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8장 세리아의 잘못된 결정 □
프로시안 영지 회의실.
아침부터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사람들.
특히 수뇌부 사람들은 새벽에 회의실에 들어가 한밤중이 되도록 나오지 않았다.
"부관! 지금 당장 장안의 숲에 보급부대를 보내지 않으면 이천오백 명이 굶어 죽을 것이야. 그들을 사지에 내버려 둔 채 영지를 지키자는 말인가!"
남작이 부관을 째려보며 언성을 높였다. 하지만 부관은 절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지금 보급부대를 보낸다는 것은 자살행위입니다. 남작님은 보이지 않으십니까. 영지의 외성 5킬로미터 앞으로 오천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것이요!"
부관의 말도 거짓이 아니었다. 장안의 숲으로 가는 길목은 모두 헤일론 백작군이 차단하고 있었다. 억지로 성문을 열고 강행돌파를 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들에게 군수물품을 보내 주기로 한 날짜를 이틀이나 어겼다. 그들도 더 이상 버티기가 힘들 걸세."
영지의 병사도 아니고 용병들이다. 용병들이 아니어도 전쟁 시에 병사들에게 군수물자를 제때 보급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미 이틀이나 어겼으니 지금쯤 토벌군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을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크윽! 그들에게 정보를 알릴 방법이 없으니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이럴 때 통신구라도 있다면……!"
통신구는 워낙 귀한 마법물품이라 한 나라의 왕족이나 사용할 수 있었다. 일개 남작인 프로시안 영주가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울분을 터뜨리는 남작을 본 회의실에 모인 자들이 모두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어찌어찌 해서 보급품을 보내는 데 성공한다면 이천오백 명의 병사들을 영지전에 투입할 수 있었다. 적의 병력이 오천인 것을 감안해도 이천오백 명 정도면 싸울 만했다.
그때 조용히 말을 듣고 있던 그로퍼가 일어났다.
"영주님! 저에게 군사 백 명만 내주십시오. 제가 적들을 유인해 어떻게 해서든 토벌군에 군수물품을 댈 수 있는 시간을 벌겠습니다."
"적은 오천일세. 백 명 가지고는 상대도 되지 않아."
오십 배나 되는 머릿수였다.
"이대로 앉아서 당하느니 싸우다 죽는 것이 낫습니다."
그로퍼가 소신껏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있을 때 문 바깥에서 작은 소란이 일어났다.
덜컹!
병사 하나가 회의실 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
"헤일론 백작의 부관이 남작님과 일대일 면담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뭐, 뭣이!"
일개 부관 따위가 귀족과 일대일 면담을 요청한다는 말에 부관의 얼굴이 상기되었다.
"어찌 백작이 나오지 않고 부관이란 자가 대신 나온단 말이냐!"
"백작은 부재 중이라 합니다."
"남작님! 이것은 프로시안 영지를 무시하는 처사임은 물론, 남작님을 자신과 같은 위치로 보는 행위입니다. 그놈의 목을 쳐 군사들의 사기를 올려야 합니다!"
"아아! 그만 하세나. 지금은 그걸 따질 때가 아니야."
지금과 같은 전시 중에 일대일 면담을 요청하는 데는 필시 이유가 있을 터.
남작은 턱을 괴고 고민을 거듭하다가 한참 후에 입을 열었다.
"좋다. 면담을 받아들여라."
주군이 걱정된 부관이 그를 말렸다.
"남작님! 놈들의 계략이옵니다. 자신들에게 유리한 싸움에 일대일 면담 따위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내 몸은 걱정하지 말게나. 수행원으로는 그로퍼 경과 욘지 경을 데리고 갈 걸세. 그 둘은 우리 영지 최고의 기사들이니 위험하다고 해도 충분히 몸을 뺄 수 있지 않겠는가?"
기사는 주인이 자신들에게 목숨을 맡길 때 제일 감격한다고 하지 않는가!
그로퍼와 욘지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굳게 입을 다물었다.
병사가 다시 말했다.
