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0장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
욘지는 냉정한 기사다.
동료의 죽음에 눈 한 번 찡그리지 않을 냉혈한은 아니어도 자신의 본분이 무엇인지는 망각하지 않는다.
헤일론 백작의 천 명 군대가 욘지 하나가 빠져나가는 것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는 설사 마스터라 하여도 들을 수 없을 정도로 멀리까지 몸을 움츠린 채 이동했다.
파바밧―!
은밀했던 그의 움직임도 어느 정도 지나자, 폭발적으로 마나를 전신으로 돌리며 도주하기 시작했다.
'일단 토벌대가 있는 곳으로…….'
한밤중이긴 하지만 익스퍼트에 오른 달인이기 때문에 길을 찾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다. 전에도 이미 성을 한 번 들렀다 온 적이 있는 그다. 이미 그때 꼼꼼하게 길을 외워 두고 있었다.
숲을 내달리는 그의 눈에 슬픔이 비쳤다. 만약 지금이 전시 중이 아니었다면 눈물을 흘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헤일론 백자아악! 반드시 이 복수를 갚아 줄 것이오!'
이런 전시라면 자신들을 죽이려 하던 매복 군대가 누구인지는 눈치 챌 수 있다.
애초에 항복이란 없었다. 그것은 보이기 위한 속임수였고, 안심하게 만들려는 의도였다.
욘지는 앞에서 먼저 떠난 수하들과 병사들의 죽는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그리고 아직도 귀에 생생하게 들리는 비명 소리는 평생 잊히지 않을 것이었다.
'아아, 단장님. 그렇게 가실 분이 아니건만.'
기사도를 운운하셨지만, 욘지가 도망갈 시간을 벌어 준 것뿐이었다.
'크윽!'
욘지가 피가 나올 정도로 주먹을 세게 쥐었다.
오늘은 그에게 있어 가장 치욕스런 날이었고, 가장 슬픈 날이었다.
어둠을 꿰뚫는 백여 개의 눈.
세리아는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진 참극을 보며 할 말을 잃었다.
누구보다 의심치 않았던 그로퍼 백작이 헤일론 백작에게 단숨에 무너지는 것을! 그리고 많은 기사와 병사들의 비명 소리를!
그것을 똑똑히 보고 들었다.
'설마 헤일론 백작이 마스터의 경지에 들어섰을 줄이야!'
대외적으로 그의 실력은 익스퍼트 최상급의 경지였다.
슈레이더 왕국의 마스터가 될 실력자로 손꼽히는 인재였으나 벌써 마스터가 돼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만약 그의 옆모습을 보지 못했다면 영지군이 누구 손에 죽었는지도 못 알아볼 뻔했다.
"아가씨, 적은 수백의 군대입니다. 일단 자리를 피하고 보시지요. 적들 중에 마스터의 경지가 있다면 우리를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아, 알았어."
세리아는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참극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자신에게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수백 명을 향해 50명이 달려들어 봤자 그것은 계란을 바위에 던진 거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자신을 위로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더라면 더욱 화가 치밀었을지도 모르니까…….
"음?!"
그때 옆에 있던 기사 하나가 눈을 찡그렸다.
"무슨 일이야?"
기사가 경계심을 갖춘 눈초리로 말했다.
"큰일입니다. 저희 위치가 발각된 모양입니다. 약 50명 정도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방향은요?"
"동쪽입니다!"
"좋아, 지금은 일단 토벌군이 있던 방향으로 도주하는 게 좋겠어. 신속히 움직여!"
그녀는 침착하게 대응하며 스스로에게 윈드 워크를 걸어 빠르게 이동해 나갔다.
50명 전원이 웨폰 오러 중급에 이른 강자들이었다.
게다가 데려온 기사의 경지도 익스퍼트 초급에 오른 엄청난 실력자였다. 그들은 아무 흔적 없이 왔을 때처럼 돌아갈 때도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세리아가 뒤쪽을 살짝 스쳐보자 발자국 소리 하나 없이 움직이는 50여 명이 보였다. 자신들을 뒤쫓아 오는 이들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뛰었을까.
"하아! 하아!"
숨이 조금씩 벅차오른다고 생각이 들었을 때, 또 다른 무리들이 나타나 그들의 앞을 막았다.
자신들을 쫓아오는 이들이 100여 명이 넘어섰을 때, 세리아의 뇌리를 스치는 단 하나의 생각.
'아, 아뿔싸! 이들은 우리를 몰이하는 거로구나!'
사냥이라는 것이다.
인간들인 자신을 고작 사냥 대상으로만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들은 쫓기는 산짐승처럼 움직였다.
"틀렸어! 모두들 잘 들어. 여기서 도주하려면 토벌군이 있는 방향으로 무작정 퇴로를 뚫어야 해."
그를 수행하는 기사가 말한다.
"그렇다면 저들의 공격을 받을 겁니다."
