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0장 로이니스(下) □
로이니스의 움직임은 매우 은밀했다. 그녀의 곁에서 바람이 불고, 그 바람이 불고 나면 그녀의 자취가 묘연해졌다.
"실프, 고마워."
그녀의 앞에 있던 작은 바람 덩어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이 봤다면 놀라 넘어갈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바람이 대답을 하다니!
"실프! 저 아이를 절대 놓치면 안 돼. 네 어깨에 내 밥줄이 걸려 있다."
바람의 하급정령 실프가 막중한 사명감을 불태우며 레나를 은밀하게 쫓았다. 그녀를 쫓는 로이니스 또한 발자국조차 남지 않고 주변에 동화해 버린 듯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여관에 도착한 레나는 미리 가져온 가죽통에 싸구려 맥주를 가득 담았다.
"아줌마, 고마워요."
"그래. 다음에도 또 오너라. 자, 가면서 이거라도 들어."
"에이. 또 이런 것을 쥐어 주시네. 안 주셔도 된다니까."
레나는 말로는 거부하면서도 손을 뻗어 냉큼 챙겼다. 그녀의 손에는 큼지막한 육포가 쥐여 있었다.
그 모습을 훔쳐보던 로이니스가 평소 거들떠도 보지 않던 육포를 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환장하겠네. 아침부터 굶었더니 별별 음식 같지도 않은 것들이 다 먹고 싶……."
흠칫.
그녀는 말하다 말고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앞서 가던 레나가 갑자기 가던 길을 멈추고 뒤를 힐끔 돌아본 것이다.
"어라? 이상하다. 방금 뭔가 있지 않았나?"
잠깐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인 레나가 다시 앞으로 걷기 시작하자 로이니스는 뒤에서 가슴을 쓸어 내렸다.
'프로시안 영지는 시녀들까지 훈련을 시키나? 아니, 아무리 왕실 기사들이라고 해도 실프의 은신을 알아볼 리가 없을 텐데.'
단순한 우연이라 치부한 로이니스가 계속 레나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레나는 누군가 자신을 뒤쫓는다는 사실도 모른 채 콧노래를 흥얼거리다 작은 상점으로 들어갔다.
한스와 존슨에게 부단장을 거들먹거리며 일단 바깥으로 나오긴 했지만 사실은 시녀장의 심부름이 있었다. 은밀히 갔다 오라는 말에 청령의 이름을 팔아먹은 것이다.
"헤헤, 그래도 나온 김에 오라버니 몸보신할 것이라도 사 갈까? 흐음. 그러고 보니 오라버니가 부단장이 되셨는데 축하 선물 하나 준비 안 했네. 내가 너무 정신이 없었나?"
레나는 시녀장이 심부름 시킨 물건을 쭉 고른 후 구석에서 먼지가 잔뜩 쌓인 책 몇 권을 들고 나왔다.
"오라버니는 책을 아무거나 다 읽으시니까 선물로 가져가면 좋아하시겠지. 아저씨! 이거 얼마예요?"
"어차피 팔아도 제값도 못 받는 것들이니 1실버만 내놓고 가라."
"우와, 정말 싸네요."
프로시안 영지민들이 하루에 벌어들이는 수익은 평균 100실버 정도다. 1실버라면 무척이나 싼 가격이었다.
레나는 책을 품에 껴안고 싱글벙글하는 표정으로 곧바로 성안으로 들어갔다.
"한스 아저씨, 존슨 아저씨! 저예요, 레나!"
"어이쿠, 목이 빠져라 기다렸다."
빠른 속도로 문이 열리자 그때를 기다린 로이니스가 바로 성으로 숨어 들어갔다.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한 레나와 경비병들은 추호의 의심도 없이 다시 성문을 닫았다. 경비병들의 관심은 오로지 레나가 쥐고 있는 가죽통이었다.
"자, 여기요.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 그럼 다음에 뵈요."
레나가 가죽통을 존슨에게 건네고 손을 흔들며 사라지자, 존슨 또한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래! 아이고, 좋아라. 한스! 빨리 와 봐. 냄새가 장난이 아니다."
* * *
영주의 성으로 잠입해 들어온 로이니스는 이때만큼은 정말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실프를 불러들이고 바람의 중급정령인 실라페를 소환했다.
기사들과 실력 좋은 용병들이 있는 이상 실프로는 은신이 힘들 것이었다. 마나 보유고에 고여 있던 마나가 순식간에 사라지자 로이니스의 고운 이마에 땀이 맺혔다.
얼마 전에야 고작 중급정령을 소환할 만한 실력을 갖게 된 로이니스였기에 소환하는 것만 해도 힘든 일이었다.
그녀는 앞서 가는 레나를 뒤쫓아 동관으로 슬며시 들어갔다.
―실라페, 나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저 여자를 쫓아가서 내 향수 냄새가 나는 물건을 찾아와 줘.
실프와는 달리 실라페는 마음속으로도 대화가 가능한 경지였다. 그녀가 그렇게 전하자, 실라페가 고개를 끄덕이며 어느 순간 사라졌다.
그렇게 약 5분 정도를 기다리고 있자 실라페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찾았어?
실라페는 고개를 저었다.
―뭐야! 이곳 어디에도 없단 말이야?
실라페가 고개를 끄덕였다.
향수 냄새를 지웠다 해도 실라페가 찾지 못하는 것은 없었다. 실라페가 찾지 못한다면 애초에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때 갑자기 실라페가 고개를 번쩍 들더니 본관 쪽을 빤히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야? 응? 짐작 가는 곳이 있다고?! 그럼 뭐 하고 있어. 당장 가자!
실라페가 고개를 끄덕이자 로이니스가 본관을 향해서 무작정 달렸다. 그러다 문득, 실라페가 몸을 꺾더니 사람 없는 한적한 곳으로 향하는 것이 아닌가!
로이니스가 잠시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보자, 실라페가 속도를 멈추며 우뚝 섰다.
"아……!"
로이니스는 한순간 숨이 멎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눈에 연못을 앞에 두고 멍하니 앉아 있는 청년의 모습이 들어왔다. 평민들이나 입을 법한 평상복을 입은 청년은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진한 먹향을 풍기고 있었다.
"그 빌어먹을 도둑놈일까? 아니면…… 누구지?"
청년과의 거리가 상당해서 정확히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다. 그녀는 실라페를 믿고 앞으로 계속해서 움직였다. 그리고 그와 약 30미터를 앞에 두었을 때, 청년이 고개를 들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누구십니까?"