"백작의 부관에게 그리 말하겠습니다. 또한, 남작님께 아무런 위험이 없다는 뜻을 전하기 위해 시간과 장소는 남작님이 결정하시길 원했습니다."
"좋다. 장소는 헤일론 백작의 주둔지와 서쪽 외성의 중간 지점으로 하겠다고 전해라. 시간은 앞으로 한 시간 후다."
"그리 전하겠습니다."
병사가 빠져나가자 남작은 서둘러 면담할 채비를 갖췄다. 부관이 멀뚱멀뚱 서 있자, 남작이 그에게 물었다.
"자네도 함께 가겠는가?"
"남아서 영지를 지키겠습니다."
"훗, 그래 주면 나야 고맙지."
"절대 적들에게 현혹되지 마십시오. 언제나 거짓만 일삼는 헤일론 백작이 아닙니까."
영지전을 일으킨 것도 별 말도 안 되는 명분 때문이었다. 프로시안 남작이 헤일론 백작을 멸시해, 그의 기사들을 감옥에 가둬 아사시켰다는 것이다. 프로시안 남작이 그에 대한 일을 해명했으나 아무도 그의 말을 믿어 주지 않았다.
남들이 보기에 프로시안 남작은 일개 시골 영주일 뿐이고, 헤일론 백작은 슈레이더 왕국의 기둥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곧 돌아옴세."
남작은 그 말과 함께 회의실 문을 열었다.
'남작님은 그러한 분이다. 돌아온다 하시면 꼭 돌아오시는…….'
그분은 자신의 주인이었다. 자신이 그를 믿어 주지 않는다면 대체 누가 그분을 믿는단 말인가.
부관은 모두 빠져나간 회의실을 공허함과 씁쓸함을 달래며 홀로 지켰다.
병사 몇 명이 투입되어 막사가 지어졌다. 햇빛을 막기 위해 지붕을 쳤고, 정면을 마주 보는 단 두 개의 의자만이 놓여졌다.
백작의 부관인 이든은 프로시안 남작보다도 먼저 두 명의 기사만을 대동한 채 나와 있었다.
"흠!"
이든은 신분상승을 꿈꾸며 백작의 부관으로 들어온 자로, 불과 얼마 전 백작의 마스터 경지에 전율을 느꼈다.
그 이후부터였다.
그는 신분상승의 꿈을 버리고 오로지 백작만을 따르길 맹세했다. 자신의 계략으로, 프로시안 남작을 처참히 무너뜨리기를 원했다. 그가 백작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았다면 오늘 이 자리에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무엇 하러 목숨을 걸면서까지 면담을 요청한단 말인가.
"남작이 제때 나올 것 같소?"
뒤에서 경호를 서고 있는 기사가 물었다. 그레이 기사단의 단장 알렌이었다.
"그래야지요. 그들은 궁금해서라도 나와야 할 겁니다. 이 면담이 지옥구덩이로 빠지는 길인 줄도 모르고 말이죠, 흐흐."
이든은 오만한 웃음을 지었다. 그의 계획은 섬세하고 치밀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자신들은 실패한다고 해도 손해 볼 것이 없었다.
그때, 다른 사람보다도 눈이 좋은 알렌이 손가락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저기 오는군."
알렌과 같이 서 있던 기사도 이내 발견했는지 눈에서 이채를 발산했다.
"과연 저들이 속아 줄지 모르겠소. 뭔가 함정이라도 파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오."
"저들도 절박한 상황입니다. 고작 오백의 군사로 오천의 군사를 막는다는 미친 생각을 할 정도로 아둔한 영주는 아니죠. 함정을 팔 만한 시간도 없었을 겁니다."
남작 일행이 30미터 앞까지 다가오자 이든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아무리 백작의 부관이며, 백작의 대리인으로 나왔다 한들 상대는 귀족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남작님. 프로시안 영지의 버팀목이신 프로시안 영주를 직접 뵈어 광영입니다."
"반갑소. 당신네들이 침범한 저 보잘것없는 성의 영주이올시다."
"하하! 보잘것없다니요. 보잘것없는 영지였다면 백작각하께서 이렇게 몸소 행차하셨을 리가 없지요."