"어차피 저들도 우리가 설마 공격하리라곤 예상치 못했을 테니 방심할 거야. 지금 우리는 저들의 생각처럼 사냥을 당하는 거나 다름없어. 무리를 해서라도 뚫어야 해!"
"아가씨의 말씀 들었나? 퇴로를 뚫는다. 방향은 토벌군이 있는 동쪽이다!"
그들은 죄다 숨겨 두었던 무기를 서서히 뽑아내며 곧바로 달려들었다.
"매직 애로우(Magic Arrow)!"
퍼퍼펑―!
세리아의 앙칼진 목소리가 숲을 울리자, 열 발이 넘는 빛의 화살들이 적들의 머리를 공격했다.
"으아악!"
"마법사가 숨어 있다! 마법사부터 잡아라."
"이놈들, 어딜!"
그들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세리아를 지키는 기사가 경계의 눈초리를 번뜩거리며 그들을 공격해 나갔다.
"아가씨를 지켜라! 아가씨부터 지켜 내라!"
"우와아아!"
세리아의 눈썹이 역팔자로 휘어졌다.
웨폰 오러 중급의 경지들이니 능히 싸움에도 능수능란한 게 맞는 일이었다. 세리아가 이끄는 50여 명이 한꺼번에 움직이자 적들은 마치 겁에 질린 듯 퇴로를 쉽게 열어 주었다.
"뭐, 뭐지? 이 허전한 기분은……."
퇴로가 열리자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세리아는 기사가 팔을 거세게 잡고 이끌자 엉겁결에 끌려가듯이 움직였다.
"아가씨, 빨리 움직여야 합니다!"
"아, 알았어."
타타탁!
화르륵!
세리아의 50명 부대가 완벽하게 퇴로를 뚫었다고 생각이 들었을 때 숲에서 수많은 불이 켜졌다. 병사 몇몇이 횃불을 들고 포위하고 있던 것이다.
"헉!"
"이런!"
사방을 둘러보자 최소 500여 명이 넘는 병사들이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도주할 때 전부 이곳까지 이동해서 기다리고 있었단 말인가.'
앞이 캄캄했다. 용빼는 재주가 있지 않는 이상은 더 이상 도주할 길이 없었다.
그 순간, 세리아의 앞으로 중년의 남성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세리아를 감싼 병사들이 그 남성과 마주하는 것 자체만으로 몸을 심하게 떨기 시작했다.
"헤일론 백작!"
세리아가 경악을 하며 경멸하듯이 노려보기 시작했다.
헤일론 백작이 들고 있는 검에서는 아직도 피가 사라지지 않아 짙은 혈향을 풍겼다.
놀라운 일이었다. 그와 10미터가 넘게 떨어져 있건만 고작 검에 묻은 피의 냄새가 이곳까지 풍길 줄이야!
모든 관심이 백작에게 쏠린 순간, 백작의 무거운 입이 열렸다.
"허어! 실로 대단하기 그지없는 미모로다."
아무리 이성과 본성을 제어하는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다고 한들 세리아의 미모는 그것을 뛰어넘고도 남았다.
주위는 이미 음산하기 짝이 없는 깊은 밤에 접어들었지만 세리아의 용모는 빼어나기 그지없었으니, 백작의 눈에 음심이 가득했다.
"다, 당신이 어째서 이곳에 있는 거죠?"
가시가 묻어나는 말투였다.
"단순한 호기심…… 그리고 나를 증명하는 것!"
세리아의 용모가 얼마나 빼어난지 보고 싶었고, 마스터에 오른 자신이 얼마나 강한지 알고 싶은 것이다.
익스퍼트 최상급 경지의 기사와의 목숨을 건 대결로 말이다.
헤일론 백작은 세리아 일행 50여 명을 일일이 살펴보더니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아쉽게도 그가 안 보이는군."
"누구를 말하는 거죠?"
"왜 있잖은가? 프로시안 영지의 최고 실력자."
헤일론 백작은 자신의 실력을 숨기고 있는 기사가 있을 거라 예상했다. 확실히 그런 기사가 숨어 있긴 했다.
웨폰 오러 중급으로 철저하게 자신을 숨긴다 하지만 세리아의 옆에 붙어 있는 기사의 경지는 익스퍼트 초급.
최상급의 경지를 가진 기사는 보이지 않았다.
"이안…… 경을 말씀하시는 거로군요."
"아, 그랬지. 그 기사 이름이 도저히 기억이 나지 않더군."
"저희들을 어찌할 생각이죠?"
"글쎄……."
짓궂은 표정을 지어 보이는 헤일론 백작.
그가 쥐락펴락하듯 세리아의 목숨이 걸려 있었다. 세리아뿐만 아니라 프로시안 영지민 전체의 목숨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순수하게 잡혀 줄 생각은 없나?"
"없어요."
일언지하에 거절해 버리는 세리아.
"허어! 단 한순간도 생각하지 않고? 지금 그 병력으로 도망이라도 치시겠다?! 순수하게 잡혀 준다면 살려 줄 용의도 있거늘."
