담겨 있었다. 그 주위에 있는 기사들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알렌을 바라봤다.
"프, 프로시안 영주!"
자신들이 무리하게 추격을 하는 이유가 무엇이던가.
첫 번째 목표는 사라진 프로시안 영주를 찾아 화근을 없애는 것이었다. 그 첫 번째 목표인 남작이 눈앞에 홀로 서 있었으니 알렌이 경악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랬다. 호르카를 일 검에 죽인 중년의 남자는 남작이었다.
기마병 500명을 후퇴시키게 만든 그는 후발대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아니, 돌아가지 못했다.
영지민을 지키지 못한 영주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해 떠나지 않았다.
'이게 최선의 방책일 뿐. 지키지 못했으니 이번엔 반드시 지킨다. 설사 그 대가가 목숨이라 할지라도.'
전장에서 검을 들고 싸우는 게 정말 오랜만이다. 젊었을 때만 해도 곧잘 검 하나를 들고 전장으로 뛰어나가 영지를 부흥시킬 생각뿐이었다.
남작은 검을 든 상태 그대로 굳어 버린 듯, 움직이지 않았다. 다만, 입만 살짝 벌어지며 말을 내뱉었다.
"왜 그러나? 설마, 단 한 명의 상대에게 겁을 먹을 정도로 헤일론 백작 군대는 '겁쟁이'들뿐이었나?"
남작의 발언에 발끈한 기사들이 고삐를 쥐고 앞으로 나왔다. 그렇다 해도 호르카가 당하는 것을 두 눈으로 목격했으니 혼자서 나오는 일은 없었다.
무려, 하얀 갑주를 입은 기사가 셋이었다.
그들이 남작 하나를 상대하기 위해 앞으로 천천히 나섰다.
"닥쳐라, 이놈! 영지도 지키지 못한 놈이 어디서 백작 각하를 욕보이느냐!"
"이랴! 백작 각하를 우롱하는 일은 내 검이 용서하지 않는다!"
기사 셋이 순식간에 달려들었다.
그들의 뒤에 선 알렌은 느긋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전부 웨폰 오러 최상급인 호르카와 비슷한 경지의 기사들이었다.
설사 익스퍼트 급이라 하여도 이들을 상대하기에는 상당히 고전을 면치 못할 것이었다.
하지만 알렌의 생각은 무참히 깨어졌다.
퍽!
남작은 단순히 검만 달랑 들고 다니는 바보가 아니었다. 첫 번째 기사의 검을 간단하게 막아 냄과 동시에 허공에서 왼쪽 발차기가 말 머리를 강하게 때렸다.
푸히히힝!
말의 격찬 비명 소리와 함께 기사는 자세가 무너지며 앞으로 쓰러졌다.
슈악―!
이미 오러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검인지라 갑옷 따위는 무참히 갈라 버렸다.
"이놈!"
그때, 또 다른 기사가 남작의 뒤를 점유하며 검을 내질렀다.
"감히 내 앞에서 뒤를 내보이다니! 후회하게 만들어 주마."
누가 생각해도 이후에 있을 일은 순식간에 등을 찔려 피를 토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남작은 전신을 바닥 깊숙이 엎드리며 검을 피해 냈다.
푸힝!
그 순간을 기다리던 남은 기사가 말의 앞발로 내려찍기 위한 동작을 취하고 있었다.
퍽!
말의 앞발은 애꿎은 땅만 공격했다.
기지를 발휘한 남작이 옆으로 데굴데굴 굴러가 양쪽 팔에 힘을 주며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것을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기사 둘이 바로 덤벼들었다.
왼쪽 기사는 아래를, 오른쪽 기사는 위를 점유해 빠르게 찔러 가는 합동 공격. 그 누구라 하여도 피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취해진 공격이지만 남작은 왼쪽 기사에게 검을 내던지며 마나를 폭발적으로 하체에 운용하여 뛰어올랐다.
챙!
"크윽!"
남작이 던진 검을 막아 낸 기사는 그 어마어마한 충격음에 순간 검을 놓칠 뻔했다. 그리고 그 기사는 잠시 후 남작이 허공에서 내려오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없었다.
퍼억!
하체에 운용했던 마나는 아직도 풀리지 않았다. 그의 발길질 한 방에 안면을 얻어맞은 기사는 그대로 뒤통수가 터지는 참사를 당하고 말에서 떨어졌다.
"이런, 개자식! 두고 보자!"
눈썹을 역팔자로 휘어 버린 기사는 말 머리를 돌려 곧바로 자신의 진영으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다그닥! 다그닥!
말 한 마리가 뛰는 소리가 묘하게 크게 들린다. 남작은 죽어 버린 기사가 쓰던 검을 줍더니 그대로 허공으로 던졌다.
오러가 맺힌 검.
푸욱!
"커허헉!"
