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인하르트-16화 (16/60)

■ 제16장 어쩌면 그는 마스터일지도 모른다 □

로이니스는 지난 5일간 두 명의 남자를 찾기 위해 성안을 이 잡듯이 뒤졌다. 실프를 이용해 흔적을 찾고, 밤에는 두 명의 성인 남자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은밀한 곳을 찾기 위해 돌아다녔다.

하지만 얻은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5일이라는 시간이 헛되이 느껴질 만큼 아무것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때, 병사 복장을 하고 있는 로이니스의 어깨를 잡는 남자가 있었다.

"자네! 혹, 통신실이 어디 있는지 아는가?"

로브를 입고 있는 젊은 마법사였다. 로이니스의 정령술사로서의 감각으로는 최소 3서클 이상의 마법사였다.

"몰라."

고작 스무 살도 안 됐을 법한 병사가 반말로 대답하자, 마법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뭐, 뭐라?"

그 모습을 본 로이니스가 다시 살짝 입을 열었다.

"……요."

"……."

"몰라요. 아니, 모릅니다. 이곳은 처음인지라……."

로이니스는 아차 싶어 황급히 말을 존대로 바꾸었다.

"흠! 모른다니 됐네. 다음부터 조심하게나."

마법사는 자신의 말을 끝내고 훌쩍 사라졌다. 멍하니 그 뒷모습을 쳐다보던 로이니스가 갑자기 경악스런 비명을 질렀다.

"아앗! 그러고 보니……."

방금 그 남자의 목소리가 상당히 귀에 익었다. 이곳에서 마법사로 보이는 자의 목소리가 귀에 익었다면, 은밀한 곳에서 대화를 나누던 둘 중의 한 명이기 때문일 것이다.

로이니스는 황급히 남자를 뒤쫓았다.

"없어! 없어! 대체 어디로 간 거지?"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지고 곰곰이 생각하던 로이니스가 갑자기 발걸음을 뚝 멈추고는 중얼거렸다.

"잠깐? 분명히 그놈이……."

'자네! 혹, 통신실이 어디 있는지 아는가?'

통신실을 찾고 있었다. 로이니스의 입가에 빙그레 웃음이 지어졌다.

"좋아! 일단 통신실부터 찾아가 보면 그놈의 행방을 알 수 있겠지. 실프! 지금 당장 통신실을 찾아."

통신실은 대부분 마구간 근처에 있다. 통신이라고 해 봤자 이런 작은 영지에서는 고작 말로 이동하여 소식을 전달하는 것뿐이었다.

타탓!

로이니스는 곧이어 마구간을 향해 마구 내달리기 시작했다.

5일 만에 얻은 단서였기에 포기하기가 쉽지 않았다.

* * *

"제1군의 피해는 사망자 마흔, 부상자가 서른일곱 명입니다. 부상자 중에서 다음 토벌에 나갈 수 있는 자는 고작 열 명도 채 되지 못할 것입니다."

"제17군의 피해는 사망자 열셋, 부상자가 여덟 명입니다. 부상자 중에서 다음 토벌에 나갈 수 있는 자는 전원입니다."

제1군이 움직일 수 있는 병력은 이제 오십 명도 채 되지 못한다. 오크들에게 둘러싸여 갇혀 있던 그들이었기에 피해가 너무도 막심했다.

제17군은 오크들이 방심한 사이에 공격한 탓에 1군보다는 피해가 적었으나, 사망자 모두가 마나를 다룰 정도로 수련된 병사들이었기에 뼈아픈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소렌트와 이안이 백인장을 맡고 있는 1군과 17군은 협곡에 갇혀 이도저도 못하고 있었다. 이 협곡을 넘어서 북쪽으로 올라가면 하피들의 먹이가 될 테고, 남쪽으로 내려갈 경우 기다리고 있던 오크들의 화살에 벌집이 될 것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문제인 것은, 더 이상 기다릴 여력이 못 된다는 것이었다. 예상치 못한 싸움이 벌어지는 바람에, 제17군만 고작 이틀 치의 식량을 갖고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이런 협곡에서는 식량을 구하기가 힘들었다. 그것을 쪼개고 쪼갠다 해도 사흘을 버티기는 힘들었다. 또한 부상자들을 치료할 약초를 알아볼 만한 자나 신관이 없어 상처를 방치해 둘 수밖에 없었다.