로이니스는 그 자리에서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숨이 턱 막혀 왔다.
그 누가 실라페의 은신을 알아챈다는 말인가!
'어라? 역시 그 빌어먹을 놈이네!'
얼굴을 확인한 그녀가 주먹을 움켜쥐고는 실라페에게 은신을 풀어 달라 요청했다. 어차피 그녀가 이곳에 온 이유는 돈주머니를 되찾기 위해서였다.
"어떻게 알았지?"
"무엇을 말입니까?"
"내가 너한테 다가가는 것을 어떻게 알았냐고!"
"풀이 꺾였습니다."
그의 말에 로이니스가 자신이 걸어온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실라페가 발자국은 없애 줄 수 있지만 풀이 꺾이는 것은 원상태로 복구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지금 이곳에 당신이 계신다는 것은…… 영주님의 초대를 받으셨습니까?"
로이니스는 베리카 백작의 딸이었으니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로이니스는 마침 핑계 삼을 것이 앞에 떨어지자 얼른 주워 먹었다.
"그, 그래. 난 정식으로 프로시안 남작님께 초대를 받아서 온 것이라고."
"그렇습니까? 그럼 아침의 무례는 용서해 주십시오."
"괘, 괜찮다. 아침엔 나도 신분증이 없었으니 그럴 수밖에. 너도 네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었으니까, 이번만은 특별히 용서해 주지."
그녀가 선심 쓰듯이 말하자 청년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지금까지 고뇌한 듯한 표정이 아니었다.
'에이 씨, 이렇게 잡스러운 얘기나 나누려고 온 게 아닌데! 빨리 내 돈 찾고 나가야 된단 말야.'
로이니스가 청년을 향해 당당히 손을 내밀었다.
"자, 이야기는 이쯤이면 됐고, 내놔."
"무엇을 말씀입니까?"
청년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눈을 껌뻑이자 로이니스의 표정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좋은 말로 할 때 내놓으라니까. 지금 당장 내놓는다면 내가 특별히 용서해 줄 수 있어. 그러니까 내놔."
청년은 자신의 몸 이곳저곳을 탁탁 치더니 아무것도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설마…… 그 많은 돈을 전부 써 버린 것은 아니겠지?"
"돈이요? 애초에 돈은 없었습니다만."
로이니스가 냉큼 달려들려 하자 청년이 한 걸음 뒤로 빠졌다.
"무, 무슨 짓입니까!"
"흥! 발뺌한다 이거지? 좋다 이거야. 내 똑똑히 말해 줄 테니까 귓구멍 씻고 잘 들어. 내 돈주머니 내놓으라고, 이 자식아! 어디다 숨겼어?"
"돈주머니라뇨? 그건 무슨 소리입니까?"
청년, 아니 청령이 재차 묻자 로이니스는 기가 막힌 듯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오호라.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네가 안 준다면 나도 다 방법이 있거든? 실라페! 이 녀석 발 좀 묶어. 실토할 때까지 이곳에서 한 발자국도 못 움직일 줄 알아!"
그녀의 말에 잔잔히 있던 바람이 거세게 몰아치더니 청령을 향해 나아갔다. 가만히 서 있는 청령을 보며 로이니스가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봐도 겁을 먹어 움직일 수 없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흥! 실토할 수밖에 없을걸? 실라페는 오우거의 발걸음도 막을 수 있다고!'
'돈?'
청령은 돈이란 얘기에 잠시 회상해 보았지만 아무것도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아니, 애당초 그는 그녀의 돈주머니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청령은 그녀 모르게 한숨을 푹 쉬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귀족가의 딸이라는 여자가 너무 철이 없어 보였다.
'오늘만큼은 정말 혼자 있고 싶었는데, 하늘이 허락하질 않나 보군. 아니, 영지 안에서 하루 만에 두 번이나 얼굴을 본다는 것은 인연이라 봐야겠지.'
정말 짜증나는 인연이었다.
청령은 그녀와 대화를 나눈 후에 적당히 연못가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혼자 생각하고 싶은 것들이 한두 개가 아니었으니까…….
그러다가 문득 드는 의문.
그녀의 곁에 머물고 있는 형상화한 바람이 자신에게 살기를 드러내고 있다. 참으로 신기한 노릇이었다.
인간이 다룰 수 없다는 자연이 설마 인간에게 머리를 숙일 줄이야.
'정령이라는 것이겠지. 그것도…… 바람의 정령이로군. 제법 강한 정령.'
중급정령 실라페. 대륙에서도 중급정령을 다루는 이들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기사와는 달리 정령술사들은 오로지 자연의 선택을 받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수가 적은 마법사들보다도 훨씬 적었다.
청령은 유라시아 대륙에 와서 처음으로 정령이란 것의 실체를 볼 수 있었다.
"오호라.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네가 안 준다면 나도 다 방법이 있거든? 실라페! 이 녀석 발 좀 묶어. 실토할 때까지 이곳에서 한 발자국도 못 움직일 줄 알아!"
그녀의 명령에 놀랍게도 정령이 청령의 이목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곧 한 줄기 바람이 청령의 다리를 감쌌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당황한 청령이 그제야 송서초상비를 펼쳐 그 자리를 벗어났다. 검을 뽑을 시간도 없었다.
너무도 자유롭게, 자연스럽게 다가와 청령의 발을 묶어 버린 것이다.
놀란 것은 비단 청령뿐만이 아니었다. 로이니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바람의 중급정령 실라페의 속도라면 아무리 익스퍼트에 오른 기사들이라 해도 쉽게 벗어나기 어려웠다. 하지만 청령이 너무도 쉽게 벗어나자 믿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렇게 그녀가 입을 벌리고 놀라는 사이 청령의 주먹이 그대로 움직였다. 그의 단전에서 움직인 한음지기가 그대로 주먹으로 뻗어 나왔다.
주변의 공기조차 얼어붙게 만드는 한기!
청령의 주먹에 파란빛이 번쩍이는 권기가 생성되었다. 육안으로 확인될 정도로 선명한 권기였다.
콰앙!
권기가 부딪쳐 간 곳은 실라페의 바람이었다. 발을 묶으려 했던 실라페의 바람이 쩌적 얼어붙기 시작하더니 그대로 실라페까지 순식간에 얼려 버렸다.
"어? 어, 뭐, 뭐야! 시, 실라페가 얼었어? 너 설마…… 마, 마법?"
