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1장 변화, 그리고 3대 제국검(帝國劍) □
덜컹! 덜컹!
프로시안 영지를 달리는 작은 마차 안에 선남선녀들이 타고 있었다. 보고만 있어도 눈이 번쩍 뜨일 미녀 둘과 준수한 얼굴을 한 남자였다.
"아얏! 도대체 그 트라바체스 대장간이라는 것은 어디에 처박혀 있는 거야. 이런 싸구려 마차가 얼마나 엉덩이가 아픈 줄 알아?!"
담담한 표정으로 창밖을 쳐다보고 있는 남자와 단아한 복장의 여인과는 달리, 조금은 어려 보이는 여인 로이니스가 짜증을 부렸다. 남자가 그녀를 보더니 마치 어린애 다루듯 살살 달래기 시작했다.
"걸어서도 가 봤으니 곧 도착할 겁니다. 출발할 때는 트라바체스 대장간이 좋다고 하시더니 이젠 또 왜 그럽니까?"
남자, 즉 이안이 되묻자 로이니스가 얼굴을 홍당무처럼 붉히더니 세리아를 보고 말했다.
"흥! 트라바체스 대장간이라고 하면 귀족들 사이에서는 알아주는 명품만 생산하는 곳이니까. 대부분의 귀족들이 그곳의 무기나 갑옷을 선물로 받거든. 내 것도 그렇고."
그러면서 그녀가 허리춤에 차고 있던 단검을 이안에게 건넸다.
과연 드워프가 만들었다는 단검은 여타의 단검과는 달리 심상치 않은 예기를 뿌리고 있었다. 이안이 살짝 손을 대 보자 손가락에 금방 핏물이 고였다.
'과연…… 명검이다. 철을 다루는 능력은 중원보다도 더욱 뛰어나.'
이안은 핏물을 소매로 스윽 닦고는 다시 검을 건넸다. 저 검을 보니 문득 자신이 주문한 검이 생각났다. 드워프의 제자들이 만들었으니 기대가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검을 받아 든 로이니스가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턱을 괴고 창밖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어머? 로이니스 님. 그 고운 얼굴 찌푸릴 것 없잖아요. 앞을 보세요. 이제 다 도착했는걸요."
세리아의 말에 로이니스가 곧바로 고개를 돌려 트라바체스 대장간의 간판을 보고 남들보다 빠르게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정령술을 다루는 정령력을 갖고 있는 로이니스였기에 쉽게 균형을 잡을 수 있었다.
그 뒤를 이어 이안이 먼저 내려 레이디를 에스코트하듯 세리아의 손을 잡았다. 그 상황을 가만히 보고 있던 로이니스가 심술 맞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탕탕탕!
분주해지는 발걸음.
누구 하나 제대로 앉아 있는 자가 없었다. 커다란 대장간 안에서는 쉴 새 없이 쇠를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세리아가 대장간에 오기 전 미리 언질을 주었기에 지난번 이안에게 이것저것 설명을 해 주었던 장한이 미리 나와 일행들을 맞이했다.
"오, 어서 오십시오. 세리아 님, 이안 님. 직접 어려운 발걸음을 이끌고 찾아오셔서 영광입니다. 음, 게다가……."
그 장한은 자신이 모르는 유일한 얼굴인 로이니스를 살짝 곤란하다는 듯한 눈초리로 쳐다봤다.
"아, 이분은……."
이안이 미처 설명하기도 전에 로이니스가 앞으로 나와 선수를 쳤다.
"난 로이니스야. 현재 에이전트 기사단의 전속 용병술사로 고용되었어……. 기억하도록 해."
아무리 용병처럼 연기를 해도 그 거만한 표정과 입매는 한눈에 귀족이란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이안이 그녀의 말을 들으며 이마를 짚고 있는 사이, 뒤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야, 이 빌어먹을 인간 놈아!"
작은 체구. 키는 이안의 반밖에 되지 않는 데다 작은 발로 뒤뚱뒤뚱 걸어오는 드워프였다. 처음 보는 자라면 웃음을 터뜨리는 실례를 범했을지도 모를 정도였다.
드워프의 시선이 향한 곳은 장한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아무리 생각이 없으려니 숙녀에게 '빌어먹을 놈'이라는 욕을 할 리도 없었으니 남은 것은 이안뿐이었다.
이안은 이 드워프를 본 것이 처음은 아니지만 직접 대면한 것은 처음이다. 처음에 봤을 때만 해도 드워프가 작업에 열중한지라 차마 얘기를 나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저…… 말입니까?"
"그래. 너 말이야, 너. 키는 멀대같이 크고 얼굴도 못생긴 인간 놈 말이야."
"풋."
옆에서 세리아와 로이니스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특히 로이니스는 이안이 곤란해 하는 모습을 보고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드워프가 뒤뚱뒤뚱 걸어와서 바로 이안의 앞에 섰다.
"너 이놈……. 네놈은 나를 따라 들어와라. 그리고 영지 아가씨는 처리해야 할 문제가 있으니 내일 다시 왔으면 좋겠군."
