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인하르트-17화 (17/60)

■ 제17장 음모의 시작 □

필립 후작의 저택.

필립 후작은 작은 통신용 수정구를 보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력을 지닌 필립 후작이 고개 숙인 모습은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프라스 제국의 대공을 뵙습니다."

프라스 제국의 대공이라 하면 유라시아 대륙에서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한 자다. 심지어 어린아이조차 '엄마'라는 말보다 그의 이름을 먼저 배운다고 하지 않던가!

킹 제레브.

대륙에서 유일하게 킹이라는 단어가 붙는 자!

대륙십강 중에서도 제일 강한 자!

왕국 내에서도 왕족이 아닌 자는 사용이 불가능한 통신구슬이 필립 후작 저택에서 사용되고 있었다. 구슬 속에서 걸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필립 후작, 예정대로 진행되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초대 황제의 무덤을 찾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으니 믿어 주십시오."

"후후. 그래, 그래. 내 자네를 의심해서는 안 될 일이야. 그런데 요즘 자네에 대한 소문이 너무도 좋지 않아. 오백만 골드나 사용해 버리다니…… 그 많은 돈을 어디다 썼는가? 설마 자네 같은 인간이 왕국을 위해 사용했다고 보기도 어렵고……."

"그, 그게, 은밀하게 쉐도우 로드와 접촉을 시도하다 보니……."

당황하는 필립 후작의 표정에 수정구슬 반대편의 남자가 웃음 지었다.

"후후! 설마 그 쉐도우 로드가 내 목을 노리는 것은 아니겠지?"

대륙십강의 지존이 킹 제레브라면, 쉐도우 로드는 몇몇 사람들에게만 은밀히 알려진 또 다른 강자였다. 그 실력이 출중하여 대륙십강의 일원이라 칭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필립 후작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히 드러났다.

"그, 그럴 리야 있겠습니까? 설사 노린다고 해도 쉐도우 로드는 결코 대공을 해할 수 없을 겁니다."

"그렇지. 대륙 내에서 나보다 강한 자는 없을 테니까."

결코 헛된 말이 아니다.

대륙십강의 일원 두세 명이 달라붙어도 킹 제레브를 이긴다고 장담할 수 없을 정도라 했다. 그는 십 년이 넘도록 수많은 강자의 아성을 깨뜨리며 최고의 자리를 지켜 온 자였다. 그리고 유일한 그랜드 마스터이기도 했다.

"그럼 자네에게 명을 내리겠다."

"명을 받듭니다, 대공!"

"현재 전력으로 슈레이더 왕국을 집어삼키는 데는 얼마나 걸리나?"

"한 달 후, 천춘절(왕의 생일)이 있습니다. 그때 모든 귀족들이 참석할 것이니 경계가 소홀해진 틈을 탄다면 무리할 것도 없습니다. 한 달! 한 달이면 됩니다."

"그날만을 기다려 왔겠지?"

"제 평생을 그날을 위해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대공!"

"그럼 명을 내린다. 자네는 슈레이더 왕국의 왕이 되어라. 그것이 나 킹 제레브가 내리는 명일지어다."

"명을 받듭니다."

"실패는 죽음뿐이다! 명심해 두어라!"

* * *

대륙 곳곳에 수백 개가 넘는 분점을 두고 있을 정도로, '블랙 머플러(Black Muffler)'는 정보와 암살을 주로 하는 단체 중 최고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반인들은 그 존재 자체도 모르고 있었으니 철저하게 베일에 싸인, 음지에 있는 단체였다.

과거 수십 년 전부터 어쌔신들 사이에 은밀하게 전해 내려오는 말이 하나 있다.

'모든 정보는 그의 귀에 들어갈 것이고, 그는 모든 어쌔신들의 경배를 받을 것이다.'

블랙 머플러라는 단체를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는 수장의 얼굴을 보았다는 자는 대륙에 그 누구도 없었다.

쉐도우 로드.

나이, 이름, 얼굴, 출생지,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자.