기사는 멍청하게 싸움에서 등을 내보인 죄로 등에서부터 찔린 검을 앞에서 볼 수 있는 신기한 경험을 해야 했다. 오러의 강력함 때문인지 등은 손잡이 부분을 제외하고 단단한 갑옷까지 뚫고 모조리 가슴 쪽으로 토해 냈다.
"대, 대단하군."
알렌은 자신도 모르게 떨리는 음성으로 감상을 말했다. 마치 남작의 무위는 서커스의 피에로처럼 실로 놀라울 정도로 유연함과 균형이 있었다.
'누가 감히 저자를 패배한 영주라 칭하는가, 누가 감히…… 병석에서 몇 달을 보낸 사람이라 하는가.'
병석을 훌훌 털고 일어난 것이 얼마 되지 않았다 들었다. 그것도 플래임 플라워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치료를 했으니 또다시 몸져누울 거라 생각하며 비웃었다.
몇 달.
기사의 감각을 잃기에는 충분한 시간이고, 한두 달 정도로 그것을 찾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알렌은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영지민을 위해 천명이 넘는 추격군들 앞에서 혼자 저렇게 당당할 수 있는 자는 얼마나 되겠는가.
"그렇군! 과연 저자를 넘지 않으면 우리는 그 뒤를 넘어갈 수 없겠어."
그 뒤에 있는 길은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눈앞에 있는 남작이라는 거대한 기사가 하나 보일 뿐.
'난 과연 저자를 이길 수 있을까?'
꽤나 지쳐 보였다. 무리도 아니었다.
무려 기사 넷을 상대했다. 소드 마스터가 아닌 이상에야 지치는 것이 당연했다. 체력은 두말할 것도 없고, 마나의 소비도 상당할 것이다. 무엇보다 저자는 기사들과의 싸움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쳐 주는 말 또한 없었다. 그저 검만 하나 달랑 들고 있을 뿐이었다.
알렌은 고개를 슬며시 저었다.
장담할 수 없었다. 같은 익스퍼트고 마나의 양도 지금은 자신이 훨씬 많을 테지만, 기사들과의 싸움에서 승패를 결정짓는 것은 마나의 양 따위가 아니었다.
입을 굳게 다문 남작의 얼굴은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허세를 떨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이것이 그의 진실 된 얼굴이라는 거군.'
알렌은 자신의 뒤로 선 수하들을 바라봤다. 기사들의 숫자만 해도 10명이 넘었다.
"기사들은 들어라! 백작 각하의 이름을 더럽힌 저 프로시안의 간악한 영주를 죽여 내 앞에 가져와라."
"명을 받듭니다, 단장님!"
"이랴!"
알렌을 제외한 모든 기사들이 앞으로 나섰다. 남작이 서 있는 외길이 그렇게 넓지는 않지만 말을 탄 10명 정도가 횡으로 지나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기사들도 방금 전 싸움을 목격했기 때문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오로지 이 싸움에 전력을 다하겠다는 듯 대화로 에너지를 소비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남작은 서 있었다. 기사들 열 명이 두렵지도 않은 것인지 무표정을 계속해서 고수하고 있었다.
"죽여라!"
그들의 싸움에서 첫 번째로 나온 말이었다. 기사들 전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앞장서서 달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움직임은 대지를 울리기에 충분했고, 그들의 목적인 남작은 말에 밟혀 죽을 정도로 위태위태한 모습이었다.
철컥!
남작의 마나가 검에 오러를 씌우며 푸르스름한 기운을 내뱉기 시작한다.
"오너라! 헤일론 백작의 개들이여, 지옥에 온 것을 환영한다."
남작은 열 명이 넘는 기사들을 상대로 그들의 중심에서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기사들의 압도적인 싸움으로 끝을 내릴 거라 예상한 것과는 달리, 또다시 이변을 일으키며 폭풍 같은 기세로 적들을 압도했다.
늘어나는 상처들. 점점 지쳐 가는 체력과 고갈돼 가는 마나의 앞에서도 결코 무릎을 꿇지 않고 기사들을 도륙하다시피 검을 내질렀다.
장장 30분이 넘게 싸우며 뒤엉켜 싸운 흔적에서 유일한 승자는 남작이었다. 모든 기사들이 오러에 잘려 쓰러지며 검을 지탱하고 서 있는 것은 남작뿐이었다.
"하악, 하악……."
입 안에서 거친 단내가 풍긴다 하여도, 가득 메우는 피 때문인지 찝찝한 뒷맛이 침과 함께 목구멍으로 섞여 들어왔다.
기사들의 치명상을 제외한 공격은 몸으로 받아 냈기 때문에 옷 여기저기가 찢어지며, 서 있을 기운조차 없었다.
'마나의 양은 그리 많지 않군. 더 이상 오러를 운용하면 싸우기가 힘들 뿐이로군.'
그는 몸을 지탱하는 데만도 미약한 마나를 이용하고 있었다. 영지민을 위해 지키겠다는 마음이 없다면 이미 쓰러지고도 남았을 체력. 그의 몸을 지탱해 주는 것은 마나뿐만 아니라 정신력 또한 있었다.
