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1장 라인하르트 초대 황제의 무덤! □
디펜스 캐슬.
불과 며칠 전만 해도 2,500여 명의 용병들과 병사들이 머무는 곳이었으나 지금은 한산하기 그지없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욘지의 말을 들은 칸은 생각보다 사태가 크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들은 쉽게 이곳을 떠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병사들이라도 있다면 한 팔 걷어서 지금 당장 남작을 도우러 가야 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나 아직 그들의 사령관인 세리아가 며칠째 소식이 없었다.
사령관이 사라지자 용병들은 때를 참지 못하고 모두 성을 뛰쳐나가 버렸다.
애초부터 용병들에게 이곳에 남길 바란 것이 헛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용병들은 이 일에 책임을 물어 막대한 양의 손해배상을 프로시안 영지에 청구하는 등, 이리저리 많은 빚더미에 올라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쉽게 갚을 여건이 되지 않았다. 지금 당장 프로시안 영지에선 4,500이나 되는 백작의 병력의 철군이 미뤄진 탓에 하루하루를 불안감을 가지고 살아야 했다.
프로시안 영주인 남작은 무거운 얼굴로 외성을 바라보았다.
항복을 하고 시간이 점차 지났지만 백작의 군대는 움직일 기미가 없었다.
아무리 수성을 하는 입장에선 상대의 병력보다 적은 수로도 충분히 유리하게 작용이 될 수 있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외성을 수비하는 1,500명의 병사 모두가 활시위조차 놓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영지를 보호해 달라는 부탁을 하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타타탓!
그때였다. 부관이 이마에 땀을 뻘뻘 흘리며 남작의 옆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인가?"
"오늘로 삼 일째, 토벌군으로부터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외곽을 경비하는 병사들 말로는 백작의 군대가 움직임을 보였다 합니다."
"뭣이? 다시 한 번 백작의 사병들의 수를 확인해 봐라. 게다가 움직임이 있었다면 그 흔적이 남을 터. 흔적을 추적하라 일러라."
1시간 전에 보고 받은 백작의 군대는 4,500.
처음에 이곳에 올 때만 해도 5,000의 군대였으니 500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니, 며칠 전만 해도 갑자기 밤사이에 천 명의 병사가 사라지고 500만 돌아온 적도 있었다.
"음!"
그때 남작의 뇌리를 스치는 생각.
백작의 병사 천 명이 사라진 날과 시간, 그리고 보급 부대가 이동한 시간이 아주 비슷했다.
그날이 지나고 난 뒤, 백작은 무언가를 숨기려는 듯 장안의 숲으로 가는 길을 모두 차단시켰다.
남작의 얼굴이 점점 딱딱하게 굳어 가자 부관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왜…… 그러십니까?"
"너무 멍청했군, 멍청했어! 빌어먹을! 저들은 애초에 항복 따위는 들어주지도 않았던 거야."
"간밤에 사라졌던 천 명의 병사. 그리고 돌아온 자들은 고작 오백. 남은 오백 명은 어디로 증발했다고 생각하는가?"
"그러고 보니……."
부관은 이제야 알겠다는 듯 자신의 이마를 쳤다.
애초부터 항복이란 없었고, 그저 백작의 천 명의 병사는 남작의 보급 부대를 치기 위한 밑바탕이었다.
완전 백작의 손에서 놀아난 꼴이었다.
"이런! 그렇다면?"
"저들은 분명 성을 장악하려 들 걸세. 모든 영지민들에게 은밀히 알려서 밤에 탈출시키게나."
"마, 말도 안 됩니다. 성안에 포함된 영지민들의 숫자만 해도 물경 1만에 달할 정도인데 2,000명의 병사들을 모두 푼다고 해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밤사이 해낼 수 있는 일은 더더욱 아닙니다."
일만이면 엄청난 이동이었다. 그리고 그 일만이나 되는 영지민들을 받아 줄 곳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백작의 병사들의 눈을 피해 도망갈 길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일만이나 이동을 한다면 발각될 것이 분명했다.
"간단하게 일단 노인과 아이, 여인부터 보내게나. 차근차근 2천 정도씩 다섯 번을 끊어서 보내면 될 거야."
"차라리 각 마을의 젊은이들을 뽑아서 영지를 지키게 하는 것이……."
"지금 뽑아 놓은 2천 명의 영지민들을 보았는가?"
영지민들에게 영지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어디든 발붙일 곳에 살길 바라고 자신들의 목숨을 걸어 이 땅을 지킬 명분도 없었다.
만약 억지로 시키려 하다가 폭동이라도 일어나면 영지가 통째로 날아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영지민들을 위해 풀어놓을 곡식 하나 없는 것이 현 실정일세."
"그렇다면 근처 영지에 도움이라도……."
남작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슈레이더 왕국의 동쪽의 제왕은 다름 아닌 헤일론 백작이었으니까. 근처 영주들은 헤일론 백작의 눈치나 보며 살살 기고 있었다.