다만 몇몇 귀족들은 그가 대륙십강과 버금가는 무위를 지녔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블랙 머플러의 본점은 놀랍게도 유라시아 대륙의 큰 축을 이루는 펠타온 제국의 수도에 자리를 잡고 있다.

예로부터 기사의 나라인 펠타온 제국에 어쌔신들의 수장인 쉐도우 로드가 있다는 것은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만큼 기사들은 어쌔신을 경멸하기 때문에, 마주친다면 서로 으르렁거리는 사이였기 때문이다.

어두운 방 안.

칠흑 같은 어둠이 방 안을 맴돈다. 자신의 손발마저 확인하지 못할 정도로 어둡다.

"으하하하! 놀랍군. 정말 놀라워……. 설마 이곳에서 '그것'을 발견할 줄이야! 필립 후작이 제법 쓸 만한 구석도 있군그래."

그는 광기 띤 얼굴로 호탕하게 웃어 젖혔다.

프로시안 남작의 영지 근처에 있는 장안의 숲에 라인하르트 초대 황제의 무덤이 있다는 것은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알고 있어도 그에게는 그다지 흥미 있는 얘깃거리가 아니었다. 어느 나라건 간에 왕이 있고, 그 무덤이 있다.

아무리 라인하르트 제국이 유라시아 대륙의 4할을 점령했던 대제국이라 해도 별로 놀랍지 않은 얘기였다.

그런데 얼마 전 삼백만 골드짜리 의뢰가 들어왔다. 의뢰인은 '익명'으로 철저하게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 했으나, 남자는 그 의뢰자를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고맙소, 필립 후작! 설마 당신 따위가 의뢰한 것에 삼십 년간 찾아다녔던 것이 있을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소이다."

마치 그는 앞에 필립 후작이 있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

한참을 웃던 남자는 잠시 후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다.

"카리스!"

파밧!

그러자 그의 앞에 칠흑의 복장을 한 남자가 스르르 나타났다. 너무도 자연스러워서 마치 처음부터 거기 있던 사람 같았다.

"카리스! 이 정보를 필립 후작에게 넘겨라."

"예스, 로드!"

스르륵!

카리스는 남자에게서 서류를 받고 그대로 자리에서 사라졌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발자취 하나 남기지 않고 바람처럼 사라진 것이다.

끼익∼

카리스가 사라진 뒤 한 여자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여인의 미모는 절로 감탄이 나올 정도로 뛰어났다. 이 방이 칠흑이라면, 그 여인은 칠흑을 밝히는 빛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갸름한 턱선에 허리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은 남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이 있었다.

"어머? 로드, 당신이 삼십 년간 찾던 것을 필립 후작에게 고스란히 넘길 생각이신가요?"

저벅저벅!

그녀가 한 발자국씩 다가오자 남자의 표정이 조금 부드럽게 변했다.

"후후! 둘이 있을 때는 아버지라 부르자 약속하지 않았더냐."

그의 말에 여인이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푸호호홋! 어릴 때만 해도 아버지라는 말을 그렇게 싫어하시더니……. 그리고 둘이라뇨?"

그녀가 천장으로 고개를 들어 올리면서 좌우에 있는 벽을 향해 살기를 내뿜었다.

"크흠!"

남자, 쉐도우 로드가 무안한 듯 헛기침을 했다. 그러고는 놀란 듯 속으로 중얼거렸다.

'난 분명 딸아이에게 그들의 위치를 밝히지 않았건만.'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의 곁에는 다섯 명의 특급 어쌔신들이 지키고 있었다. 마음먹고 은신하면 익스퍼트에 오른 기사들도 발견하기 힘들 정도였다.

쉐도우 로드가 화제를 바꾸어 말했다.

"그가 의뢰한 내용은 초대 황제의 무덤에 무엇이 있느냐 알아봐 달라는 것이었다. 그 물건은 내가 취할 것이야. 그 누구라 해도 물건에 손을 댈 수는 없을 것이다!"

"호호호! 로드께서 그 물건을 취할 수 있기를 기원할게요."

