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인하르트-14화 (14/60)

■ 제14장 토벌을 위한 준비, 영지전을 위한 준비 □

프로시안 남작이 내일 출병을 위해 움직이듯, 헤일론 백작가에서도 은밀한 움직임은 계속되고 있었다.

"기사들과 병사들에게는 잘 말해 두었겠지?"

소드 마스터 경지에 오른 헤일론 백작은 예전보다 냉철해지고 살기가 많이 사라진 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의 그런 모습이 상대로 하여금 섬뜩함을 느끼게 했다.

"물론입니다, 백작각하. 목에 칼이 들어온다 해도 절대 발설하지 않을 것입니다."

"알겠지만 우리의 목표는 놈들의 보급로를 끊고 영지를 공격하는 것이다. 병사들에게 전해라. 너희가 얻은 모든 전리품은 모두 공평하게 나눠 가질 것이라고 말이야."

백작의 말에 부관은 음침한 미소를 지었다.

"모두들 백작각하에게 고마움을 느낄 것입니다."

전리품은 보통 영주에게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 하나, 만약 전장에서 얻은 전리품을 병사들에게 나눠 준다면 사기를 올릴 수 있었다.

"우리는 놈들을 철저하게 박살 낼 것이다. 놈들이 모든 것을 얻었다고 생각했을 때, 그때 철저하게 박살 내 줄 것이야. 하나하나……."

부관이 간사한 표정으로 고개를 조아렸다.

"흐흐. 염려 마십시오, 백작각하. 모든 일은 백작각하의 뜻에 따라 결정지어질 것입니다."

"오랜만에 몸 좀 풀고 싶은데…… 프로시안 영주의 딸이 엄청난 미인이라지?"

원래 헤일론 백작은 엄청난 색마다. 그의 눈이 음흉하게 빛났다. 게다가 헤일론 백작가는 왕국에서도 몇 개 없는 프리마 녹테가 진행되는 곳이었다. 프리마 녹테란 평민 여성이 결혼할 때 그 첫날밤을 영주에게 바치는 것이니, 헤일론 백작이 얼마나 음탕한지를 잘 말해 주는 제도였다.

"사교계에 진출하는 순간 모든 이목이 끌릴 정도라 합니다. 그 미모가 베리카 백작의 여식조차 감히 발끝에 미치지 못한다는 말이 많습니다."

"호오! 베리카 백작의 여식이 따라갈 수 없다?"

예전에 사교 파티 같은 곳에서 베리카 백작의 여식을 몇 번 본 적이 있다. 그 당시 고작 열다섯의 어린 나이였지만 왕국에서도 그 미모가 자자해 어른이 되면 침어낙안을 웃돌 거라 했다.

그런데 그 미모를 능가할 정도라니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그래, 남작의 여식이 이번 토벌에 참여한다고 했으니 보급부대를 치는 일은 내가 맡으면 되겠군."

"하, 하나 어찌 그런 경박한 일을 감히 백작각하께서 하십니까? 백작각하는 병졸들을 이끌어 성을 공격하시는 게 어떠하신지요? 그 일은 기사단 단장들이 할 일이옵니다."

부관이 조심스레 대답을 내놓았으나, 백작의 마음은 쉽게 변하지 않았다.

"아니다. 내가 그곳에 고작 여자나 취하려고 가는 줄 아느냐."

"그렇다면……?"

"얼마 전에 보고를 들어서 알고 있다. 프로시안 영지에 신출내기 기사가 하나 들어왔다지?"

"혹, 화이트 부단장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백작이 살짝 고개를 끄덕여 대답을 대신했다.

약관의 나이로 그 추정 경지가 익스퍼트 최상급이라 알려진 이안. 게다가 그가 사용하는 속성검은 모든 것을 얼려 버릴 정도의 한기를 보여 주었다.

"익스퍼트 최상급이라…… 마스터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은 나에게 딱 적당한 상대로군. 그로써 내가 얼마만큼 성장했는지 알 수 있을 테니 말이야."

그가 아무리 음탕한 귀족이라 해도 검을 중시하는 한 명의 기사였다. 강자와의 싸움은 또 다른 즐거움을 줄 수 있었다.

부관이 뒤로 물러나며 작게 말했다.

"모든 것은 백작각하 뜻대로……."

* * *

레더린과 찰트는 이안을 보고 놀란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선황 폐하와도 같은 늠름한 모습에,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좌중을 압도하는 마나력.

그가 이미 익스퍼트 최상급 이상의 경지를 보여 주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전하, 이대로 우리와 같이 돌아가시는 게 어떠십니까? 모든 병졸들이 전하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레더린의 말에 이안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니, 그것은 사양하도록 하지. 윈스텀에게 들어서 대충 알고는 있다. 자금 상황도 그렇고, 병사들의 숫자도 아직 재건 계획을 시작할 정도는 아니라고 하던데."

