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인하르트-8화 (8/60)

■ 제8장 화이트 폰 이안 □

쾅!

헤일론 백작의 주먹이 책상을 깊게 파고들어 갔다. 값비싼 오동나무로 만든 책상이 둘로 갈라졌다.

"말이 돼! 자네가 생각하기에 고작 프로시안 남작령에 갔다 오면서 기사를 셋이나 잃은 게 말이 되냐고!"

기사 하나를 키우려면 어마어마한 돈이 필요하다. 더군다나 고작 남작령에 갔다 오면서 기사를 잃었다는 것은 헤일론 백작에겐 명예를 실추하는 일이었다.

부관이 슬쩍 자신의 의견을 꺼내 놓았다.

"알렌 단장이 말하기를, 자신은 몬스터에게 단원을 잃었다고 했습니다. 차라리 이것은 기회입니다. 영지전을 벌여 프로시안 남작령을 차지한다면, 잃는 것보다 얻는 것이 더 많을 것입니다."

"제정신이냐? 최근 왕의 눈초리가 나를 향하고 있다. 일부러 왕의 이목을 끄는 행위는 친국왕파에게 먹잇감을 던져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지 않느냐!"

얼마 전, 국왕파 귀족 중 하나인 베리카 백작의 여식이 가출을 하는 일이 발생했다. 베리카 백작은 영지는 없지만 자금력에 있어서는 슈레이더 왕국 내 최고였다. 그가 이끄는 상단이 유라시아 대륙 오대상단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평소 여자를 밝히기로 소문난 헤일론 백작이 당연히 용의자로서 귀족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하필이면 그때, 헤일론 백작의 기사들이 수도로 출타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암시장에서 사들일 노예가 있었기 때문이다.

베리카 백작의 영애가 가출했을 때와 헤일론 백작의 기사들이 영지로 돌아오는 시간대가 맞아, 헤일론 백작이 용의자로 지목된 것이다.

"필립 후작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필립 후작은 현 슈레이더 왕국의 왕의 숙부이면서, 반국왕파의 수장이었다. 하지만 아둔하고 어린 왕은 그 사실을 모르는 눈치였다. 어떻게 보면 현재 이 나라는 필립 후작의 손에서 놀아나고 있다고 볼 수 있었다.

지금 세워진 왕은 언젠가 사라질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필립 후작님 말이냐?"

다소 화가 누그러진 백작이 부관을 바라봤다.

"필립 후작님이시라면 능히 영지전을 허락하게끔 왕을 설득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반국왕파의 자금은 대부분이 우리 것입니다. 우리의 부탁을 쉽게 거절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음."

헤일론 백작은 고민에 빠졌다. 확실히 필립 후작은 말 한 마디에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큼 권력이 강했다. 부관이 말을 이었다.

"이어 헤일론 백작 각하께서는 이번 일로 이름이 크게 알려지실 겁니다."

"오, 그게 무슨 말이냐?"

"장안의 숲은 슈레이더 왕국에서 보면 상당히 골칫거리입니다. 그 숲의 면적만 해도 거의 자작급의 크기입니다. 이번 일로 프로시안 남작령을 흡수하고, 장안의 숲까지 장악한다면 백작님의 이름이 드높아질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게다가 장안의 숲을 농경지로 메운다면 영지의 수익도 크게 늘어날 것이고, 영지민 또한 많아질 겁니다."

"장안의 숲 몬스터들을 토벌하는 게 가능한 이야기냐? 지금껏 들어 보니 예전 슈레이더 왕국에서 대대로 토벌하기 위해 십만 대군을 보냈으나 모두 실패했다고 들었다."

백작의 물음에 부관이 막힘 없이 대답했다.

"당시에는 장안의 숲이 현재보다 1.5배가량 컸습니다. 지금은 그때 십만 대군의 힘으로 그 규모를 줄인 데다가, 당시 패배의 요인은 일교차가 크다는 자연적인 핸디캡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총사령관이 너무 아둔했기 때문입니다."

당시만 해도 아무것도 모르고 무작정 몬스터를 토벌하기 위해 장안의 숲에 쳐들어갔다가 망신살만 제대로 뻗치고 패잔병을 이끌고 돌아온 적이 있다. 그 일로 당시 총사령관은 사형을 면하기 어려웠다.

지금은 그때와 달라서, 장안의 숲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볼 수 있었다.

"처음에는 프로시안 남작령에서 영지전을 벌인다는 이유로 말이 많겠지만, 그들도 나중에는 수긍할 것입니다."

"음, 그럼 좋다. 부관은 당장 필립 후작님에게 이 일을 상세히 전하고 프로시안 남작에게 선전포고를 하도록 해라!"

"예. 하나, 필립 후작님께는 조금 늦게 보고드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왜?"

그가 영문을 모른다는 듯 묻자 부관이 헛기침을 했다. 분명 아침에 올린 보고서를 읽지 않은 것이 틀림이 없었다.

"현재 필립 후작님께서는 부재 중이시랍니다. 영지로 돌아오는 데 약 보름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고 하십니다."

"음……. 어쩔 수 없군. 그럼 그때 하는 게 좋겠군."