그 말을 끝으로 이든이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명백한 조롱이었다. 성질 급한 그로퍼가 검을 뽑아 들 기세로 이를 뿌득뿌득 갈았다.
오래 걸어온 탓인지, 남작이 먼저 자리를 건넸다.
"그것도 그렇군. 자자, 서 있지만 말고 일단 앉아서 얘기하는 게 좋겠소."
"감사합니다."
남작이 앉고 나자 이든이 그제야 자리에 앉았다.
둘은 한참 시선을 마주하며 소리 없는 공방전을 펼쳤다. 그 과정에서 먼저 입을 뗀 것은 남작이었다.
"그럼 거두절미하고 얘기를 나눠 보지. 아, 이름이 뭐라 했지?"
이든은 아직 자기소개를 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든입니다. 평민이기 때문에 성은 없습니다."
"흠! 좋소, 이든. 난 정말로 궁금한 것이 많은 사람이오. 이런 전시에 일대일로 면담을 요청한 저의가 뭐요? 오히려 이 면담은 우리가 먼저 제의해도 모자랄 판이었소."
"백작각하께서는 프로시안 남작님에게 항복을 권유하라 하셨습니다. 항복만 하신다면……."
그때였다. 이든의 말을 끊고, 그로퍼의 검이 순식간에 뽑혀 나왔다.
"네 이놈! 어디 그 더러운 입을 놀리는 것이냐! 항복이라니! 우리가 저 오합지졸 군대에 겁먹는단 말이냐!"
여차하면 부관의 목을 날릴 기세였다. 이든의 뒤에 있던 기사들이 얼른 검을 뽑아 들며 견제에 나섰다.
"아아! 그로퍼 경, 그만 하시게. 경의 생각은 잘 알았으나 지금은 이성적으로 생각해야 할 때야. 좋아, 이든. 계속해서 말해 보게나."
스르릉!
남작의 말에 검을 다시 집어넣는 그로퍼.
하지만 검병에서 손을 떼지는 않았다. 그것은 이든을 지키는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항복하신다면 남작님의 작위만 회수하고 영지민들과 병사, 기사들은 온전히 받아 주신다 하셨습니다."
"아니 될 말이로군."
저런 식의 항복 권유는 영지전에서라면 항상 있어 왔다. 하지만 항상 음험하기 짝이 없던 헤일론 백작이다. 막상 항복하고 나면 또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백작각하께서 보급부대를 토벌군에게 온전히 보내 주신다 하셨습니다. 지금 토벌군은 사지에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이미 많은 용병들이 그들의 곁을 떠나 귀환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크흠!"
틀린 말은 아니었다. 자신의 부관과도 그것에 대해 걱정하기도 했다. 보급이 제때 이뤄지지 않았다면, 계약을 위반했다 생각한 용병들이 벌써 떠났을지도 모르는 일.
지금 토벌군이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도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원하신다면 지금 당장 따님의 행방과 토벌군의 근황, 모든 정보를 드릴 수도 있습니다."
"정말……인가?"
애처로운 눈빛을 보내는 남작의 모습에 이든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자신의 예상대로, 이미 남작은 반 이상 넘어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때, 이든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 말은 남작을 끝내는 데에 필요한 최후의 결정타였다.
"휴우. 만약 그래도 안 될 경우 백작각하께서는 남작님의 작위는 그대로 내버려 두시고, 지금부터 약 오 년 동안 생산되는 곡식의 40퍼센트를 상납하라 하셨습니다. 그것만 꾸준히 지켜 주신다면 군수물자를 보내는 데 저희는 어떠한 간섭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흐음!"
평소의 남작이라면 코웃음만 치고 뒤돌아설 것이다. 하지만 이미 며칠 동안 자기 딸의 생사조차 확인할 수 없었던 탓인지 마음이 흔들렸다.
최소한 부관만 따라왔어도 그의 판단력이 이렇게 흐려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곡식 40퍼센트 정도는 광산을 개발한 후에 얻은 금으로 충분히 충당할 수 있다.'
