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인하르트-22화 (22/60)

■ 제22장 갈림길에서의 각자의 기연! □

한 나라에서 일어나는 영지전은 왕의 관할이 아니었다.

영지전에서 승리한 영주가 패배한 영주에게 무엇을 요구하든 그것은 귀족들만의 특권이었고, 왕이 개입할 수 없다.

다만 영지전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왕에게 윤허를 받을 명분이 필요했다. 헤일론 백작이 반국왕파 필립 후작의 강력한 우방인 만큼 슈레이더 왕국의 지배자인 카이어스는 영지전을 반대할 힘이 없었다.

그만큼 반국왕파의 힘은 날이 갈수록 강해져만 갔고, 그것을 저지할 국왕의 힘은 나약해질 뿐이었다.

외성과 멀리 떨어진 9만 명의 프로시안 영지민들은 각 마을에 자치대 정도만이 경비를 보고 있었다.

사실 9만 명이라는 어마어마한 숫자이기는 하나 수십 개로 마을이 멀리 떨어져 있었다. 거리가 거리인 만큼 각 마을에 연락통이 있긴 하지만 일주일에 한 번 정도나 교류가 가능했다.

그렇다 보니 9만 명은 그대로 헤일론 백작가의 군대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외성과 떨어진 영지민들은 자신들이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말로만 듣던 영지전이 일어났다는 것도 자세히 알지 못했으니 전혀 대비를 하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평화로운 마을에 갑자기 들이닥친 병사들.

그 수가 수백에 이를 정도였으니 고작 몇 명만이 자치대를 꾸리고 있는 마을이 쑥대밭이 되는 것은 찰나의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아무도 살려 보내지 마라!"

헤일론 백작과 그의 부관 이든은 애초에 각 마을이 연락이 늦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본보기로 수많은 마을을 불태워 입을 막았다.

영지민들이 병사들에게 노예로 끌려가고 노리개로 전락된 것이 어언 이틀이 지나서야 프로시안 영지에 그 정보가 전달이 되었다.

"보고 올립니다. 현재, 약 500명으로 구성된 병사 집단이 마을 다섯 개를 집어삼킨 것도 모자라 아녀자들을 겁탈, 그리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노예로 끌려갔습니다."

한 병사의 보고에 회의실은 찬물을 끼얹은 듯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런 상황 속에서 다시 병사의 말이 이어졌다.

"아직까지는 많은 마을이 이 사태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사님들이 나서서 최대한 피해를 줄이기 위해 애를 쓰고는 있지만 병사들을 막기에는 역부족입니다."

쾅!

그 순간, 남작의 주먹이 강하게 책상을 내리쳤다.

"빌어먹을! 백작에게는 무장도 하지 않은 9만 명의 목숨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이냐!"

영지전에서 패배한 영주는 작위와 성을 빼앗기고 평민으로 전락했다. 물론 영주를 죽이는 경우도 있지만, 암묵적으로 대부분의 승리한 영주들은 돈 몇 푼 쥐어 준 채 내쫓았다.

그리고 승리한 영주들이 전쟁을 통해 빠져나간 돈을 다시 채우기 위해서 패배한 영주의 영지민들을 노예로 내다 파는 경우가 허다했다.

하지만 설마하니 외성의 바깥에 있는 마을을 공격하여 도발을 해 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남작은 주먹을 움켜쥔 채 옆에 있는 부관을 향해 물었다.

"병사들의 현재 훈련 상황은 어떠한가?"

각 마을에서 뽑은 2천 명의 젊은 병사들을 며칠 전부터 훈련시키고 있었다.

"밤낮을 쉬지 않고 이동 작업을 위해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많아 훈련 상황은 아직까지 발걸음도 떼지 못했습니다. 헤일론 백작의 정규군과 싸우려면 손색이 있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병사 2천을 급히 뽑느라고 병장기가 많이 부족했다. 어떤 병사들은 무기가 없어 대나무로 창을 만들어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출병 준비를 하라."

"예?"

남작의 말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부관이 다시 물었다.

"출병 준비를 하라 했다. 내 이 손으로 그놈들의 목을 베지 않는 한은 평생에 한이 될 것이야!"

"남작님, 1만 명의 영지민들의 목숨이 달려 있습니다."

부관 또한 지지 않고 나섰다.

"그럼 9만 명이나 되는 영지민이 죽도록 이렇게 내버려 두자는 말인가!"

"이것이 놈들의 계략이라는 것을 모르십니까."

"놈들의 계략을 두려워해서야 어찌 영지민을 구한단 말이냐."

"지금의 선택은 그저 지켜보는 것뿐입니다."

부관의 말에 남작은 그저 멍한 시선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오는 작은 말.

"……이틀 이내로 영지민을 이주시킨다."

"알겠습니다, 남작님!"

헤일론 백작은 자신의 아래 놓인 제국검 '로열'을 보며 의미 모를 시선을 던졌다.

"크음!"

오른손에서 강한 화기가 느껴졌다.

불과 1분 전에 검을 잡았다. 하지만 검은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듯 강하게 반항해 왔다. 만약 순간적으로 손에 마나를 폭발적으로 운용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온몸이 타들어 갔을 것이었다.