임시 회의실에 모인 몇몇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고 생각해 봐도 해결방안이 나오지는 않았다.

"……자네라면 어떻게 하는 것이 제일 나을 것 같은가?"

소렌트가 묻자, 이안은 현재의 상황을 설명했다.

"아시다시피 북쪽으로 가면 하피를 만나게 되는데, 저희는 하피의 가죽을 꿰뚫을 만한 화살을 보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남쪽으로 가자니 이곳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오크들을 상대로 싸울 병력이 남아 있지도 않지요."

정찰병을 보내 알아본 바 오크들의 숫자가 오백 마리를 넘어서고 있었다. 이안 혼자라면 발을 빼는 것이 무리가 아니었지만 병사들의 목숨이 붙어 있는 이상 두고 갈 마음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 지금 결론이 뭐요? 싸우자는 거요, 말자는 거요?"

웨일즈의 말에 회의실에 있는 자들도 덩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서 이틀 동안 처박혀 한 것이라고는 고작 머리를 맞대고 방법을 찾은 것뿐이었다. 하지만 이삼 일만 지나면 아사하는 병사가 나올지도 몰랐다.

"나 같으면 어차피 죽을 것 싸움이라도 하다가 죽는 게 나을 것 같소. 아사하고 싶은 마음은 절대 없으니까."

조용히 앉아 있던 이안이 버나드를 향해 물었다.

"남쪽으로 가는 통로는 사람을 기준으로 했을 때 몇 명이나 드나들 수 있는 정도입니까?"

"고작 오십 명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들어갈 수 있을 정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무슨 좋은 방도라도 생각나셨습니까?"

"흐음, 아닙니다."

오크들이 간악하게도 남쪽 협곡에 수많은 궁수들을 배치해 놓았기 때문에 그곳에서는 엘리나 버나드의 마법이 통하지 않을 것이었다.

오늘도 결론 없는 회의가 끝나자 모두들 초췌한 모습으로 딱딱하게 굳어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곳에서 아사할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었는데 누가 좋아하리.

불과 이틀 전만 해도, 1군과 17군이 막 도주를 시작할 때 오크들은 얼마나 재빠른지 추격대를 편성해서 쫓아왔다. 그때는 밤이기도 했고 너무 정신이 없었던지라 이안이나 소렌트도 협곡이라고 생각하지 못한 채 갇혀 버린 것이다.

"대장님, 아가씨께서 분명 정찰대를 보내 확인하셨을 겁니다."

여태껏 조용히 앉아 있던 펠린이 의견을 내놓았지만 이안은 고개를 흔들었다.

"저도 그랬으면 좋겠지만 우리가 이곳까지 온 흔적은 오크들이 모두 지워 놓았을 거예요. 어찌 된 것인지 오크들의 지능이 생각보다 좋아서 상대하기가 너무 까다로워요."

"그럼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아직 잘 모르겠어요. 일단 병사들을 잘 다독여 주세요. 여기까지 온 이상 오늘 아니면 내일 중으로 출병할 거예요."

"알겠습니다, 대장님."

펠린과 엘리, 웨일즈가 조용히 물러나자 이안은 주변을 둘러보며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이 협곡에서는 식량을 구하기 힘들고 나무 한 뿌리조차 보기 힘들다. 주변에 물이 흐르지 않았으니 이곳에 더 이상 있다가는 자진붕괴할 뿐이었다.

오로지 모래와 돌, 그리고 까마득히 높은 바위만이 동쪽과 서쪽을 가로막고 있다. 남쪽으로 갈수록 계곡의 간격이 좁아지는데 종국에는 고작 오십 명만이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좁아진다.

"아……!"