"이번 한 번은 오해로 생긴 일이니만큼 용서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한 번만 더 이런 일이 생긴다면 영주님께 말씀을 드려 그대를 이 영지에서 추방하도록 하겠습니다."
청령은 그 말과 함께 자신의 가슴팍에 들어 있던 돈주머니를 꺼내 그녀에게 던졌다. 그것은 청령의 것이었다. 돈주머니를 받아 든 그녀가 제법 묵직한 무게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제법 돈이 될 겁니다. 그대가 어찌하여 저를 범인으로 지목한 것인지는 모르겠다만, 이것으로 끝내 주셨으면 합니다."
"어? 어?"
청령은 그 말과 함께 등을 돌리고 사라졌다.
로이니스는 그의 신형이 점이 될 때까지 바라보다가 급히 실라페를 바라보았다. 그저 잠시간의 동결로 인한 것이었으니 실라페는 곧바로 원상태로 돌아갔다.
제대로 망신살이 뻗친 로이니스가 짜증스런 말투로 실라페에게 물었다.
"너는 대체 왜 저 녀석을 의심한 거야?"
그러자 실라페가 상황을 설명하듯 손을 이리저리 허공에 휘저었다.
"뭐라고? 당연하잖아! 오전에 저 녀석을 만났으니 내 향수 냄새가 나는 건 당연하지. 웬일이야? 실라페가 실수를 다 하고."
실라페를 추궁하려던 로이니스는 뭔가 생각났는지 실라페를 역소환했다. 정령을 다룰 마나가 바닥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녀석…… 마법사일까? 아니, 마법사면 마법사지 왜 부단장 노릇을 하고 난리야……."
혼자 애꿎은 땅바닥을 차던 로이니스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좋았어. 난 궁금한 건 죽어도 못 참아. 그 녀석이 누군지 제대로 알지 못하면, 잠도 못 자!"
그녀는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경비병들이 교대하는 시간을 틈타 문으로 살짝 빠져나갔다.
이른 아침부터 베리카 백작의 여식이 찾아왔다는 소식에, 칸과 세리아는 다소곳이 응접실에 앉아 있었다. 신분증이 없어 잠시 소란이 일긴 했지만 허벅지에 그려진 카이트 실드가 있는 이상 그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로이니스가 초라한 응접실을 보며 차를 홀짝 마셨다.
'음, 프로시안 영지가 이번에 대대적인 장안의 숲을 토벌할 준비를 하느라 재정이 없다더니 정말인가 보네. 차 맛이 꼭 여관에서나 주는 디저트 같아. 향도 별로고.'
그녀는 귀족 체면상 맛이 없는 것은 먹지 못한다. 탁자에 차를 내려놓고 더 이상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세리아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 전 베리카의 백작의 여식이 가출했다는 소식은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바로 자신의 앞에 떡하니 앉아 있으니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 왔다.
칸과 세리아는 프로시안 영지에서는 높은 신분이지만 로이니스에 비하면 한참이나 아래였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로이니스 님."
"이 누추한 곳까지 다 찾아오시다니 영광이에요."
그런 인사는 평소 듣던 것이라, 그녀는 손을 가지런히 무릎에 올려놓고 세리아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외모에 대해서는 슈레이더 왕국에서도 한 이름 당당히 내놓고 있는 로이니스였다. 하나, 지금 앞에 앉아 있는 별 시답지 않은 남작의 딸이 자신보다도 훨씬 고와 보이는 것은 왜일까.
"그건 그렇고, 여기까지 찾아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리아의 질문에 로이니스가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프로시안 영지에서 장안의 숲의 초입을 토벌한다는 소문이 있어서 말야. 오면서 봤는데 정말 용병들이 많더라."
"장안의 숲을 토벌하려면 그 정도는 당연하지요."
세리아가 자신 있게 입을 열었다. 로이니스는 책을 통해 십만 대군으로도 토벌하지 못한 곳이 장안의 숲이라는 것을 배웠기에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프로시안 남작님이 이번 일에 사활을 걸었다는 것도 잘 알아. 그래서 말인데, 나도 이번 그 토벌 작전에 끼워 줄 수 없을까?"
"예?"
베리카 백작에게 알려 한시라도 빨리 딸을 데려가라고 서신을 보내려 마음먹었던 세리아였다.
만약 로이니스가 프로시안 영지에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 자신의 아버지가 베리카 백작의 눈 밖에 나는 것을 막지 못할 것이었다.
베리카 백작이 슈레이더 왕국의 대부호인 만큼, 그의 눈 밖에 난다는 것은 사실상 다른 영주들에게도 밉보이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너희도 알다시피 난 정령술사야. 특히 중급정령을 아주 잘 다뤄. 토벌이나 전쟁에서 정령술사의 존재 여부는 군사들에게 커다란 의지가 될 수 있어. 따라서 전쟁에 크게 기여할 수 있지."
사실이 그랬다. 정령술사들은 마법사들과는 달리 캐스팅 할 필요 없이, 마법에 버금가는 기술을 차례대로 사용할 수 있었다. 게다가 물의 정령은 사제처럼 치료도 할 수 있었고, 바람의 정령은 전투와 정탐에 능하며, 땅의 정령은 지리에 매우 능했다.
전쟁에서 정령술사들은 어느 누구보다도 훨씬 귀한 손님 대접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세리아와 칸도 살짝 마음이 기우는 것을 막지 못했다.
"좋아요, 로이니스 님. 하지만 다친다면 그 누구도 책임질 수 없어요. 그러니 토벌 중에는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말아야 해요. 그래 주실 수 있다면……."
로이니스가 세리아의 말을 끊고 크게 외쳤다.
"알았어! 걱정하지 마. 난 이제 너희에게 운 좋게 고용되어 프로시안 영지의 에이전트 기사단을 돕는 용병 정령술사로 활동하게 될 거야. 그러면 됐지?"
생각보다 이야기가 수월하게 풀리자 세리아가 활짝 웃었다. 그러면서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함께 일하게 되어 반가워요, 로이니스 님."
로이니스도 예의상 손을 마주 잡았다. 로이니스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나 또한."
* * *
전날 청령에게 당한 기사들을 살펴본 후, 에이전트 기사단은 아침 시간에 빠짐없이 나와 정렬해 있었다.
아침 훈련 시간보다 5분 일찍 나와 있던 청령도 이 순간만큼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제의 충격이 컸긴 컸나 보네. 아니면 대형 몬스터들에게 허무하게 죽고 싶지 않다거나.'
