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9장 로이니스(上) □
"백작 각하, 필립 후작님께서 전하시길 이번 공격 결정을 철회하시랍니다."
아침부터 찾아온 부관의 보고에 헤일론 백작은 분노했다.
"왜!"
그런 헤일론 백작의 모습을 한두 번 본 것이 아니었는지, 부관이 진정하라는 투로 입을 열었다.
"프로시안 남작이 수천의 용병을 끌어들였습니다."
헤일론 백작이 펄쩍 뛰었다.
"뭐라고? 얌전히 죽어 있던 놈이 왜? 한동안 앓아눕더니 머리까지 맛이 갔냐? 아니면, 우리 군사의 움직임을 눈치 챘다는 것이냐."
"아닙니다. 장안의 숲 초입을 토벌해 영지에 안전을 기한다는 명목이지만, 그들에게는 수천의 용병을 고용할 만큼의 돈이 없습니다. 아무래도 광산을 캐려는 의도인 듯합니다."
"그렇다면 용병들이 토벌하러 간 사이에 우리가 슬그머니 그들의 영지를 치면 되는 일이 아니냐?"
부관이 고개를 저었다.
"아시다시피 프로시안 영지와 장안의 숲의 거리는 매우 가깝습니다. 우리가 영지를 친다면 곧바로 군을 돌려 우리를 향해 칼을 겨눌 것입니다."
"고작 용병들이 무서워 뽑은 칼을 도로 집어넣으라는 것이냐? 필립 후작님을 다시 봐야겠군. 그렇게 옹졸한 겁쟁이일 줄이야."
헤일론 백작의 말에, 부관은 속으로 그를 비웃었다.
'멍청하게 날뛰는 당신보다야 낫지. 당신이 그 모양이라 아직도 백작인 거다.'
"아닙니다. 우리의 최종 목적은 프로시안 영지를 차지하고, 광산과 비옥한 땅을 가진 장안의 숲을 토벌해 영지를 늘리는 것입니다. 괜히 용병들과 싸워서 군사를 잃을 필요도 없거니와, 그들이 토벌에 성공하면 용병들은 곧바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때 쳐들어간다면, 우리는 군사를 잃지 않고 광산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부관의 일리 있는 말에 헤일론 백작이 턱을 괸 채 눈을 가늘게 떴다.
"호오. 그거 괜찮군. 어차피 저놈들이 토벌에 실패한다 해도 엄청난 군사를 잃을 테니까."
"필립 후작님께서 그들이 장안의 숲 토벌을 끝내면 출병 승인을 해 주신다 하셨습니다."
"좋다. 어차피 그런 것이라면 뽑아 든 칼을 나중에 휘두른다 해도 상관은 없지."
* * *
"그 말 들었어? 프로시안 남작님께서 우리에게 위협이 되는 장안의 숲을 토벌한다고 하더군."
"그럼, 이 사람아. 그걸 이제야 알았는가?"
"그러고 보니 요즘 이상하게 용병들이 많이 다닌다 했는데, 역시 영주님은 훌륭한 분이군! 우리같이 미천한 자들을 위해 직접 토벌군을 이끈다고 하시던데."
"그렇지. 헤일론 백작가에서 살고 있는 내 친척 놈은 세금이 너무 많다고 불평하던데 말이야. 그에 비하면 여기는 타 영지에 비해 고작 반밖에 안 되는 세금이니 말야."
"맞아, 맞아. 우리 영주님이 최고야."
제법 고급스러운 여관을 찾은 로이니스는 자신의 외모가 눈에 띌까 걱정돼 후드를 깊게 눌러썼다. 그러다 들려온 얘기에 자신도 모르게 귀를 기울였다.
"아오! 이거 완전 살 판도 개판이네. 왜 하필이면 이때 장안의 숲을 토벌한다는 거야?"
쿵쿵쿵!
그녀는 이마를 찡그리며 탁자를 연달아 내리쳤다. 장안의 숲을 보고 싶어서 목숨을 걸고 여행을 떠났는데 그곳을 토벌한다니, 그 말이 청천벽력같이 들렸다.
"어쩌지? 돌아가야 하나? 에이 씨,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그놈한테 내 허벅지 안 보여 줘도 되는 일이었잖아."
그 일을 생각하자 얼굴이 다시 붉게 물들었다.
"흠흠. 그래, 일단 먹고 생각하자!"