"당연하지 않느냐? 그 물건이 내 손에 들어오는 날 우린 음지가 아닌 당당히 양지로 나설 것이다. 내가 있음을 만천하에 알릴 것이야! 크하하하!"

"호호호!"

쉐도우 로드의 광기 어린 웃음에 여인 또한 웃었다.

* * *

병사들의 사기를 충족시킬 만한 연설은 없었다. 그들에게 현재 필요한 것은 이곳을 탈출할 수 있는 티켓뿐이었다.

"부상자들은 제일 안쪽으로 옮겨라. 우리가 빠져나갈 수 있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방패병은 사방을 둘러싸고 궁수들은 최대한 뒤에 있는 몬스터들을 공격한다."

"알겠습니다, 대장님!"

아사 직전의 병사까지 나오는 실정이라 대답하는 소리가 크지는 않았다. 그래도 초췌한 병사들을 위해 소렌트가 한마디 했다.

"기회는 한 번뿐이다. 죽지 않고 살아서 돌아가자!"

"우와아아!"

소렌트의 말 한마디에 병사들은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는 듯했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병사들은 단 한 번뿐인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눈을 빛냈다.

부상자들의 수가 제법 많았기에 행군 속도는 너무 더뎠다.

게다가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은 지가 제법 되었기에 그 누구라도 힘이 날 리가 없었다. 고작 며칠 만에 십 년은 늙어 버린 병사들의 표정은 비장하기 그지없었다.

이안과 소렌트가 맨 앞을 걸었다. 현재 1군과 17군 중 그들의 표정이 그래도 제일 밝았다. 익스퍼트에 오르면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기 때문에 물을 마시지 않고도 며칠은 충분히 버틸 수 있었다.

"이 속도로 30분만 더 가면 오크들과 정면충돌하겠군."

"어차피 한 번은 마주쳐야 하니 빨리 충돌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지금으로선 오크들한테서 빠져나간다고 하더라도 도망갈 힘도 없어 보입니다."

"그런 것 같군."

이안의 말에 소렌트가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이안이 황급히 뒤를 돌아봤다.

"음?"

강렬한 살기가 자신을 옥죄어 오는 기분이었다. 그런 이안의 행동에 소렌트가 의아한 듯 물었다.

"자네 왜 그러는가?"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십이경맥의 손상이 심해져서 신경이 예민해졌다고 생각한 이안은 만상귀일신공을 일으켰다. 일주천이라도 하며 마음을 가라앉힐 생각이었다. 그의 눈이 잠시 패도적인 기운을 띠더니 곧 안정을 되찾았다.

처음 이 무공을 연마할 때만 하더라도 패도적인 안광을 감추기 위해 방 안에 틀어박혀 서생 노릇을 했었다. 하지만 팔성에 오른 직후에는 그런 패도적인 내공을 잠재우고 조화를 이뤄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후후! 그 누가 알까. 도가 계열의 청성파 무공이 과거 살수 단체들 때문에 패도적인 기운을 띠게 됐다는 것을!'

그는 잠시 과거 생각을 했다가 다시 정면을 주시했다.

이제 잠시 후면 오크들과 직면하게 될 것이고, 자신은 제일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진법을 발현해야 하는 것이다. 워낙 범위가 넓다 보니 최대 5분 이상 진법을 발휘하기는 힘들었다.

"후우!"

이안이 짧게 숨을 내쉬었다.

여러 가지 생각을 담고 걷다 보니 어느새 오크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오크 궁수들이 가진 활의 사정거리가 멀지는 않으나 5분 후면 협곡 위에서부터 쏟아져 내려오는 화살을 고스란히 막아야 했다.

이안뿐만 아니라 웨일즈와 펠린마저도 표정을 굳히며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 갔다.

그들이 그러한데 병사들은 어찌할까.

꿀꺽!

한 병사의 침 삼키는 소리가 그 어떤 소리보다도 크게 들렸다. 이안은 소렌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놀랍게도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다.

'역시 제1군의 백인장이란 말인가!'

이런 상황에서도 저런 여유로움을 보여 줄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놀라웠다.

이안이 입가에 미소를 걸었다.