그로퍼와 욘지도 일반 기사들과 같이 맨 뒤에 서서 청령이 하는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아침 두 시간을 맡았으니 간단한 몸 풀기 운동부터 시작했다.
"아! 제가 말씀을 미리 안 드린 것이 있는데, 제 훈련 시간에는 갑옷이 아직 필요 없으니 벗어 놓고 와도 좋습니다."
기사들의 훈련에 갑옷은 필수라고 여기던 그로퍼가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봤지만, 청령은 애써 그에게 해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로퍼도 두 시간을 이미 청령에게 주기로 했으니 아무 말도 내뱉지 않았다.
몸 풀기 운동이 끝난 후, 청령의 말을 듣고 갑옷을 벗어 놓고 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에게는 갑옷을 입는 것이 더 익숙했다.
'쩝. 이제부터 내가 할 것은 심법이랑 보법인데, 그런 무거운 것을 입고 있으면 무지 힘들 텐데…….'
"그럼 전원 저와 같은 자세를 취해 주세요. 처음에는 많이 힘들고 불편하겠지만 점점 익숙해질 겁니다."
청령이 가부좌를 틀자 기사들도 하나 둘 따라 하기 시작했다.
"으윽!"
"헙! 이, 이게 무슨 훈련이라는 거지?"
처음 해 보는 자세에 기사들이 모두 인상을 찡그리며 최대한 청령과 비슷한 자세를 하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어떤 이들은 가부좌를 튼 지 고작 5분 만에 포기했고, 10분 동안이나 참는 자들도 있었다.
청령은 전원이 똑바른 자세가 될 때까지 일일이 돌아다니면서 지적해 주었다. 기사들은 저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새삼 갑옷을 벗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갑옷 때문에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 더욱 힘들었다.
"분명 의아해 하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지금 이 훈련은 여러분들의 마나를 늘리려는 목적이니만큼 제 지시에 따라 주셨으면 합니다. 그럼 저와 같이 눈을 감고 편안한 마음으로 배로 호흡해 주십시오. 주변에 마나가…… 마나가 느껴지실 겁니다."
익스퍼트에 오른 욘지, 그로퍼 및 여러 기사들은 주변에 있는 마나를 느꼈다. 하나 아직 웨폰 오러의 경지인 기사들은 저마다 마나가 느껴지지 않아 애를 먹었다.
"제가 지금부터 여러분에게 가르칠 것은 삼재…… 아니, 마나 호흡법이라고 하여 이것을 익히고 익숙해진 분은 걸어 다니면서도 그것이 가능해질 겁니다. 자, 제가 마나를 주입하면 그 경로를 정확히 기억해 두었다가 후에 혼자 하실 경우 그 경로로 마나를 돌리면 됩니다."
청령은 맨 앞에 있는 기사의 몸에 내공을 주입해 강제로 소주천 시켰다. 기사의 마나는 처음에는 뜨끔했지만 이내 완전히 청령의 내공을 받아들였다. 그런 식으로 삼십 명의 기사들에게 내공을 주입하니 이제는 청령이 녹초가 다 되었다.
'내가 이들에게 삼재심법을 가르쳐 주는 이유는…… 그저 부단장의 역할을 다해 단원들을 죽지 않게 만들기 위함일 뿐이야. 그 외에 다른 이유는 필요 없어…….'
로이니스는 나무에 기대 기사단이 훈련하는 것을 눈여겨보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배를 잡고 쓰러졌다.
"푸하하하, 쟤네들 뭐 하는 짓이니?"
그녀가 바라본 곳에는 기사단이 한데 뒤엉켜 발자국을 따라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발자국이 워낙 오묘해서, 똑같이 밟는 것이 힘든 듯했다.
맨 앞에서는 청령이 내공을 발에 실어 땅바닥에 발자국을 정확히 찍어 내고 있었다. 그 뒤에 따라오는 기사단은 한 번을 제대로 못 하고 비틀거리며 넘어지기 일쑤였다. 만약 그들이 청령이 배운 경공술이나 보법을 제대로 배우겠다고 결심한다면 모두 거품을 물고 쓰러졌을 것이다.
청령은 느긋하게 한다고 했으나 자신을 쫓아오지 못하는 기사단을 보고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 토벌 일까지 남은 것은 고작 한 달 정도였다. 과연 그들이 그때까지 얼마나 익숙해질지 참으로 걱정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때, 보고만 있던 로이니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천천히 청령에게 걸어왔다. 그러더니 그가 찍어 놓은 발자국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실소를 터뜨렸다.
"푸훗, 너네 혹시 댄스파티에 나가? 기사단이 단체로 미쳤구나."
청령은 그녀와 시선도 마주치지 않은 채 발자국 찍는 일에 열심이었다. 줄기차게 쏟아지는 햇빛에 이마에 흐른 땀을 훔치며 한숨 돌린 청령이 말했다.
"당신이 아무리 귀족의 딸이라 해도 기사단 훈련의 관람은 금지입니다."
"어머? 세리아가 말 안 해 줘? 난 오늘부터 용병 정령술사로서 활동할 거거든. 잘 부탁해, 부단장 씨."
그녀가 선뜻 손을 내밀었지만 청령은 그녀의 손을 맞잡아 주지 않았다.
"참으로 하릴없어 보이는군요. 남에게 딴죽을 걸 시간이 있으면 저 단원들과 같이 훈련이나 하시죠."
로이니스의 얼굴이 잔뜩 찌푸려졌다.
"뭐, 뭐얏! 넌 내가 누군지 모르는 거야?"
"오늘부터 용병으로 활동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어떤 기사가 용병에게 귀족 대우를 해 준답니까? 제 눈앞에 있는 사람은 용병일 뿐, 귀족으로 보이진 않습니다."
"……."
청령에게 말로 밀린 로이니스는 그대로 등을 홱 돌려 버렸다.
"흥! 그래! 좋다 이거야. 그 천한 입을 언제까지 놀릴 수 있는지 두고 보자."
청령은 뒤돌아서서 가 버리는 로이니스를 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과연 저 여인에게 자신의 신분을 말해 주면 어떻게 생각할까. 아니, 과연 믿어 주기나 할까.
기사단의 훈련이 끝나자, 청령은 쉴 틈도 없이 곧바로 병사들을 한데 불러 모아 그들에게도 기사단과 똑같은 훈련을 시켰다. 병사들은 웨폰 오러도 아닌, 웨폰 맨 수준의 경지였기에 그들을 훈련시키는 것은 더욱 힘들었다.