"자네는 영지민들을 받아 줄 영주들을 은밀히 포섭해 놓게나. 시간이 없어,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
"알겠습니다, 남작님."
부관이 빠른 발걸음으로 사라졌다. 외성을 바라보고 있는 남작에게 병사 하나가 다가왔다.
"남작님께 보고 올립니다."
"……."
"백작의 군대는 아직 그대로 4,500입니다. 하지만 무언가 꾸미는 것이 있는지 몰라도 방금 들어온 정보에 의하면 간밤에 움직이려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합니다."
"알았다. 수고했다."
"예, 그럼."
보고를 받은 남작의 얼굴은 쉽게 펴지지 않았다.
"크으음!"
헤일론 백작은 신음을 삼키며 붕대를 바라봤다.
불완전하긴 했어도 오러 블레이드 입은 상처였으니 쉽사리 나을 기미가 없었다. 칼에 찔린 것도 모자라 방심한 순간 날아온 바람 덩어리에 두 팔이 부러지는 상처까지 입었다.
빠른 응급치료와 신관들의 축복 마법이 있었기에 간신히 운신할 정도나 되었다.
"완전히 당했군."
두 팔이 부러졌으니 실상으론 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설마 손에서 바람 덩어리가 나올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방심했던 탓에 상당한 충격을 입은 것이다.
헤일론 백작은 물끄러미 자신의 옆에 놓인 검을 바라보았다. 그 녀석이 쓰던 검이었다.
검을 마법으로 보호하고 있었는지 검을 잡은 기사가 그대로 불에 타 죽어 버리는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마침 마나 파장을 줄여 주는 마법 천이 없었다면 이곳까지 들고 오는 것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주인만 가질 수 있는 검이란 건가?"
예전부터 그런 말을 무수히 들었다.
명검이란 주인을 스스로 고른다. 백작은 비릿한 미소를 입에 걸었다. 안타깝지만 검의 주인은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졌으니 살아남을 리가 만무했다. 멀쩡한 몸으로도 장담하기 어려운 곳을 만신창이가 돼서 떨어졌으니 말이다.
"으하하! 빨리 시험해 보고 싶군. 이 검이 누구를 택할지!"
응당 주인이 죽었다면 먼저 알아차리는 검이다.
그렇다면 또 다른 주인을 찾으려 할 테니, 헤일론 백작은 자신이 이 검의 주인이 되길 바랐다.
"이틀이다. 이틀만 기다리면 내 팔도 온전히 나을 수 있겠지. 그럼 너의 주인이 되어 주마."
아무리 신관들이 신성 마법을 사용했어도 보통 인간들이라면 뼈가 붙는 데 10일 정도가 걸린다. 하지만 마스터에 오른 이후 비약적으로 회복 속도가 늘어나 고작 5일이면 뼈가 붙어 버렸다.
백작이 광소를 흘리다가 얼굴을 들어 올리더니 바깥으로 통하는 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자 백작의 부관인 이든이 안으로 들어왔다.
"백작 각하께 아뢰옵니다. 남작이 성안 영지민들을 드디어 이동시키기로 한 모양입니다."
"생각보다 늦군."
"남작이 그만큼 생각을 많이 한 모양입니다. 어떻게 할까요? 영지민들을 공격하는 게 낫겠습니까?"
"아니, 그대로 둔다. 남작은 책임감이 아주 강한 인물이야. 설마 영지민 일만 명이 이동하는데 멍하니 있으려고?"
장안의 숲의 어느 정도는 토벌에 성공은 했지만 곳곳에 숨어 있는 잔당들을 전부 죽인 것은 아니었다. 영지민이 십만 명이나 이동한다면 그들을 지킬 병력이 필요했다.
"남작은 우리가 프로시안 영지를 갖는 데 불필요한 요소. 제거하는 게 낫다. 전군에 일러라. 조만간 움직일 때가 있을 거라고."
"명을 받듭니다, 백작 각하!"
* * *
"아가씨께서 벌써 며칠째 소식 한 통 없소! 만약 그분께 신변의 위험이라도 있다면 어쩌겠다는 말이오?"
칸의 흥분된 말에 소렌트가 이마를 짚었다.
"끄응. 그렇다고 도대체 어디로 갔는지 알아야 병사들을 풀 거 아니겠소?"
병사들은 보급 부대를 기다리다 평소처럼 근처에 있는 약초나 열매 따위로 목숨을 연명해 나갔다. 생기 넘치던 디펜스 캐슬에는 이제 200여 명의 병사들만이 남았다.
그들을 통솔하는 인원이 열 명 정도 남은 것이다.
"그럼, 좋소. 나라도 나가서 찾아야겠소이다."
"잠깐 기다리시오! 마법사 혼자서 가게 내버려 두어선 아니 될 말이오."
그때 잠자코 있던 펠린이 앞으로 한 발자국 걸어 나왔다.
"저도 가겠습니다. 부단장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니 아가씨를 모시러 간 듯합니다."
웨일즈 또한 성에 남기에는 거북했는지 펠린의 옆구리를 툭툭 치며 걸어 나왔다.
