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인하르트-15화 (15/60)

■ 제15장 제1군 소렌트, 그리고 제17군 이안 □

이안의 눈이 좌중을 훑었다.

세리아가 제일 상석에 앉아 있고 그녀의 옆으로 칸이 앉아 있었다. A급 용병들 중 제법 실력 있는 자들이 사령부로 왔고, 얼마 전에 보았던 용병들의 총사령관인 소렌트도 있었다.

"어서 오시오, 이안 경."

"반갑소. 이안 경이라고 했나?"

"아, 예. 에이전트 기사단의 부단장인 이안입니다."

구면인 소렌트가 먼저 인사를 건네자 다른 용병들과도 손쉽게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이안과 눈이 마주친 세리아가 눈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어떻게 된 일이에요?"

이안이 전음으로 얘기를 걸자, 세리아가 살짝 놀란 듯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예요, 저. 이안."

세리아가 잠시 중얼거리더니 마법을 캐스팅 했다.

전음과 같은 기능을 하는 매직 마우스였다.

"저야말로 묻고 싶네요, 이안 경. 어떻게 매직 마우스를 사용할 수 있죠?"

"매직 마우스 아니에요. 펠타온 제국에서 쓰던 거죠. 놀랐어요?"

"예, 정말 놀랍네요."

"그건 그렇고, 오늘 왜 이렇게 모였죠?"

"어머? 몰랐나요. 전 아실 줄 알았는데……. 조금만 기다려 봐요. 아직 모두 도착 안 했거든요."

그가 자리에 앉고 10분 정도가 흐르자 사령부의 자리가 꽉 메워졌다. 잠시 후 사령실 안의 라이트 마법이 꺼지고 어둠이 찾아왔다.

눈에 어둠이 익숙해질 때쯤 칸이 의자를 밀고 일어나 맨 앞으로 나섰다. 모두의 이목이 자신에게로 집중되자, 칸이 헛기침을 하고서 입을 열었다.

"험험! 프로시안 영주의 전속 마법사인 칸입니다. 사흘간의 면밀한 조사 끝에 적들의 정체와 머릿수, 지형 등을 파악했습니다. 물론 완벽하지는 않겠지만, 여러분도 알다시피 이번 토벌작전은 겨울이 오기 전에 끝내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시간을 오래 끌어서는 좋을 게 없다는 뜻이다. 다소 무리한 일일 수도 있겠지만 빨리 몰아쳐서 추운 겨울을 피하는 게 제일 좋다. 게다가 장안의 숲은 밤이 되면 일교차가 굉장히 심해지기 때문에 해가 지면 적을 공격할 방도가 없었다.

"여기 와 계신 모든 분들에게는 일단 백 명의 병사가 주어질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 백인장이 된 것이지요. 백인장에게는 각각 지도가 주어질 것이며, 그 지도에는 각자가 토벌해야 하는 구역들이 섬세하게 나누어 표시되어 있습니다. 자……! 이걸 나눠 주시죠."

성의 수비병력 오백을 제외한다면 약 이천 명의 용병과 병사들이 스무 명의 백인장 밑에 소속될 것이다. 이안은 이미 통보받은 사항이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넘어갔다.

그러나 잠시 후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단순히 그것을 말하기 위해 이들을 이곳에 모이게 했나? 그거라면 사람을 시켜 통보할 수도 있을 터인데…….'

이안은 미리 준비되어 있었던, 병사들이 나눠 주는 지도를 바라보았다. 일단 파악해야 할 것은 이 성을 둘러싸고 있는 몬스터들의 영역이다. 아무리 성안에 있다고 해도 이곳은 장안의 숲이다. 몬스터의 영역에 자리를 잡은 이상 아무리 성안이라 해도 안심할 수가 없다.

칸이 다시 입을 열자 이안은 지도에서 시선을 떼었다.

"백인장들도 알다시피 이곳은 보통 몬스터들이 아닙니다. 장안의 숲, 몬스터들의 땅이지요. 흔히 보는 몬스터들이라 착각했다간 목이 땅에 떨어지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을 겁니다."

모두들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장안의 숲의 몬스터가 괜히 무서운 것이 아니다. 여느 몬스터들과 현격한 차이를 보여 주는 전투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슈레이더 왕국의 십만 대군이 여기에서 무너진 또 다른 이유는, 바로 몬스터들을 아둔한 놈들이라 생각하며 방심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몬스터 토벌을 위해 움직일 때, 몇몇 백인장들은 이곳에 위치한 몬스터들을 토벌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가 가리킨 곳은 작은 동굴 수백여 개가 위치한 곳이었다. 제법 큰 언덕 위에 위치한 동굴들이었다.

이안의 부대가 토벌해야 할 곳은 그곳과 매우 근접해 있었다.

"저기가 어디인데 그리 호들갑이오?"

이안과 마찬가지로 그 인근에 토벌 구역이 정해진 백인장들이 입을 모아 묻자, 칸이 대답했다.

"그곳에 들어갈 수가 없어 자세히 조사할 수 없었습니다만, 몇몇 정찰병들의 말을 따르면 공중 몬스터들의 둥지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공중 몬스터는 잡기가 매우 까다롭다. 특히 질긴 가죽을 가진 것들은 화살공격이 통하지 않아 마법으로만 상대가 가능했다.

"공중 몬스터라면 그리폰 같은 것 말이오?"

"그렇습니다. 대표적으로 그리폰, 하피, 와이번 등이 있지만 아마 동굴의 크기로 볼 때 하피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곳에 인접한 구역을 맡은 분들은 특별히 마법사를 편성할 것이니 착오 없으시기 바랍니다."