"방패병들은 방패를 위로 들어라! 창병들이 앞으로 달리면 궁수들이 그들을 지원하라! 전군! 돌격!"

"우와아아아!"

거대한 함성이 남쪽 협곡에 울려 퍼졌다. 그들의 함성 소리에 놀란 오크들이 부랴부랴 무기를 집어 들고 돌격해 왔다. 하지만 이미 체계를 잡고 진영을 구축한 채 달려드는 인간들의 상대가 될 리 만무했다.

"이안 백인장!"

소렌트의 외침에 이안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창병들보다도 앞서 달려가더니 곧 어제 진법을 위해 박아 넣었던 돌들에 내공을 불어넣었다.

위이이잉!

스팟!

"취, 취익! 뭐, 뭐냐!"

"이, 이게 뭐지? 취익!"

병사들과 격돌한 오크 수십 마리는 제법 멀쩡했으나, 뒤에 달려들던 오크들 수백 마리는 갑자기 머리가 멍해짐을 느꼈다. 그리고 갑자기 펼쳐지는 환영의 나래.

인간마저도 현실인지 꿈인지 헷갈리는 마당에 오크들이라고 구별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이문생사진에 꼼짝없이 갇혀 환영들과 싸우고 있었다.

"취익! 사, 살려 줘! 취익!"

"취이이익! 켁켁! 취이익!"

"기회는 한 번뿐이다! 단 5분! 5분 안에 이곳을 빠져나가라!"

"우와아아아아!"

병사들은 처음에는 오크들의 반응에 고개를 갸웃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점차 그것이 마법이라고 굳게 믿게 되었다. 마법이 아니라면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질 리가 있겠는가!

삼백 마리가 넘는 오크들이 침을 질질 흘리며 그대로 굳어 버린 채 비명을 지르다니!

두 눈을 온전히 뜨고 바라봐도 믿지 못할 일이었다.

환영들과 싸우기 시작하더니 종국에는 같은 오크끼리 살육전이 벌어졌다. 협곡 위에 대기하고 있던 오크 궁수들이 화살을 모조리 퍼부어 봤지만 견고한 방패는 뚫릴 리가 없어 보였다.

"전군 계속해서 진군하라! 방패병들은 방패를 앞과 좌우로 집중한다! 부상병들을 이끌고 재빨리 진군!"

소렌트의 명령에 더욱 힘입은 병사들은, 환영들과 싸우는 오크들을 절단 낸 뒤 재빠르게 도주해 갔다.

"저기 입구가 보인다! 입구가 보여! 계속해서 진군!"

"우와아아!"

병사들의 눈에도 오크들이 가득 둘러싸고 있는 입구가 보였다. 오크 궁수들이 몇 있었지만 이미 병사들의 기세는 어쩌지 못할 지경이었다.

"갈!"

제일 먼저 달려든 이안이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오크들을 향해 사자후를 터뜨리며 종횡무진 움직였다. 조금 전보다 다소 위력이 감소된 듯한 모습에 소렌트가 궁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역시, 마스터는 아닌가? 아니, 어쩌면 실력을 숨기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아직까지 오러 블레이드를 뿜어 대는 것을 본 적이 없어 마스터라 생각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때의 움직임은 마스터가 아닌 이상은 결코 보여 줄 수 없는 것이었다.

소렌트는 아련하게 느껴지는 마스터의 실마리를 잡기 위해 온갖 짓은 다 해 봤지만, 결국 마스터가 될 수는 없었다.

마스터와는 인연이 없는 거라 생각하고 체념한 순간 자신의 눈앞에 마스터로 보이는 청년이 나타났다.

'어쩌면! 실마리를 잡을 수도 있어!'

그러기 위해서는 살아남아야 한다. 아무리 상대가 어리다 하더라도 마스터라면 깨달음을 얻을 조언을 구할 수도 있었다.

소렌트의 검도 거침없이 오크들을 베어 냈다.

"길이 열렸다! 모두 저곳으로 이동하라! 성이 눈앞이다."