"젠장! 이놈 때문에 제명에 죽기는 글렀군. 부단장을 찾으러 간다면 나도 데려가야 할 거요."
"애송이가 간다고? 그럼 나도 간다."
예전에 처참하게 웨일즈를 이긴 헤니도 나섰다.
헤니의 말에 발끈한 웨일즈가 성을 내며 달려들었다.
"망할! 헤니 형님, 누가 애송이란 말이유? 내가 이래 봬도 전에 있는 곳에서는 이름 좀 날렸수."
"크큭! 하긴, 네놈의 칼솜씨는 뒷골목에서나 알아줄 법한 실력이었지."
"정말 그럴 거요!"
"크하하하!"
세리아를 찾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평소 이안에게 도움을 받던 이들이라면 누구든 주저하지 않고 나섰다.
생각보다 많은 지원자가 생기자 칸이 미소를 띠며 각각 분류를 하기 시작했다.
"장안의 숲이 토벌됐다곤 하나 아직까지 완벽하게 안전한 것은 아니오. 그래서 열 명씩 짝을 지어 두 팀으로 나눈 후 각각 10시간 정도를 교대로 보내겠소."
그들은 세리아와 이안이 무사하기만을 빌며 고개를 끄덕였다.
로이니스의 눈은 마치 초점을 잃은 듯 멍했다. 며칠 전부터 혼자 있고 싶은 맘에 이안의 방 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십수 년을 쌓아 온 정령력을 한순간에 날려 버렸다.
'실프!'
간단한 명령어로 자신의 눈앞에 드러나던 실프가 이젠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하수인이었던 정령이 사라지자 무언가 허한 느낌이 들었다.
이 상황을 누구에게든 간에 위로를 받고 싶었다.
그런데 제일 위로받고 싶은 사람은 생사를 확인할 수가 없다.
초점이 흐린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망할 놈, 감히 날 걱정하게 해?"
입술을 타고 혀로 들어간 눈물의 짠맛이 느껴지자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가 이안의 베개를 주먹으로 때렸다.
'이안! 이안! 이안!'
퍽! 퍽! 퍽!
이제는 너무도 어려진 작은 손.
그 손으로 베개를 있는 힘껏 패고 나자 속이 후련한 듯 그녀가 손을 털었다.
탁탁!
"흥! 좋아, 네가 돌아왔을 때 내가 얼마나 잘 있는지 보여 주지."
떳떳하게 보여 줄 것이다.
나약하게 보이던 그 모습을 버리고.
못된 귀족의 딸 같은 권력도 잊어버린 채로.
누군가의 한 여자로 보일 수 있게!
그녀가 방을 나갔다.
"밥이라도 든든하게 먹고 있어 주마. 빌어먹을 녀석. 그 녀석은 제발 밥 좀 굶어 버렸으면 좋겠네!"
활짝 웃으며 나가는 그녀였지만 바닥에 떨어진 눈물은 지워지지 않았다.
"제발 돌아와, 망할 놈아."
* * *
쏴아아아!
룩커강으로 흐르는 물살은 엄청나게 거세었다.
그 물살에 두 남녀가 떠내려갔다.
남자는 정신을 잃은 듯 전신이 축 처져 있었고, 여인만이 어금니를 꽉 깨물고 정신없이 주변 사물들을 잡았다.
그녀의 노력이 닿았을까.
그녀는 제법 큰 바위 덕분에 떠내려가는 것을 멈추고 한숨 돌릴 수 있었다.
"하아! 하아! 이안? 정신 차려 봐요, 이안!"
그녀의 옆에 축 늘어진 남자는 다름 아닌 이안이었다.
이안은 만신창이로 세리아를 구하기 위해서 물살에 쓸려 가는 도중 충격을 모두 몸으로 받아 냈다.
"끄으응!"
깨우는 것을 포기한 세리아는 나무뿌리들을 잡으며 옆으로 조금씩 이동했다. 그녀가 이동을 한 지 십여 분 정도가 지나자 간신히 발을 디딜 만한 장소가 나타났다.
그녀는 이안의 양팔을 잡고 질질 끌어당겼다.
"이안? 이안?"
이안의 옆에 앉아 상태를 확인해 보자 숨을 쉬지 않았다.
얼굴도 새파랗게 질려 몸이 차갑게 식어 갔다.
"제발! 숨 좀 쉬어 봐!"
아무것도 없는 이곳에서 혼자 남겨진다는 사실이 그녀를 공포에 질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처음으로 자신의 감정을 내비친 사내가 눈앞에서 죽는다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흡!"
세리아는 아주 천천히 움직이더니 자신의 입술을 이안의 입술에 대었다. 둘의 입이 포개지더니 숨을 거칠게 몰아넣었다.
"후우! 후우!"
두 번의 숨을 몰아넣고 그녀가 오른손 등에 왼손을 얹어 깍지를 끼고 이안의 가슴을 가볍게 눌렀다. 그것을 연 30번 반복하고 다시 인공호흡으로 숨을 두 번 불어넣었다.