그녀는 헛기침을 하고는 그대로 메뉴판을 들어 올렸다. 먹음직스러운 음식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는데, 가격표를 본 순간 그녀의 표정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이, 이거 뭐야. 뭐 이리 비싸?'
그녀가 찾은 곳은 프로시안 영지 최고의 음식과 숙박시설을 갖춘 여관이었다. 하루 투숙비만 해도 평민들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인 데다가, 음식조차도 모두 고급이었다.
그녀는 울상을 지었다.
"이렇게 비싼 줄 알았다면 다른 여관을 잡는 건데."
하지만 그녀가 아무리 다른 여관을 찾는다고 해도 결국 이곳과 비슷한 수준의 여관일 것이다. 평민들이 묵는 질 낮은 여관에 묵기에는 그녀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배낭에 들어 있는 돈주머니를 꺼내려고 뻗은 로이니스의 손이 잠시 허공을 맴돌았다.
"어, 어라?"
당황한 그녀가 다시 배낭을 샅샅이 뒤졌지만 돈주머니는 사라지고 없었다.
"없다! 없어! 돈주머니가 사라졌어."
그녀는 의자가 부서질 정도로 거칠게 일어나서는 곧바로 여관을 뛰쳐나갔다.
"거기 있을 거야. 꼭 거기 있겠지."
확신하듯 주먹을 움켜쥔 그녀는 자신이 땅을 파고 들어온 성벽 쪽으로 재빨리 달려갔다. 여관에 오기 전에 있었던 곳이라고 해 봤자 그곳뿐이다. 그곳에 없다면 도저히 찾을 방도가 없었다.
그 주변을 30분이나 샅샅이 뒤져 보았으나 주머니는 발견할 수 없었다.
큰일이었다. 돈주머니가 없다면 지금 묵는 여관을 나와 길바닥에 나앉을 판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집으로 돌아갈 경비조차 없는 것이다.
팍팍팍!
"에이 씨! 내 돈 내놔! 내 도오온!"
그녀는 애꿎은 땅을 걷어차며 울분을 태웠다. 그러다가 제풀에 쓰러져서는 숨을 몰아쉬었다. 쉬고 있던 중 가만히 드는 생각.
"가만, 그러고 보니……?"
천천히 회상해 보자 제일 의심 가는 자가 한 명 있긴 있었다. 성벽을 몰래 파고(?) 들어온 자신을 처음 발견한 기사.
"에이전트 기사단의 부단장이라고 했던가?"
어찌 잊을 수 있을까. 그녀는 프로시안 영주의 저택이 보이는 곳으로 무작정 달려갔다.
"도둑놈! 내 돈 안 내놓으면 죽여 버릴 거야!"
아침 훈련 시간을 빼먹을 수밖에 없었던 청령은 급한 대로 훈련장에 있는 가죽갑옷을 걸치고 곧바로 훈련에 참여했다.
아침부터 고된 훈련을 받아 신경이 날카로워진 기사들은 청령을 좋은 눈으로 쳐다볼 수 없었다.
청령은 그들의 눈빛을 철저히 무시하고 그로퍼가 시키는 대로 기본 훈련을 시작으로 고된 훈련까지 완벽히 소화해 냈다. 그러자 기사들의 눈빛이 살짝 변했다. 한눈에 보아도 평생 먹향이나 풍길 것 같던 청령이 생각보다 잘 따라 했기 때문이었다.
청령도 훈련을 빠지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평소 약점이었던 체력을 보강하는 의미에서 시작한 훈련이 점점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그로퍼는 언제부터인가 청령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그가 부단장이라는 직위를 받았을 때는 그의 실력을 의심했다. 하지만 그는 에이전트 기사단원들도 나가떨어지는 혹독한 훈련을 잘 버텨 내고 있었다.
'하지만 체력이 좋다고 검을 잘 쓰는 것은 아니다.'
그로퍼는 훈련을 일찍 끝내고 단원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화이트 경의 기사 서임을 축하할 겸 우리 단원, 그리고 부단장이 된 자의 실력을 알아보기 위해 대련 시간을 마련했다."
보통 기사단의 부단장이 되려면 단원 둘과 싸워도 지지 않을 만한 검술이 필요하다.
"화이트 경! 단원들의 실력을 알아 둘 필요가 있지 않나? 어떠한가? 대련을 해 보는 것이."
"대련이라면 좋습니다."
