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인하르트-23화 (23/60)

■ 제23장 프로시안 남작가의 풍운 □

실버 소드 기사단의 부단장인 아스만.

그는 거의 전멸하다시피 박살 나 버린 수하들을 보며 패닉 상태에 빠져 있었다. 죽은 사람은 없었지만 커다란 멍 하나씩 눈에 만들어 둔 자들이 수두룩했다. 그것은 오히려 다행이었다. 반항이 심했던 몇몇 기사는 그대로 맞고 널브러져 어딘가 한 군데씩 부러졌다.

트레저 헌터들 또한 이 놀랄 일에 서로를 껴안고 부들부들 떨었다.

아스만은 청년이 했던 말을 생각하며 오한으로 얼굴이 창백해졌다.

'자∼! 계속하시겠어요?'

그대로 그만 두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모름지기 지금보다는 훨씬 좋은 상황일 거라 장담할 수 있다. 상대의 젊은 외모와 강한 실력에 질투심과 열등감이 유발된 기사들은 그대로 검으로 상대를 공격했다.

그것은 아스만이 말리기도 전에 일어난 눈 깜짝할 만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봤을 때는 수하들 대부분이 땅바닥에 누워 기절해 있었다.

'죽진 않았을 거예요. 당신들이 왜 이곳에 있는지 이유는 묻고 싶지만 사정이 있을 테니까. 자, 그럼 전 가 봅니다. 부디 다음에는 부딪치지 않기를 바라며.'

마지막으로 하고 갔던 말은 경고라고밖에 볼 수 없었다.

아스만은 그저 고개만 끄덕이며 멍하니 청년과 여인이 철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볼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아스만은 일단 되는대로 준비한 포션들을 수하들의 입에 부었다. 부러진 뼈가 붙기는 할 테지만, 며칠 정도는 부러졌던 곳을 사용하기는 힘들 것이었다.

'대체 그는 누구기에…….'

그가 누구인지는 모르나 그의 경지는 어느 정도 유추가 된다. 25명이나 되는 익스퍼트 급 기사들을 떡 주무르듯 박살 낸 괴한.

죽이는 것도 아닌 간단하게 제압으로 끝낸 인물.

'마스터!'

그것이 아니면 과연 무엇이라 해야 할까.

아스만은 복잡한 심정이 들었다.

'슈레이더 왕국의 마스터란 말인가.'

지금껏 슈레이더 왕국은 마스터를 배출하지 못했다.

워낙 변방에 위치한 나라이다 보니 국민 수도 얼마 되지 않았고, 펠타온 제국의 기세로 허리도 펴지 못하는 약소국에 불과했다.

하지만!

동굴 입구에서 아다만티움 문을 뚫기 위해 정보 수집을 나갔던 사이 아스만은 이상한 소문을 듣게 되었다. 정보 조직이 내어 놓은 것이지만 도통 믿을 만하지가 않았다.

헤일론 백작이 마스터의 경지에 들어섰다!

그리고…….

당금 또 다른 마스터가 나타났다.

너무나도 젊은 외모와 강한 무위.

그렇다면 소문이라도 한번 나야 정상이건만,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슈레이더 왕국의 풍운이란 것인가.'

갑자기 나타난 마스터에 경지에 오른 이들 둘.

아스만은 이 일이 대륙 전체에 퍼질 풍운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다만, 조용히 왕국에 퍼질 것이라고만 생각할 뿐.

이안과 세리아의 예상대로 광장의 뒷문은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수백 년이 흐르면서 목재로 이루어진 계단이 부식되어 절벽이나 마찬가지로 올라갈 수가 없었다.

족히 수백 미터는 될 만한 절벽의 높이에 세리아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이런 상태로는 도저히 올라갈 수도 없겠는걸. 갈림길에서 다시 돌아서 다른 방향으로 가 보는 것이 어떨까?"

"아뇨, 상황은 비슷할 거예요. 그래도 이곳이 우리가 떨어졌던 곳보다는 낮아요."