"제발 일어나란 말이야, 이 바보야!"
그녀는 흐느끼며 계속해서 인공호흡을 반복했다.
"여기서 죽으면 안 되잖아. 너, 이 멍청아."
그녀가 그대로 뒤로 누워 버렸다. 그녀의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며 상쾌한 공기가 폐를 휘감았다.
그녀는 다시 일어서서 자신의 입술을 이안의 입술에 대어 숨을 몰아넣었다. 두 번을 반복하고 가슴에 손을 얹으려는 그 순간.
탁!
"콜록콜록! 케엑!"
이안의 손이 세리아의 팔뚝을 잡으며 그대로 물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이, 이안?"
그녀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지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안은 세리아를 보며 한쪽 눈을 찡그렸다.
"아앗, 계속해서 가슴에 손 대고 있을 거예요? 콜록! 그리고 사람 기절해 있다고 그렇게 반말할 줄은 몰랐네요."
"아, 미, 미안!"
심장 옆에 검에 입은 상처가 있다는 것을 잘 알기에 그녀는 황급히 손을 떼어 내었다. 그러고는 부끄러운 듯 얼굴이 붉어지며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이안은 한숨을 푹 쉬며 인심 썼다는 듯 얼굴에 화색을 돋웠다.
"뭐, 좋아요. 세리아 아가씨는 말을 놓아도 상관하지 않을게요."
"알았어."
그녀도 그동안 불편함을 느꼈는지 곧바로 말을 놓았다.
"대신 조건이 있어."
"말씀하세요, 아가씨."
"이안도 말을 놓도록 해."
기사단의 부단장과 변방 영지의 남작 여식이라면 그렇게 신분 차이가 심한 것도 아니었다. 남작은 귀족은 귀족이지만 하위층이었고, 그 하위층 귀족의 여식이었으니 준귀족인 이안과 말을 놓아도 이상하진 않았다.
실제로도 어느 남작가의 자식들은 평민들과 거리낌 없이 친구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방금 죽다 살아난 사람한테 그 무슨 농담입니까?"
하지만 그녀는 뜻을 꺾지 않았다. 세리아는 이안의 양어깨를 부여잡고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나만 말을 놓으면 이상하잖아. 내 평생소원이라 생각하고 그냥 해 주면 안 될까?"
물에 빠져 있던 터라 세리아의 얼굴이 오늘따라 묘하게 신비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평소 주변에서도 경국지색이라 일컫던 세리아의 미모였기에 이안의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두근! 두근!
그 어떤 남자라고 하더라도 지금 세리아의 모습에 부탁하면 넘어가지 않을 자가 없었다.
"후후! 익숙해지면 불러 볼게요."
이안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회피했다.
하지만 세리아는 그 정도만으로도 흡족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은 가까워진 걸까?'
하루가 지나갔다.
이안은 주변을 살짝 둘러본 후에 곧바로 만상귀일신공을 일으키며 운기행공에 열중했다. 내상과 외상이 너무 깊어서 지금 함부로 몸을 운신할 정도가 아니었다.
'다행이다! 10년 정도의 내공은 남아 있구나.'
하지만 곧바로 이안의 얼굴이 굳어졌다. 십이경맥의 손상은 1, 2년으로 치료가 가능한 수준이 아니었다. 5년을 거쳐 운기행공을 한다고 해도 힘들 일이었다.
확실히 십이경맥을 손상 입은 상태에서 만상귀일검법이나 구하천풍검법 등을 사용한 것은 몸에 더 상처를 가져올 뿐이었다.
자신의 상태를 확인한 이안은 눈을 뜨며 절벽을 쳐다보았다.
절벽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올라 있기 때문에 올라가는 것은 현재로썬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이 절벽을 빠져나갈 방법이라곤 빠른 물살을 타고 내려가야 했지만 이 주변에는 발 디딜 곳도 없었다. 더 최악인 점은 음식도 없었고 오로지 쉽게 구할 만한 것은 물뿐이었다.
이안은 벽에 기대어 쉬고 있던 세리아에게 물음을 던졌다.
"아가씨, 플라이 마법으로 이곳을 올라갈 수 없어요?"
"응. 하루 이틀 내로 마나를 모은다고 하더라도 4서클 정도로는 중간쯤 올라가서 마나가 전부 손실될걸."
이젠 그들의 대화가 무척이나 자연스러워졌으나 이안은 이마를 짚으며 골머리를 썼다.
플라이는 4서클 마법이다. 마나의 손실이 큰 만큼 이 높은 절벽을 올라가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어찌해야 하지?"
휘이잉∼
그 순간, 이안의 주변을 한 줄기 바람이 휘감았다. 그 바람에 단 냄새가 섞여 들어왔다.
"뭐지? 저기, 아가씨!"
세리아의 시선이 돌아가며 이안과 마주쳤다. 그녀의 얼굴은 은은하게 웃고 있었다.
"……?"