금은 프로시안 영지를 부유하게 만들어 줄 수단이었다. 그는 금을 최우선으로 믿고 고개를 살짝 끄덕임으로써 대답을 대신했다.
그에 이든이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옳은 결정을 하신 겁니다. 백작각하께서 크게 좋아하실 것입니다. 오늘 내로 장안의 숲으로 가는 모든 길목을 열어 드리고, 이틀 내로 철군을 준비하겠습니다."
그의 표정 연기는 보는 이로 하여금 뭐든지 믿게 만들 정도로 뛰어났다.
그의 웃음 속에 가려진 본심은 그 누구도 알아보지 못했다.
"항복을 증명하는 친필서한이라도 하나 써 주면 되겠소?"
"아니, 아닙니다. 저흰 남작님을 믿습니다."
이든의 말에 남작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대로 영주성으로 되돌아갔다.
그가 사라진 방향을 보며 이든은 비릿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 모든 것은 시작일 뿐……."
이안과 소렌트가 귀환하고 이틀이 지나갔다.
바로 다음 날이면 보급부대의 군수물자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토벌대는 시간이 지체되자 뭔가 이상한 것을 느꼈다.
"이럴 리가 없습니다. 통신병을 보내 봐야 합니다."
"맞습니다. 보내야 합니다, 아가씨."
그들의 말대로 세리아는 세 명의 통신병을 보냈다. 발 빠른 말들을 준비해 두었기에 하루도 안 걸릴 거라 생각했지만 그 다음 날이 되어도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통신병들이 돌아오지 않음을 어느 정도 눈치 챈 병사들 사이에서는 하나의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하나, 생각보다 신빙성이 있어서 아둔한 용병들이 속아 넘어가기에는 충분했다.
"헤일론 백작가의 공격에 프로시안 남작이 죽고 영지를 빼앗겼다는군."
"영지민이 몰살당하고 그들의 군대가 장안의 숲을 둘러싸고 있어서 우리는 고립되었다고 하던걸?"
술렁거림이 잦아지자, 사령부에서는 즉시 함구령을 내렸으나 이미 퍼진 소문은 막을 수가 없었다.
특히 보급품이 오지 않아 상처가 썩어 악화되는 것을 지켜만 봐야 하는 병사들은 그 소문을 더욱 믿을 수밖에 없었다.
한 번 더 통신병을 보내기로 했으나, 성내에 비축해 놓은 식량이 바닥을 보이자 용병들은 마구간을 기습해 말까지 잡아먹을 정도로 흉폭해졌다.
성내에서는 여기저기서 불만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프로시안 남작은 계약 조건을 어겼소!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소이다. 이렇게 된 이상 성을 빠져나가 용병 길드로 돌아갈 것이오!"
"이틀을 굶었습니다! 정말 프로시안 남작이 죽은 것 아니오?"
세리아는 소문의 근원지를 찾으려 했으나 이천 명이 넘는 용병들에게 일일이 캐묻고 다닐 수도 없었다. 오히려 세리아 자신이 그 소문을 점차 믿어 가고 있었다.
사령부에 나온 세리아는 여러 자리가 비었다는 것을 알고 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어떻게 된 일이죠?"
"몇몇 자들이 밤에 탈영했습니다."
세리아가 불같이 성을 냈다.
"뭐, 뭐라구요! 어, 어떻게 용병들이 탈영을 했죠? 그동안 칸 아저씬 뭘 하셨어요!"
"죄송합니다, 아가씨. 더 이상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미 성내에서도 이백 명 정도가 탈영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런……."
용병들로서도 변명할 거리는 있었다.
애초에 계약서에 모든 보급품을 제때 지급하기로 명시돼 있었으니 단 하나라도 계약 내용을 어긴 이상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의뢰인인 남작이 죽어 버렸다는 소문까지 도는 이상 그들은 오히려 남작가에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도 있었다.
쾅!
세리아가 어금니를 꽉 깨물더니 비장한 표정으로 탁자를 거칠게 내리쳤다.