몇몇 병사들이 화살에 맞아 협곡에서 죽음을 당했다. 오크들의 창검에 싸늘한 시체가 되었다. 병사들은 죽은 동료들의 몫까지 싸워 나간 끝에 드디어 탈출로를 열 수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푸드덕 푸드덕!

수십 쌍이 넘는 날갯짓 소리가 협곡에 울려 퍼졌다. 그들이 서 있는 곳으로 짙은 그림자가 드리우자, 몇몇 병사들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위로 들었다.

"어? 뭐, 뭐지?"

"뭐야? 이봐! 위를 봐 봐."

꿈을 꾸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하얀 나체의 여인이 날개를 가진 채 하늘을 날고 있었다. 그 미모가 가히 심금을 울릴 정도라 모두들 멍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 여신이다!"

"마, 맞아! 여신께서 내려오셨다! 여신이 틀림없을 거야!"

하피들이 빠른 속도로 병사들에게 날아왔다. 하지만 병사들은 그저 멍한 표정으로 있을 뿐이었다.

"키엑! 키에에엑!"

차창!

그들은 날카로운 손톱을 내세운 채, 엄청난 하강 능력을 보여 주었다.

하피 한 마리가 내려오자 병사들은 오크들의 존재도 잊은 채 다리가 풀려 털썩 주저앉았다.

'이, 이런!'

이안은 자신 또한 넋 놓고 있었다는 사실에, 얼른 상념에서 깨어나 내공을 끌어올렸다. 그의 내공이 들끓기 시작하더니 점차 검으로 집중되었다.

"풍천진의!"

청풍검법의 절초인 풍천진의가 이안의 몸을 한번 휘돌더니 하피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슈욱! 슉슉!

"키에에엑!"

하피의 비명이 협곡을 울렸다. 그 비명 소리에 병사들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이안을 바라봤다.

"저것들은 요물입니다! 이곳이 하피의 영역이란 것을 잊으셨습니까!"

이안의 공력 섞인 외침에 병사들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진영을 정비한 채 도주하기 시작했다.

하피들도 이안에게 경각심을 느꼈는지 더 이상 덤벼들지 못한 채 오크를 향해 다시 달려들었다.

이안은 자신들을 위협하던 오크가, 고작 오십 마리나 될 법한 하피들에게 전멸당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몸을 잘게 떨었다.

예전 장안의 숲을 정벌하기 위해 십만 대군이 사용했던 성의 이름은 '디펜스 캐슬'로 지어졌다. 디펜스 캐슬을 지키는 병력은 용병과 병사를 합쳐 약 오백 명이었는데, 평소 백여 명 정도가 교대해 가며 보초를 섰다.

이번 토벌대에 지원한 존슨은 얼마 전 B급 용병을 이긴 것도 모자라 계속 승승장구하고 있는 실력자였다. 게다가 마나를 느끼기까지 하며, 최근에는 웨폰 오러 최상급에 오르는 기염을 토해 냈다.

만약 그가 다른 영지로 갔다면 기사의 종자도 충분히 될 수 있을 만한 실력이었다. 시골 영지라면 기사까지 될 수 있는 실력을 갖춘 셈이다.

하지만 그는 프로시안 영지를 떠날 사람이 아니었다. 새로 정착하기까지 얼마나 고된 힘이 드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그가 프로시안 영지 토벌군으로 참여해서 맡은 일은 디펜스 캐슬의 보초대장이었다. 병사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초대장까지 올라간 것은 엄청난 승진이라 할 수 있었다.

그의 친구인 한스가 훈련대장이라는 높은 직급에 있었기 때문에, 한스의 입김이 닿았다고 볼 수 있었다.

매일 보초들을 감시하는 보초대장이었으니 그다지 힘이 드는 일도 없었다. 간간이 겁 없이 달려드는 중급몬스터들은 기사들이 알아서 처리해 주었으니 목숨을 위협받을 일도 없었다.

"어?! 저, 저기!"

그때 보초병 중 하나가 우거진 숲 속에서 약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갑자기 나타난 것을 보고 외쳤다.

"대장님! 웬 부랑자들이 갑자기……."

