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2장 폭발! 이안의 힘 □
트라바체스 대장간에는 결코 대장장이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윈스텀이 고용하여 예전에 하급관리로 있던 영지민도 있었다.
그런 그들이 오늘은 회의실에 모여 두 여인 앞에서 허리를 굽실거리며 자신들의 의견을 내놓고 있었다.
"세, 세리아 아가씨. 그렇다면 이번 원정은 단순히 몬스터의 토벌뿐만 아니라, 광산을 개발하기 위함입니까?"
아무리 하급관리라고 해도 세리아의 얼굴을 몰라볼 리가 없었다.
유라시아 대륙은 영지가 있고 영주가 존재하는 곳.
봉건제도가 존재하는 곳이었다.
제국의 지배자는 황제고, 왕국의 지배자는 왕이며, 영지의 지배자는 영주라는 말이 있다. 영지라는 작은 땅을 지배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영주이기 때문이다.
세리아는 어디까지나 귀족 중에서도 하급작위인 남작의 여식이지만, 그녀의 신분은 귀족이다.
하급관리였던 그와 영주의 딸 사이에는 하늘과 땅만큼의 신분 차이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세리아를 대하면서도 감히 얼굴을 쳐다보지 못하고 식은땀만 흘리고 있었다.
세리아가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릴 듯 보였다. 그녀가 이곳에 협상을 하러 온 이유는 광산 개발을 위해 그곳에서 생산되는 양의 금속들을 트라바체스에서 제련을 원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드워프가 있는 곳이니 만큼 믿음이 갔다.
드워프의 제련이라면 그 품질에서는 어느 곳과도 비교할 수 없을 것이고, 같은 영지 내에 있기에 매우 싼 가격으로 거래가 가능할 것이었다. 게다가 드워프가 제련했다는 것만 증명된다면 막대한 이익을 남길 수 있었다.
"그건 비밀이에요.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겠지만, 이 일이 밝혀지면 곤란하거든요."
세리아가 방긋 웃으며 비밀이라고까지 말하자 관리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귀족이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무조건 이 일에 협상해야 했다. 귀족들의 비밀을 알았으니 입막음을 위해 살해당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물론 세리아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리는 없겠지만 말이다.
"광산의 크기와 거기에서 생산되는 광물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까?"
"금이에요."
"그, 금 말입니까?"
얘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대충 은광이 아닐까 생각했다. 대부분의 광산이 철광이거나, 가끔가다 은광이 발견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은광보다도 귀한 금광이란다.
남자는 너무 놀라 입을 떡 벌렸다. 그러고는 한동안 다물어질 줄 몰랐다.
"이 일은 저 혼자 결정 가능한 게 아닙니다. 부디 윈스텀 님과 상의한 뒤에……."
"알았어요. 얼마나 기다리면 되죠?"
"쉽게 결정될 사안이 아니니 적어도 하루 정도는 시간을 주셔야……."
"네, 그럼 내일 다시 오도록 하죠. 그건 그렇고, 아까 윈스텀 님과 같이 들어갔던 기사 분은 언제 오시는 거예요?"
"그,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송구합니다."
"그래요? 알았어요. 그럼 이만 나가 볼게요."
남자가 세리아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아직도 긴장이 풀어지지 않아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내일 뵙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예, 그럼 안전히 돌아가십시오."
남자가 그 말과 함께 사라지자 세리아는 한숨을 내쉬고는, 자신의 옆에 곤히 잠들어 있는 로이니스를 흔들어 깨우기 시작했다.
"저…… 로이니스 님? 이제 일어나실 시간인데요."
고리타분한 얘기는 애초에 관심조차 없었던 로이니스였기에 일찍이 대화를 시작하고부터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세리아가 깨우는 소리에 흥얼거리며 눈을 비볐다.
"흐응. 그 녀석은 아직도 안 왔어?"
"예……. 하지만 곧 올 거예요. 로이니스 님은 마차에서 기다리시는 게 어때요?"
풀 죽은 세리아를 본 로이니스가 볼멘소리를 냈다.
"흥! 그 녀석, 돌아오기만 해 봐라. 아주 혼을 내 줄 거야. 감히 우리를 이렇게 기다리게 하다니……. 좋아! 일단 마차에서 기다리도록 하……."
로이니스가 갑자기 말을 끊더니 놀란 토끼처럼 눈을 크게 떴다. 라운드 타입의 하프 플레이트를 걸친 흑발의 남자가 회의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가까이서 보지 않았다면 결코 그를 이안이라고 생각하진 못했을 것이다. 흑발이면서 금빛이 번쩍이는 듯하고 선한 인상은 온데간데없어져 날카로운 미남의 얼굴만 남아 있었다.
확연하게 달라진 분위기.
"이, 이안 경……?"
세리아의 눈이 커졌다.
"맞습니다. 늦게 돌아와 죄송합니다, 아가씨."
"너, 너 누구야! 이거 설마 가짜는 아니지?"
로이니스가 대번에 달려와 이안의 얼굴을 잡아당겼으나, 진짜 피부가 변장한 것처럼 찢어질 리가 없었다. 세리아도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라 마나스캔까지 해 보았지만 결코 마법으로 변형한 얼굴은 아니었다.
이안이 로이니스의 손을 떼어 내며 살짝 웃었다.
"진짜가 맞습니다. 그저 예전 펠타온 제국에 있을 때 적국의 마법사에 의해 마법에 걸려 있었던 것뿐입니다. 우연히 윈스텀 님 덕분에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윈스텀은 이안의 수하였으나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으니 남들 앞에서는 존대를 해야 했다.
놀라워하는 이들에게 미리 준비해 놓은 변명을 늘어놓자 그럭저럭 넘어가는 눈치였다.
"그건 그렇고, 협상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잘 완만하게 해결이 되었습니까?"
급히 화제를 돌리자 당황한 세리아가 말을 더듬거렸다.
"예? 아, 아뇨. 아직까지는 확실치가 않아요. 내일까지는 기다려 봐야 결과를 알 것 같거든요."
"하하. 그렇습니까? 그럼 빨리 마차로 가도록 하죠. 저기 째려보고 있는 분이 계셔서 더 이상 있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안이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은 로이니스였다.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픈 로이니스는 세리아와 이안이 계속해서 대화를 주고받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흥!"
로이니스가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홱 돌렸다.
* * *
"필립 후작님께서 드셨습니다."
대전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위사의 말에, 담소를 나누던 귀족들의 시선이 모두 한곳으로 몰렸다. 화려한 대전의 문이 열리자 어깨에 블루 드래곤의 문장을 수놓은 필립 후작이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시원스런 발걸음은 용좌에 앉아 있는 카이어스 국왕의 앞에서야 멈췄다.
"신 알카이드 반 필립이 폐하께 문후 여쭈옵니다."
필립 후작의 얼굴을 본 국왕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어서 와요, 숙부님.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그래, 전할 말이 있다고요?"
"귀가 너무 많습니다. 죄송하지만, 주위를 좀 물려 주시지 않겠습니까?"
카이어스가 고개를 끄덕이고 손짓하자 주변에 있던 근위기사들이 모두 바깥으로 나갔다.
물론 귀족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경들은 그만 나가서 쉬시오. 난 숙부님과 나눌 이야기가 있으니 회의는 내일 하겠소."
귀족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대전을 나가자, 필립 후작이 주위를 스윽 둘러보더니 잠시 후 운을 떼었다.
"폐하께서도 슈레이더 왕국 동쪽에 어떤 영지들이 존재하시는지 잘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음……. 제가 알기론 프로시안 남작가가 있다고…… 그리고 그 바로 옆에는 헤일론 백작가가 있고요."
"예, 그중에서도 장안의 숲을 막고 있는 영지가 바로 다름 아닌 프로시안 영지입니다. 그런데 얼마 전 그 프로시안 영지에서 안 좋은 일이 있었습니다."
"호오? 그게 뭔가요, 숙부?"
"프로시안 영지의 영주인 남작이 병환으로 쓰러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 남작은 아주 자존심이 센 사람이라, 사교계에서는 모르는 자가 없지요."
카이어스 국왕은 필립 후작이 거짓말을 한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프로시안 남작은 예전부터 그 영지를 이어받아 다스려 왔으며 지금껏 영지를 위해 헌신했기 때문에 사교계에는 발을 넣어 본 적도 없었다.
'과연, 숙부님은 나의 눈과 귀를 이렇게 멀게 해서 그동안 나 몰래 세력을 키워 왔구나. 내가 너무 아둔하고 멍청했느니라…….'
하지만 카이어스는 혼자서 이 나라를 다스릴 만한 재목이 되지 못했다. 이제는 그를 지지하던 귀족들도 하나 둘 떨어져 필립 후작의 뒤에 서기 시작했다.
"그래서요?"
"그것을 안타까워한 헤일론 백작이 친히 그레이 기사단에게 그 병을 다스릴 수 있는 약재를 들려 보냈습니다. 그런데 우습게도, 프로시안 남작은 그 은혜도 모르고 그레이 기사단의 기사 세 명을 죽이고 백작을 모욕했습니다. 이런 일은 전대미문이요, 앞으로도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될 일입니다. 부디 폐하의 그 하늘과 같은 마음으로 백작과 남작의 영지전을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결국 나를 따르는 자들은 모두 적당한 명분을 내세워 죽여 없애고 왕위를 차지하려는 속셈이 아니더냐.'