영지 아가씨란 세리아를 지칭한 말이었다. 영주의 딸을 내치는 것은 인간이었다면 크게 벌을 받아 마땅하나 이종족인 드워프기 때문에 그런 것은 용서가 되었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먼저 마차에 가 계세요. 곧 갈 테니."
"알겠어요."
세리아가 이안의 말을 듣고 살짝 미소를 지었다.
이안이 드워프의 뒤를 따라 사라지자 로이니스가 입술을 삐쭉 내밀고 툴툴거렸다.
"왜 사람을 오라 가라야. 정말 재수 없는 드워프라니깐."
세리아가 얼굴에서 미소를 지웠다. 계속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던 드워프가 내내 마음에 걸린 것이다.
'괜찮……겠지?'
이안은 드워프의 뒤를 쫓아 한참을 안으로 들어갔다. 작업장을 지나쳐 사람들의 눈과 귀를 피해 도착한 곳은 아주 작은 방이었다. 술을 숙성시키기 위한 창고였는지 주변에 많은 오크통이 보였다.
역시 드워프라는 말이 절로 튀어나올 정도였다.
드워프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술을 좋아한다. 철을 만지고 나무를 깎는 일보다도 더욱 좋아했던 것이다.
"깨끗하진 않지만 대충 앉아라."
이안이 주변을 둘러봤지만 어디 한 군데 앉을 자리는 없었다. 이안은 오크통을 내려놓고 그 위에 올라앉았다.
드워프는 정작 자신은 앉지 않고 이안의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그것도 모자라 이안의 왼 팔뚝을 만져 보더니 이내 그가 입고 있던 상의의 팔뚝 부분을 양쪽으로 찢었다.
부욱!
드워프의 타고난 힘은 인간 성인 남자의 배가 넘을 정도다. 그런 힘으로 찢었으니 약한 천이 그대로 찢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한 피부가 드러났다.
"인간! 네 팔뚝에 있는 문신은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이냐!"
깨끗한 피부가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이 성을 내는 드워프에게, 이안이 오른손으로 팔뚝을 감싸고 뒤로 물러났다.
"왜, 왜 그러십니까?"
드워프가 콧방귀를 뀌었다.
"흥! 정말 모르는가 보군."
당황하는 이안의 표정을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던 드워프가 짧은 다리로 뒤뚱뒤뚱 걸어가더니 한쪽 벽에 걸린 검집을 하나 들고 왔다.
"그 검은 네가 요청한 대로 내 제자 중 하나가 만든 검이다. 마나를 불어넣어 보거라."
스르르릉!
청아한 소리와 함께 검집에서 얼굴이 비칠 정도로 깨끗한 검신을 가진 검이 나왔다. 이안이 드워프의 말대로 내공을 끌어올려서 검에 주입하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쩌저저저적!
마나를 주입하자 검이 중앙부부터 쪼개지기 시작한 것이다.
"왜 이런 겁니까?"
"네가 요청한 검은 절대 이 세상에 있을 수 없는 검이다. 쉽게 부러지지 않으면서 마나를 잘 유통하며, 최대한 가볍게 만들어 달라? 그때는 멍청한 제자 중 하나가 그런 요청을 받아들였을지 몰라도…… 네가 본 것과 같이 검이란 절대 그 세 가지 장점을 타고나기 힘들다. 그럼 묻겠다. 너는 왜 그 아이에게 그런 요청을 한 것이냐. 그것은 바로 네가 전에도 그런 검을 써 봤다는 증거가 아니냐!"
방금 이안이 깨뜨린 검은 묵철이 아닌 그냥 철로 만든 것이었다. 수천 수만 번의 담금질을 했지만 방금 전 본 것처럼 미스릴로 만들었다 해도 마나를 버틸 순 없었다. 그렇다고 묵철로 만든다면 무게는 천지 차이. 고작 작은 검을 만든다고 해도 마치 도끼를 든 것처럼 묵직한 감이 들 것이다.
"……."
이안의 착 가라앉은 눈과, 심각한 빛을 띤 드워프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나조차도 만들기 힘든 그런 검을 사용해 보았다? 인간! 어서 대답해 봐라!"
이안은 열세 살 때까지만 해도 자신만의 검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도사들에게 혼난 사형들이 이안에게 분풀이를 한다고 이안이 애지중지하던 검을 시장에 팔아먹은 것이다.
이안은 바로 그 검과 똑같은 검을 트라바체스 대장간에 주문한 것이다.
"좋다, 인간! 내가 아주 믿기 힘든 사실을 가르쳐 주지. 똑똑히 봐 두거라. 네가 어떤 신체를 지녔는지!"
드워프가 품속에서 작은 돌을 꺼냈다.
그것은 마법 효과를 없애 주는 디스펠의 능력이 깃든 마나석이었다.
크기는 매우 작았지만, 눈에 간신히 보일 정도로 작은 마나석의 가격이 십만 골드를 넘었으니 드워프가 가진 주먹만 한 마나석은 백만 골드를 호가할 것이다.
드워프가 돌을 이안의 왼 팔뚝에 대는 순간 마나석이 그의 몸에 흡수되기 시작했다.
번쩍!
그러자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 일이 일어났다. 눈뜨기도 힘든 강렬한 빛이 쏟아지더니 그의 왼 팔뚝에 창과 방패를 한 손에 하나씩 들고 있는 여신의 형상이 드러난 것이다.