이안의 말에 세리아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럼 뭐해? 둘 다 올라갈 수 없다면 높낮이는 아무 상관없다고."

"후훗.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이안의 웃음소리에 세리아의 심장이 가라앉았다. 그리고 얼굴은 홍당무처럼 붉어졌다.

'아……!'

세리아는 자신의 얼굴을 들키지 않기 위해 고개를 옆으로 홱 돌렸다.

"그, 그래."

더듬거리는 세리아의 말에 이안이 재미있다는 듯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아가씨."

"으응?"

"잘 잡아요."

"뭐? 꺄악!"

이안은 그대로 세리아를 안아 올렸다. 계단이 부서졌으니 도약으로 절벽을 올라갈 생각이었다.

"뭐, 뭐 하는 거야?"

품에 안기게 되자 고개를 돌릴 곳이 없는 세리아는 얼굴이 붉어진 것이 들통 나자 창피했다. 이안은 그런 그녀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라? 어디 열 있어요? 없는 것 같은데."

이안의 손바닥이 세리아의 이마에 대었다.

"여, 열? 아, 그, 그래. 열이 좀 있는 것 같아. 며칠 굶었더니……."

세리아는 눈을 꼬옥 감고 조용히 말했다. 마치 표정이나 안색만으로 보면 정말 환자 같았다.

'어쩜 좋아……. 바라보기만 해도 심장이 자꾸 터질 것 같아.'

이안은 세리아의 말을 그대로 믿고 정말 걱정스러운 얼굴을 지었다.

"일단 이곳을 벗어나도록 하죠."

"어떻게?"

"끙차!"

이안은 경공술로 몸을 가볍게 만들고 절벽의 곳곳을 발로 딛기 시작했다. 막대한 내공을 필요로 하지만 화경에 오른 내공으로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타타탓―!

한 번의 도약으로 거의 수십 미터를 뛰어 올라간 이안은 몇 번의 도약만으로 절벽을 올라올 수 있었다.

"다 올라왔어요. 이제 눈 떠도 돼요."

눈을 뜬 세리아가 주위를 둘러보자 정말인지 수많은 나무들이 눈에 띄었다.

"일단 디펜스 캐슬로 가는 게 좋겠어요."

토벌대가 어떻게 되었는지도 궁금하던 참이다.

"그런데…… 안 내려요?"

아직도 이안의 품에 안겨 있는 세리아.

"꺄악!"

세리아는 이안의 말에 황급히 몸에서 떨어지기 위해서 발버둥을 쳤다.

이안은 발버둥 치는 세리아를 얌전히 내려놓았다.

"가죠."

벌게진 얼굴로 세리아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 * *

본인의 이름은 라인하르트 드 샤이헬.

유라시아 대륙에 라인하르트 제국을 세운 초대 황제다. 혹, 나의 후예가 이곳에 왔을 경우를 대비하여 이렇게 내 이름을 남긴다.

그대가 보고 있는 이 책의 이름은 차원의 검술.

막상 이름만 보자면 차원을 이용한 검술 같아 보이지만, 맞는 얘기다. 하지만 차원은 인간에게 너무나 방대한 힘이기에 그 힘을 압축하여 일부분을 끌어다 쓰는 것에 불과하다.

마나보유고에 위치한 마나를 촉매로 삼아 검술을 펼치는데, 이 검술을 익히기 위해서는 자신이 이곳에 오는 동안 나온 갈림길 왼쪽으로 들어서야만 얻을 수 있는 내 친우의 피가 도움을 줄 것이다.

알케미온. 그 피는 내 친우 알케미온의 것이다.

멋진 금발과 깊게 눌러쓴 후드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캐스팅을 끝마치면 어김없이 수천 명의 적병들을 죽여 대륙 최고의 마법사로 인정받던 그.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는 7서클에 올랐다는 주장을 할 정도로 매우 높은 경지였다.