카이어스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필립 후작이 지금 당장이라도 귀족들을 앞세워 병력을 모아 왕궁으로 쳐들어온다면 막을 자신이 없었다. 자신에게는 힘이 없었고, 그렇다고 나라를 이끌 재목도 아니었다.
'프로시안 남작……. 나를 용서하시오.'
헤일론 백작이라 하면 최소 슈레이더 왕국에서만큼은 모르는 이가 없다.
다른 의미로, 프로시안 남작 또한 모르는 자가 없다.
장안의 숲을 끼고 있는 최악의 영지!
세금을 내는 것조차 버거운 영지!
고작 천 명도 안 되는 병사로 운영되는 영지가, 헤일론 백작가의 강력한 수천 군대를 막아 낼 리가 없었다.
"오늘은 별궁에서 묵도록 하세요, 숙부님. 제가 이따가 사람을 시켜 그곳으로 친필 서한을 보내겠습니다."
"신 알카이드 반 필립! 폐하의 명을 따르겠나이다."
필립은 자리에서 일어남과 동시에 등을 홱 돌려 그대로 대전 문을 나갔다.
카이어스는 필립 후작이 나간 방향을 한동안 쳐다보고는 떨리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정말 미안하오……. 남작."
한편 그 시각 헤일론 백작가에서는, 그 소식을 건네받은 부관이 발 빠르게 움직여 연무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요새 영지전 때문에 부쩍 자극받은 백작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검술 수련에 빠져 있었다.
그가 여색을 탐하는 시간에 검술 수련에만 매진했다면 마스터에 올랐을 거라 말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런데 주군이 연무장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검술을 연마하니 부관은 그런 모습을 보면서 뿌듯함을 느꼈다.
"자네, 왔는가?"
"헛!"
다가서기도 전에 백작의 입에서 나온 한마디.
평소와는 많이 다른 분위기다.
예전에 풍겼던 위압적인 기운은 사라지고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기운만이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연무장에 홀로 앉아 명상을 하고 있던 백작에게 다가간 부관이 시종에게 미리 부탁해 받아 놓은 수건을 건넸다.
수건을 건네받은 백작이 땀을 닦아 내더니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일어났다.
"후후. 정말 기분이 좋군. 이런 거였나? 마스터라는 것이……."
부관은 방금 자신의 귀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했다. 하지만 분명 백작의 입에서는 마스터라는 단어가 또렷하게 흘러나왔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갑자기 백작의 검집에서 검 한 자루가 뽑혀 나왔다. 백작의 마나를 머금은 검이 처음에는 옅은 오러를 뿌려 대더니 갑자기 그 위에 또 다른 검이 만들어졌다.
우우우웅!
마나 특유의 소리. 그리고 백색의 마나.
"오, 오러 블레이드!"
검에 대해 문외한이라는 부관도 오러 블레이드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안다. 심지어 세 살짜리 애들도 마스터라는 경지가 얼마나 오르기 힘들고 드문지를 알고 있다.
부관은 온몸에서 힘이 빠진 듯 엉덩방아를 찧었다.
지금 같아서는 자신이 모시는 백작이 마스터가 됐다며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고 싶은 심정이었다.
슈레이더 왕국에서는 이례적인 최초의 마스터였다.
백작이 부관의 심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듯 오러 블레이드를 집어넣으며 그에게 말했다.
"내가 마스터가 됐다는 소문은 되도록 내지 말도록. 그것이 퍼지면 어떻게 해서든 내 목숨을 위협하는 암살자 놈들이 끊이지 않을 테니까."
"자, 잘 알겠습니다. 백작 각하. 이제 프로시안 영지만 쓸어버리고 전쟁에서 공을 세운다면 후작도 머지않았습니다."
"후후. 프로시안 영지라…… 그래, 필립 후작님께 전언이 있었나?"
"예. 보름 후 정도면 토벌에 나갈 거랍니다. 토벌이 반 정도 진행됐을 때, 한 번에 몰아치는 게 중요하다 하셨습니다. 그때가 되면 토벌군도 다시 발을 빼기가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럼 토벌군은 누가 이끌 거라는 말은 못 들었나?"
"아마 남작의 여식인 세리아가 이끌지 않을까 합니다. 토벌군을 이끌기에는 아직 남작의 체력이 완전치 못하답니다. 그리하여 오백의 병사로 영지를 지키고 남는 병사들은 모두 물자 이동을 위해 움직인답니다."
"으하하하. 오백? 그럼 준비해 두어라. 우린 그 숫자의 열 배인 오천으로 나갈 것이다."
"예! 성심껏 명을 수행하겠습니다."
부관의 대답에는 어딘지 모르게 힘이 실려 있었다.
자신이 모시는 주인이 한층 강해졌다는 데 대한 자부심.
그것으로 부관은 백작에 대한 충심이 한층 강화되는 것을 느꼈다.
* * *
"지원군은?"
초록색 피를 온몸에 뒤집어쓴 웨일즈가 묻자 남자 하나가 황급히 대답했다.
"아직이랍니다!"
"그 자식들, 도대체 뭐 하는 거야! 자기 영지에 있는 마을이 이렇게 되고 있는데……."
웨일즈가 이를 갈더니 검을 쥔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모든 대원들은 마을 사람들을 황급히 대피시키고 오크들을 최대한 견제해라!"
"오크들을 견제하기엔 대원들 숫자가 너무 적습니다! 게다가 미노타우로스 때문에 견제 또한 쉽지 않습니다."
"좋아! 미노타우로스는 내가 맡는다. 그동안 모두 마을 사람들을 구출하라!"
웨일즈는 그 말과 함께 두 마리의 미노타우로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파파팟―!
그 뒤로 열 명의 궁병이 오크들에게 활을 쏘기 시작했다. 오크의 숫자는 팔십 마리에서 오히려 열 마리가 늘어나 구십 마리를 넘어서고 있었다. 화살 열 대가 날아갔지만 한 대도 제대로 맞히지 못했다. 화살은 어디까지나 견제용일 뿐, 화를 돋우려 하는 대원은 아무도 없었다.
웨일즈는 반쯤 부러진 검에 마나를 불어넣고는 곧바로 미노타우로스의 하체를 공격했다.
미노타우로스는 질긴 가죽과 엄청난 체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체를 무너뜨리지 않으면 공격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아앗!"
웨일즈의 검이 푸르스름해지자 그를 본 대원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대원들 역시 검에 마나를 집어넣을 수 있는 경지가 익스퍼트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익스퍼트는 미노타우로스 같은 대형 몬스터를 죽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리 질긴 가죽이라 해도 철도 베어 내는 오러를 견뎌 낼 턱이 없었기 때문이다.
스팟―!
그의 검이 허벅지를 관통하려는 찰나, 옆에 있던 또 다른 미노타우로스가 달려들었다. 손에 들고 있는 커다란 몽둥이로 웨일즈의 움직임을 보고 있다가 그대로 내리찍었다.
"칫!"
웨일즈는 검을 포기하고 그대로 옆으로 굴렀다.
쿠웅!
몽둥이가 닿은 지면이 쩌저적 갈라졌다.
그 모습을 본 대원들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웨일즈가 지면을 힐끔 쳐다보더니 질린 표정으로 혀를 내둘렀다.
"제기랄, 이거 제대로 한 대 맞았으면 골로 갈 뻔했어."
웨일즈는 날렵한 움직임으로 이리저리 피해 다니며 시간을 끌었다. 아무리 미노타우로스가 힘이 강하다고 해도 마나를 이용해 움직이는 상대를 쉽게 맞힐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웨일즈의 목적은 시간을 끄는 것이지 미노타우로스를 죽이는 것은 아니었다.
한층 여유가 생겼을 무렵,
퉁―!
묵직한 것을 쏘아 올리는 소리가 들렸다.
"대장! 뒤에 조심……!"
"뭐?"
웨일즈가 급히 뒤를 바라보자 어느새 투입된 오크 궁수들이 화살을 쏘아 대고 있었다. 조잡한 활임에는 틀림없지만 30미터도 채 되지 않는 거리에서 쏘았으니 결코 피하기가 쉽지 않았다.
웨일즈가 그 자세 그대로 뺑그르르 돌았다.
차악!
화살이 그의 왼팔을 스쳐 지나가자 피가 뚝뚝 떨어졌다. 오른팔로 상처를 감쌀 즈음, 갑자기 거대한 그림자가 그를 덮쳤다. 미노타우로스의 공격이었다.
타탓!
고통에 신음할 시간도 없이 웨일즈가 그대로 땅을 박차고 뒤로 몸을 날렸다. 아까와 똑같은 몽둥이가 지면을 때리자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땅이 크게 울렸다.
웨일즈는 곧바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미노타우로스의 다음 공격에 대비했다.
때마침 대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장! 모두 구출했수! 빨리 빠져나오슈!"
"그럼 다음 마을로 가서 공격에 대비하라고 전해! 한시라도 빨리!"
"대장은 어쩌실 거요!"
"내 걱정은 마라. 나도 이딴 놈들에게 내 하나뿐인 목숨을 줄 생각은 없다!"
웨일즈가 바로 뒤돌아서서 튈 자세를 취했을 때, 그의 귀에 미세한 신음 소리가 들렸다.
'뭐지?'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마나를 귀에 집중하자 그 소리가 점점 크게 들리기 시작했다. 분명 여자아이의 목소리였다.