그때 이안이 이마를 손으로 짚으며 남쪽 끝의 지평선으로 눈을 돌렸다. 이런 협곡 안에서는 진법과 같이 병용하여 사용하는 연환계(連環計)가 가장 좋다.

연환계란 두 계책을 혼합해 사용하는 병법으로, 병법을 배우는 이들에게는 기초 중에 기초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실제 전장에서도 많이 쓰일 정도로 훌륭한 병법이다.

오크들의 머리가 아무리 좋다고 한들 인간에 비하면 떨어지는 수준이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이안은 지금 이 협곡 안에서 제일 쉽게 쓰일 만한 진법을 생각해 냈다.

고금 무림에는 자연의 산물인 돌이나 나무 등으로 이루어진 진법을 이용해 적을 가두거나 발을 묶는다.

이안은 과거 청성파 지하석실에서 무공을 발견할 때, 진법 하나에만 꼬박 삼 년의 시간을 투자한 적이 있을 정도로 조예가 제법 깊었다.

이안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캄캄한 곳에서 탈출구를 찾은 기분이었다.

세리아는 사령부에서 유난히 휑하게 느껴지는 빈 공간을 보고 생각에 잠겼다. 돌아오려면 벌써 돌아왔어야 할 1군과 17군이었다. 정찰대에서는 그들을 발견한 자가 없다는 보고가 쉴 새 없이 올라왔다.

"칼 아저씨, 정찰대를 더 보내서 1군과 17군을 찾도록 하세요."

"안 됩니다, 아가씨. 더 이상 정찰대를 보냈다가는 오히려 몬스터들의 경계심만 높여 주는 꼴이 됩니다."

이런 상황을 제법 겪어 본 칼로서는 침착하게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 처음 토벌대를 이끌어 본 세리아는 그들이 오지 않자 밤잠을 설칠 정도였다.

"그렇다고 이대로 내버려 둘 수도 없잖아요! 지금 이곳에서 그들을 발견했다는 사람이 도대체 누가 있죠? 어쩌면 현재 고립되어 못 오는 걸 수도 있잖아요!"

"죄송합니다, 아가씨."

그저 고개 숙이며 그렇게 대답하는 칼의 모습에 세리아는 답답함을 못 이기고 그대로 사령부를 뛰쳐나갔다. 몇몇 백인장들이 그 모습을 보고 혀를 끌끌 찼다.

"아직 어린 나이라 현실을 제대로 못 보고 계시는구려."

"그렇소. 사사로운 정에 이끌리시다니."

듣고 있던 백인장들도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수긍했다.

바깥으로 뛰쳐나온 세리아는 숙소로 돌아와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녀는 손바닥이 찢어져라 주먹을 세게 쥐었다.

"제발……! 제발……! 살아만 있어 줘요."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이안은 방안이 떠오르자마자 곧바로 소수를 이끌고 남쪽으로 은밀히 내려갔다. 그들은 소렌트, 웨일즈, 펠린, 버나드, 엘리로, 이안까지 포함해 모두 여섯 명이었다.

이안과 소렌트가 맨앞에서 움직였고 그 뒤를 펠린과 웨일즈가 버나드와 엘리를 지키는 식으로 이동했다.

"자네의 의중을 알 수가 없네. 대체 남쪽으로 이동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혹시 이 협곡에서 빠져나갈 방법이라도 찾았는가?"

제법 흥분된 표정으로 묻는 소렌트의 얼굴을 본 이안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러자 소렌트가 믿지 못하겠다는 듯 이안의 어깨를 뒤흔들었다.

"저, 정말인가? 하지만 이 정도 인원으로 도대체 뭘 할 수 있다고……."

"진법이라고 알고 계십니까?"

이안의 뜬금없는 물음에 소렌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투를 수행하기 위해 병졸들을 이용해 진을 치는 방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던가. 그런 것이라면 용병으로서 어깨 너머로 제법 배운 적이 있었다.

"후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네."

제법 자신 있어 하는 소렌트의 표정에 이안이 손바닥만 한 돌을 대여섯 개 가져와 소렌트의 주위에 뿌렸다. 그러자 돌들에서 여러 빛깔의 은은한 색이 나타났다.