아무리 레더린 같은 훌륭한 기사가 있다 하더라도 병사들 숫자와는 별개의 문제였다.

사실 그들이 숫자를 늘리지 못하는 이유는 프라스 제국이 라인하르트 제국의 잔당들을 죽이기 위해 자주 염탐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숫자가 늘어남에 따라 문제가 되는 것이 병사들에게 지급되는 식량과 무기, 갑옷 등이었다.

상단 다섯 개와 정보 길드를 설치해 돈을 모으고 있었지만 점차 늘어나는 병사들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이안이 무작정 나타난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전하, 그렇다면 방법은 있으신지요?"

찰트가 머리를 굴리며 조심스럽게 묻자 이안은 또다시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직 찾고는 있으나, 기회를 얻기가 힘들다. 레더린과 찰트는 당장 본대로 돌아가 프로시안 영지와 본대의 정보처를 만들어 나한테 도움이 되는 정보를 송신하도록 해."

"예, 전하. 명에 따르겠습니다."

그렇게 그 셋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날이 제법 저물자, 장안의 숲으로 들어가는 보급부대가 줄지어 있는 것이 보였다.

내일 출병이었으니 하루 빨리 출발해 진군 시기와 시간을 맞추어야 했다.

"전하, 내일 토벌이 있다 하였습니다."

"남작님이 그러더군."

"혹, 저희에게 시키실 일이 있다면 언제라도 연락을 주십시오. 발 벗고 나설 것입니다."

"알았다."

레더린과 찰트의 얼굴을 보자 걱정 어린 기색이 역력히 드러났다. 누가 뭐래도 장안의 숲은 유라시아 대륙에서 한 번도 정복당한 적이 없는 곳이었다.

"레더린 대장, 그리고 찰트."

"옙! 전하."

"말씀하시지요."

이안이 그들의 어깨를 잡으며 웃었다.

"잘 부탁한다."

그 말을 끝으로 레더린과 찰트는 아쉬움을 달래며 본대로 돌아갔다. 레더린은 미련이 남았는지 이안에게 또다시 힘을 보태겠다 제의했지만, 찰트가 말려 준 덕분에 이안의 입에서 명령이란 말이 나오기 전에 돌아갈 수 있었다.

하루가 지나고 토벌의 날이 밝자 남작은 창문 바깥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천오백 명이 넘는 용병들과 병사들이 정렬한 모습은 장관을 이루기에 충분했다. 부관이 그런 남작의 모습을 바라보고는 천천히 다가왔다.

"남작님, 내려가시지요. 모두 남작님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후후, 오랜만에 서 보는 거라 긴장될 것 같아서 마음을 다잡고 있었네. 그래, 컨디션들은 모두 어떠하던가?"

"베스트 중에 베스트입니다. 당장 장안의 숲으로 가서 몬스터들을 토벌할 의욕에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 좋아. 내려가지."

남작은 꾸며 입은 제복에 망토를 휘날리며 밑으로 내려갔다. 아직 병이 다 낫지 않아 토벌에는 참전할 수 없었지만 말로라도 힘이 돼 주자 마음먹었다.

이천오백 명의 눈이 자신에게 쏠리자, 남작은 최대한 가슴을 펴고 칸과 나란히 그들의 앞에 섰다.

프로시안 남작은 한동안 침묵한 채 이천오백 명의 얼굴을 하나하나 쳐다보았다. 그렇게 잠시 후, 칸의 음성증폭 마법이 캐스팅 되자 남작이 무거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제군들……."

이천오백 명이 남작의 입을 주목했다.

"이기고 돌아와라. 지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살아 돌아온 자에게는 큰 포상을 내릴 것이다!"

이기는 것이 당연시되는 토벌.

이천오백 명의 병졸들은 포상이라는 말에 아이처럼 커다란 환호성을 질렀다.

"우와아아아!"

"전군, 진군하라!"

빠바밤! 빠바바바밤!

말을 탄 기사들과 그 뒤를 따르는 용병들. 곧, 성을 떠나는 자들을 위한 나팔 소리가 성내를 울렸다.

그렇게 출병은 예정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장안의 숲은 자작령 영지의 크기 정도로 방대하게 넓다.

십 년 전, 슈레이더 왕국에서 대대적으로 십만 병사를 투입해 토벌 계획을 실행했으나 몬스터들에게 고전해 패배한 적이 있는 곳이다. 게다가 이름 모를 독초, 도통 예측할 수 없는 날씨에, 일교차가 사막만큼 심해 한 번 들어갔다 하면 살아 돌아오기 힘든 곳이었다.