"푸하하하! 이거 정말 골 때리는군. 저 녀석들 좀 봐라."
우연히 훈련 장면을 목격한 용병들도 로이니스와 마찬가지로 배를 잡고 뒹굴었다. 그렇게 되자 훈련 방식에 불만을 가진 병사들이 다음 훈련을 빼먹는 일까지 일어났다. 하지만 청령은 그들을 나무라지 않았다. 자신이 보아도 정말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많은 병사들이 청령의 훈련에 불만을 가지면서도 잘 따라 주고 있었다.
'후우, 앞으로는 병사들을 죽게 만들 수 없다. 이들이 프로시안 영지의 병사들이기 때문에 자신의 가족을 지킬 수 있는 게 아닌가.'
청령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자! 이번에는 진법으로 넘어가겠습니다."
* * *
열흘이 넘어서자 기사들의 수준도 청령이 만족할 만한 정도까지 껑충 뛰어올랐다. 처음에만 해도 반신반의하며 청령의 심법이나 보법을 믿지 못하던 그들도 이제는 앞 다투어 연무장에 나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련에 임했다.
이대로만 간다면 기사들도 얼마 지나지 않아 전원이 익스퍼트에 드는 것도 힘든 일은 아닐 것이었다.
"전원이 모두 익스퍼트라……. 후후."
꿈에서나 있을 법한 이야기다. 한 기사단 전원이 익스퍼트인 경우는 펠타온 제국의 왕실 기사단뿐이었다.
하지만 청령은 그런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었다.
지내보니 숨김이 없고 거짓이 없는 기사도를 가진 에이전트 기사단이다.
그런 그들이 삼재심법만으로도 익스퍼트의 벽을 넘는 것은 굉장히 쉬웠다. 그렇다면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병사들이었다. 그들은 아직 두드러진 효과를 보이고 있지 않았다.
가부좌의 힘든 자세나, 따라 하기 힘든 삼재보를 꾸준히 배우는 병사들은 이백 명도 채 되지 않았다.
이제 토벌 작전이 20일 가까이 다가온 이때 그런 것이 무슨 소용이냐며 도리어 화를 내는 자도 있었다.
"아직까지 마나를 느낄 수 있는 병사들은 없다라……. 너무 늦은 나이에 시작한지라 혈관이 방해가 되는 건가?"
유라시아 대륙에서 펼치는 삼재심법도 신공절학의 수준까지 될 수 있으나 병사들의 늦은 나이가 문제였다. 어떤 이들은 20대에 시작하고 어떤 이들은 40줄이 되어 심법을 배웠다. 그러다 보니 열흘 만에 마나를 느낄 만한 자들은 아직까지 병사 중에는 없었다.
그때 청령의 고개가 오른쪽으로 돌아갔다.
쿠당탕!
용병 하나가 병사를 상대로 시비를 걸었다. 적절히 대처하지 못한 병사가 그대로 용병에게 주먹을 맞고 바닥에 쓰러졌다.
"호오……."
청령이 보기에도 그 용병의 실력이 제법이었다. 체계적인 훈련을 쌓은 병사들보다, 목숨을 걸고 전장을 누비는 용병들은 보이는 것이 실력의 전부가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경험이라는 것이 존재했다.
한눈에 보아도 용병보다 실력이 낮아 보이는 병사가 그대로 이를 악물고 주먹을 날렸다. 용병이 여유만만한 표정으로 주먹을 피하고 그대로 병사의 복부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나이가 좀 더 많아 보이는 병사가 그 주먹에 정신을 잃은 듯 그대로 쓰러졌다. 그러고는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의심할 여지 없이 용병의 승리였다.
청령은 그 모습을 보고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순간적이지만 병사의 발걸음에서 삼재보를 볼 수 있었다. 수박 겉 핥기 식으로 배워 펼친 것이라 막무가내로 달려가는 것보다도 못해 보였지만, 사실 그렇지 않았다. 병사의 주먹에 실린 힘이 평소보다도 두어 배는 강해 보였던 것이다.
"차라리 다행이야. 병사들의 삼재보를 누구한테 실험하나 했는데, 저렇게 훌륭한 스승들이 있을 줄은 몰랐는걸."
한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는 용병들이다. 한 곳에 계속 있다 보니 좀이 쑤셔 제일 만만한 병사들에게 시비를 거는 것이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싸움 소식이 들려왔다. 하지만 청령은 철저히 무시했다.
누군가 병사 하나가 멋지게 용병을 꺾었다는 소식을 듣고 싶었다.
나무에 걸터앉아 있던 청령이 문득 하늘을 쳐다봤다. 너무도 자연스러운 바람이지만 무언가 자신을 바라보는 느낌이었다. 청령의 시선에 그 바람이 점점 형상을 이루더니 여인의 모습으로 변했다. 로이니스의 실프였다.
"나를 찾고 있는 건가?"
영지에 들어온 이후 로이니스는 자꾸 청령의 옆에 달라붙어 떨어지지를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도망치듯 모습을 숨겼더니 실프한테 여지없이 모습을 들키고 말았다.
청령이 나무에서 뛰어내려 사뿐히 착지했다. 제법 높은 위치였지만 먼지 하나 일어나지 않았다.
"차라리 잘됐어. 어차피 약속한 것도 있었으니까 다 같이 가면 되겠지."
태양이 뜬 위치를 보니 얼추 약속 시간이 된 것 같다.
아침 일찍 일어나 곧바로 트라바체스 대장간을 찾아가려 했던 청령에게 어젯밤 세리아가 찾아왔다.
자신도 일이 생겨 트라바체스 대장간을 찾는다는 것.
마침 대장간에 가는 청령에게 호위를 해 달라고 요청해 온 것이다.
청령은 옆에 떠 있는 실프를 의식하면서 본관으로 향했다.
* * *
"고작 열흘이었던가……?"
로이니스의 입이 살짝 열렸다.
그녀의 몸이 떨렸다. 날씨 변화가 심한 프로시안 영지의 특성상 제법 추운 탓도 있었지만, 기사들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몸을 주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기사들은 매일같이 아침에 나와 이상한 자세로 명상을 하고, 명상이 끝나면 땅바닥에 찍힌 발자국을 따라 걸었다.
밥을 먹을 때도 명상을 했고, 잠을 자도 연무장에서 잤다.
그렇게 열흘.
이제 그들은 땅에 찍힌 발자국을 완벽히 따라 하고 있었다. 그저 간단한 사교파티의 스텝이라고 생각했던 발자국이 기사들의 발로 빠르게 시전되자 놀라운 효과를 발휘했다. 로이니스의 눈이 반짝였다.