이안은 자신도 모르게 팔뚝을 가렸지만 드워프의 눈은 어느새 이채를 띠고 있었다.
"여신의 축복의 문신이라면 과거 라인하르트 황족들에게만 허락된 권능. 그 제국이 망하고 나서 모든 황족이 몰살을 당했다. 그런데 네놈은……! 네놈은 어떻게 된 일이냐? 없어졌어야 할 여신의 축복을 가졌고, 대륙에서는 보기 힘든 검은 눈과 흑발이라니! 그것은 과거 라인하르트 황족들에게나 가능한 일이었다."
이안도 자신의 팔뚝에 이런 신기한 비밀이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어렴풋이 떠오른 노인장의 기억.
그 기억을 통해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되었지만 그래도 아직은 의심을 품고 있던 이안은 드워프의 말과 자신의 팔뚝에 새겨진 여신의 문양을 보고 확신할 수 있었다.
자신은 라인하르트 대제국의 마지막 후손인 황태자라는 것을!
"인간! 네놈에게 묻겠다. 넌, 넌…… 대체 누구냐?"
* * *
본래 평민이란 귀족들과 상성이 맞지 않는 존재다.
평민은 귀족을 어렵게 대하고, 귀족 또한 평민들을 벌레 보듯 여겼다.
그레이 기사단의 유일한 평민인 웨일즈가 지금껏 몇 달 동안이나 그들과 한솥밥을 먹은 것을 보면 꽤나 오래 견뎠다 할 수 있었다.
커다란 도개교의 문이 내려졌다. 가벼운 행랑 차림을 한 젊은 사내가 헤일론 백작가에서 침을 퉤퉤 뱉고 걸어 나왔다.
"제기랄, 죽이지 않은 것만도 고마워하라니?"
그래도 한솥밥을 먹으며 미운 정이라도 박혔다고 생각한 웨일즈였다. 얼마 전 필립 후작이 뒷돈을 쓸 곳이 많아 헤일론 백작가의 돈을 탕진했다. 그 일로 백작가의 재정이 흔들리자 영지민에게 더욱 많은 세금을 거둬들였다.
그렇지 않아도 하루 벌어 먹고사는, 입에 풀칠이나 간간이 하던 평민들은 그야말로 피눈물을 흘리며 세금을 냈지만, 세금을 내지 못한 자에게 돌아온 것은 다른 영지로의 이주 권유였다.
말이 권유지 쫓아낸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호위하는 병사 하나 없이 다른 영지까지 몬스터들과 산적들의 눈을 피해 도망쳐야 하는 것이다.
그 일로 수천의 평민들이 쫓겨났고, 웨일즈한테는 커다란 누명이 씌워졌다.
웨일즈는 월급을 받지 못한 상태라 상당히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다. 우습게도 다른 기사들은 월급을 받았지만, 그는 평민이라는 이유로 받지 못했다.
명백한 차별이었다.
그 후 풀이 죽어 여느 때처럼 술로 밤을 지새웠다. 그런데 그때 사건이 터지고 만 것이다. 기사들 일부가 부관의 집을 털었다. 하필이면 부관의 집 근처가 바로 웨일즈가 술을 마시던 곳이었다.
다음 날 웨일즈의 방에서 부관이 아끼던 수많은 금은보화가 발견되었고, 그 길로 그는 누명을 뒤집어쓴 채 기사단에서 쫓겨나 자유기사가 되고 말았다.
"에휴∼ 응?"
한숨을 쉬던 웨일즈의 눈이 갑자기 이채를 발했다.
웨일즈의 눈에, 퀭한 눈을 한 채 곡괭이를 무기 삼아 다른 영지로 발걸음을 옮기는 평민들이 보였다. 그들에게는 살아갈 희망도 없었고, 다른 영지까지 안전하게 도망칠 수 있다는 보장도 없었다.
웨일즈의 시선이 평민들을 향해 있다가 그들이 이동하는 방향으로 돌아갔다.
'어라? 저 방향은 프로시안…… 영지인가?'
그곳에서 머물 때만 해도 제법 재미난 일이 있었다.
"어차피 다른 곳으로 이주한다면 한 번 눈에 익혔던 곳이 적응하기가 쉽겠지."
타 영지에 비해 프로시안 영지까지의 거리가 그래도 제일 가까웠다. 웨일즈의 발걸음이 평민들이 이동하는 곳으로 옮겨 갔다.
"프로시안 영지로 가는 행렬이오?"
행렬을 이끌고 있는 다소 왜소해 보이는 중년의 남자가 웨일즈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렇소만……."
"그렇다면 나도 껴 주시오."
책임자가 웨일즈를 상체부터 하체까지 훑어보았다. 그는 겉보기에 제법 건장한 청년이었다.
"검을 들고 다니는 것을 보니 용병이라고 봐야겠군. 그렇다면 실력은 어느 정도나 되는지……."
"후후, 이 행렬을 지킬 만큼은 될 거요."
웨일즈가 작게 웃었다.