청령이 그렇게 말하자 기사들의 눈빛이 대번에 바뀌었다. 청령에게 은근히 불만이 많은 기사들이었다. 그의 실력을 의심하던 기사들은 너도나도 대련 상대로 자신이 뽑히기를 열망하고 있었다.
그로퍼가 주위를 스윽 둘러보더니 익숙한 얼굴을 불러냈다.
"욘지 경! 어떠한가? 새로운 부단장과 한번 붙어 보는 게 말이야."
기사들이 저마다 숨소리를 죽였다. 에이전트 기사단의 부단장인 욘지는 냉철한 인물이었다. 순수한 검술 실력으로 따지면 그로퍼보다도 한 수 위지만, 나이에서 밀려 단장의 직위를 받지 않고 부단장이 되었다.
그렇다는 것은, 현재 에이전트 기사단에서 제일 강한 자라는 뜻이다. 자신이 호명되자, 욘지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청령을 노려보았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청령과 욘지가 서로를 쳐다보며 자세를 취했다.
스르르릉.
욘지의 손에 의해 검과 검집이 천천히 분리되었다.
딸칵!
청령이 왼손 엄지를 튕기자 손잡이가 밀려 올라갔다.
청령의 단전에서 내공이 들끓었다. 일갑자가 넘는 한음지기가 검을 타고 흘러내리자 주변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이에 질세라 욘지의 마나가 폭풍 같은 기세를 뿜어냈다.
청령의 검에는 푸르스름한 빛이, 욘지의 검신에는 노란빛이 번쩍거렸다.
청령과 욘지의 검을 본 기사들이 놀란 토끼처럼 눈을 치켜떴다. 특히 주변을 압도하는 청령의 검기를 바라본 기사들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저것이 말로만 듣던 속성검이로군!"
펠타온 제국에서도 허락되지 않은 존재는 얻을 수 없는 능력이다. 거의 견식조차도 불가능했던 기사들은 기대를 품고 대련을 기다렸다. 청령을 처음 보았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서(Sir) 화이트, 욘지. 그대들은 이 대련으로 감정을 품지 아니하고, 최선을 다할 자신이 있는가?"
"예!"
"당연합니다!"
"주신 마르드 님께서 증인이 돼 주실 것이다. 그럼 이 순간부터 대련을 시작한다."
타앗!
그로퍼의 말과 함께 청령이 곧바로 욘지를 향해 송서초상비를 펼치며 달려들었다. 15미터나 떨어져 있던 청령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고 공격해 오자 욘지는 헉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을 들어 올렸다.
채애애애앵!
크게 한 번 부딪친 욘지의 검이 청령의 검에서 흘러나오는 한기를 제대로 받아치지 못하고 부르르 떨렸다. 비틀거리는 욘지의 몸을 향해 청령의 검이 다시 한 번 쇄도해 들어갔다.
"헛!"
욘지가 헛숨을 들이켜며 곧바로 몸을 비틀었다. 청령의 검날이 욘지의 플레이트 메일 옆구리 부분을 파손시켰다.
"크으윽!"
욘지가 제대로 손도 못 써 보고 당하고 있자 기사들이 청령이 부단장이 된 이유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속성무기를 사용하는 자는 펠타온 제국의 사람.
펠타온 제국은 기사의 나라였으니 이토록 젊은 자가 이 정도의 무위를 갖는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컥!"
곧이어 날아온 청령의 발차기가 가슴을 가격하자 욘지는 가슴을 부여잡고 그대로 벌러덩 넘어졌다. 욘지가 너무나도 쉽게 지자 그로퍼는 절로 눈살을 찌푸렸다.
확연한 차이.
이 정도의 차이는 결코 운 따위로 결정 지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욘지의 패배에 호승심이 일어난 기사들이 너도나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화이트 부단장과 대련하고 싶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단장님!"
그로퍼가 청령을 쳐다보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너무 쉽게 끝난 감이 있어 적잖이 실망한 것이다.
욘지가 상대가 안 될 정도였기에 기사 둘이 한꺼번에 덤벼들었다. 이들 둘은 기사단에서도 최상위 실력에 속하는 자들이었다. 둘이 덤비면 욘지도 충분히 이길 만한 실력자들인 것이다.