"그럼 그때 알아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부관만 믿겠다."

* * *

청령이 유라시아 대륙에 떨어진 지도 어느덧 두 달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그는 서재에 있는 책이란 책들은 모조리 읽었고, 틈틈이 시간이 나는 대로 몰래 영주의 침실에 잠입해 한기를 몸으로 흡수했다. 그 결과 약 일갑자에 해당되는 한음지기를 얻을 수 있었고, 남작의 몸은 그 후로 사흘이 지나자 쾌차하여 보통 사람처럼 걸어 다닐 수 있게 되었다.

남작의 병이 낫자 모든 병사와 기사들은 서로를 얼싸안고, 세리아와 부관, 칸은 눈물을 흘리며 축제를 벌일 정도로 크게 기뻐했다.

남작은 곧바로 영지를 다스리는 데 힘을 발휘했다.

"정말 대단한데. 이거 정말 세리아의 솜씨가 맞는가?"

부관이 기쁜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남작님. 정말 세리아 님의 통치는 남작님과 비견하여 절대 떨어지지 않습니다."

너무 오래 함께한 사이다 보니 이런 농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남작은 만족스런 웃음을 지으며 좋아했다.

"하하하. 그거 정말 다행이군. 이거, 내가 주신의 품으로 돌아갔어도 우리 영지는 제대로 돌아가겠어."

"그런 말씀은 정말 섭섭합니다. 우리에게 영주님은 항상 남작님밖에 없습니다."

"그래, 지금까지의 상황을 내일까지 보고서를 써서 올리는 건 어떠한가?"

"여부가 있겠습니다. 키킥!"

그가 작게 웃음을 터뜨리자 남작도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남작이 쾌차했다는 소식에, 마리엔과 그의 제자인 페그는 깜짝 놀랐다. 플래임 플라워의 거래가 실패했을 때는 이미 다 끝났다고 생각한 그들이었다. 그러던 중 병이 나았다니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믿기지 않았다.

"내가 꿈을 꾸는 건 아니겠지?"

옆에 있던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스승님께서는 현재 현실에 계십니다. 저도 놀라울 따름입니다. 지금까지 프로시안 남작님이 걸렸던 병이 저절로 치유됐다는 것은 듣도 보도 못했습니다."

마리엔은 기쁜 듯 껄껄 웃었다.

"그래, 듣도 보도 못한 일이지만 생명의 여신인 플로아 님께서 구원의 손길을 주신 것이 틀림없는 것 같구나. 역시 플로아 님은 아직 남작이 세상에서 할 일이 많다고 생각하시는 게 틀림없다."

마리엔은 자신의 눈이 틀리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이런 변방의 작은 영지에 신전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힘든 일이었다. 사실 마리엔이 이곳의 신관이 된 이유는, 영주로서의 덕목을 지니고 있는 프로시안 남작에게 크게 감명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아까 전에 이상한 사내가 찾아왔습니다."

"응? 이상한 사내라니?"

"검은 머리를 한 사내였는데, 리바이브 리턴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자세히 알고 싶다고 했습니다."

"뭣이! 리바이브 리턴! 그것은 지금까지 성공한 적이 없는 기술로 알려진 신성마법이 아닌가? 아무리 신에 대한 믿음이 강해도 성공할 수 없다는 그 마법 말이야. 이미 고서에서조차 사라졌다고 알고 있는데, 아직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마리엔이 놀란 눈으로 페그를 바라보았다.

"음. 어찌 됐든 페그, 성안으로 들어가 보는 게 어떻겠느냐?"

마리엔의 말에 페그가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스승님, 소식 못 들으셨습니까?"

"소식이라니?"

정말 모른다는 듯 되묻자 페그가 한숨을 내쉬고 대답해 주었다.

"에휴. 최근에 남작이 자리를 훌훌 털고 일어나자마자 용병들을 모집하고 있답니다. 그들 말로는 장안의 숲의 입구 쪽에 서식하는 고블린과 코볼트, 오크들을 토벌한답니다."

"놈들을 이제야 토벌한다는 거냐? 아니,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구나."

"제자 또한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럼 용병들 때문에 성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거냐?"

"용병들과 시비라도 붙을까 걱정이 되신 모양입니다."

이해한다는 듯 마리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사를 넘나드는 전투를 치르다 보니 용병들의 성격은 자연스레 기사들보다도 더 거칠어졌다. 그들에게 예의를 바란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죽을 날이 오늘이 될지, 내일이 될지 모르는 일이니 말이다.

"음, 그럼 너는 이번 기회를 빌미로 수련여행을 떠나는 것이 어떠냐. 사제라는 것은 병사들에게 엄청난 존재가 될 수 있다."

사기가 오를 수 있고, 병사들을 빠르게 고칠 수 있는 것이 사제들이었다. 페그는 재능과 노력을 겸비해 또래에 적수가 없을 정도로 신성력이 높은 편이었다.

"스승님의 명에 따르겠습니다."