그가 결정적으로 귀족 신분을 가진 기사들에게 누명을 써야만 했던 이유, 그리고 평민이면서 장래성이 있는 헤일론 백작가의 기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익스퍼트에 오른 천재기 때문이었다.
* * *
반국왕파의 절대적인 수장 필립 후작.
현 슈레이더 왕국의 왕의 숙부이면서, 왕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자였다. 슈레이더 왕국에서만큼은 나는 새도 떨어뜨릴 권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에게 줄을 대고 있는 왕국의 귀족들은 50퍼센트를 넘었다.
아직까지 어디에도 줄을 대지 못한 중립이 20퍼센트라고 봤을 때 왕을 지지하고 있는 귀족들은 고작해야 30퍼센트.
고작 열에 셋이 왕을 지지하고 있는 것이다.
슈레이더 왕국의 전대 왕 에르니아가 통치할 때만 해도 필립 후작은 깃발도 세우지 못한 채 거의 숨어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에르니아 왕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광명정대하며 학식도 매우 높아 슈레이더 왕국을 대륙 최고의 나라로 발돋움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대륙의 모든 학자가 그를 칭송했고 군주들은 그를 본받았다.
하지만 그가 즉위한 지 오 년이 지났을 때, 슈레이더 왕국에는 커다란 참사가 일어났다.
에르니아 왕의 서거.
독살을 당했는지 어쨌는지 사인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채 그의 아들인 카이어스가 태자 책봉도 거치지 않은 채 곧바로 왕으로 즉위했다.
카이어스가 왕으로 즉위한 나이가 고작 열셋.
정치를 하기에는 지식과 경험이 모자랐고, 공과 사를 구별할 줄 아는 사리분별력 또한 전대 왕인 에르니아에 비해 한참이나 뒤떨어졌다.
세상은 그를 비난했고, 백성들은 그를 무시했다.
'아둔한 자!'
'어린 왕, 슈레이더 왕국 최악의 상황.'
'슈레이더 왕국은 이대로 나락으로 떨어져야만 하는가!'
열세 살의 나이로 그런 비난을 받자 정신이 버티지 못할 지경에 이른 카이어스에게 필립 후작이 다가왔다. 생일파티 때 몇 번 보았던 숙부인 필립 후작이 근접해 오자 몇 없는 피붙이였다고 생각한 카이어스는 아무런 의심 없이 마치 숙부를 아버지처럼 따르기 시작했다.
필립 후작은 그것을 이용해 귀족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고 왕좌를 빼앗고자 하는 자신의 탐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리고 카이어스가 즉위한 지 육 년이 지난 지금.
카이어스의 나이가 열아홉이 되고 정식적인 성인이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이 필립 후작에게 당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참으로 아둔하기 짝이 없는 왕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후로도 카이어스는 필립 후작을 멀리하지 못했다. 이미 어려서부터 길들여진 근성이 그러했고, 그 이외에는 자신의 심정을 잘 아는 자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펄럭펄럭∼
화려한 블루 드래곤의 깃발이 휘날렸다. 슈레이더 왕국 귀족의 깃발에 드래곤의 형상이 그려져 있다는 것은 그에게 왕족의 피가 흐른다는 증거였다.
창문 테두리에 보석을 박아 번쩍이는 사두마차가 슈레이더 왕국의 수도인 '아르텔'을 천천히 달렸다.
"필립 후작님, 곧 있으면 왕궁에 도착할 것입니다."
마차 안.
검은 후드를 깊게 눌러쓴 이가 하얀 양복을 입은 자를 쳐다보았다.
"……그런가?"
40대 중반의 얼굴을 가진 남자가 창밖을 쳐다보았다.
아르텔은 슈레이더 왕국의 자랑거리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는 물의 도시였다. 슈레이더 왕국이 변방의 작은 나라라 해도 물의 도시 '아르텔'이라 하면 유라시아 대륙에서 모르는 이가 없을 만큼 유명한 곳이었다.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아르텔은 물론이고 이 슈레이더 왕국의 모든 것이 후작님의 차지가 될 것입니다."
"후후. 그렇지. 그렇지 않으면 헤일론 백작의 500만 골드를 사용한 의미가 없을 것이야. 아, 자네에게도 보이는가? 이 아름다운 아르텔의 모습이……."
"아르텔에 와 본 것은 이번으로 딱 세 번째입니다. 대륙을 횡단해 보아서 느낀 것이지만 아르텔만큼 아름다운 도시는 이 대륙에 없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후드를 깊게 눌러쓴 이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표정에는 자부심이 깃들어 있을 것이었다. 문득 그의 시선이 다시 후작에게 향했다.
"후작님, 이번에 아르텔에 들른 연유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후후……. 설마 자네도 눈치 채지 못하였는가?"
"헤일론 백작가가 프로시안 영지를 눈여겨보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욕심이 많은 자다 보니 장안의 숲 어딘가에 묻혀 있는 광산을 탐내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영지전은 어디까지나 프로시안 남작이 토벌을 끝내기 전까지는 보류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때 영지전이 일어난다고 해도 늦지는 않을 테니 말입니다. 아르텔에 들른 이유는 현 국왕 카이어스에게 영지전을 허락해 달라는 친필을 써 달라고 요구하기 위해서가 아니옵니까?"