"헛! 이, 이게 도대체 무엇인가?"

"놀라시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이안이 직접 돌의 위치를 바꾸며 내공을 불어넣자 잠시 후 소렌트의 눈이 멍하게 풀렸다.

그렇다. 이안이 펼친 것은 처음 진법을 배울 때나 사용하는 이문생사진(二門生死陣)이었다. 두 개의 길 중 하나는 생로, 하나는 사로로, 생로를 찾지 못하면 환영을 보며 죽음에 이르는 진법이었다. 하지만 상대가 인간이라면 진법에 조예가 없는 자라 해도 빛이 이끄는 방향으로 똑바로 이동하면 되었기에 쉽게 빠져나올 수 있었다.

"으으……."

소렌트의 입에서 신음 섞인 비명이 흘러나오자 그 모습을 본 웨일즈와 펠린이 크게 놀라 물었다.

"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백인장님?"

버나드가 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 구르자 이안은 가볍게 손뼉을 쳐서 진을 파훼했다.

이문생사진에서 간신히 살아 나온 소렌트는 처음 겪는 정신적 충격에서 쉽게 헤어 나올 수 없었다.

"헉! 헉! 도, 도대체 이게 무엇인가?"

"우리가 이 협곡을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이안의 말에 소렌트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 그렇군."

"어떠십니까?"

"불쌍하군."

소렌트의 말에 웨일즈나 버나드가 고개를 갸웃했다.

도대체 뭐가 불쌍하다는 걸까. 그 진법에 걸린 자신이 불쌍하다는 것일까.

"대체 뭐가 불쌍하다는 거요?"

웨일즈의 물음에 소렌트가 다소 상기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것에 갇혀 허우적거릴 오크들이 정말 불쌍하다는 말일세."

이안 일행은 빠른 속도로 움직여 30분 만에 남쪽 협곡 입구에 다다를 수 있었다. 동쪽과 서쪽 협곡 위에는 오크 궁수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서 있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오른다는 것은 애초에 무리였다.

"이제 나는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진을 구축하려면 적어도 십여 개의 커다란 돌이 필요합니다. 일단 그 돌을 구한 후 시간을 벌어 주시면 됩니다. 다행히도 이 협곡의 입구는 매우 좁습니다. 충분히 치고 빠지는 식으로 움직인다면 길게는 10분 이상 버실 수도 있습니다."

소렌트는 익스퍼트 최상급에 오른 고수다. 일초지적도 안 되는 오크들 정도는 여유를 가지고 상대할 수 있었다.

"대장, 그럼 우리는 뭐 하러 끌고 온 거요?"

웨일즈의 질문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와 버나드는 소렌트 님이 출발하기 전 제일 큰 마법을 시전해 적들에게 혼란을 주면 됩니다. 그럼 그때 바로 소렌트 님이 움직여서 시선을 자신에게 끌면 되는 것이지요. 펠린과 웨일즈는 엘리와 버나드를 지켜 주시면 됩니다."

말귀를 알아들은 이들이 아까와는 다른 의미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바깥에 있는 오크의 숫자는 적어도 오백 마리는 될 걸세. 저들을 모두 진에 가둘 수 있겠는가?"

"상대가 인간이라면 힘들겠지만 놈들은 오크입니다. 아무리 머리가 좋다고 한들 인간보다는 한 수 밑이지요. 일부만 혼란에 빠뜨려도 쉽게 빠져나갈 수 있을 겁니다."

"지금 상황이라면 그 이상의 방법이 나오긴 힘들 것 같군."

모두들 경계의 눈초리로 사방을 보는 한편, 이안과 웨일즈만 은밀하게 움직이며 사람 몸통만 한 돌을 구하러 다녔다.

돌이나 모래밖에 안 보이는 협곡인지라 돌을 구하기는 쉬웠다. 돌을 모두 구하자 이안이 직접 로열 소드를 꺼내 돌에 작게 한자를 적기 시작했다.

"그건 무슨 글자입니까? 용병 생활을 제법 했지만 그런 글자는 처음 봅니다."