하지만 그들도 얼마 지나지 않아, 고작 삼 합 만에 무너지고 말았다. 한 기사는 팔에 검을 맞아 검을 떨어뜨려 패배했고, 다른 한 명은 복부에 각을 얻어맞아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청령이 그로퍼를 쳐다보며 물었다.
"더 할까요?"
욘지와 기사 둘을 가뿐히 패배시키고도 지치지 않은 표정. 그로퍼가 기사단을 스윽 둘러보자 모든 기사들이 침묵을 지키며 고개를 푹 숙였다. 여기에서 조금 전의 그 둘보다 실력이 좋은 콤비는 없었다.
"아니, 그만두는 게 좋겠군."
"그리고 남작님께서 말씀하시길, 부단장이란 직위는 단장과 마찬가지로 단원들을 훈련시킬 수 있다고 하셨는데…… 그래서 말씀드리는 거지만 아침 훈련의 두 시간을 저에게 주십시오."
확실히 그런 것이 있긴 하지만 욘지도 그로퍼의 훈련 방식이 그다지 싫지 않았기에 따로 단원들의 훈련 시간을 갖지 않았다. 하지만 그로퍼와 마찬가지로 예전부터 기사단을 이끌던 욘지도 아닌, 이제 갓 부단장이 된 자가 자신들을 가르친다고 생각하니 기사들의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렇다고 그 누구도 입 밖으로 불평을 얘기하진 않았다.
자신들의 눈으로 보지 않았는가.
에이전트 기사단의 실력자들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것을 말이다.
"내 훈련 방식이 맘에 안 드는가?"
"아뇨, 그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해서는 이번 토벌에서 선봉에 서는 기사들은 죽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다혈질인 그로퍼는 그 말을 듣고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그의 손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자네, 지금의 그 말은 우리 기사단이 고작 몬스터 따위에 패배할 거라는 뜻인가?"
"단장님, 지금 에이전트 기사단은 오크나 고블린 따위를 잡으러 가는 것이 아니라 장안의 숲을 토벌하러 가는 것입니다. 아무리 초입이라곤 하나 그 땅의 크기가 웬만한 영지만큼 큽니다. 설마 대형 몬스터들의 영역이 없겠습니까?"
청령도 지지 않고 맞섰다. 확실히 유라시아 대륙의 검법은 너무도 초라하고 정직했다. 중원에서 삼류로 구분되는 삼재검법만도 못했고 삼재보(三才步) 같은 가벼운 보법도 없었다.
'병사들이나 기사들에게 삼재보만 가르쳐도 생존율이 최소 수십 배는 높아질 것이다.'
"그렇다면 자네가 가르친 자는 대형 몬스터 앞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 이건가?"
"뿐만 아니라, 마나보유고(단전)의 마나도 대폭 상승시킬 수 있습니다. 펠타온 제국의 기사들은 훈련으로 마나를 증폭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청령이 펠타온 제국을 들먹이자 그로퍼도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펠타온 제국은 슈레이더 왕국에서는 넘볼 수 없을 만큼의 대제국이었다.
"마나를 훈련 외에 다른 방법으로 증폭시킨다? 그렇다면 그것은 가문의 비전이 틀림없을 것 같군. 근데 그런 것을 세상에 순순히 내놓을 사람은 아무도 없지 않나."
청령이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삼재보나 삼재심법 같은 것은 중원에서 은자 한 냥만 있어도 그 비급의 필사본을 수십 권은 구할 수 있었다.
"아뇨. 이건 저희 가문에서도 기사들을 키울 때 가르치던 것들입니다. 배우기도 어렵지 않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청령이 그로퍼와 눈을 마주친 후 기사들을 살짝 쳐다봤다. 그들의 눈빛에는 강해지고 싶다는 열망이 담겨 있었다.
처음의 태도와는 너무나도 대조적인 모습들.
청령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내일부터 제가 아침 훈련 두 시간을 맡겠습니다. 혹 나오기 싫은 분들은 나오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 * *
칸이 초췌한 모습으로 숙소로 들어왔다.
요즘 들어 영지에 용병들을 불러들이는 바람에 처리할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닌 데다가, 용병, 마법사들과 팀워크를 맞추려다 보니 하루에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칸은 목욕탕으로 갈까 하다가 너무도 피곤한 나머지 그냥 수면을 취하자고 마음먹었다. 곧바로 발걸음을 방으로 옮긴 그는 방문이 살짝 열린 것을 보고 의아하게 여겼다.