장안의 숲 초입부라고 해도 그 크기가 남작 영지의 반 정도나 되었다. 이 정도 크기의 숲에는 몇몇 중형급 몬스터가 있었지만, 대부분이 코볼트나 고블린, 오크 같은 하급몬스터들이 세를 이루고 살아가고 있었다.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이 고블린들이다. 고블린은 오크만큼 똑똑하지는 않지만 매우 영악한 놈들이었다.

그들의 손톱에서 뿜어 나오는 독에 중독되면 금방 마비가 되기 때문에 기사들도 접근하기를 상당히 꺼려 한다. 그들뿐만 아니라 트롤 같은 중급은 목이나 심장을 관통하지 않으면 엄청난 재생능력을 보이며 부활하기 때문에 병사들로는 잡기가 매우 힘들었다.

프로시안 영지의 군대는 전날 보급대가 움직인 방향으로 안전하게 숲에 도달할 수 있었다.

"아가씨. 진영은 어디다 세울까요?"

영지군의 선두에 서 있는 것은 세리아와 이안, 그리고 용병들의 총 책임을 맡고 있는 소렌트였다. 소렌트는 A급 용병 중에서도 실력이 제일 좋았다. 사십 년간의 용병 생활로 잔뼈가 굵었으니, 이런 토벌에 참여한 것도 손으로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소렌트가 조심스레 묻자 세리아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5미터는 넘을 법한 나무들이 햇빛을 가리고 있고, 작은 몬스터나 새들은 이천오백이나 되는 대군에 놀라 이미 도망을 갔다.

그렇다면 이 영역은 이제 영지군의 것이었다.

진영을 세우려면 일단 몬스터의 침입을 막기 쉽도록 입구가 좁은 곳이 좋고, 퇴로가 확보되어 있는 곳이 좋았다.

"소렌트 경, 보급부대가 좋은 곳을 찾아 놓았다고 하니 그곳으로 일단 가 보도록 해요."

일개 용병에 불과하지만 웬만한 기사단의 단장은 꿰찰 실력이었으니 예의를 차리는 것이 당연했다.

숲 속으로 두 시간을 더 들어가자 보급부대가 세워 놓은 깃발이 멀리서도 보였다.

소렌트가 깃발이 세워져 있는 곳을 보며 눈을 빛냈다.

"호오? 저것은 성이 아닙니까? 어찌하여 이런 곳에 성이……."

"십 년 전, 이곳을 토벌하려 했던 슈레이더 왕국 십만 병력이 쓰던 곳이랍니다. 물론, 십 년간 비워 두었던 곳이니만큼 이곳저곳 손볼 데가 많지만 몬스터들의 공격을 막기 쉽고 성도 제법 크니 이천오백 명이 머물기에는 충분할 것입니다."

이안의 시원스런 대답에 듣고 있던 세리아와 소렌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곳에 성이 있다는 말은 그녀도 들어 본 적이 없는 듯 보였다.

"그런데 이안 경은 어찌하여 저런 곳에 성이 있는 것을 알았소?"

상대가 기사이니만큼 소렌트의 물음에는 이안에 대한 존중이 깃들어 있었다. 게다가 이안의 전신에서 뻗어 나오는 기세는 오랜 연륜으로 볼 때 결코 자기 아래가 아니었다.

"알았다기보다는 유추해 본 것이지요. 그 당시 십만 병력에는 병사들과 기사만 있던 것이 아니라 몇몇 건설업자도 따라갔다고 책에서 읽은 적이 있거든요."

"흐음, 과연 이곳에 대해 철저하게 조사를 하셨군."

"기본이죠."

그것으로 대화를 끝마치고, 이천오백 명의 병사가 천천히 성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보급을 마친 오백의 병사들은 수레를 몰고 영지로 돌아가기 위한 준비를 철저히 끝냈다.

보급에 대한 관리는 에이전트 기사단의 부단장인 욘지가 하고 있었다. 그는 세리아가 성안에 들어서자 누구보다 먼저 나와 미소 지어 보였다.

"아가씨, 보급부대의 일은 끝났습니다. 그럼 저희는 속히 영지로 귀환하겠습니다."

"그래요. 아직 초입부이지만 조심하는 것이 좋을 거예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오백의 군사라면 오크들이 아무리 멍청해도 쉽사리 덤벼들진 못할 겁니다."

오크들은 절대 자신들에게 승산이 없는 싸움은 걸지 않기 때문이다. 이 근방에서 오백 마리가 넘는 오크를 보는 건 매우 드물었다.

"아, 다음 보급품은 언제 도착하죠?"

"보름 후입니다. 그들이 도착하면 저희도 영지군과 합류할 생각입니다."