하지만 그는 드래곤이었다. 잠시 유희에 나왔던 것에 불과하지만 만약 그가 없었다면 완성되지 않은 차원의 검술로 과연 라인하르트라는 제국을 세울 수 있었을까?

그는 마법사였지만 검술에도 조예가 깊었다. 아마도 수천 년을 살아온 고룡이었기에 가능한 소리겠지.

그러면서 나는 차원의 검술을 완성할 수 있었다.

이 완성된 검술을 내 후예에게 넘긴다. 그대는 이 검술로 부디 조국에게 영광을 줄 수 있기를.

이것으로 서두의 말은 끝나 있었다.

"……한발 늦었군."

왼쪽 갈림길로 이동하여 도착한 광장에는 알케미온의 피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놈들이 가져갔겠지."

쉐도우 로드는 품 안에서 작은 구슬을 꺼내었다. 일회용 마법 아티팩트지만, 대지가 기억하고 있는 과거를 회상하여 보여 주는 투영구였다.

위잉!

쉐도우 로드의 마나를 머금자 구슬이 보랏빛으로 번쩍거리기 시작하더니 작은 운용 소리와 함께 영상이 밝혀졌다.

대지가 기억하는 건 최대 하루 전까지나 가능한 일이다.

수정 구슬을 바라보는 쉐도우 로드의 얼굴이 변했다.

"……설마 놈들이 아니었던가?"

필립 후작이 이 일에 관여하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하지만 익히 알고 있던 실버 소드 기사단이 아닌 제3자가 먼저 이 광장에 침입해 있었다.

"음!"

안타깝지만 수정 구슬은 많은 것을 기억하지 못했다.

투영해 주는 영상은 완벽하지 않아 대략적인 실루엣만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 실루엣 속에서도 뚜렷하게 보이는 하나의 인상이 있었다.

"누구지?"

굉장히 아름다워 보이는 여인이었다.

정보와 암살에 왕이라고 불리는 쉐도우 로드라 하여도 모든 것을 기억할 수는 없다.

투영구를 바라보던 쉐도우 로드가 갑자기 남자의 무위를 보며 순수하게 감탄을 내뱉었다.

"놀랍군! 설마 유라시아 대륙에 내가 모르는 마스터가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해 봤는데."

최소 피스트 마스터 하급.

주먹에 서린 것이 오러가 아니란 것쯤은 알고 있었다.

마스터 물의 전유물인 오러 블레이드와 마찬가지로 피스트 마스터들에게 나타나는 것.

오러 블래스터. 즉, 권강이었다.

"재밌겠어. 설마 드래곤의 피를 마스터가 가져갔을 줄이야. 암! 이렇게 쉽게 나에게 넘어오면 재미없지."

쉐도우 로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누군지 모르지만 지옥 끝까지라도 찾아가 주지. 그 누구더라도!'

같은 시각.

프로시안 영지에서는 작은 은밀한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며칠 밤낮을 영지민 이동에 박차를 가하던 병사들이었기에 지친 정신력과 체력 때문에 느슨해진 경계를 틈타 밤에 몇몇 그림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슈우웅!

약 10명으로 구성된 자들이 성벽에 갈고리를 던져 조심스럽게 올라왔다.

"응?"

성벽 위에 창대를 붙잡고 졸고 있던 병사들은 이상한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성벽 아래를 바라본 병사들의 눈이 순식간에 커졌다.

슉!

"앗! 기습…… 컥!"

그림자들은 미리 준비해 놓은 단검을 던져 병사의 목을 꿰뚫었다. 그들의 귀신같은 투척술에 그들을 발견한 병사들 모두가 똑같은 참사를 당했다.

높은 성벽을 올라온 그림자 열 명은 서로의 안위를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섯 명은 경비들을 제압한다. 나머지 넷은 나를 따라라. 빠르게 성문을 제압한다."

"옛!"

그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빠르게 지시를 내리자 그림자들은 각자 임무를 위해 흩어졌다.

프로시안 영지의 병사들은 이제 걸음마 훈련도 제대로 떼지 못한 상태라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그림자들의 무위가 귀신같았다.