프로시안 남작이 무리하게 장안의 숲의 초입을 토벌하려는 이유는 광산에 있었다. 수백 년간 묻혀 있던 광산이 하나 둘 암암리에 알려지자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이번 일로 수천의 용병들과 계약을 맺었기 때문에 그동안 모아 둔 돈은 모두 파탄지경에 이르렀다. 프로시안 남작은 이번 일에 목숨을 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가 이번 일을 무리하게 추진한 이유는 그것이었다.

"A급 용병만 오십 명입니다. B급 용병이 오백이고, C급 용병이 이천 명입니다. 용병들과 본 영지의 마법사들을 합쳐 총 열다섯 명 정도이며, 이번 토벌 성공 확률은 약 85퍼센트입니다. 변수가 생긴다 하더라도 70퍼센트 이하로 내려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부관의 말에 남작이 화색을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최근에 몸이 나은 후에는 검술에 심취해 있었다. 본래 검을 좋아하던 그의 경지는 익스퍼트 중급 정도였다. 그런 남작이 선봉에 서서 직접 토벌에 가담한다고 하니 군의 사기가 오를 대로 올라갈 것이다.

그때 부관이 남작의 곁으로 살짝 다가왔다.

"남작님, 외람된 말씀이지만 그는 외부의 손님입니다. 그를 에이전트 기사단의 부단장에 앉힌 이유가 무엇입니까?"

남작이 내뱉은 충격 발언.

현재 동관에서 머물고 있던 청령을, 자신을 치료해 줬다는 명목으로 에이전트 기사단의 부단장 자리에 앉힌 것이다. 현재 부단장인 욘지까지, 이로써 부단장은 두 명이 되었다.

기사들의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가뜩이나 몬스터 토벌을 앞두고 있는 이때 기사단이 동요한다면, 그것은 사기에 커다란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왜? 내가 실력이 없는 자를 부단장에 앉혔겠는가?"

"남작님의 눈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오나, 그 나이에 비해 부단장의 실력을 가졌다는 것은 믿기 힘든 일입니다."

남작이 입가를 말아 올리며 웃었다.

"후후, 걱정 말게나. 그것은 나중에 알게 될 걸세. 자네는 오후에 있을 기사 서임식이나 빨리 준비하는 게 좋을 걸세. 그는 이번 토벌 작전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할 자라서 말이야."

"예. 명을 받들겠습니다."

해가 중천에 뜨자 연무장에서 기사 서임식이 진행되었다. 당연히 내로라하는 영지 내 유명인사들이 모두 모였다. 그 자리에 기사들이 빠질 수 없었다.

연무장에 나선 에이전트 기사단은 놀란 토끼처럼 눈을 둥그렇게 떴다. 욘지와 같은 부단장의 직위를 받은 작자가 생각보다 젊기 때문이었다.

"아, 경들. 어서 오시오."

프로시안 남작이 그들을 발견하고 인사를 건넸다. 기사들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남작에게 목례했다.

"영주님을 뵙습니다."

그로퍼가 생각보다 좋아 보이는 남작의 모습에 화색을 띠며 말했다.

"쾌차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다 경들이 걱정을 해 주어서 그렇소."

"별말씀을……."

"자, 자리에들 앉게나. 마땅히 축하받을 일이니만큼, 자네들이 빠질 수는 없지."

영지의 재정이 말이 아니었기에 서임식이 거창하게 진행되지는 않았다. 하나, 약소하나마 남작의 마음씀씀이가 느껴지는 서임식이었다.

빠바밤!

기사들이 지정된 자리에 앉자 그에 맞춰 나팔 소리가 울렸다. 서임식이 시작됨을 알리는 소리였다.

하얀 제복을 차려입은 청년이 들어오자 양옆에 앉아 있던 하객들의 눈이 그의 발걸음을 쭈욱 따라갔다.

빠른 걸음으로 제단에 올라간 남작이, 옆에 경건하게 서 있던 마리엔 신관에게서 하얀 검을 받아 들었다.

청년이 남작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기사의 조약을 읊어 보아라."

청년, 아니 청령은 진작에 레나에게서 건네받은 쪽지를 달달 외워서 그대로 읊기 시작했다.

"제1조, 기사는 약한 자를 보호한다. 제2조, 나라가 위험에 처하면 누구보다 앞에 나선다. 제3조, 절대 악에 해당되는 일은 하지 않으며, 이 세 개의 서약에 대해서는 주신 마르드 님께서 증인으로 입관하신다."

에이전트 기사단이라면 주군과의 관계에 관련된 조항이 몇 개 더 있었지만, 청령이 읊은 것은 어디까지나 자유기사의 조항이었다.

청령은 최소한 프로시안 남작령에 있는 동안만은 자유기사의 신분으로 부단장의 직위를 허락받았다. 유라시아 대륙의 신분증이 없는 청령에게는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자유기사의 신분이라면 최소한 어딜 가도 대접받을 수 있었다.

남작은 검을 들어 청령의 양어깨와 머리에 댄 후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부터 경에게 화이트라는 성을 하사하며, 여기에 모인 하객들이 그대가 자유기사가 되었음을 증명할 것이다. 또한 일 년으로 계약한 에이전트 기사단의 부단장 직을 아무 탈 없이 수행하길 바란다."