"좋은 생각이에요."

도개교가 열리며 오백 명의 보급부대가 돌아가자 세리아는 분주하게 움직이며 성안 곳곳의 수리를 지시했다.

이번 토벌이 길어져서는 안 되는 것은 절대적으로 세리아의 생각이었다. 겨울까지 질질 끌었다가는 영지의 재정이 파탄 나는 것은 시간문제였고, 이곳에서 겨울을 나기에는 추위를 견뎌 낼 수가 없었다.

이안과 소렌트는 각자 부대를 나누어 주위의 지형을 알아보기 위해 지도를 필사한 후 열 개 조의 정찰부대를 보냈다.

첫날은 용병들에게 지시한 대로, 일정 시간마다 교대할 수비 병력을 세워 놓고 간단히 숙소를 정해 성안에서의 활동을 활성화하는 데 보냈다.

* * *

이안은 기사의 신분이기 때문에 개인적인 전속시녀가 한 명씩 붙을 수 있었다. 영지 내에서 신분이 비밀스럽게 유지되고 있는 로이니스가 이안의 전속시녀로 전락했다.

원래 기사단 정령술사로 참가할 계획이었으나 남작이 위험한 토벌작전에 일부러 나서지 말라는 뜻에서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이안의 전속시녀로 만든 것이다.

"이봐, 이안. 벌써 사흘째인데 사령부에서 아무런 연락이 없는 것이 조금 이상하지 않아?"

이안은 로이니스를 쳐다보지도 않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전혀요."

"왜?"

"일단 토벌을 하기 위해서는 어느 위치에, 어느 정도 규모의, 어떤 종류의 몬스터가 있는지 철저하게 조사해야 할 테니까요. 아마 그 작업만 해도 일주일은 걸릴걸요. 그동안은 훈련을 통해 호흡을 맞추는 것이 더 중요할 거고요."

실력 좋은 용병들을 대거 투입한다고 반드시 토벌에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다. 호흡이 맞지도 않는 용병들은 고작 오합지졸일 뿐이었다. 그러니 정찰을 하는 동안 호흡을 맞추는 일이 제일 시급했다.

"그러면 일주일을 그냥 이렇게 보낸다는 거야?"

"아뇨, 기사들은 벌써 중급몬스터를 잡는다고 들떠서는 성 바깥으로 나갔던데, 로이니스도 관심 있어요?"

"아니."

이런 식으로, 두 사람은 거의 하루 종일 방 안에만 틀어 박혀 있었다. 이안은 갖가지 병법 책들을 가져와 훑어보았지만 이런 데서 쓸 만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중원에서 쓰던 병법도 써먹을 만한 것이 얼마나 있을지는 보장할 수 없다. 중원에서 전투 상대는 오직 인간뿐, 이곳처럼 오크나 고블린 같은 마물은 없었으니까.

이안이 머리를 굴리다가 입맛을 다셨다.

'쩝, 십 년 가까이 한 서생 노릇도 정작 이곳에서는 별로 도움이 안 되는군.'

"후우, 계속 생각해 본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니까."

이안이 자리에서 일어나 갑옷을 챙겨 입자 로이니스가 정말 시녀라도 된 것처럼 뒤에서 도와주었다.

"어디 가?"

"제 관할 구역 녀석들 좀 보러 갑니다."

가벼운 순찰이지만 로이니스가 따라간다고 나섰다.

"그럼 나도 갈래."

로이니스의 말에 이안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안 가시는 게 좋을 텐데요."

"문제라도 있어?"

이안이 한숨을 쉬었다.

"에휴∼ 로이니스의 외모가 너무 눈에 띕니다."

그 말대로, 그녀는 눈에 번쩍 뜨일 만큼 아름다웠다. 게다가 그녀가 어떤 신분인지 모르는 이때 용병들에게 어떤 시달림을 당할지는 대충 상상이 갔다.

"옷이야 바꿔 입으면 되지."

"바보 아닙니까? 그냥 병사들도 아니고 유라시아 대륙을 떠돌던 용병들인데, 잘못하다간 로이니스의 얼굴을 알아보는 자가 있을지도 모르니 그냥 계시죠."

로이니스가 바보라는 말에 발끈해서 덤벼들 태세를 갖췄다.

한 번이라도 더 말을 잘못했다간 주먹이 날아올 기세였다. 이안은 살짝 웃음 짓더니 벽에 걸린 투구를 들어 로이니스의 머리에 씌웠다. 투구 때문인지 로이니스의 기다란 머리카락만 흘러내렸을 뿐 얼굴은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갑옷을 입기 전에 안에 덧대 입는 하드레더를 던져 주었다.

"그렇게만 입으면 제 종자라 생각할 겁니다. 자, 어때요? 그래도 따라오실래요?"