"침입자다!"

"……!"

슈악!

"컥!"

단도가 빠르게 목을 훑고 지나가자 긴 혈선이 그어지며 병사가 그대로 무너졌다. 성문을 지키고 있던 열 명의 병사들은 자신을 죽인 자들의 얼굴조차 제대로 확인하지 못하고 널브러졌다.

그림자 중 하나가 레버를 당기자 성문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그때에 맞춰 경비들을 끝낸 다른 다섯 명이 속속 모여들었다.

"본 자들은?"

"없습니다!"

"따라온 자들은?"

"없습니다!"

"좋다. 신호탄을 쏘아 올려라!"

"놈들의 시체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며칠이고 확인해 보았지만 이미 물고기 밥이 된 것 같습니다."

도저히 살아나올 수 없을 만큼 깊은 절벽 깊은 곳으로 떨어졌다. 게다가 물살조차 빨라 마나를 소비한 마법사와 깊은 검상을 입은 남자가 빠져나올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직까지 시체를 확인하지 못했다면 십중팔구는 물고기 밥이 되었을 일이었다.

헤일론 백작은 병사의 보고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자신의 아래 놓인 명검.

그것은 아직도 자신을 주인으로 인정하고 있지 않았다.

바로 그때였다.

우우우웅!

검이 짧게 울기 시작했다. 그 울음은 짧지만 여러 번 지속해서 울렸다. 헤일론 백작의 머릿속은 갑자기 얽히기 시작했다.

"……설마 놈들이 살아 있단 말인가?"

설사 살아 있다고 하더라도 그곳에서 떨어진다면 족히 몇 년을 요양하거나 평생을 반신불수로 살아갈 만한 상처를 입었을 것이었다.

"백작 각하."

바로 그 순간, 부관이 들어와 작게 백작을 불렀다.

매일같이 부관이 오는 것을 백 미터 밖에서 듣고 기다리던 백작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만큼 검에 대한 욕심 때문에 감각이 무뎌진 것이었다.

백작은 검에서 눈을 떼고 부관을 쳐다봤다.

"무슨 일인가?"

"신호탄이 쏘아 올라졌습니다."

백작이 짧게 신음성을 토해 냈다.

"흠! 경비가 정말이지 허술한 모양이군. 이거, 생각보다 쉽게 성문을 뚫은 것 아닌가?"

"그만큼 지쳤다는 뜻이겠지요."

"그렇지. 우리가 병사들로 건드린 9만의 영지민 따위는 애초에 관심조차 없었다는 것을 도발로 받아들이다니."

프로시안 영지를 점령하고 나면 9만의 영지민은 순전히 세금을 걷어야 할 자신의 영지민이 될 것이었다. 아무리 백작이 군대를 일으켜 영지전을 하고 있지만, 9만의 영지민을 전부 다 죽일 정도로 살인마는 아니었다.

일종의 그들을 작게 건드린 것은 도발에 불과했다.

"지금 당장 출병 준비를 하라. 오늘 밤, 프로시안 영지의 주인은 내가 될 것이다."

"명을 받듭니다, 백작 각하!"

* * *

레나는 뛰고 또 뛰었다.

그동안 피부 미용으로 사용하던 마나 호흡법이 그 순간 도움이 되는지 무거운 발걸음에 힘을 실어 주었다. 레나조차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하지만 자신에게 있어서만큼은 그보다 느리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하늘에 올라온 작은 폭죽을 따라 바라본 성문 바깥으로는 수천의 병사들이 모래 폭풍을 일으키며 달려오고 있었음을 빨리 알려야만 했다.

"헉! 헉! 헉!"

그 순간, 레나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살고 싶은 마음에, 빨리 알리고 싶은 마음에 흘린 것이다.

'아!'

자신의 얘기를 끝까지 들어 주던 이안 오라버니에게 모든 것을 털어 내고 싶었다. 그제야 토벌군에 따라가지 않은 것이 조금씩 후회가 되었다.