웨일즈의 눈이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곧 무너진 건물 속 작은 구멍을 통해 들리는 소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빌어먹을 놈들. 모두 구출하라고 했더니 한 명 놓쳤잖아!"
여자아이가 있는 건물은 하필이면 오크들의 뒤편에 있다. 구하는 것은, 이젠 백 마리가 넘어 버린 오크 사이를 파고들어 길을 낸 다음에야 가능했다.
철커덩!
웨일즈가 바닥에 놓인 검을 가볍게 차올리자, 그대로 그의 손으로 검이 빨려들어 왔다. 다음 순간 오크들이 만든 벽을 뚫기 위해 달려들자 궁수들이 시위를 당겼다가 놓았다.
파파파팟!
십여 대가 넘을 정도로 많은 화살들이 날아오자 웨일즈는 그대로 검을 빠르게 내리쳤다.
타타타타탕!
"멍청한 놈들아! 그것밖에 안 되냐! 더 쏴 봐, 더!"
"취익! 인간 놈이 도발한다. 취익! 소원대로 더 쏴 줘라! 취익!"
"취익! 취익!"
웨일즈의 눈에 숲을 내려오는 오크들이 하나 둘 눈에 띄기 시작했다. 그들 모두 등에 활을 걸치고 있는 것을 보면 궁수들이 틀림없었다.
"이 개자식들. 숫자가 점점 많아지네."
파파파팟―!
화살의 숫자가 방금 전보다 두어 배는 많아졌다. 웨일즈가 상기된 표정으로 검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아까보다 숫자가 많아지자 막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푸욱!
거칠게 날아온 화살 한 대가 그의 어깨에 틀어박히자 한순간 틈이 생겼다.
그 틈을 타 쏘아져 날아온 대여섯 대의 화살.
그 중 두 대가 웨일즈의 가슴에 틀어박혔다.
"컥! 제기랄! 이 자식들, 다 죽여 버리겠어!"
팟!
마나를 불어넣은 검을 휘둘러 빠르게 베어 내기 시작했다. 머리가 비상한 놈이었는지, 오크들의 우두머리가 궁수들을 뒤로 물리고 전방에 몽둥이를 가진 오크들을 배치하자 궁수들을 죽이기가 어려워졌다.
"케엑! 취익! 취익!"
"취익! 인간 놈은 혼자다. 이제 지쳤다. 취익! 모두 달려들어라! 취익!"
슈욱―! 슉!
오크 궁수들은 동족이 같이 포진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웨일즈가 있는 방향으로 무조건 화살을 날렸다.
"이런 지독한 새끼들! 너희는 동족이 있는데도 화살을 쏴 대냐! 오냐. 내가 이대로 죽는다면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오크 궁수들이 쏘아 낸 화살이 웨일즈를 공격했지만 정작 맞은 것은 오크들이었다. 오크들이 쓰러지자 웨일즈는 황급히 오크를 방패 삼아 앞으로 내달렸다.
"취익! 취익! 아무것도 생각지 마라! 그냥 저놈만 죽이면 된다! 취익!"
우두머리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오크들이 무작정 달려들었다. 사방에서 옥죄어 오는 놈들을 뚫고 가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게다가 부상까지 입은 상태.
'내가 죽으면 아이까지 죽는다! 이대로…… 이대로 멍청한 생각은 말고 전진뿐이다!'
웨일즈는 들고 있던 오크의 시체를 전방으로 던지고 그대로 달려들었다.
'제길, 내가 왜 이런 생고생까지 해야 하는지 모르겠군.'
헤일론 백작가에서 쫓겨나 프로시안 영지로 이주하는 사람들을 호위하며 베얀 마을에 도착했다. 영지로 오는 동안 몬스터들을 만나 목숨을 위협받았던지라 마을에 도착하니 긴장감이 풀려 그대로 쓰러지듯 여관에서 잠을 청했다.
하지만 곧이어 들리는 비명 소리.
그 소리에 잠에서 깬 웨일즈는 검을 들고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마을 안은 이미 아수라장으로 변해 있었다.
몇몇 자치대원들이 사람들을 진정시키고 다음 마을로 도주시키는 모습이 보이자 웨일즈는 자유기사 증명서를 보여 주고 곧바로 대장이 될 수 있었다.
마침 자치대장이 오크에게 죽임을 당하는 바람에 대장 자리가 비어 얻은 자리였다. 웨일즈는 아카데미에서 배운 대로 침착하게 사람들을 이끌고 대원들의 능력을 하나하나 파악하여 오크들과 미노타우로스의 견제에 나섰다.
그것이 실수였다.
'그대로 도망갔다면 목숨은 부지했을 텐데…….'
명예를 중시해서 기사가 된 것은 아니었다. 기사를 동경해서 그동안 귀족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면서도 꿋꿋하게 버텨 온 것이 아니었다.
평민들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난 이렇게 성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귀족들에게 말하고 싶었다.
'귀족이 아니어도 얼마든지 최고가 될 수 있다.'
갑자기 웨일즈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것이었다면 처음부터 기사 따위는 안 됐을 텐데 하는 후회가 밀려 들어왔다.
이렇게 죽으려고 귀족들에게 욕을 먹으며 눈물로 밤을 지새며 버텨 온 것이 아니다. 이렇게 허무하게 눈을 감으려고 기사가 된 것이 아니었다.
"제기라아알!"
콰앙! 콰앙!
그는 몸 안에 가둬 놓은 모든 마나를 검으로 폭발시켰다. 아까보다도 선명한 오러가 오크들을 훑었다.
슈욱! 슉슉!
"취익! 케에엑! 취익!"
"케엑! 케엑!"
십여 마리가 넘는 오크가 그대로 몰살당했다.
그에 따라, 지치지 않던 웨일즈의 입에서 거친 숨이 터져 나왔다. 입에서는 단내가 났다.
"헉! 헉! 이젠 끝……인가?"
입을 열 만한 힘도 남지 않았다.
그는 검을 땅에 꽂고 온 체중을 검에 실어 그대로 무너졌다.
"취익! 놈을 없애라! 몸을 운신할 힘도 없다. 취익!"
우두머리가 말하자 오크들이 그대로 그를 사방에서 둘러싼 채 점점 압박해 왔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피를 너무 많이 흘렸기 때문인지 점점 시야가 흐릿해져 갔다.
쿠웅!
마침내 온몸을 지탱하던 검이 쓰러지자 웨일즈의 몸도 땅바닥으로 기울어졌다.
"하악…… 하악!"
웨일즈의 고개가 방금 전까지 자신을 부르던 아이의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돌아갔다.
"뭐가 기사란 말이냐. 뭐가 천재란 말이냐. 사람 목숨 하나 구하지 못하는 놈이거늘."
웨일즈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이제 한낱 괴물인 오크들의 손에 허무하게 죽음을 당할 것이다. 놈들의 방망이가 두개골을 박살 내고, 녹슨 글레이브가 심장을 파고들 것이다.
'너무…… 허무하다.'
촤르르르르륵!
대지를 찢어 버리는 거대한 파공음!
방금 전까지 웨일즈를 압박하던 오크 무리 중 한곳이 그대로 얼어 버렸다.
"뭐, 뭐지?"
제법 거리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한기가 온몸을 덮쳤다. 죽음을 앞두고 느껴지는 한기가 아닌, 체온으로 느껴지는 지독한 한기였다.
콰아앙!
"취익! 뭐냐! 뭐가 어떻게 된 것이냐. 취익!"
"또 다른 인간입니다! 취익! 취익!"
"취익! 뭐, 뭐라? 또 다른 인간? 취익!"
오크 서른 마리가 그대로 얼어 버렸다.
지면이 얼고, 오크 무리 사이로 공포가 전해진다.
파팟!
갑자기 오크들의 눈에 파란 궤적 한 줄기가 스쳐 갔다.
허공에 움직이는 파란 궤적 한 줄기.
그것이 움직일 때마다 오크들의 몸통이 그대로 썰려 나갔다. 그리고 그 궤적을 그리며 움직이는 인간.
"인간이다! 취익! 화살을 쏴라!"
"취익! 쏴라!"
엄청난 수의 화살이 허공을 덮었다.
하지만 그는 검으로 얼굴만 보호할 뿐 신체 다른 부분은 가리지 않고 그저 전진했다.
"무, 무모한!"
웨일즈가 놀란 표정으로 소리쳤지만 기우였을 뿐이다. 그가 입고 있는 라운드 타입의 플레이트 메일이 화살을 모두 튕겨 내고 있었던 것이다.
타타탕!
"인간이 갑옷을 입고 있다! 머리를 노려라! 취익! 모두 공격하라! 어차피 한 명뿐이다! 취익!"
우두머리가 아무리 똑똑하다고 해도 오크일 뿐이다.
놈의 아둔한 눈은 전방 50미터에서 얼어 있는 미노타우로스 두 마리를 보지 못했다. 그것을 봤더라면 결코 인간을 공격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그가 다시 한 번 검을 휘두르자 앞에서 달려오던 오크 열 마리가 공격하던 자세 그대로 얼어 버렸다.
쩌저저적!
뚜둑!
달려가던 오크들이 그 자리에서 멈췄다.
"취익! 인간…… 너무 세다. 취익! 로드! 취익! 어서 후퇴 명령을……."
"취익! 멍청한 놈들! 취익! 놈은 하나다! 그냥 공격해라! 취익! 우리의 승리뿐이다."
아무도 나서는 오크가 없었다.
