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인하르트-19화 (19/60)

■ 제19장 기사의 명예 □

이안은 세리아가 사라진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하지만 탈영병을 막지는 못했다.

이미 대부분의 병력이 탈영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시라도 빨리 보급부대가 도착하지 않는다면 하루 이틀 내로 용병들이 모두 떠날 것이었다.

계약 조건을 지키지 않은 건 사실이었기에 아무도 탈영병을 막을 수 없었다. 세리아를 걱정하며 보급부대가 한시라도 빨리 도착하기를 진정 바라는 이들은 프로시안 영지의 사병들뿐이었다.

"칸 님! 소렌트 님 못 보셨습니까?"

세리아가 떠난 직후 소렌트가 보이질 않았다. 용병들이 날뛰는 이때 소렌트마저 보이지 않았으니 답답할 지경이었다.

"소렌트 경은 아까 중형급 몬스터들 때문에 잠시 근처에 나가셨네."

"얼마나 됐죠?"

"두 시간 정도 된 걸로 알고 있네."

"흐음! 두 시간이라……."

갑자기 불안이 엄습해 왔다. 만약 소렌트마저 용병들을 선동해서 탈영했다면 더 이상 용병들을 이끌 사람이 없어진 것이다.

'설마!'

소렌트는 평소에도 계약에만큼은 엄격한 사람이었다.

아무리 생사를 함께한 사이라곤 해도 계약을 어긴 것은 프로시안 영지 측이었으니 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었다.

"칸 님께서는 주변 몬스터에 대한 경계를 철저히 해 주세요."

칸은 평소에도 그런 일을 맡고 있었다.

"알았네."

이안의 말에 칸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적지 않게 당황했다.

'어, 어찌하여 내가 저자의 말을…….'

이안은 칸에게 명령을 내릴 권한이 없다. 하지만 그에게서 조금씩 뿜어 나오는 카리스마에 몸이 뻣뻣하게 굳어 갔다.

칸은 이안의 팔에 새겨진 여신의 문신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음을 알아챌 수 없었다.

밥을 씹을 때마다 돌의 딱딱함이 느껴졌다. 이미 바닥을 드러낸 식량을 바닥까지 긁어냈다는 증거였다.

용병들의 불만이 점점 커져 갔다.

몇몇 조직을 구성해 근처에 있는 먹을 수 있는 약초나 과일을 따 오도록 했으나 수천 명의 배를 매번 부르게 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되자 성내에서도 용병들끼리, 혹은 병사와 용병이 싸우는 일이 다반사였다. 음식을 위한 쟁탈전이었고 물을 마시기 위한 사투였다.

이안은 방으로 돌아와 그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러다 문득, 생각보다 방이 깨끗하다는 것을 느꼈다. 며칠 동안 그는 이 방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로이니스라면 이 방을 매일같이 왔다 갔다 한다.

표면상 그녀는 이안의 전속시녀를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자기 같은 고귀한 신분이 시녀를 할 수 있겠냐며 이안에게 갖은 투정을 다 부리긴 했다.

그렇기 때문에 방청소 같은 것은 이안이 전부 도맡아 했다.

그렇다 해도 자신의 신분이 발각되지 않기 위해, 때때로 시녀장이 시킨 일도 꿋꿋하게 해냈다. 하지만 며칠 동안은 음식을 가져다 놓은 흔적도 없었다.

그대로 방을 나선 이안은 지나가는 시녀의 팔을 잡았다.

"혹, 제 시녀 못 보셨나요?"

"시, 시녀요? 아! 그…… 로이니스 말입니까?"

시녀의 수가 제법 되지만 로이니스가 꽤 건방졌기에 얼굴이나 이름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며칠 동안 본 적이 없어서……."

누구보다 성안을 많이 돌아다니는 시녀가 로이니스를 본 적이 없다?

이안은 그대로 몸을 튕겨 숙소를 빠져나왔다.

