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인하르트-13화 (13/60)

■ 제13장 레더린 후작 □

"앞으로의 거리는?"

"반나절이면 도착할 것입니다."

두 중년인이 말을 타고 천천히 달렸다.

그중 왼쪽에 있는 중년인의 망토에는 여신의 형상이 그려져 있었는데, 그 여신은 창과 방패를 들고 있었다. 과거 라인하르트 제국의 황족들을 지켜 주던 여신이었다.

"떨리십니까?"

로브를 걸친 중년인이 그렇게 묻자, 다소 상기된 표정을 하고 있던 망토의 중년인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잘못된 정보는 아니겠지?"

"드워프는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게다가 그는 간주입니다."

"프라스 제국의 음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자꾸 불안해지는군."

"그건 아닐 겁니다, 대장님."

망토를 입은 중년인이 살짝 미소 지었다.

"자네 말대로 아니면 좋겠군. 아니라면…… 우린 드디어 주인을 뵐 수 있을 거야."

"무려 이십 년을 기다려 왔습니다. 저 또한…… 거짓이 아니기를 바랄 뿐입니다."

* * *

한스와 존슨은 프로시안 영지의 병사들이다.

한스가 존슨보다 먼저 병사가 되어 지금은 '훈련대장'이라는 직책을 맡고 있었고, 존슨은 그가 지휘하는 훈련대원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 존슨이 영지에 있는 용병들과 시비가 붙어 크게 한판 싸웠다가 얻어맞고 돌아온 적이 있었다. 그때 얼마나 맞았는지 토벌군이 출발하기 하루 전인 오늘에서야 부기가 서서히 빠지기 시작했다.

한스는 자신이 아끼는 대원이자 친구인 존슨이 얻어맞고 돌아오자 발끈해서 복수를 생각했으나, 존슨은 오히려 그런 그를 말렸다.

"억울해도 참아. 맞은 나도 이렇게 참는데 네가 화낼 이유가 뭐냐?"

"인마, 네가 이렇게 맞고 돌아왔는데 지금 내가 제정신이게 생겼냐?"

"걱정 마. 상대는 B급 용병이었어. 이긴다는 게 더 말이 안 되지. 하지만 두고 봐. 꼭 그놈을 흠씬 두들겨 패 줄 날이 올 거야."

B급 용병이라 하면 용병 세계에서 최소 오 년은 잔뼈가 굵어야 오를 수 있는 계급이었다. 이제 신출내기인 존슨이 B급 용병을 이긴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존슨은 그렇게 복수의 날을 위해 하루에도 수백 번씩 기절할 것만 같은 살인적인 훈련을 견뎌 내 이제는 어엿한 프로시안 영지의 병사로 커 가고 있었다.

그는 한스와 함께 새벽에도 별도의 훈련을 하면서 삼재보와 마나 호흡법을 틈틈이 수련해 나갔다. 신기하게도 삼재보는 빠른 돌격력을 갖게 해 주었고, 마나 호흡법은 머리를 맑게 하며 피로감을 없애 주는 효능이 있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배 아래쪽이 조금씩 따뜻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처음에는 병인 줄만 알고 동네 의사를 찾아가 치료를 부탁했지만, 미친놈 소리를 들으며 쫓겨나야만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한스도 그렇고 몇몇 동료 병사들도 자신과 같은 증세를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어리둥절해 있는 동안 존슨은 또다시 이상한 일을 겪었다. 침침하던 눈이, 이제는 저 멀리 날아가는 새의 날갯짓조차 보일 정도로 또렷해진 것이다.

그 외에도 순발력이 좋아지고 달리는 속도가 빨라지는 등, 소소하지만 눈에 보이는 발전이 이어졌다. 마치 나이를 거꾸로 먹는 느낌이었다.

"합!"

존슨의 목검이 빠른 속도로 한스의 목을 향해 찔러 들어갔다. 한스가 다급히 왼 팔뚝을 올려 목검을 살짝 쳐 냈다. 나날이 늘어가는 존슨의 실력에 한스 역시 기분이 절로 좋아졌다.

"이제는 정말 괜찮아졌어. 그때 그 용병 녀석이랑 붙어도 지지는 않을 거야!"

"농담 마. 그때 그 용병 실력은 진짜였어. 아직은 아니야.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실력을 쌓고……."