"이놈!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어린 병사 하나가 내뱉은 외침에 존슨은 진위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성벽 바깥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그런데 어린 병사의 말이 맞았다. 옷은 전부 걸레나 다름없었고 눈은 퀭한 것이 여기저기 피딱지가 묻어 있었다. 게다가 얼굴까지 초췌해 보여, 부랑자나 다름없어 보이는 집단이었다.

영지에서 보았다면 일단 보고를 올리고 상부에 넘길 테지만, 여긴 장안의 숲이다. 장안의 숲에 화전민이 있다는 것은 듣도 보도 못했다.

순간, 그는 유독 번쩍이는 눈을 가진 남자를 보고 성밖으로 다급히 뛰어 나갔다.

"이놈들! 1군과 17군의 귀환이다! 문을 열어라!"

"예? 그들이라면 벌써 다 죽었다고……."

"멍청하긴. 시체라도 확인해 봤느냐!"

"아이고, 예예."

"어서 성문을 열어라. 난 상부에 보고하겠다."

1군과 17군이 토벌을 실패하여 돌아오지 못한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들은 것이 바로 며칠 전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살아 돌아왔다고 하니, 세리아는 신발도 신지 않고 무작정 성문으로 내달렸다.

몇몇 백인장들이 그들이 돌아온 것을 보고 화색을 띠었다.

"정말 잘 돌아왔소이다. 우린 자네들이 다 죽은 줄 알았구려."

친분이 있는 백인장들의 말에 소렌트가 입에 미소를 걸며 이안을 어깨동무했다.

"후후! 우리도 다 죽는 줄 알았지. 협곡에 갇혀 이도저도 못했으니 말이야. 여기 이 친구가 아니었으면 정말 죽을 뻔했어!"

"오! 자네가 바로 17군 백인장인가?"

"반갑습니다. 제17군 백인장, 이안입니다."

"하하, 정말 딱딱한 친구로군. 어쨌거나 자네들이 살아 돌아왔으니 정말 기쁘기 그지없구려! 자자, 이럴 게 아니라 들어가세나."

"소렌트 님, 부상자들이 있으니 먼저 들어가십시오. 여긴 제가 맡겠습니다."

"그래 주겠나? 알았네. 그럼 잘 부탁하네."

소렌트가 사라진 뒤 이안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협곡에서 정말 죽을 뻔했기에 살아 있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만약 또다시 갇힌다면 용빼는 재주가 없는 한 다시 살아 나올 수 없을 것이었다.

"부상자들은 모두 신관님에게 보내 주세요. 빨리요! 위급한 순으로!"

이안은 직접 나서 병사들을 옮겼다.

현재 토벌대에는 마리엔의 제자인 페그가 나와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도 몸은 하나인지라 치료하는 데 상당히 애를 먹고 있었다.

"휴우! 이거 어떻게 해야 하나? 부상자가 한둘이 아닌데. 약초도 다 떨어졌으니 보급대가 올 때까지 꼼짝없이 기다려야겠군."

그때 이안의 옆으로 작은 바람이 불어왔다.

세리아가 맨발인 채 화사한 웃음을 지으며 이안에게 한 발자국씩 다가왔다.

"괜찮아요. 군수물자는 아마 내일쯤 도착할 수 있을 거예요. 예정보다 빨리 출발한다고 했거든요."

이안이 세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웃음 속에 묻어 있는 작은 슬픔을 보았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그가 살아 돌아왔다!

설마 죽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렇게 자신의 두 눈으로 실체를 확인할 수 있었으니 그 믿음을 저버리지 않은 것이다.

'정말 살아 돌아왔어!'

세리아는 자신의 심장고동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를 바라보자, 그를 생각하자 보통 때보다도 두 배나 빨라졌다.

세리아가 한발 한발 다가오더니 이내 이안의 품에 안겨 버렸다.

"아, 아가씨?"

이안이 당황한 기색으로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으나 세리아는 오히려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험험! 아가씨."