이런 곳에서 하피를 만난다면 최악이다. 하피는 전투력은 없지만 현혹계열 마법을 사용하기 때문에 자칫하다가는 아군이 적군으로 변할 수도 있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가죽이 매우 얇기 때문에 석궁이나 활로 충분히 견제가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하피들이 마법을 사용하려면 최소 5미터까지 접근해야 했다. 숫자가 그리 많지 않다면 다가오기 전에 화살에 의해 벌집이 되어 버릴 것이다.

"그럼 대대적인 토벌은 내일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은 이만 쉬고, 내일 보도록 합시다."

간단한 회의가 끝나자 숙소로 돌아온 이안은 지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 자신이 잡아야 할 몬스터의 숫자는 오백 마리가 채 되지 않는다. 물론 백 명이 상대하기에는 많은 숫자라 볼 수도 있지만 몬스터들은 각자의 영역에 진영을 구축했기에 각개격파가 가능했다.

"문제는 지도에서 언급한 커다란 언덕이로군."

남작의 서재에서 읽은 바로는, 하피는 우윳빛 피부에 나체로 돌아다니는 몬스터였다. 그 미모가 경국지색에 이를 정도라 하니 과연 병사들이 제대로 활시위를 놓을 수 있을까 걱정이었다.

저벅저벅!

곧이어 들리는 작은 발소리에 이안은 지도에서 눈을 떼었다. 그리고 잠시 후 조심스럽게 문이 열렸다.

방 안으로 들어선 로이니스는 무언가에 쫓기는 듯 질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벗어서 침대 위에 올려놓은 투구는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아무리 더웠어도 저 정도는 아닐 것이다.

"로이니스, 무슨 문제 생겼어요? 도둑이라도 된 것 같은 표정인데요."

로이니스가 한숨을 쉬더니 침대에 풀썩 드러누웠다.

"후우! 아니, 아무것도 아냐. 사고 친 건 아니니까 상관하지 마."

다소 쌀쌀맞은 태도였지만 평소에도 그랬기에 이안은 그러려니 하고 그냥 넘어갔다. 갑자기 로이니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이안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이안, 이 성에 마법사들 숫자가 총 몇이나 되는지 알아?"

"그건 왜요?"

"빨리!"

"열다섯인데요."

"열다섯? 그렇다면 내일 출병하는 마법사는 총 몇 명이야?"

로이니스의 말을 들은 이안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어, 어떻게 알았어요? 내일 출병하는지. 설마, 사고 안 쳤다더니 엿들었어요?"

회의 내용을 엿듣는 것은 중죄다. 이런 전장에서는 목이 잘려 나가도 할 말이 없는 행위였다.

로이니스는 그것도 모르고 당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은 한숨을 푸욱 쉬더니 입을 열었다.

"다섯 정도. 많아도 열을 넘진 않겠죠."

"다섯? 많지는 않네. 알았어. 그럼 내일 잘 갔다 와."

친절하게 손까지 흔들어 주며 배웅하는 척하는 로이니스였다. 이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제17군이 위치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세리아의 입김이 닿은 탓인지 백 명의 병사들이 모두 프로시안 남작의 병사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만약 용병들이 조금이라도 섞였다면 통솔하기가 참으로 난감할 것이었다.

백 명의 병사들 중 조금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병사라기는 뭐하지만 웨일즈도 이 부대에 편입되어 있었다.

가장 먼저 이안의 눈에 띈 것은 백 명의 병사들 중 혼자만 로브를 입고 있는 자였다.

후드를 깊게 눌러쓴 바람에 성별조차 알 수 없어 가까이 다가가니 아담한 키의 여인이었다.

검사의 마나가 아닌, 심장에 작은 고리로 이루어진 패도적인 마나.

3서클의 마법사였다. 세리아보다는 두어 살 정도 많아 보였다. 약관에 나이에 4서클에 오른 세리아 정도의 천재는 아니지만, 저 정도 나이에 3서클에 올랐다는 것은 상당한 재능이라고 봐야 했다.

"안녕하세요. 제17군 백인장 이안이라고 합니다."

이안이 먼저 나서서 손을 내밀었지만 여인은 멀뚱히 쳐다보기만 할 뿐 선뜻 손을 내밀지 않았다. 그러다 한참 후에 떨리는 손으로 이안의 손가락 끝만 잡고 악수를 한 후 살짝 입을 열었다.

"엘리예요. 잘 부탁……해요."

이안은 최대한 웃는 표정으로 대했으나, 자신을 엘리라 소개한 마법사 여인은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

부끄러워하지도, 웃지도 않고 계속해서 무표정.

"저도 잘 부탁해요, 엘리."

용병이라고 하기에는 분위기가 너무도 다른 여인이었다.

"그럼 이만……."

이런 분위기에 익숙지 않은 탓인지 살짝 고개만 숙이고는 곧바로 사라졌다.

"아……."

이안은 닭 쫓던 개처럼 지붕만 쳐다보는 꼴이 되었다. 병사들이 이안의 표정을 보고 속으로 웃었지만 겉으로 내색하는 사람은 없었다.

* * *

방패병 스물과 궁수 서른, 마법사 하나와 장창병 오십으로 구성되어 발 빠르게 움직였다. 방패병들은 네 방향을 카이트 실드로 둘러싸고 있었고, 궁수들은 제일 안쪽, 그리고 장창병들은 방패병들 바로 뒤쪽에서 움직였다.

"하하하! 이거 길을 헤매는 꼴 아니오? 안 그러냐, 펠린?"

"……."

펠린은 기사단에서 나이도 제일 어렸지만, 가장 정숙했다. 그는 웨일즈를 힐끔 쳐다보더니 입을 꾹 다물었다.

이안은 실제의 지형과 지도를 비교해 보았다. 지도 보는 법은 제법 배웠지만 실전에서 사용하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능수능란할 리가 없었다. 그런 점에서는 펠린이나 웨일즈도 수준 미달이었기에 물어볼 수도 없었다.

한참을 길을 헤매던 중 매일같이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있는 엘리가 한쪽을 가리켰다.