필립 후작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이가 드러나도록 웃었다.
"맞네. 맞긴 하지만, 영지전을 서두른 이유는 다른 곳에 있지. 어쩌면 장안의 숲 어딘가에 라인하르트 초대 황제의 무덤이 있을 것이야."
"라인하르트라 하시면 이십 년 전에 멸망한, 유라시아 대륙의 대제국 아닙니까? 그 초대 황제의 무덤에 대체 무엇이 있기에 후작님께서 욕심을……."
"나도 우연히 고서에서 봤을 뿐이네. 대체 무엇이 있는지는 이 세상 그 누구도 모른다고 할 수 있지. 그래서 더욱 욕심이 나고 궁금해. 당장이라도 알고 싶을 정도로……."
* * *
프로시안 영주성 본관.
밀린 집무와 함께 토벌 작전으로 인해 심신이 피곤해진 남작과 부관이 서로 사이좋게 차를 나눠 마시고 있을 무렵, 투구를 반쯤 눌러쓴 어린 병사 하나가 피투성이가 된 채 집무실 문을 덜컥 열었다. 숨이 넘어갈 듯 거친 입김이 실내를 맴돌았다. 병사의 다급한 표정을 본 남작과 부관의 얼굴이 한순간 굳어졌다.
"무슨 일인가?"
"크, 큰일 났습니다! 몬스터들이 장안의 숲과 인접한 '베얀 마을'을 대거 공격해 들어왔습니다. 지금의 마을 자치대로는 막기가 어렵습니다. 제발 저희를 도와주십시오, 남작님!"
"베얀 마을이라면……."
남작이 말끝을 흐리면서 부관을 흘끔 쳐다보았다. 그동안 앓아누워 있어서 오랜 기간 영지를 시찰하지 못했기 때문에 베얀 마을이 어디였는지 도통 기억이 나지 않은 것이다.
부관이 헛기침을 하고는 남작의 귀에 속삭였다.
"장안의 숲과 제일 인접해 있는 마을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입니다. 베얀 마을이라면 분명 몬스터들이라 해도 고블린이나 코볼트 정도밖에 없는 터라 자치대만으로 충분할 텐데……."
"인접한 곳인데 고블린이나 코볼트 같은 하급몬스터밖에 없는 것은 또 무슨 이유요?"
작게 말했지만 귀가 밝은 젊은 병사 하나가 대신 대답했다.
"그동안 베얀 마을에 하급몬스터밖에 없었던 이유는 마을 자체가 아주 소규모였기 때문입니다. 보통 큰 집단을 이루는 오크들은 애초에 관심조차 갖지 않았는 데다가, 중급인 트롤이나 오우거의 영역은 고블린이나 코볼트가 사는 곳에 있지 않으니 말입니다."
남작이 이제야 이해하겠다는 듯 턱을 쓰다듬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야 알겠군. 얼마 전 헤일론 백작가에서 세금을 대폭 올리는 바람에 수많은 영지민들이 쫓겨나 그나마 제일 가까운 우리 영지로 유입되고 있지. 아무래도 그들이 베얀 마을로 많이 가고 있는 모양이로군. 갑자기 마을에 사람들이 늘어났으니 식량이 많아졌다 생각했을 테고……."
"그렇습니다. 그러니 제발 도와주십시오, 남작님! 한시가 급합니다."
남작이 창문 바깥으로 고개를 돌렸다.
토벌을 위한 고된 훈련으로 인해 기사는 물론이고 병사들까지 쉴 틈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 빡빡한 일정 속에서 어딘가로 병사들을 뺀다면 그들의 불만이 머리끝까지 치솟을 것이었다. 그렇다고 용병들에게 마을을 지켜 달라고 부탁하려면 또 한 번의 거대한 지출이 필요할 것이었다.
"자, 잠깐. 부관! 아까 세리아가 나 대신 영지 시찰을 돈다고 했는데 몇 시에 출발했지?"
남작이 심각한 어조로 묻자 부관이 그제야 황급히 바깥으로 나가 경비를 서고 있던 병사 하나를 데리고 왔다.
"두어 시간쯤 됐을 겁니다, 남작님."
병사는 황송하다는 듯 고개도 들지 못했다. 멀리서나마 보던 남작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게 되니 병사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지금 당장 베얀 마을로 간다. 이봐, 현재 베얀 마을을 침입해 온 몬스터의 종류와 숫자는?"
"미노타우로스 두 마리에 대부분이 오크들입니다. 오크의 숫자는 대략 팔십 마리 정도였습니다."
"미, 미노타우로스!"
반은 소이고 반은 인간의 형상을 한, 지상체 중에서 오우거와 마찬가지로 최강이라 일컬어지는 몬스터 중 하나다. 속도에서는 오우거에게 밀릴지 몰라도 힘만으로 따지면 오우거보다도 한 수 위였다. 가죽이 얼마나 질긴지 보통의 창이나 검으로는 뚫기가 어려웠다.
"지금 당장 출병 가능한 기마병 백 명과 에이전트 기사단을 데리고 간다! 이번 일의 지휘는 내가 맡을 것이다. 내가 없는 동안 부관은 뒤를 부탁하네. 그리고…… 어서 내 갑옷을 가져오도록 하라."