"이놈의 주인은 분명히 죽었을 터인데…… 어찌하여 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거지?"

그는 제국검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당시 이안이 자신을 궁지로 몰아간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명검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모르겠구나, 모르겠어."

라인하르트 제국의 제국검은 크게 알려진 바가 없기 때문에 헤일론 백작은 단순히 명검이라고 판단했다.

헤일론 백작은 몰랐다.

제국검은 '인정'이라기보다는 황실의 피를 가진 자를 '판단'하는 것을, 그리고 이것이 말로만 듣던 제국검이란 것을 말이다.

"오냐, 하지만 언젠가 인정을 받아 너의 주인이 되어 주마."

백작이 검에게 말하는 사이 그의 부관 이든이 안으로 들어왔다.

백작은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왔는가?"

마치 처음부터 올 것 같았다는 말투.

"남작이 드디어 움직인 모양입니다."

"마을을 몇 개 박살 내니 효과가 있긴 있군. 그래, 남작의 성정으로 보아 군사 전부를 끌고 덤빌 생각은 없을 터, 오늘부터 착실하게 영지민들을 이주시키겠지?"

부관 이든의 생각대로 척척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미래의 일을 먼저 보고 왔다는 것처럼.

백작이 묻자 이든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 아니면 이틀 이내로 이동시키려 할 겁니다. 저희는 오늘 중으로 외성을 함락시켜야 합니다."

"방법은 미리 준비해 뒀겠지?"

부관은 자신만만한 투로 대답했다.

"흐흐, 걱정하지 마십시오. 프로시안 영지의 외성 정도는 세 시간만 주셔도 함락이 가능합니다."

"자네만 믿겠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백작 각하!"

"영지민들을 받아 줄 영주는 물색해 보았는가?"

"그, 그게……."

"무슨 일인가?"

말을 더듬는 부관에게 남작이 물었다.

"열심히 찾아보긴 했습니다만, 이 근처 어떤 영주도 영지민을 받아 줄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렇겠지."

남작은 그리 실망하지 않았다. 이미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다.

헤일론 백작이라 하면 슈레이더 왕국의 동쪽 지배자로 군림하던 자였다. 그의 눈 밖에 난다면 어떤 상황을 초래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약 열흘 거리 정도에 있던 자작 한 명이 영지민을 받아 준다 합니다."

"으음?"

남작의 얼굴에 기대감이 떠올랐다.

"그 자작의 이름이 무엇인가?"

"성은 브론테스. 현재 영주는 8대 대대로 물려 온 충신 중의 충신입니다. 국왕파의 인물로, 영지민 1만을 데려오면 모두에게 1년 동안 세금 10% 면제와 집과 땅을 준다 합니다."

브론테스 자작은 검술이나 마법, 또한 지략 등 뛰어난 점이라곤 하나도 없는 자였다. 그렇다고 정치도 그럭저럭 잘한다고 볼 수도 없었고, 세금도 40% 정도로 평범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주군에 대한 충성도가 강해 영지전도 몇 번이나 치르고 모두 승리를 이뤄 내었다. 그렇다 보니 자작의 영지가 거의 백작가에 버금갈 정도로 불어난 상태였다. 영지의 크기에 비해 사람 수가 많이 부족했다.

보통 자작가의 영지민은 3만 정도다. 하지만 브론테스 자작의 영지민은 2만 5천 정도로, 그 수가 적었다.

프로시안 영지의 경우 10만 명을 육박할 정도로 후작령에 버금가는 땅과 인구수를 지녔지만, 그것은 애초에 영지가 세워지기 전에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던 마을 사람들 때문이었다.

장안의 숲을 견제하고자 세운 프로시안 영지는 그 마을을 모두 흡수해서 영지라 표시했고, 유일하게 왕이 인정한 10만 영지민을 가진 남작가가 된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많다고 할 수는 없었다. 장안의 숲의 견제 때문에 세금을 모조리 방어에 치중하다 보니 사병을 키울 만한 돈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곳으로 이동해야겠군."

"우선 1차로 2천 명을 이동시키고 있습니다."

"이동에 따른 문제점 등을 확실하게 나에게 보고를 해 주게."

"명을 받듭니다."

일만 명이나 되는 대인원이 움직이다 보니 여러 문제점이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터전을 잃기 싫어하는 장정들은 병사들이 되기를 원했고, 마찬가지로 어떤 가족들은 떠나기 싫다며 이곳에 눌러앉으려는 자들도 있었다.

특히 이곳에 여행 목적으로 왔던 자들이나 물건을 판매하러 온 상인들은 마차에 한가득 사람들을 싣고 이동해야 하니 불만의 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2천의 병사들은 밤낮을 쉬지 않고 훈련에 이동 준비를 끝마쳐야 했기에 제대로 잠 한숨 자지 못한 채 투덜거렸다.

그런 곡소리 나는 현장에서도 부관은 남작의 일을 자신이 대신 처리했다. 남작이 문제점을 보고하라 했지만, 부관은 잘 알고 있었다. 딸의 생사도 모르고, 영지민 걱정 때문에 요즘 남작이 얼마나 힘들어 하고 있는지를 말이다.

조금이라도 편안히 쉬게 하려는 부관의 의도였다.