오래전부터 백작을 믿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가 집무를 보는 동안 백작의 행동이 어땠는지 낱낱이 알고 있었다. 순수하게 잡힌다면 목숨을 건진다고 과연 믿을 수 있을까.
아까부터 바라본 백작의 눈빛이 마치 몸에 지렁이가 기어가는 듯했다.
자신의 육감이 경고하고 있다. 이런 자는 믿지 말라고!
세리아를 지키는 기사가 눈을 번뜩이더니 크게 외쳤다.
"제군들! 아가씨의 진심을 알았다면 전력으로 아가씨가 이동할 퇴로를 만든다! 죽어도, 설사 원귀가 된다고 하더라도 안전하게 이동해야 한다!"
그의 검에서 오러가 번뜩이며 빛났다. 모든 이목이 그에게 쏠린 순간, 백작의 검 또한 빠르게 움직였다.
파밧―!
백작의 팔이 움직였다 싶은 순간 그 기사의 목을 오러가 통과하고 있었다.
츄파아앗―!
마치 시간이 정지된 듯한 기분이다.
"어? 어?"
기사의 다급한 목소리. 그리고 비스듬히 목이 떨어져 나갔다.
쿵!
육중한 무게의 머리가 바닥으로 떨어지자 장내는 조용해졌다. 뭐가 움직였는지조차 아무도 볼 수 없었다. 다만 헤일론 백작이 기사를 죽였다는 것만 추측할 수 있었다.
"대, 대체 이게……!"
말로만 듣던 마스터의 신위.
하지만 익스퍼트 초급에 오른 기사의 눈에도 잡히지 않는 빠른 속도로 오러를 날려 목을 베어 버리다니!
백작의 병사들이나 기사들도 눈을 화등잔만 하게 뜬 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더 이상 움직이면 모두 죽는다."
백작의 입에서 나온 소리에 모든 자들이 몸을 떨었다.
특히 세리아는 입술을 꼬옥 깨물었다.
그때 갑자기 병사 하나가 세리아에게 다가왔다.
"아가씨, 실례를 용서하십시오!"
"꺄아악!"
세리아의 몸이 갑자기 붕 떴다. 그 병사는 세리아를 들쳐 업고 그대로 냅다 뛰기 시작했다.
"기사님 말 못 들었냐! 우리의 임무는 아가씨를 안전하게 모셔다 드리는 것이다. 어차피 이판사판, 죽을 거 멋지게 한번 영웅이 돼 보고 죽자!"
"저, 저놈이!"
병사들이 세리아를 들쳐 업은 남자를 경이로운 눈빛으로 바라보다 황급히 쫓았다.
"내가 아가씨를 모실 테니 너희들은 길을 뚫어!"
다급한 상황이었다. 백작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잠시 당황하고, 그들을 둘러싼 병사들도 검에 손을 대지도 않았다.
슈악―!
"놈들이 도망간다! 여자만 사로잡고 모두 죽여도 된다! 여자의 털끝 하나 다치게 만드는 놈은 내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백작은 기사를 죽일 때와 같은 수법으로 병사의 허벅지를 양단시켜 버리고 외쳤다. 아무리 마스터라고 한들 50명이나 되는 놈에게 오러를 날릴 마나를 보유하진 않았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로퍼와의 결전 때문에 상당히 많은 마나를 소모한 뒤였다.
"우와아아아!"
세리아는 이 광경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쏟았다.
'나 때문에…….'
기사가 죽고 병사들이 허무하게 죽어 나갔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을 살리기 위한 것이었다.
그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귀족가의 딸이기 때문에!
"아가씨, 원귀가 되더라도 지켜 드리겠습니다!"
"설사 여기서 죽는다고 하더라도 후회는 없습니다!"
병사들 모두가 그렇게 한마디씩 던져 놓고는 동귀어진 수법으로 매달렸다. 옆구리를 창에 찔리고 화살이 등에 박혀도 죽기 직전까지 창검을 휘둘렀다.
그들의 눈은 핏발이 서서 마치 악귀처럼 보였다.
하지만 애초에 50명이 500명이 넘는 견고한 포위망을 뚫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크악!"
"크윽!"
세리아의 눈에는 속절없이 쓰러지는 50여 명의 병사들이 하나하나 보였다.
'이번에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
풀썩!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주저앉은 세리아의 주위로 50여 명의 병사들이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었다.
백작이 다가와 혀를 끌끌 찼다.
"쯧쯧, 그러게 얌전하게 잡혀 주었다면 이렇게 죽지도 않았을 터인데 말이야."
"백작! 당신, 가만 안 둘 거야!"
이를 가는 세리아를 보며 백작이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한 걸음 더 가깝게 다가왔다.
"오호라! 가만 안 두겠다면 어쩔 것인가?"
파밧―!
세리아의 주위에서 마나 서클이 돌기 시작했다.