곧이어 하인이 갑옷을 가지고 오자 남작은 묵묵히 갑옷을 입더니 그대로 검을 빼 들었다.
바깥에서 잠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더니 순식간에 연무장에 기마병과 에이전트 기사단이 나타났다.
"조심히 갔다 오십시오. 기다리겠습니다."
"내 걱정은 하지 말게."
* * *
'전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팔뚝에 그려진 문신은 제가 잠시 봉해 놓겠습니다. 얼굴 형태 또한 유라시아 대륙과 이곳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얼굴도 이쪽 중원이라는 세계에 걸맞게 바꿔 놓겠습니다. 훗날, 유라시아 대륙으로 돌아가는 날 인연이 된다면 꼭 본모습을 되찾길 신께 기도하겠습니다.'
"크으윽!"
이안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왈칵 쏟아졌다. 그가 한순간 표정을 일그러뜨리더니 곧바로 바닥을 뒹굴었다.
'애초에…… 애초에 그 노인장은 자신의 혼이 신에게 영원히 구명받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그랬다는 것인가! 왜! 왜?'
전신의 통점을 수백 개의 바늘로 찌르는 듯한 고통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날 자신을 용아천에서 구한 노인을 회상했다.
얼마 전 꾼 꿈에서는 골드드래곤이 나왔다.
그 꿈으로 자신이 황태자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고, 노인이 누구인지 대략이나마 알 것 같았다.
차원 이동을 하는 자들은 서로 만날 수 없다. 접촉을 시도한 자는 죽어서도 구천에서 편히 살 수 없는 것이다.
노인장은 죽음을 각오하고, 아니 죽음을 당한 후에도 죽음보다도 더한 고통을 받을 것을 알면서도 이안에게 자신의 혼을 바쳤다. 이안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전신의 고통으로 인한 눈물이 아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눈물이었다.
'내가 어리석었구나. 내 운명은 이미…… 유라시아 대륙 최고의 대제국 라인하르트의 황태자였다는 것을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어.'
"이봐, 인간! 괜찮은가, 인간!"
드워프 윈스텀이 이안을 흔들었다. 이안이 갑자기 피를 토하고 쓰러지자 윈스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더니 이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변했다.
윈스텀은 그대로 이안을 업고 빠르게 창고를 빠져나왔다. 이안의 키가 훨씬 컸기 때문에 이안이 거의 질질 끌리듯 되어 버린 상황이었다.
윈스텀은 이게 무슨 이유인지 몰라 곰곰이 생각해 보자 자신이 사용한 마나석에 문제가 있음을 알았다.
이안은 노인, 추기경의 신성마법에 의해 어릴 적 전신을 변형시켰다. 그것이 디스펠 능력이 깃든 마나석에 의해 깨지고 본모습으로 돌아가려 하니 뼈와 살이 변해 가는 현상이었다.
이안은 정신이 혼미해지는 상황에서도 간신히 입술을 떼어 냈다.
"전……."
"인간! 말은 그만 해라. 잘못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안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숨을 한 번 크게 몰아쉬더니 윈스텀의 귓가에 아주 작지만 또박또박 한 글자씩 소리 내어 말했다.
"라, 인, 하……르트 황태……잡니다."
그 말을 끝으로 이안은 정신을 놓아 버렸다.
"뭐, 뭐라고? 인간! 인간!"
정신을 잃은 이안의 몸이 놀라운 변화를 시작했다.
그동안 하고 있던 선한 청년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유라시아 대륙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조금은 날렵한 인상으로 변했다. 그 다음으로는 전신의 골격이 하나하나 바뀌더니 수차례 변화를 거듭했다.
"헉! 이, 이 모습은……!"
변화한 이안의 얼굴을 본 윈스텀은, 라인하르트 황태자라는 말에 반신반의했던 마음이 모조리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여신의 축복을 받은 자답게 카리스마가 묻어났고, 뭇 여인들의 가슴을 뛰게 만드는 매력적인 얼굴이었다. 사실 예전의 얼굴은 여신의 축복을 받았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을 만큼, 서생 같은 먹향을 풍겼던 것이다.
다음 순간, 윈스텀은 또다시 놀라야 했다. 이안의 얼굴이 누군가와 많이 닮았다고 생각은 했지만, 라인하르트 대제국이 멸망하기 전에 본 선황의 용안과 너무나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윈스텀이 갑자기 눈시울을 붉히더니 이내 눈물을 왈칵 쏟아 냈다. 그가 이안을 향해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통곡하기 시작했다.
"흑흑! 선황 폐하! 선황 폐하가 되살아나신 것이 틀림이 없구나. 선황 폐하아아∼!"
이십 년 전 라인하르트 대제국이 멸망할 때만 해도 그 사실을 쉽게 믿지 않은 윈스텀이었다.
국왕의 유일한 후사인 황태자가 그대로 대륙에서 모습을 감추자 모든 사람들이 그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라인하르트 제국이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져 가고 있는 지금…….
자신의 앞에서 번듯이 살아 숨 쉬고 있는 자가 라인하르트 제국의 황태자란다…….
어찌 눈물이 나지 않을까.