명색이 백작가의 귀한 따님이 투구를 눌러쓰고 남자가 입던 하드레더를 입어야 된다는 사실이 고민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안의 장난기 가득한, 능글맞은 표정을 본 로이니스는 곧바로 하드레더를 집어 들더니 그 자리에서 시녀복을 벗었다.

"뒤로 돌아."

"네네. 분부대로 합죠."

하드레더를 가지고 나와 바깥에서 갈아입는 것을 들키기라도 한다면 놀랄 소지가 있었다. 방 안에서 갈아입는 것이 당연했지만 로이니스는 행동으로 옮기기까지 많이 고민했다.

그녀는 얼굴을 홍당무처럼 붉힌 채 마지막으로 한번 거울을 보고 살짝 손질했다. 5분이고 10분이고 계속 기다리던 이안이 기다림에 지쳐 물었다.

"됐습니까?"

"응. 이제 뒤돌아봐도 돼."

그저 철없는 아가씨라고만 생각했던 로이니스였지만 일단 갑옷을 입고 나니 제법 그럴듯한 기세가 풍겼다. 아마도 정령들의 힘 때문에 은연중에 감출 수가 없었던 탓일 것이다.

"어울리네요."

이안이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말을 입으로 꺼내 놓자 그녀는 기쁜 듯이 활짝 웃었다.

"정말?"

"네. 자, 그러면 따라오시죠."

이안이 방문을 열고 나가려는 찰나, 멀리서 풀메일을 입은 기사 하나가 다가왔다.

"부단장님, 아가씨께서 찾으십니다."

에이전트 기사단에서 나이가 제일 어린 펠린이었다. 이안이 로이니스를 돌아보자, 로이니스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좋아요, 펠린. 곧 갈 테니 그리 전해 주세요."

"예, 부단장님."

펠린이 먼저 사라지자 이안은 살짝 웃음을 지었다.

"아마 로이니스가 바깥에 나가지 말라는 징조 아닐까요?"

"관둬, 관둬! 나 혼자라도 나갈 테니까."

"뭐, 마음대로 하세요. 사고만 안 치면……."

로이니스가 이안의 말을 끊고 화를 버럭 냈다.

"누가 사고를 친다는 거야!"

* * *

무려 소드익스퍼트 중급이다. 게다가 나이도 어려 어느 기사단에 들어가도 최고의 대우를 받을 거라 생각했다.

적어도 며칠 전까지는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었다.

웨일즈가 에이전트 기사단에 들어와 처음 느낀 감정은 바로 경악이었다.

전원 익스퍼트 급 기사라니!

토벌에 따라온 에이전트 기사단원은 자신을 포함해서 스무 명이다. 그런데 그중에 익스퍼트가 아닌 자들이 없었다.

한 기사단에 익스퍼트가 스무 명이 넘는다는 것은 적어도 후작가 정도는 돼야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일개 남작가의 기사들이 익스퍼트 급이라는 것은 눈으로 직접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부단장이라고 하는 자.

스쳐 지나간 욘지 경도 최소 소드익스퍼트 상급이었는데, 이안 경은 최상급 익스퍼트 경지가 확실했다.

전신을 휘감는 마나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이들 스무 명뿐만 아니라 영지에 남은 기사들 또한 모두 익스퍼트라면?'

꿀꺽!

저절로 침이 넘어갔다.

공작가나 왕실기사단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기사단 전체가 익스퍼트?

진작 왕국 전체에 소문이 퍼질 일이었다. 기사를 육성해도 익스퍼트가 되는 자들은 그리 많지 않다. 대부분 웨폰 오러 상급이나 최상급 정도에 머물기 때문이다.

'프로시안 남작은 무서운 자다!'

게다가 알고 보니 남작가의 기사단에는 평민이 많았다.

일부 몰락한 귀족가의 자제들이나 준남작의 자제들도 있었지만 대다수가 평민이라 할 수 있었다. 귀족만 뽑는 것이 아니라 두루두루 인재들을 양성한다는 것이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보통 황실의 병사들을 보면 웨폰맨 상급 정도의 경지다. 하지만 그동안 면밀히 살펴본 결과, 프로시안 영지의 병사들은 웨폰 오러 중급에서 최상급까지 다양한 경지가 엿보였다.

자신 정도의 실력이면 충분히 기사라 칭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런데 이 웃기는 영지에서는 고작 병사란다.

'나 참, 환장할 일이군. 이 빌어먹을 영지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기에 곧 익스퍼트에 오를 자들이 아직도 병사 노릇을 하는 거지?'