"빠른 공수전환, 가공할 스피드, 그리고 엄청난 마나 상승까지……. 도대체 어떤 마술을 부린 거지?"
마나가 늘었다. 단순히 생각하면 기사나 마법사가 고된 수련을 쌓으면 당연한 결과다. 하지만 이들은 고작 열흘 만에 마나의 양을 대폭 상승시켰다. 몇몇 기사들은 벌써부터 두각을 드러내며 익스퍼트의 높은 벽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렇게 상념에 빠져 있는 사이 그녀의 귀에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서 뭐 하세요?"
로이니스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그러자 단아하게 차려입은 세리아가 보였다. 꽤나 신경 쓴 모습인 듯했다.
"그냥. 이안을 찾다 보니 이곳에 와서 우연히 수련 광경을 목격하게 됐다. 그러는 넌?"
"본관에 가고 있어요."
"왜?"
"일이 좀 있어서요."
"그래? 그럼 잘 가."
로이니스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세리아는 주저 없이 로이니스를 뒤로한 채 본관을 향해 걸어갔다. 그런 세리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로이니스는 한껏 차려입은 그녀의 모습이 왠지 신경 쓰였다.
"잠깐!"
"……?"
"설마 이안을 만나러 가는 건 아니겠지?"
"그 설마가 맞아요."
로이니스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딴에는 세리아가 이안을 만난다는 것이 아니꼬웠던 것이다.
그때, 이안을 찾아보라 보냈던 실프가 돌아왔다. 실프의 얘기를 살짝 들은 로이니스가 얼굴을 굳혔다.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좋아, 나도 가자."
* * *
청령은 속보(速步)로 본관으로 향하던 중 도중에 있는 병사들의 훈련장을 지나게 되었다. 그때가 마침 훈련 시간이었는지 청령의 눈길이 자연스레 그쪽으로 향했다.
"흐아아압!"
"산개하라!"
병사 백 명 정도가 손에 목검을 꼬나쥔 채, 그들의 중간에 선 기사들을 중심으로 멀리 퍼졌다. 기사들의 숫자는 고작 다섯 명에 불과했다.
'뭐 하려는 거지……?'
청령은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그 모습을 관심 있게 쳐다봤다. 기사 다섯 명은 병사 백 명에게 갇혀 이도 저도 못하는 상황, 서로의 등을 맞댄 채 목검을 쥐고 있었다.
'목검을 사용한다는 것은 마나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뜻이로군.'
목검은 예민하기 때문에 청령처럼 기(氣)를 컨트롤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나무가 마나를 견디지 못했다.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한 훈련장에 이번에 훈련대장으로 임명된 한스가 손을 위로 들어 올렸다.
"모두 공겨∼억! 기사라 생각하지 마라! 저들을 죽이지 못하면 우리가 죽는다!"
"우와아아아아!"
쿠쿠쿠쿠쿠!
훈련장의 모래가 사방으로 튀었다. 병사 백 명이 모두 독기를 품은 채로 기사들에게 달려들었다.
기사들도 저마다 비장한 표정을 짓고는 곧바로 그들을 향해 쏜살같이 튀어나갔다.
다섯 방향으로 퍼진 기사들이 이를 악물고 자신들에게 날아오는 목검을 쳐 내기 시작했다.
"그렇군. 훈련이라 이건가? 기사들이 무기에 마나를 깃들이지 않고 다섯이서 백 명을 상대하는 거로군. 쉽지 않겠어."
기사 한 명이 상대해야 하는 것은 스무 명의 병사다. 마나를 사용한다 해도 쉽게 장담할 수 없다. 한데, 기사들은 마나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들의 신체적인 능력과 기본 검술로 병사들을 상대하는 것이었다.
이 훈련에서 병사들은 강한 상대를 다수로 이기는 방법을 터득하고, 기사들은 사방에서 언제 휘둘러 올지 모르는 칼에 긴장하며 민첩성과 집중력을 향상시키는 놀라운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청령이 따로 지시하지 않은 사항이었다. 그런 점에서 토벌 작전을 위해 노력하는 그 모습이 왠지 모르게 부럽게 느껴졌다.
'난 황태자인데…… 아무것도 노력하지 않았어.'
그렇게 생각하던 청령이 곧바로 고개를 세차게 돌렸다.
"아니, 난 부단장이야. 에이전트 기사단의 부단장. 원귀가 되어 넋을 위로받지 못한 청성파를 생각해야 할 때다. 난 태자 따위가 아니야……. 난 그럴 그릇이 못 돼."
쓴웃음을 짓던 청령이 눈을 반짝였다. 어느새 힘이 부치기 시작했는지, 기사들이 스무 명 정도의 병사를 쓰러뜨린 후 온몸에 마나를 휘두르기 시작하고 있었다. 검에 마나를 깃들이지 않는다고 마나를 쓰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신체에 마나를 돌리면 훌륭한 무기가 된다.
기사들의 능력이 대폭 상승하자 병사들은 그 기세에 완전히 주눅 들었다. 그때 훈련대장 한스가 앞장서서 달려 나갔다.
"기사들이 마나를 사용한다! 마나는 유한한 것. 저들은 지쳤다! 더 밀어붙여라! 승리가 눈앞에 보인다!"
"우와아아!"
"이길 수 있다!"
한순간에 사기를 끌어올린 병사들이 동귀어진 하듯 마냥 몸을 내던져 마구잡이로 달려들었다.
"으음!"
기사들의 실력이 아무리 좋다 해도, 병사들 역시 다른 영지에서는 충분히 수비대장을 맡을 수 있을 정도로 잔뼈가 굵은 자들이었다.
검을 잡은 손 하나로, 한 번에 다섯 방향에서 찔러 오는 손속을 막을 수는 없었다.
퍽퍽퍽!
막는 것보다 맞는 것이 더 많아졌다.
기사들의 얼굴이 낭패감에서 당혹감으로 물들고, 그들의 표정이 점차 고통스럽게 변함을 알 수 있었다. 한 기사가 수십여 대를 얻어맞고 그대로 풀썩 쓰러졌다.
남은 네 기사도 훌륭히 버티긴 했으나 간신히 막을 뿐이지 역공할 기회조차 잡지 못했다.
그들을 바라보는 청령의 얼굴에 실망이 어렸다.