'하지만 이미 토벌군은…….'

소식은 들을 수 없지만 토벌군에 있던 용병들이 프로시안 영지로 가끔씩 들렀다. 그들은 탈영을 한 자들이라 하였지만, 목숨이 먼저라는 생각에 결정을 내린 일이었다.

그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이미 토벌군은 해체.

모든 이들이 도주하거나 전멸했다는 말이었다.

"남작……님!"

레나의 뜀뛰기가 얼마나 빨랐는지 순식간에 남작의 내성으로 들어갔다.

"무슨 일이냐?"

하지만 남작은 보이지 않고, 부관만이 레나의 말을 들었다.

"헉! 헉! 헉!"

레나는 가슴에 손을 대고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외, 외성 바깥에…… 헉! 헉! 벼, 병사들이 오고 있어요."

그 순간, 부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확실하느냐?"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요."

"알았다! 나는 이 일을 빨리 남작님에게 알릴 테니 너도 빨리 도주할 준비를 하거라."

"예."

레나가 고개를 숙이고 가려 하자, 그 순간 부관이 레나의 어깨를 붙잡았다.

"병사들이 오고 있다는 것은 함구하도록 해라."

부관의 얼굴을 바라본 레나는 겁에 질려 더듬거렸다.

"네, 넷!"

레나는 대답과 함께 뒤로 사라졌다. 부관은 레나의 어깨를 잡은 손을 연신 쳐다보았다.

한순간이지만 무서울 정도로 전신을 휘감은 마나가 꿈틀거리고 있었던 것이 느껴졌다.

'넌 대체…….'

꾸준한 삼재심법의 운용으로 이미 웨폰 오러 상급에 이른 레나였다.

아주 훗날이지만, 이안의 작은 호기심과 걱정이 레나를 검후로 만들어 주는 계기가 되었다.

헤일론 백작의 군대가 프로시안 영지의 외성까지 도달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시간 내에 부관은 빠른 발걸음으로 남작을 찾았다.

"남작님."

남작의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초췌해 보였다.

"자네가 외성 바깥에서 공격해 들어오는 백작의 군대를 보고하러 온 것이라면 그럴 필요 없겠어. 이미 진동으로 충분히 느끼고 있으니까."

두두두!

남작이 골머리를 쓰며 작성한 보고서들이 작게 떨렸다. 물을 마시던 찻잔이 테이블 위에서 흔들리며 땅으로 떨어졌다.

푹신한 카펫 덕에 떨어진 찻잔은 깨지지 않고 그 주위를 빙그르 돌았다.

"이동 상황은 어떠한가?"

"브론테스 자작의 영지까지는 아직 선발대도 5일 이상이나 남았습니다. 후발대 또한 무리하게 진행하고 있긴 하지만 적들의 추격이 벌어진다면 결코 살아남기 힘들 겁니다."

"그렇군. 놈들이 노리는 건 나겠지?"

"……."

부관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남작은 침울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가 헤일론 백작이라면 나를 죽이고 브론테스 자작 영지로 이동하는 영지민들을 어떻게 하겠는가?"

"제 개인적인 소견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브론테스 자작은 국왕파 가문입니다. 영지민이 늘어나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아마도…… 추격군을 보내는 것이 당연할 겁니다."

개인적인 소견이지만 그 누구라도 그런 선택을 할 것이다. 헤일론 백작은 필립 후작의 충신인 반국왕파였으니 말이다.

남작은 잠시 뒤 입을 열었다.

"아직까지 이동하지 못한 자들도 있나?"

"20대에서 40대의 젊은 남성층이 아직 이동을 하지 못했습니다."

"숫자는?"

"500명 정도입니다."

"그들을 빠른 시간에 소집하게."

"명을 받듭니다, 로드."

"대체 무엇을 하는 거요? 지금 바삐 도망쳐도 모자랄 판에 길을 막는다니!"