청령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부단장의 지위를 받아 줘서 고맙네."

머릿속에서 울리는 목소리에 청령이 고개를 들어 남작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남작이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청령은 그제야, 이곳에서도 전음과 같은 수법이 있다는 것을 알고 크게 놀랐다. 사실 그가 전음을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왼손 약지에 낀 반지 덕분이었다. 그것은 마법 아티팩트로, 마나를 이용해 상대의 귓가에 속삭이는 듯한 효과를 내는 마법인 매직마우스가 걸려 있었다.

청령도 마주 웃으며 그에게 전음을 보냈다.

"어차피 세리아 소저에게 은공을 입은 몸입니다. 그 일을 어떻게 갚을까 고민했는데…… 정말 다행입니다."

남작은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더욱 청아한 목소리가 들리자 화들짝 놀랐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는 청령이 싱긋 웃는 것을 보고 그가 보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마나를 사용하지도 않고 매직마우스 같은 수법을 사용하다니. 자신은 전대부터 내려져 오던 반지가 아니라면 이와 같은 수법은 불가능했다. 점점 청령이 맘에 드는 남작이었다.

서임식이 끝나자 봇물 터지듯 계속되는 하객들의 축하인사에 청령은 결국 녹초가 되어 동관 자신의 방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그는 에이전트 기사단의 부단장 직을 수행하기로 계약했지만 부단장이기 전에 자유기사였다. 그 때문일까?

기사들이 머무는 숙소가 아닌, 동관에서 머무른다고 그에게 뭐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정말 피곤하군."

청령은 입고 있던 하얀 제복을 벗었다. 때마침 들어온 레나가 하얀 제복을 주워 들고는 청령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살짝 홍조가 어렸다.

"무슨 일이야?"

"이제 정식으로 기사 서임을 받은 분이라, 예전처럼 함부로 대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청령이 평민일 때는 아무리 아가씨의 손님이라고 해도 편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까마득히 높은 사람이다. 귀족은 아니지만 그래도 준귀족으로 취급되는 기사. 게다가 영지에 하나밖에 없는 기사단의, 무려 부단장의 직위다. 이제 일개 시녀 따위가 함부로 할 수 없는 존재였다.

피곤한 표정으로 누워 있던 청령이 소리 내어 웃었다.

"푸하핫, 그런 것은 상관하지 마시죠. 언제 우리 레나 아가씨가 상관하고 살았나?"

그의 말투에 레나의 표정이 굳었다.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비딱한 것을 보니 놀리는 것이 확실했다.

"오라버니! 정말 그러실 거예요?"

"그래, 평소처럼 지내면 돼. 안 그러면 오히려 나만 불편해진다고."

레나가 꽥 소리치자 청령이 씩 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자 오히려 당황하는 것은 레나였다.

"왜, 왜요?"

"너 하루에 삼재심법을 얼마나 운용해?"

레나의 얼굴에서 잡티가 사라졌다. 사실 그녀는 시간이 나는 대로 삼재심법을 운용하고 있었다.

레나가 검지와 엄지 사이를 살짝 떼었다.

"이, 이 정도쯤?"

손을 떠는 것을 보니 필시 거짓이라는 것을 눈치 챈 청령이 살짝 웃었다.

"웬만하면 그전처럼 하루에 조금씩만 하도록 해."

레나의 내공을 살펴보니 보통 사람보다도 훨씬 많은 양이 모여 있었다. 적어도 그로퍼 정도 되는 절정 급의 기사라면 충분히 알아볼 소지가 있었다. 그렇다면 레나를 추궁할 수도 있었다. 일개 시녀가 가질 수 없는 양의 마나를 소지하고 있는 것이 궁금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알았어요."

청령은 레나에게 청명심법마저 가르칠까 생각하다가 그만두었다. 아무리 이곳이 이계라 해도 청성의 비술을 함부로 가르쳐 줄 순 없었다.

똑똑―!

갑자기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청령이 입가에서 미소를 지웠다. 레나가 방문을 열더니 꾸벅 고개를 숙였다. 방 밖에는 세리아가 서 있었다.

"아, 무슨 일입니까? 세리아 아가씨."

평소에 별로 볼일이 없었던 세리아였기에 의아한 마음에 그렇게 물었다. 세리아가 힐끔 쳐다보자, 레나는 곧바로 방을 나갔다.

"기사 서임식 때문에 피곤하실 텐데 죄송해요. 꼭 전해 드릴 말이 있거든요."

"아닙니다."

세리아가 주위를 스윽 둘러보더니 청령을 바라보았다.

"화이트 경, 숙녀를 이렇게 세워 두실 참인가요?"

다소 상기된 표정으로 묻는 세리아의 말에 청령이 입가에 미소를 띠며 자리를 가리켰다. 청령은 화이트라는 성이 생각보다 맘에 들었기 때문에 기분이 좋았다.

"화이트 경이 아버지의 한기를 치료해 줬다는 말을 들었어요. 혹시 당신은 마법사인가요?"