다른 오크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우두머리가 직접 거대한 몽둥이를 들고 '인간'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취익! 인간! 그대로 살아 나갈 생각은 마라. 취익!"
실력에 자신이 있는지, 오크 우두머리가 그렇게 외쳤다.
우두머리가 나서자 다른 오크들은 자연스럽게 뒤로 물러났다. 우두머리의 실력은 자신들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얼어붙은 미노타우로스 두 마리도 우두머리의 부탁이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 같이 숲을 내려온 것이었다.
우두머리의 실력은 숲에서도 그들의 영역을 위협하는 오우거 한 마리를 때려잡았을 정도로 대단했다.
결코 저 '인간' 따위에게 질 것이라는 일말의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취이익!"
기합 소리와 함께 달려드는 오크 우두머리. 마나를 가진 오크는 아니었지만 그 속도는 상상을 불허할 정도였다.
"빠, 빠르다!"
그 모습을 본 웨일즈의 눈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아무리 좋은 갑옷을 입고 있다고 해도 실력의 차이는 결코 갑옷으로 메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잠시 후 피떡이 될 남자를 상상하면서, 웨일즈는 저도 모르게 눈을 부릅떴다.
그때 그는 남자의 입가에 서린 미소를 보았다.
'어디서 나오는 자신감인가……? 하지만 저 거리에서 맞으면 최소 즉사다!'
"취익! 죽어라! 인간!"
우두머리의 몽둥이가 한순간에 내리쳐졌다.
다음 순간 남자의 몸에서 파란 기운이 솟는 듯한 기분이 들었을 때,
스팟!
남자의 모습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그 움직임을 본 자는 아무도 없었다.
* * *
"휴우."
로이니스는 남몰래 한숨을 푹 내쉬었다.
도저히 이안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자기를 얼마나 속 좁다고 비웃을 것인가.
괜한 질투심이 일었을 뿐이다.
덜컹덜컹!
그런 그녀의 심란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차가 거칠게 흔들렸다.
그때 창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있던 이안이 심각한 어조로 세리아를 불렀다.
"아가씨."
"무슨 일이죠, 이안 경?"
"현재 이 마차가 향하는 곳이 베얀 마을이라 하셨습니까?"
"예, 오늘은 그곳만 돌면 영지 순찰이 끝날 예정이에요."
"알겠습니다."
끼이익!
그 말과 함께 이안이 갑자기 마차 문을 거칠게 열었다. 그와 동시에 마차 위로 훌쩍 뛰어 올라가더니 주변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죄송하지만 마차를 좀 더 빨리 몰아 주시겠습니까?"
마부의 신분은 평민이었다.
귀족은 아니지만 그래도 준귀족인 이안과의 신분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 이안이 부탁하자 마부는 채찍질에 더욱 힘을 가했다.
"이랴! 이랴!"
이안이 서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아까부터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있었다. 내공을 끌어올려 귀에 집중하자 미세하게나마 칼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이안! 너 지금 무슨 짓이야!"
열린 마차 문으로 거센 바람이 불어 들어온 통에 상념이 깨져 버린 로이니스가 화를 냈지만, 이안은 심각한 표정으로 전방을 쳐다볼 뿐이다.
"로이니스! 지금 당장 정령을 이용해서 마차를 보호하도록 하세요."
"너 지금 누구한테 명령……!"
"아가씨도 마법으로 몸을 보호하세요. 아무래도 변고가 있는 모양입니다. 사방팔방에 몬스터들이 포진해 있습니다."
퉁!
마차를 향해서 화살 하나가 쏘아졌다. 그다지 정확도가 좋지 않았기에 이안이 몸을 살짝 비틀자 애꿎은 땅에 처박혔다.
화살을 본 로이니스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실프! 지금 당장 마차를 보호해."
실프는 하급정령이지만 적어도 마나가 실리지 않은 화살을 막아 내는 데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오크들의 활에서 쏘아진 화살 중 수십여 대가 마차로 날아오자, 이안은 처음에는 수월하게 막아 냈으나 점점 수가 많아지자 그것도 힘들어졌다.
"마부 아저씨. 좀 더 빨리 안 됩니까?"
이안이 힘에 겨운 목소리로 물으며 마부를 쳐다보았다.
오크들의 화살을 보고 겁에 질린 마부가 온 힘을 다해 말을 채찍질하기 시작했다.
"저, 저기……."
그때 마부가 손을 들어 올리더니 앞으로 손가락을 내뻗었다.
마차를 막기 위함인지 오크 스무 마리가 가로막고 서 있었다.
"그대로 달리도록 하십시오."
"하, 하지만 말들이 놀랄 겁니다."
"괜찮습니다. 절대 놀라지 않을 겁니다."
마부를 안심시킨 이안은 그대로 내공을 끌어올려 제국검에 실었다.
우우웅!
푸르스름한 검기가 검을 타고 흐르자 이안은 그 검기를 전방으로 쏘아 냈다.
"하압!"
검기를 날리는 것은 익스퍼트 상급자도 가능하지만, 두어 발을 넘게 날리려면 최소 최상급은 되어야 한다.
하나가 아닌 무려 세 줄기의 검기가 이안의 검을 떠나 오크들을 향해 날아갔다.
쿠콰콰콰쾅!
"허, 허억!"
놀란 마부가 눈을 화등잔만 하게 떴다. 살기를 가득 뿜고 있던 오크 스무 마리가 파편이 되어 사라지자 믿을 수 없다는 눈초리였다.
"최고 속력으로 베얀 마을로 가야 합니다. 당장!"
"예, 예. 기사님."
하지만 마음대로 되는 일은 아니었다.
마부뿐만 아니라 말 또한 방금 날아간 검기 때문에 놀라 속력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그렇게 되자 오크들이 쏘아 댄 화살의 표적이 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투투퉁!
로이니스의 실프는 어디까지나 '마차'만 보호하고 있었을 뿐 '말'을 보호하는 것은 아니었다. 기세 좋게 쏘아 낸 화살이 앞서 달리던 말 한 마리의 등을 꿰뚫자 마차는 그대로 전복돼 버렸다.
히히힝!
"으아악!"
마차 안에 있던 로이니스나 세리아는 작은 찰과상을 입은 데 불과했지만, 마부는 마차가 전복되는 순간 앞으로 튕겨 날아가고 말았다. 이안은 황급히 마부의 옷을 끌어당겨 바닥에 내려놓고 다시 한 번 검기를 오크 궁수들을 향해 날렸다.
쿠콰콰쾅!
"취익! 인간 강하다. 취익! 일단 후퇴다. 취익!"
"취익! 취익!"
궁수 수십 마리가 쓸려 나가자 다른 궁수들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무작정 도망가기 시작했다.
"이건 또 무슨 일이야……."
로이니스가 전복된 마차 안에서 투덜거리며 바깥으로 나왔다. 세리아 또한 무사히 마차 밖으로 나왔다.
찰과상을 입었다지만 고생 없이 살아온 귀족 영애가 견디기에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녀들 모두가 질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안이 멀쩡한 말 한 마리를 끌고 와 로이니스 앞으로 가져갔다.
"로이니스, 그리고 아가씨. 정령을 이용한다면 뒤편에 있는 오크 궁수들에게서 도망갈 수는 있을 겁니다. 속히 이 사실을 영지에 알리도록 하세요."
마차를 끌던 말들은 모두 네 마리였지만, 그중 한 마리가 화살에 맞아 마차가 전복되는 바람에 즉사하고 다른 한 마리 또한 커다란 부상을 입어 움직일 수 없었다. 말 한 마리에 마부가 타고, 남은 한 마리를 세리아와 로이니스가 탄다면 이 자리를 벗어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세리아는 고개를 흔들며 로이니스에게 말했다.
"아니, 그건 절대 안 될 말이에요. 제 마법은 전투에서는 매우 유용하다고요. 저도 베얀 마을에 갈 거예요. 차라리 로이니스 아가씨께서 영지로 돌아가세요."
세리아의 서클은 4서클.
마법사가 4서클에 올라서면 그때부터 본격적인 공격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 마법을 캐스팅 할 시간만 있다면 오크 오십 마리 정도는 한순간에 날려 버릴 파괴력을 지니고 있었다.
"아니요. 아가씨는 가실 수 없습니다."
"왜죠?"
"영주님의 여식입니다. 그리고 저는 기사. 수행하는 기사가 결코 로드의 여식을 위험천만한 곳으로 내몰 수는 없는 일. 어서 돌아가십시오."
"하지만……!"
그 순간 이안의 손가락이 더 빨리 움직였다. 마혈을 점혈하자 세리아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5분간은 움직일 수 없으실 겁니다. 그럼 로이니스, 아가씨를 부탁합니다."
"자, 잠깐. 야!"
하지만 이안은 이미 자리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송서초상비를 펼치자 한 걸음에 1장씩 쭉쭉 뻗어 나갔다. 신기한 것은, 초상비 덕분인지 땅에 발자국 하나 남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이안이 떠나자 잠시 멍해 있던 로이니스는 일단 세리아의 마혈이 풀릴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묘한 일이었다. 손가락으로 신체 중 한곳을 강하게 누르니 인간의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마법적인 수법이 가미되지 않는다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실제로 눈앞에서 일어났으나 좀처럼 쉽게 믿어지지 않았다.
'대체 그놈의 정체가 무엇이기에……?'