"뭐, 마음대로."

다시 한스와 존슨의 목검 대련이 시작되었다. 예전에는 한스가 십여 합이면 존슨을 간단히 이겼지만, 이제는 사력을 다해 싸워도 백여 합 이내에 이기기는 불가능했다.

게다가 새벽에 한 특훈도 존슨을 한 달 이내에 병사들 안에서 손가락 안에 드는 순위에 들게 할 정도로 만들어 주었다.

존슨과 한스는 5분 정도 더 대련하던 중 뒤에 다가온 용병들을 보고 멈출 수밖에 없었다.

"오늘도 수고가 많군. 크크큭. 그래 봤자 토벌에 나가면 다 죽어 나자빠질 애송이들이겠지만 말이야."

이런 식으로 용병들이 병사를 조롱하는 경우가 아주 많았다. 평소라면 아무 생각 없이 넘길 일이었지만, 지금 눈앞에서 깐죽대는 저 용병이 바로 얼마 전 존슨의 얼굴을 피투성이로 만든 녀석이었다.

존슨은 한스를 뒤로한 채 목검을 들고 용병 앞에 당당히 섰다.

"이놈 뭐야? 얼마 전에 나한테 죽어라 맞았던 놈 아니냐? 너 아직도 안 죽고 용케도 살아 있었군. 근데…… 그 목검은 뭐냐? 나랑 한판 붙어 보겠다는 거야, 응?"

예전만 해도 존슨은 상대가 내뿜는 살기에 숨도 못 쉴 정도였지만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래."

용병들 무리에서 요란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우하하! 캐론! 상대해 주는 게 어떠냐? 아무래도 저놈은 그냥 물러갈 놈이 아닌 것 같은데."

캐론이라 불린 사내는 용병으로 십 년을 넘게 구른 자였다. 그는 오히려 눈앞에 선 존슨을 보고 콧방귀만 뀔 뿐이었다.

"흥! 멍청한 놈. 저런 어눌하게 생긴 놈이 내 상대가 된다고 생각하는 거냐?"

"닥쳐라! 그동안 내가 너처럼 술만 퍼마시며 살아온 줄 아느냐! 어서 검을 뽑아라."

"좋다, 애송이. 심심하던 차에 잘 됐군."

그러면서 그는 진검을 뽑아 들었다. 캐론의 체격은 제론보다도 두 배는 다부져 보였다. 과연 그는 자신의 체격만큼 커다란 검을 뽑아 들었다. 그레이트 소드였다.

캐론이 존슨을 가리키며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애송이! 세 수를 양보한다. 덤벼!"

그러자 존슨이 격분하여 덤벼들었다.

"이놈! 후회하게 만들어 주마."

"얼마든지!"

슈욱!

존슨의 목검이 허공을 내질렀다.

얼마나 빠른지 정신 차리고 보지 않았다면 쉽게 막기 힘들 정도였다.

하지만 캐론은 지난 십 년간의 용병 생활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주듯이 어렵지 않게 막아 냈다.

"애송이, 고작 이 정도라면 포기해라!"

"멍청한 멧돼지 같은 놈. 아직 시작도 안 했다!"

"뭐, 뭐라? 멧돼지?"

평소 별명이 멧돼지였기에 캐론은 그 말을 세상에서 제일 싫어했다. 뒤에 있던 용병 무리가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오히려 존슨보다 더 격분하는 캐론을 말리려고 대결에 끼어들었다.

평소 캐론이 멧돼지란 말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잘 알았고, 만약에 상대를 죽이기라도 한다면 자신들은 이곳에서 일 한 번 못 하고 쫓겨나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존슨은 이안이 가끔 훈련 시간에 와서 전장에서 겪은 이야기를 해 주면 하나도 놓치지 않고 머릿속에 빼곡 채워 넣고 있었다. 만약 상대가 자신보다 강하다면 상대를 흥분시켜서 허점을 만들어 내라는 것이다.

존슨의 말에 흥분한 캐론이 양보한 세 번의 공격이 끝나자 곧바로 돌격해 들어왔다. 존슨 역시 그런 캐론을 향해 마주 달려들었다.

하지만 무작정 달려가는 것이 아닌 가볍게 스텝을 밟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삼재보로 이어졌다.