"저쪽……이에요."

"저쪽이요?"

"……."

역시 무표정한 얼굴로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며 이안의 시야에서 멀어져 가는 엘리.

그래도 제법 용병 생활을 해 왔을 테니 믿어 보기로 하고 그녀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으로 움직였다.

채 5분을 걷지 않아 언덕 위의 예정지에 도착한 이안은 놀라운 표정으로 엘리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엘리는 이안과 눈도 마주치지 않고, 진영을 구축하고 있는 오십여 마리의 오크들을 보며 조용히 마법을 캐스팅 했다.

이안이 뒤를 바라보며 손을 높이 들었다.

"전군 정지!"

척! 척! 척!

백여 명의 병사들이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정확히 멈춰 섰다.

"장창병들은 뒤로 빠지고 방패병들만 앞으로 나온다. 궁수들은 그 뒤로 이동!"

명령을 내리자마자 30초 만에 소리 없이 이동했다.

"불화살 준비!"

삼십여 명의 궁수들이 화살에 불을 붙였다.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기고 있던 궁수들이 곧 터져 나올 이안의 외침에 집중했다.

"공겨억!"

휙휙휙휙휙!

삼십여 대의 화살이 하늘을 갈랐다.

언덕 밑에 있던 오크들은 화살 날아오는 소리에 놀란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가 당황하여 다급히 소리쳤다.

"적습이다! 취익! 취익! 모두 뭉쳐서 대응해라! 취익!"

하지만 불화살이 노린 것은 그들의 천막이었다.

"파이어 볼(Fire Ball)!"

조용히 캐스팅을 끝낸 엘리가 커다란 화염구를 오크들에게 쏘아 내며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파파팍!

콰앙!

불화살이 천막에 꽂히고 몇몇 오크들이 화살에 맞아 쓰러졌다. 파이어 볼에 맞은 세 마리의 오크들이 그 자리에서 재가 되어 사라졌다.

이안은 마법사가 전쟁터에서 왜 그렇게 귀중한 존재인지 알 것 같았다.

"취익! 화살! 취익! 화살을 쏴라! 취이익!"

몇몇 오크들이 분개하며 조잡한 화살을 쏘아 대자, 미리 준비하고 있던 방패병들이 앞과 머리 위를 보호하면서 모두 튕겨 냈다. 나무로 깎아 만든 조잡한 화살이 카이트 실드를 뚫을 리 만무했다.

"장창병 앞으로! 궁수 공격 그만! 방패병 검 들어! 모두 돌격! 펠린! 엘리를 지켜라."

펠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의 빠른 명령 하에 이루어진 공격에 오크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궁수들을 제외한 칠십여 명의 병사들과 이안, 웨일즈가 앞으로 나서며 오크들을 빠른 속도로 베어 내기 시작했다.

"취익! 도주하라! 취익…… 꾸엑!"

이안은 오크 무리를 통솔하는 체격이 우람한 우두머리의 목을 순식간에 베어 냈다. 우두머리를 잃은 오크 잔당들이 여러 방향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대장! 빨리 잡아야 되는 거 아니오?"

웨일즈가 묻자, 병사들이 수긍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손쉽게 거둔 승리에 아직 흥분이 걷히지 않은 병사들이 추격대를 조직하기를 원했지만 이안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뇨! 추격은 불가능합니다. 이곳은 장안의 숲입니다. 언제 또 다른 몬스터가 나올지 모르는 일. 한 시간 동안 여기서 쉬고 또 다른 오크를 찾으러 가겠습니다."

이안의 말에 병사들은 아쉬움을 달래며 몇몇 병사들을 불침번을 세우고 휴식을 취했다.

이안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병사에게 급히 물었다.

"피해 상황은?"

다소 상기된 이안의 표정을 본 병사가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

"오십 마리의 오크들을 사살했고, 사상자 0명, 부상자 0명입니다. 간단하게 승리했습니다!"

병사의 말에 이안이 통쾌하게 웃었다.

"하하! 정말 마음에 드는 승리였습니다. 상처 입은 사람이 정말 한 명도 없다는 겁니까?"

"대장님 말대로 보통 장창보다 두 배는 기다란 장창을 이용했더니 오크들이 돌격해 오기도 전에 꼬챙이가 되었습니다."

병사들이 들고 있는 창의 길이는 무려 3미터에 육박하고 있었다. 보통 창 두 개를 이어붙여 만든 것으로, 꾸준히 창을 들 힘만 있으면 무작정 돌격해 오는 오크 무리 정도는 손쉽게 죽일 수 있었다.

"대장! 다음 몬스터는 뭐요?"

"고블린 칠십 마리입니다. 이번에는 다른 전법으로 갈 것이니 방패병들이 수고 좀 해 주세요."

* * *

'아침부터 나간 마법사들의 숫자는 여덟. 그럼 일곱 명인가? 아니, 아니야. 프로시안 영지 마법사는 그 시간에 사령부에 있었으니 남은 것은 여섯이야!'

로이니스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같은 시각에 사령부 바로 위층으로 발 빠르게 움직여 실프로 몸을 숨겼다.

그녀의 예상대로 3층에서부터 삐걱대는 발걸음이 들려오더니 그중 두 명이 곧 옆방으로 들어갔다.

"백작……각하께서…… 언제……."

"아직…… 정……한 통……보……."

역시 사일런스를 쳐 둔 것인지 실프로도 그들의 대화를 완벽하게 엿듣기는 무리였다. 로이니스가 더욱 귀를 바짝 대려고 다리를 움직이자, 마침 그녀의 발아래 있던 나뭇조각이 부서졌다.

빠각!

"……."

"……."

둘의 대화가 끊겼다.

탁탁탁!

로이니스가 밟은 나뭇조각 부서지는 소리를 들었는지, 옆방에 있던 두 명이 방에서 나오자마자 로이니스가 숨어 있는 방을 급습했다.