자꾸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 감에 대한 믿음을 절대 무시해선 안 된다. 그것은 그 무엇보다도 예민한 내공이 전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안은 주위에 복잡한 성안을 돌아다니며 로이니스를 찾았다.

'로이니스는 정령사다! 정령사가 뿜어내는 특이한 내공을 잡아야 해.'

그렇다. 기사와 마법사가 다르듯, 정령사도 뚜렷하게 구분이 된다. 특히 로이니스의 바람의 정령력은 워낙 강대한 기운을 풍기기 때문에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었다.

'이건가?'

그중에서도 감이 하나 잡히는 것이 있었다.

하지만 실프라고 해도 믿지 못할 만큼 약한 정령력이었다.

이안은 일단 그곳으로 몸을 돌렸다. 이 성에서 정령을 익히고 있는 것은 로이니스뿐이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그가 도착한 곳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창고였다. 하지만 의외로 창고로 향하는 문 앞에는 몇몇 사람이 서성인 듯한 발자국이 희미하게 찍혀 있었다.

철컥!

끼이이익!

이안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자 기름칠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문이 비명 소리를 냈다.

창고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칠흑처럼 어두웠다.

하지만 이안의 눈은 정확하게 한곳을 향하고 있었다.

* * *

쥐 죽은 듯이 숨을 쉬고 있는 병사 복장의 한 인영.

이안은 그 인영에게 재빨리 다가가 얼굴을 자기 쪽으로 돌렸다.

이안의 입에서 경악스런 외침이 튀어나왔다.

"로, 로이니스……! 이, 이게 어찌 된 거죠?"

그 목소리에 로이니스의 감겨 있던 눈이 기적적으로 뜨였다. 그리고 철근같이 무거운 입이 벌어졌다.

"왔구……나."

가까이서 듣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가 이안의 귀에는 천둥처럼 크게 들렸다.

이안은 황급히 평소에 가지고 다니던 물통을 로이니스의 입에 갖다 댔다. 며칠 만에 맛보는 물인지 몰라도 로이니스의 입에는 계속해서 물이 들어갔다.

꿀꺽꿀꺽!

그는 로이니스의 몸 상태를 보고 거의 경악 어린 표정을 지었다.

'최악이다! 정령력을 거의 잃었어. 빨리 신관에게 데려가지 않으면 위험하다!'

이안은 그녀를 안고 창고 문을 부서져라 열어젖히고는 그 길로 신관에게 달려갔다. 그냥 달려가는 수준이 아닌 경공을 펼친 것이었다.

토벌군에 단 하나밖에 없는 신관인 페그의 앞에 로이니스를 내려놓았다. 페그는 밀려오는 부상자들에게 질색하다가 로이니스의 상태를 보고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지금 로이니스는 그 어떤 병사들보다도 위급한 상태였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저도 모릅니다. 다만 며칠 동안 창고에 갇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일단 상처를 치료해야 하니 갑옷을 벗겨 주십시오."

갑옷은 그다지 벗기기 어렵지 않았다. 상대가 누워 있었으니 이안은 고리를 풀고 손쉽게 벗길 수 있었다.

갑옷이 벗겨지자 그녀를 본 용병들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뭐, 뭐야? 여자잖아?"

"병사들 중에 여자가 있었나?"

페그는 치료에 집중하기 위해 용병들과 그녀 사이에 커튼을 쳐 버렸다. 그러자 커튼 바깥에서 용병들이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철저하게 무시해 버렸다.

"이분은 보통 병사가 아니군요."

페그가 말했다.

그의 신성력이 은은하게 뿜어 나오는 로이니스의 정령력에 가로막혔다. 하지만 그 정령력도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여신의 축복에서 비롯된 신성한 기운이여, 그 기운으로 내 앞에 있는 이에게 축복을 내릴지어다. 리커버리!"