그동안 고된 연습으로 거의 몸에 배어 버린 삼재보였기에 실전에서도 무리 없이 펼칠 수 있었다.

타타탁!

존슨이 빠른 속도로 시야에서 사라지자 캐론이 기겁하며 뒤로 물러섰다.

"헉! 뭐, 뭐야!"

"뭐긴, 네놈의 패배다!"

퍽!

존슨이 갑자기 밑에서 위로 솟구치며 오른발로 상대의 사타구니 쪽을 강하게 찼다. 과연 남자의 약점을 얻어맞은 만큼, 캐론이 얼굴을 붉히더니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쿠에엑! 이, 이 개자식!"

캐론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얼마나 아팠으면 저럴까 하는 생각이 들만도 하지만 존슨은 넘어진 상대를 목검으로 가격하기 시작했다.

"너도 죽어 봐라, 이 자식아!"

"크, 크아악! 잘못했으니 봐줘…… 아니, 제발 봐주세요!"

"이놈! 이 정도로는 턱도 없다."

그렇게 시작된 구타는 10분이 지나서야 용병들이 말려 간신히 진정될 수 있었다.

* * *

더웠던 날이 풀리고 이젠 아침에는 제법 쌀쌀해졌다.

토벌 날짜가 벌써 하루 앞으로 훌쩍 다가오자, 이안은 병사들의 마지막 훈련을 끝내고 동관으로 들어왔다. 내일이 출병하는 날이니만큼 오늘 오후만이라도 쉬게 해 주는 게 좋았다.

이안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안에는 뒤뚱거리며 방 안을 둘러보는 작은 키의 드워프가 있었다.

"윈스텀!"

이안이 부르자 윈스텀이 입을 함지박만 하게 벌리고 웃으며 이안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고 예를 갖췄다.

"껄껄껄. 도련님을 뵙습니다.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예, 당연하죠. 그런데 여기까진 무슨 일로?"

"음……."

갑자기 윈스텀이 뜸을 들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안은 재촉하지 않고 윈스텀이 입을 열 때까지 가만히 앉아서 기다려 주었다.

"며칠 전에 도련님께 말씀드렸다시피, 유라시아 대륙 곳곳에서 라인하르트 제국의 재건을 위한 병사들의 훈련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병사의 숫자는 얼마인지 모르나 그들 모두는 라인하르트 제국의 황손이 살아 있기를 바라면서 재건을 꿈꾸는 자들이었다.

"예, 알고 있지요."

"그들이 도련님을 믿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예? 믿지 못한다니요?"

"그 세력의 총사령관은 과거 라인하르트 제국의 후작이었던 레더린이라는 자로, 현재 마스터 중급에 올라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부관으로 있는 자는 수석마법사였던 현 5서클 마법사며 작위는 없습니다. 아무래도 그들이 도련님을 모시러 조만간 올 것 같습니다."

"그들에게 지금 제 상황을 전해 주세요. 토벌 때문에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전했지만 막무가내였습니다."

이안은 작게 신음을 흘렸다.

일단 직접 이곳까지 만나러 온다고 하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내일이면 토벌을 위해 자신은 장안의 숲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렇게 침묵의 시간이 흐르고 있을 때,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오라버니, 남작님께서 찾으세요."

레나의 목소리였다.

"아, 그래? 알았어."

이안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윈스텀도 같이 일어났다.

"도련님,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러세요. 그럼 나중에 다시 뵙도록 하죠."

"그럼 이만."

윈스텀이 먼저 나가자 이안도 레나의 안내를 받아 본관으로 향했다.

본관으로 향하는 길은 연무장을 훤히 볼 수 있다. 연무장에는 백 명이 넘는 병사들이 아직도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기사 셋을 둘러싸고 있었다.

쿵쿵쿵쿵!

"우! 우! 우! 우!"

병사들이 하나씩 창을 꼬나쥔 채 제자리걸음을 하며 먼지구름을 일으켰다.

그것이 기사들에게 묘한 압박감을 주고 있었다.

뭐라 해도 병사의 숫자는 백이었고, 기사들의 수는 셋에 불과했다. 게다가 병사들의 무기는 진짜 창이었고, 기사들은 목검에 불과했다.