"좋아요. 이렇게 된 이상 저라도 영지로 돌아가 봐야겠어요. 칸 아저씨와 소렌트 경, 이안 경은 이곳에 남아서 남은 병사들을 잘 추려 주세요."
"마, 말도 안 됩니다, 아가씨! 어쩌면 성내에 퍼진 소문이 사실일지도 모르는데 아가씨가 직접 나서신다뇨. 절대 허락할 수 없습니다."
"허락? 허락할 수 없다니요? 전 이곳 총사령관이에요. 칸 아저씨는 저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권리가 없다고요! 게다가 칸 아저씨마저 그 허무맹랑한 소문을 믿는다는 거예요?"
칸은 세리아의 말에 고개를 푹 숙였다.
"아닙니다, 아가씨. 제가 그만 생각이 짧았습니다."
칸이 아무리 세리아의 마법 스승이라 해도 세리아는 영주의 딸이었고, 이번 토벌의 총사령관이었다.
"몸이 날랜 자들로 오십여 명만 준비해 줘요. 위험해져도 금방 몸을 뺄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가진 자들로만요."
"한 시간 안에 준비해 두겠습니다."
세리아는 칸의 말을 듣지도 않고 그대로 나갔다. 이안은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세리아가 방을 나가기 전 매직 마우스로 자신에게 말을 걸었기 때문이다.
"제가 만약 시간 내에 돌아오지 못한다면 총사령관 직은 이안 경에게 부탁하겠어요."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아가씨."
"고마워요. 하지만…… 아니, 아니에요. 이안 경의 말대로 꼭 돌아오겠어요."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했지만 이내 얼버무리는 세리아.
그녀의 말에는 왠지 자신감이 없어 보였다.
면담이 끝난 뒤 남작은 다급히 군수물자를 보낼 보급대를 꾸렸다. 성에 있던 병사들과 각 마을의 자치대원들을 끌어 모은다고 하더라도 칠백을 넘지 못했다. 남작은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인근에 사는 사십에서 육십 세까지의 건장한 남자들을 강제징병 했다.
물론, 그들은 성을 지키는 수비병력이었다.
그렇게 되자 보급대를 제외한 수비병이 이천을 넘어설 정도로 늘어났다. 하지만 이 병력은 그저 머릿수를 채우기 위해 모은 오합지졸일 뿐이라는 것을 남작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오천의 병력에 맞서, 눈이 좋은 이들은 벌써부터 다리를 절거나 창을 쥔 손에서 힘이 풀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평생 농사나 짓던 이들이었기에 전쟁을 겪어 보는 것은 처음이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부관이 다가와 남작에게 보급대의 상황을 알려 주었다.
"보급대 전원 준비 완료입니다. 남작님의 명령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모두 재빠르게 움직여야 할 걸세. 우리의 손에 토벌대의 목숨이 달려 있다. 그로퍼 경과 욘지 경이 보급부대를 맡아 주시게. 그리고 그곳의 상황을 자세히 알아서 나에게 전달해 주면 고맙겠군."
"하, 하지만 남작님! 그로퍼 경과 욘지 경은 병사들과 기사들이 아주 잘 따르는 이들입니다. 그들이 사라지면 이 성을 지킬 자는 남작님밖에 없습니다."
"원래 이 땅은 내가 영주로 있는 곳. 기사들의 도움이 아닌 내 손으로 이곳을 지켜야 한다."
비장한 각오를 한 듯 남작의 눈이 이채를 발산했다. 그러한 남작의 모습에 부관은 어떠한 반론도 하지 못한 채 한숨을 푹 쉬었다.
"후우! 그로퍼 경과 욘지 경에게 그렇게 일러두겠습니다."
남작은 부관이 사라지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눈빛에서는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 * *
하렌은 토벌대에 참여하여 통신병으로 활약했다.
통신부대는 약 스무 명으로 구성되어 있어 프로시안 영지와 정보를 교환하는 부대였다.
그곳에서 하렌이 맡은 임무는 프로시안 영지의 정보를 세리아에게 보고하는 것이었다.