잠시 후 펼쳐지는 신성마법.

디바인 포스가 강력하게 움직이더니 로이니스의 몸에서 빛의 향연이 일어났다.

그러자 로이니스의 표정이 편안하게 바뀌었다.

"다행히 크게 문제는 없습니다만, 앞으로 정령을 다시 부리기는 힘들 것입니다. 아무래도 정령을 모두 잃었다고 봐야겠습니다."

이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자신이 십이경맥의 손상으로 신공절학에 비견되는 무공을 잃었을 때 얼마나 속이 쓰렸던가!

"되찾을 순 없습니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겠죠. 정령을 잃었다곤 해도 아직 정령과 친화력을 잃은 것은 아닐 테니까요."

"다행이군요."

"후우! 그럼 저는 이만."

"안녕히 가십시오."

페그는 상당히 바쁜 몸이었기에 한 곳에 오래 머무를 수는 없었다.

이안이 의자를 끌어당겨 로이니스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조심스레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쓸어 넘겼다.

'내가 왜 이러지?'

평소에는 이런 기분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무언가 달랐다.

이안이 울컥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미안합니다, 로이니스. 설마 로이니스가 사라졌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으니까요."

변명 아닌 변명. 이안 자신도 얼마나 이게 구차한 변명인지 잘 알고 있었다. 바로 그때,

"위……험……."

"으응?"

로이니스의 살짝 벌어진 입술에서 흘러나온 단어.

뚝뚝 끊기지만 못 알아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이안……. 네가 위험해……."

"전 여기 있습니다만."

다음 순간, 로이니스가 눈을 살짝 떴다. 그리고 이안의 얼굴을 확인하더니 이내 얼굴에 웃음을 지었다.

"잘…… 있었구나."

"그건 그렇고, 어떻게 된 일입니까? 설마 창고에 며칠이나 갇혀 있었던 겁니까?"

로이니스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했다.

"누군가가 보급대를 공격한다고……."

"아니, 도대체 누가?"

"헤일론 백작."

로이니스가 힘겹게 대답하자, 이안은 마치 둔기에 얻어맞은 듯 몸을 휘청거렸다.

로이니스가 평소에 거짓말을 했던가! 아니, 설마 했다고 해도 이런 상황에서 그런 거짓말을 할 리가 없었다.

게다가 헤일론 백작이 개입되었다면 충분히 이번 사태에 대해 짐작할 수 있었다.

'위험하다! 세리아가……. 로이니스가 가르쳐 주려고 했던 것은 그것이었던가!'

세리아가 출발한 시간이 제법 되었다.

'지금 쫓아간다면 따라잡을 수 있을까?'

"로이니스! 금방 돌아올 테니 푹 자 둬요."

이안이 그대로 몸을 돌렸다.

"자, 잠깐!"

로이니스가 황급히 입을 열었지만 그다지 큰 소리는 내지 못했고, 게다가 잔뜩 흥분해 있는 이안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온 힘을 다한 로이니스의 손짓이 허공에서 멈췄다. 그곳은 방금 이안의 팔이 자리를 잡고 있었던 곳이었다.

'이안…….'

이안이 움직인 것은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그의 기혈이 들끓기 시작하더니 그동안 응축되어 있던 내공이 한꺼번에 풀렸다.

"속았군! 아주 제대로 속았어."

그동안 헤일론 백작이 프로시안 영지에 대한 아무런 적대심을 보이지 않아 안심하던 차였다. 하지만 설마 토벌대를 고립시키는 비수를 숨겨 뒀을 줄이야!

이안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세리아가 데리고 간 오십 명의 사람들은 모두 흔적을 지우는 데 애를 쓴 것처럼 보였다. 이안은 추적술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다. 그래서 세리아의 흔적을 찾기가 매우 힘이 들었다.

이안은 토벌군 백인장들에게 나눠 준 지도를 아직도 가지고 있었다. 지도는 생각보다 넓은 영역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에 영지까지 가는 길도 알 수 있었다.