"나 좀 부축해 줄 수 없을까요?"
"급한 일이야?"
"아마도."
"할 수 없지."
이안은 하루 동안 세리아에게 힐링 마법을 받으며 외상 대부분은 치료했으나 내상이 심해 운신이 힘들었다.
세리아의 부축으로 일어난 이안은 단 냄새를 맡은 곳과 바람이 분 방향으로 발을 옮겼다. 그러자 도착한 곳은 벽이었다.
"음?"
"무슨 일인데?"
세리아가 궁금한 듯 물어 오자 이안이 히죽 웃으며 벽을 향해 손을 불쑥 대었다. 그러자 손이 마치 물에 들어간 듯 벽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세리아는 자신을 모르는 것이 이안이 알아냈다고 생각하자 큰 패닉 상태에 빠졌다.
"어, 어떻게 이런 것이?"
"아마도 환상 마법의 일종이 아닐까 생각되는데요? 아가씨가 이쪽 분야에 더 정통한 줄 알았는데."
"자, 잠깐! 이 정도로 커다란 환상 마법을 펼치려면 적어도 6서클 이상이 돼야 한다고!"
"그래요? 다행이네요. 우연히 이곳에서 사람의 손길이 닿은 곳을 발견하다니."
안으로 들어간 곳은 칠흑 같은 암흑 속이었다. 똑똑 떨어지는 물소리가 들리고 밖에서 맡았던 단 냄새가 이곳에선 더욱 진하게 느껴졌다.
약간 텁텁한 느낌이 드는 걸로 보아 동굴이었다.
"아가씨, 뭐 해요? 불 좀 켜 줘요."
세리아는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가볍게 캐스팅을 중얼거렸다.
"주변을 밝히는 마나여! 라이트!"
1서클 마법밖에 안 되지만 주변 10미터를 모두 밝힐 정도는 되었다. 그 빛을 통하여 주변을 둘러본 이안이 부축을 받으며 한 걸음씩 걸어갔다.
"여긴 어디지?"
"자연적으로 생긴 곳은 아닌 것 같아요."
"어째서?"
이안이 손가락으로 바닥을 가리켰다.
"그렇다면 저기 선명하게 사람 발자국이 찍혔을 리가 없을 테니까요."
발자국의 개수는 얼마 되지 않았으나 사람 발자국인 것은 확실했다. 그것도 얼마 되지 않은.
그들은 곧 거대한 철문 앞에 도착했다. 철문이 있다는 것은 인간 중 누군가가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다.
세리아는 철문을 만져 보더니 경악하는 표정을 지었다.
"마, 말도 안 돼! 이 거대한 철문 전체가 아다만티움이잖아?"
대륙 최고의 강도를 지닌 아다만티움.
웬만한 마법이나 오러 따위에는 흠집조차 허용하지 않는 것이 아다만티움이었다.
"어라? 여기에 무언가 쓰여 있는데."
"어디, 봐 봐요."
철문의 중간에는 몇 줄로 작은 글귀가 쓰여 있었다. 세리아는 난생처음 보는 글자에 고개를 갸웃했다. 유라시아 대륙에서 이런 글씨를 쓰는 나라는 본 적이 없었다.
글귀를 본 이안의 입은 세리아와는 다르게 저절로 열렸다.
"……이곳은 라인하르트 제국의 초대 황제의 무덤이다. 만약 그대가 라인하르트 제국의 황족이라면 능히 안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나, 아니라면 발을 뒤로 돌리고 사라져라."
분명히 글귀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그것도 라인하르트 제국의 후작 이상들만 알고 있다는 라인하르트 제국의 언어였다.
"이, 이안? 어떻게 이 언어를 알고 있는 거야."
세리아의 궁금증 속에서도 이안은 아래 마지막 글귀를 읽어 내렸다.
"라인하르트 제국의 황손이여, 환영한다. 이 안으로 들어가려면 이 철문의 오른쪽 하단에 피를 담는 그릇에 자신의 피를 담아라. 그러면 문은 저절로 열릴 것이다."
그걸로 글귀는 끝나 있었다.
이안은 잠시 고민했다. 세리아가 이곳에 있는데 과연 자신이 안으로 들어가야 할까.
그러다 잠시 입술에 미소를 지었다. 이 동굴에 자신이 들어온 것은 인연이라 볼 수 있었다.
인연이 아니라면 어떻게 라인하르트 초대 황제의 무덤에 들어올 수 있겠는가!
"이안, 아무래도 이곳은 거대한 무덤인 것 같아. 억지로 이곳을 들어가려 하면 트랩들 때문에 안 될 거야. 일단 이곳을 빠져나가서 영지로 돌아간다면 트레저 헌터들을 부르는 것이 낫겠어."
"흠."
세리아는 아직까지 이안의 신분을 모르고 있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이 거대한 철문을 뚫고 안으로 들어가면 과연 무엇이 있을까 기대되기도 했지만 호기심 때문에 괜히 위험을 자초할 일도 없었다.