그렇게 남작가가 서두르는 사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다른 움직임이 보이고 있었다.

* * *

"폐하……. 허허, 폐하라!"

말하고 말해도,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는 단어.

한 나라의 지배자!

필립 후작은 20일 후 열리는 카이어스 왕의 생일, 용좌에 앉은 자신을 상상했다.

모든 계획은 완벽했다.

헤일론 백작에게 받은 500만 골드 중 200만 골드는 마스터도 암살한다는 S랭크 어쌔신들에게 의뢰를 해 놨으니 모든 변수가 존재해도 실패할 가능성은 지극히 낮았다.

'이제 난 황제가 되는 것이다!'

본디 슈레이더 왕국의 지배자는 분명 국왕 전하라 칭해야 맞다. 하지만 필립 후작은 스스로를 폐하라 칭했다.

게다가 귀족들이 보는 앞에서 카이어스에게 폐하라 칭한 것은 후에도 자신이 그 칭호를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필립 후작은 슈레이더 왕국을 발판으로 삼아 펠타온 제국을 집어삼켜 프라스 제국과 어깨를 견줄 양대산맥의 나라를 세우려 하는 야심가였다.

"세상이…… 세상이…… 내 손아귀에 쥐어진다! 으하하하!"

필립 후작은 정말 호탕하게 웃었다.

망상만으로도 이미 그의 미소는 입술에 걸쳐져 떠날 생각이 없었다.

얼마 전 쉐도우 로드에게서 들었던 정보.

뜻밖에도 라인하르트 제국 초대 황제의 무덤에는 그가 일전에 사용하던 '검술서'가 잠들어 있었다.

아주 옛적부터 내려오던 전설.

라인하르트 제국의 초대 황제가 만들고 사용한 '검술'을 익힌 자는 대륙 최강이 되리라.

역사서에 따르자면 라인하르트 제국의 초대 황제는 최소 그랜드 마스터 최상급에 이르는 실력자였다고 적혀 있었다.

"으하하!"

필립 후작은 이미 오 일 전쯤에 라인하르트 초대 황제의 무덤으로 익스퍼트에 이른 실력자 50명을 보냈다. 뛰어난 트레저 헌터 다수가 따라갔으니 반드시 검술서를 가져올 거라 믿었다.

그리고 그의 웃음소리는 밤이 돼도 끊이질 않았다.

스슷.

좁아지는 보폭 소리.

60명 정도 되는 인원이 빠른 속도로 동굴을 나아가고 있었다. 그들의 인원은 60명이나 되지만 그 아무도 발소리를 내지 않았다.

이윽고 그들이 도착한 곳은 거대한 철문 앞.

아니, 아다만티움이라 불리는 금속으로 이루어진 문의 앞이었다.

"헉! 이건?"

그때 맨 앞을 걷던 중년의 남자가 문을 바라보더니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무슨 일이오?"

"이, 이틀 전과는 달리 이 거대한 문이 열려 있습니다."

"뭐, 뭣이오?"

그들의 말소리에 귀를 기울던 다른 자들도 재빠르게 문 앞으로 다가왔다.

"한 사람씩 들어갈 정도는 되는군."

"함정일지도 모릅니다."

"누가 함정을 판단 말이오? 이틀 동안 이 주위를 샅샅이 뒤져 봤지만 이곳에 사람은 없었소."

"일단 상황을 판단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무리하게 마법으로 돌입한 마법사의 비명 소리를 잊으신 것은 아니지요?"

"음!"

이들은 익스퍼트 50명과 트레저 헌터 10명, 그리고 4서클 마법사 둘이 껴 있는 파티였다.

그중 4서클 마법사가 이틀 전에 무리하게 안으로 들어가려고 공간 이동 마법인 블링크를 사용했다가 온몸이 황산에 녹아 버린 적이 있었다.

"내가 일단 들어가 보겠소."

"아닙니다. 이곳부터 할 일은 우리 트레저 헌터들이 해야 합니다."

"그렇군."

트레저 헌터들은 능숙한 솜씨로 가방에서 장비를 꺼냈다.

일단 가벼운 마법들을 차단시키는 캔슬과 마나 스캔을 사용할 수 있는 일회용 스크롤 등이 사용되었다.

번쩍!

스크롤이 찢어지면서 나타난 불빛은 동굴을 감싸고 잠시 후 사라졌다. 빛이 사라지고 난 뒤 트레저 헌터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머리를 긁었다.

"무언가 이상합니다."

"뭣이 말이오?"

"저희가 처음 도착했을 때만 해도 6서클을 상회하는 마법으로 트랩이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허나 지금은 마치 '해제'된 듯 고요하기만 할 뿐입니다."

"확실한 것이오?"

"예, 일단 지금 들어가 본다면 위험은 없습니다."

트레저 헌터들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어째서 트랩들이 해제되었는지 의문을 풀 수가 없었다.

'이유를 알 수가 없군. 아! 혹시 이 문에 새겨진 글자의 뜻은 무엇을 가리킬까?'

그런 의문 속에서 트레저 헌터들이 마지막 확인차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저벅저벅!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자 한숨 돌린 일원들은 한 명씩 빠른 속도로 통로를 걸어갔다.