"이곳이다."

자신이 만약 세리아의 입장에서 움직인다면 제일 빠른 길로 이동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일 것이다. 아무리 세리아라도 헤일론 백작이 개입되어 있는 것을 알지는 못할 것이었다.

이안은 자신의 판단이 맞기를 바라며 지도를 구겨 넣었다.

아무리 그들이 흔적을 지웠다 하더라도 오십 명이 단체로 움직인다면 작은 흔적이라도 남는 법이다.

잠시 후, 그는 발걸음을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아 작은 흔적들을 볼 수 있었다. 마치 잘못 보았더라면 곰이 움직인 듯 아주 자연스러운 흔적이었다.

하지만 이 근처에는 곰이 절대 살지 않는다. 곰이 미치지 않은 이상은 몬스터들과 같은 영역 안에 살 리가 없었다.

이안은 거의 확신한 듯 그곳을 향해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그의 신형이 한 걸음에 몇 장씩 뻗어 나갔다. 하지만 이안의 표정은 굳을 대로 굳어져 펴지지 않았다.

얼마 전 소렌트와 협곡에 갇혔을 때 빙허임풍을 끌어올리느라 얼마나 많은 고통을 참아 내야 했던가.

간신히 조금씩 자연치유가 되고 있는 십이경맥이 손상된다면 치유가 훨씬 더뎌질 것이다.

하지만 이안은 모든 내공을 빙허임풍을 펼치는 것에 쏟아 부었다. 이미 그의 안중에는 십이경맥의 손상은 뒷일이었다.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된다. 로이니스가 그렇게 다쳤거늘 내 몸 하나 사릴 순 없지 않은가.'

이안의 신형은 점점 세리아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 * *

헤일론 백작은 멀리서 달려오는 수레바퀴 소리에 눈을 빛냈다.

아까부터 계속 기다리던 소리가 들린 것이다. 그의 눈에 저 멀리서 다가오는 수백 명의 병사들이 보였다. 모두들 경계심을 보여 주기는 했지만 수레를 몰고 오느라 지쳐 다른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백작이 매복군들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그들이 각자 가져온 단궁에 화살을 걸었다.

"백작각하, 모든 병사들의 준비가 끝났습니다. 공격은 언제 시작할까요?"

한 기사의 질문에 헤일론 백작이 만족스런 웃음을 지었다.

"훗. 좋군! 공격은 저들이 호랑이 아가리에 반쯤 들어왔을 때 시작한다. 그때가 아니면 쥐새끼처럼 도망갈 놈들을 한꺼번에 처단하는 게 불가능할 테니."

보급부대를 쥐새끼라 말하고 자신들을 호랑이의 아가리에 비유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천 명의 매복군 모두가 비장한 각오를 한 채 공격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그때, 기사 하나가 은밀히 헤일론 백작의 옆으로 다가왔다.

"백작각하! 말씀하신 대로 일단의 무리가 이곳으로 오고 있습니다."

"숫자는?"

"약 오십 명 정도입니다. 실력으로 보아 웨폰 오러 중급 정도 되는 자들입니다."

"웨폰 오러 중급이라……. 상당히 낮군."

견습기사 정도의 실력이라는 뜻이다. 적어도 기사가 되려면 웨폰 오러 상급 이상이어야 했다.

"혹, 그 오십 명 중에 여자가 있더냐?"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그 오십 명이 가운데에 있는 누군가를 보호하듯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익스퍼트 최상급으로 보이는 기사는 안 보이더냐?"

"그 정도의 실력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크흠!"

헤일론 백작은 적잖이 실망했다. 자신이 이곳에서 보급부대 따위나 습격하려는 이유는 순전히 프로시안 영지를 정복하겠다는 뜻도 있긴 했지만 마스터의 실력을 보고 싶어서였다.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지만 자신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감히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그의 영지 내에는 감히 그와 겨룰 만한 실력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상관없다. 남작의 딸만 사로잡는다면 불가능한 것은 아닐 테지!'