"응? 시녀들이 문을 안 닫고 나갔나? 이것들을 정말! 시간이 나면 단단히 혼이라도 내줘야 되겠군."
시녀들이 평소에 문을 열고 다니면 이후 귀족들을 모실 때 영주가 욕을 먹을 수도 있는 일이다. 그것을 바로 고쳐 주자 마음먹은 칸이 방문을 거칠게 열었다.
"오래 기다렸어요, 칸 아저씨."
"어라? 이런 밤에 무슨 일이십니까, 아가씨?"
세리아는 들고 있던 책을 살짝 덮고는 옆으로 치웠다. 휴식을 원했던 칸은 삐딱한 표정을 짓고서 곧바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일단 앉고 나니 다리에 힘이 풀린 것이다.
"요즘 칸 아저씨 근황 좀 확인해 볼까 와 봤어요. 그냥 이것저것 궁금한 것도 있고, 음…… 밤에 잠이 오질 않아서 그런지 스승님이랑 오랜만에 얘기도 나누고 싶고……."
손가락으로 입술에 침을 발라 가며 말하는 세리아의 표정에 칸은 웃음을 지었다. 어렸을 때부터 세리아를 딸처럼 키워 왔으니 그녀의 그런 표정이 너무도 귀여웠다.
문득 세리아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오늘…… 그 사람 대단하더라고요."
"누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화이트 경이요. 기사들의 불만을 한순간에 잠재워 버렸어요. 오늘 그로퍼 경에게 여쭈어 보니 기사 중 누구도 이젠 그의 실력을 의심하는 자가 없다나 뭐라나."
"제가 뭐라고 말씀드렸습니까? 하하하. 그래도 펠타온 제국의 기사들이 대단하긴 한가 봅니다."
멋쩍게 웃는 칸을 보며 세리아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를 생각하면 이상하게 왼쪽 가슴이 아팠다.
좋아하는 감정은 아니었다.
지금껏 느껴 보지 못한 그런 감정이었다.
'그런데…… 떠날 거라고?'
침울해 하는 세리아를 보며 칸 또한 작게 한숨을 쉬며 급히 화제를 돌렸다. 그것은 그가 들어오자 곧바로 덮고 옆으로 밀어 버린 책에 관한 것이었다.
"아가씨, 저 책은 라인하르트 제국에 관련된 책이로군요."
"예. 여신의 축복을 받은 라인하르트 황제들이 과연 어떻게 통치를 했는지 궁금했거든요. 이 거대한 유라시아 대륙의 땅을 40퍼센트나 차지하고 있던 나라가 어떻게 그 오랜 역사를 자랑해 올 수 있었는지."
"라인하르트 제국. 제가 젊을 때만 해도 그곳은 정말 아름다운 곳이었지요. 아! 용병들에게 듣기로 라인하르트 제국을 멸망시킨 것은 다름 아닌 배신이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배신이요?"
"뭐, 떠돌아다니는 얘기긴 합니다만. 아시다시피 여신의 축복이란 능력은 남성에겐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떨리는 카리스마를, 여성에겐 매력을 말합니다. 그 능력을 시기한 한 귀족이 황제를 죽였다는 얘기죠. 뭐, 어찌 됐든 발란은 일어났고 라인하르트는 멸망. 그 뒤에는 다름 아닌 프라스 제국이 있었다, 뭐 이런 얘깁니다."
라인하르트 제국이 멸망한 뒤 제일 이득을 본 나라가 바로 프라스 제국이었다. 라인하르트 제국의 곡창지대와 철과 미스릴의 생산지를 독점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라인하르트 황족들은 욕심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멸망한 걸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황족들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신하들에게 맡기고 죽었다고 합니다."
* * *
선봉에 선 기사들이 허무하게 대형 몬스터의 먹잇감이 되지 않게 하겠노라 호언장담한 청령은 머리가 지끈거림을 느꼈다. 요즘 들어 왠지 모를 위화감이 들었다. 노인장의 기억이 점점 구체적으로 드러나면서 라인하르트 제국이란 이름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는 왜 이유 없이 그들에게 중원의 기술들을 가르치려 했을까.'
단순히 생존 확률을 높이려는 생각이었을까?
그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가 이야기책에나 나올 법한 성인군자는 더더욱 아니었다.
'난 단지 이곳에 청성의 혼을 뿌리고 싶었을 뿐이다. 나에겐 노인장의 부탁을 들어줄 정도의 용기도 없고, 그럴 능력도 없어.'