하지만 이안은 세리아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문을 열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무식하게 철문을 부숴서 들어가는 것이 아닌 글귀에 적힌 대로 오른쪽으로 천천히 걸어가 아래쪽을 살폈다.
"뭐 하려고?"
이안은 싱긋 웃어 보이며 이빨로 팔뚝을 물었다. 자신의 애검인 로열은 그때 싸움에서 들고 올 수 없었기에 지금은 검이 없었다.
뚝뚝뚝!
피가 한 방울씩 떨어지며 그릇을 채우기 시작했다.
그릇의 크기가 얼마 크지 않아 몇 번 쏟아 낸 피로 꽉 채워졌다.
이안은 다시 팔을 지혈시키며 그릇을 안에 있는 작은 공간으로 밀어 넣었다.
쿠쿠쿠쿠쿵!
잠시 후, 문이 거대한 괴성과 동시에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열린 것이 사람이 간신히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작은 공간이었다.
"어, 어떻게 이 문이 열리는 거지?"
세리아는 아직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크게 뜨며 이안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분명 이안이 말해 준 글귀에는 라인하르트 황손이 아닌 이상은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서, 설마!'
그렇게 보면 지금까지의 행동이 모두 이해가 갔다.
펠타온 제국의 조국이라곤 하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한 번도 들려 준 적이 없었다. 귀족이었다면 당연시되는 예절 따위도 뭔가 어수룩한 점도 있었다.
"라, 라인하르트 황손?"
너무 놀라서 말도 더듬거리는 세리아.
이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식으로 소개드립니다, 아가씨. 20여 년 전 멸망한 라인하르트 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화이트 폰 이안입니다."
지금까지 웃으며 아파 하던 환자가 맞을까 의심이 되었다.
정중하게 소개를 해 오는 이안의 전신에서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카리스마가 흘렀다. 여자인 세리아는 마치 귀신에 홀린 듯 눈이 풀려 자리에 주저앉았다.
털썩!
그 순간, 그 누구도 이안의 왼쪽 팔뚝에 그려진 여신의 문신이 빛나고 있음을 알아챌 수 없었다.
저벅저벅!
철문을 지나 작은 통로를 지나고 있었지만 부축하고 있던 세리아는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하긴 충격일 것이었다.
자신이 알고 지내고, 유라시아 대륙 변방에 위치한 슈레이더 왕국의, 그것도 남작 영지의 부단장이 사실은 대륙의 4할을 점령하던 대제국의 황태자였다니!
이안이 슬쩍 세리아의 표정을 확인하더니 입을 열었다.
"놀라워요?"
"예? 아, 사, 사실 그래요."
이안이 살짝 웃음을 터트렸다. 세리아의 말투가 또 바뀌어 버린 탓이다. 그리고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 말도 계속해서 더듬거렸다.
"흠! 사실 저도 처음엔 그랬어요. 아무 탈 없이 20년을 보냈는데 뜬금없이 망한 제국의 황태자라니. 마치 마른하늘에 날벼락 맞는 기분이었죠."
"……"
세리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귀를 열고 듣기만 할 뿐.
"크게 신경 쓰지 마세요, 아가씨. 어차피 황태자였다고 해도 크게 변하는 건 없을 거예요. 이미 망해 버린 나라의 황태자였다 한들 그 누가 인정해 주겠어요. 그냥 아까처럼 말 놓으세요."
"정말 그래도……."
"후후! 걱정 말라니까요."
이미 망한 나라 따위의 황손이란 사실은 변방 국가의 귀족 딸만큼의 신분도 되지 못했다.
세리아는 통로를 계속 걷다가 이안에게 물었다.
"그럼 어째서 이런 변방 영지의 부단장 따위나 하고 있는 거야?"
"이곳 이외에는 아는 곳도, 기댈 곳도 없으니까요."
이안은 프로시안 영지와 장안의 숲 이외에는 어딜 떠나 본 적이 없었다. 어떻게 보면 유라시아 대륙에서 이안만의 고향은 프로시안 영지뿐이었다.
세리아가 이안을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불쌍한 사람…….'
"어라?"
그 순간, 이안이 손가락으로 앞쪽을 가리키자 길이 두 갈래가 나왔다.
"어떡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왼쪽과 오른쪽 중 이안은 두 곳을 살펴보더니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왼쪽으로 갔다가 별 탈 없으면 오른쪽으로 가 보죠. 운이 좋으면 나가는 길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초대 황제의 무덤이라는데 궁금하지도 않아? 이안, 너의 조상이잖아."
"무덤은 그대로 보존해야죠. 단순히 호기심 때문에 보고 싶은 맘은 없어요."
이안의 얼굴에는 한 치의 거짓도 보이지 않았다.
세리아는 이안을 부축하며 왼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안이 왼쪽을 먼저 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동굴 입구부터 풍기던 단내가 왼쪽에서 더욱 진하게 풍겼기 때문이다.
"어머? 이 단내를 아까부터 맡았다는 거야?"