하지만 기사들은 병사들과는 달리 긴장하지 않고 태연한 얼굴로 목검을 가슴 앞으로 끌어당겼다.

기사들 셋 중에 하나는 바로 욘지였다. 욘지는 리더십을 발휘해 기사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었다.

"우리의 목표는 첫째, 마나를 사용하지 않고 저 백 명을 제압한다. 둘째, 절대 죽여선 안 된다. 셋째, 져서도 안 된다! 알겠나, 제군들!"

"예! 명심하겠습니다."

두 명의 기사가 연무장이 떠나가라 우렁차게 대답했다.

그러는 사이 병사들이 조금씩 앞으로 걸어 나왔다. 예전처럼 멀리에서 달려들어 초반부터 체력을 떨어뜨리는 움직임은 철저하게 삼갔다.

기사들과, 그들을 둘러싼 병사들의 거리가 10미터까지 가까워지자 한스가 손을 높이 들었다.

"처음 공격은 방진(方陣)이다! 준비!"

"준비! 방진!"

이안은 결코 병사들에게 힘으로만 상대를 제압하는 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철저하게, 토벌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생존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래서 고안한 것이 바로 팔진법이다. 제갈량이 사용했던 팔진법은 전장에서 사용하기에 굉장히 유용한 진법이었다.

팔진법 중에서도 바로 방진이라는 기초적인 진법이 있는데, 이것은 다수의 강한 적을 상대할 때 그들을 분산시켜 혼란을 주는 것이었다.

과연 하루 이틀 훈련한 솜씨가 아니라는 듯 병사들은 빠른 속도로 기사들에게 돌격해 들어가 그들을 분산시키기 시작했다.

기사들은 병사들이 이 진법을 마지막 훈련 때 써 보기 위해 아껴 두었다는 것을 알고 당황하기 시작했다. 셋이 따로따로 갈라지면 혼자 삽십 명이 넘는 병사들을 당해 내기가 힘들었다.

"당황하지 마라! 각자 맡은 자리를 사수하고 정면으로 맞서라. 우리는 기사다!"

"예, 부단장님!"

셋이서 백여 명을 상대하는 진법은 없었으니 그들은 정면충돌을 시도했다. 이외로 기사들이 반격에 나서자 병사들은 끊임없이 공격을 시도했다.

기사들은 백여 명이 꼬나든 창날에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긴장감을 가지고, 창대를 하나하나 쳐 가면서 상대를 제압해 나갔다.

"끝까지 냉정을 유지하고 삼재보를 펼쳐라! 피하기가 한결 수월할 것이다."

"삼재보를 펼친다! 모든 병사들은 물러서라!"

그 외침에 병사들이 우르르 후퇴하기 시작했다. 아니, 후퇴라기보다는 공격을 끊고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난 것이 전부였다.

"뭐, 뭐냐?"

병사들의 갑작스런 행동에 기사들은 삼재보도 사용하지 못한 채 살며시 동요했다.

"1조, 2조, 3조는 각자 삼재진(三才陣)을 펼쳐라! 4조, 5조, 6조는 대기한다. 모든 병사는 진형을 그대로 유지하라."

훈련대장 한스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각 조마다 세 명의 병사들이 앞으로 나섰다. 각 조마다 각각 기사 한 명씩을 맡아 긴 창을 이용해 쉴 새 없이 공격을 퍼부었다.

실로 무서운 진형이 아닐 수 없었다.

"크윽! 이게 무슨……?"

막기에도 급급했다. 실력 좋은 욘지도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기에는 부족했다.

"크악!"

그때 기사 하나가 오른팔이 창날에 베여 한순간 검을 놓치고 말았다. 만약 병사가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으면 그대로 팔을 내줬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멍청한! 기사는 어떤 상황이 되어도 검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모르느냐!"

"죄, 죄송합니다, 부단장님!"

"알았으면 검을 들어라!"

병사들도 그 정도는 기다려 줄 수 있다는 듯, 기사가 다시 목검을 집을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이안은 토벌을 하루 앞둔 상황에서도 병사들이 실전을 방불케 할 정도로 열심히 연습하자 왠지 기분이 뿌듯했다.

"오라버니, 어서 가요. 남작님이 기다리신다니까요."

"그래. 어서 가자."