프로시안 영지의 최고 기사.

소문으로는 익스퍼트 최상급이라 알려져 있었으니 이제 막 마스터에 오른 백작에게는 안성맞춤인 상대였다.

"일단 그들을 주시하고 있어라. 만약 도망친다 해도 사로잡을 수 있도록 은밀한 포위망을 구축해 두어라."

"명을 받듭니다!"

기사는 발소리도 내지 않고 그대로 사뿐히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헤일론 백작은 다시 정면을 주시했다.

어느덧 보급부대는 범의 아가리에 아무것도 모른 채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백작이 손을 높이 들어 외쳤다.

"쏴라! 놈들에게 도망갈 구멍조차 내주지 마라!"

슈슈슈슉!

수백 개의 화살이 시위를 떠나 보급부대를 향해 날아갔다.

숲 속의 밤은 빨리 찾아오는 법이다.

게다가 장안의 숲은 일교차가 심한 곳이기 때문에, 매서운 추위에 그로퍼와 욘지는 신음을 삼켰다.

"음!"

한 치 앞을 구분 못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 속도로 나아가다간 한밤중에 행군을 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게다가 지금 피부로 느끼는 추위도 겨울에나 느낄 정도였으니, 만약 한밤중이 된다면 병사들이 너무 옴짝달싹 못할 것 같아 걱정되었다.

"병사들이 많이 위축됐군. 아무래도 헤일론 백작의 군대 때문이겠지."

자신들의 터전을 위협하는 오천의 대군을 보고 놀라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로퍼조차 그 당당한 기세에 위축되어 어깨를 제대로 펴지 못하고 있었다.

"단장님! 일단 무리를 해서라도 빠른 속도로 토벌대와 합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렇게 가다간 동사하는 자가 나올지도 모르는 데다, 한시라도 빨리 토벌대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합니다."

"그래야겠군! 모든 병사들은 들어라! 지금보다 행군 속도를 높인다! 오늘 밤 안으로 성에 도착해야 한다!"

그로퍼는 나이는 제법 들었지만 말만 앞세우는 기사는 아니었다. 그 또한 병사들과 같이 수레를 밀며 한몫 거들었다.

수레를 끄는 말들은 이미 추위를 견뎌 내지 못해 일일이 사람이 미는 수밖에 없었다.

기사도의 명예에 흠집이 간다고 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애초부터 평민인 그는 그런 허울 따위에 신경 쓰진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런 자들에게 크게 호통 쳤다.

'사내대장부로 태어나 사람을 돕는 것이 어찌하여 명예에 흠집이 가는 일이란 말인가!'

그로퍼는 그런 기사였다. 다만 다혈질적인 것이 문제였지만 그의 심성이 포악하지 않음을 잘 알기에 그런 성정은 덮고도 남았다.

"훗."

욘지도 어쩔 수 없다는 듯 같이 수레를 밀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들의 결정적 실수였다.

수레를 미는 데 집중하는 바람에 익스퍼트에 오른 기사들의 예민한 감이 흐트러진 것이다. 그로퍼보다는 약간 경지가 높은 욘지가 먼저 이상함을 눈치 채고 수레에서 손을 뗐다.

"쏴라! 놈들에게 도망갈 구멍조차 내주지 마라!"

그렇지만 이미 그들의 머리 위에는 화살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보급부대원들이 모두 그 소리에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봤다. 주변이 어두컴컴했기에 검게 칠한 화살이 제대로 보일 리가 없었다.

그로퍼가 번개 같은 속도로 검을 뽑으며 빠르게 대응했다.

"수레 뒤로 몸을 숨기고 방패를 들어 막아라! 주변에 매복부대가 있다!"