코를 찌르는 듯한 향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안의 기준이었고, 세리아 같은 경우는 지금에서야 미약하게 향을 맡았다.
"……거의 다 왔어요. 향이 무척 짙어요."
이안이 말이 끝나자 통로가 점점 넓어지는가 싶더니 이어서 작은 광장이 하나 튀어나왔다. 신기하게도 광장은 구석구석에 라이트 마법이 켜져 있어 사물을 구분하는 데 문제가 없었다.
광장의 맨 뒤에는 이안과 세리아가 들어올 때 보았던 아다만티움으로 이루어진 문과 비슷한 철문이 있었고, 광장의 중심지에는 동굴 입구부터 단내를 풍기던 물체가 있었다.
"이건?"
이안이 다가가서 물체를 확인해 보니 비커 안에 들어 있는 붉은 액체였다. 붉은 액체를 흔들어 보니 빛에 반사되어 금빛으로 번쩍였다.
"여기 뭐라고 적혀 있는데?"
세리아가 비커가 놓여 있던 곳의 먼지를 털어 보니 라인하르트 제국의 문자가 적혀 있었다.
이안이 문자를 확인해 보니 이렇게 적혀 있었다.
알케미온의 피
"아마도…… 이건 드래곤의 피인 것 같아요."
"뭐, 뭐?"
세리아의 눈이 더없이 커졌다.
드래곤! 유라시아 대륙 최강의 생물체!
일만 년의 긴 세월을 살 수 있는 수명에,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10서클을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자들이었다.
드래곤의 피는 이 세상에서 어떤 영약보다도 더욱 귀했다.
고작 한 방울만으로도 무병장수(無病長壽)를 하며, 피부의 노화가 진행되지 않아 죽어도 20대의 얼굴로 죽는다 한다.
만약 드래곤의 피가 수천 년을 살아온 고룡의 것이라면 지금 들고 있는 비커의 양만으로도 당장 이안의 상처를 회복시킬 수 있었다.
"드, 드래곤이 실제로 존재했단 말이야?"
드래곤을 본 자들이 없었다. 설마 있다고 한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사기단들이었다.
설마 전설이나 신화 속에서나 존재하는 드래곤이 존재할 거라고는 막연한 생각조차 안 한 세리아가 펄쩍 뛰었다.
이안은 그대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세리아는 비커를 들어 올리더니 피에 마나 스캔을 걸었다.
"이게 정말 드래곤의 피라면 지금 당장 이안의 내상 정도 따위는 한순간에 고칠 수 있어."
"알아요."
하지만 드래곤의 피는 병만 고치겠는가.
아마 지금 당장 마신다면 심후한 공력을 단번에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통제할 힘이 없었다.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적어도 초절정 급 이상으로 내공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이었다.
마나 스캔을 사용한 세리아가 잠시 후 경악스런 표정을 지었다.
"엄청난 마나! 이, 이 대륙에서 이것보다 강한 마나를 지닌 것은 본 적이 없어."
플래임 플라워를 볼 때만 해도 손도 댈 수 없을 정도의 화기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플래임 플라워 따위는 드래곤의 피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었다.
세리아도 마법사로서 탐이 나는 물건이긴 했지만 지금 당장에는 이안의 몸을 고치는 게 우선이었다.
이안은 비커를 받아 들며 자신에게 물었다.
'제대로 다룰 수나 있을까?'
평소의 몸 상태라고 해도 자신할 수 없다. 지금같이 다친 상태라면 과연 얼마만큼의 효과를 볼 수 있을지, 과연 자신의 의도대로 내공이 움직여 줄지 미지수였다.
"아가씨, 지금부터 제 몸에 손을 대지 마세요."
세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이 비커에 담겨 있는 피를 단숨에 삼켜 버렸다.
꿀꺽―!
드래곤의 피는 사람 피와는 달리 강한 점도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한번 쏟아진 피는 입 안에 전부 들어가야만 했다.
비커의 반 정도를 남겨 두려고 했던 이안은 눈을 크게 뜨며 다시 뱉어 내려 했지만 마치 식도에 걸린 듯 움직이지를 않았다.
"흡!"
마치 목구멍이 타들어 가는 느낌이었다.
이안은 곧바로 가부좌를 틀고 만상귀일신공을 운용했다. 만상귀일신공의 패도적인 느낌이 강한 내공이라면 지금 당장에 드래곤의 피를 제압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의 생각대로 드래곤의 피는 곧바로 식도를 타고 내려가 하단전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커헉!"
콰앙!
만상귀일신공에게 제압당한 것이 아니라 마치 일부러 움직여 준 듯했다. 곧바로 이안의 내공을 흩트려 버림과 동시에 전신 이곳저곳을 무작정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몸에 주는 타격이 엄청났다. 꽉 깨문 입술에서 검붉은 피가 쏟아지는 것은 물론이고, 그동안에 쌓여 있던 탁기가 모공을 통해 빠져나왔다.
그 탁기는 엄청난 악취를 풍기며 이안의 옷을 물들여 갔다.