스스로의 실력에 자부심을 가졌던 웨일즈는 더 이상 자신 있어 할 수 없었다. 그리고 토벌대에 참여해서 첫날 훈련을 해 본 결과 이곳의 훈련은 도저히 사람이 따라갈 수 있을 정도가 아니었다.

처음 두 시간을 이상한 명상 따위로 허비하더니, 다음에는 병사들과 함께 훈련하는 것이 아닌가.

병사들이 기사들을 빙 둘러싸면 기사들은 그곳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목검으로 그들을 상대해 갔다. 물론 마나를 사용하는 것은 허용돼도 목검에 마나를 불어넣는 것은 철저히 금지되었다.

웨일즈는 기사들이 하는 양이 신기해 자신도 참여해 보았다가, 첫날 병사들에게 피 토할 때까지 얻어터지고 나서야 항복을 선언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시작과 똑같이 두 시간을 명상으로 보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명상이 끝나고 나자 기사들이 모두 피로를 회복한 모습이라는 것이다. 기사뿐만 아니라 병사들도 이제는 모두 명상을 하고 있었다.

기사들의 훈련에 참가했다가 갑자기 죄다 일어나서 진검을 뽑아 들자, 웨일즈도 진검을 뽑았다.

"웨일즈! 지금부터는 대련 시간이다. 얼마 전 헤일론 백작가에 있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어떠냐? 한판 붙어 보는 것이……."

그보다 다섯 살은 많은 헤니였다. 헤니의 경지는 이제 갓 익스퍼트에 오른 초급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웨폰오러 최상급의 경지였다가 마나 호흡법으로 깨달음을 얻어 익스퍼트가 된 흔한 케이스였다.

"후후. 뭐요, 헤니 형님? 나한테 진다면 어쩔 거요?"

아카데미에서도 배웠듯이 초급이 중급을 이길 확률은, 능숙함과 경험을 바탕으로 싸운다 하더라도 30퍼센트를 넘기기 힘들었다. 하지만 헤니는 얼마 전에야 겨우 익스퍼트에 올랐기에, 웨일즈는 그 어느 때보다도 자신이 있었다.

"어쩌긴, 네가 그토록 원하던 명상 시간에 뭘 하는지 가르쳐 주마."

대련을 구경하는 기사들의 입에서 휘파람 소리가 울렸다.

"헤니! 졌다간 가만 안 둬. 부단장이 남에게 가르쳤다간 아작 낸다는 소리 못 들었냐?"

"시끄러, 라일로! 이제 저놈도 우리 식군데 남이란 소리가 나오냐?"

웨일즈가 검을 가슴 바짝 대며 웃음 지었다.

"좋습니다! 그 약속 안 지키면 헤니 형님을 내가 가만 안 둘 거요!"

"뭐야, 인마? 그럴 일은 없을 테니 덤벼! 하수에게 이 형님이 세 수를 양보하도록 하지."

우람한 체격에 2미터가 넘는 장신인 헤니가 자기 키만 한 검으로 웨일즈를 도발했다.

'헤니 형님은 키가 크고 몸집이 둔하다. 이럴 때는 스피드로 승부를 거는 게 제일 좋다!'

스피드로 승부를 걸 때 사용하는 방법이 히트 앤 어웨이다.

공격을 한 후 뒤로 빠지고 다시 공격에 들어가는 전법은 아카데미에서도 제일 먼저 가르쳐 주는 전술이었다. 웨일즈는 헤니가 세 수를 양보한다 했지만 그것이 그의 작전이라고 생각하고 그대로 공격에 들어간 후 뒤로 빠졌다.

파파밧!

챙! 챙! 채애앵!

하지만 헤니는 스스로의 말대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웨일즈의 공격에 코웃음만 칠 뿐이었다.

"흥! 뭐야, 이거? 순 겉멋만 든 애송이잖아."

"헤니 형님, 아직 한 수가 끝났을 뿐이오."

"좋아, 더욱 강하게 밀어붙여 보라고."

다시 웨일즈가 오러를 잔뜩 실은 검을 난사해 대자, 헤니는 검이 부딪칠 때만 오러를 사용하며 마나의 소모를 최대한 줄이고 있었다.

뒤로 한 발자국 빠진 웨일즈가 거의 돌진하다시피 검으로 상대를 찔러 들어갔다.

"막을 수 있으면 막아 보슈. 댄싱 소드(Dancing Sword)!"

강자들을 무릎 꿇게 만드는, 삼초식으로 이루어진 댄싱 소드가 웨일즈의 검에서 펼쳐지자 헤니는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다시 침착한 표정으로 맞수를 했다.

극쾌의 검을 구사하는 댄싱 소드는 마지막 세 번째 초식 때는 허점이 많이 드러나기 때문에 되도록 마지막 수단으로만 사용했다.