세리아와 백작의 거리는 불과 5미터!
"파이어 오버(Fire Over)!"
그녀의 작은 손에서 거대한 마나가 움직였다. 그 마나와 서클이 서로 공명을 일으키더니 백작의 주위에서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쿠콰콰콰쾅!
4서클 마법사들의 위력은 전쟁에서 엄청난 힘을 보여 준다. 지금껏 캐스팅을 읊으며 때를 기다렸던 세리아였다.
마법이 터진 거리가 불과 5미터밖에 되지 않아 세리아 자신도 고스란히 타격을 입을 테지만 그것을 문제 삼진 않았다.
5미터 앞에서 폭발시키면 아무리 마스터라고 하여도 방심하고 있을 터, 충분히 타격을 줬을 거라 장담했다.
"콜록! 콜록!"
세리아가 강력한 마법에서 얼굴 곳곳이 그을린 채 바깥으로 나왔다. 그 안에는 엄청난 먼지 구름이 사방 2미터에 뻗어 있어 안을 들여다보기가 어려웠다.
그곳을 빠져나온 세리아는 곧바로 쓰러졌다. 모든 마나를 퍼부은 만큼 그녀의 몸도 정상은 아니었다.
"헉! 헉! 헉!"
거친 숨소리로 가슴이 오르락내리락을 반복했다.
세리아의 강력한 힘을 보았기 때문일까.
또 무언가 숨기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라 기사나 병사들이 쉽사리 다가오지 못하고 있었다.
먼지 구름이 사라지고 한 인영이 그 중간에 서 있었다.
언제 들었는지 모를 검 등으로 철저하게 중요한 부분을 가리고 검막을 치고 있었다.
마법에도 전혀 타격을 입지 않은 모습.
옷의 어느 정도만 타들어 갔을 뿐 얼굴이나 어디를 보아도 정면으로 4서클 화염계 마법을 맞은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숨겨 둔 한 수가 있었구나!"
백작의 표정이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졌다. 마법을 사용하기 전 일어나는 마나를 느끼지 못했더라면 그대로 허용하고 말았을 것이다.
"크으! 이년을 잡아 포박하라."
백작의 눈에선 음심이 사라지고 없었다.
설마 자신이 이런 식으로 공격을 당할 줄 상상이나 했겠는가! 게다가 세리아가 4서클 마법사임은 예상 밖의 일이었다.
백작의 말에 병사들이 다가와 세리아를 줄로 동여매었다.
"으음!"
그 순간, 백작의 눈이 갑자기 아무도 없는 허공으로 치켜 올라갔다. 백작이 바라보고 있는 곳은 달빛조차 가로막은 나뭇잎들의 더 위인 허공. 지상으로부터 수십 미터는 떨어져 있는 하늘이었다.
그곳에서 작은 점이 자신의 눈에 점점 크게 보이기 시작했다.
"뭐지?"
백작이 난데없이 허공을 바라보고 있자 그의 주변으로 병사와 기사들도 눈을 찡그리며 보기 시작했다. 그들의 눈에도 허공의 작은 점이 보였다.
"새라도 되는 건가?"
"글쎄."
병사들이 서로 묻고 답하며 궁금증을 자아 갈 때, 백작의 눈이 두 배로 커졌다.
수십 미터 허공에서는 사람이 내려오고 있었다. 그것도 자신의 머리 위로…….
"사람이다!"
누군가가 소리를 내질렀다.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람은 실낱같이 오러가 날리는 칼을 뽑아 들더니 땅 쪽으로 가리켰다.
그리고 외치는 남자의 소리!
"파지풍룡(破地風龍)!"
구하천풍검법(九河天風劍法)의 제2초식, 파지풍룡이 남자의 손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 * *
콰콰콰쾅!
우르르릉!
그것은 차라리 드래곤의 현신이라고 해도 믿을 만한 광경이었다. 그 남자의 입에서 커다란 외침이 들렸을 때는 검에서 무지막지한 하늘색 용이 튀어나와 땅을 갈라놓았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남자의 사방으로 15미터 내의 땅이 쩌억 갈라짐과 동시에 주변에 엄습하지 못할 정도로 한기가 서렸다.
"크으윽!"
백작의 얼굴이 아까보다도 더욱 일그러졌다. 만약 자신이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지 않아 한서불침(寒署不侵)이 되지 않았다면 당장에 얼어붙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네, 네놈은?"
헤일론 백작은 자신의 눈앞에 있는 남자로부터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마나의 양을 보자면 고작 익스퍼트 최상급에 불과해 보이지만 풍기는 기세로 보아 마스터에 이른 자신에게 그리 뒤질 게 없어 보였다.
'이놈이로군! 익스퍼트 최상급의 프로시안 최고의 기사!'
익스퍼트 최상급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강해 보였다. 방금 땅을 가르는 엄청난 검기도 마스터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특히 무엇보다 경악스러운 것은 자신의 머리 꼭대기까지 올라가 있는 것도 간신히 알 수 있었다.