세리아는 그렇게 물으면서도 확신할 수 없었다. 마법사라면 응당 심장 부위에 마법서클을 두고 마나의 냄새가 물씬 풍겨야 할 테지만, 정작 청령에게서는 마나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청령을 볼 테마다 느껴지는 먹향 때문에 그를 마법사라고 의심했던 것이다. 게다가 한기를 치료하는 것은 마법사나 신관이 아닌 이상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마법사는 아닙니다."

정확히 말해 청령은 마법이란 학문 자체를 알지 못했다. 그저 노인장의 기억으로나마 살짝 이해하고 있을 뿐이었다.

"마법사도 아니고, 신관도 아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대체 누구죠? 그리고 왜 그날 룩커 강에 있었던 거죠?"

"……."

청령은 그녀의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이계에서 왔다고 한다면, 라인하르트 제국의 마지막 핏줄이라 한다면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믿어 줄까?

청령이 머리를 굴린 끝에 그럴듯한 대답을 꺼내 놓았다.

"저는 펠타온 제국에서 왔습니다. 그리고 한때나마 귀족……이었습니다."

"한때나마? 그렇다면 가문이 멸문?"

청성파가 멸문했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청령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도 살짝 믿는 눈치였다.

청령의 얼굴이 굳는 것을 본 그녀가 황급히 사과했다.

"죄송해요. 전 그런 줄도 모르고……."

"아뇨, 이미 과거의 일입니다. 그리고…… 도주하던 도중 룩커 강으로 떠밀려 오게 된 거죠. 가문을 멸문시킨 흉수들과 싸우다 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절벽으로 뛰어들었는데, 운 좋게 아가씨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거죠."

잠룡수라대가 청성파를 멸문시킨 흉수였으니, 이 말도 반은 맞는 말이었다.

"그럼 당신은 기사로군요. 사실 반신반의했어요. 어렸을 적부터 천재라는 말을 듣고 자란 제가 가늠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고수가 제 나이 또래에 있으리라고는……."

기사의 나라라 불리는 펠타온 제국이니만큼, 그녀는 청령이 제법 명망 높은 가문의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당신은 이제 무엇을 하실 생각이죠?"

'응당, 청성파를 재건해야죠'라고 대답할 순 없었다.

"가문을 부활시킨 뒤 그 흉수들을 제 손으로 꼭 처단해서 허무하게 죽은 분들의 넋을 위로하고 싶습니다."

"그럼…… 언젠가는 이곳을 떠나야겠다는 말씀이군요."

청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계속 머물 생각이었다면 애당초 자유기사라는 작위를 받을 연유가 없었다.

그리고 부단장 직위도 고작 일 년 계약을 맺은 것뿐이었다. 세리아는 잠시 섭섭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몸을 돌렸다. 찬바람이 쌩쌩 부는 그녀의 표정에, 청령은 잠시 넋 나간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내가 뭘 잘못했지?'

그렇게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지고 있을 때, 방을 나서던 그녀가 청령의 전신을 스윽 쳐다보았다.

"명색이 영지를 대표하는 에이전트 기사단의 부단장인 화이트 경이 검과 갑옷이 없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군요. 내일 아침 일찍 성 외곽에 있는 대장간으로 가도록 하세요. 이 성에는 어차피 대장간이 하나뿐이니,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쾅!

자기 할 말만 하고 방문을 거칠게 닫아 버린 세리아의 뒷모습을 보고 있을 때, 레나가 주위를 살금살금 살피다가 들어왔다.

"아가씨께서 뭐라고 하셔요? 아까 돌아가실 때 보니까 표정이 장난 아니시던데."

"몰라, 나도."

"진짜요?"

"그렇다니까!"

* * *

로이니스 반 베리카.

슈레이더 왕국 대부호인 베리카 백작의 딸 이름이다. 올해 열여덟 살이 된 그녀는 호기심이 매우 강한 소녀였다. 평소에 여행을 즐겨 하던 그녀는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유명한 장안의 숲의 위용을 구경하기 위해 직접 프로시안 남작령까지 갔다.

"야! 내가 베리카 백작의 딸이라니까 왜 이렇게 안 믿어? 정말 여행 중에 신분증명서를 잃어버렸다니까!"

그녀가 꽥 소리를 지르는 이유는 있었다. 영지로 들어가려고 검문을 받던 중, 경비병들이 신분증명서가 없는 로이니스를 포박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어떻게 되는 일이 이렇게 없는 거야! 이럴 줄 알았으면 혼자 오지도 않는 거였는데.'

프로시안 남작령이 현재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잘 알고 있는 베리카 백작은, 프로시안 영지로 가겠다는 딸의 말에 대경실색하고 말았다. 로이니스는 아버지의 반대에 못 이겨 결국 야반도주하여 저택을 빠져나와 몇 번의 위기를 넘긴 끝에 간신히 프로시안 남작령에 도착할 수 있었다.

경비병이 로이니스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 글쎄, 안 된다고 하지 않았소! 정말 베리카 백작님의 여식이라면 혼자서 그런 볼품없는 복장으로 돌아다닐 리가 있겠소? 이번 한 번은 눈감아 줄 테니 썩 돌아가시오!"

"야, 이씨! 너네 내가 아버지 부르면 다 잘려, 이것들아! 너희는 베리카 백작의 딸도 못 알아보냐!"