아까부터 지면이 흔들리는 것이 심상치 않았다. 1만 명이나 살고 있는 외성에 단 500명만이 남게 되니 겁에 질리는 것은 당연한 일.

맨 마지막 후발대로 이동하기로 되어 있는 그들은 아직까지 자신들이 이동을 하지 못하자 강력하게 항의를 했다.

처처처척!

그 순간, 망토를 어깨에 걸쳐 멘 남작이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앞으로 나오자 그를 호위하고 있던 병사들이 창을 500여 명의 남자들에게 들이밀었다.

"남작님, 도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도망가야 할 저희들에게 도리어 창을 들이밀다니요!"

보통이라면 입에 담기도 어려운 말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극에 처하자 순간 마음에 담고 있는 말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그의 의견에 수긍하는 다른 자들 또한 손을 들며 그대로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할 말은 하고 삽시다. 내 자식들이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단 말입니다. 지금이라도 빨리 이동하지 못한다면 개죽음만 당할 뿐입니다!"

"음……."

남작은 500여 명의 사람들을 순서대로 훑어보기 시작했다.

외성에는 약 1,000명 정도의 군사가 있다. 2천 명이었던 군사는 1,000여 명 정도를 영지민이 이동하는 데에 호위로 붙여 둔 까닭이다.

대체로 500명은 부상자를 전부 제외하고 남은 자들이다.

"말 한번 잘했군."

"예?"

갑자기 군소리를 하며 떠들던 이들의 입이 쏙 다물어졌다.

남작은 흡족한 듯한 표정을 짓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잘 들어라. 자네들의 가족들은 브론테스 자작의 영지로 이동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들의 목숨을 위협할 추격군들의 창칼에 두려움에 떨고 있을 테지."

그때였다. 서른 살로 보이는 남자 하나가 손을 들며 말한다.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아니, 오히려 저희들은 곧 쳐들어올 놈들의……."

"곧 쳐들어올 놈들? 아니다. 지금 놈들은 외성으로 침입하여 당장 이곳으로 달려오고 있을 것이다. 귀를 기울여 봐라. 놈들의 함성 소리가 들릴 테니."

거리가 제법 멀리 떨어져 있어 함성 소리가 들리는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남작의 그 발언으로 500명의 남성들은 죄다 겁에 질린 듯 어깨를 움츠렸다.

"나, 남작님, 그, 그렇다면 지, 지금이라도 빨리……!"

"흠흠!"

남작은 잠시 목청을 가다듬고선 시선을 멀리 던졌다. 그러더니 잠시 후 다시 운을 떼었다.

"자네들을 제외하면 9,500여 명의 영지민이 피난을 하는 동안, 우리 프로시안 영지의 군사들은 헤일론 백작 군대를 막기로 결정했다."

웅성웅성.

오백 명의 오합지졸로 4천이 넘는 군대를 막는다니 터무니없어 보이는 소리였다. 게다가 헤일론 백작가의 군대는 벌써 외성으로 침투했다는 말도 나오지 않았던가?

여기 모인 젊은 군중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남작은 다시 한 번 훑어보더니 입을 열었다.

"자신은 없다. 하지만 우리마저 도망간다면 반드시 추격군들에게 잡힐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또한 앞서 간 영지민 또한 추격군들에게 사로잡혀 개만도 못한 생을 살 것 또한 장담할 수 있다."

영지전을 겪어 본 적은 없지만, 영지전에서 패한 영주와 영지민들이 어떻게 되는지 잘 알고 있는 그들로서는 남작의 연설이 가슴을 쓰라리게 만들었다.

"누군가는 그들을 막아야겠지. 우선 처음엔 내가 나설 것이다. 나 또한 이곳에서 살았고, 지켜야 할 가족 같은 영지민들이 있다. 그래서 묻겠다. 나와 뜻을 같이하여 지원할 자는 손을 들어라."

오백 명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기에 뜻있는 젊은 사람들의 지원을 원하는 남작이었다. 남작의 눈은 정말 이곳에서 뼈를 묻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또한 남작의 말을 들은 젊은이들의 눈에서 갈등이 뒤섞였다.