레나와 이안이 본관에 들어설 때까지도 창검 부딪치는 소리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 * *

"훈련 상황은 어떠하오?"

"병사들은 아침 훈련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밤에 다시 모여 물자 이송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끝낼 것입니다."

"흠……."

프로시안 남작은 자신의 집무실에 앉아 있는 웨일즈를 쳐다보았다. 웨일즈는 분명히 실력이 있는 자유기사다.

헤일론 백작가에서 쫓겨난 자라고는 하지만 놓치기에는 매우 아까웠다. 물론 다른 기사단에서 버티지 못한 자가 이곳이라고 과연 버틸 수 있을까 그것이 걱정이기는 했다.

살짝 표정이 굳어진 웨일즈를 향해 남작이 입을 열었다.

"이보시게, 웨일즈 경……."

"말씀하십시오, 남작님."

"정처 없이 대륙을 도는 것보다는 차라리 우리 에이전트 기사단에 들어와 실력을 쌓는 것은 어떠한가? 자네만 좋다면야 보통 기사들과 같은 대우를 해 주는 것은 물론일세."

하지만 내일이 토벌을 위한 날이기도 했다. 오늘 기사가 된다면 곧바로 토벌에 참여해야 하는 신세가 되는 것이었다.

"내일이 토벌 일이라는 사실을 잘 알 걸세. 토벌이 끝나고 기사단에 들어오고 싶다면 그래도 좋지. 일부러 목숨을 버리려고 전장에 뛰어드는 것은 아무리 기사라고 해도 옳은 일이 아니지 않나?"

"어차피 기사단에 들어오고 싶어 이곳에 왔습니다. 예전 헤일론 백작가의 알렌 경과 이곳 그로퍼 경의 대련을 보았는데 결코 잊을 수 없는 광경이었습니다."

입이 더럽고 험한 웨일즈라고 해도 프로시안 남작 같은 사람 앞에서는 얌전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의 주인이 될 사람이었다.

"잘 생각했네."

"고맙습니다, 남작님. 아, 그리고 또 웬만하면 오늘 기사단에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실력을 쌓기 위해 왔는데 토벌이 무섭다고 피하면 언제 실력이 늘겠습니까? 하하!"

"그것도 그렇군. 하하하! 축하하네. 이젠 자네도 어엿한 에이전트 기사단의 일원이 되었군."

웨일즈가 남작을 향해 무릎을 꿇고 크게 외쳤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주군!"

"바깥에 있는 시종이 자네를 안내해 줄 걸세. 오늘은 천천히 영지를 둘러보는 게 좋을 것 같군."

"감사합니다."

웨일즈가 바깥으로 나간 후, 얼마 안 있어 로이니스와 세리아, 이안이 차례대로 들어왔다.

"거기 앉으십시오, 로이니스 님. 이안 경과 세리아도 자리에 같이 앉아 주면 좋겠군."

세 사람이 소파에 앉자 남작도 의자에 앉았다.

"왜 부른 거야, 남작? 나까지 부른 걸 보니 심상치 않은 것 같은데."

얼마 전 세리아에게 로이니스의 정체를 들은 남작은 그녀를 백작처럼 대했다. 어차피 로이니스는 몇 년 후면 그 자리를 이어받아 명실상부 슈레이더 왕국의 베리카 백작 가문의 수장에 오를 것이니 말이다. 그 때문에 주위의 관심이 쏟아지자 로이니스는 조금 짜증을 느꼈다.

"내일이면 토벌군이 출발할 것입니다. 로이니스 님이 원하신다면 성에 남아 주십시오. 만약 큰 사고라도 난다면……."

로이니스가 손을 들어 남작의 말을 끊었다.

"아아, 됐어. 미안하지만 난 여기 남을 생각이 없는걸? 명색이 나도 슈레이더 왕국의 귀족으로서 왕국을 어지럽히는 장안의 숲 토벌을 도울 권리는 있다고."

"예, 알았습니다."

워낙 로이니스의 태도가 완고했기에 더 이상 뭐라 할 수도 없었다. 프로시안 남작의 눈이 이안과 세리아를 향했다.

"화이트 경, 자네도 알다시피 난 이제 나이도 먹고 아직 병이 완벽하게 나은 게 아니기 때문에 숲 속에 오래 있을 수 없네. 그래서 세리아가 내 대신 나가기로 돼 있지."