헤니는 웨일즈가 자신 있게 펼친 댄싱 소드를 옆으로 살짝 피함과 동시에 다음 순간 살짝 검면을 쳐 냈다. 방향이 틀어진 웨일즈의 검이 다시 자리를 잡기 위해 시간이 허비된 사이, 헤니가 다시 검을 위로 쳐 냈다.

채애앵!

"헉!"

댄싱 소드가 가로막히자 웨일즈가 헛바람을 들이켰다.

익스퍼트 중급이 고작 초급한테 검이 막히다니!

웨일즈는 놀랄 새도 없이 검을 가지고 뒤로 빠졌다.

그런 웨일즈의 표정에 헤니가 재미있다는 듯 낄낄거리며 동료 기사들과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푸흐흐. 이봐, 애송이! 세 수는 끝났다. 잘 봐라! 대련이란 검과 팔만 움직인다고 되는 것이 아니니까."

헤니의 우람한 체격이 움직이자 마치 천지가 울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거대한 움직임이 하나하나 선명하게 보이던 중, 갑자기 헤니의 신형이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가볍게 삼재보를 밟은 헤니가 그립 부분으로 웨일즈의 가슴을 강하게 쳐 냈다.

타앙!

갑옷을 입고 있었기에 별다른 충격은 없었지만 정신적인 충격이 클 수밖에 없었다. 움직임이 큰 헤니가 순간적으로 사라진 것도 모자라, 눈 깜짝할 새 그립으로 자신의 가슴을 칠 때까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어, 어떻게……?"

얼이 빠진 듯한 웨일즈의 표정.

"부단장님께 물어보는 게 좋을 거다!"

첫 번째 그립 공격은 정신을 차리라는 의미였기에, 헤니는 다시 검을 쥐고 웨일즈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이며 도발했다. 웨일즈는 아까 당한 공격에 충격이 너무 커서 쉽게 발을 떼지 못했다.

"안 와? 그럼 내가 가지."

헤니가 가볍게 지면을 밟고서는 그대로 검으로 웨일즈를 내리쳤다.

까강!

"큭!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힘이……?"

웨일즈는 지금껏 검에 마나를 불어넣을 줄만 알았지, 순간적으로 데미지를 상승시키며 폭발시키는 방법은 알지 못했다.

웨일즈는 대부분의 경지를 혼자서 독파했기에 이안에게 차근차근 검술을 배워 온 헤니 같은 자들을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어렵사리 막은 검에 인상을 찌푸린 웨일즈를 향해 거침없는 발길질이 날아들어 왔다.

퍼벅!

"크악!"

갑옷을 뚫고 전해지는 충격이 제법 컸다. 웨일즈가 그대로 지면을 굴렀고, 다음 순간 그의 목 언저리에는 헤니의 커다란 검이 닿아 있었다.

"항복?"

웨일즈가 눈동자를 굴렸다. 기사라면 여기서 항복해야 하는 순간이다.

"예, 항복……하겠수."

그의 얼굴이 지면을 향하자 헤니는 검을 높이 들고 승리를 자축했다.

웨일즈는 자신이 진 이유를 고민하기 위해 방금 전의 대련을 되새겨 보았다.

승패를 좌우한 것은 보유한 마나의 양이나 경지가 아니라 마나와 검, 신체를 얼마나 잘 활용하느냐였다.

저벅저벅!

그때 침착한 발소리가 들리자 모든 기사들이 대련을 멈추고 검을 지면으로 향했다.

"아니, 부단장님 아니십니까? 여기까지 어언 행차신지."

호들갑을 떠는 헤니의 옆에 서 있던 기사들 전원이 인사를 건넸다.

웨일즈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홱 돌리자 그 누구보다 강렬한 느낌을 주는 기사가 서서히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익스퍼트 최상급이다! 그 이안 부단장이로군.'

말도 안 되는 속성검을 구사하며, 주변을 압도하는 한기에 질색하게 만들었던 자.

베얀 마을 사건 때 자신을 구해 주었던 자.

그가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아, 헤니, 라일로. 훈련은 할 만해요? 지금 사령부로 가고 있는데 같이 가려면 오세요."

"그런 곰팡이 냄새 나는 곳은 싫습니다. 내겐 안 어울린다는 걸 모르는 거유?"

몸서리치는 헤니를 보며 이안이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그것도 그렇네요."

그러면서 고개를 주억거리던 웨일즈와 이안의 눈이 마주쳤다.

"아! 웨일즈 경? 베얀 마을을 떠난 이후로는 처음 보네요. 처음에는 훈련에 적응이 안 되겠지만 계속해 보세요."

"알았소."

간단명료한 대답에 이안이 웃으며 훌쩍 사라졌다.

헤니는 갑자기 다가와서는 웨일즈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퍽!