하렌은 한솥밥을 먹던 같은 부대 소속 병사 두 명과 함께 프로시안 영지를 향해 빠른 속도로 질주해 나갔다.
하지만 며칠 동안 물 한 모금 먹기 힘들었던 그들이었기에 평소라면 금세 주파하는 거리를 간간이 쉬면서 가야 했다. 게다가 말에게 먹일 여물조차도 부족했기에 말 역시 틈틈이 쉬게 해 줄 수밖에 없었다.
꿀꺽꿀꺽!
하렌은 강에 얼굴을 그대로 담그고 벌컥벌컥 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하렌뿐만 아니라 그를 따라온 두 명의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푸하!"
하렌이 먼저 얼굴을 물 밖으로 내밀며 소매로 입가를 스윽 닦았다. 식량이 없었기에 물이라도 가득 담아 가야 했다.
하렌의 바로 옆에 있던 병사 그룬이 주위를 쳐다보더니 아까부터 천둥 치는 배를 문질렀다.
"하렌! 잠깐만 기다려라. 이 형님이 배가 고파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겠다."
그가 숲 속 깊은 곳까지 들어가려는 것을 본 하렌이 기겁했다. 아무리 얼마 전에 대대적인 토벌을 했다고 하더라도 아직까지 그들의 인식 속 장안의 숲은 몬스터가 사는 아주 무서운 곳이었다.
"멍청한! 우리의 어깨엔 아주 중요한 일이 걸려 있거늘, 지금 네 배고픈 것을 타령해야 하겠냐!"
꼬르륵!
그렇게 말하는 하렌의 배에서도 천둥이 울렸다.
"헤헤! 이러지 말고 과일 딱 하나만 먹읍시다, 하렌 형님. 어차피 근처에선 몬스터도 볼 수 없을 텐데 말이죠."
그룬의 말에 동의를 표하며 간사한 표정으로 웃는 이는 밀락이었다. 그룬이나 하렌과 마찬가지로 밀락도 며칠 동안 음식 구경을 한 적이 없었다.
그룬이 주변의 나무들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런 나무들이 있는 것을 보니 주변에 과일이 열린 게 분명할 거야. 몬스터도 이미 토벌했으니 임자 없는 과일 나무가 분명해!"
그룬은 그렇게 말한 후 밑동이 어른 허리의 세 배는 될 법한 나무들이 우거진 숲 속으로 사라졌다. 그룬이 사라지고 얼마 후, 밀락도 바지를 걷어 올리고는 머리를 긁적이며 하렌에게 말했다.
"하렌 형님. 그럼 잠시 실례. 헤헤!"
밀락이 수풀 사이로 모습을 감추자 하렌은 계속해서 갈증이 느껴지는 탓인지 계속 물을 들이켰다. 위장에서도 물맛을 오랜만에 느끼는 터라 계속해서 입으로 들어갔다.
한참이 지나도 밀락이 돌아오지 않자 하렌은 이상한 낌새를 차리고 경계하는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뭐지? 혹시 큰 것을 누나?"
며칠간 음식 맛도 못 본 녀석이 큰 것을 눌 리가 없었다. 분명 오랜만에 물을 마신 탓에 위가 놀라 소변을 보러 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렇다면 밀락이 늦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5분이고 10분이 지나도록 기다렸지만 밀락이 오지 않자, 하렌은 그가 사라진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파밧!
"음?"
수풀이 살짝 흔들리는 소리.
하렌이 경계심을 담은 눈을 그곳으로 돌리자 토끼가 재빨리 도망치는 것이 보였다.
"토끼였나?"
하렌은 안심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때였다.
"하, 하렌 형님!"
밀락의 목소리였다.
하렌은 밀락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잠시 후 도착한 곳에서는 밀락이 뭔지 모를 그물 같은 것에 걸려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과일을 구하러 사라진 그룬 또한 밀락의 옆에 있는 그물에 잡혀 있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하렌 형님! 어, 어서 그, 그물 좀 풀어 주세요."
그물이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는지 그룬이 크게 소리쳤다.