"베리카 백작님의 딸 얼굴이 어디 영지 곳곳마다 붙어 있소? 긴말 필요 없으니까 어서 가시오. 나도 슬슬 짜증나려고 하니까."

"그래! 간다, 가! 두고 봐라, 이놈들아!"

로이니스는 큰 소리를 떵떵 치고는 그대로 발걸음을 뒤로 돌렸다. 오늘 밤은 편안히 여관에서 쉬려고 했던 그녀의 계획이 무산되고 말았다.

"정말 집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나.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그냥 돌아가?"

그녀가 툴툴거리며 조그만 돌멩이를 발로 차자, 돌멩이는 앞으로 3미터는 굴러가더니 그대로 성벽 아래쪽에서 우뚝 멈췄다.

"응? 어라?"

돌멩이가 굴러가는 데로 시선을 쭈욱 따라가던 그녀는 한순간 탄성을 내뱉었다. 성벽 아래, 사람이 다닐 수 있을 만한 크기의 구멍이 있는 것이 아닌가.

"우와! 확실히 몬스터 침공에 대비해 성을 지었기 때문에 견고하게 짓긴 했겠지만, 그래도 역시 허점은 있구나!"

시무룩했던 그녀의 표정이 다시 활기차게 변했다. 그녀는 주위를 스윽 둘러보더니, 자신이 지나갈 수 있도록 구멍 주위를 손으로 파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는 것도 잊은 채 정신없이 땅을 파다가 소매로 이마를 훔쳤다.

"좋아, 이 정도면 충분해. 일단 짐부터 밀어 넣어 보고."

그녀가 들고 온 배낭을 구멍으로 밀어 넣자 배낭은 별 무리 없이 성 안쪽으로 들어갔다.

로이니스가 자신의 몸을 있는 힘껏 구멍으로 밀어 넣었다. 그녀가 악을 쓰며 몸을 비틀었다.

"으으읏, 여행하면서 살이 쪘나? 왜 이렇게 큰 구멍에 내 얇은 허리가 못 지나가는 거야!"

오만가지 불만을 쏟아 부으며 간신히 구멍을 빠져나온 그녀가 옷에 묻은 흙을 털어 냈다.

"휴우. 사람이 건량만 먹다가 죽으란 법은 없구나. 빨리 여관이라도 찾아봐야겠…… 엇!"

로이니스는 흙을 털던 그대로 굳어 버렸다. 한눈에 봐도 '나 기사요!'라고 할 만한 사람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저들은 처음부터 자신이 몰래 침입하는 것을 보고 있었다고 봐야 했다. 로이니스는 태연한 표정을 지은 채 그 둘을 향해 입을 열었다.

"뭘 봐, 여자 처음 봐?"

"……."

* * *

명색이 부단장이라는 자가 기사들의 수련을 빼먹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는지라, 아침에 눈을 뜨기가 무섭게 곧바로 대장간으로 향했다.

프로시안 영지에 안착한 지도 어느새 두 달이 지났지만 성의 규모가 규모인 만큼 지리를 모두 외운 것은 아니었다. 청령은 이각이나 헤매고 나서야 간신히 대장간을 찾을 수 있었다.

트라바체스의 대장간.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더니, 대장간의 건물과 간판이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대단해 보이자 발걸음이 절로 가벼워졌다.

탕탕탕―!

대장간의 규모는 상당히 컸다. 아무래도 프로시안 영지 전체에 하나 있는 대장간이다 보니, 눈에 보이는 대장장이의 수만 해도 삼십 명은 가뿐히 넘어 보였다.

청령이 주위를 스윽 둘러보다가 한쪽에서 망치로 검신을 두들기는 자그마한 노인을 보고 대경실색했다.

"드, 드워프?"

책으로 볼 때만 해도 인간 이외의 종족은 자신의 터전을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보기가 어렵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 청령의 눈앞에 있는 것은 분명히 드워프였다.

"프로시안 영지에 대장간이 하나뿐인 건 드워프 때문인가?"

아무리 인간 중에서 기술이 날고 긴다는 사람들도 드워프 앞에서는 한 수 접어 줄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감히 드워프가 있는 마당에 대장간을 차릴 간 큰 사람도 없거니와 이미 대장간을 갖고 있던 사람들도 모두 문을 닫아야 했다.

"저, 어르신?"

청령이 드워프 노인의 주위로 가서 살짝 입을 열었지만, 그는 못 들은 척 여태 하던 일만 계속했다.

"어르신?"

탕탕탕!

망치 두드리는 소리가 청령의 귀에 들려왔다. 드워프는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았다.

"트라바체스 님은 작업 중에 방해하는 사람을 제일 싫어합니다. 웬만해서는 작업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 좋을 겁니다."

옆에서 다른 작업을 하고 있던 장한이 말하자 청령이 그를 바라봤다.

"흠, 전 에이전트 기사단의 부단장 화이트 폰 이안이라고 합니다. 오늘 이곳에 오면 갑옷과 검을 만들 수 있다는 말에 왔는데……."