"윽……! 왜 때려요, 헤니 형님!"

"시끄러, 인마! 부단장님에게 그따위로 말했다가는 다른 기사들이나 병사들에게 얻어맞는다고."

"그렇다고 때릴 건 없잖수?"

웨일즈가 째려보자 헤니가 그 시선을 피하며 입을 열었다.

"부단장님이 저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 가르쳐 줘도 되겠다."

"명상 시간에 하는 거 말이우?"

눈을 빛내며 묻는 웨일즈를 보며 헤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눈앞에서 내 모습이 사라진 듯한 느낌이었지? 나도 처음엔 그랬으니 그런 표정 이해해. 그것도 가르쳐 주지. 아니, 전부 가르쳐 주마. 너도 이제 에이전트 기사단의 가족이 아니냐?"

"헤니 형님……!"

웨일즈가 감격한 얼굴로 달라붙자, 헤니가 그를 떼어 내기 위해 마나를 운용해 얼굴을 후려갈겼다.

"이거 놔, 이 자식아!"

"절대 못 떨어집니다!"

"쳇! 명심해. 내가 가르쳐 주는 이유는 어디까지나 전쟁에서 안심하고 내 등 뒤를 맡기기 위해서니까."

"걱정 마슈. 내가 있는 한은 언제라도 등이 시원한 느낌은 받지 않을 거요."

"그래, 믿어 보마."

웨일즈의 즐거운 표정은 그가 이미 에이전트 기사단의 일원이 되었음을 말해 주었다.

* * *

로이니스는 귀찮은 일을 피하기 위해 병사 복장을 벗지 않고 그대로 돌아다녔다. 어디에서 구했는지 모를 단창을 들고 다니자 완벽한 병사의 모습이었다.

이안의 말대로 사고를 치지 않기 위해 불편한 것을 무릅쓰고 이런 복장을 하고 돌아다니는 것이다.

'사고 치지 말라고? 흥! 좋다 이거야. 어디 두고 보자.'

실프로 몸을 가린 채 은밀히 사령부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사령부 쪽에는 병사들의 모습이 많이 눈에 띄었기 때문에 실프가 없었다면 오는 것을 포기했을 것이다.

'이안, 넌…… 나를 너무 몰랐어.'

사령부는 2층에 있었으니 3층으로 들어가 실프를 이용하여 엿들을 생각이었다. 이안이 성에서 나간다면 몰래 따라 나갈 것이다. 그의 정체를 알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3층으로 단숨에 올라간 로이니스는 주변에 모든 기척을 지우고, 자신이 움직인 발자국마저 없앴다.

사령부 바로 윗방에는 경비가 없던 탓인지 손쉽게 들어갈 수 있었다. 2층과 3층 사이에 방음시설이 설치되어 익스퍼트 급 기사라고 해도 엿들을 수 없을 테지만, 실프를 이용하면 간단히 해결할 수 있었다.

'아직 시작을 안 했나?'

이안이 도착을 안 한 듯싶었다. 그뿐만 아니라 몇몇 사람들의 자리가 빈 것 또한 느낄 수 있었다.

'조금만 기다리면 되겠지.'

그런 마음으로 기다리던 로이니스는 문득 미세한 발소리가 들려오자 숨을 죽였다.

뚜벅뚜벅!

이곳은 3층이었다. 3층에 묵는 사람은 없었다.

발걸음은 하나가 아니라 둘이었다. 그 발걸음들은 로이니스가 숨어 있는 방을 지나쳐 바로 옆방으로 들어갔다.

―실프, 저들의 대화를 들려줘.

실프가 옆방으로 들어가자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헤일…… 보급……."

"이…… 프로시……."

"백…… 각하…… 모든 것……."

로이니스는 그들의 대화에 잡음이 많이 섞여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은 분명 대화를 차단해 주는 사일런스의 효과였다. 실프의 능력이 아니었다면 저런 대화마저도 듣지 못했을 것이다.

"내일…… 다시…… 이곳에서……."

그 말을 끝으로 그들은 방에서 나왔다.

발걸음이 멀어지는 것을 느끼자 로이니스는 가슴을 쓸어 내렸다.

그녀의 귀에는 마지막 말만 맴돌고 있었다.

"내일 다시 이곳에서 만나겠다는 거야?"

사일런스를 사용한다는 것은 상대 중에 마법사가 있다는 뜻이었다. 현 프로시안 남작의 전속 마법사인 칸을 제외하면 이곳에 있는 마법사의 숫자는 열 명을 넘었다.

"용병 마법사라……! 이곳에 있는 동안 그래도 심심하진 않겠는걸."

뭔가 재밌는 것을 찾았다는 듯 로이니스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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