통로에서 트레저 헌터들이 앞장서서 주변을 살피며 걸었다. 그들의 눈에는 혹시 놓치는 것이 있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깃들어 있었다.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트레저 헌터들이 길을 멈추고 어두운 통로를 빛으로 밝혔다.

"갈림길이로군."

왼쪽과 오른쪽.

트레저 헌터들도 이곳에서는 생각에 생각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보통 던전들을 둘러보면 이렇게 갈림길이 나오는 경우는 한두 곳이 아니었다. 그때 제일 좋은 방법은 무작정 아무 곳이나 들어가 본 후, 위험이 있다면 다시 되돌아와 다른 길로 향하면 된다.

"일단 왼쪽으로 간 후 다시 오른쪽으로 가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럴 수 없소."

기사들은 그 의견에 동의할 수 없었다.

"무슨 말입니까?"

"후작님께서는 그리 한가한 분이 아니시오. 인원도 60명이나 되니 반으로 나누어서 왼쪽과 오른쪽으로 가는 게 나을 것 같소."

60명이나 되는 대인원.

30명씩 나누어서 이동한다 해도 각 트레저 헌터들이 5명씩 있을 것이니 큰 위험부담은 없어 보였다.

트레저 헌터들도 수긍했다.

"좋습니다. 원하는 것을 얻었을 경우 동굴 바깥에서 모입시다."

"알았소."

왼쪽과 오른쪽, 두 갈림길에서 서로 갈 길을 잡은 자들은 올 때와 마찬가지로 트레저 헌터들을 앞세워 이동했다.

그리고 그때.

60명의 뒤에 작은 그림자 하나가 뒤를 따랐다.

너무나도 조용한 발걸음. 공기와 동화되는 숨소리.

그 그림자는 왼쪽과 오른쪽, 그 두 방향을 번갈아 보더니 오른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이안은 쓰러지고 나서 이틀 만에 다시 깨어났다.

깨어나자마자 곧바로 운기행공에 들어간 이안은 하단전을 꽉 채우는 내공에 입을 떠억 벌렸다.

골드 드래곤 알케미온의 피를 마셨을 때는 꼼짝없이 죽을 거라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멀쩡히 살아 있는 것도 모자라 손상된 십이경맥이 모두 치료가 되어 있었다.

"화경……의 경지인가?"

초절정을 넘어선 인간의 경지의 마지막.

화경!

유라시아 대륙의 구분으로 따지면 마스터의 상급에 이른 경지라 볼 수 있었다.

"하하…… 하하하하!"

위기에 닥쳐 죽을 뻔했지만 지금은 행복에 겨운 웃음이 저절로 생겨났다.

"흐응……."

이안의 웃음소리를 깨는 작은 볼멘소리.

언제 깨어난 건지 눈을 비비며 동그랗게 뜨고 이안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녀 또한 이안의 몸에 어떠한 현상이 일어났는지 마나 스캔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분명 그것은 '마스터'의 경지에 오를 때 느껴지는 '마나 폭풍'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짓궂은 표정으로 이안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물었다.

"왜 그렇게 실실 웃는 거야?"

"후후! 아뇨, 아무 것도. 그건 그렇고, 제가 얼마나 누워 있었어요?"

실실 웃으며 묻는 이안의 말에 세리아는 풀이 죽은 채로 소곤거렸다.

"몰라, 하루인지 이틀인지. 최소 이틀은 지났을 거야."

"어라? 무슨 일이에요. 아가씨가 그렇게 풀이 죽은 모습은 어울리지가 않……."

꼬르르륵.

배에서 난 작은 소리.

이안은 결코 그 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이안은 화경의 경지에 오르면서 일주일을 굶고 잠을 자지 않아도 멀쩡한 신체를 지녔다.

그렇다면 누구일까?

이곳엔 이안과 세리아밖에 없었으니 자연스레 이안의 눈길은 세리아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그 순간 둘의 눈이 마주치자 세리아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물론 홍당무처럼 볼이 발그레했다.

"나, 난 아냐."

말을 더듬으며 부정하는 세리아의 모습에 이안이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저런 모습도 왠지 귀여운걸.'

"풋! 좋아요. 아가씨께서 그렇게 부정하시니 내가 했다고 치죠. 며칠을 굶었으니 이해하세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놀리는 이안의 말투에 세리아는 매서운 기세를 눈에 품고 째려보기 시작했다. 이안은 마치 여유로운 표정으로 그 시선을 피했다.

"그럼 일단 이곳을 나가 보도록 할까요? 누군가 이곳을 만들었으니 나가는 길도 근처에 있겠죠."

이안은 일단 처음부터 의심스러웠던 광장 맨 끝에 달린 철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곳은 처음 들어왔던 철문과는 달리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아 대체적으로 평범해 보였다.

"여기가 나가는 문일까?"

"글쎄요. 그래도 이런 곳을 지으려면 많은 사람들이 투입돼야 했을 테니 다니는 길이 있겠죠. 자, 그럼! 일단 열어 보기로 할까요?"

장정 몇이 밀어도 밀리지 않을 것만 같은 거대한 문이었다.

하지만 이안이 가볍게 힘을 주자 철문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끼이이이익!