"이 멍청한……! 하렌! 이 주위에 다른 놈들이 있다. 빨리 이 사실을 영지로 가서 알려! 빨리!"
그룬의 말에 하렌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일단 도망쳐서 이 사실을 알려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가 등을 뒤로 돌리며 곧 도주하려 하자 그의 뒤로 또다시 그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 돼!"
마치 절망과도 같은 소리였다.
그 소리가 귀를 울리자, 갑자기 불에 덴 듯 다리가 화끈한 기분이 들었다.
푸슉!
"크아악!"
하렌은 비명을 내지르며 그 자리에서 넘어져 굴렀다. 그의 허벅지에는 화살 하나가 관통해 있었다.
하렌이 넘어지자 열 명이 넘는 일대의 무리가 나타났다.
"이들을 백작각하께 데려가라."
"예!"
밀락과 그룬은 곧 그물에서 풀려났고, 다음 순간 병사들이 휘두른 몽둥이에 머리를 강하게 얻어맞았다.
"큭!"
"컥!"
방심하고 있던 터라 밀락과 그룬은 그대로 자리에 쓰러져 기절하고 말았다. 하렌이 자신을 공격한 이들을 보기 위해 고개를 높이 들자 검은 천이 그의 눈을 가렸다.
"이놈! 어딜……! 흐흐. 이 어르신들의 얼굴을 보는 게 네 신상에 좋을 것은 없을 것이다. 이만 잠이나 자 둬라."
퍼억!
그의 말이 끝나자 머리에 화끈한 충격이 가해졌다. 하렌은 그 충격과 동시에 정신을 잃었다.
소드 마스터라는 초인의 경지에 오른 후부터 헤일론 백작의 얼굴은 항상 편안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얼굴에는 예전에 보이던 음심이나 욕심 따위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이성과 본능을 조절할 수 있는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마스터는 오감이 엄청나게 발달한다.
그는 프로시안 영지의 성벽 위에 서 있는 병사들을 보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남작이 아주 악을 쓰는군. 한눈에 봐도 창 한 번 휘둘러 보지 못한 놈들을 성벽 위에 세워 두다니."
그의 말에 부관 이든이 동조하듯 말했다.
"그만큼 저희를 믿지 않는다는 것이겠죠. 저런 행위는 이미 항복의 취지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가서 말리고 올까요?"
"아아, 그만두는 게 좋아.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겠지. 평생 농사나 짓던 것들이 활을 날려 봐야 얼마나 정확하고, 또 창을 휘둘러 봐야 얼마나 빠르겠어?"
그건 맞는 말이었다. 헤일론 백작의 사병들은 아주 혹독한 훈련을 쌓고 영지전에 투입된 자들이었다.
헤일론 백작만큼은 아니더라도 병사들 중에는 눈이 나쁜 이가 하나 없었다. 그들도 자신들의 발 앞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질 프로시안 영지를 상상하고 있었다.
프로시안 영지의 농노들은 오합지졸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때 병사 몇 명이 말을 타고 달려왔다. 그 소리에, 지키고 있던 병사들이 길을 비켜 주었다.
"백작각하를 뵙습니다!"
"그래, 무슨 일이냐?"
"프로시안 영지와 토벌군을 연결하던 통신병 세 명을 잡아 두었습니다. 이든 님 말대로 매복을 하고 있었더니 놈들이 속절없이 걸려들었습니다."
부관은 통신병들이 아무리 많아도 다섯을 넘지 않을 거라 예상하고 각각 열 명으로 구성된 총 서른 개 팀을 장안의 숲 곳곳에 숨겨 두었다. 이미 토벌군이 쓸고 간 자리였기 때문에 몬스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예상대로입니다, 백작각하. 이미 놈들은 통신병들의 소식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바, 백작님이 원하시던 그 기사나 토벌군 사령관인 남작의 딸이 직접 나설 것이 분명합니다."
부관의 말대로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으니, 헤일론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좋다! 그 통신병 세 명을 내게 데려오라."
"옛!"
병사들이 자리에서 물러나고 잠시 후 얼굴이 창백해진 하렌 일행이 끌려 나왔다.