쿵!

"누구냐!"

한 남자가 문을 확 열어젖히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방 안을 한동안 돌아다닌 남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내 착각인가? 방금 무슨 소리가 들렸던 것 같은데."

"여긴 아무도 오지 않는 곳이야. 설마 누가 오겠어?"

"그런가? 좋아. 왠지 기분이 찜찜한데. 내일부터는 장소를 옮기도록 하지."

"그러는 게 좋겠군."

예의 두 남자의 목소리였다. 그들이 방문을 닫고 나가자 문 옆에 실라페의 은신술로 숨어 있던 로이니스의 목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점차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로이니스는 바닥에 두 손을 짚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하아!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야?"

로이니스는 그 둘의 대화를 더 듣지 못한 것이 안타까운 듯 입맛을 다셨다.

"빌어먹을. 그 대화를 계속 들어야 하는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장소와 시간을 말하지 않고 훌쩍 떠나 버린 그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둘의 성별을 알아냈다는 것뿐이다.

현재 남아 있는 마법사들 중 남자는 네 명이다. 둘 다 마법사일 가능성도 있고, 한 명만 마법사일 가능성도 있었으니 상황은 점점 복잡해져만 갔다.

* * *

스무 개 부대로 나뉜 토벌군은 몇몇 사상자를 내긴 했지만, 한 팀의 낙오도 없이 승리를 이어 가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이안이 이끄는 제17군을 비롯한 몇몇 부대는 사상자 하나 나오지 않았다.

사십 년간의 용병 생활로 잔뼈가 굵은 소렌트가 이끄는 제1군이 그러했다.

소렌트는 그동안 용병들을 이끌었던 대로 침착하게 대응했고, 이안은 중원에서 십여 년 정도 공부한 것을 토대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파앗!

푸슉!

이안의 검이 오크 로드의 목을 거침없이 꿰뚫었다. 오크 로드가 죽자, 휘하 백 마리의 오크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런 오크들 사이를 마치 성난 멧돼지처럼 돌격하는 것은 펠린이었다. 기사단 사이에서도 나이가 제일 어리고 실력이 낮은 그였지만, 이번 토벌을 통해 실력이 크게 증진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이안은 자기 일처럼 기쁘게 웃었다.

"펠린의 실력이 그동안 많이 늘었군요. 이제 어느 기사단에 가더라도 손색이 없겠어요."

"어느 정도는…… 그럴 거요."

평민 신분에 기사가 되어 귀족들이 득실거리는 기사단에 들어갈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잘 알고 있는 웨일즈가 씁쓸하게 웃었다.

"이제 상황을 정리해야겠어요. 웨일즈는 부상자가 있는지 살펴보고, 모두 이곳을 빠져나가요. 이곳에서 사투가 벌어진 것을 주변 몬스터들도 알았을 겁니다."

"알겠소, 대장."

"좋아요. 자, 그럼 빨리 움직여요!"

이안은 오크 잔당을 모두 해치운 후, 몸이 멀쩡한 병사들을 시켜 화살들을 모두 회수하게 했다. 이곳에서는 화살이 매우 귀중하기 때문에 함부로 낭비할 수가 없었다.

"낙오한 자는 내버려 둘 겁니다!"

이안의 말에 병사들의 손길이 차츰 빨라졌다. 5분도 채 안 되어 모든 상황을 정리한 17군은 그대로 그곳에서 멀어져 갔다.

백 명이 넘게 움직였지만 사흘간의 토벌을 통해 몬스터들의 청각이 얼마나 예리한지 알게 된 그들이었기에 발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았다.

이안은 더욱 경계된 눈초리로 주변을 훑어가며 빠르게 전진해 나갔다. 그의 손에는 지도가 들려 있었고, 현재 제일 가까운 숙영지로 이동 중이었다.

"엘리! 숙영지까지 거리가 얼마나 되죠?"

"가까워요……. 아주 조금만 가면……."

엘리가 높낮이가 없는 말투로 조그맣게 말했다.

"아, 고마워요."

사흘간 엘리와 함께한 시간이 제법 되지만 그녀는 여전히 무표정을 고수하고 있었다. 엘리는 이안에게서 세 발자국 이상 뒤로 떨어져 펠린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었다.

그 모습을 본 웨일즈가 작은 웃음소리를 내며 이안에게 은근슬쩍 다가왔다.

"흐흐! 대장, 저 둘 정말 잘 어울리는 것 같지 않소?"

펠린도 성격이 소심했던지라 엘리와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무표정만 고수하고 있었다. 둘의 비슷한 모습에 이안도 웨일즈의 말에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핫, 저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었군요. 웨일즈도 그렇게 생각할 줄은 몰랐네요."

이안이 작게 소곤거렸지만 정작 들은 사람은 주변에 있던 웨일즈뿐이었다. 웃음소리에 펠린은 잠깐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그때였다.

"자, 잠깐 정지!"

이안이 손을 들고 외치자 백 명은 절도 있는 자세 그대로 멈춰 섰다.

"대장, 왜 그러우?"

"엘리! 지금 이 방향으로 쭉 가면 정말 숙영지가 나오는 게 맞아요?"

"네……."

"좋아요! 지금 이 앞에는 혼전이 벌어지고 있어요. 아마도 우리가 향하는 숙영지가 있는 곳이겠죠. 금속음이 들리는 것을 보니 인간과 몬스터 같아요. 지금부터 전투태세로 들어가 상황을 봐 가면서 아주 조금씩 움직일 겁니다."

이안은 적어도 1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몬스터들은 도망가는 인간들을 잡기 위해, 혹은 영역을 침범하는 다른 몬스터를 견제하기 위해 곳곳에 매복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

전투태세에 들어가자 방패병들이 사방을 둘러싸기 시작하고, 모두들 허리를 구부린 채 한 걸음씩 느리게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대장! 제정신이오? 어떻게 그 먼 곳 상황을 살핀단 말이오?"