일단 모든 용병들이 토벌을 위해 출발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용병들이 출발하면 이곳 영지의 병사들이 군수물자를 수송할 것이었다.

"흠, 내가 자네를 부른 이유는 자네가 세리아를 보필하여 용병들을 이끌어 줬으면 하기 때문이야. 용병들이야 워낙 거칠다 보니 혹 여자인 세리아가 견뎌 낼 수 없을 만큼 곤란해질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 점은 이안도 충분히 걱정하고 있었다. 그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건 그렇고, 칸은 뭐 하고 있느냐?"

"칸 아저씨는 지난번 이안 경이 잡은 미노타우로스 때문에 연구에 빠지셨어요. 아버지도 아시다시피 미노타우로스가 워낙 구하기 힘든 마법 재료잖아요."

"하긴, 쩝……. 그래도 상당히 아깝군. 그 가죽이며 힘줄은 뛰어난 갑옷과 활을 만들어 줄 텐데 말이야."

"칸 아저씨를 누가 말리겠어요."

세리아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하자, 남작은 인자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조심하거라……. 너도 알다시피 장안의 숲은 여타 숲과는 다른 곳이니까."

"아버지도 참, 걱정 마세요. 칸 아저씨도 따라가고 여기 로이니스 님과 이안 경이 있으니 목숨이 위험하면 언제든지 도망쳐 나올 수 있어요."

프로시안 남작이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라면 잘해 줄 거라 믿는다."

남작과의 대화를 끝낸 후, 이안은 동관으로 돌아와 여느 때와 같이 3대 제국검이라 불리는 자신의 검을 깨끗한 천으로 닦아 냈다.

똑똑!

가볍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

이안이 문 쪽을 휙 쳐다보자 허락도 없이 방문이 열리며 레나가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흥! 오라버니는 또 그 잘난 검만 쳐다보세요? 저는 내일 오라버니가 출병한다는 소식에 보양식이라도 좀 만들어 왔는데……."

레나가 쀼루퉁한 표정을 짓자 이안이 머리를 긁적였다.

"아, 미안. 검을 쳐다보고 있었더니 그냥 왠지 이름이 필요할 것 같아서 말이야."

"이름이요?"

"응. 레나는 이 검에 어울릴 만한 이름이 뭐가 있을 것 같아? 아무거나 말해도 좋아."

중원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유라시아 대륙의 기사들도 자신의 검에 이름을 붙여 주는 것을 좋아했다. 그럼으로써 검과의 관계가 돈독해진다는 미신이 돌기 때문이다.

"흐응…… 조금 특이한 검이네요."

"어라? 어떻게 알았어?"

이안이 놀랍다는 듯 쳐다보자 레나가 거만한 표정으로 두 손을 양 허리에 올려놓았다.

"그거야…… 평소에 돌아다니다 보면 관심이 없어도 검을 많이 보게 되니까. 그 검은 롱소드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바스타드소드만큼 크지도 않으니 조금 특이한 검이랄까……."

이안이 들고 있는 검은 특이하면서도 기품이 넘쳐 보였다.

아무래도 제국검이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상당히 고민하는 레나의 표정을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면서 보양식이란 것을 한번 떠먹어 보았다.

"윽! 이거 도대체 뭘로 만든 거야?"

냄새만 맡았을 때는 상당히 괜찮게 느껴졌는데, 정작 먹어 보니 도저히 먹을 수 있을 정도가 아니었다.

"어떻게 오라버니는 여자 맘도 몰라요. 그냥 잠자코 드세요오∼ 오라버니이! 몸에 좋은 건 원래 쓰답니다."

"이건 쓴 게 아니라 맛이…… 윽!"

보양식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고기처럼 보이는 것들이 둥둥 떠 있고 그 외에 한 번도 본 적 없는 한약 재료로 국물을 우려낸 듯했다.

이안은 레나의 표정에 질겁하여 무려 15분이나 걸린 끝에 간신히 보양식을 해치울 수 있었다. 만약 조금 전의 훈련으로 인해 배가 고프지 않았다면 절대 먹지 못할 음식이었다.

"어?"

이안이 마지막에 숟가락을 놓자 음식에 가려져 있던 접시의 맨 아랫부분에 작은 글씨가 쓰여 있는 것이 보였다.