병사들의 대응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미 그들은 이곳에 오기 전부터 오크 궁수들의 공격에 대비하여 언제든 방패를 소지하고 다녔다.

타타타탕!

"크윽!"

"커헉!"

몇몇 병사들은 방패의 틈새로 비집고 들어오는 화살에 맞아 그대로 절명했다. 말 그대로 이들이 포진하고 있는 진형은 오크 궁수들을 상대하기 위한 것이었지, 인간들이 만든 정교한 화살을 막기 위함이 아니었다.

"매복이다! 놈들의 목표는 수레임에 틀림없다! 공격하라!"

보급부대 전원이 지금까지의 멍한 눈빛을 버리고 검을 뽑아 들자 흉흉한 기세가 뻗어 나왔다. 그로퍼나 욘지는 적들이 매복하고 있다면 퇴로는 이미 차단된 것이 분명하다 느꼈다.

그리고 그들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상황이 그러하다면 차라리 한 곳을 강하게 공격해 타격을 주는 편이 훨씬 나았다.

"우와아아아!"

오백 명의 병사가 사방으로 빠르게 달려가자 매복해 있던 부대도 각자 무기를 뽑아 들었다.

채앵!

"건방진 프로시안 영지의 병사들에게 무서움을 보여 주어라!"

"우와아아아!"

천 명과 오백 명의 싸움이 벌어졌다.

프로시안 영지의 병사들은 적들의 기세에 눌리면서도 어느 때보다도 강하게 적을 제압해 나갔다. 그들이 영지 안에서 용병들과 싸우면서 얻은 깨달음과, 밤잠을 설쳐 가며 익힌 삼재보 등이 하나씩 펼쳐졌다.

"헛, 뭐, 뭐냐!"

프로시안 보급부대의 모습이 눈앞에서 순식간에 사라지자 헤일론 백작의 매복부대가 헛바람을 들이켰다. 그들도 나름대로 지옥 같은 훈련을 견뎌 왔다 생각했지만 프로시안 병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평생 몬스터의 침공을 경계하며 살아가는 그들과는 마음가짐 자체가 달랐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처음에는 프로시안 영지군이 거세게 몰아붙였지만 시간이 갈수록 헤일론 백작 군대 쪽으로 승기가 기울었다.

프로시안 영지군은 지금껏 수레를 몰고 오느라 엄청나게 지친 상태였다. 게다가 삼재보를 펼칠 여력도 없었다.

숫자에서도 두 배 가까이 차이가 났으니 헤일론 백작의 군대가 기세를 잡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우우우웅!

순간, 기세 넘치는 한 남자의 눈빛을 본 그로퍼와 욘지의 온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는 평소 남작에게서도 느껴 볼 수 없었던 강력한 기운이었다. 마치 눈빛만으로 전신을 옥죄는 강력한 느낌!

그로퍼와 욘지의 시선이 자연스레 남자가 들고 있는 검으로 옮겨졌다.

"허, 헙!"

검을 감싸는 마나. 그리고 펼쳐진 또 다른 검.

어두운 숲 속이지만 그들의 눈에는 아주 또렷하게 보이는 오러 블레이드가 남자의 검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소, 소드 마스터!"

30센티미터나 솟아나 있는 오러 블레이드.

푸르스름한 마나가 검에 넘실거렸다.

그때 기사 몇몇이 호기롭게 그에게 달려들었다.

"안 돼!"

그로퍼의 비명 같은 외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뜀박질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와 지척에 도착했을 때 한순간 도약하여 그에게 검을 휘둘렀다.

"죽어라, 이놈!"

"마스터라 한들 어차피 인간이다!"

정체불명의 마스터.

그가 순간 비릿한 미소를 짓는가 싶더니 검을 든 팔을 아주 살짝 움직였다.

푸슉!

"꺽!"

"크어억!"

기사들이 도약하던 그 자세로 무너져 내렸다. 그들 모두 허리가 양단되어 있었다.