이안이 헛기침을 하고 살짝 밀어내자 세리아는 다소 상기된 얼굴로 얼굴을 푹 숙였다. 주변에 있는 병사들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앗! 미, 미안해요. 정말 그러려고 한 건 아닌데……."

이안은 당혹스런 표정을 짓다 이내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아뇨. 걱정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제가 깜박 잊고 먼저 아가씨를 뵈지 못한 점 사과드리겠습니다."

세리아가 이안의 능글맞은 표정을 보며 얼떨결에 대꾸했다.

"아, 예에……."

"이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아니, 같이 들어가시죠."

이안이 에스코트 하듯 손을 내밀자 세리아가 그 손을 잡고 웃었다.

"호호! 좋아요, 기사님."

세리아의 심장박동이 평소보다도 배는 빨라졌다. 바로 옆에 있는 이안이 자신의 심장 소리를 들을까 두려울 정도였다.

이때만큼은 이안이 익스퍼트 급 기사라는 것이 얄미울 정도였다.

'아이 참, 들리는 건 아니겠지?'

이안은 세리아가 자신에게 이러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도 연애에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었기에 눈치 채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다만 기사의 예로써 레이디를 대할 뿐이었다. 그의 그런 점 때문에 세리아는 이안에게 선뜻 다가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여신의 축복.

이 축복이 이안의 존재를 독보적으로 만들고 있었다. 생사를 가르는 사투에서 살아 돌아온 이안의 모습은 어느 여인의 마음이라도 설레게 만들 정도였다.

세리아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언제부터인가 세리아는 이안을 좋아하게 되었다…….

* * *

1군과 17군이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온 이때, 로이니스는 성안을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얼마 전 통신실에서 기다렸다가 남자들의 대화를 어느 정도 엿들을 수 있었다. 다소 위험을 감소하고 실라페로 그들의 대화를 엿듣는 데만 집중한다면 똑똑히 들을 수 있으리라.

정령력을 실라페에 온전히 돌리다 보니 로이니스는 발걸음을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실프를 운용해 자신을 은신시킬 여력이 되지 않았다.

통신실의 뒤에는 작은 창고가 있었는데 이번에는 그곳에서 대화를 나눌 참이었나 보다. 로이니스는 먼저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숨을 죽였다.

잠시 후, 창고 문을 열고 익숙한 목소리의 두 남자가 주위를 살피며 들어왔다. 이번에도 사일런스 마법을 시전해 만전을 기하는 모습이었지만, 실라페의 은신능력을 간파할 수는 없었다.

"따라오는 자는 없었겠지?"

"물론이지."

로이니스는 그들의 대화가 잘 들리자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귀를 쫑긋 세웠다.

"헤일론 백작 각하께서 소식을 전달하셨다. 오늘 아니면 내일 중으로 프로시안 영지와 보급대를 궤멸시킬 수 있다고 하시더군."

"오오! 벌써 말인가?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군."

그들의 대화를 엿듣던 로이니스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저, 저놈들! 헤일론 백작이 프로시안 영지를 노리는 건가?'

로이니스가 놀라는 사이 그들의 대화가 다시 시작되었다.

"그럼 우리가 할 일은 뭐라고 하시던가?"

"보급로가 끊기면 하루 이틀 내에 부상자들을 치료할 수 없게 될 테고, 식량까지 끊긴다더군. 그때 우리가 나서서 살짝 소문만 퍼뜨리면 되네. 프로시안 영지가 망해 용병들과의 계약이 저절로 끊겼다고 말일세."

"호오! 그거 참 흥미로운 얘기가 아닌가? 그렇다면 토벌군은 저절로 해산되고 영지는 고스란히 백작각하 손아귀에 넘어가게 된다는 건가?"

"해가 서쪽에서 뜨지 않는 한 그렇게 될 걸세!"

엄청난 대화를 듣고 만 로이니스는 갑자기 입에서 나오는 헛바람을 막지 못했다.

"허헙!"

순간적으로 손을 들어 막긴 했지만 워낙 소리가 컸기에 두 사람이 듣는 데는 충분했다.

"자, 잠깐! 방금 무슨 소릴 들었는데?"