웨일즈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을 하자 이안은 살며시 미소 지었다.

"날 믿어요. 아마도 우리가 향하는 곳에 그들이 먼저 진영을 구축하려 했겠죠. 하지만 요즘 토벌작전 때문에 몬스터들이 촉각을 곤두세운 것 같아요. 일단, 먼저 그곳에 먼저 도착한 사람들을 도와야겠어요. 이런 상황이라면 고립되어 빠져나올 수 없을 거예요."

"아, 알았소."

병사들도 처음엔 믿지 못하겠다는 눈치였으나, 지난 사흘간 이안의 말이 아니었으면 꼼짝없이 죽을 뻔했던 기억들이 생생하게 떠오르자 순순히 그 말을 따랐다.

"자, 빨리, 그러나 은밀하게 움직입시다. 아군을 도우려면 일단 매복해 있는 놈들부터 처리해야 할 겁니다."

이안의 말에 백여 명의 병사들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대장님! 더 이상 들어가면 위험합니다. 근처에 하피들이 서식한다는 동굴이 있습니다. 오늘은 일단 이곳에서 숙영한 뒤, 내일 다시 이동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음……. 알겠네."

지도를 들여다보던 중년의 마법사가 말하자, 소렌트가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군 정지! 오늘은 이곳에서 숙영한다."

그 말과 함께 지친 기색을 보이던 병사들이 금세 화색을 띠며 발 빠르게 움직였다. 평소와 같이 곳곳에 텐트가 쳐지고 근처 강가에서 물을 구하기 위해 열 명 정도가 소집되었다.

제1군 중년 마법사가 배낭에서 육포를 꺼내 드는 소렌트를 보며 물었다.

"오늘도 육포로 허기를 달래실 참입니까?"

"그래. 그게 제일 안전할 걸세. 자네도 용병이라면 알지 않나. 이런 곳에서 불을 피우는 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벌써 육포만 씹어 먹은 지가 사흘째입니다. 병사들 모두 지쳐 있는 데다가 사기도 떨어졌습니다. 어차피 근처에 몬스터도 없는데 오늘만이라도 좀 불을 피우는 게 어떻겠습니까?"

"크흠!"

마법사가 걱정하는 것은 밤이 되면 급격히 내려가는 기온이었다. 장안의 숲은 일교차가 매우 심하기 때문에 어둠이 내림과 함께 거센 추위가 시작된다. 불 없이는 밤을 보내기가 매우 힘들었다. 지난 사흘 동안 모두들 부둥켜안은 채 동사라도 할까 봐 뜬눈으로 지새운 이들이 많았다.

소렌트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마법사의 말에 따랐다.

"알았네. 대신 불은 아주 작게, 멀리 퍼지지 않도록 하게나. 그리고 자네는 근처에 알람마법을 걸어 몬스터의 침입을 언제라도 알릴 수 있도록 하고, 근처 퇴로를 알아보게."

자신의 의견이 관철되자 마법사가 밝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알겠습니다, 대장님. 병사들에게 곧 알리도록 하겠습니다."

소렌트의 명을 전해 받은 병사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지난 사흘 동안 불은커녕 미세한 온기나마 접해 보지 못한 그들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추위를 피해 보려고 두꺼운 천으로 노출된 피부를 가리기 위해 애쓰는 자들이 부지기수였다.

병사들은 갓 잡아온 토끼들을 손질하여, 근처의 먹을 수 있는 식물을 채취해 스튜를 끓였다.

보통 때라면 한 시간이면 식사 준비가 끝났을 테지만, 불을 크게 키우지 못하다 보니 세 시간이 넘어도 준비가 끝나지 않았다.

병사들은 조급해 하면서도 짜증 한 번 내지 않았다. 그만큼 스튜를 기대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준비가 완료되자 그 누구도 먼저 입에 들지 않았다.

마법사는 병사를 시켜 소렌트를 불렀다.

"대장님, 식사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알았네. 미안하지만 내가 먼저 들어야겠군."

"별말씀을. 대장님이 아니었다면 어찌 한 명의 희생자도 없이 지금까지 버텨 왔겠습니까."

"빈말이라도 칭찬이라 생각하겠네."

앉아 있던 소렌트가 병사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병사의 손에 난 커다란 상처를 본 소렌트가 물음을 던졌다.

"어디서 난 상처인가?"

"아, 이것 말씀이십니까? 아까 물을 뜨러 갔다가 그만 넘어지는 바람에 돌에 긁혀서 난 상처입니다. 별거 아니니 괘념치 마십시오."

"흐음, 장안의 숲에는 워낙 이상한 것들이 많으니 일단 상처를 치료하도록 하게."

"감사합니다, 대장님."

다섯 개의 커다란 냄비에 끓인 스튜는 결코 적은 양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동안 말린 고기 따위로 연명하던 병사들에게는 한없이 적은 양이었다. 당연히 부족하다고 느낀 소렌트는 병사들을 위해 아주 작은 접시에 한 번 담아 먹고 식사를 끝냈다.

마법사 또한 그다지 많은 양을 먹지 않고 식사를 끝낸 후 소렌트의 옆으로 다가왔다.

"부족하실 텐데 더 드시지 않습니까?"

그의 물음에 소렌트가 배낭에서 말린 고기를 꺼내 들었다.

"후후! 미안하지만 난 스튜보다는 육포를 더 좋아하는 사람일세. 자네야말로 더 들지 않고 뭐 하나?"

소렌트의 말에 마법사 또한 딱딱하게 굳은 빵을 꺼내 들어 입에 물었다. 딱딱하게 씹히는 빵에 물을 적셨지만 상황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이렇게 맛있는 빵이 있는데 무엇 하러 스튜 따위를 먹겠습니까."

소렌트가 봤을 때 그다지 먹음직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으하하하! 자네는 정말 바보일세."