마법사 버나드가 이안이 적어 넣는 문자에 흥미를 가졌다.

"이 진법을 만든 마법사가 만들어 낸 문자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진법은 발동되지 않습니다."

"잘못 적으면?"

"모든 것이 허사로 돌아가지요."

"컥!"

버나드가 경악에 가까운 비명을 질렀다. 이안은 살짝 웃으며 돌에서 검을 떼어 냈다.

"후후. 걱정 마세요. 이 짓만 하며 삼 년을 보냈으니 틀릴 리가 없습니다."

버나드는 그래도 걱정이 되는지 이리저리 문자를 쳐다봤다.

유라시아 대륙 문자보다도 훨씬 복잡한 형태에 머리가 멍해지는 느낌이다.

"자넨 도대체 이런 것을 어디서 배워 온 것인가?"

"전 펠타온 제국 사람이었습니다. 펠타온 제국은 기사의 나라. 병졸들을 이끄는 방법만큼은 특이하여 어느 나라도 펠타온 제국을 따라갈 수 없지요. 한 마법사가 발견한 것입니다."

날이 갈수록 늘어 가는 거짓말이다. 소렌트와 버나드는 제법 흥미를 갖는 듯하다가 펠타온 제국의 기술이라는 말에 기가 팍 죽었다.

"그렇다면 배울 기회가 없겠군."

"죄송합니다. 워낙 은밀하게 내려오는 기술이라."

"우리에게 그렇게 말해도 됩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말한다고 해도 믿을 사람이 없을 테니까요. 게다가 여러분이 말하지 않으리란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비밀에 부쳐 달라는 말이다. 버나드와 소렌트는 결코 누군가의 비밀을 함부로 입에 담을 사람이 아니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무덤까지 가져갈 테니 걱정 말게나."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일찍이 포기한 듯한 모습이었다. 이안은 그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살며시 돌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10분만 시간을 끌면 되겠는가?"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이안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엘리와 버나드가 자신들에게 가장 자신 있는 마법들을 캐스팅 하기 시작했다.

"화염의 여왕이 내뿜는 숨결이여, 내 앞에 있는 적들을 향할지어다. 플래임 블래스터!"

"차가운 바람의 신이 말하니, 내 앞의 모든 적들을 향하여 분노를 내세울지어다. 아이스 윈드(Ice Wind)!"

버나드의 손에서 작은 빛이 번쩍이더니 어느 순간 허공에서 격렬하게 폭발했다.

쿠콰콰쾅!

그 뒤를 이어 엘리의 손에서 차가운 바람이 불더니 그 주위 일대를 모조리 얼려 버렸다. 협곡 안으로 들어간 인간들을 기다리며 쉬고 있던 오크들이 당황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

"취, 취익! 침입자다!"

"취이익! 저, 저기 인간이다. 취익!"

소렌트의 모습을 발견한 오크들은 이내 침착을 되찾고 각자 무기를 꼬나쥔 채 그를 쫓아가기 시작했다. 소렌트의 뒤로 엄청난 수의 오크들이 따라붙자 이안은 거대한 돌덩이 하나를 품에 안고 그대로 오크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갈! 비켜라. 내 앞을 가로막는 놈은 모조리 베어 버릴 것이다!"

이안의 입에서 내공을 담은 사자후가 터져 나오자, 오크들이 사시나무처럼 떨기 시작했다. 이안의 검이 그런 오크들을 가로지르며 그들의 몸을 쪼갰다.

펠린과 웨일즈는 동쪽과 서쪽 절벽 위의 오크 궁수들을 바라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역시 이런 혼전 중에는 오크들도 쉽게 화살을 날리지 못한다. 고작 몇 놈 맞히자고 수백 마리의 동족들이 부대껴 있는 곳을 공격할 수는 없었다.

이안은 제법 높은 곳으로 뛰어올라 갖고 있던 돌덩어리를 벽에 박아 넣었다. 그런 식으로 여덟 개 정도를 박고 나자 진법의 범위를 늘려 줄 두 개의 돌을 놓기가 꽤나 애매해졌다.