투툭!

그로퍼는 자신의 눈앞에서 시체가 되어 버린 부하들을 보고도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오로지 부하를 죽인 남자가 휘두른 팔만 뚫어지게 쳐다볼 뿐이었다.

'팔이 보이지도 않았다! 그야말로 순식간이다.'

마스터의 경지를 두 눈으로 직접 본 적이 없었으니 기사 몇몇이 함께 검세를 취하면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설마 휘두르는 검조차도 보지 못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기사들을 철저히 양단한 남자가 또 다른 타깃을 잡아 기사들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몇몇 병사들도 그 공격에 휩쓸려 싸늘한 주검이 되었다.

남자의 가세로 프로시안 영지군이 눈에 띄게 밀리기 시작했다. 지척에 있는 기사들이 전멸당하고, 병사 수십이 남자 손에 죽어 갔다.

'지치지도 않았다?'

마치 가벼운 운동을 한 듯한 얼굴이었다. 남자의 표정에서는 어떠한 것도 읽을 수가 없었다.

"크악!"

"크윽!"

또다시 곳곳에서 프로시안 영지군의 비명 소리가 처절하게 울려 퍼졌다. 그로퍼는 무능력한 자신을 욕하며 검에 마나를 불어넣기 시작했다.

"다, 단장님! 대체 어쩌시려는 겁니까?"

옆에 있던 욘지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이런 상황에서 기사라면 목숨을 사리는 것이 아니라 불쌍하게 죽어 간 병사들을 뒤따라가는 것이다!"

그로퍼는 자신들의 앞을 막는 매복부대를 빠르게 베어 냈다.

"이곳을 빠져나가야 합니다! 여기 있다가는 그저 개죽음을 당할 뿐입니다."

"부단장! 자네라도 빨리 나가는 게 좋겠다. 이 상황을 토벌대에 알릴 사람이 없으면 어찌하겠나."

부단장 욘지가 망설이기 시작했다.

"그, 그럼 단장님께서는……?"

"수십 년을 남작님을 모시는 기사로 살아왔다! 이제는 그 은혜에 보답을 해야 할 때다. 게다가 그토록 원하던 마스터와의 싸움인데 어찌 도망간단 말이냐!"

"다, 단장님! 제길!"

그로퍼는 무작정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욘지가 급하게 그로퍼를 불렀지만 이미 잔뜩 흥분한 그의 귀에 들릴 리가 없었다. 그로퍼가 검을 빠르게 휘두르며 노호를 터뜨렸다.

"이놈들! 내 앞을 막지 마라!"

수십의 병사와 기사들이 그로퍼의 앞을 막았지만,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삼재보를 펼치며 그들 사이를 공격했다.

그로퍼의 눈은 오직 자신의 수하를 죽인 정체불명의 마스터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크아압!"

그로퍼의 괴성과 함께 남자를 향해 검기가 쇄도해 나갔다.

쿠우웅!

헤일론 백작은 적잖이 당황했다. 익스퍼트 중에서도 제법 상급에 해당하는 데미지를 가진 검기가 불현듯 날아오다니!

쿠우웅!

막상 오러 블레이드로 베어 내긴 했지만 충격이 컸다. 분명 이 검기는 혼신의 힘을 다해 날린 것이 분명했다.

백작이 살짝 고개를 돌리자 앞에는 백발을 휘날리는 노기사 하나가 있었다.

헤일론 백작이 노기사의 눈에서 뿜어지는 안광을 보며 입가에 미소를 걸었다.

"좋구나! 내 상대가 될 자격이 충분하다! 네놈의 이름이 무엇이냐!"

그로퍼는 살짝 코웃음을 쳤다. 설마 마스터가 자신을 인정해 줄 거라곤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프로시안 영지 소속 에이전트 기사단 단장인 그로퍼! 당신의 손에서 죽어 수하들의 뒤를 따라간다면 더없는 영광이 될 것이오!"