"대장님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하하핫!"

둘은 초췌해진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호탕하게 웃었다. 그들이 웃는 동안 병사들은 어느새 식사를 끝내고 주변을 빠르게 정리하고 있었다.

그때 소렌트의 얼굴이 마법사가 먹은 빵처럼 딱딱하게 굳기 시작했다. 그가 다소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자네 말이 맞을 걸세."

"예?"

"난 정말 바보였군. 젠장! 모두 전투 준비! 몬스터다!"

소렌트가 말을 끝내고 곧바로 검을 들고 뛰쳐나왔다. 방패병들은 소렌트의 외침에 부랴부랴 방패를 들고 주위를 감쌌고, 그 안에서는 궁수들이 경계 어린 눈초리로 사방을 둘러보고 있었다.

마법사가 소렌트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서는 흥분된 표정으로 물음을 던졌다.

"어떻게 몬스터들이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을 알았을까요? 설마 불씨가……."

"그럴 수도 있겠지만, 결정적으로 큰 실수는……."

소렌트는 그 말과 함께 자신의 손에 묻은 핏물을 바라봤다. 아까 병사의 손을 강하게 잡으면서 상처에서 터진 피였다. 아무래도 상처 입은 사람이 있고 그 피가 떨어지자 근처에 있던 몬스터들이 몰려들어 미약한 불씨를 보고 정확한 방향을 찾은 것이다.

쿠쿠쿠쿠쿵!

나무가 넘어가듯 거대한 소리가 사방에서 울렸다. 숙영지 50미터 밖에 설치해 둔 알람 소리였다. 경보가 울린다는 것은 몬스터들이 벌써 50미터까지 근접해 왔다는 증거였다.

갑작스런 몬스터들의 습격에 대비했다 하지만, 병사들의 동요는 생각보다 극심했다.

"방패를 더 높이 들어! 만약 오크라면 궁수들이 먼저 공격해 올 것이다!"

소렌트는 주먹을 세게 쥐었다. 병사들의 공포와 동요를 막기 위해 큰소리는 쳤다만 그리 좋은 결과를 얻진 못했다.

접근하는 숫자로 보아 적어도 삼백 마리쯤 되지 않을까 싶었다.

'제길! 근처에 하피가 사는 동굴이 있다더니, 그 때문에 삼백 마리나 되는 몬스터 소굴을 발견하지 못했나 보군. 설마 하피들의 영역 근처에 다른 몬스터가 살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하고!'

삼백 마리나 된다면 자신에게 주어진 지도에 쓰여 있지 않을 리가 없었다.

"바보 같은 놈들. 하피는 원래 영역이 매우 좁기 마련이거늘. 다른 몬스터들과 같이 봤군."

이제 와서 후회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음을 아는 소렌트는 몬스터들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렸다.

"자네는 지금 접근해 오는 몬스터의 종류가 무엇인 것 같은가?"

소렌트의 물음에 마법사가 얼른 대답했다.

"고블린이나 코볼트면 좋겠습니다만, 최악의 경우 오크라면 궁수들의 공격에 병사들이 사기를 잃을 것이 확실합니다."

"좋아! 자네는 커다란 마법을 하나 준비하게나. 곧바로 몬스터의 공격이 시작되면 한순간 틈이 생길 걸세. 그때 그놈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게 제일 중요해!"

"알겠습니다."

곧이어 탁 트인 숙영지 사방을 검은 그림자들이 감싸기 시작했다. 몬스터들의 접근으로 인해, 주변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소름 끼칠 정도로 조용했다.

높은 나무숲 때문에 달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숙영지에 병사들은 발로 불을 끄고 어둠에 익숙해지기 위해 사방으로 눈을 돌렸다.

잠시 후, 다른 이들보다 빨리 어둠에 익숙해진 병사가 손을 벌벌 떨며 외쳤다. 안타깝게도 소렌트의 희망은 이 병사의 외침에 날아가 버렸다.

"오크다! 오크가 나타났다."

"제기랄!"

"동요하지 마라! 고작 오크일 뿐이다."

슈슈슈슈슉!

공포에 떠는 병사들의 외침이 울린 후 오크 궁수들의 화살이 빗발처럼 쏟아졌다.

타타탕! 푹! 푹!

완벽하게 방어에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엉성한 화살들이 방패를 뚫지는 못했으나 방패로 가려지지 않은 부분은 눈먼 화살에 꿰뚫렸다.

"아악!"

"크으윽! 내 발!"

한순간의 화살 공격으로 전투 불능이 된 병사가 다섯이다. 오크 궁수들은 한차례 화살을 쏘아 낸 뒤 물러났다. 첫 번째 줄의 궁수들이 사라지자 두 번째 줄의 궁수들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오며 다시 활시위를 당겼다.

"뭐, 뭐냐! 오크 따위가 이렇게 조직적으로 싸운단 말이야?"

소렌트는 직접 맞서기보다는 치명적인 부분을 노리고 날아오는 화살을 철저하게 검으로 막아 냈다. 하지만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몇몇 화살은 또다시 병사들을 전투 불능으로 만들고 말았다.

"대장님! 비키십시오. 이번에 싹 쓸어 버리겠습니다."

마법사가 캐스팅을 끝냈는지 오크 궁수들을 향해 마법을 내뿜었다.

"화염의 여왕이 내뿜는 숨결이여, 내 앞에 있는 적들을 향할지어다. 플래임 블래스터(Flame Blaster)!"

3서클 화염마법이 한순간 어둠을 환하게 비추며 오크 궁수들을 휩쓸었다.

콰콰콰쾅!

"꾸에엑! 취익!"

"취이이익!"

삼십 마리가 넘는 오크 궁수들은, 한 줄기 뻗어 온 화염마법이 폭발하자 사방으로 날아가 전투 불능 상태가 되었다.