이 글을 본다면 해가 지기 전에 외성 동쪽으로 나오시오. 기다리겠소.

분명히 검기로 접시에 문자를 새겨 넣은 흔적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 문자를 보고 원래부터 접시에 새겨진 문자인가 하고 고개를 갸웃거릴 정도로 정교한 글씨였다.

검기도 검기였지만, 라인하르트 제국에서만 사용하던 문자였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평민과 농노들은 모르는 문자.

귀족, 그중에서도 후작 이상의 최상위 귀족들에게만 은밀하게 내려오던 암호 같은 것이었다.

이안이 벌떡 일어나더니 레나의 양어깨를 짚었다.

"레나! 이 음식 누가 만들었어?"

심각한 어조로 묻자 레나가 얼른 대답했다.

"그거야 제가……."

"혹시 이 접시 어디서 가져온 줄 알아?"

"아! 그 접시라면 오늘 새로 들어온 시종이 주더라고요.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 주는 접시라면서……."

"알았다."

이안이 곧바로 몸을 돌려 방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레나의 작은 음성이 들려왔다.

"오라버니."

얼마나 작았는지 청각이 예민한 이안마저도 놓칠 정도였다.

"무슨 일인데?"

레나가 부끄러운 듯 얼굴을 홍당무처럼 붉히더니 양팔을 배배 꼬면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

"검 이름 말이에요. 소드 오브 로열(Sword of Royal) 어때요?"

왕의 검이라는 뜻이다.

이안이 검집째로 높이 들어 올리며 말했다.

"좋아!"

이안은 가볍게 경공을 펼쳐 무작정 외성으로 향했다.

아직 해가 지는 시간은 아니었기에 충분한 시간이 있었지만 한시라도 그들과 만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 세력의 총사령관은 과거 라인하르트 제국의 후작이었던 레더린이라는 자로, 현재 마스터 중급에 올라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부관으로 있는 자는 수석마법사였던 현 5서클 마법사며 작위는 없습니다. 아무래도 그들이 도련님을 모시러 조만간 올 것 같습니다.'

라인하르트 제국의 문자는 후작 이상만이 알고 있는 암호다. 그런 암호를 알고 있다는 것은 과거에 후작 이상이었던 자.

현재 재건을 위해 병사들을 은밀하게 키우고 있는 레더린밖에 없었던 것이다.

'생각보다 빨리 와서 다행이로군. 출병보다 늦게 도착했다면 만나기가 상당히 힘들었을 텐데 말이야.'

그런 생각에 이안은 어느새 동쪽 외성에 다다랐다.

프로시안 영지의 동쪽 외성을 지나면 나오는 장안의 숲은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곳이었다. 성과 인접한 마을 사람들만 간간이 다닐 뿐 대체적으로 한산했다.

주위를 둘러보다가 한곳에 멈춰 선 이안의 눈이 이채를 발산했다.

'그 세력의 총사령관은 과거 라인하르트 제국의 후작이었던 레더린이라는 자로, 현재 마스터 중급에 올라 있습니다.'

윈스텀의 말을 계속 곱씹고 되뇌어 보았다.

말 두 마리가 숲을 향한 채 나란히 서 있고, 그 위에는 각각 한 명의 중년인이 앉아 있었다.

둘 중 한 명은 망토가 잘 보이게끔 서 있었는데, 그 망토에는 이안의 왼쪽 팔뚝의 문신과 같은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이안은 그를 보는 순간 전신의 털이 쭈뼛쭈뼛 서는 오싹한 기분을 느꼈다.

'초절정! 그것도 곧 있으면 화경의 경지에 오를 정도다.'

마스터의 경지를 초절정으로 본다면, 마스터 상급은 화경이라 할 수 있었다. 레더린은 마흔의 나이로 마스터의 경지에 올라 지금껏 삽십 년 동안의 훈련으로 중급에 오른 강자 중에 강자였다.

그리고 레더린 옆에 서 있는 중년인 또한 만만치 않은 실력자였다. 처음에는 로브를 뒤집어써서 못 알아봤지만 이윽고 얼굴을 마주치자 중년인이라는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저자가 레더린 후작의 부관이다! 부관 또한 5서클의 경지라고 했으니 만만치 않은걸.'