이윽고 세리아의 마혈이 풀리자, 그들이 왔던 방향 쪽에서 거대한 땅울림이 들려왔다.
"뭐야?"
두두두두!
틀림없는 말발굽 소리다.
땅이 진동할 정도였다. 로이니스가 뒤돌아보자 백 명이 넘는 인원들이 말을 타고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아버지!"
세리아는 선두에 달리고 있는 중년의 남자를 향해 분명히 그렇게 불렀다.
'뭐? 아버지? 그렇다면 프로시안 남작이 직접 이곳까지 왔다는 건가.'
로이니스의 짐작대로 남작이 직접 병마를 이끌고 마을을 구하러 온 것이었다.
"아직 마을에 들어간 것이 아니었더냐?"
"예. 따라가려고 했지만……."
"그런데 너를 수행하는 기사 하나 없이 이곳까지 온 것이냐?"
"아니요. 이안 경이 있었어요."
"호오, 화이트 경이……. 그렇다면 경은 어디 가고 어찌 네가 여기 있는 것이냐."
화이트는 어디까지나 이안의 성이었다. 이안의 이름을 부르는 이는 세리아와 로이니스뿐이었다.
"이안 경은 베얀 마을로 갔어요."
순간 남작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왜, 왜 그러세요?"
"큰일이다. 현재 마을에는 미노타우로스 두 마리와, 오크 수십여 마리가 같이 있을 것이다. 혼자서 공격하기에는 분명 역부족일 터인데……."
"뭐, 뭐라구요?"
미노타우로스가 어떤 몬스터인가.
장안의 숲을 옆에 끼고 있는 영지에서 이십 년을 살아온 세리아 또한 본 것이 손에 꼽을 정도로 보기 드문 몬스터다. 그만큼 개체수가 적었지만, 수가 적다는 것은 그만큼 몬스터의 힘이 강대하다는 뜻이다.
"영주님,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한시라도 빨리 베얀 마을로 가시지요. 마을이 어떻게 됐을지 모릅니다."
"그, 그래, 알았소."
영주 전속 마법사인 칸 또한 따라온 모양이었다.
"너는 영지로 돌아가거라. 욘지 경, 그대가 내 딸을 성까지 보호하도록 하시오."
"명을 받듭니다, 로드!"
욘지가 말을 천천히 몰아 세리아 옆으로 다가갔다.
"가시지요, 아가씨. 아, 그대가 아가씨를 보필하는 자인가? 복장을 보아하니 시녀 같은데, 본 적이 없는 것 같군."
욘지의 시선이 정확히 로이니스를 향했다. 로이니스는 자신을 시녀로 보는 욘지의 말에 발끈했지만, 세리아가 선수를 치고 나왔다.
"아니요. 이분은 정령사예요. 실력이 좋은 분이죠. 인사하세요. 여기 이분이 우리 영지 에이전트 기사단의 부단장 욘지 경이에요."
"반갑소. 내 눈이 좋지 않아 정령사를 시녀로 봤군. 하늘과 같은 아량으로 용서해 주시길 바라오."
"흥!"
로이니스는 욘지의 눈도 쳐다보지 않고 몸을 홱 돌렸다. 욘지는 자신의 사과를 받지 않는 로이니스를 보고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흠…… 아가씨, 그럼 가시지요. 성까지 안전히 수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예, 알았어요."
움직이는 인원이 수십이 넘으니 오크들의 눈에 띄는 것은 당연했다. 열 명 정도의 자치대원들이 활을 쏘아 오크들을 견제하기는 했지만 그들을 쫓는 숫자는 수십이었다.
오크들의 체력은 인간에 비하면 배는 높다.
마을 사람들 중에는 어린아이와 노인이 섞여 있었기에, 점차 속도가 떨어져서 오크들과의 격차가 점점 줄어들었다.
"이 속도라면 곧 있으면 따라잡힐 겁니다!"
"할 수 없다. 마을 사람들을 먼저 보내고 우린 저놈들의 눈을 따돌린다. 다섯 명은 날 따르고 네 명은 마을 사람들을 안전하게 인도한다."
"예!"
그렇게 결정을 내리자 여섯 명의 자치대원들이 오크들의 눈을 돌리기 위해 화살을 쏘며 다른 방향으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취익! 인간 녀석들이 겁이 없다. 저놈들을 잡자! 취익!"
따라오던 오크 전원이 자치대원 여섯 명을 쫓아가기 시작했다. 그때 마을 사람들 중 나이를 지긋이 먹은 여인 하나가 주변을 훑기 시작했다.
"왜 그러십니까?"
자치대원 하나가 묻자 그녀가 갑자기 그를 물고 늘어졌다.
"아이고! 내 딸이 마을에 있는가 봅니다. 제발, 제발 저희 딸을 살려 주십시오."
"마을에 말입니까?"
"예. 아이고, 내 딸! 사라∼!"
울고불고 난리가 나자 그가 옆에 있던 또 다른 대원을 쏘아보았다.
"이봐! 아까까지만 해도 마을 사람을 모두 구출했다고 하지 않았나?"
"바, 발견하지 못했나 봅니다. 하지만 지금 다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뭐, 뭐라구요? 아이고! 사라야."
여인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늘그막에 얻은 딸이라 더욱 소중한 아이였다. 이번 몬스터들의 습격으로 남편을 잃었으니 딸까지 잃는다면 도저히 살아갈 희망조차 없었다.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는 그녀를 안타깝게 쳐다보던 마을 사람들이 자치대원의 인도에 따라 서둘러 움직이기 시작했다.
"왜 그러는가?"
자치대원 하나가 놀란 토끼처럼 눈을 크게 뜬 대원을 보고 묻자, 그가 몸을 벌벌 떨기 시작했다.
대원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오크 수십 마리가 다시 따라붙고 있었다.
"아무래도 시끄러운 소리가 나자 주의가 쏠렸나 봅니다."
"제길, 아둔한 놈들이라고 생각했건만, 청각이 예민하다는 것을 생각 못했군."
자치대원 여섯 명이 오크들을 유인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쫓아오는 오크들의 숫자를 반으로 줄인 것뿐이었다. 나머지 반은 계속 마을 사람들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좋아! 어쩔 수 없다. 계속 견제하면서 나아간다. 곧 있으면 다른 마을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예!"
자치대원들이 다시 활을 들어 오크들을 견제해 나갔다.
자치대원 하나가 화살통에서 화살을 꺼내려고 했지만 허공만 잡힐 뿐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이런, 화살이 다 떨어졌다."
"마을 사람들도 전부 지쳤습니다. 더 이상 움직이는 것은 무리입니다!"
"오크 놈들이 코앞까지 다가왔단 말이다! 무조건 움직이는 수밖엔 없어!"
"큰일입니다. 사방에서 오크들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자치대원 네 명 중에서도 제일 나이가 많은 남자가 입술을 깨물더니 활을 버리고 검을 뽑아 들었다.
"어쩔 수 없다. 모두 활을 던지고 검을 뽑아라. 어찌 되었든 마을이 있는 방향을 뚫고 나간다."
도망가던 마을 사람들도 심상치 않음을 느낀 탓인지 각자 농기구를 하나씩 손에 쥐고 긴장한 표정으로 앞으로 걸어 나갔다.
샤샥―!
이윽고, 그들의 앞으로 열 마리가 넘는 오크들이 나타났다. 겁에 질린 아이들은 부모의 품속으로 숨고, 그나마 힘 좀 쓰는 남자들이 자치대원들의 옆에 붙었다.
"취익! 인간들을 공격해라. 취익! 노예로 데려갈 필요가 있으니 몸은 성히 냅 둬라. 취익!"
일부 오크들은 인간을 노예로 두기도 한다.
오크 중에서도 하프 오크는 머리가 좋았다.
인간과 오크의 결합으로 태어나며, 때때로 인간의 머리를 가진 하프 오크가 태어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하프 오크는 지도자는 못 되지만, 지도자에게 조언하는 주술사나 부관과 같은 존재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노예가 된 인간들의 대부분은 쓸모가 없어지면 오크들의 식량이 된다.
"이놈들! 내가 죽기 전에는 내 자식은 절대 건드릴 수 없을 것이다."
자치대원의 외침에 힘을 얻은 몇몇 장정들이 오크들을 향해 돌격했다.
"취익! 인간들이 반항한다. 화살을 쏴라! 반항하는 놈은 죽여도 좋다. 취익!"
투투투퉁!
스무 대가 넘는 화살이 시위를 떠나 곧바로 장정들에게 날아갔다. 그 화살에 자치대원 둘이 쓰러지고, 장정 여럿이 다쳤다.
"다시 쏴라! 취익!"
"꺄아아악!"
"빌어먹을 오크 놈들!"
투투투퉁!
또다시 스무 대가 넘는 화살이 이번에는 마을 사람들을 향해 날아갔다.
콰자자작!
하지만 이번에 쏜 화살은 오크들의 의도대로 마을 사람들을 죽이지 못했다.
신기하게도 화살이 전부 얼음 덩어리가 되어 땅으로 떨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뭐, 뭐냐! 취익! 어떤 놈이냐!"
"취익! 취익!"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느낄 수 있는 지독한 한기!
저벅저벅!
오크들은 분명 자신 쪽으로 천천히 다가오는 사내에게서 이 지독한 '한기'가 흘러나온다는 것을 알았다. 그저 한기가 닿았을 뿐이지만 추위를 제법 견딘다는 오크들이 모두 사시나무 떨듯 떨기 시작했다.