마법의 폭발 장면을 본 소렌트가 순수한 감탄을 내뱉었다.

"대단하군!"

마법사는 이런 상황에서도 농을 던졌다.

"하하! 이 마법이 아니었다면 저는 지금쯤 농사나 지으며 먹고살았을 겁니다."

"그렇군. 모든 병사들은 들어라. 지금부터 남쪽으로 도주한다. 남쪽으로 퇴로를 뚫어라!"

"우와아아아!"

소렌트가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가며 퇴로를 막는 오크들을 베어 나갔다.

마법사는 병사 몇몇에게 보호를 받으며 간간이 마법으로 몬스터들을 상대했다.

"자네, 아까와 같은 마법을 다시 한 번 펼칠 수 있겠는가?"

"가능합니다. 다만, 마법 사용 후에 정신을 잃을지도 모릅니다. 정신을 잃으면 절 지켜 주시겠습니까?"

"걱정 말게!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켜 주겠네."

"그럼 2분만 시간을 벌어 주십시오. 퇴로를 향해 다시 한 번 마법을 사용해 보겠습니다."

"모든 병사들은 들어라! 방패병들은 마법사를 보호하고 힘을 비축해라. 한순간이다. 2분 후에 마법이 폭발하면 모두들 그쪽으로 돌격해야 할 것이다."

병사들은 방패를 더욱 견고하게 들며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2분간의 짧으면서도 긴 시간이 흐르자 병사들의 숫자는 처음에 비해 많이 줄어들어 있었다. 거의 스무 명에 이르는 병사가 죽거나 다쳐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언제 마법을 펼칠 수 있는가?"

"준비하십시오! 바로 지금입니다. 화염의 여왕이 내뿜는 숨결이여, 내 앞에 있는 적들을 향할지어다. 플래임 블래스터!"

마법사의 손에서 쏘아져 나간 붉은 광선이 순식간에 퇴로를 막고 있는 오크들을 날려 버렸다.

쿠콰콰쾅!

"모두 들어라! 남쪽으로 달려라! 지금뿐이다."

자욱한 먼지 속에서 병사들이 죽어라 내달렸다. 먼지가 가라앉을 때쯤에는 오크들과 상당히 거리가 멀어진 뒤였다.

"성공입니다, 대장님!"

10분도 채 안 되는 전투를 벌였지만 병사들의 모습은 말이 아니었다.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좋아할 때가 아니다. 오크들이 벌써 뒤쫓아오기 시작했다."

"알겠습니다!"

썩 좋은 상황은 아니었지만 병사들은 아까보다는 덜한 긴장감을 유지하며 뒤도 보지 않고 앞으로 내달렸다. 그때 갑자기 소렌트가 검을 던지며 발을 멈췄다.

"제길! 매복한 몬스터들이 있다!"

소렌트가 던진 검에 매복해 있던 오크 궁수 한 마리가 맞고 나무에서 떨어져 내렸다. 그 모습을 바라본 병사가 경악에 가까운 비명을 내질렀다.

"으아악! 오크 궁수다!"

"다시 방패를 들어라! 방패병을 믿고 도주하라!"

"큰일 났습니다. 전방에 오크 투사들입니다!"

보통 오크보다도 강한 오크 투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이미 남쪽으로 퇴로를 정했다는 것을 안 모양이었다. 그들이 주춤하는 사이 뒤에서 쫓아오던 오크들은 벌써 소렌트가 있는 곳까지 당도해서 서쪽과 동쪽, 남쪽 세 방향으로 물샐틈없이 포위했다.

"아악! 우리는 전부 죽을 거야."

"포기하지 마라!"

"살려 줘!"

소렌트도 용병 생활 사십 년 동안 이렇게 극에 달한 위기를 겪어 본 건 손에 꼽을 정도여서 어떻게 명을 내려야 할지 금방 해답이 나오지 않았다.

유일한 희망인 마법사는 이미 마나를 많이 사용한 탓에 기절했는 데다가, 병사들은 동요가 너무 심해 공포까지 느끼고 있었다.

'정녕 이곳에서 뼈를 묻어야 한단 말인가!'

뼈를 묻기 위해서는 장안의 숲은 좋지 않았다. 이번에 용병 생활을 청산하고 조용히 고향에 돌아가 손자나 돌보리라 마음먹었던 소렌트는 크게 상심했다.

용병 생활로 제법 번 돈을 고향에 부쳐 자식을 홀로 수십 년 키웠을 아내를 두고 가기에는 너무나 안타까웠다.

몇 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아들 녀석이 벌써 결혼하여 애까지 낳았다며 소식을 전해 온 것이 얼마 전이었다.

쿠콰콰쾅!

그때 남쪽에 있던 오크 투사들과 오크 궁수들이 한순간에 얼어붙었다.

"뭐, 뭐냐!"

삶을 포기했던 소렌트가 갑작스럽게 눈을 크게 뜨며 주변을 훑었다. 살을 에는 지독한 한기!

하지만 느껴지는 한기보다는 놀라움이 더 컸으리라.

남쪽으로 백여 명의 병사들이 나타났다.

"우와아아! 지원군이다!"

죽으리라 생각했던 제1군 병사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지원군이라 생각한 제17군의 백인장 이안이 검을 높이 들어 외쳤다.

"지금부터 저들을 도와 이곳을 빠져나갑니다! 엘리는 동쪽 방향을 향해 마법을 사용해 주십시오. 그 옆을 펠린이 지키고, 웨일즈는 저를 도와주세요."

"알았소, 대장."

그들은 빠른 속도로 오크들을 베어 내기 시작했다.

* * *

이안은 매복군을 향해 조심스레 다가가 빠르게 해치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몬스터의 숫자가 갑자기 급증하기 시작했다. 명백한 실수다. 몬스터들을 한낱 미물로 생각해 얕잡아 본 것이 이안의 커다란 실수였다.