유라시아 대륙을 통틀어서 마법의 최고자라고 일컫는 경지는 7서클 마스터에 들어 있는 마탑의 탑주뿐이다.

대제국인 프라스 제국 또한 고작 6서클 유저가 궁중 마법사를 하고 있으니 다른 왕국에서 또한 5서클 정도로도 궁중 마법사가 될 수 있었다. 그러니 5서클이라고 하면 엄청난 실력자라 볼 수 있는 것이다.

레더린 후작도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이안을 향해 눈을 돌렸다.

한동안 침묵이 흐르고, 레더린이 이내 말을 끌고 천천히 다가왔다.

소리 없는 공방전.

두 사람의 눈은 한 치도 움직이지 않았다. 껌뻑거림도 사라지고 어느새 자존심 싸움까지 이어졌다.

이윽고 레더린이 싱긋이 웃으며 말에서 뛰어내려 호탕하게 웃으며 이안에게 다가왔다.

"하하하! 졌습니다, 졌어요. 이 노부의 시선을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받아 내다니요. 자아, 인사 올리겠습니다. 과거 라인하르트 대제국의 영광을 얻고자 황태자 전하를 기다려 온 레더린이라 합니다."

노부라 하기에는 누구나 이상하게 생각할 만한 모습.

다른 사람이 보았다면 이제야 갓 마흔이 된 이로 보일 것이었다. 확실히 레더린은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고 난 뒤 나이를 전혀 먹지 않는 모습이었다.

마법사가 로브를 벗고 무릎을 꿇더니 이안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찰트라고 합니다. 과거 라인하르트 대제국의 수석마법사였으며 현재는 본대에서 마법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본대?"

"예, 저희의 군대는 셀 수 없을 정도로 유라시아 대륙 각지에 퍼져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본대는 약 오천 명으로 구성되어 있지요."

이안은 그 둘을 보다가 스스로를 짧게 소개했다.

"화이트 폰 이안. 이 영지에 사정이 생겨 숨어 산다고 볼 수 있겠군. 지금은 기사의 신분이다."

이안은 이들의 주군이 될 자였다. 종족이 다른 윈스텀은 몰라도, 이들의 앞에 서자 절로 위엄이 우러나왔다.

사실 이안은 얼굴이 변모한 이후 엄청난 변화가 생겼다. 여신의 축복을 받았기에 그와 함께하는 자들은 숨이 턱 막힐 듯한 카리스마를 느낄 수 있었다.

지금 레더린과 찰트 또한 그러했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던 그들도 이안에게서 자연스럽게 풍겨 나오는 위엄에 자신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었다.

찰트가 조심스럽게 이안에게 물었다.

"저, 전하! 송구하오나 팔뚝에 새겨진 문신을 보여 주실 수 있사옵니까?"

"원한다면."

이안이 왼 팔뚝을 걷어 올리자 창과 방패를 들고 있는 여신의 문신이 보였다.

"맞습니다, 대장님! 이분은 분명 라인하르트 대제국의 마지막 후손인 황태자 전하십니다."

"확실하느냐?"

레더린이 아직 의심이 가시지 않았는지 흥분된 목소리로 재차 물었다.

"확실합니다!"

"오, 여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이 노부의 이십 년 기다림이 헛되지 않게 해 주심을 또 감사드립니다."

남들이 모두 죽었다고 생각한 라인하르트 대제국의 후손. 그들은 하루를 백 년같이 생각하며 기다려 왔다.

레더린과 찰트는 절을 하듯이 몸을 바짝 숙이고 눈물을 흘렸다.

"전하! 다시 한 번 인사 올리겠나이다. 과거 대제국의 후작이었던 레더린이라 합니다. 부디 저희들을 이끌어 주십시오!"

"저 찰트, 전하에게 여생을 바치겠나이다. 거두어 주시옵소서! 전하아∼!"

채앵!

이안은 그들이 보는 앞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그 검을 본 레더린과 찰트가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3대 제국검 중 하나가 이안에게 있었으니 어찌 놀라지 않을까.

"그대들이 있는 한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 또한 재건을 위해 헌신할 것을 이 검에 맹세하겠다."

소드 오브 로열(Sword of Royal)!

그렇게 세 사람은 왕의 검에 맹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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