'최소 내가 가르쳐 준 삼재보만 펼쳤어도, 저들에게 저리 쉽게 패하지는 않았을 것을. 하긴 삼재보를 가르치는 것만 생각했지, 그 위력은 보여 주지 않았구나.'
청령이 누워서 숨을 헐떡거리는 기사들에게 다가갔다. 한 기사가 청령을 발견했다.
"이안 부……단장님."
못 볼 것을 보여 줬다는 듯 그들은 저마다 고개를 제대로 들지 못했다.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부단장 앞에서 병사들에게 깨지는 모습을 보여 줬으니, 훈련을 맡은 부단장에게 면목이 없는 것이다.
청령이 그들에게 손을 내밀어 일으켜 세웠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당신들이 왜 졌는지 아십니까?"
"저희들의 부족함입니다."
진심으로 사죄하는 기사들의 모습에 청령이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후후. 잘 보세요, 왜 질 수밖에 없었는지……."
청령이 그 말과 함께 훈련 때문에 쉬고 있던 훈련대장 한스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한스도 청령의 얼굴을 아는지라 얼른 일어나서 고개를 숙였다.
"이안 부단장님을 뵙습니다."
"반가워요. 한스라고 했습니까? 방금 전의 훈련…… 정말 인상 깊게 봤습니다."
"칭찬이라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청령이 작게 웃음 지었다.
"후훗, 방금 했던 그것, 저에게도 똑같이 백 명으로 해 줄 수 있겠습니까?"
한스가 대경실색해서 말을 더듬었다. 당황한 기색을 내보이지 않으려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누가 보더라도 청령의 행동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었다.
"호, 혼자 말입니까?"
"예. 왜요? 안 되나요?"
"그것이 아니오라……."
병사들은 물론이거니와 기사들까지 모두 딱딱하게 굳었다. 백 명을 상대하겠단다. 말 그대로 혼자서 백 명의 병사들을 말이다. 자신감을 넘어서 오만이라고까지 보일 정도였다.
"휴식 시간이 필요하다면 10분 정도 기다려 드리겠습니다. 어차피 어느 정도의 시간은 필요할 테니까요."
청령은 훈련장에 모인 병사들의 수가 부족할까 염려한 것이다. 하지만 워낙 이 훈련에 이골이 났던 탓인지 곧이어 백 명 모두가 다시 훈련에 임했다.
기사 하나가 청령의 곁으로 다가왔다.
"혼자서는 무립니다. 저희도 회복하는 대로 돕겠습니다. 이번에도 백 명을 상대하는 것은 무리겠지만, 최소한 아까보다는 나을 겁니다."
"아뇨. 혼자서도 충분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기가 아닙니다. 아까 말씀드렸죠? 진 이유가 무엇인지……. 당신들이 배운 삼재보, 결코 헛배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드릴 테니까."
청령이 그들을 뒤로한 채, 백 명의 병사들 한가운데로 들어갔다. 청령의 모습을 확인한 한스가 손을 높이 들어 외쳤다.
"모두 산개하라!"
쿠쿠쿠궁!
방금 전과 같이 병사들이 모두 흩어졌다. 고작 한 명을 상대하는 것이었지만, 병사들 모두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제법이야."
무려 백 명이 넘는 병사들이 뿜어내는 살기, 한순간도 풀지 않는 긴장. 한 명을 상대하더라도 최선을 다한다. 그것은 어느 영지의 병사들에게서도 쉽게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이번에는 단 한 명이다. 상대의 신분을 생각하지 마라! 이번 싸움이 끝나면 오늘은 모두 휴식이다!"
"우와아아아!"
병사들이 하늘 높이 목검을 들고 외쳤다. 부단장을 상대로, 그리고 단 한 명을 상대로 검을 들기 꺼려 하던 병사들도 이내 쌍심지를 켰다. 토벌을 이십 일을 앞두고 있다 보니 쉬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 그들에게 휴식은 달콤한 시간이었다.
"자, 공격이다!"
"공격!"
쿠쿠쿠쿠쿵!
공격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병사 백 명이 포위망을 좁혀 오며 그대로 청령에게 달려들었다. 그들의 중심에 선 청령이 달려오던 이들을 바라보며 슬며시 발을 떼었다.
'다수와 싸울 때는 기선제압이 중요하다! 이것이 바로 첫 번째 해야 할 일이다.'
기사들의 눈에 청령의 발걸음은 너무도 가벼워 보였다. 병사들이 보기에는 그냥 이리저리 걷는 듯한 걸음. 하지만 그의 발에서 펼쳐지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삼재보!'
매일같이 땅을 밟으며 수백 번을 넘어지고 나서야 간신히 따라 할 수 있었던 기묘한 보법!
청령의 발걸음이 땅바닥을 밟았다.
쿠우웅!
엄청난 대지의 울림! 중원에서 삼류보법으로 취급받는 삼재보가 청령의 발에서 신기를 보이고 있었다. 그것은 더 이상 삼재보가 아니었다.
쿠웅!
청령이 다시 한 번 땅을 밟자 그의 주위로 파문이 일었다. 훈련장이 가뭄이 일어난 듯 주위 20미터가 쩌적 갈라졌다. 모래먼지가 부옇게 일어나, 달려드는 병사들의 시야를 가렸다. 그때였다.
천천히 걷던 청령의 신형이 눈앞에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어, 어디!"
"제길, 앞이 안 보여!"
한 번 올라온 모래먼지가 오랜 시간 사라지지 않았다.
오랜 시간 잠들어 있던 청령의 내공이 들끓었다.
십이경맥의 손상으로 꾸준히 치료는 하고 있었지만 이제 옛 내공의 반 정도를 찾았을 뿐이다.
내공으로만 따지면 절정의 마지막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깨달은 이치는 초절정이었다.
때문에 그가 펼친 삼재보는 더 이상 삼재보라 부를 수 없었다. 보고 있던 기사들이 하나같이 모두 얼음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최고다!"
누군가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다른 기사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의 목구멍에 침이 한가득 고여 꼴깍 넘어갔다.
그들은 청령, 아니 이안이 마나를 활용하지 않고, 삼재보를 펼치며 병사들을 모두 제압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안의 입이 살짝 열렸다.
'난 청령인가, 이안인가.'
한 사람의 이름일 뿐이지만 각각 가지고 있는 신분은 차이가 있었다.
'그렇다면 난…… 두 가지 전부를 짊어지겠다.'
이안의 목검이 병사의 복부를 정확히 파고들었다.
"욱!"