'제압할 수 없을 정도로 속도가 너무 빨라! 어떻게 해야 하지? 아, 혹시?'
이안은 내공보다는 지금 당장 움직일 수 있는 한음지기를 모두 끌어들여 드래곤의 피를 얼려 버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퍼져 나가던 드래곤의 피의 속도가 점점 디뎌지기 시작했다.
'일단 속도에 대한 제어는 성공이다. 그럼 내공으로 순간에 태워 버려야 한다.'
이안은 잃어버린 열양지기가 새삼 아쉬웠다.
드래곤의 피를 모두 섭취할 수 없기에 일부를 태워 버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열양지기가 아닌 이상은 쉽게 드래곤의 피가 태워지지 않았다.
'이, 이놈들!'
드래곤의 피가 움직일 때마다 모든 상처가 깨끗이 나았다. 그것은 좋은 일일지 모르나 예전 용아천에서 귀창과의 싸움 이후 닫혀 버린 임독양맥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임독양맥은 잘못 건드렸다가는 목숨이 위험해질 수도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드래곤의 피는 이미 이안의 손에서 벗어나 버린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무작정 돌격해 버렸다.
"끄으으윽!"
정신의 끈을 놓지 않고 버티는 것이 엄청난 고통이었다.
하지만 이안도 알고 있었다. 이곳에서 정신의 끈을 놓는다면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좋아! 네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도록 이곳에서 도와주마. 하지만! 네가 모두 움직였을 때는 반드시 태워 버리리라.'
이안이 드래곤의 피를 막고 있던 내공을 한순간에 뭉쳐 놓았다. 놈들이 모두 활기를 치고 돌아다니며 지쳐 버렸을 때, 단숨에 방심한 틈을 타 제압하려는 것이다.
드래곤의 피는 이안의 머릿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었기에 당장에 임독양맥을 뚫으며 거침없이 세맥들을 지나쳐 버렸다.
임독양맥이 뚫리고 곧바로 드래곤의 피는 생사현관과 십이경맥을 차례대로 공략하기 시작했다.
십이경맥은 이전에 이미 상처를 입은 곳이었던 탓일까?
5년이나 지나야 간신히 치료가 될 것 같은 십이경맥이 마치 포옹하듯 드래곤의 피가 지나가는 길을 열어 주었다.
그렇게 되자 십이경맥이 순식간에 치료가 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생사현관이 드래곤의 피에 밀려 타통되는 고통을 전신으로 느껴야 했다.
'이 망할 놈! 좋아, 지금 당장 움직일 곳도 없겠다, 모두 한순간에 덮쳐 주지.'
이안은 그러면서 단전에 두었던 내공과 한음지기를 단숨에 풀어 버려서, 일단 한음지기로 드래곤의 피를 얼려 버렸다.
하지만 얼었다고 보기엔 힘들었다. 속도가 잠시 늦춰진 것일 뿐, 전신에 느껴지는 고통은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해도 그 정도의 시간은 이안이 내공이 드래곤의 피를 순식간에 제압하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이안의 전신을 돌아다닌 드래곤의 피는 방심했던 탓인지 내공에 밀려 하단전으로 움직여 버렸다. 이안은 처음과 같이 놈들을 과소평가하는 실수를 막기 위해 하단전에서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길 모두를 내공으로 막았다.
'후후! 이놈, 어떠냐?'
이안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입에 미소를 걸었다.
드래곤의 피는 제압당한 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마치 생물체처럼 빠져나갈 길을 찾아보려 했지만 헛수고였다.
이안은 급히 내공으로 드래곤의 피들을 태워 버리기 시작했다.
치이이이익―!
정말, 이안의 귀에 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타는 소리라기보단 드래곤의 피들이 지르는 비명 같은 소리였다.
'어라?'
그때 이안이 고개를 잠시 갸웃거렸다.
드래곤의 피들이 더 이상 탈 수 없었는지 그대로 이안의 내공과 융합되는 현상이 일어났다.
'이, 이런! 이게 무슨 현상이지? 크으윽!'
마치 마지막 발악이라고 느껴졌다.
이안은 전신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가부좌가 저절로 풀어지며 그대로 자리에 드러누웠다.
"크아아아악!"
"이, 이안?"
세리아가 갑자기 다가와 이안의 얼굴을 살피자, 이안의 눈은 패색적인 기도를 풍겼다. 제멋대로 기운이 날뛰어 통제를 할 수가 없었다.
이안은 처절하게 비명 소리를 내질렀다.
'이놈, 오히려 내가 방심하고 있길 바라고 있던 것이냐!'
드래곤의 피는 이안에게 자신이 잡힐 구실을 만들어 내기 위하여 일부러 '방심했던 척'을 했던 것일 뿐.
이안은 물고기처럼 그것이 설마 떡밥인 줄도 모르고 덥석 물고 만 것이다.
'마, 망할!'
이안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울컥 쏟아지며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그 순간.
이안의 왼쪽 팔뚝의 여신이 금빛으로 번쩍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