오랫동안 사용을 하지 않은 곳이라 이음새 부분에서 많은 괴성을 질렀다.

그때, 이안이 사람 한 명쯤 빠져나갈 정도도 열지 않고 그대로 손을 떼어 냈다. 그리고 무언가에 집중하듯 눈길을 뒤로 돌리더니 귀를 쫑긋 세웠다.

"누군가 다가오고 있어요."

"이곳으로?"

"예. 숫자는…… 상당히 많아요. 기척으로 보았을 때 적어도 자신들의 실력을 숨길 만한 자들."

그렇다면 능숙하게 마나를 다룰 수 있다는 것.

최소 익스퍼트 급이라는 것이다.

세리아는 라이트 마법을 띄워서 입구 쪽으로 보냈다. 그때 이안이 세리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가씨, 음…… 일단 몸을 숨기시는 게 어때요?"

"뭣 하러?"

"아무리 봐도…… 좋은 의도로 다가오는 것은 아닌 것 같거든요."

"숫자는?"

이안은 자신 있는 투로 딱 떨어지게 대답했다.

"서른 명."

아무리 기척을 숨긴다고 하더라도 이안의 청각을 피할 정도는 아니었다.

"누군가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순간, 마침 입구 쪽에서 다가오는 정체불명의 무리들도 세리아가 올려놓은 라이트 마법을 본 것 같다.

목소리를 들어 보니 이안이 있는 곳과 그리 떨어져 있는 곳도 아니었다.

"아가씨, 그냥 갈까요? 위험할 수도 있는데."

"아니. 넌 초대 황제의 무덤에 누군가가 왔다는데 궁금하지도 않은 거야?"

"그다지."

별로 흥미가 없는 듯해 보였다.

이안과 세리아가 그러고 있는 사이 조금씩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무리 중에 맨 앞에 있는 다섯 명의 남자는 그다지 강해 보이지는 않았다. 대체적으로 간편한 복장으로, 놀란 눈길로 이안과 세리아를 번갈아 쳐다볼 뿐이었다.

그들의 뒤로 25명의 사람들은 플레이트 메일을 걸친 채 각자 그립에 손을 대고 있었다. 소속을 감추려 했는지 투구로 얼굴을 가리고, 가문의 문장을 지웠다.

서른 명의 인원 중에서 한 중년의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너희들은 누구냐!"

위엄 있는 말투.

분명 소속 가문을 지우긴 했지만 '기사'들이었다.

이안과 세리아는 쉽게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들의 신분상 말해 줄 수는 없었다.

그 기사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이안과 세리아의 뒤에 있는 거대한 철문을 바라보았다.

"트레저 헌터인가?"

원하는 것이 있으니 이곳에 들어오지 않았겠는가.

혼잣말로 작게 얘기한 것이지만 이안의 귀는 그 소리를 잡아냈다.

"그럴지도."

"헙!"

앞쪽에 다섯 명의 트레저 헌터들은 아무리 작게 말했어도 근처에 있었기에 기사가 한 혼잣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안의 대답도 충분히 들릴 만큼 컸다.

'저들이 6서클 마법을 해제한 자라고?!'

용모를 봤을 때 아무리 많이 쳐주어도 20대 중반을 넘어 보이진 않았다. 이제 갓 약관의 나이가 됐을 법한 젊은 여인과 남자, 이렇게 딱 둘이었다.

외관상 보았을 때 여자는 마법사로 보였고, 남자는 그녀를 지키는 호위무사처럼 보였다. 트레저 헌터라면 자신들과 같이 장비를 쉽게 사용할 수 있는 허리춤에 두기 마련이다.

하지만 남자의 어디를 보더라도 트레저 헌터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이 세상 어디에도 6서클 트랩을 캔슬시킬 수 있는 주문서 따위는 존재하지 않아!'

일회용 스크롤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제작하려는 서클보다 두 단계는 높아야 한다. 예를 들어 1서클의 스크롤 제작을 위해서는 3서클 마법사가 필요했다.

그렇다면 6서클 마법을 해제하기 위해서는 6서클 디스펠 마법이 담겨져 있는 스크롤이 필요한데, 현재 유라시아 대륙 어디에도 8서클 마법사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에 근접한 7서클 마스터인 마탑의 탑주 한 사람뿐이었다.

'그렇다면 저 여인이 6서클에 올랐을까?'

그들은 고개를 좌우로 돌렸다.

7서클에 마스터인 마탑의 탑주 또한 거의 80에 접어들어서야 7서클에 오른 경지다. 어렸을 때부터 마법에 대한 이해도와 친화력이 천재라며 독보적인 전설을 이룩한 탑주가 6서클에 접었을 때는 50살이었다고 전해졌다.

'그렇다면 저들은 어떻게 이곳에 들어왔단 말인가?'

그때 이안이 서른 명의 인원을 쭈욱 훑어보며 물었다.

"그렇다면 당신들은 기사단인가?"

"그럴지도."

참으로 의미심장한 말이다.

트레저 헌터들은 조용히 기사들을 통솔하는 자에게 소곤거리며 물었다.

"저들을 제압할 수 있겠습니까? 궁금한 것이 있어 물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도 어차피 그럴 참이었소. 그건 걱정하지 마시오."