빠드득!
그는 오크와 5미터 거리를 앞둔 채 이를 갈았다.
사내의 표정이 점차 굳어지는 것을 확인한 오크들이, 그가 겁에 질렸다고 판단했는지 곧바로 몽둥이를 들고 돌격해 왔다.
주위 여덟 방위를 점하고 달려드는 오크 떼.
일순, 사내의 얼굴이 무표정해짐과 동시에 그의 발이 살짝 땅을 굴렀다.
쿵! 쿵! 쿵! 쿵!
사내를 공격해 오던 여덟 오크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을 공격하려 했던 오크들의 몸체가 전부 기우뚱 기울어졌다.
"취익! 뭐냐! 취익! 땅이 무너진다."
"취익! 인간의 짓이다. 취익!"
오크들의 자세가 무너지자 그가 곧바로 달려들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바람 같은 속도로 오크들을 향해 주먹을 날리기 시작했다.
퍽!
"꾸엑! 취익!"
권법에 조예가 깊지 않아 검법만큼의 위력을 내지는 못하지만, 이런 괴물 따위를 상대하는 데는 이것만으로 충분했다.
주먹질 한 방에 나가떨어지는 오크들을 본 마을 사람들의 손에 자연스레 무기가 쥐어졌다.
"우와아아!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우리도 싸우자!"
그간 당한 것에 한이 맺혔는지, 장정들은 오크들이 쓰던 몽둥이를 그대로 주워 들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탁타타탁!
오크 대 인간의 혈전이 벌어졌다. 오크의 사기는 막 불꽃같이 타오르는 인간들의 투쟁심을 넘어서지 못했다.
처음에는 장정들이 밀렸으나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그들도 오크들과 비슷한 수준으로 싸울 수 있었다.
"취익!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 취익! 강한 인간 놈이 있다. 취익!"
"빨리 대장에게 알려야 한다! 취이익!"
하지만 오크들은 마을 사람들의 공격에 발이 묶인 탓에 도망가기도 벅찰 정도로 수세에 몰려, 우두머리에게 지금의 상황을 알릴 수 없었다.
오크들 수십 마리와 혈전을 벌여 이긴 마을 사람들은 환호성이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곧 입을 틀어막았다. 이곳에서 소리를 질렀다가는 또다시 오크들이 공격해 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살아남은 자치대원 야쿰이 직접 사내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감사합니다. 실례지만 존함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갑옷을 보니 프로시안 영지의 기사 분 같은데……."
"이안입니다."
자신을 '이안'이라고 소개한 사내가 또 다른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쪽엔 무엇이 있습니까?"
"아, 예에. 베얀 마을입니다만…… 가 보시려면 최소한 다른 기사 분이랑 같이 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왜죠?"
"그거야 몬스터들이 마을을 공격해서 살아남은 사람이 한 명도 없을……."
야쿰이 그렇게 단정 지으려는 순간, 방금 전까지 딸을 살려 달라고 애원하던 여인이 사람들을 헤치고 나타났다.
"아이고, 기사님! 제 딸이 마을에 갇혀 있습니다. 그것이 아무것도 모르고 분명히 다락방에 갇혀 있을 텐데, 이대로 두면 굶어 죽을지도 모릅니다요. 아이고오! 제발 살려 주십시오, 기사님!"
여인이 울음을 터뜨리며 이안의 다리를 붙잡고 늘어지자 야쿰이 나타나 제지했다.
"어허! 기사 나리께선 그렇게 한가한 분이 아닐세. 미안한 얘기지만 그만 포기하게. 이쯤 됐으면 이미 산 아이가 아닐 걸세."
"아이고! 이 미천한 것의 평생소원이옵니다."
"아니, 이 사람이 그래도!"
이안은 검을 집어넣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베얀 마을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기사님! 대체 어딜 가시는 겁니까? 그쪽은 베얀 마을입니다. 혼자서는 절대 무리입니다!"
야쿰은 단순히 이안의 안전만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또다시 오크들에게 공격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이안을 붙잡게 했던 것이다.
이안이 고개를 뒤로 돌리더니 자리에 누워 통곡을 하고 있는 여인을 향해 물었다.
"아이 이름이 무엇입니까?"
"예? 사, 사라입니다!"
"……."
이안은 그대로 송서초상비를 펼쳐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십이경맥도 웬만큼 회복되고, 내공 또한 예전만큼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자 움직이는 속도는 가히 범인의 눈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이쪽인가?'
이안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주변을 훑는 이안의 시야에 발견된 오크들이 일제히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안이 검으로 가볍게 찔러 들어오자 오크들이 모두 몽둥이를 들어 올렸다.
스륵―!
"케엑!"
"취이익!"
하지만 모두 허사.
그의 검날에 전방에 있던 오크들이 죄다 피투성이가 됐다.
이안의 날카로운 검세에 오크들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몇몇이 주도하여 진형을 바꾸었다.
"놈들도 제법 머리가 있는걸? 궁수를 뒤로 배치하고 그 앞에 투사들을 배치한다라……. 분명 평범한 병사들한테는 최고의 효과를 낼 수 있을 테지."
베얀 마을 근처에서 수십 마리의 오크들이 일제히 이안에게 활시위를 겨눴다.
그들의 앞을 지키는 것은 평범한 오크들이 아닌, 어릴 적부터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아 온 투사들이었다.
이안이 다시 검을 들어 올리더니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그들 사이를 걸어 들어갔다.
"멍청한 괴물들. 상대가 왜 혼자서 덤벼들 수 있는지는 생각 못하나 보지?"
순간 이안의 한음지기가 꿈틀거리며 움직이더니 전신으로 뻗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간 십이경맥의 손상으로 대부분의 무공을 상실한 이안은 청풍검법을 체화(體化)하는 것이 가능해질 정도로 성취도를 높였다.
"날 가로막지 마라."
이안이 몬스터들에게 살기를 쏘아 보냈다.
중원에서만 살아온 그는 몬스터라는 존재를 일개 미물로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오크들이 이안의 살기에 일제히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자신들 수백이 달려들어도 절대 이길 수 없다. 주변에 가까이 가는 것조차도 허용되지 않는다. 그것을 증거로 '인간'의 주변에 있는 모든 생물이 얼어붙었다.
그나마 오크는 분위기를 파악하며 행동하는 '이성'을 지녔지만 다른 것들은 아닌 모양이었다.
이안이 베얀 마을에 들어서자, 그간 건물을 부수고 가축을 모두 집어삼킨 미노타우로스 두 마리가 새로 나타난 생물체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당연히 놈들은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똑같은 자세로 이안에게 돌진해 오기 시작했다.
쿵쿵쿵쿵!
4미터에 육박하는 미노타우로스가 달려들면 그 누구라도 움츠러들기 마련이건만 이안의 표정에는 여유로움뿐이었다.
'온몸이 근육덩어리인가? 생각보다 둔하다.'
스륵!
이안의 검에서 표출된 검기가, 달려오던 미노타우로스들의 하체를 노렸다. 본능적으로 그것이 '위험'이란 것을 알아차렸는지 그들 또한 그 자세에서 점프를 하는 신기를 보였다.
하지만 놈들은 치명적인 실수를 범했다.
아무리 힘이 강하다 해도, 새가 아닌 이상 공중에서는 방향을 틀 수 없다.
이안이 다시 검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살짝 내리긋자 검기가 날아갔다.
서겅!
미노타우로스들의 오른 다리와 왼 다리를 앗아간 검기는 그 힘을 잃지 않고 뒤에까지 날아가 바위를 박살 낸 후에야 사라졌다.
"우워어어?"
"우워어!"
미노타우로스들의 포효가 주위를 쩌렁쩌렁 울렸다. 날아오던 자세 그대로 쓰러진 놈들의 포효에 오크는 물론 근처에 있던 산새들도 하늘 높이 올라갔다.
아무리 다리를 잃어버린 놈들이라 해도 먹이사슬의 최상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미노타우로스들을 무심히 바라본 이안이 고개를 높이 들어 올리더니 미약한 두 줄기 음성을 잡아냈다.
"하나는 남자, 하나는 여자아이다. 남자의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지는 것을 보니 위험하다. 저 건물의 뒤인가?"
미노타우로스들이 건물을 모조리 박살 내 놨기에 여기서는 남자와 여자아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안은 아무리 다리를 잃어버렸다 해도 그 존재 자체로도 위험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생각하고 그대로 풍천진의를 일으켜 녀석들을 얼려 버렸다.
그러고는 일단 목숨이 위험한 남자에게 먼저 발길을 옮겼다.
* * *
콰지지직!
이안의 검이 남자를 구하기 위해 또다시 한음지기를 내뿜은 순간, 좌중은 분위기에 압도당해 버렸다.
서른 마리의 오크가 얼었고, 그 여파로 근처의 땅이 겨울눈에 뒤덮여 굳은 것보다도 훨씬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후우! 후우!"
이안이 숨을 몰아쉬며 검을 쥔 손아귀에 더욱 힘을 주었다. 오크들의 숫자가 만만치 않았다. 이곳까지 경공을 펼쳐 오고 한음지기를 남발하는 바람에 남아 있는 내공이 많지 않았다.