"오!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소문엔 젊고 아주 잘생긴 분이라 했는데, 오히려 소문이 못하군요. 훨씬 훤칠하게 생기셨습니다."

장한의 칭찬에 청령은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칭찬은 원래 만인을 기쁘게 한다.

"그렇게 봐 주시니 감사합니다."

"트라바체스 님이 작업 중이시니 혹시 원하시는 게 있다면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청령은 진열대에 놓인 검을 일일이 살펴보면서 제일 적당한 것을 골랐다.

"이 검보다 검신이 조금 짧고, 쉽게 부러지지 않으면서, 마나가 잘 유통되는 것이 없을까요? 무게는 가벼우면 가벼울수록 좋습니다."

상당히 어려운 주문임에도 불구하고 장한은 묵묵히 청령의 말을 받아 적었다. 묵철로 검신을 만들고, 미스릴로 코팅 작업을 하면 청령이 원하는 검이 만들어진다. 다만 가격이 만만치 않다는 맹점이 있었지만, 청령은 그런 사실을 완전히 간과하고 있었다.

"갑옷은 어떤 걸로 하시겠습니까?"

청령은 이번에는 전체적인 외형이 둥글둥글해서 충격을 분산해 주는 라운드 타입의 하프 플레이트 메일을 들어 보았다. 볼 때는 50근은 나갈 것 같았지만 막상 들어 보니 철판이 매우 얇았다.

'중원의 무인들이 보면 미쳤다고 놀리겠군.'

중원의 무인들은 몸에 부담이 가지 않도록 무거운 물건은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 하물며 육중한 이 플레이트 메일을 몸에 걸친다면 무인이라 할 수 없었다.

"이 갑옷과 검은 제작 기간이 족히 열흘은 걸립니다. 그때 오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때까지만 이 검을 쓰시는 건 어떻습니까?"

대륙의 기사들이 제일 많이 사용하는 롱소드였다. 철로 만든 값싼 롱소드지만, 드워프가 제작했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 멀리서도 검을 구입하러 오는 자들이 있었다.

"이 검들은 모두 저 드워프 어르신이 만드십니까?"

"아니오. 트라바체스 님은 평소 우리가 작업하는 것을 눈으로 보시며 지적을 해 주실 뿐입니다. 직접 작업하시는 경우는 드뭅니다."

"직접 작업하시는 모습을 보니 특별한 일이 있나 보군요."

"예, 타 영지에서 이름 높은 기사들이 주문제작을 하곤 합니다."

청령이 롱소드의 검신 부분을 손가락으로 튕겼다.

따아아앙.

인간이 만든 것과는 차원이 다른 소리다. 청령은 최대한 만족스런 웃음을 지었다. 드워프가 신의 손재주를 가졌다더니 거짓말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가 가르치는 제자들의 수준만 해도 대단하지 않은가.

"그럼 열흘 후에 오도록 하겠습니다."

"살펴 가십시오, 기사님."

청령은 받아 든 롱소드를 검집과 함께 왼쪽 옆구리에 차고 대장간을 나섰다.

청령이 곧바로 향한 곳은 연무장이 아닌 옷가게였다. 이곳에 와서 마땅히 입을 만한 옷은 죄다 기사가 되어 몇 벌 얻은 예복이나 시종의 옷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어, 어서 오십시오. 찾으시는 물건이 있으십니까?"

옷가게 주인이 청령의 검집을 보고 겁에 질린 표정을 지어 보였다. 평민들에게는 기사라는 신분이 상당히 무거운 위압감을 줄 수도 있었다.

"평상시에 입을 만한 옷이 몇 벌 필요합니다. 비단옷이 아닌, 입어도 거북함이 없는 천이면 좋겠습니다."

어려운 것을 주문할 거라 생각했던 주인이 대번에 화색을 띠며 청령을 한쪽으로 안내했다.

"그런 것을 찾으신다면 이곳에 정말 잘 오신 겁니다. 우리 가게는 삼십 년 전통을 가진 곳으로, 없는 옷이 없습니다. 자자, 이 옷은 어떠십니까?"

주인의 추천에 따라 요즘 유행한다는 옷 몇 벌을 싼값에 구입할 수 있었다. 청령은 제값을 주고 사려 했지만 주인이 한사코 거절하며 싸게 쥐여 준 것이다.

청령이 머리를 쓸어 넘기며 거울을 쳐다봤다. 머리카락이 생각보다 길어서 신경 쓰이는 부분이 많았다.

"밖에 나온 김에 머리도 정리해야 하나? 이제 부단장이라는 신분이니까 사람들의 이목도 신경 써야 할 텐데."

청령은 말을 하다 말고 귀를 자극하는 소리에 그만 거울에서 눈을 뗐다. 옷가게 뒤쪽에서 나는 소리였다.

"안녕히 가십시오!"

청령이 그대로 떠나자 주인이 기쁜 표정으로 청령을 향해 허리 숙여 인사했다. 역시 아직까지 기사는 평민들에게 낯설고 상대하기 어려운 신분임이 확실했다.

가게를 나선 청령이 소리의 근원지를 향해 서서히 다가갔다.

사각사각!