약해 보이는 공격이었지만 맞는 병사로서는 죽을 맛이었다. 보기와는 너무나 다른 공격이었다. 느려 보이는 공격이라 그냥 달려들었더니, 맞고 나니 후회스러웠다.
그 병사를 끝으로 정확히 오십 명의 병사가 바닥을 기었다.
이미 모래먼지는 가라앉았다. 모두가 이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섣불리 공격을 나서지 않았다.
정확히 오십 명의 병사가 당한 것은 고작 10분.
쓰러진 병사들 가운데에는 한 청년이 당당히 군림하고 있었고, 그는 힘들어 하는 기색조차 없었다.
이안은 예전 귀창과의 싸움에서 체력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필사적으로 체력 훈련을 해 왔다. 예전과는 차원이 다른 체력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병사 백 명이 손도 한 번 못 써 보다니! 역시 대단합니다. 이안 부단장님, 죄송하지만 병사들이 더 이상 싸운다 해도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자는 한스였다. 처음 이 같은 말도 안 되는 대련을 할 때만 해도 속으로는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는데 이안의 무위를 보고 나니 마음이 싹 바뀌었다.
그가 난처한 표정으로 말하자 이안 역시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때, 이안의 입에서 달콤한 한 마디가 나왔다.
"그만 할까요?"
병사들의 눈이 모두 한스를 향했다.
'그만 해라! 그만!'
'죽을 것 같다. 이 분위기 파악도 못하냐!'
한스는 다행히도 병사들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예, 송구합니다만 졌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한스 훈련대장, 그리고 병사 분들도."
이안은 절망, 그리고 희열을 느끼고 있는 기사들을 향해 다가갔다. 그들은 모두 얼이 빠진 듯 허탈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어떤 것 같아요? 이제 왜 졌는지 알 것 같습니까."
기사들은 저마다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어느 정도는……."
"좋아요. 대충이라도 알았다면, 이번에 보여 준 것이 크게 손해 본 장사는 아니었군요. 자, 크게 깨달은 값은 해야겠죠? 토벌 전까지 저와 비슷한 실력을 쌓아야 할 것입니다. 기사단 전원!"
"아, 예…… 예?"
기사들이 얼굴이 점차 굳어 갔다. 모두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이안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럼 기대하겠어요."
이안이 그들의 어깨를 스치며 그대로 사라졌다. 그의 발소리가 묘연해지자 누군가의 입에서 작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에휴……. 오늘부터 잠은 다 잤군."
'저 녀석 정말 마법사 아니야?'
본관에서 한참을 기다려도 이안이 오지 않자 로이니스와 세리아는 그를 찾으러 병사 훈련장을 찾았다. 실프가 시시각각 이안의 위치를 알려 주었기에 쉽게 찾아낼 수 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병사들에게 둘러싸인 이안이 살짝 발을 떼는 것을 보았다. 다음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사람의 발로 대지를 울렸다. 그것이 작았다면 몰라도 멀리 떨어져 있던 그녀들도 느낄 수 있는 거대한 땅울림이었다.
그렇게 대련이 끝나자 이안이 느긋한 발걸음으로 그녀들에게 다가왔다.
'백 명을 상대로 추호의 망설임조차 없다니……. 이 녀석, 도대체 정체가 뭐야.'
열흘간이나 사람 귀찮을 정도로 따라붙었는데 알아낸 것이라고는 펠타온 제국 사람이었다는 것뿐이다. 그것도 명망 높지만 이미 멸문한 귀족가 말이다.
그렇게 나름대로 조사해 봤지만, 수십 년 이내 멸문한 귀족가 중에서 속성검을 사용할 수 있는 곳은 꽤 되었다. 그중에서 이상하게도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도대체 누구의 자식이야? 어머니의 피를 타고난 건가? 그렇다면 검은 머리라 해도 이상하지는 않지만…….'
다시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얻을 수 있는 결론은 아무것도 없었다. 세리아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 결코 거짓은 아니겠지만, 왠지 펠타온 제국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믿기 어려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검은 머리를 가진 사람이 유라시아 대륙에서는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다. 그중에서도 검은 머리를 가진 가문 하면 떠오르는 자들이 바로 라인하르트 황족.
'하지만 라인하르트 황족 중에서 속성검을 사용했다는 인물은 아무도 없어. 게다가 이미 망해 버린 나라인데……. 그냥 흔치 않은 우연이겠지. 맞아. 우연이야, 우연.'
세상에는 많은 우연이 있다. 이안이 검은 머리인 것은 그저 수많은 우연 중에 하나일 뿐이란 생각이 들었다. 조소를 머금던 로이니스가 문득 이안을 쳐다봤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낀 탓인지 이안도 로이니스를 쳐다봤다.
"무슨 일입니까?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고."
"아니, 암것도."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감돌자 이안이 다시 세리아를 보며 입을 열었다.
"오늘은 영지 순찰입니까? 호위를 맡긴 걸 보니, 대충 그런 것 같은데."
세리아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방긋 웃어 보였다. 그 모습에 어색한 분위기가 다시 화사해졌다.
"호호호, 예. 물론이에요. 트라바체스 대장간에 들러서 할 이야기도 있고요. 마침 호위도 필요하고, 트라바체스에 들르는 기사가 이안 경뿐이었으니까요. 마침 잘됐다 싶어서 호위를 맡긴 거예요. 오늘 시간 괜찮죠, 이안 경?"
"괜찮습니다. 이것저것 신세 지고 있는데, 그 정도 시간이야. 뭐, 다만……."
꾸물거리던 로이니스가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에 소리를 꽥 질렀다.
"왜!"
"아니, 그대도 따라올 겁니까?"
"흥! 안 가. 너희끼리 가 버려!"
로이니스가 그 자리에 우뚝 서서 딴청을 피웠다. 하지만 곧 이안과 세리아가 자신을 앞질러 지나가 버리자 갑자기 그녀의 표정이 굳어졌다.
하지만 로이니스의 발걸음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이미 한 번 안 간다고 했기 때문이다.
성격상 한번 튕겨 본 것뿐인데…….
그렇다고 재차 묻지도 않고 정말 두고 가 버릴 줄은 몰랐다.
이미 쫓아가기에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자신이 아까 왜 안 간다고 했는지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이안이 발걸음을 뚝 멈추더니 담담한 표정으로 뒤돌아 물었다.
"정말로 안 갑니까?"
로이니스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가, 간다. 뭐…… 쳇!"
결국 그녀는 못 이기는 척 후다닥 이안을 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