트레저 헌터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단 또한 저들이 무엇을 위해 이곳에 왔는지 궁금하던 참이었다.

"이곳은 우리가 먼저 왔다. 던전은 찾은 자가 주인이 되니 여기서 찾은 것이 있다면 어서 내놓아라."

한 기사의 말에 이안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후후! 억지요. 내가 당신들이 이곳에 먼저 왔는지 어떻게 안단 말이오?"

"어서 썩 내놓아라! 내놓지 않는다면 너희들의 무덤을 이곳으로 친히 정해 주겠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마시오. 당신들에게 미안하지만 난 이곳에서 가져간 것이 아무것도 없소."

당당한 말투. 한 치의 거짓도 없을 정도로 깨끗한 눈빛이었다.

"정말 가져간 것이 하나도 없단 말이냐?"

"그렇습니다만."

"흥! 웃기는 소리. 그것은 뒤져 보면 알겠지. 저 두 연놈을 포박하라!"

채채채챙!

뒤에 있던 기사들이 드디어 검을 뽑아 들었다.

이안은 그대로 주먹을 꽈악 쥔 채 앞으로 걸어 나갔다.

25명이나 되는 익스퍼트 급 기사들이 광장으로 들어와 이안을 포위하자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그때, 기사들을 이끌던 중년의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겠다! 가져간 물건을 내놓고, 몇 가지 질문에만 대답에 응해 주면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웃기는 소리."

"허세 부리지 마라. 믿는 구석이 있다고 한들 우리에겐 통하지 않을 것이다!"

상황을 보아도 그러했다.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실력자라고 해도 익스퍼트 급 기사가 25명이나 있다면 상대하기가 여간 만만치 않은 것이 아니었다.

하물며 무장도 하지 못한 청년이 25명을 상대로 겁에 질린 표정도 아닌 당당한 모습을 보여 주었으니 믿는 구석이 있다고밖에 설명되지 않았다.

"저들을 제압하라! 저들에게 마법사가 있다. 일단 마법사부터 포박하라."

마법사의 힘은 실로 놀랍다. 만약 남자가 시간을 끌고 여인이 캐스팅을 끝마친다면 크진 않아도 피해가 올 수도 있었다.

기사들은 신중한 표정으로 한 걸음씩 앞으로 다가왔다.

그 누구라도 용빼는 재주가 있지 않은 이상은 도주하기 실로 어려운 상황.

이안은 사방을 둘러보더니 가볍게 주먹을 풀었다.

안타깝게도 애검 로열은 헤일론 백작과의 싸움에서 잃었기 때문에 현재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충분했다.

되찾은 내공.

그리고 그동안 십이경맥의 손상으로 '최대한' 봉인할 수밖에 없었던 무공들.

지금은 과거 귀창과 다시 붙는다 하더라도 이긴다고 장담할 수 있었다.

파밧!

'오히려 제압해야 할 쪽은 나다!'

이안이 발을 떼는 순간, 그의 신형은 마치 실로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사라졌다.

"뭐, 뭐지?"

"놈이 보이지 않는다!"

기사들이 하나 둘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였다.

퍼벅!

"크억!"

한 기사가 안면에 적중하는 커다란 충격에 그대로 뒤로 발랑 넘어졌다.

"류드!"

아마 류드라는 기사였나 보다. 기사들은 의문 모를 상황에 한층 경계한 모습으로 류드의 모습을 보며 안타까운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그들도 '안타깝게' 되는 것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타타타탓!

그 순간, 이안이 마구 날뛰기 시작했다. 그것도 날카로운 검날 속을 파고들며 상대의 안면을 공격해 모두 기절시키는 놀라운 실력이었다.

콰쾅!

그때, 기사들을 지위하는 중년의 남자가 처음으로 이안의 주먹을 막아 냈다. 중년의 남자는 주먹을 막아 냈음에도 불구하고 놀란 토끼처럼 눈을 크게 뜨며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 이놈! 놈은 최소 피스트 익스퍼트 급의 실력자다! 모두 오러를 주입하라!"

검이 아닌 주먹으로 익스퍼트에 경지에 이른 자들.

예전부터 있다고만 들었지 실제로 본 적은 처음이었다.

기사들도 안력을 더욱 돋우어 이안의 주먹에 서린 푸르스름한 권기를 보며 오러를 뿜어냈다.

"내공을 주입한다고 해도……."

휘리리릭!

이안의 신형을 가까스로 쫓은 기사들은 이안이 주먹을 향해서 검을 찔러 들어갔다. 아무리 주먹에 오러를 주입했다 해도 절대로 검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 기사의 커다란 오판이었다.

쨍그랑!

오러가 뿜어져 나오는 검이 마치 무 썰리듯 가볍게 반 토막이 되어 버렸다.

"이, 이게 어찌!"

기사는 어벙한 상태가 되어 경악하듯 말했다.

이안은 그를 향해 주먹을 내뻗으며 작게 읊었다.

"……더 강한 힘으로 부수면 부서질 수밖에!"

콰앙!

갑옷을 입고 있었지만 주먹과 정면으로 부딪히자 종이 구겨지듯 갑옷이 찌그러졌다. 그리고 기사의 상태도 가히 무사하지 못했다.