하렌 일행은 먹은 것이 없어서인지 더없이 초췌해 보였다. 게다가 온갖 고문을 당했는지 다리가 기이하게 비틀려 있어 제대로 걷는 이 하나 없었다.
그들을 끌고 온 고문 전문 병사 하나가 말했다.
"독한 놈들입니다. 제 평생 고문으로 지내 왔으나 이놈이나 저놈만큼이나 입을 열지 않는 놈은 처음입니다."
하렌과 그룬이었다. 그들은 통신부대에 소속되기 이전부터 혹독한 훈련을 받아 왔다. 아무리 잔인한 고문이라 해도 그들의 입을 열게 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병사가 실실 웃으며 자부심 가득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흐흐! 하지만 이놈은 다릅니다. 몇 번 강하게 두들겨 패니 아주 술술 내뱉었습니다. 이것이 놈의 입에서 나온 현재 토벌군의 상황입니다."
"음!"
백작이 눈짓하자 부관 이든이 나서서 서류를 받아 들었다. 대체적으로 많은 정보가 들어 있는 것은 아니나 이든이 살펴본 결과 토벌군의 상황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였다.
그리고 앞으로의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도 정확히 예측할 수 있었다.
하렌과 그룬은 원망스런 눈초리로 밀락을 바라봤다. 그들 셋은 각자 다른 방에서 고문을 받으며 며칠 동안 얼굴을 보지 못한 상태였다. 설마 밀락이 입을 열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부관이 보기에는 어떠한가?"
"시간이나 정황상, 고립되어 있는 상태이니만큼 남작의 딸이 직접 나설 것입니다. 아마 남작의 보급부대가 방금 전에 출발했으니 이쯤에서 만날 확률이 큽니다."
부관은 세리아의 성격이 어떠한지 낱낱이 알고 있었다. 그녀는 결코 이런 상황에 직면해 남에게 일을 맡길 성격이 아니었다.
부관이 가리킨 곳은 장안의 숲과 토벌군이 있는 곳의 가운데쯤 되는 지점이었다. 근처에 룩커 강으로 흐르는 물줄기를 볼 수 있는 절벽이 있고, 나무들이 우거져 매복하기가 매우 용이했다.
"좋다! 이든, 이곳을 맡아라. 난 군사 천 명을 은밀히 움직여 보급부대를 치겠다."
백작이 이미 이 원정에 나서기 전부터 생각해 둔 것이었다. 부관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았습니다."
백작은 말 그대로 군사들을 은밀하게 움직였다. 오천의 병사 중 천 명이 빠져나갔지만 프로시안 영지에서는 아무도 눈치 채는 자가 없었다. 설마 천 명이나 되는 병사가 줄었을 거라곤 상상하지 못한 것이다.
백작이 이끄는 천 명의 병사들은 정말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보급부대는 군수물자를 옮기는 수레를 몰고 있었기 때문에 시간이 배 이상이나 걸렸다.
그렇기에 헤일론 백작은 곳곳에 매복하기 좋은 곳을 선정해서 각각 궁병들을 배치했다.
백작의 부관 이든도 성을 바라보며 공격 준비를 갖췄다. 사천의 병사 정도라면 피해가 전무할 정도로 영지 외성을 장악할 수 있다. 외성을 지키는 병력이 아무리 많아도 천오백을 넘지는 못한다. 그리고 내성을 지키는 병력이 오백이다.
항복으로 어느 정도 방심하고 있는 외성을 공격한다면 하루나 이틀 안으로 점령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레이 기사단의 단장 알렌이 멀찍이서 성을 바라보며 부관에게 의문을 표시했다.
"항복했는데 굳이 공격할 필요가 있겠소?"
"후후! 알렌 경. 헤일론 백작가는 항복 권고를 쉽게 받아 줄 만큼 만만한 곳이 아닙니다."
"크흠! 그것도 그렇군."
"남작……. 우리는 절대 그대들을 내버려 둘 생각이 없습니다. 후후후!"
알렌은 오늘만큼은 부관의 웃음소리가 섬뜩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