허공에서 바람에 날리는 옷의 소리가 아니었다면 자신의 머리에 검이 떨어질 때까지 모를 뻔했다.
"생각보다 젊군."
이제 갓 20세에 접어들어 보이지만 위압적인 외모였다.
얼굴은 마치 여신이 깎아 만든 듯해 보였지만, 어딘가 모르게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남작은 이안의 얼굴을 보며 한마디 내뱉었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은 얼굴이로군."
이안은 세리아가 포박되어 있는 것을 보며 살짝 입을 열었다.
"만약 아가씨의 일이 아니었다면 지금 당장 당신의 목으로 칼을 휘두를 것이었습니다."
"그런가? 그런데 참으로 절묘한 타이밍이로군. 우리가 여기 있는 걸, 우리가 여기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어떻게 알았나?"
"헤일론 백작께서는 참으로 대단한 분을 건드리셨더군요."
눈앞에서 로이니스의 얼굴이 떠나질 않는다.
만약 도망치는 욘지를 제때 발견하지 못했다면 이곳까지 오는 것도 상당히 애를 먹었을 일이었다.
"음?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가는데 설명을 해 주겠나?"
"아뇨. 지금 당장은…… 입이 아니라 검으로 말해 드려야겠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검을 강하게 쥐어 잡았다.
"으하하하! 정말 괘씸한 친구로군! 좋아. 그렇다면 대답은 후에 들어 보도록 하지."
호탕하게 웃은 백작 또한 검에 힘을 주었다. 상대는 자신의 이목을 숨기고 이곳까지 숨어들어 온 자.
절대 방심하지 않았다.
먼저 움직인 것은 이안이었다.
이안의 신형이 갑자기 허공에 잠깐 뜬다고 생각했을 때 이미 헤일론 백작의 눈앞으로 횡으로 검을 베었다.
슈슉! 슈슈슉―!
헤일론 백작이 눈을 크게 뜨며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나자 이안은 계속해서 여세를 몰아갔다.
'상대는 초절정의 고수다! 지금의 내공 수준으로는 턱도 없어. 당장에 박살 내지 않으면 위험하다!'
초절정 고수를 꺾고 도주하는 것도 용이하지 못하다. 이미 자신은 이곳까지 십이경맥의 모든 고통을 참으며 빙허임풍을 펼쳤다. 체력도 체력이거니와 내공, 그리고 십이경맥의 손상 때문에 제대로 운신하기가 힘들었다.
타타타탕!
쿠와앙!
검과 검이 격돌했다.
둘 다 마나를 잔뜩 머금었기에 부딪치는 곳으로부터 파장의 위력이 3미터를 뒤흔들었다.
백작은 식은땀이 흘렀다. 자신과 싸우고 있는 이 청년이 정말 익스퍼트 최상급이 맞기는 한 것인가!
이것은 마치 마스터와의 싸움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계속해서 오러로 부딪친다면 이길 수 있다고 장담할 순 없었다.
"좋구나! 내가 원하던 것은 이것이다!"
백작은 그 말과 함께 자신의 모든 마나를 폭발적으로 검에 운용했다. 곧이어 백작의 검에서 또 하나의 검, 오러 블레이드가 솟구치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격렬한 마나 파장이 병사들에게도 뚜렷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오오오!"
기사들 모두가 눈에 이채를 발하며 바라봤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주인인 백작이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다는 것을 몰랐던 그들이다. 그런데 방금 전부터 선보인 오러 블레이드는 경외심과 존경심을 갖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안의 얼굴이 눈에 띌 정도로 어두워졌다.
'음!'
만약 상대가 검강으로 나온다면 자신의 검기로 승부를 걸 자신이 없었다.
'초절정으로 올랐을 때의 그 깨달음은 아직도 잊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충분히 가능성은 있어.'
이안의 검에서도 눈부시게 푸르스름한 기운이 맺혔다. 하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고 거대한 파동을 이끄는 작은 검이 하나 더 튀어나왔다.
오러 블레이드.
하지만 이것은 익스퍼트 최상급, 절정에서도 아주 극소수만이 펼칠 수 있는 불안전한 검강이었다.
검강보다 위력도 약할뿐더러 내공을 많이 잡아먹으니 별 소용이 없었다.
"허헉! 사, 상대도 마스터란 말인가!"
"아니! 아니다. 오러 블레이드를 자세히 봐라. 심하게 떨림을 보이는 것으로 보아 불완전한 오러 블레이드다!"
기사들이라고 못 알아보는 것은 아니다. 불완전한 검강은 자세히 보면 중간에 균열이 가 있고 심하게 떨고 있었다.
이안의 눈빛 또한 흔들렸다. 검강을 펼치는 것만으로 십이경맥이 찢어질 듯 아파 오기 시작했다. 최대한 만상귀일신공을 펼쳐 고통을 잊으려 했지만 쉬운 것은 아니었다.