"그리고 하나 더! 내성의 안에는 대피소가 있다. 만약 천 명의 군대가 맞서다 죽는다 하더라도 대피소에 있다면 족히 500명이 한 달은 넉넉히 지낼 수 있다."

군대를 막다가 개죽음만 당하지 않는다면 대피소에서 숨어 있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기억해라! 자네들의 누나가, 부모가, 동생이 저 개보다 못한 헤일론 백작 군대의 노리개가 될 수도 있고, 짐승보다 못한 노예가 될 수도 있다."

그 말을 끝으로 500여 명의 젊은 군중을 포위하던 병사들의 창날이 하늘을 가리켰다. 이제 위협이 사라졌다는 뜻이다.

"갈 사람은 가도 좋다. 누구든 목숨은 소중한 것이다. 부모가 병에 걸렸다면 여기서 죽는 것보단 살아서 보필하는 것이 더욱 뜻있는 일이다. 남의 눈치 볼 일도 없다."

남작의 예상대로 잠시간의 웅성거림이 끝나고 몇 명의 남자들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도망가기 시작했다. 남은 사람들은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이었다.

꽤나 선한 인상을 한 청년이 손을 조용히 들었다.

"뭔가?"

"지원하겠습니다."

"이유는?"

남작보다는 부관이 그에게 먼저 물었다. 청년은 잠시 우물쭈물 대답을 못하다가 조그마한 소리로 입을 열었다.

"펴, 평생을 겁쟁이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몸이 약해 제대로 일도 못해 봤습니다. 하지만 이곳이 좋습니다. 저를 낳아 준 어머님이 계시고, 제가 보살펴야 할 동생 또한 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단 한 번, 한 번만이라도 떳떳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은 것뿐. 그것뿐입니다."

과연 청년의 말대로 그의 전신은 초췌해 보였다. 마치 며칠을 굶은 듯 빼빼 마른 것 또한 한몫했다.

하지만 그런 청년이 지원을 했다는 사실에 남은 남자들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환영한다! 내 뒤에 있는 병사에게 무기와 갑옷을 지원받을 수 있다."

남작의 말에 그 청년은 병사에게 창과 조잡하기 이를 데 없는 레더 아머를 지급받았다. 하지만 창을 쥔 청년은 자신의 선택에 후회가 없어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시간이 없다! 더 이상 시간을 끈다면 백작 군대의 눈먼 화살에 맞을지도 모른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남는 것을 강요하지는 않는다. 겁쟁이는 떠나도 좋다."

괜한 겁쟁이는 오히려 군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일만 할 뿐이었다. 남작도 그러한 점을 잘 알고 있었기에 미련 없이 떠날 것을 강요했다.

남작의 언성에 이백 명 정도가 그대로 떠났다. 그러자 오백 명 중 이백오십 명이 그 자리를 고수하고 있었다.

"자네들은 뭔가? 선택이 필요한 시간을 더 달라는 뜻인가, 아니면 남겠다는 뜻인가?"

그의 질문에 다부진 체격을 가진 남자가 말했다.

"남작님께서 이곳에서 뼈를 묻겠다고 들었습니다. 저 또한 남겠습니다. 흐흐흐! 평생을 도망자라는 소릴 들으며 자책하고 싶진 않습니다."

그의 말을 시작으로 총 이백 명 정도가 뜻을 함께했다.

"자네들이 자랑스럽다! 자네들은 산다면 영웅이 될 것이고, 죽는다 하더라도 이 땅의 영원한 입담에 오를 전설이 될 것이 분명하다."

그 말을 끝으로 남작이 연설을 끝냈다.

그리고 그 남작의 뒤로 천이백 명이나 되는 군대가 질서정연하게 움직였다.

오직 그들의 목표는 하나뿐.

백작의 군대를 저지하는 것이었다.