"쿨럭!"

몇 명째 기사가 그대로 손도 못 써 보고 튕겨 나갔다.

기사들의 모습은 사뭇 진지하게 변하며 침을 꼴깍 삼켰다.

오러를 주입한 검을 그대로 반 토막 낸다는 주먹은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다.

항시 그들이 듣기에는 '주먹'은 '검'보다 약하다였다.

그렇지 않다면 뭣 하러 검을 들고 다니겠는가.

하지만 지금 그들이 보고 있는 장면은 스무 살밖에 안 되어 보이는 애송이한테 마치 25명의 익스퍼트가 주먹으로 농락을 당하는 듯 느껴졌다.

이안은 그들의 중심에서 싱긋 웃었다.

마치 즐거운 것이 있다는 듯이.

"자∼! 계속하시겠어요?"

우둑!

주먹을 말아 쥐는 이안의 모습이 섬뜩하게만 느껴졌다.

* * *

필립 후작가의 실버 소드 기사단.

그들은 필립 후작에게서 은밀히 명을 받고 트레저 헌터 10명과 4서클 마법사 두 명을 데리고 프로시안 영지로 향했다.

며칠 밤낮을 말을 바꿔 타 가며 달려왔던 그들이라 피곤하긴 했지만 시간이 촉박하니 빡빡한 일정 속에 눈 한번 붙이지 못하고 '던전'으로 향했다.

하지만 던전은 강력한 환상 마법으로 교묘하게 가려져 있어 찾는 데만 해도 굉장히 애를 먹었고, 막상 안으로 들어가니 눈이 번쩍 뜨일 만한 트랩들이 사방에 깔려 있었다.

시간이 촉박하다는 말에 4서클 마법사가 먼저 아다만티움으로 이루어진 문을 마법으로 통과하여 안으로 들어섰지만 처절한 비명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일행들은 그곳에서 며칠을 소모하며 정보를 수집하다 다시 던전에 모였을 때는 문이 살짝이나마 열려 있었다.

그동안 자신들을 괴롭히던 트랩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싸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통로만이 있었다.

그들은 통로를 넘어서며 계속해서 걸었다.

그리고 나온 갈림길.

그곳에서 익스퍼트 최상급에 해당되는 실버 소드 기사단의 단장은 오른쪽으로 향했고, 부단장은 왼쪽으로 향하며 각각 병력을 반씩 나누었다.

실버 소드 기사단의 단장인 라이노는 굳은 심지를 대변하듯 두툼한 입술과 강력한 인상을 주는 두꺼운 눈썹으로 상당히 매서워 보이는 사람이었다.

"아까부터 살기가 느껴진다. 모두들 주변을 경계해라."

스르릉―

기사들은 저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뽑아내었다. 자신들의 감각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지만, 단장은 헛소리를 할 만한 자가 아니었다.

마법사의 라이트 마법과 트레저 헌터들의 눈썰미에 차근차근 몇 개의 작은 트랩들이 해제되고 나자 그들의 눈앞에는 커다란 광장 하나가 튀어나왔다.

곳곳이 라이트 마법으로 밝혀 주는 듯하자 마법사는 라이트 마법을 캔슬하고, 단장 라이노는 자신들이 목적지에 도착했음을 알 수 있었다.

"흠!"

아주 낡아 보이는 책이었다. 만지기만 해도 잘게 부서질 것만 같은 누런 종이였지만, 막상 손으로 감촉을 느껴 보니 마법이 걸린 것이 틀림이 없었다.

"절대 영구보존 마법이 걸려 있습니다. 이 상태로 수백 년간 이곳에 있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영구 보존 마법은 5서클에 해당되는 고위급 마법이다. 라이노는 마법사의 설명을 들으며 가져온 마법 천으로 에워쌌다. 아직까지는 이 책이 어떤 비밀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행위였다.

"페레로이, 가져온 가방을 이리 다오."

페레로이는 라이노가 개인적으로 아끼는 수하였다.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솜씨와 재능이 뛰어나 미래가 기대되는 재목이었던 터라 이번 밀명에 데려온 기사였다.

"……."

하지만 잠시간의 시간이 흘렀지만 페레로이는 앞으로 나오지 않았다.

아니, 나올 수가 없었다.

"페레로이?"

라이노가 급히 뒤로 돌아보자 기사들은 서로를 쳐다보기에 바빴다.

"단장님, 페레로이가 보이지 않습니다."

"뭐라? 각자 자신의 앞뒤로 순번을 확인해 보거라!"

페레로이뿐만이 아니었다. 트레저 헌터들을 제외하고 뒤에서 따라오던 기사 5명 정도가 보이지 않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저희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곳 광장에 들어오기 바로 직전까지만 해도 있었는데……."

사라졌던 이들의 바로 앞에 있던 수하의 말을 토대로 라이노는 급히 광장의 입구 쪽으로 달려갔다.

"크음!"

입구 쪽에서 무언가를 목격한 라이노의 입에서 작은 신음 소리가 나왔다. 입구는 라이트 마법이 비치지 않아 어둡긴 했지만 똑똑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짙은 피가 사방에 뿌려져 있었다.

그리고 코를 찌르는 짙은 혈향 속에 묻어나는 독향.