'빨리 승부를 봐야 한다!'
이안이 무거운 발걸음을 떼기 전에 먼저 백작의 검이 날아왔다. 오러 블레이드 때문에 늘어난 거리. 그들은 지척에서 싸우는 대신 서로 3미터 정도의 거리를 둔 채 격돌하기 시작했다.
마치 언뜻 보면 둘이 춤사위를 펼치는 듯한 모습.
하지만 기사들의 손아귀에는 땀이 흥건하게 배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큭!"
검강과 부딪히니 손아귀가 찢어질 듯 아파 왔다.
"호오!"
백작이 놀랍다는 듯 이안의 검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처음에 봤을 땐 못 알아봤는데 검이 상당히 견고했다.
필시 명검임에 분명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불안전한 검강 따위를 검이 받아 낼 리가 없었다. 마나의 운용 또한 불안전하거늘 다른 검이었다면 깨지고도 남았을 것이었다.
이안도 이 점은 확실히 깨닫고 있었다.
'만약 로열이 아니었다면 검강과 부딪히고 난 뒤에 바로 깨질 것이야!'
로열은 레나가 붙여 준 소드 오브 로열에서 로열만 살짝 떼어 부르는 이름이었다.
타앙!
"젠장!"
이안이 이제 방어하기보다는 피하는 쪽으로 돌렸다. 더 이상 검강과 맞서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백작은 이안의 눈을 보고 간담이 서늘해졌다.
'마치 무엇을 노리는 듯한 눈빛이다!'
심장을 찌르기 위한 비장의 한 수를 위해 지금 자신의 공격을 견뎌 내는 것처럼 보인다. 그 증거로 처음과 달리 눈이 훨씬 매서워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놈!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가 본데, 마지막 기술조차 펼칠 수 없게 목을 잘라 주마!'
슈우욱!
백작의 검이 파란 궤적을 그리며 이안의 목을 향해 날아갔다.
'기회!'
이안은 헤일론 백작이 팔을 크게 휘두르는 것을 보며 눈을 빛냈다.
그리고 외치는 한마디.
"일섬검(一纖劍)!"
만상귀일검법의 제1초식, 일섬검이 펼쳐졌다.
세리아의 눈이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백작과 이안의 싸움을 눈이 있다면 볼 수 있고, 귀가 있다면 들을 수 있다.
포박되어 있지만 눈과 귀를 가린 것은 아니었다.
'단신으로 500명의 병사가 넘는 곳으로 단숨에 날아오다니!'
아무리 그래도 제정신으로 할 짓은 아니었다.
이안이 아무리 프로시안에서 최고라 하더라도 상대는 마스터다.
대륙십강에 오른 인물들도 죄다 마스터 최상급의 경지, 그리고 단 한 명만이 그랜드 마스터 급이었다.
소드 마스터에 오른다면 유라시아 대륙백강 정도의 실력에는 들을 수 있다. 천하에 백작보다 강한 사람이 백 명 이상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대체 왜! 왜 나를 위해 이렇게…….'
스스로 물어보고 답을 구하는 세리아.
그녀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동귀어진으로 달려드는 이안을 바라보았다.
츄파아앗―!
백작의 눈이 두 배는 확장되어졌다.
마스터의 경지에 올라 얻은 초인적인 반사신경으로 몸을 돌렸으나 옆구리에 검이 틀어박혀 있었다. 실로 무서운 쾌검이었다.
자신의 모든 방어는 뒤로한 채 공격만을 위한 검술!
동귀어진이 아니라면 쉽게 펼칠 수 없었다.
이안도 무사한 것은 아니었다.
"커헉!"
목으로 날아오는 것을 알고서 일섬검으로 달려들었기에 간신히 피할 수는 있었으나 심장 근처를 완벽하게 꿰뚫렸다. 만약 조금만 더 느렸다면? 심장에 검이 박힌 채로 그대로 싸늘한 주검이 되었을 것이다.
이안은 눈을 부릅뜨고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그때였다. 기사 몇몇이 포박당해 있는 세리아의 목을 향해 검을 대었다. 살짝 목에 상처가 생기며 핏물이 주륵 흘렀다.
"이놈, 백작 각하에게서 썩 물러나지 않을까! 지금 당장 검을 버리지 않는다면 이년의 목숨을 끊어 버리겠다!"
"후후후!"
이안이 마치 괴인처럼 실소를 머금었다. 입에서는 피가 왈칵 쏟아져 내리는 데다가 꿰뚫린 부분에서 출혈이 일어났다.
눈앞이 흐린 것이 곧 있으면 과다 출혈로 죽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 이놈이! 당장 검을 버려라!"
그래도 이안이 검을 버리지 않자 기사가 호통을 쳤다.
하지만 그런 기사들도 썩 당당한 표정은 아니었다. 여인을 핍박하는 것은 기사도의 예가 아니었다.
쨍그랑!
이안은 곧바로 검을 떨어뜨렸다.