성으로 들어오는 문은 매우 좁았다. 4천이 넘는 군대가 들어오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데다, 남작의 대응이 워낙 빨랐던 탓인지 성문을 주위로 군사를 포진시켜 막는 데에 성공할 수 있었다.

"부관, 이 상태로 간다면 얼마나 시간을 끌 수 있겠는가?"

"하루, 아무리 끌어도 이틀을 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보다 남작님, 조금 쉬시지요. 이곳은 제가 맡겠습니다."

"무슨 소리인가, 부관? 자네가 이곳을 막겠다니?"

남작은 아직도 부관이 떠나지 않은 이유가 의심스러웠다.

부관은 평생을 사무직으로 살아온 사람이다. 그에게 있어 이런 전쟁터는 어울리지 않았다. 이제 남은 것은 시간을 끄는 일뿐. 진작 피난을 갔어야 할 부관이 이곳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자네까지 이곳에서 죽을 필요는 없어. 지금이라도 좋으니 빨리 피난하도록 하게."

남작의 말을 들으며 부관이 자신의 왼쪽 약지에 낀 반지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은은하게 빛나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그, 그게 뭔가?"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남작님. 슬립(Sleep)."

시동어와 동시에 갑자기 남작의 눈꺼풀이 스르르 내려갔다.

"자, 자네……."

쿵!

그 말과 함께 무너진 남작의 곁으로 부관이 병사 하나를 불러 세웠다.

"자네는 몇몇 병사를 데리고 남작님을 빨리 도주시키게. 성내에 마구간에 가면 아직 남은 말이 있을 게야."

"옛!"

"아직, 아직 프로시안 영지는 이렇게 망해서 안 돼. 다시 일으켜 세워야 돼! 자네의 어깨에 그 짐이 달려 있네. 명심하게!"

"목숨을 다해서라도 지키겠습니다."

그 병사는 두 명의 병사를 더 데리고 성내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부관은 남작이 사라지는 방향으로 깍듯이 인사를 했다.

"안녕히 가십시오, 남작님……."

그의 눈에서는 굵은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20년을 이곳에서 넘게 근무하며 이미 고향이 되어 버린 프로시안 영지.

20년 동안 그가 근무만 한 것은 아니었다. 요령껏 눈치도 살필 줄 알게 되었고, 영지의 마법사 칸과도 면식을 익힐 기회도 많이 있었다.

그렇게 되며 친우의 사이가 되었다.

칸은 토벌을 떠나기 전 자신이 끼고 있던 마법 아티팩트 반지를 부관에게 넘겼다.

'혹시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남작님을 꼭 지키게. 이 반지는 마법을 익히지 않은 자에게 마나를 담을 그릇을 만들어 줄 것이고, 이 반지는 마나를 모아 줄 거야.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네의 결혼반지에는 슬립과 힐링 마법을 1회용으로 사용할 수 있게 했네.'

그가 이전에 레나의 전신에 퍼진 마나의 농도를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칸이 준 아티팩트 때문이었다.

평소 남작은 익스퍼트에 이른 실력자지만 정신적 충격이나 피로감 때문에 간단한 슬립 마법도 피해 가기 어려웠다. 슬립 마법에 빠졌으니 족히 6시간은 잠들어 있을 테지만, 이미 남작이 깨어났을 때는 도주하고 있을 것이었다.

'고맙네, 칸. 자네 때문에…… 내 죽음이 헛되지는 않을 것 같군. 이제 자네가 보여 줘야 할 것 같군. 꼭 아가씨를 살려서 보내게.'

그는 가슴속으로 염원하듯 눈을 감았다.

혼란스러운 장내에서도 오직 그 혼자 서 있는 듯 조용해졌다.

이틀 후, 프로시안을 지키던 천 명의 군대는 전멸했고 뜻을 같이했던 이백여 명의 남자들은 뿔뿔이 흩어지며 항복을 하거나 대피소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이로써 영지전은 끝났고 곧바로 헤일론 백작은 이천의 병사를 추격대로 보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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