옷가게 뒤쪽으로 갈수록 소리가 점점 커지자 청령은 어렵지 않게 그곳을 찾을 수 있었다. 성벽의 아랫부분의 땅이 조금씩 파이더니 이내 자그마한 구멍이 뚫렸다. 그리고 잠시 후 거대한 배낭이 안으로 쏙 들어왔다. 그 뒤를 이어 젊은 여인이 그 구멍을 통해 성안으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으으읏, 여행하면서 살이 쪘나? 왜 이렇게 큰 구멍에 내 얇은 허리가 못 지나가는 거야!"

몸이 구멍에 낀 듯 여인이 오만가지 표정을 짓더니 이를 악물고 몸을 비틀었다. 청령이 도와줄까 생각한 순간, 여인이 몸을 세차게 흔들어 마침내 구멍에서 빠져나왔다. 그녀가 옷에 묻은 흙을 털어 내면서 고개를 들어 올렸다.

"휴우. 사람이 건량만 먹다가 죽으란 법은 없구나. 빨리 여관이라도 찾아봐야겠…… 엇!"

이내 눈이 마주친 청령은 시선을 어디다 둘지 몰라 그녀를 빤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성벽 아래 흙을 파고 들어온 신기한 여인.

그녀가 청령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시건방진 표정을 지었다.

"뭘 봐, 여자 처음 봐?"

"……."

너무나도 태연한 그 물음에 청령의 몸이 굳어 버렸다. 뭐라고 대꾸는 해야겠지만, 마땅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건 아니고…… 전 프로시안 영지의 에이전트 기사단 소속 부단장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신분을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함부로 말한다는 것은 그녀가 상당히 높은 귀족이라는 것을 뜻했다. 보통 평민들은 방금 전 들렀던 옷가게 주인처럼, 기사라는 존재를 어려워하고 껄끄러워했다.

'그런데 왜 귀족이 이런 구멍을 통해 들어오려고 하지? 도개교가 있는데.'

"신분을 말씀해 주십시오. 치안대나 경비대 소속은 아니지만, 영지에 침입한 자를 처분할 권리는 있습니다."

그 말에 그녀는 난처해졌다. 신분증이 있었다면 이런 개구멍이나 파서 들어왔을 리가 없었다.

"흥! 이런 시골 영지의 기사가 들어 봤을 리가 없겠지만, 베리카 백작의 딸이 바로 나다. 여행 중에 신분증을 잃어버려서 마땅히 대처할 방법이 없다."

"베리카 백작?"

그러고 보니 언젠가 들어 본 적이 있다.

베리카 백작.

슈레이더 왕국을 좌지우지하는 대부호 중 한 명이었다. 이 여인이 정말 베리카 백작의 딸이라면 처벌하기가 상당히 껄끄러웠다.

"수행원은 어디 있습니까?"

청령이 주위를 스윽 둘러보았지만 수행원의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었다.

"없어! 나 혼자 여행한 거란 말야!"

정확히 말하면 가출이었다. 청령이 손을 내밀어 그녀의 배낭을 집어 들었다.

"그렇다면 만약을 대비해 소지품 검사를 하겠습니다. 귀족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면 곧바로 풀어 드리죠."

청령은 여인이 '어어?' 하며 당황해 하는 사이에 재빨리 배낭을 열어 소지품을 하나 둘씩 꺼내 보았다. 옆구리에 찬 단검을 빼고는 위협이 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다고 신분을 증명할 만한 것도 나오지 않았다.

청령이 그녀에게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소지품 중에는 신분을 증명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귀족에게는 자신을 증명할 가문의 문신이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뭐?"

그녀의 얼굴이 갑자기 붉게 물들었다. 베리카 가의 문장은 나라를 지키는 신성한 방패의 형상이다. 그런데 그것이 하필이면 허벅지에 새겨져 있었다. 바지를 걷어 올려 속살을 훤히 보여 줄 수는 없었기에 그녀는 망설이기 시작했다.

"없습니까?"

"그래! 보여 준다, 보여 줘! 너 이상한 생각 하면 죽을 줄 알아!"

청령이 재차 묻자, 그녀는 이를 뿌득뿌득 갈며 그대로 바지를 걷어 올렸다. 그러자 약 3센티미터 정도의 하얀 카이트 실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곧바로 바지를 내렸다.

"됐지?"

문신은 확실했다. 베리카 가를 증명하는 문신이었다.

"예, 됐습니다."

"나 간다! 또 붙잡지 마."

"……."

그녀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지자 청령은 점이 되어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살짝 웃었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지났군. 베리카 백작의 딸이라…….'

세리아와 비교하면 너무 철이 없어 보였다.

청령은 곧바로 영지의 본관으로 향했다.

로이니스는 아직도 붉어진 얼굴을 들지 못했다. 뺨에 손을 대자 처음 느껴 보는 이상한 열기에 손이 뜨거웠다.

'왜 이러지? 이런 적이 없었는데.'

골똘히 생각하면 할수록 자꾸 청령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반반한 얼굴. 부단장이라는 직위가 어울리지 않는 나이.

'아닐 거야. 아니겠지?'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청령의 모습을 잊으려 애쓰자 곧바로 그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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