자기가 원해서 떨어뜨린 것이 아닌 몸에 힘이 빠지니 저절로 손아귀에서 검이 떨어진 것이다.
이안은 그 순간 청명심법으로 모든 자신의 내공을 숨기고 만상귀일신공을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단전에 있는 내공을 순식간에 폭발시켰다. 십이경맥이 찢어지는 고통을 보이고 피가 더욱 분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하지만 내공 운용을 멈추지 않았다. 가까스로 모인 내공 한 줌.
이안의 입가에 미소가 걸쳐졌다. 그러다 한순간 오른손을 살짝 들더니 나직이 외쳤다.
"구하천풍장."
순간 손에서 연보랏빛이 나더니 9개의 거대한 돌풍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바람은 각각 헤일론 백작, 세리아를 잡고 있는 기사들, 마지막으로 주변에 있는 땅을 겨냥해서였다.
쿠콰콰쾅!
"꺄아악!"
세리아는 자신의 옆에서 얼굴이 그대로 터져 버리는 기사를 보며 숨을 꼴깍 삼켰다. 무언가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고 난 후, 한 치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먼지가 일어났다.
그 순간, 자신의 팔을 잡는 강력한 힘.
"어? 어?"
반항도 할 수 없어 끌려 나오듯이 한 세리아는 자신의 팔을 잡은 상대를 보며 한순간 안심할 수 있었다.
이안이었다.
이안은 폭발을 만들어 두고 병사들과 기사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백작 각하께서 크게 다치셨다. 어서 모셔라!"
병사들은 물론 기사들까지 자리를 뜨며 백작이 있는 곳으로 달려들었다. 그렇게 이안과 세리아의 포위망이 사라지자 이안은 지체 없이 그곳으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그들을 감시하는 것은 병사들뿐만이 아니었다. 몇몇 눈치 있는 기사들이 도망치는 이안을 바라봤다.
"흉수들이 도망친다! 어서 잡아라!"
"반드시 살려서 잡아내라!"
세리아는 자신의 옆에서 뛰고 있는 이안의 창백한 모습을 안쓰럽게 바라봤다.
"괜찮아요?"
"괘, 괜찮아요, 아가씨."
입고 있던 모든 옷으로 상처를 동여매었다. 그리고 이안은 순식간에 혈도를 점해서 더 이상의 출혈을 막아 냈다.
"큭!"
순간 뒤를 바라본 이안은 크게 신음을 삼켰다.
수백은 될 법한 병사들이 자신들을 뒤쫓고 있었다.
"이안 경, 이제 어쩌죠?"
"제가 막고 있을게요. 먼저 가세요, 아가씨!"
이안이 비장한 표정으로 몸을 뒤로 틀자, 세리아도 더 이상 뛰지 않았다. 그녀는 곧바로 돌아와서 이안의 팔뚝을 잡고 그대로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안의 다리에 윈드 워크를 걸어 걸음걸이를 빨리했다. 포박되어 있는 동안 정신없이 모은 마나였다.
"놈들을 놓치지 마라! 백작님께서 놈들을 사로잡는 자에게는 10골드의 상을 내린다 하셨다!"
"우와아아!"
한 기사의 명령에 병사들은 돈에 눈이 멀어 활시위를 당겼다.
슈슉!
"악! 이, 이안 경!"
절망에 가까운 부름 소리에 이안이 뒤를 언뜻 바라보자 화살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흡!"
이안은 그 순간 몸을 최대한 비틀어 버리자 화살이 옆구리를 스쳐 지나갔다. 마치 불에 덴 듯 선혈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쿠당탕!
하지만 이안의 몸도 정상은 아니었다. 순간 균형이 틀어지며 그대로 옆으로 굴러가기 시작했다. 하필이면 옆이 비탈길이었기 때문에 이안의 몸이 5미터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쿨럭! 비, 빌어먹을!"
이안의 입에서 난데없이 욕지거리가 흘러나왔다.
"아악! 이안, 거기 꼼짝 말고 있어요!"
"그렇지 않아도, 쿨럭……! 꼼짝 않고 있을 수밖에 없어요."
계속해서 입에서 피가 쏟아졌다. 벌써 다른 이들이었다면 죽어도 당연할 정도로 과다한 피가 흘러내렸다.
세리아가 이안을 부축하며 물었다.
"몸을 움직일 순 있겠어요, 이안?"
이안은 그 순간 자신의 귀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했다.
세리아가 언제부터 자신의 이름을 이렇게 불렀단 말인가.
'후후!'
마침 이런 상황이 되자 세리아의 진심 어린 표정을 볼 수 있었다.
"망할……. 굴러 떨어지면서 갈비뼈가 부러진 것 같아요."
입가에 미소를 짓는 이안의 태평스런 모습에 세리아는 억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세리아는 사방을 둘러보더니 이안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이곳으로 가는 거 맞아요?"
"모르겠어요. 어차피 이 속도로 움직인다면 곧 잡히고 말 거예요."