사흘간 몬스터들도 자신들의 영역인 장안의 숲을 침범한 인간들에 대해 알게 되었을 것이다. 당연히 그에 합당한 준비를 끝내 놓은 그들이었다.

이곳은 다름 아닌 장안의 숲.

그들의 앞마당이었고, 장안의 숲의 몬스터들은 다른 숲의 몬스터보다 월등히 강하고 머리가 좋다.

책에 써 있는 몬스터들의 정보를 곧이곧대로 믿어서는 절대 안 된다는 말이다. 이곳은 분명히 다른 곳과는 달랐다.

"대장! 제길, 뒤에도 몬스터들이 오고 있소. 이렇게 되면 되도록 빨리 저놈들과 합류해서 길을 찾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어떠하오?"

펠린도 묵묵히 검을 들고 몬스터들을 베고 있었지만 은연중에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보아 그 말에 동의한다는 뜻이었다. 펠린뿐만 아니라 엘리와 다른 병사들도 같은 생각인 모양이었다.

그들이 그렇게 나오자 이안도 어쩔 수 없이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엘리! 지금 당장 북쪽으로 마법을 날려요. 저들과 합류해서 한순간에 몰아친 뒤 도주하는 게 좋겠어요."

엘리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대응하는 엘리였기에 더욱 믿음직스러웠다.

쿠콰콰쾅!

엘리가 캐스팅을 준비하던 중 갑자기 이안의 제17군 북쪽에서 커다란 폭발 소리가 들렸다.

"뭐죠?"

"아무래도 저쪽 군에서 날린 마법 같소. 우리도 빨리 캐스팅을 해서 돕는 게 좋을 거요, 대장!"

"알았어요, 웨일즈!"

큰 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갑자기 팔십여 명의 병사들이 도주하기 시작했다. 그 도주 방향은 이안의 17군이 있는 쪽이었지만 17군과 그들 사이는 오크들이 가로막고 있었다.

"엘리! 저놈들을 향해 마법을 사용할 수 있어요?"

엘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지금 날려요!"

엘리의 손이 앞으로 뻗어지자 곧바로 빙계(氷系)마법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안도 순수한 내공보다는 한음지기를 이용하여 오크들을 향해 내쏘았다.

쿠콰콰쾅!

지독한 한기가 오크들을 뒤덮었다.

"지금입니다. 빨리 갑시다."

백여 명의 병사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오크들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런 상황에서도 결코 동요하거나 공포에 떠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안은 일단 자신들이 도우려는 군대의 수장이 보이자 눈을 빛냈다.

'소렌트! 저런 실력자가 설마 이런 곳에 발이 묶여 있을 줄이야.'

이안 자신이 승부를 자신할 수 없었던 자다. A급 용병 중에서는 단연 최고라고 볼 수 있었다. 이안이 검을 높이 들며 외쳤다.

"지금부터 저들을 도와 이곳을 빠져나갑니다! 엘리는 동쪽을 향해 마법을 사용해 주십시오. 그 옆을 펠린이 지키고, 웨일즈는 저를 도와주세요."

"알았소, 대장."

이안은 오크 투사들을 베어 내며 소렌트와 합류했다.

"자, 자네는……!"

소렌트는 이안의 얼굴을 보자 반가운 표정을 비쳤다. 그들의 모습을 보니 얼마나 힘들었을지 상상이 갔기에, 이안이 고개를 숙이며 위로의 표정을 지었다.

"어쨌든 상당히 고맙게 됐군. 자네에게 이렇게 꼴사나운 모습을 보일 줄은 몰랐네."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이곳을 나갈 수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죠."

그때 제1군의 마법사가 깊게 눌러쓰고 있던 후드를 벗어 젖히며 숨을 몰아쉬었다. 정신을 잃었다가 혼전 속에 간신히 눈을 뜬 것이다. 몸을 가눌 정도로 회복된 것은 아니었다.

"하아…… 하아…… 안녕하십니까? 전 제1군 전속 마법사인 버나드입니다. 이런 꼴로 인사를 드려 죄송합니다."

"17군 백인장 이안입니다. 별로 신경 쓰지 않으니 걱정 마십시오. 그런데 무슨 방법이 있으십니까?"

"저쪽을 보아 주십시오."

버나드가 가리킨 곳은 북쪽이었다. 그곳은 방금 전까지 제1군이 싸우던 곳이었다.

"저쪽으로 도망가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몬스터가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는 일단 북쪽으로 몸을 피한 후 군을 재정비하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하지만 저곳은……."

이안은 지도를 꽉 움켜쥐었다. 자신이 기억하기로, 북쪽으로 이동한다면 분명 하피들과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습니다. 하피의 영역입니다. 하지만 하피의 영역이 매우 좁다는 것은 알고 계실 겁니다. 하피들의 영역에 들어선다고 해도 우리는 숫자가 제법 많습니다. 하피들도 머리가 없지 않은 이상 우리를 공격할 리가 없을 겁니다. 그들의 영역으로 가야 우리가 살 수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는 제법 좋은 방법이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계속 늘어나는 몬스터들의 먹잇감만 될 뿐이다.

"이안 경, 어찌할 생각인지 물어봐도 좋소?"

"방법은 그것뿐이니…… 전 좋습니다."

"어쩔 수 없군. 나도 좋네."

"그럼 먼저 가시지요. 일단 저들을 막을 자가 필요할 겁니다."

"자, 자네……!"

시야에서 흐릿해진 신형. 이안은 가볍게 발을 놀린 것이었지만 보법을 처음 보는 소렌트는 그의 뒷모습만 멍하니 쳐다볼 뿐이었다.

"대장님, 우리가 먼저 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버나드의 말에 소렌트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그럼 부상자를 데리고 빨리 가도록 하지."

"예."

그날 그들은 막대한 사상자를 내고 북쪽으로 정신없이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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