'아, 라인하르트 제국의 후손을 찾기 위해 얼마나 모진 고생을 해 왔는가!'
제국이 멸망하고 수년간 대륙을 떠돌아 다녔다. 오직 제국을 재건할 후손을 찾기 위해서!
남들이 뭐라 해도 상관없었다. 그저 윈스텀은 그런 희망을 잃고 싶지 않았다.
대륙을 떠돌다 우연히 알게 된 사실.
라인하르트 초대 황제의 무덤이 바로 프로시안 영지 내의 장안의 숲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곳에 무덤이 있다면 나중에라도 후손이 찾아오지 않을까 싶어 당장에 프로시안 영지로 이주했다. 돈이 필요해 대장간을 열었고, 인간이 만든 조악한 농기구나, 간간이 들어오는 기사 또는 병사들의 검을 봐 주며 십 년을 넘게 살아왔다.
"크흑! 당신이야말로 제가 이십 년 넘게 기다려 온 진정한 주군이옵니다. 주군! 이제 저는 당신을 주군으로 떠받들고 여생을 당신과 함께 보내겠습니다!"
라인하르트 대제국 역사에서 대장장이의 신이라고까지 불린 윈스텀.
그가 이십 년 넘게 기다려 온 주군을 맞는 사건이었다.
* * *
"으음……."
흐릿한 시야에서 눈을 뜬 이안이 주변을 둘러보고는 그대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혹여 저승이 아닐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저승이었다면 땅을 치고 크게 후회하고, 미안했을 테지. 추기경에게 말이야……."
그가 입술을 말아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대체 제국을 왜 재건해야 하는지, 그리고 자신이 황태자라는 사실까지도 의심하고 있었던 게 사실이었다.
삶에 대한 의욕도 없었고, 청성파의 복수를 해야 할 자신이 왜 이계로 떨어졌는지 원망까지 하며 살았다.
하지만 추기경은 자신을 위해 목숨을 버렸고, 영혼까지 버렸다. 무엇을 위해?
추기경의 기억을 바탕으로 옛 기억을 되살려 내자 그가 왜 그랬는지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라인하르트 제국은 결코 자진 붕괴한 게 아니었다.
이안은 주먹을 부서져라 쥐고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프라스 제국 이놈들!"
선황 폐하셨던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까지 처참하게 살해한 그들. 라인하르트 제국의 백성들을 노예로 전락시킨 것도 모자라 우리를 철저하게 속인 놈들!
추기경은 그것이 너무도 분하고 원통했을 것이다.
"감사하오, 추기경……. 이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것 같으니까."
똑똑!
이안이 그러고 있는 사이 바깥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십시오."
허락이 떨어지자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이안을 몰아붙였던 윈스텀이 눈물 자국을 지우고 들어왔다.
"오……! 깨어나셨습니까, 주군? 씻을 물을 준비해 왔습니다."
윈스텀의 말에 갑자기 이안이 크게 놀라 소리쳤다.
"주, 주군이라니요? 그대와 저는 종족이 다르건만, 어찌하여 제가 당신의 주군이란 말입니까."
윈스텀이 이안을 향해 무릎을 꿇고 세숫물을 바쳤다.
"저같이 천한 것에게 존대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당신은 진정 라인하르트 제국을 재건해 주실 분. 어찌하여 종족을 논한단 말입니까? 당신은 저에게 주군이옵니다."
무언가 떨떠름한 기분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심하게 몰아붙였던 자가 이제는 고개를 숙이고 들어왔다.
"어, 어쨌든 일어나십시오."
"감사합니다, 주군!"
황송하다는 듯 윈스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똑바로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시선은 언제나 바닥에 고정하고 있었다.
이안은 처음에 윈스텀이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그의 눈을 보자 그것이 진심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정말 저 드워프는 나를…….'
"당신은 라인하르트 제국과 관련이 있습니까?"
"라인하르트 제국 제1대장간의 간주로 있었습니다."
이안의 눈동자가 화등잔만 해졌다.
"가, 간주 말입니까!"
라인하르트 제국의 대장간의 수는 헤아리기가 어렵다고 들었다. 각 대장간에서는 제일 실력이 좋은 자를 간주로 뽑는데 그중 제1대장간의 간주가 단연 최고였다. 드워프라는 이점이 많이 발휘되어 그 후로도 라인하르트 제국을 성장케 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었다.
"변변치 못한 실력일 뿐입니다. 그저 운이 좋아 선황 폐하의 눈에 띈 것뿐. 주군에게 많은 도움을 드렸으면 하는 것이 이 노인네의 마지막 소원입니다."
"후우∼ 알았습니다. 하지만 다음부터는 주군이라는 호칭은 삼가셨으면 합니다. 게다가 이야기를 나눌 때도 허리는 꼿꼿이 세워 주시구요. 남들에게 괜한 오해라도 사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이안이 머리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앞에 놓인 물에 비친 그의 눈이 다시 한 번 커졌다.
'이건 누구야?'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매서운 눈빛으로 주위를 쳐다보고는 그대로 거울을 향해 달려갔다.
"허, 헉!"
사람이 이렇게 변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여태껏 하고 있던 얼굴이 사라지고 날카로워 보이는 청년의 얼굴이 보였다. 머리 색깔도 그전보다는 옅어져서 마치 금발처럼 번쩍거렸다.