이안의 진지한 대답에 세리아는 부축하고 있던 손에 힘을 더욱 주었다.
"아악!"
이안이 갑자기 비명을 내질렀다.
"아, 아앗! 미안해요. 괜찮아요?"
"하하! 오늘 그 괜찮아요 소리만 한 세 번 들은 것 같아요."
"흥. 장난할 힘이 있다면 괜찮은 거로군요."
그렇게 그들은 계속해서 앞으로 움직였다. 이안이 떨어진 곳이 워낙 아래였기 때문인지 추격하던 병사들도 쉽사리 따라오진 못했다.
'왜 이안은 이토록 날 살리려는 거지? 내가 뭐라고?'
둘은 도주하면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안은 말할 체력마저 몸을 추스르는 데 사용했고, 세리아는 마땅히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저, 이안, 한 가지 물어봐도 돼요?"
"말하세요, 아가씨."
"왜 절 위해 이렇게 목숨을 건 거예요?"
죽더라도 이 대답은 꼭 듣고 싶었다. 병사들도 그렇고 이안도 그렇고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걸었다.
자기가 뭐라고?
그저 변방에 위치한 작은 나라의, 그것도 보잘것없는 시골 영지의 남작 딸이었을 뿐이다. 남들이 보면 코웃음 칠 만한 신분이란 것이다.
"그날…… 당신이 절 살려 주었잖아요. 그 은혜, 아직도 잊지 않았어요."
중원에서 장안의 숲 룩커강으로 흘러갔다. 그날 세리아가 아니었다면 자신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었다.
"그것……뿐이에요?"
"당연히 아니죠. 세리아는 프로시안 영지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죠."
형식적인 대답일 뿐이었다.
세리아는 그런 대답에서 시원스런 해답을 구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놈들이 저기 있다!"
그때 병사 하나가 소리쳤다. 이안은 입술을 꽉 깨물며 앞으로 내달렸다. 곧 갑자기 탁 트인 광경이 보였다.
"마, 망할!"
쏴아아아!
웅장하게 들리는 물소리.
고개를 아래로 내리자 거대한 물줄기가 내려가고 있었다. 이곳은 룩커강으로 내려가는 곳이다. 반대편으로 넘어가려면 허공답보가 아닌 이상에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포기해라, 이놈들! 네놈들이 살아서 도망갈 길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
이안의 뒤로 중년의 기사가 거대한 검을 휘두르며 나섰다.
사방을 백 명이 넘는 병사가 둘러싸고 있다. 이안이 언뜻 세리아를 보자, 그녀는 뭔가를 결심한 듯 고개를 내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설마?!"
그렇다. 그녀는 일부러 이곳으로 자신을 데려온 것이었다.
세리아는 이안의 표정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최소한 이곳보다는 이 아래가 나을 테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도 자신은 없어 보인다.
"가능성은 있어요?"
"어느 정도는요."
마법에는 순간적으로 중력을 뒤바꾸는 그라비티(Gravity) 가 있다. 세리아는 모아 둔 마나로 그것을 펼칠 요량이었다.
'다만…… 떨어지고 난 뒤 어디로 이동을 해야…….'
이안의 몸은 만신창이고, 마법을 사용하고 나면 자신도 어디 한 군데를 붙잡을 힘도 없어졌다.
"이안, 준비해요."
헤일론 백작의 충복인 골든 기사단 단장인 데이안.
중년의 나이로 익스퍼트 상급에 올랐고, 최상급을 눈앞에 두고 있는 실정이다. 그는 방금 자신의 주인인 백작과 한 젊은이의 싸움을 손에 땀을 쥐고 봤을 정도로 열광했다.
고수들의 싸움은 평생 한 번 볼까 말까 할 정도로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그는 젊은 나이에 익스퍼트 최상급에 오른 상대를 보고 적이지만 감탄을 했다. 어떤 훈련을 했기에, 어떻게 자라면 그 젊은 나이에 익스퍼트가 될 수 있는지!
막상 백작의 명이 있어 두 사람을 쫓아오긴 했으나 잡는 건 썩 내키지 않았다. 자신은 저 둘을 살리기 위해 뭐든지 할 작정도 했었다.
'우리 기사단원으로 끌어들이고 부단장의 직위를 내린다면 헤일론 백작가는 부흥할 것이다!'
그리고 아련하게 잡히는 최상급의 경지도 눈앞에 보일 지경이었다.
그런 그 순간.
갑자기 그 둘이 절벽 밑으로 뛰어내렸다.
"……."
한순간 모든 이들의 얼굴이 멍하게 변했다.
"이, 이런! 잡아! 저들이 죽으면 끝장이다. 너희들은 당장 룩커강 쪽으로 내려가라. 시체라도 찾아!"
"예, 옙!"
'젠장! 일이 더럽게 꼬였어.'
데이안은 백작에게 어떻게 변명을 해야 할지 머리가 지끈 아파 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