후드를 깊게 눌러쓴 마법사 하나가 갑자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른 한쪽은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하고 남자를 탓했다.

"분명 자네가 신경이 예민해진 걸세."

"아, 아냐! 확실해. 주변을 둘러보는 게 좋겠어."

두 사람은 창고를 구석구석 뒤지기 시작했다. 로이니스는 실라페의 마나 파동을 저들이 느낄 거라 생각한 나머지 다급히 역소환을 진행했다.

파앗―!

하지만 역소환도 상당한 마나 충격을 준다. 주변 마나의 흐름이 뒤바뀌자 민감한 마법사가 그 자리에 우뚝 멈췄다.

"빌어먹을, 정령술사다! 정령술사가 숨어든 것이 분명해."

"나도 확실히 느꼈네. 설마 이런 창고에 정령술사가 숨어들었을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정령술사여! 지금 당장 나오지 않는다면 그 목을 잘라 버릴 것이다. 이곳에 있는 이상 빠져나갈 생각은 말아라!"

마법사의 말대로 로이니스는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나가려면 오로지 저들의 뒤에 있는 작은 문을 통과해야 한다. 그렇다고 실라페를 운용하느라 대부분 날린 정령력으로는 저들을 상대할 수 없었다.

실프는 절대로 3서클 마법사의 상대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지?'

로이니스가 고민하는 동안에도 마법사는 그녀를 잡기 위해 주위를 이 잡듯이 뒤지고 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 잡히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녀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두 사람의 눈을 피해 자리에서 살짝 일어나 움직이기 시작했다. 문까지의 거리는 제법 멀다. 그녀는 거기까지 이동하는 데 숨도 한 번 내쉬지 않고 억지로 참았다.

다시 동태를 살피기 위해 얼굴을 살짝 내밀자 마법사는 로이니스가 있는 곳이 아닌 엉뚱한 곳을 찾고 있었다.

'딴 녀석은?'

눈을 돌려도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갑자기 불안한 나머지 고개를 더욱 내밀고 사방을 살펴보았다.

'어디 갔지?'

로이니스는 더 이상 상관하지 않고 실프로 자신의 몸을 감싼 뒤 그대로 문을 향해 달려들었다.

문이 코앞으로 다가온 시점 로이니스가 마법사 남자를 한번 쳐다보자 그는 입술에 미소를 걸고 있었다.

"뭐, 뭐야?"

그녀는 마법사의 웃음에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와 동시에 허리에서 불에 덴 듯한 느낌이 들었다.

슈악!

"꺄아악!"

실프의 배리어를 뚫고 검 하나가 옆구리를 스쳐 지나갔다.

주춤!

로이니스는 갑자기 자신의 신형이 크게 흔들리는 것을 느끼고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녀의 앞으로 검을 든 남자 하나가 살며시 다가왔다.

"검에는 독이 묻어 있네. 걱정 말게. 일단 우리도 그대를 죽일 생각은 없어. 검에 묻은 건 그저 마취약일 뿐이야……. 그럼 묻겠네. 우리의 대화를 엿들었는가?"

로이니스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예, 옘병! 꼬, 꼴값 떨고 있네."

뼛속부터 귀족이었기 때문에 절대로 자존심을 굽히는 짓은 하지 않았다.

"흐흐! 이번 거사가 끝난 후 다시 묻겠네. 그때까지 편히 잠이나 자 두게. 사흘 정도 굶고 나면 목이 말라 얘기가 하고 싶어질 걸세."

"우, 웃기지……."

쿠웅!

그 말을 끝으로 로이니스는 정신을 잃었다. 그녀가 정신을 잃자 두 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이놈을 묶어서 창고에 가두고 내가 수시로 확인을 해 봐야겠군."

"그러는 게 좋겠어."

두 사람은 로이니스를 창고 깊숙한 곳에 내팽개친 채 그대로 사라졌다.

창고 문을 통해서 들어오던 빛이, 두 남자가 창고를 나가고부터는 보이지 않았다. 정적이 찾아오고, 로이니스는 간신히 입술을 비틀어 중얼거렸다.

"이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