사천을 휘어잡던 청성이 무너졌다는 생각을 할 때만 해도 너무도 가슴이 아팠다. 사제들, 사형들, 장로, 장문인까지 청성파의 모든 가족들이 혈파의 손에 죽었다는 사실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그들의 울부짖음이, 눈물이 보여 주고 원하던 것이 무엇인지 나는 알고 있다.'
청성파의 재건. 하지만 그것뿐만 아니라, 자신을 구해 준 노인의 기억 속에는 낯설지 않은 존재들이 엿보였다. 마음이 자꾸만 기울어져 갔다.
청성파가 무너질 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사실보다, 라인하르트라는 제국이 사라졌다는 사실이 더욱 가슴이 아팠다. 그 사실이 마치 잔잔한 마음에 돌을 던져 파문을 일으키는 것만 같았다.
'라인하르트 대제국의 국민들은 모두 어디로 뿔뿔이 흩어졌을까.'
노인의 기억 속을 헤집고 다녀서 얻은 사실은, 전 대륙의 나라로 들어가 노예보다도 못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을 위해서도, 라인하르트라는 제국이 다시 세워지길 바라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그 나라는 재건되어야만 했다.
'어째서 하늘은 나에게 이토록 힘든 시련을 주었는가!'
청령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황태자라는 신분.
자신이 기억도 못하는 아기였더라도 그것은 대단한 신분이었다. 노인의 기억 속을 엿보고 나서야 그 사실이 정말 실감나기 시작한 것이다.
'도대체 난 무엇을 해야 하지?'
돈주머니를 찾기 위해 밤까지 기다렸다가 슬슬 움직인 로이니스는 생각보다 작은 영주의 성에 안심했다.
'만약 컸다면 그 자식을 찾기가 힘들잖아. 그건 그렇고, 또 어떻게 들어가지? 생각보다 경비가 너무 삼엄하네.'
로이니스는 돈주머니 하나 찾자고 궁수들한테 벌집이 되고 싶진 않았다. 천천히 성문을 엿보다가 벗어나려는 순간, 성문 열리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한스 아저씨! 존슨 아저씨! 이 밤에 경비 서느라고 수고가 많으셔요. 쉬엄쉬엄 하세요. 누가 여길 침입한다고……!"
그 말을 들은 로이니스가 뜨끔 하는 표정을 지었다. 한편으로는 정말 쉬엄쉬엄 했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란히 성문에 서 있던 중년 남자 둘이 크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껄껄껄. 알았다, 레나. 그런데 이 밤에 넌 무슨 일로 나가려는 것이냐?"
한스의 물음에 레나가 방긋 웃었다.
"그건 비밀."
"예끼! 우리가 널 얼마나 귀여워하는데……! 넌 그 부단장이라는 오라버니가 그렇게 좋더냐?"
"예……."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연 레나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존슨이 그런 레나의 얼굴을 보고 턱을 괴었다.
"그러고 보니 레나, 요즘 피부 마사지라도 받냐? 바쁘다는 애가 피부가 너무 고와졌다."
항상 뙤약볕에서 나뒹구는 한스와 존슨은 요새 레나의 피부가 좋아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볼 때마다 레나의 얼굴은 하얗게 변하고 몸매 또한 균형 있게 변하고 있는 것이었다.
"어머! 정말 그래요? 와아, 다행이다. 사실 오라버니께서 가르쳐 준 것이 있는데 그것 때문에 그런가 봐요."
"쩝. 우리도 가르쳐 주면 안 돼?"
레나가 고개를 푹 숙였다.
"미안해요, 아저씨들. 오라버니가 남들에겐 꼭 비밀로 하라 그랬거든요. 나중에 오라버니에게 여쭈어 볼게요."
존슨과 한스는 아쉽다는 듯 입맛만 다셨다.
"올 때 아저씨들이 마실 만한 술이라도 한 병 사 올게요."
"그래, 껄껄. 기대되는구나. 빨리 갔다 오너라. 조심하고!"
레나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한스와 존슨은 성문을 닫아 버렸다. 그 어둠 속에서 로이니스가 눈에 이채를 번쩍이며 레나가 사라진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빌어먹을 도둑놈의 시녀란 말이지? 좋았어. 내 돈을 훔쳐 간 대가를 톡톡히 보여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