"후후후!"
남작은 조심스레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죽을 때가 되어서 그런가? 나도 유치해졌군.'
기사들에게 내뱉은 말이 그러했다. 아무리 공포심을 심어 주기 위해서였다지만, 평소였다면 입에 담지도 않을 경악스런 말이었다.
"후욱! 후욱!"
남작은 벽에 몸을 대며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눈은 생기를 잃지 않고 오로지 추격군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무리로군. 후후! 당신의 얼굴이 눈에 다 선할 정도야.'
죽을 때가 다 되어서인지 과거의 일이 하나씩 생각났다.
그것은 마치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아름다운 아내를 만났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을 손에 넣었다.
'세리아, 세리아…… 제발 살아만 있어 다오. 이 아비의 마지막 소원일지니.'
알렌은 추격군을 이끌고 천천히 외길로 들어왔다. 그의 눈앞에는 간신히 몸을 지탱하고 있는 남작의 모습이 보였다.
알렌이 남작을 향해 측은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적이었지만 정말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귀족이고 기사였다.
"그대가 적이 아니었다면 정말 훌륭한 귀족이었을 것이오. 잘 가시오, 남작."
"후후! 벌써 나를 죽은 사람 취급한단 말이오?"
"이미 다 끝났소, 남작. 마지막 유언 정도는 들어 주겠소."
"후후후! 영지전에 패한 귀족은 계급을 잃소이다. 남작이라 그리 칭하지 않아도 된단 말이오."
"그렇다면 어찌하여 길을 막는단 말이오? 하나뿐인 목숨, 잘 간수해도 모자랄 판에."
남작은 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리고 한참 후에 살짝 입을 떼어 냈다.
"내가 하지 않으면 누가 한단 말이오."
"흠……."
알렌은 천천히 손을 위로 올렸다. 그의 지시에 뒤에 있던 병사들이 석궁을 들고 천천히 걸어 나왔다.
"내가 죽는다면, 나의 시체를 프로시안 영지 어느 곳이든 좋으니 묻어만 주시오."
"할 말은 그것뿐이오? 어차피 프로시안 영지는 백작 각하의 땅이 되었소. 그래도 좋단 말이오?"
"나의 딸, 나의 병사, 나의 기사. 그들이 언젠가…… 영지를 되찾아 줄 것이라 믿고 있으니 걱정 마시오."
"하하하하! 정말 재미있군."
"후후후!"
그 둘은 계속해서 웃었다. 마지막을 가는 이를 향해 배웅을 하는 것인가.
그 순간, 남작의 눈에서는 작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때에 맞춰 알렌의 표정은 살짝 굳어져 올려져 있던 손을 아래로 내렸다.
투투투퉁!
남작은 눈을 감지 않았다. 무릎을 굽히지 않았다. 목에 핏대를 세우며, 적을 향해 신음 소리를 흘리지 않기 위해 입술을 물었다.
슈슈슉―!
다섯 발의 쿼렐이 남작의 몸에 박혔다. 신기하게도 대부분의 쿼렐은 가까운 곳에서 쏘아 낸 것임에도 불구하고 비껴갔다.
"발사!"
슈슈슉―!
다시 한 번 발사된 쿼렐이 이번에도 정확히 다섯 발만 남작에게 꽂혔다.
남작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검을 땅에 박았다.
'나의 눈물이 영지민을 지킬 것이다. 내가 죽어도 눈물을 마시며 목이 마르지 않을 것이다. 난 눈물로…… 취할 것이다.'
퍼퍼퍼퍼퍽!
남작의 몸이 살짝 기울어졌다. 하지만 넘어지지 않았다. 그는 눈을 부릅뜬 채로 계속해서 서 있었다.
그 모습에 한 병사가 말했다.
"독한 귀족이로군. 쿼렐이 열 발이나 박혔는데도 죽지 않는 걸 보면……."
그때, 알렌은 손을 들며 다시 추격군들을 이동시켰다.
알렌은 병사의 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죽지 않았다고?"
"예? 그럼?"
병사들이 놀란 눈으로 남작을 다시 쳐다봤다. 남작은 움직이지 않았다. 계속해서 한 모습으로 서 있을 뿐.
"그는 죽었다."
"예?"
"서서 죽었을 뿐이다."
알렌은 남작의 앞을 지나며 검을 손에 쥐었다.
죽었지만, 언제 어디서든 갑자기 덤벼들 것 같은 살기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것도 서 있는 시체에서 말이다.
추격군들의 끈질긴 추격에도 불구하고 영지민들은 전부 브론테스 자작령으로 무사히 들어갈 수 있었다. 자작령 쪽으로 호위 병사들과 기사들이 미리 나와 그들을 맞이했다.
그렇게 프로시안의 마지막은 사라졌고, 역사서와 지도에서 모습을 바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