"버나드! 엘리! 다시 한 번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겠어요?"

"무리입니다. 엘리 씨도 그렇지만 더 이상 마나를 사용한다면 다시는 마법 사용이 불가능할 것입니다."

엘리와 버나드는 이미 며칠 전 무리하며 마법을 사용한 적이 있다. 아직 몸도 성치 않은데 다시 한 번 마법을 사용한다면 몸 안의 마나가 바닥나 폐인이 될 가능성이 있었다.

"큭!"

십이경맥의 손상만으로 얼마나 뼈아픈 손실을 입었는지 잘 아는 이안이었기에 그들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안의 최고 신법인 빙허임풍이 아닌 이상은 오크들을 유린하며 후미까지 이동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소렌트를 슬쩍 보니 더 이상 견디는 건 무리로 보였다.

'어쩔 수 없나?'

십이경맥의 손상은 처음 프로시안 영지로 옮겨 왔을 때만 해도 엄청날 정도였다. 몇 달이 지난 지금이라고 완전히 치유된 것은 아니었다.

빙허임풍을 펼치려면 고통을 참아내야 한다. 이안은 어금니를 꽉 깨물고 만상귀일신공과 빙허임풍을 사용했다.

몇 달 만에 펼치는 빙허임풍의 느낌에 이안의 표정이 고통스럽게 변했다.

십이경맥을 천천히 순환하는 내공에 점차 고통이 심해졌다. 이안의 표정이 변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장난이 아니군! 오래가진 못한다. 빨리! 빨리!'

이안의 신형이 살짝 떠오르더니 순식간에 오크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그가 검을 살짝 흔들자 순식간에 수 마리의 오크가 베어졌다.

슉! 슈욱!

현란하다 못해 아름다운 이안의 무위에 펠린이나 웨일즈가 경악하며 입을 쩌억 벌렸다.

그런 식으로 마지막 돌까지 가져다 놓은 이안은 곧바로 모든 돌에 내공을 불어넣으며 발 빠르게 움직였다.

"크윽! 큭!"

챙챙! 채챙!

소렌트가 몇몇 오크 투사들과 사투를 벌이는 모습에 이안은 그대로 놈들의 허리를 양단했다.

아무리 소렌트를 상대하고 있었다 해도 이안의 기척조차 잡지 못한 오크 투사들의 경악한 모습에 소렌트는 벼락에 맞은 듯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마, 말도 안 된다! 어찌 인간의 몸이 저런 식으로 움직일 수 있단 말인가!'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할 광경.

마스터의 경지가 아니고서야 보일 수 없는 움직임.

소렌트의 시선이 이안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갔다.

'그는, 그는 마스터란 말인가!'

어려서부터 열망하던 경지, 마스터의 힘.

그것이 고작 자신의 반도 살지 못한 청년의 몸에서 흘러나오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핫!"

이안의 검에서 뿜어 나온 오러가 줄기차게 오크들을 휩쓸자 주위가 먼지로 뒤덮였다.

"웨일즈! 펠린! 엘리와 버나드 씨를 데리고 도망가요!"

이곳에서 할 일은 전부 했다.

둔기에 뒤통수를 맞은 듯 멍하니 있던 소렌트의 등을 살짝 두드리자 그가 얼른 상념에서 깨어나 정신을 차렸다.

"소렌트 님! 빨리 가요."

"아, 그, 그래야지. 미, 미안하네. 정신이 없어서……."

"자, 이쪽입니다."

"자네 괜찮나? 표정이 말이 아니군."

"괜찮습니다."

이안은 겉으로는 최대한 멀쩡한 척을 하고 있었지만 속은 거의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무리하게 빙허임풍을 펼쳤으니 그동안 꾸준하게 치료되던 십이경맥의 상처가 또다시 심해진 것이다.

'……어쩔 수 없군. 돌아가는 대로 최대한 치료에 힘쓰는 수밖에.'

이안은 창백해진 채 협곡 안까지 간신히 들어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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