'진정, 천하를 지배하던 제국의 황태자다운 모습이로구나.'
그래도 며칠간은 적응될 때까지 거울만 봐도 깜짝 놀랄 것이었다. 새로운 얼굴에 대해서는 말이다.
"잠자리는 편하셨습니까? 주군, 아니 도련님."
이안이 애초에 주군이란 말을 삼가라 하자 바로 도련님으로 바꾸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드워프인 윈스텀이 인간 청년을 도련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조금 이상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네, 괜찮았습니다. 그건 그렇고, 제가 누워 있은 지 얼마나 됐습니까?"
"얼마 되지 않습니다. 한 시간 정도? 바깥에 있는 아가씨들이라면 걱정 마십시오. 이미 조치를 취해 놨습니다. 그들은 예정대로 저희와 협상 중에 있습니다."
"협상?"
"예, 취소하고 내일 하려 했지만, 이대로 기다리지는 못하겠다며 막무가내로 나오는 인간이 있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협상을 진행하긴 했지만 빨리 끝날 것 같진 않습니다."
짜증을 부린 것은 로이니스가 분명할 것이었다.
아무래도 명망 높은 귀족가의 여식이었으니 기다리는 것은 체면상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대장간에 볼일이 있다고 한 것은 이들과의 협상을 위해서였나?'
"그럼 그쪽으로 안내해 주시겠습니까?"
"예, 도련님. 하지만 그전에 드릴 것이 있습니다."
"뭐죠?"
"이것입니다."
윈스텀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커다란 상자를 이안에게 내밀었다. 상자의 크기가 거의 윈스텀의 키와 비슷했다.
상자를 열어 본 이안이 놀라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라인하르트 제국 선황 폐하께서 쓰셨던 3대 제국검(帝國劍) 중 하나입니다. 선황 폐하께서 서거하신 지금, 이 검의 주인은 주군밖에 안 계십니다."
그는 한눈에 보아도 값비싼 보자기로 정성스레 싼 검 손잡이를 이안에게 건넸다.
이안이 윈스텀에게서 검을 건네받자 검에 깃든 무수한 마력이 솟구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모습을 본 윈스텀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오! 역시, 3대 제국검은 드래곤이 인간에게 내린 산물입니다. 펠타온, 프라스, 라인하르트 제국이 각각 하나씩 가지고 있었는데, 황실의 피를 이어받지 않은 자는 검의 주인이 되지 못합니다. 아무런 제재 없이 검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은 진정한 태자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안 역시 책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드래곤이 인간에게 내린 검은 총 열 자루였는데, 그것을 합쳐 3대 제국검과 7대 신검(神劍)이라 칭하고 있었다.
7대 신검은 불과 이십 년 전만 해도 모두 존재했으나 현재에는 여섯 자루만 존재하고 있으며, 하나는 파괴가 되었거나 드래곤이 회수해 갔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신빙성은 없었다.
이안은 문득 윈스텀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아! 드워프가 만들 수 없는 검이라면…… 사형들에게 빼앗긴 나의 검이 7대 신검 중 하나였던 것인가?'
애초에 무리였던 자신의 주문.
드워프도 만들 수 없는 검이라면 그것은 진정 드래곤이 내린 검일 게다. 그렇게 생각하니 사형들에게 그 검을 빼앗겼다는 사실이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지금 후회해 봤자 아무 소용 없다. 그저 인연이 없었던 것뿐이라고 생각해야겠지.'
7대 신검 중 하나가 이계에 있으니 이젠 6대 신검이라 불러야 할 것이었다.
"정말 고맙습니다. 너무도 좋은 검이네요."
천하에서 제일 단단하다는 아다만티움도 쉽게 자를 만한 예기를 지닌 검이었다.
검을 쥔 손이 행복에 겨워 비명을 내지르는 듯했다.
세상에 다시없을 명검이었다.
이안이 살며시 미소 짓자 윈스텀도 따라서 미소 지었다.
"좋아하실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도련님! 제 이름은 윈스텀. 평생 동안 충성을 맹세하겠습니다. 저를 받아 주십시오."
뒤뚱뒤뚱 걸어와 어설픈 자세로 무릎을 꿇는 윈스텀을 본 이안이 심각한 듯 그를 바라보았다.
"어려운 길이 될 겁니다. 죽을 수도 있고, 평생 동안 빛을 보지 못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라인하르트 제국이 재건되는 그날까지 이 한 몸 바치겠습니다. 그것도 안 된다면 영혼을 바칠 것이고, 주군을 따라 지옥불에라도 들어가겠습니다."
수하가 되기를 자청하고 있었다.
그 누구도 이종족을 수하로 부리지 못한다.
하지만 불과 이십 년 전만 해도 라인하르트의 선황은 이종족에게도 아낌없는 포용력을 과시했다.
그것은 곧 인복이었다.
윈스텀에게 이안은 선황 폐하 그 이상의 주군이었다.
"그대와 나, 윈스텀과 이안. 여기에서 수하와 주군의 연을 맺으니 이 맹약에 배반하는 자는 죽음으로 보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