"그로퍼. 기억해 두지! 그것이 너의 유언이더냐?"

"쉽지는 않을 것이오! 허무하게 죽어 간 내 수하들의 영혼이 나를 지켜보고 있소이다!"

그로퍼는 이미 승산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초반부터 강세를 펼치기 시작했다. 오러를 잔뜩 머금은 검으로 상대를 공격했는데, 아무리 마스터라 해도 동귀어진의 각오로 달려드는 상대의 검을 막는 것은 곤욕스러울 것이었다.

펑! 펑!

오러와 오러 블레이드가 격돌하자 마치 북 터지는 소리가 들리며 주변에 시끄러운 파공음이 가득 찼다.

파상공세를 취하던 그로퍼는 상대의 얼굴에 여유가 있음을 알고는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내기로 했다.

'지금까지의 삶…… 마나! 그리고 나의 기사도로서의 명예까지!'

남다른 기사도를 가진 그로퍼.

그는 그만의 기사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 기사도가 지쳐 가는 그의 전신에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마치 다 타 버린 촛불이 발악하며 활활 타오르듯.

"흐아압! 이것이 나의 마지막 기사도다!"

그로퍼가 저 높이 도약했다. 거의 2미터를 뛰어오른 그가 모든 오러를 검에 불어넣으며 눈앞의 남자에게 쏟아 냈다.

슈슉!

남자의 팔이 조금 전 병사와 기사들을 죽였을 때처럼 살짝 움직였다. 사람의 눈으로는 절대 보지 못할 속도였지만 그로퍼는 똑똑히 보았다.

'보인다! 내가 훨씬 더 빠르다앗!'

콰아아앙!

강력한 마나가 충격했다.

"쿨럭!"

그 충격의 여파에 상처를 입었는지 그로퍼가 그대로 자리에 쓰러지며 검은 피를 쏟아 냈다.

"흠!"

남자, 백작도 신음을 삼키며 자신의 발아래 깊게 파인 땅을 보았다.

설마 일개 익스퍼트 기사가 자신을 1미터 이상이나 뒤로 밀려나게 할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후후후!"

그로퍼는 끔찍한 내상을 입고도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 미소 띤 표정은 아주 만족스러워 보였다.

채애앵!

백작의 검이 청아한 소리를 내며 그로퍼의 목 언저리에 닿았다. 백작이 무표정을 유지한 채 작게 말을 내뱉었다.

"마지막 말은?"

"후후! 빨리 죽여 주시오. 쿨럭! 크으…… 어차피 이대로 내버려 둬도 곧 죽을 몸. 당신에게 죽어서 수하들에게 마스터에게 죽었다고 자랑하고 싶어 미칠 지경이오."

헤일론 백작은 지금껏 망나니같이 살아왔지만, 마스터에 오른 후부터는 그런 면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는 정말 애도하는 표정으로 그로퍼에게 말했다.

"기사답군! 그럼 기사답게 죽여 주겠다."

"흐흐! 맘대로 하시오."

그로퍼는 편안한 자세로 누웠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그러자 지금껏 살아온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슈욱!

잠시 후, 그로퍼의 심장이 백작의 검에 꿰뚫렸다.

"고, 고맙소……."

혼신을 다해 내뱉은 말에 백작은 조소를 머금었다.

"별말씀을."

백작은 이 노기사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면 어떨까 생각했다. 만약 헤일론 백작이라는 것을 알면 분노하며 죽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떠올렸을 때는, 노기사는 이미 싸늘한 주검이 되어 온기가 사라져 가는 시체가 되어 있었다.

"그럴 필요도 없겠군. 좋아! 빠른 시간 내에 주변을 정리한다!"

백작의 말에 남은 병사들이 주변을 정리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욘지가 살아서 도망갔다는 것을 알진 못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