한음지기를 거의 다 소모했기 때문에 이젠 순수한 내공으로 전투를 지속해야 함을 알았다. 그리고 그 순간 이안이 움직이려 하자 먼저 오크들의 화살이 빗발치듯 날아오기 시작했다.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내공 소모를 줄여야 한다. 오크들의 무기 다루는 수준은 인간에 비하면 지극히 낮다. 하물며 드워프가 만든 갑옷이니 한번 믿어 보자!'
노출된 부위를 최대한 검으로 막고 갑옷으로 몸을 보호하자 과연 생각대로 화살이 갑옷에 흠집조차 주지 못하고 떨어졌다.
게다가 라운드 타입의 갑옷이었기 때문에 충격 완화 작용을 해 주어 정작 이안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우두머리의 돌격 명령에 오크 열 마리가 달려들자, 이안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다시 한음지기를 뿜어냈다.
'아차! 실수했군. 한음지기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졌기 때문일까? 어찌 되었든 이제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크 열 마리가 이안의 한음지기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이안은 한음지기를 봉인하기로 하고 순수한 내력으로 상대하기 위해 그들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저벅저벅!
이안이 한 발자국씩 내디딜 때마다 오크들은 찔끔해서는 뒷걸음질 치며 점점 이안과 거리를 벌렸다.
"취익! 인간…… 너무 세다. 취익! 로드! 취익! 어서 후퇴 명령을……."
하프 오크들은 진땀을 빼며 자신들의 로드를 설득했다. 자신들이 생각하기에도 주술사들이 없는 이상 목숨을 걸고 싸울 오크들은 없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말에는 은연중 로드가 대신 나가 싸워 줬으면 하는 바람도 섞여 있었다.
"취익! 멍청한 놈들! 취익! 놈은 하나다! 그냥 공격해라! 취익! 우리의 승리뿐이다."
"……."
그래도 나서는 오크가 없자 우두머리가 이빨을 빠득 갈았다.
할 수 없이 다른 오크들의 소리를 뿌리치고 그대로 우두머리가 거대한 몽둥이를 들고 '인간'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취익! 인간! 그대로 살아갈 생각은 마라. 취익!"
머리 좋은 하프 오크들은 쾌재를 불렀다. 지금껏 저 인간이 동족들을 상대하느라고 상당히 많은 마나를 소모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생각대로 이안은 수많은 오크를 상대하느라 꼬박 몇 시진은 운기행공을 해야만 채울 수 있을 한음지기를 잃었다. 하지만 그에게 내공이 한음지기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단전에 잠들어 있는 내력 또한 상당한 양이었다.
"취이이익!"
오크 로드가 뒤뚱뒤뚱 걸어오는 것이 우스웠지만 그 돌격 속도를 보면 웃는 이들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질 것이었다.
오크들은 태어날 때부터 강한 힘과 순발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게다가 가끔씩 보통 오크를 뛰어넘는 덩치를 지닌 오크들이 태어나는데 그들이 바로 로드로 결정지어진다.
수많은 오크들 사이에서 치고받으며 생사를 여러 번이나 넘긴 오크 로드에게 패배란 있을 수 없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오크 로드의 힘은 미노타우로스들이 한 수 접어 줄 정도였고, 스피드는 오우거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평범한 사람의 관점에서 본 것이었다.
이안의 눈에는 오크 로드의 속도가 절대 빨라 보이지 않았다. 이안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
"취익! 죽어라, 인간!"
후웅!
오크 로드가 정확히 이안의 머리를 향해 무기를 휘둘렀다.
근육이 폭발할 듯 불뚝거렸다.
멀리 포진해 있던 오크들은 몽둥이가 내는 바람 소리에 놀라는 한편, 잠시 후 자신들을 괴롭히던 인간의 최후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저절로 웃음 지었다.
그 순간, 이안의 몸에서 미세한 내공의 움직임이 일었다.
이안이 가볍게 발을 놀리자 놀랍게도 오크들의 중앙에 그의 모습이 나타났다.
"취익! 뭐냐? 누, 눈앞에서 사라졌다."
"취익! 인간, 마법사인가? 취익!"
오크들이 당황하기 시작하자 오크 로드는 그들을 진정시키는 한편, 놀란 가슴을 감추기 위해 심호흡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안은 오크 로드에게 심호흡할 정도의 여유를 줄 생각이 없었다. 이안이 남자를 들쳐 멘 채 그대로 포위망을 뚫으며 앞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취익! 잡아라! 인간이 도망친다."
이안이 경공을 이용해 발을 놀리자 그 속도는 오크들이 쫓아올 수준이 아니었다.
"뒤, 뒤에 화살!"
기절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정신은 붙어 있나 보다. 이안의 등에 업힌 남자가 간신히 붙어 있는 숨소리로 말했다.
"칫!"
이안이 그대로 제국검을 들어 위에서 아래로 내리그었다.
혼자였다면 화살은 무시하고 도주했을 테지만, 들쳐 업은 남자가 화살에 맞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남자가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이안에게 소곤거렸다.
"이, 이 근처에 여자아이가 있소."
이안은 남자를 다시 보게 되었다. 그가 여태껏 오크들을 막은 것은 마을 사람들을 위해서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이 남자는 제법 실력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도망간 후에라도 얼마든지 오크들을 농락하며 도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여자아이를 위해서 목숨을 걸었군.'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 소녀가 방금 전 이안에게 매달린 여인의 딸이라는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사라라고 했던가?"
"……뭐가 말이오?"
"아까 여자아이의 어머니를 보았습니다. 이름이 사라라고 하더군요."
"사라…… 사라……."
남자는 그 이름을 머릿속에 되새기며 잊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잠시 후 그가 다시 이안에게 말을 걸었다.
"……아, 아이가 정확히 어디에 갇혀 있는지 알겠소?"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정도는요. 아까보다 숨소리가 잦아든 것을 보니 잠들었나 봅니다."
"……고맙소."
"뭐가 말이지요?"
"내 목숨 살려 준 것. 언젠가 갚을 길이 있을 것이오."
"별말씀을."
이안은 앞을 가로막는 오크들을 모두 베어 내며, 여자아이가 묻혀 있는 곳에 조심스레 다가갔다. 여기에 작은 힘이라도 가해진다면 무너진 건물이 또 무너져 아이가 절대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었다.
'어떡하지? ……응?'
그렇게 머릿속을 굴리는 이안의 귀에 갑자기 말발굽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영지군(領地軍)이다!'
이안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번졌다. 남자 또한 말발굽 소리를 들었는지 눈을 화등잔만 하게 뜨고는 물었다.
"……영지군이오?"
"그렇습니다."
"다행이로군. 아이를 어떻게 구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오크들도 이쯤 되면 소리를 들었을 겁니다. 그럼 전 놈들이 도망가지 못하게 막아야겠습니다."
이안의 말대로, 청각이 인간보다 월등한 오크들은 말발굽 소리를 듣고 크게 혼란스러워했다. 이안은 자신의 제국검에 내력을 충만하게 집어넣고는 오크들의 퇴로를 차단해 갔다.
만약 다른 이들이 보지 않았다면 오크들을 몰살시켰겠지만 여기까지 고생해서 출병한 영지군을 그냥 돌려보낼 순 없지 않겠는가.
그들이 만약 이안이 구해 준 남자에게서 상황을 듣는다면 자연히 이안이 홀로 오크 무리와 미노타우로스를 없앴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혼자서 그 많은 오크 무리와 두 마리의 미노타우로스를 제압했다는 사실만 해도 기절초풍할 일인데, 그보다 더 놀랄 상황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
영지군은 힘겹게 베얀 마을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동안의 혹독한 훈련이 아니었으면 진작에 오크 무리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전쟁터가 따로 없군."
여기저기 나뒹구는 오크의 시체와 사람의 주검이 한데 뒤엉켜 시산혈해(屍山血海)를 이루고 있었다. 영지군은 시체에서 풍기는 고약한 냄새 때문에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기마병은 이 주위를 뒤져서 남은 몬스터를 제거한다. 그로퍼 경이 맡아 주시오."
"맡겨 주십시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기마병 백 기와 기사 다섯 명이 출발하자 프로시안 남작은 천천히 말을 몰면서 마을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남작님! 저기 좀 보십시오. 미노타우로스입니다."
기사 하나가 외치는 소리에 프로시안 남작이 고개를 돌렸다.
"……저, 저게 무엇인가? 정녕 미노타우로스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요."
미노타우로스들은 아직도 얼어붙어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칸이 주위로 가서 살펴보자 동사를 한 것이라 판명했다.
"미노타우로스를 얼려 버릴 실력이라…… 무섭군. 칸, 자네도 미노타우로스를 이렇게 얼릴 수 있나?"
"무리입니다. 이 정도가 되려면 적어도 5서클은 돼야 할 겁니다. 하나…… 이것은 마법이 아닙니다."
"으음? 마법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순수한 마나입니다. 너무도 깨끗해서 저도 뭐라 말씀드릴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미노타우로스가 동사한 모습을 본 기사들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자신들이 알고 있는 '그 사람'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해서였다. 그때 기사들 중 하나가 살짝 입을 열었다.
"남작님, 아마 부단장님이 아닐까 합니다."
"부단장? 욘지 경 말인가?"
기사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이안 부단장님은 펠타온 제국에서 건너온 사람. 그 검술이 아니라면 저렇게 미노타우로스의 다리를 정교하게 자를 수 없을 것입니다. 게다가 이안 경은 특이하게도 속성검으로 아이스를 사용합니다."
남작이 기사의 말을 듣더니 곧바로 칸의 얼굴을 쳐다봤다.