피를 따라 앞으로 쭈욱 걸어가 보니 6구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그들의 시체는 모두 공통점을 띠고 있는데, 그것은 피부가 검푸른 것이 십중팔구 독에 중독되어 죽은 것이었다.

"독? 하지만 이곳은 독이 있을 리가……."

라이노의 눈매가 자연스레 트레저 헌터들에게로 향했다.

그는 따지듯 물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이오? 그대들이 분명히 트랩들은 죄다 해제했다고 하지 않았소."

트레저 헌터들은 순간 어이가 없었다.

기사단장의 말을 들어 보면 꼭 자신들이 수하들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민 것처럼 들렸다.

"트랩들은 죄다 해제가 되었습니다. 해제되지 않았다면 우리가 먼저 독에 당했겠지요."

분명히 당한 것은 맨 뒤에서 대열을 이루던 기사들이다.

라이노가 그들에게서 의심의 눈초리를 지우고 죽은 수하들을 바라보는 사이, 갑자기 시체가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헉! 뭐, 뭐지?"

당황한 기사들이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난다.

시체들은 끓다가 한순간 눈 녹듯 사라졌다. 그리고 땅으로 강력한 악취를 풍기는 초록 빛깔의 독이 그대로 흘러나왔다.

"피, 피해라!"

마치 독이 자아라도 가지고 있는 것처럼 기사들을 하나 둘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이, 이게 어찌 된 일이오? 저런 독이 존재하오?"

직업상 독을 많이 접해 본 마법사나 트레저 헌터들은 죄다 고개를 돌렸다. 순식간에 사람을 죽이고, 그 시체를 녹여 버려 다른 사람에게까지 피해를 주는 독은 본 적이 없었다.

"크아아악!"

기사 몇 명이 그대로 독에 당해 몸이 녹아 버렸다.

라이노는 수하들의 비명 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오러를 머금은 검으로 독을 향해 강하게 내질렀다.

파앙―!

독이 허공으로 분산되었다.

기사들은 몸을 움츠리며 독을 피하기 위해 몸을 뒤로 돌리고 냅다 뛰기 시작했다.

라이노의 공격이 어느 정도 먹혔는지 죄다 독이 오러로 인해 파인 땅속 깊이 들어가 버렸다.

"저, 정말이지 무서운 독이로군."

"휴우!"

기사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그 순간, 라이노의 눈썹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고작 독에 의해 총 9명의 수하를 잃었다. 이것은 평생 머리에 각인될 만한 커다란 판단 미스였다.

라이노가 허공으로 눈을 돌리자 광장을 밝히던 수십 개의 라이트 마법이 일순간에 사라졌다.

"허헉!"

한순간에 시야를 잃은 기사들은 동요하며 그대로 검을 뽑아 들었다. 라이노 또한 검을 뽑아 들며 사방으로 경계된 눈초리로 외쳤다.

"검을 함부로 쓰지 마라! 침착하라!"

라이노의 외침을 들은 것인지 기사들이 죄다 묵념하듯 침묵 속으로 빠졌다.

"어서 라이트 마법으로 밝혀 주시오."

"……."

"이보시오!"

익스퍼트 최상급에 오른 라이노라 할지라도 갑자기 생긴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게다가 광장이 얼마나 어두운 것인지 자신의 손발도 확인하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헙, 이럴 수가!"

어느 정도 눈이 익숙해진 라이노는 처참한 시체가 되어 목이 잘려 버린 마법사의 시체에 경악했다. 그뿐만 아니라 같이 들어왔던 트레저 헌터들 또한 그대로 목 없는 몸이 되어 땅에 널브러져 있었다.

'어떻게 익스퍼트 최상급에 이른 내가 알지도 못하는 수법에 걸려 죽는단 말인가!'

슈악―!

그 순간 무언가가 잘리는 소리가 나더니 라이노의 앞으로 커다란 무언가가 떨어져 내렸다.

"……."

라이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것은 처참하게 잘려 나간 수하의 머리였다.

그 머리는 자신이 죽었다는 것도 알지 못한 채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어둠에 익숙해지려고 눈을 뜨고 있었던 것이다.

퍼펑!

"크윽!"

갑자기 다시 광장에 라이트 마법이 켜졌다. 이미 어둠에 적응되어 있던 눈이라 다시 빛에 노출되어 팔로 급히 이마 쪽을 가렸다.

실눈을 뜨자 흐릿한 시야 속에 검은 옷을 입은 한 남자가 조심스레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누, 누구?"

슈욱―!

그것이 라이노가 내뱉은 마지막 말이었다.

쿠웅!

익스퍼트 최상급에 오른 라이노의 목에 작은 혈선이 그어지며 그대로 땅에 머리를 처박았다.

라이노를 죽인 남자는 단검을 검집에 넣더니 낡은 책을 손아귀에 쥐었다. 그것은 방금까지 라이노가 가져가려 했던 것이다.

"이것인가? 이것이 라인하르트 제국 초대 황제의 검술서……."

그의 입가에 작게 미소가 그려졌다.

품에 검술서를 집어넣은 그는 그대로 사라졌다.

마치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그는 블랙 머플러의 수장 쉐도우 로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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