칸이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이자 남작은 무언가 이상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이 어렸을 때만 해도 기사의 나라라는 펠타온 제국에 대해 많이 들어도 보았고, 여행을 떠난 적도 있었다.
얼음으로 속성검을 사용하는 가문은 본 적 있지만 손에 꼽을 정도였다. 게다가 미노타우로스를 얼릴 만한 파괴력을 지닌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남작은 살며시 미소 지었다.
'이안 경, 당신은 참으로 이상한 사람이오. 내 병을 치료해 줄 때도 그렇고, 갑자기 나타나서 이런 해괴한 짓을 벌여 놓다니…….'
그로퍼는 최근에 얻은 성취로 어렵지 않게 오크들을 학살해 나갔다. 그러면서도 은연중 살짝 입가에 미소를 짓는 것을 잊지 않았다.
방금 전 기마병 백 기와 오크 무리가 정면충돌할 때만 해도 살짝 걱정은 되었으나, 그 걱정과는 달리 병사와 기사들이 한순간에 오크들을 쓸어버리는 장면은 장관임이 틀림없었다.
그러고 보니 지난 열흘 동안, 병사들의 마나 보유고에 마나가 조금씩 쌓이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이 마나 호흡법 때문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덕분에 병사들의 사기는 올라갔고, 실력은 일취월장하여 토벌의 날만 손꼽아 기다리는 형국이 되었다.
그리고 기사단 내부에 조금씩 변화가 생겼다.
그로퍼는 사실 단장이라는 직위에 맞지 않을 정도로 실력이 낮은 편이었다. 실력은 오히려 욘지가 나았지만, 높은 연배이기에 단장이 되었다는 것을 영지에서 모르는 이가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마나 호흡법이란 것을 알게 되고부터 마나가 늘어나고, 이젠 완벽한 익스퍼트 상급의 경지에 올랐다. 그 덕분인지 몰라도 이젠 어느 정도 마음을 추스를 수 있는 평온함을 가지게 되었다.
그로퍼는 마나 호흡법을 가르쳐 준 이안을 떠올렸다.
처음에는 낙하산이 아니냐며 기사단에서도 말이 많았지만 이제는 그 누구도 그를 욕하는 이가 없었다. 젊은 나이에 욘지를 단숨에 제압하고, 기사들 여럿이 달려들어도 상대조차 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기사들은 할 말을 잃었고 오히려 호감을 갖기 시작한 듯했다.
기사들은 강력한 기사를 열망하고, 또 강력한 기사가 되기를 바란다. 이안은 그들에게 매우 강한 부단장이었다.
그렇게 되니 그 실력을 인정하고, 자신들의 부단장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슈욱! 슈욱!
그로퍼의 검날에 오크 여럿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풀썩 쓰러졌다.
그의 눈에 허겁지겁 도망치는 오크 로드가 보였다.
"기사들은 나를 따르라! 기마병은 어서 주위를 수습하고 이안 경을 찾아라!"
"예!"
베얀 마을 주위에 있는 오크 잔당들은 기마병과 기사들의 검에 의해 싸늘한 시체가 되었다. 지친 탓도 있었고, 완전히 기세에 눌려 도주한 오크 로드 때문에 피해가 더 극심했던 것이다.
그에 비하면 영지군은 기사를 제외한 기마병들이 중상을 입긴 했으나 모두들 몇 달만 쉬면 나을 수 있는 정도였다.
오크들의 피해에 비하면 경미한 수준인 것이다.
"……이자는 누구입니까?"
"끝까지 베얀 마을을 지키던 기사입니다. 본인 말로는 자유기사라는데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해서……."
"기사 분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웨일즈라고 하더군요."
"흐음……."
기마병은 알겠다는 듯 웨일즈를 자신의 안장에 올려놓고 재빨리 영주성으로 달려갔다. 웨일즈의 부상 정도가 상당했기에, 지금은 비록 기절했지만 언제 목숨을 잃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이제 모두 말에서 내려 주시겠습니까?"
"무엇 때문에……?"
"해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예?"
기마병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기사가 지시하는 일이니만큼 당연히 말에서 내려야 했다. 게다가 여기서 밉보이면 훈련을 받을 때 또 어떤 고생을 하게 될지도 몰랐다.
"제 앞에 있는 무너진 건물이 보이십니까?"
"예, 보입니다."
"그럼 여기 쌓인 돌 무더기를 치워 주십시오. 아주 조심히 말입니다."
갑자기 기마병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서, 설마 이것도 훈련은 아니겠지요?"
"훈련이 아니라 실전입니다. 이 아래 여자아이가 깔려 있으니 되도록 조심하십시오."
그러면서 이안 역시 조심스레 돌들을 치워 내리기 시작했다.
기마병들도 처음에는 의아해 하다가 여자아이가 깔려 있다는 말에 놀라 천천히 돌을 치워 내기 시작했다.
드르륵―!
그렇게 한 10분이 흘렀을 무렵, 무너진 곳에서 작은 굉음이 들렸다.
'뭐지?'
이안처럼 청각에 예민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들을 수 없을 만큼 작은 소리였다. 이안이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하고 다시 돌을 치우기 시작하자, 잠시 후 방금 전보다는 조금 더 큰 소리가 울렸다.
쿠구궁―!
이번 것은 병사들도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어라? 뭐야. 방금 무슨 소리 못 들었어?"
"그러게. 잘못 들었나?"
이안은 갑자기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다를까.
돌을 거의 치워 가는 무렵, 오크 로드를 죽이러 갔던 그로퍼가 득의양양한 모습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의 왼손에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오크들을 지휘하고 마을을 약탈했던 오크 로드의 수급이 쥐어져 있었다.
한 마리라면 상관이 없지만 말 여러 마리가 한순간에 달리자 땅이 울리는 바람에, 붕괴되어 있던 건물이 조금씩 흔들리면서 또다시 붕괴될 위험에 처했다.
이렇게 되면 안에 있는 소녀가 그대로 깔려 죽을 수도 있었다.
이안이 밖에서 큰 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 말을 멈추라고 하세요! 당장!"
"예예!"
말들이 가까워 올수록 건물은 조금씩 더 흔들렸다. 말을 멈추기 위해 기마병들도 뜀박질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라면 분명 무너진다. 방법이 없을까?'
"사, 살려 주세요."
그때, 잠들어 있던 사라가 깨어났는지 바깥으로 손가락을 내밀었다. 기마병들도 그 소리를 들었는지 더욱 안타까운 얼굴로 무너진 건물 쪽을 쳐다보았다.
2차 붕괴가 일어난다면 분명히 죽을 것이었다.
"기사님, 이제 다른 지시를……."
이안이 주변을 둘러보더니 이내 한쪽에 놓여 있던 삽을 들고 왔다. 그러고는 제법 나이가 들어 보이는 병사들을 향해 말했다.
"당신들 딸이 있지요? 그럼 따님한테 했던 것처럼 달래 주세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삽을 가져와요. 삽이 없으면 손으로라도 좋으니 지금 당장 여기를 파세요."
"거긴 왜……?"
"방법은 이것뿐입니다. 아래에서 파고 올라가 구하는 수밖에 없어요."
지금 당장이라도 청풍검법을 이용해 땅을 날려 버리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2차 붕괴가 일어날 수도 있었다. 결국 살리려다가 무덤을 만들어 주는 격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병사들이 다 달려든다 하더라도 시간 안에 구하기는 애초에 불가능해 보였다.
'방법이 없을까, 방법이……?! 어떻게 해야 하지? 생각해라, 생각! 청령, 네가 그동안 읽은 책들은 다 어디다 써먹으려는 것이냐!'
이안은 스스로를 책망했지만 이런 상황에 걸맞은 해결책이란 쉽게 나오기 힘들었다.
그때 마을을 둘러보던 프로시안 남작과 칸이 기사 몇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이안 경, 지금 무엇을 하는 건가?"
영주가 나타났지만 병사들은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촌각을 다투는 일이라 이안도 땅을 파는 손을 멈추지 않고 고개만 돌려 남작과 시선을 맞췄다.
"아이가 건물 잔해에 묻혀 있습니다. 하지만 아까 말들 때문에 간신히 버티던 건물이 2차 붕괴의 위험에 처했습니다. 오래지 않아 곧 무너질 것이라……."
"그런 것이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칸이 앞으로 나서며 제법 파인 구덩이로 들어와 캐스팅을 시작했다.
"잠깐만요! 여기서 마법을 썼다가는 오히려 그 충격에 건물이 무너질 겁니다."
이안이 말렸지만 칸은 괜찮다는 듯 손을 들어 보였다.
"걱정 말게. 공격마법이 다 사람을 죽이는 데만 쓰이는 건 아니니까……. 땅의 여신이시여, 제 앞길을 가로막는 땅을 길로 열어 주소서. 디그(Dig)!"
놀랍게도 구십 명이 넘는 병사들이 달려들어서 판 것보다, 순식간에 더욱 깊은 구덩이가 파였다. 디그는 하급마법이라 칸도 별 무리 없이 충분히 시전할 수 있었다.
칸이 몇 번 더 시전하고 나서야 안에 있던 사라를 구할 수 있었다.
사라는 곧장 어머니에게 돌아갔고, 그날 이후 베얀 마을은 폐쇄되어 목책이 세워졌다. 그리고 목책 주위에는 몇 명의 병사들이 경비를 서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